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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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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အာဇာနည်ကုန်း ဗုံးပေါက်ကွဲမှု
Rangoon Bombing
파일:bomb-blast.jpg
발생일 1983년 10월 9일
발생 위치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랑군 아웅 산 장군 묘소
(現 미얀마 양곤 관구 아웅 산 국립묘지)
유형 폭발, 테러
가해국 북한
피해국 대한민국,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동기 북한의 대남 도발, 대남 사회 전복 공작
인명 피해 <colbgcolor=#000> 사망 범인 포함 25명[1][2]

1. 개요2. 명칭3. 전개 : 전두환의 미얀마 방문4. 테러5. 사망자 명단6.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7. 수습 및 후속 조치8. 후폭풍9. 만약 전두환의 암살이 성공했다면
9.1. 개전 가능성9.2. 이른 민주화 가능성
10. 대중매체에서11. 기타12. 관련 자료13. 관련 문서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983년 10월 9일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3]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북한 폭탄 테러.

2. 명칭

아웅 산은 버마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 사건은 아웅 산이 안치된 묘소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다.

영어로는 'Rangoon Bombing'. 즉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라고 부른다.

이 사건이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가 아니라 주로 '아웅 산 폭탄 테러'라고 줄여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버마에 아웅 산이라는 (山)이 있고 거기서 테러가 일어났나 보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대한민국 정부가 사용하던 공식 명칭은 버마 아웅 산 암살 폭발이었지만 이는 미얀마인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할 수도 있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명칭이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 수준으로 전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위인이다. 비유하자면 한국에 외국 대통령과 귀빈들이 방문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외국 대통령 암살을 노린 폭탄 테러가 일어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가 훼손되고 외국 귀빈들이 사망했는데 이 사건을 '이순신 폭탄 테러' 혹은 '이순신 폭파 사건'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따라서 현재는 '버마 아웅 산 암살 폭발'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3. 전개 : 전두환의 미얀마 방문

파일:0401201010095403000054030011954.jpg
미얀마로 떠나는 전두환[4]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 북한에서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면서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들여 가면서 온갖 선물 공세로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앞서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외교전에 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당시 미얀마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로 굴러가는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해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 대양주 순방[5]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하였다.

사실 원래 순방 계획에는 미얀마가 없었다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졌고 기자들 앞에서 이범석 외무장관이 "그 개새끼 때문에 버마까지 가야 하게 되었군"이라고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외무부는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정을 갑작스럽게 바꾸도록 지시한 사람은 당시 전두환 정부의 실세였던 쓰리허[6]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7]
정부 핵심 관료들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한 것은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나라인 데다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막상 얻을 만한 실리나 국제적 위상이 부족하다는 것과 결정적으로 북한을 더 지지하는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으며, 북한에 의한 암살/ 테러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세계 정세에 정통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피력되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여 북한을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강했다.

2010년대에 KBS가 제작한 다큐에 출연한 당시 취재기자는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네 윈의 통치술을 배우기 위해 버마를 선택한 것이란 의견이 많이 돌았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쓰리허 중 한 명이 전두환을 설득할 때 동원한 논리가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는 모양새이다. 신동아 1992년 6월호 기사 <전두환은 '네 윈'을 꿈꿨다(이상우 기자)>, 1993년 8월 13일자 중앙일보 기사 <청와대 비서실( 박보균 글)> '전씨 「나들이 병」 겹친 과잉 외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실제로 1981년 네 윈-우산유 대통령직 이양 이후 서열 관계는 <88년 정권교체준비연구>란 문건에 나온 권력 구도와도 유사했기 때문에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순방을 추진하였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서울을 떠나 양곤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양곤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 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8] 미얀마 순방 결정까지 참모진의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해외 순방이 워낙 많았고[9] 그때까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미얀마를 포함한 5개국 순방도 평범한 해외순방으로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다.

4. 테러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로, 쉽게 말해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10],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 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앞장서서 안내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두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한 후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곧 각하가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 대사의 말에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했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분주했다.

파일:attachment/burma02.jpg

위의 사진은 이렇게 부산한 가운데 촬영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이 참배를 위해 도열한 모습을 담은 것으로, 테러가 발생하기 불과 몇 초 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즉, 이것이 희생된 수행원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당시 일간지 사진기자가 흑백필름 및 컬러필름을 각각 장전한 카메라 2대로 촬영했는데 컬러필름 카메라는 다행히 무사해서 이처럼 깨끗하게 사진이 나왔으나 흑백사진은 매우 훼손이 심각해서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복원한 사진이라는 얘기는 잘못되었고 애초부터 컬러, 흑백 따로 찍은 사진이다.

