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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9:03:06

허즈번드 킴멜


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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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eaeaea,#1f2023>※ 문서가 있는 인물만 2차 대전기 당시 계급으로 서술함
※ 윗 첨자 : 전사, 윗 첨자 : 육군 항공대, 윗 첨자 해병: 해병대, 윗 첨자: 전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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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에드워드 킴멜
Husband Edward Kimmel
파일:Mountbatten_Short_and_Kimmel_in_Hawaii_1941.jpg
1941년 8월, 허즈번드 킴멜(가장 우측)[1]
<colbgcolor=#355e93> 출생 1882년 2월 26일
켄터키 헨더슨 카운티
사망 1968년 5월 14일 (향년 86세)
코네티컷 그로튼
복무 미국 해군
1904 ~ 1942년
최종 계급 소장
주요 참전 멕시코 혁명
베라크루스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커리어2.2. 초대 태평양함대 사령관2.3. 진주만과 그 이후
3. 평가4. 가족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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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간기 및 태평양 전쟁 초창기 미 해군 제독. 진주만 공습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서 그 책임으로 끝내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은 걸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커리어

1904년 아나폴리스의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초급장교 시절을 카리브 해에서 전함 승조원으로 지냈다. 버지니아급 전함 USS 조지아의 승조원으로 근무하며 멕시코 혁명에 개입한 미국 정부의 계획에 따라 베라크루즈 점령 작전에 참가하였고 이때 부상을 입었다.

1915년부터는 해군성 차관보인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부관으로 근무하면서 그와 인연을 쌓았고, 이 인연은 훗날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된 이후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강력히 밀어붙인 계기가 되었다. 훗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일선으로 복귀, 와이오밍급 전함 USS 아칸소에서 근무했고, 종전 뒤 워싱턴 D.C.의 해군성과 필리핀에 연이어 부임하여 사무업무를 보다가 해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순조롭게 진급하며 구축함전대의 전대장 및 뉴욕급 전함 뉴욕의 함장을 역임했다. 당대 해군의 핵심인 전함의 함장 자리는 그만큼 요직이었고 출세 코스였다. 1937년 준장으로 진급, 제독이 되어 남미순항전단을 지휘했고 뒤이어 전투 함대[2]의 순양함대 지휘관을 맡았다.

2.2. 초대 태평양함대 사령관

1941년 2월 1일, 미 해군이 함대조직을 개편하고 태평양함대를 신설하면서 킴멜은 전격적으로 임시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기존 해군 전투함대 총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리처드슨이 루즈벨트의 명령에 반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루즈벨트는 전투함대를 태평양, 대서양, 아시아 3개 함대로 개편했고 이 자체는 리처드슨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일본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루즈벨트는 태평양함대를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배치하기를 희망했고, 리처드슨은 일부 분함대면 모를까 함대 주력을 본토가 아닌 진주만에 배치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리처드슨은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주력을 배치하더라도 일본에 어떠한 압력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루즈벨트는 함대조직 개편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에 반발하던 리처드슨을 해임하고, 과거 해군성 차관보 역임 시절 자신의 부관이었던 킴멜을 전격적으로 발탁하여 기용한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적극적인 백업이 있었지만 킴멜도 이미 전도유망한 제독으로 인정받았기에 반발은 거의 없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킴멜은 일본에 압박을 가한다는 루즈벨트의 정책을 충실히 따라 함대 주력을 샌디에이고에서 진주만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이후 미드웨이섬 웨이크섬의 방위력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3] 두 섬에는 활주로 확장공사 및 방어진지 강화공사가 진행되었고, 병력이 증원배치되었다. 그로 인한 대표적 나비효과가 킴멜의 명령으로 웨이크섬에 와일드캣 배달을 간 엔터프라이즈.

2.3. 진주만과 그 이후

역사에 그의 이름을 길이길이 남기게 된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으로 사실상 그의 커리어는 끝났다. 공습 와중에 킴멜도 일본기가 발사한 총탄에 맞았지만, 직격이 아닌 바닥에 맞고 튀어 유리창을 깨트리고 날아온 도비탄이었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킴멜은 씁쓸하게 차라리 이 총탄에 죽었더라면 좋았으련만...이라고 되새겼다고 한다.

킴멜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지만, 공식 인사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엔터프라이즈를 이끄는 홀시에게 일본 함대 수색 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웨이크섬 전투에 증원을 보내는 함대를 파견했다가, 다시 이 증원함대를 위기에 빠트릴 수 없다며 회항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내렸다. 이는 웨이크섬의 해병 수비대를 버린다는 가혹한 결정이었기에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는데, 킴멜은 이미 진주만 기습을 허용한 최고책임자로서 맹비난을 받고 있었으므로 추가적인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사실 증원을 준비한 함대 지휘관들도 '가슴으론 반발심이 생기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는' 상황이었고 킴멜의 후임인 니미츠 제독도 이를 지지했으며, 심지어 웨이크섬의 현장 지휘관이며, 웨이크 함락 이후 종전까지 포로 생활을 한 제임스 데버루 해병대 소령도 전후 인터뷰 등에서 웨이크섬 포기를 납득하고 이를 이해하였다고 밝혔다.[4]

이후, 12월 31일부로 정식적으로 사령관직에서 경질되면서 임시 계급이 해제되어 소장으로 환원되었고, 후임자 체스터 니미츠에게 직을 인계했다. 그 뒤 계급 정년에 걸려 자동 퇴역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만에서의 전격적인 기습을 당한 것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의회 조사단에서 킴멜은 기습을 사전에 인지할만한 정보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변호했으나 조사단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그 이외의 민형사상 책임은 지지 않고, 퇴역 해군 소장에게 주어지는 연금 등 혜택도 그대로 주어졌다.

