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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뉴욕 주지사 | |||
<colbgcolor=#131230><colcolor=#ffc224> 미합중국 제11대 연방대법원장
찰스 에번스 휴즈 Chalres Evans Hugh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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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fff,#1f2023> 1862년 4월 11일 | ||
뉴욕주 글렌폴스 | |||
사망 | 1948년 4월 27일 (향년 86세) | ||
매사추세츠주 오스터빌 | |||
재임기간 | 제36대 뉴욕주지사 | ||
1907년 1월 1일 ~ 1910년 10월 6일 | |||
연방대법관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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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 10일 ~ 1916년 6월 10일[대법관직] | |||
제44대 국무장관 | |||
1921년 3월 5일 ~ 1925년 3월 4일 | |||
제11대
연방대법원장 (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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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2월 24일 ~ 1941년 6월 30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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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c224> 묘소 | 뉴욕시 브롱크스 우드론 묘지 | |
부모 |
아버지 데이비드 찰스 휴즈 어머니 메리 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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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안토이네트 카터 (1888년 결혼 1945년 사별) | ||
자녀 | 4명 | ||
학력 |
매디슨 대학교 (
편입) 브라운 대학교 ( AB) 컬럼비아 대학교 ( 법학 / LL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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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미국 침례회) |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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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체임벌린, 카터 & 혼블로어[2]
월스트리트법무실 변호사 카터, 휴즈 & 크라바스[3] 파트너변호사 코넬 대학교 로스쿨 교수 브라운 대학교 이사 제36대 뉴욕주지사 연방대법관 제44대 국무장관 상설국제사법재판소[4] 판사 제11대 연방대법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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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겸 법조인.2. 1916년 대선 도전
1916년 미국 대법원 대법관을 사퇴하고 19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공화당 경선도 통과해 대선 후보가 되었다 상대후보는 재선에 도전하는 우드로 윌슨과 붙었다. 마침 진보당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본인을 지원을 하며 본인에게 유리해졌고 선거 내내 윌슨에게 이기고 있어고 본인이 당선될게 확실한채 본선이 시작됬다.3. 그러나
선거 결과는 예상과 달리 석패였다. 있단 득표율에서 보면 854만표, 46.1% 를얻었지만 윌슨에게 912만표, 49.2%로 약 60만표, 3% 정도 근소한 차로 밀렸다. 선거인단에서도 277 대 254로 23명차로 석패했다.[5] 있단은 4년전 보수표 분열로 고작 2주에서 이겼지만 지난번보다 많이 늘어난 18개주에서 승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동북부지역에 탈환에 성공했다 있단 뉴욕, 일리노이를 탈환하고 인디애나 15명 (0.97%), 미네소타 12명 (0.1%)로 간발의 차로 승리했지만 윌슨에게 결정적으로 캘리포니아 13명에서 (0.38%)차로 윌슨에게 진게 대선 패배 원인이다. [6]3.1.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갈등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명으로 연방 대법원장이 된 후 임기 초에는 보수 성향 판사 '4기사'(Four Horsemen)와 진보 성향 판사 그룹인 '3총사'(Three Musketeers) 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휴즈 코트가 무난히 자리잡는 듯 했으나 대공황의 영향으로 1932년 대선에서 후버가 재선에 실패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된 뒤 휴즈의 고난이 시작됐다.루스벨트와 민주당이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연방 정부 차원에서의 대규모 지원 정책을 입법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이 이를 가지고 소송전을 벌이는 바람에 대법원으로 불똥이 튄 것. 루스벨트 취임 초반인 1932년 금본위제 조정 사건과 1934년 미네소타의 주택담보대출 상환 유예 조치 사건에서 루스벨트와 민주당 손을 들면서 휴즈의 보수성을 염려한 루스벨트와 좋은 관계가 될법도 했지만 둘의 허니문은 여기까지 였다.
1935년 철도 산업 종사자에 대한 정년 및 연금 보장법이 입법 절차 및 상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이를 파기한데 이어 뉴딜 법안 3개(국가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구피-스나이더 석탄법)를 연속으로 파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특히 뉴딜 정책의 대표 법안 중 하나인 1933년 국가산업부흥법(NIRA)을 파기할 때는 아예 다수 의견을 작성하면서 이 법이 이중 위헌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6년 대선에서 루스벨트가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하며 상·하원도 민주당이 다시 수성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대법원에 의해 뉴딜 법안이 연속 파기되자 와그너 법, 사회보장법까지 파기될 수 있다고 판단한 루스벨트는 1937년 사법 개혁 법안(court-packing plan)을 발표하며 연방 대법관을 대거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상의 핵심은 종신직인 대법관 임기를 70세로 제한하고, 70세에 도달한 대법관이 은퇴를 거부할 경우 대통령이 임의로 새 대법관을 추가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 연방 대법관들 가운데 70세를 넘긴 사람이 5명이나 됐기 때문에 이 구상이 의회의 동의를 거쳐 실현되면 루스벨트는 그 숫자만큼의 신임 대법관을 추가로 임명해 자신의 우호세력을 다수로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루스벨트는 첫 임기 4년간 새 연방 대법관을 임명한 기회조차 없었기에 더욱더 이 법안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공화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도 격렬한 반발이 있었고, 캐스팅보드였던 휴즈 대법원장과 오웬 J 로버츠 대법관이 사법 개혁 시도 이후로는 최저임금법(West Coast Hotel Co. v. Parrish 사건), 와그너법(NLRB v. Jones & Laughlin Steel Corp. 사건)의 효력을 인정하는 등 어느 정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타협적인 판결을 내리고, 골수 보수파인 반 데반터 대법관이 은퇴해 루스벨트가 드디어 연방 대법관 지명권을 행사하는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흐지부지됐다.
4. 은퇴와 사망
1940년 건강이 약화되어 은퇴를 희망했다. 물러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후임자로 올리버 스톤을 추천했다. 루스벨트가 이를 수락해 1941년에 모든 공직에서 떠난 뒤 평온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8월 27일, 86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오스터빌에서 사망했다.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06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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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002 (50.52%) | 당선 (1위) | 초선 |
1908 | 미국 주지사 선거 | 804,651 (49.08%) | 재선[7] | |||
191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8,546,789 (46.11%, 254명) | 낙선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