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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2 21:34:24

헨리 할렉

제5대 미합중국 육군총사령관
헨리 할렉
Henry Halleck
파일:1000012441.jpg
본명 헨리 웨거 할렉
Henry Wager Halleck 
출생 1815년 1월 16일
미국 뉴욕주 웨스턴빌
사망 1872년 1월 9일 (향년 56세)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복무 기간 1839~1854
1861~1871
학력 유니언 칼리지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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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뉴욕주 웨스턴빌에서 태어나 183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몇 년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해있다가 윈필드 스콧 휘하에서 프랑스군을 견학했다. 이후 중위로 진급해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건축쪽 담당으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1854년 대위로 제대해 캘리포니아 변호사로 일했다.

1846년 <군사 예술과 과학의 요소(The elements of Military Art and Science)>를 저술하는 등 할렉은 군사 이론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남북전쟁 발발 당시 양측 군인들이 참고한 서적 중 하나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져 북군 소속 캘리포니아의용연대 지휘관로 군에 복귀해 장성이 되었으며 존 C. 프리몬트의 해임 이후 미주리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부하이자 사관학교 후배 율리시스 S. 그랜트의 공세 주장에 소극적이었지만 결국 허락했고, 그랜트가 포트 헨리, 포트 도넬슨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그 혜택을 입어 서부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할렉은 그랜트를 견제하며 등 뒤로 그랜트의 술주정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고, 그랜트 앞에서는 이를 숨기고 정중한 척 했다. 그랜트는 전쟁 내내 할렉을 존중하다가 전쟁 이후에야 진실을 깨달았다.

샤일로 전투에서 그랜트가 겨우 승리한 뒤 할렉은 10만여 명에 이르는 서부전선 통합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고 그랜트를 허울뿐인 직위인 부사령관으로 강등시켰다. 할렉은 서부전선 요충지였던 미시시피주 코린트를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전진할 때마다 방어 구조물을 세우기를 반복하며 엄청나게 느리게 움직였고, 샤일로에서 패배한 P. G. T. 보우리가드는 이미 한참 전에 주력군을 이끌고 후퇴한 뒤였다.

조지 매클렐런이 링컨과의 갈등으로 인해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뒤 몇 개월 동안 링컨과 전쟁장관 스탠턴 등이 그 역할을 대신했는데, 1862년 7월 할렉이 그 자리에 임명되어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할렉은 로버트 E. 리에게 고전하는 동부전선과 포토맥군의 상황을 바꾸지 못하며 총사령관으로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1864년 율리시스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승진한 뒤 참모장(chief of staff)이 되었다. 참모장의 행정 업무 측면에서는 총사령관 시절보다는 유능했다고 평가된다. 그랜트와 링컨을 전쟁 끝까지 보좌했으며 전후에도 1871년까지 복무했으며 1872년 부종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