파일:8000453829_20100510.jpg

참사 직전의 흑백 사진인데 사진의 왼쪽 아래에 뿌옇게 바랜 부분은 사진을 찍은 기자의 혈흔이다. 카메라 주인 연합통신 최금영 기자[11]의 피가 카메라 속으로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이 사진도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의 필름이 들어있던 카메라는 파편에 맞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고 필름들은 빛이 들어가는 바람에 대부분은 인화해 봤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도저히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나마 운이 좋아 피사체들의 형상을 좀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필름 컷이 이것이었다고 한다.[12]

이날 예정되었던 참배 대형은 아래와 같으며 이름이 올라온 인물들 중 전두환을 비롯한 굵은 글씨로 표기된 이들만 생존했다. 여기 적힌 나이는 연 나이 기준으로 당시 나이다.

|| 최재욱(43)
공보 비서관
|| 하동선(47)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13] || 황선필(44)
대변인
(미도착)
[14] || 김재익(45)
경제수석 || 민병석(54)
대통령 주치의 || 김용한(54)
과기처 차관 || 강인희(48)
농산부 차관 || 이기욱(46)
재무부 차관 ||
이기백(52)
합참의장
심상우(45)
국회의원[15]
함병춘(51)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54)
주 미얀마 대사
서상철(48)
동자부 장관
김동휘(51)
상공부 장관
이범석(58)
외무부 장관
서석준(45)
경제부총리
전두환(52)
대통령
(미도착)


그러니까 미도착한 사람을 제외하면 15명 중에서 가장 구석에 있던 2명만 살아남고 나머진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기백 장군은 입고 있던 육군 정복 약장 철제 부착물들이 방편 효과를 내 줬고 폭발 즉시 전속부관 전인범 (당시) 육군 중위가 붕괴된 건물 잔해로 뛰어올라 "의장님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으면서 즉시 들처업고 후송시켰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기백 장군은 사건 이후 자신이 현장에서 입은 정복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

폭파 순간은 MBC 카메라기자 임채헌[1942~2016] 촬영했는데 당시 광경은 너무 처참했다. 1991년 MBC 창사 30주년 특집 뉴스데스크에서 테러 당시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사용되었는데 "MBC 뉴스가 단독으로 촬영한 아웅 산 사진은 당시 너무 끔찍하다는 이유로 방송되지 못했습니다"라는 해설이 나왔다. 해당 영상은 1년 뒤에 일부 편집된 상태로 방송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5. 사망자 명단

6.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

여러모로 명백히 전두환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하게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져 살아남았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의 승용차가 운행 중에 길바닥에서 고장났다.

문제는 당시 미얀마는 1960년대 대한민국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여서 길바닥에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운전기사는 주변을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 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이 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은 도착해 있을 유칫흘랭(U Chit Hlaing)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고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무장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빈인 국가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그럴 경우 외무장관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대통령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격려 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 인사를 끝까지 했다.[26]

그러다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영빈관에서 묘소까지는 4.5㎞. 오전 일정이 대한민국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을 살린 것이다.

아웅 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의 도착이 지연되자 장세동 경호실장[27] 또는 경호실 넘버 투인 천병득 경호처장의 요청[28]에 따라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웅 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 스케줄 지연과 함께 전두환이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이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웅 산 묘소로 향할 때 당시 박상범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은 전두환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 바로 뒤의 경호차량 앞자리에 타고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었는데 묘소에 거의 다 와가는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폭탄이 폭발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황급히 대통령 일행을 되돌리게 했다. # 영빈관에서 순교자 묘역까지의 거리는 불과 4.5㎞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각이 10시 28분이었고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그로부터 4분 전에 영빈관을 출발해 테러의 순간에 묘역을 1.5㎞ 정도 남겨 놓고 있었다. 공식 행사는 2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 끗 차이였다.

한편, 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에 묘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이계철 대사가 머리 스타일이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고 모터사이클 경호를 받으며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린 후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대통령인 양 오인될 수도 있었다.

위 주장과는 달리 약간 상황이 달랐다는 주장도 있는데 참배할 묘지의 행사장이 좁다는 이유로 장세동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 함병춘 비서실장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함병춘 실장도 대머리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이계철 미얀마 대사 또는 함병춘 실장을 전두환으로 잘못 봤거나 관례처럼 비서실장이 도착하니 전두환도 당연히 도착했다고 생각되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고 한다.[29] 이계철 대사와 함병춘 실장 둘 다 순직했다.

이렇게 전두환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 펑크 + 개발도상국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어 택시를 타는 게 늦어짐 +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아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 = 스케줄이 늦어지게 됨.
  2. 전두환과 비슷한 용모의 주 미얀마 한국 대사 or 비서실장이 태극기가 휘날리는 차를 타고 먼저 도착함 + 경호실장 or 처장의 시범연주 지시로 나팔소리가 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려 버림.

