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존 뮐러 Paul John Mue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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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11월 16일 |
미국 미주리주 유니언 | |
사망 | 1967년 9월 25일 (향년 71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5~1954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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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미주리주의 소도시 유니언에서 태어났고 191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샌디에이고, 애리조나에서 복무하다가 1917년 1차대전에 미국이 개입하고 미국 원정군에 참가하여 제7보병사단 13보병여단예하 64보병연대 소대장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도착한지 얼마 안돼 소령으로 진급했고 1대대장으로서 몬셀강 인근에서 독일군을 격파해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참모직을 오갔으며 독일 코블랜츠에서 2년을 복무하다가 지휘참모학교, 육군전쟁대학, 육군화학전학교를 수료하고 38보병연대, 전쟁준비사단 참모, 29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포트 베닝에서 2대대장으로 복무중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지휘참모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1941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앨라배마 캠프 러커에서 재편성된 제81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 가 소장으로 진급했다. 부사단장으로 윌리엄 R. 슈미트가 들어왔다. 2년간 강도높은 훈련을 진행했다.
1944년 펠럴리우 섬 인근의 앙가우르 섬에서 일본군 대대와 전투를 치렀다. 승리를 거두고 제1해병사단과 합류해 펠렐리우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부대 재편을 거쳐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에 대한 잔적소탕을 치렀다.
종전 후 사단을 이끌고 일본 혼슈 북부의 아오모리현에 진주, 46년 1월에 사단이 해체될 때까지 재임했으며, 그 직후 필리핀에 있던 제86보병사단장[2]으로 몇 달 동안 있다가, 도쿄에 있는 맥아더의 참모장으로 발탁되어 46년 5월부터 49년 2월까지 지냈다.[3][4] 1954년 퇴역했고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당시 동기는
오마 브래들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제임스 밴 플리트,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헨리 오랜드등이 있다.
[2]
이 사단은 원래는 45년 초에 태평양에 배정될 예정이었는데 유럽의
벌지 전투의 영향으로 아이젠하워의 요청에 추가 병력으로 유럽에 파병되었고 독일의 항복 직후 미국 본토로 이동, 몰락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정비 및 훈련을 받던 도중 일본이 항복했고, 그 직후 필리핀에 배치되어 (목적: 잔적 소탕 및 필리핀군 지원) 46년 12월까지 활동하다 해체됨
[3]
뮐러가 임명되기 전, 전쟁에서 맥아더를 보좌했던 측근 3명이 이 직책을 맡다가 연달아 떠났는데 먼저 전쟁 전부터 종전까지 가장 오래 지낸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이 45년 연말에 본국으로 귀국 후 46년에 전역했고, 부참모장인 리처드 마셜 소장이 46년 2월까지 대행으로 지낸 후 그도 본국으로 귀국 후 전역하며, 작전참모부장 스티븐 체임벌린 소장이 46년 4월까지 대행 후 인사이동으로 미국 본토로 전출했다. 이후 1949년에 뮐러가 직을 이임할 때 후임자는 바로
에드워드 알몬드였다.
[4]
당시 주일미군엔 뮐러의 동기생이 여럿 있었는데 제1군단장
로스코 B. 우드러프 소장과 제9군단장
찰스 W. 라이더 소장, 제11공수사단장 조셉 B. 스윙 소장 등이 있었고 앞의 2명은 각각 1948년 2월과 12월까지 재임하다 미 본토로 돌아갔고 스윙은 우드러프의 후임자로 49년 2월까지 제1군단장으로 지내다 뮐러와 같은 시기에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