이후 은거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68년 5월 사망했다.

3. 평가

진주만 공습 당시 함대사령관이라는 위치 때문에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매우 비판이 많지만, 당시 상황을 참작하면 안타까운 점이 많은 인물. 킴멜의 경질은, 루즈벨트의 태평양함대 전진배치 강행에 따른 책임, 그리고 정보전의 실패 책임을 뭉터기로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대통령과 행정부 입장에선 아무리 기습이라곤 하나 개전과 동시에 함대 주력을 상실한 지휘관을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일본이 선전포고없이 기습을 한 덕에 여론의 분노가 일본에게 쏠렸기에 망정이지,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서 이 정도로 패했다면 여론의 비난은 행정부와 군 수뇌부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밖에도 사기가 떨어진 태평양함대의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도 있고 해서 그냥 가차없이 교체한 것이다.

킴멜과 사관학교 동기였던 윌리엄 홀시는 전후에도 킴멜을 변호하는데 힘썼다. 사령관 재직 당시의 부하들도 의견이 엇갈리긴 하지만 규율과 체계를 확립했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지휘관이라 회고하는 경우가 많은 편. 다만, 비판적인 의견으로 지휘 및 작전에 있어 소극적이었고 이것이 진주만 공습 직전 정보부서에서 포착된 일본 항모기동부대의 증발 사태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이유로 지적된다.

유능한 사람이기는 했으나 위기상황에서 너무 방심하여 기습을 초래한 책임은 완전히 면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군의 오랜 격언인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의 표본인 셈이다.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면, 같은 이유로 책임 추궁차 경질된 당시 하와이 주둔 육군 최선임자였던 월터 쇼트 장군은 정식 중장 계급을 달고 있다 1계급 강등된 반면, 킴멜 제독은 원 계급이 소장인 상태에서 직책을 맡는 동안만 대장이고 인사 이동시 소장으로 환원될 예정이라 강등당한 것은 아닌, 그나마 좀 명예가 덜 훼손됐다는 점이다.

4. 가족

사관학교 후배이며 전쟁기 미군의 주요 제독 중 한 명인 토마스 킨케이드로부터 여동생 도로시 킨케이드(혼인 후 도로시 킴멜)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도로시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아버지를 따라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장남 매닝 킴멜은 1935년 사관학교 졸업 후 임관하여 소령까지 진급, 잠수함장으로서 가토급 잠수함 SS-273 로발로(Robalo) 함를 지휘했으나 1944년 후소급 전함을 추적하다 팔라완 섬 인근에서 격침되었다. 당시 미군은 그가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전후 밝혀진 바로는 격침되는 함에서 탈출하여 인근 섬에 상륙하였으나 필리핀 게릴라와 접촉하기 전에 일본군에 의해 발견, 포로가 되었고 이후 목숨을 잃었다. 다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한데 매닝이 수용되었던 곳이 팔라완 섬의 푸에르트 프린세사 수용소로, 몇 달 뒤 팔라완 학살이 발생한 곳이라는 것은 밝혀졌다. 때문에 팔라완 학살 이전에 가혹한 환경 속에서 부상 및 질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과, 팔라완 학살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다.

매닝 킴멜 소령은 여러 차례의 패트롤에서 운이 억수로 없어서 단 1척의 격침전과도 올리지 못했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아들인 자신이 전공을 올려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서 격침 당시에도 전함이라는 초대형 전과에 너무 집착한 거 아니냐는 말이 있다. 상관들도 매닝의 이런 행보를 어느 정도 우려해, 연좌제 적용 안 할테니 무리하지 말라고 수시로 설득했을 정도다.

차남 토마스 킨케이드 킴멜 역시 해군 대위로 잠수함의 부장으로 종군 중이었으나 매닝의 전사(당시로선 실종) 소식을 접한 어니스트 킹 제독은 과거 동료였던 킴멜이 자식들을 모두 잃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직권으로 토마스를 지상기지 근무로 발령냈다.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전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로선 토마스가 마지막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이에 반발했지만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토머스 킴멜은 1965년까지 해군에서 계속 근무, 대령까지 진급했다.

전후에 태어난 매닝 킴멜 3세도 형들과 함께 생애 내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킴멜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매우 중요히 여겼다.

나이 차가 매우 많이 나는 동생 에드워드 랠프 킴멜(Edward Ralph Kimmel; 1921-2005)은 개전 후인 1942년에 해군 장교로 임관해 1948년 전역했으며, 로스쿨을 나와 법조계에 종사했다.

5. 대중매체에서

진주만 공습을 다루는 영화에서 모두 나온다. 당연히 좋은 취급은 못받지만 그래도 무능한 졸장, 똥별이란 이미지는 덜하고 운이 없었다는 동정적인 묘사가 많다.

[1] 가운데는 루이 마운트배튼, 왼쪽은 당시 하와이 주둔 미 육군 사령관인 월터 쇼트 중장. [2] Battle Force. 1922-1941년동안 존재한 미 해군의 전투단위 [3] 괌은 아시아함대 관할이었다. [4] 히틀러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지킬 수 있는 건 지키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방어와 공격 양극단을 오고가다 철저히 패망한 것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