위 두 가지 기막힌 상황들이 우연스럽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테러범이었던 강민철이 동료 죄수에게 해 준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전두환이 늦게 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서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폭탄이 미리 터졌다고 한다. 혹시 전파로 조종하던 폭탄이 현장에 있던 경호실/국정원 등의 무전기의 전파로 인해 간섭받은 것 아닌가란 추정도 있는데… 자신들은 실수한 적이 없으니 북한은 우리를 탓하면 안 된다는 면피성 발언일 수도 있다.[30]

노신영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미군과의 연계를 통하여 항로를 변경하는 예리한 판단, 즉 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스케줄이 미루어져서[31] 전두환의 목숨을 구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원래는 전날 도착하여 바로 아웅 산 묘소에 오후 4시쯤 참배할 예정이었지만 항로가 변경되는 바람에 한 시간이 늦어져 아웅 산 묘소에 가면 오후 5시로 어두워지는 시간이라 너무 컴컴하다고 하여 도착 다음날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만약 일정대로 전날 참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미얀마 외부장관의 타이어 펑크도 없을 것이고 날이 금방 어두워져 공작원들의 탈출도 용이했을 것이지만 항로 변경으로 미루어진 스케줄로도 전두환은 죽을 뻔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을 부정하기 위해 이 항로수정안을 가지고 노신영과 장세동이 계획한 전두환 암살 작전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늘 같이 다녔기 때문에 묘소 방문 일정이 그대로 굴러갔으면 전두환과 손잡고 같이 훅 갈 운명이었다. 게다가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 노신영은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접점이 없어 둘이 힘을 모아 무슨 일을 꾸밀 확률은 매우 낮았고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는 아예 권력 때문에 다투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가안전기획부 문서 참고.

7. 수습 및 후속 조치

파일:attachment/burma04.jpg

대한민국 국적인 17명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고위공무원들이었고 유해 엠버밍 과정을 거쳐 비행기로 운구됐다. 외국에서 사망한 사람의 유해를 한국으로 송환하여 장사를 지내는 방안은 대체로 시신을 엠버밍 처리·보존하여 비행기로 운구한 뒤 한국에 매장하는 방법과[32] 외국 현지에서 화장한 뒤 비행기로 운구하여 국내에 봉안하는 방법[33][34]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당연히 전자가 훨씬 비싸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공무원 신분이었고 공무 출장 중 순직한 희생자라는 점을 감안해 국민장을 결정하였으므로 엠버밍 과정 등 장례 절차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하였다.

사건 이후 10월 9일부터 먼저 희생자들의 자택에 빈소가 차려졌으며 다음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도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11일 유해 도착 당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영현봉영식을 연 뒤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에 설치된 합동영현봉안소에 안치됐다. 영결식 전까지 전두환 대통령과 각계 인사, 시민들이 조문 및 분향을 했으며 같은 달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순국외교사절 합동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버마 랑군에는 2개의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2명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만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했으며 수술실에 에어컨도 없어서 부채를 부쳐 가며 수술했다. 그 결과 환자들의 염증이 심해져서 2차 수술을 할 때 쯤에는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본격적인 치료는 테러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양곤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들이 총동원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자를 살리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기백 합참의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은 필리핀 클라크 미국 공군기지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다만 귀국하러 공항에 가던 와중에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들이 안치된 병원에 들려 조의를 표하고 미얀마 제1육군병원에 들러 생존자들의 병실을 둘러보았다. 병상에 누운 공보비서 최재욱은 얼굴이 피투성이어서 대통령이 몰라봐 "제가 최재욱입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알아볼 정도로 상황은 참혹하였다.

한편, 북한 공작원들은 정찰국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불리는 '강창수 부대'[35]의 3인조로 김진수 소좌(일명 진 ), 강민철 대위(본명 강영철), 신기철 대위(본명 김치오)였다. 이들은 9월 9일 북한 옹진항에서 5379톤의 북한 화물선 '애국 동건호'[36]를 타고 9월 17일 랭군항에 도착했고 22일 공작원 3명은 몰래 빠져나와 아무런 입국 검사나 절차도 없이 랑군에 잠입했다. 이 때부터 북한 공관원 전창휘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테러 3일 전인 10월 6일 아웅 산 묘소를 정찰하고 10월 7일 새벽 2시 천장에 클레이모어 2개와 소이탄 1개를 매달았다.[37] 이후 3일간 근처에서 노숙하다가 묘소에서 1㎞ 떨어진 영화관에서 원격조종장치를 눌렀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공작원들은 배를 타러 양곤강으로 가야 했는데 여기서 흩어지기로 하여 조장인 김진수는 수영해서 가기로 했고 강민철과 신기철은 걸어갔다. 요약

그런데 양곤 강에 도착하니 북한 화물선이 없었다. 9월 24일 일단 미얀마를 떠나 이집트에 갔다 온 애국 동건호가 10월 6일 재입항을 신청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 미얀마측에서 10월 15일까지 입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진수와 강민철이 입은 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둘 다 수류탄을 쥔 쪽 손이 파괴되어 외팔이가 되었고 이 중 김진수는 눈에 파편이 박혀 애꾸눈이 되었다. 던지려던 수류탄 2발이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살인멸구를 위해 안전핀을 뽑으면 수류탄이 바로 터지도록 손을 써 놓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당시의 공업 수준이 수류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진수는 폭발로 인해 왼팔과 오른손 손가락 5개 중 4개가 절단되었고 눈은 한쪽은 파편에 잃은 데다 남은 한쪽 눈의 시력까지 고작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수준으로 손상돼 사실상 맹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코, 얼굴과 양쪽 허벅지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왼쪽 가슴에는 내출혈, 복부는 창자, 방광 등이 터져 나온 상태였으나 살아남았다. 그러나 모든 진술을 거부했는데 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상을 치료받을 때 처음에는 미얀마 의료진들에게 몇 마디 영어로 소통하기도 했으나 조사가 시작된 이후로는 철저히 침묵했다. 담당 군의관은 그의 청력이나 언어 능력, 지적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증언했다. 순전히 본인 의지로 입을 닫고 있었다는 것. 재판 때 일어난 광경이 이랬다고 한다.
문: 이름이 무엇인가?
답: …….
문: 국적은 어디인가?
답: …….
문: 생년월일 또는 나이는?
답: …….
문: 가족관계는?
답: …….
문: 소속 부대는?
답: …….
문: 피고인은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군 장교라는데 사실인가?
답: …….
문: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유인데 재판 심리와 관련해서 다른 무슨 특별히 할 말은 없는가?
답: …….
문: 특별수사본부장이 범죄 사실을 설명했는데 어디 틀린 데가 있는가? 그렇다면 지적하시오.
답: …….[38]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지라 이름을 물었을 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진'이라고 웅얼거렸기 때문에 '진모'라는 가명으로 지칭할 뿐이었다. 결국 1985년 4월 6일 처형되었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3번째 사형으로, 앞서 2번은 쿠테타에 연루된 반역자들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1998년 11월이 되어서야 강민철이 인세인 형무소에서 미얀마 주재 외교관과 면담하면서 이름을 밝혀 그의 진짜 이름이 알려졌다.

한편, 버마 정부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3주가 지나도록 ‘북한’을 특정하지 않은 채 '코리언'이 범인이라는 입장이었다.[39]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처음에는 '남한 출신이고 영등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육군에서 제대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서울대학교 학적부를 조사한 결과 그런 사람 없다고 하자) '성북국민학교만 나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았고 영등포역 부근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에 어머니가 여전히 살고 있다', '버마에 육로로 왔다', '비행기로 왔다' 등의 진술을 하였으나 남한 관계자와의 면담 끝에 11월 3일 진술을 번복하며 북한에서 왔다고 시인하였다.

버마 정부는 그 다음 날 바로 북한 외교관에게 출국을 명령했고 북한과의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강민철은 김진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11월 22일 제1차 공판이 시작되어 12월 9일 제10회 공판 기일에서 판결이 선고되어 종결되었으므로 18일 만에 끝난 초고속 재판이었다. # 두 사람 다 변호인을 통해 감형 청원을 제출했으나 기각되었다. 해가 바뀐 1984년 2월 9일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 당시 미얀마 현행법은 사형수의 청원을 기각할 경우 21일 이내에 형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강민철은 자백했음이 참작되었는지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고 사실상 무기징역을 살게 된 후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40] 1998년[41]부터 남한의 외교관이 영치금과 라면, 김밥, 남한 서적[42] 등을 넣어 주며 관리했다고 한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한반도에 가고 싶어했지만 모두 가지 못하였고 2008년 5월 18일 갑작스러운 간암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테러범 검거를 담당했던 미얀마 경찰은 33년 뒤인 2016년에 미얀마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김진수가 아웅 산 묘소 테러범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검거했다"고 밝혔다.[43]

참고로 그들이 진술을 거부하건 거짓말을 늘어놓건 결국 북한 소속임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작원들이 도주하면서 거친 부두와 마을에서 수거된 수류탄을 미얀마 당국에서 조사한 결과 모두 동일한 것이었고, 이 수류탄들은 같은 군수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강민철과 김진수의 몸에서 제거한 파편도 모두 같았고, 이 수류탄들은 버마 내 반정부 게릴라들이나 미얀마군이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75년 「제인 보병무기 연감」 638페이지에 북한제로 소개된 폭탄과 동일한 것이었다. 심지어 수류탄 일련 번호도 '141-69-101'로 같았다. 이 번호 중 '141'은 동시 생산 번호이고, '69'는 제조 연도, '101'은 제조 공장 고유 번호이다. 두 범인은 동일 집단 소속임이 분명하였다.

10월 28일부터 북한의 폭발물과 폭파 수법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인 안기부 요원들이 수사에 참여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피의자들에 대한 수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의자 신문은 피의자들을 분리한 채로 종합병원의 별실에서 이루어졌다.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품은 소형 송신기[44]와 안테나 선, 12볼트 배터리 수신기[45], 원격조종용 전자수신회로 조정기 1대[46], 원격조종용 건전지 16개, 불발탄 1개[47], 소이탄 1개[48] 등이었다. 그들이 소지했던 소음권총, 수류탄, 무전기 등 휴대장비는 그동안 한국에서 검거된 북한 간첩들의 장비와 똑같은 것었다. 권총 번호도 유사했는데 1980년 11월 3일 전남 횡간도에 침투했던 간첩 3명이 휴대했던 동일한 형태의 권총의 번호와 끝자리 수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북한은 강민철이 휴대했던 25구경 브로닝 권총(번호 459771)과 횡간도 간첩 소지 권총 2정(번호 459773, 460259) 등 일련번호 459751~462546 사이 브로닝 권총 100정을 서독 거주 스웨덴 상인인 한스 루돌프 아우구스 요하임을 통해 벨기에 총기제작회사인 파브리크 나시오날 사로부터 수입했음이 밝혀졌다. 평양 100번지 소재 조양상사가 권총 100정 이외에도 동형 브로닝 권총의 실탄 1만 1천 발도 함께 수입했다. 북한이 수입한 무기들은 권총 1상자와 탄약 3상자의 형태로 벨기에의 당베르 항에서 북한으로 수송되었던 것이다. 범인들이 휴대한 수류탄은 내부에 쇠구슬이 충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도 북한제 산탄형 4각수류탄으로서 대남 침투 간첩들로부터 노획한 수류탄과 동일한 것이었다.

8. 후폭풍

8.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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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냉전의 최전선격이던 대한민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가 이런 테러를 당했다면, 그리고 미국이 뜯어 말리지 않았다면 진작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대남 도발이 벌어질 때마다 대한민국 군사력 작전권 핑계로 일방적으로 묶어 놓고 북한을 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소련도 아닌 미국이었다. 그것도 반공 성향이 강해 유럽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 로널드 레이건이 당시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를 노렸다는 점에서 북한의 목적이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의 무력화와 국가적 분열에 있었다. 물론 명목상이긴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부터 마련된 7.4 남북 공동 성명 등 여러 남북 평화 통일 방안들이 있었고 북한은 자기들의 범행이 아니라고 발뺌했으므로 혼란을 틈타 군사적 공격을 가하는 것은 이전의 국제적 선언을 자기들 발로 차 버릴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조건 및 외교사적 전례를 제쳐 놓고도 이건 대놓고 '남조선 니들 엿 먹어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이 이미 1.21 사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등으로 이미 암살을 시도한 전례가 있지만 적어도 그 두 사건은 오직 국가원수만을 노린 것이었고 한국 내부에서 저지른 사건이었으며 각각 비밀특수부대와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 문세광을 활용한 일이라 전자는 "좌경맹동주의자들이 헛짓한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이 가능했지만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핵심 인물을 모두 없애고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제3국에서 저지른 테러였다.

사망자 명단만 봐도 부총리, 장·차관에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대한민국 최고위층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부상자까지 확대해 보면 장·차관이 몇 명 더 있고 국군 최선임 장교까지 들어갔다. 제대로 터졌다면 국가 행정부와 군 지휘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다. 설치했던 폭탄 중에서 하나만 터졌고 다른 하나는 불발이었다. 그나마 소이탄이 불발되어서 망정이지 이것마저 터졌으면 섭씨 4,000도가 넘어가는 열기 때문에 사망자가 더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전두환까지 죽었다면 대한민국은 국가적인 혼란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이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해 군부에서 "북한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했으며 육사 12기 출신 장성들을 중심으로 '벌초계획'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제5공화국 버전의 실미도 작전 추진까지 거론되었을 정도였다. # # 그래서 로버트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경악했다.

이에 전두환은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일갈하는 한편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나 강경한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겨우 전방 장교들이 진정해서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12월 3일에 부산으로 침투한 무장공비가 체포되면서(다대포 사건) 아웅 산 묘소 테러에 대한 한국측의 보복작전인 이른바 '벌초 계획'은 아주 없던 것으로 되돌렸다고 주간조선은 보도하였다.

즉,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암살당했다면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명령의 공백 속에서 전두환의 친위세력인 하나회 소속 장성이나 다른 장성들이 '복수'를 명분으로 북한에 국지전이든 특수작전이든 보복 공격을 감행하려고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 전면전까지는 미국 중국 소련 또는 일본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이 아직 권위주의 군사독재 국가였기 때문에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대한민국의 군사적 보복을 막을 수 있었다. 만약 이 참사가 정부의 정보 통제 없이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면 오히려 국민들부터 전쟁하자고 들고 일어났을 수 있었는데[49]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이 직접 군을 단속하고 여론을 덮으면서 보복을 막은 것은 권위주의 정권이어서 그나마 쉽게 된 것이었고 그 점에선 전두환과 정권이 침착하게 처신해 한반도의 평화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50]

심각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직후에도 결국 양쪽 강대국들은 사과를 통한 사태 해결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건 아니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는데 미국이 섣불리 군사행동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결국 테러임에도 주 목표였던 전두환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최악의 혼란까지는 가지 않았고 부하들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에서 북한을 때려잡자는 강경 분위기에 대해서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워커는 테러행위가 북한이란 것을 확신하지만 보복공격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에 전두환은 "우리 정부와 군은 본인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국의 대통령에게 확실히 해두고 싶다. 우리는 귀국 정부와 충분하게 의견을 조율하기 전에 섣부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51]

미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뜯어말린 이유는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되어 있다. 1983년은 냉전 시기 중 쿠바 미사일 위기 다음가는 제3차 세계 대전의 위기가 닥쳐온 시기로 평가된다. 3월 8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이라고 지칭한 이래 미소관계는 악화되어 갔고 9월 1일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해당 항목에도 잘 서술되어 있지만 레이건은 이를 기회로 유럽에 퍼싱-2 미사일을 배치하고 핵무기 감축 중단, 화학무기 제조, 대소선전 강화 등을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11월 2일에 NATO의 대규모 합동군사훈련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대소 선제핵공격을 가정한 대규모 3차대전 대비 훈련이었으며 소련도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대대적으로 맞대응하고 있었는데 그런 긴장 분위기 속에서 인류가 멸망할 뻔한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과 위기는 자기들 나름에는 관리되는 범주 안에 있었다. 비록 일촉즉발의 위기였다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강대국과 그 수뇌에 의해 위기가 어느 정도 관리되고 통제되는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이빨을 세우지만 진짜 싸우기엔 서로 무서워 자제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북한이 이러한 국제적 상황을 무시하고 초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 테러로 인해 미국과 소련은 관리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진짜' 돌발상황에 직면했다. 사소한 총격전이나 국지적 충돌도 아니고 미국의 동맹국 국가원수에 대해 소련의 동맹국이 명백한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국제 정세가 적당했으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직후처럼 국지전 및 제한적 북진까지 가정한 대규모 보복작전이 감행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서로의 위기상황을 관리되는 범주 안에서만 제한하던 미소는 이 돌발사태에 당황했고 특히 미국은 어떻게든 한국의 보복 시도를 막아서 위기를 다시 관리되는 범주로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마침 로널드 레이건의 아시아 순방에서 11월 초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것이 테러 이전에 결정된 상태였다. # 방한 직후 레이건은 이례적으로 최전방을 시찰하며 한미 양국 장병들을 격려하는 등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었고 정권의 안정이 중요했던 전두환도 개인적으로야 분노했겠지만 대외적으로 인내하면서 미국의 지지를 받아내고 군 내 강경파들을 주저앉혔다. 이로서 1983년의 위기는 다시 "관리되는 범주로 회귀"했다.

인내에 대한 대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개발을 포기해야 했던 지대지 탄도 미사일 백곰 등 일부 군사 무기에 대한 재개발 허용을 요구했고 미국도 이런 테러를 겪었는데 그 정도는 허용해 줘도 된다고 판단하여 요구를 수용했다. 무기 개발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무-1 미사일이란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미국으로부터 5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알아서 설설 기며 포기했던 자주국방 사업 중 하나를 이렇게 되살리게 되었다.

한편, 대통령 및 정부 각료를 노린 희대의 테러 사건이어서 경호 및 안보 분야에서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법했지만 의외로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과 노신영 안기부장은 그대로 유임되었다. # 두 사람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제출하였지만 전두환은 이를 반려하며 사실상 면책하였다. 두 사람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이 매우 컸기도 했고 책임을 물으려고 해도 곤란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경호는 국내가 아닌 국외, 그것도 미얀마의 폐쇄적인 체제라는 한계가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경호의 1차 책임은 미얀마 측에게 있었으며 사건 직후에는 '대한민국의 자작극 아닌가?'라는 유언비어도 돌아서 장세동을 처벌하면 오히려 오해를 증폭시킬 우려도 있었다.

안보 분야도 미얀마가 사회주의 성향에 가까운 제3세계 국가라는 특수성이 있었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애초부터 노신영 안기부장은 미얀마 순방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던 터라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더더욱 불가능했다. 설에 따르면 순방을 중단하고 귀국한 직후 전두환의 아내인 이순자는 청와대에서 만난 노신영에게 '조금만 더 강경하게 막아주셨으면 했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8.2. 북한

테러의 당사자인 북한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시 지휘는 장성택의 친형인 장성우 허담 조선로동당 국제비서가 주도했다. 북한은 그 해 10월 8일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했는데 이는 남한을 대화 상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는 평가받았으나 이를 도모한 이유는 베일에 싸여 있다.[52] 다만, 애초부터 버릴 패였던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게 굴었는데 2008년에 사망한 강민철 상위의 가족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고 시도때도 없이 암살 위협을 했다고 한다.

남한에 망명 황장엽 前 북한 조선로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와 관련해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예전의 1.21 사태와 같이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반대했고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리발 모드로 나간 것이라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기점으로 대형 테러를 점차 줄여 나갔고 냉전이 끝나면서 고립을 탈피하려던 북한은 자유 진영 국가 상대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피해자인 척 하며 얻어내는 저팔계 외교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8.3.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여기도 나라 전체가 뒤집어졌다. 주권국가인 미얀마의 영토 안에서 북한이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니 이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과 동시에 미얀마를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미얀마 사람들도 이 때 많이 죽고 다쳤다.

덤으로 국제 사회에서 체면을 팍 구겼다. 타국의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는 자국의 국가원수 수준에 맞춰 보안 조치를 하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자 상식인데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온 다수의 귀빈들이 죽고 국가원수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은 그만큼 미얀마의 치안 유지 및 사전 조치가 허술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여도 (비록 자신들의 잘못은 아닐지언정) 정보·경계·경호 작전 실패로 관련자들이 모조리 사임하는 헬게이트가 열릴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게다가 미얀마는 친북 성향의 국가였기 때문에 잘못 꼬이면 '미얀마가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유인해서 암살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53] 그나마 테러범의 정체가 명확했고 미얀마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국부(國父) 아웅 산 장군의 묘소(북한에 비유하자면 금수산태양궁전 급으로 중요한 곳)가 훼손되는 광경을 다들 똑똑히 봤기 때문[54]에 그 정도로 심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 우 산유는 물론, 당시 미얀마의 실권자였던 네 윈도 당일 오후에 이례적으로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정중히 사과할 정도였으니 미얀마 측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히 여겼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아무리 우호국이어도 자국의 성지에서 이런 짓 벌이면 '싸우자'는 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테러 발생일로부터 25일째가 되는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테러범이 북한군 특공대원임을 밝히고 "범죄 집단인 북괴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괴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대한민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 북한과 재수교하여 외교 관계를 다시 맺은 것도 게 테러로부터 24년 뒤인 2007년 4월이었다.[55] 이 때는 당연히 북한이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의도적으로 국가를 망친 수준의 정책들과 2차례의 대홍수, 고난의 행군을 얻어 맞으며 최빈국으로 하락한 후였다.

덤으로 미얀마에서는 나중에 '국내에서 외국의 국가원수를 살해해도 자국의 국가원수를 살해한 죄와 똑같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는 얘긴데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보니 법이 미처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오쓰 사건 발생 직후의 일본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정부 관계자들이 사망한 일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본다면 2016년 방글라데시 다카 베이커리 테러가 있을 것이다. 당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지령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학살이 일어난 홀리 아티산 제과점(레스토랑)에서 내국인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 관광객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해 방글라데시는 테러에 나라 망신까지 콤보로 뒤집어쓰고 한동안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후 방글라데시에선 국가 주도로 추도식을 벌이고 각 관광객들이 속한 나라의 총리들도 와서 대거 참석하는 등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2017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이 사건을 판결한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의문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 꽁초가 발견돼 북한의 보복성 암살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8.4. 국제 사회

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여러 나라가 단교했으며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필리핀, 도미니카, 프랑스, 네덜란드, 서독, 오만, 아랍에미리트 등 서유럽과 중동, 동아시아, 아메리카의 10여개 국가가 북한을 향후 절대로 수교할 수 없는 나라로 선포하면서 북한의 대서방 외교는 치명타를 입었다.[56] 일본 역시 독자적 대북제재를 추진하였다.

한편, 2014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군부에선 "북한에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분노했다. 일명 벌초 작전으로, 평양에 특수부대가 상륙하여 김일성을 사살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이를 막고 무력사태로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제3세계의 남북한 외교전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북한의 패배로 끝났다는 주장은 섣부른 것이다. 소련이 1983년 9월 2일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느라 북한의 편을 들었으며 중국도 애매한 중립론을 내세우면서 북한을 두둔했던 만큼 동구권과 소련의 눈치를 보던 제3세계 국가들은 북한 비난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방 중시 외교는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먼저 시도해 봤다가 역으로 서방의 인권 공격을 당하면서 곤경에 빠지는 것을 본 데다[57][58] 김일성이 1960~1970년대에 서방 차관을 마구잡이로 들여놨다가 배째라를 시전하면서 이미 파탄난 데다 한때 남북한이 모두 환장했던 유엔 외교도 1970년대 중반에 남북한 지지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면서 헛짓거리로 판명난 상황이라서 흥미가 떨어졌다.

오히려 소련은 아웅 산 테러 이후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23년 만에 초청하였고 김일성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련 장교 노비첸코를 만나는 쇼까지 벌이면서 우호적인 북소관계를 과시했다. 1980년대에 북한과 동유럽, 소련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어 북한은 재일교포 자본을 털어서 기반한 역량을 바탕으로 상당한 양의 대소 경공업 수출을 달성하게 되었다.

중국도 북소 밀월에 긴장하여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달리 후야오방 총서기가 청진항을 방문하는 등 북한에 여러 당근을 제시하였고 북중 경협도 진전되었다. 즉, 미국처럼 북한도 대응 가능한 리스크로 넣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교적으로 소련과 중국이 나설 수 밖에 없어서 북한이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물론 이미 악명이 존재했기 때문에 "북한이 북한했네"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이러한 도를 넘은 막장 행위는 분명히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차관 먹튀에 이어 "타국 영토에서의 대한민국 수뇌부 폭탄 테러 기도"까지 할 정도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국가로 인식되어 제3세계 국가들이 북한과의 외교를 신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이 믿을 수 없는 국가로 확실히 낙인되어 북한의 외교적 고립, 특히 냉전 이후의 고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앞서 말했듯 60여 국가가 북한과의 수교를 줄이거나 끊었고 3개국은 아예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렸다.

9. 만약 전두환의 암살이 성공했다면

전두환 ( 1931년 1월 18일 ~ 1983년 10월 9일, 향년 52세)

전두환은 집권의 정통성, 적법성 논란 등은 둘째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명한 대통령이자[59] 유일하게 50대에 사망한 대통령이 된다.[60] 물론 이것도 이후에 대통령이 실제 역사와 같다는 가정 하에서 나온 것이다. 전두환이 1983년에 사망하면서 그로 인한 나비 효과로 인해 이후의 대통령이 실제 역사와는 크게 바뀌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1979년 대통령이 측근한테 암살당해 사망했는데 불과 4년 만에 대통령이 또 다시 임기 도중에 사망한 국가가 된다.

9.1. 개전 가능성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와 수뇌부가 전부 사망하여 지도부에 공백이 생겼을 경우 일시적으로나마 한국 내부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이러한 틈을 타 북한이 국지전 이상에 준하는 도발적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당초 이를 노리고 저지른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북한이 실질적으로 국지전을 넘어 제대로 된 전쟁을 벌였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에 행해진 대남 도발인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미군의 강한 보복 의지를 목도한[61] 김일성이 사과의 뜻을 전하고 굴욕적으로 물러선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국의 행정수반을 테러로 모조리 날리고 시작하는 전쟁은 전쟁을 벌이는 정당한 명분 자체가 싹 사라지기 때문에 6.25 전쟁처럼 거의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기 충분하고 중국과 소련조차도 북한을 다시 지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6.25 전쟁 때는 전력이라도 북한군이 확실한 우세였지 이 때는 대한민국 국군이 현대화된 전력을 갖추기 시작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데다 남한도 북한보단 못해도 군사 비중이 높았던 병영국가였기 때문에 남북이 1:1로 전면전을 해도 북한군이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남침으로 인한 적화통일은 망상에 가까웠다. 게다가 후술하듯 2인자 자리를 노태우가 단단히 굳힌 상황이라 노태우가 뒤를 이어받아 재빠르게 혼란을 수습해서 역공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더해 군사지식이 전무한 이승만에 비해 노태우는 전역한 사관학교 출신 전쟁 전문가[62]에 하나회를 통해 군을 꽉 쥐고 있었던 상황이니...[63]

국방부가 21세기에도 미군 없이는 북한군에 진다고 앓는 소리를 해대긴 하고 병영부조리나 비리, 평소에 보이는 국방부의 멍청한 모습들 때문에 민간에서도 북한에게 질 거라고 설레발을 치는 모습 때문에 의아할 수 있지만 한국과 북한의 기본적인 무장수준 및 질적 차이는 국방부의 삽질로도 실드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차이가 워낙 심한 데다 동원령이 끝난 예비군까지 합친 수치는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우위다.[64]

정말 테러가 성공적이어서 전두환까지 폭사했다고 해도 김일성이 마냥 기뻐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이 이 때보다 젊었을 때도 박정희를 죽이려 든 적은 있었지만 이후에 표면적, 간접적으로나마 사과를 하는 등 비교적 신중한 모습을 보였으며 스케일이 정도 이상을 넘는 대남 도발이라면 김정일을 만류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파 숙청과 주체사상 제창 등 북한 체제를 완전히 쥔 김일성 입장에서는 권력의 안정과 말년의 편안함을 원하기 때문에 아들의 무리수를 타이르거나 뒷수습하는 것에 짜증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전술한 황장엽의 증언만 봐도 김일성이 김정일식의 도발에 대립했다는 걸 알 수 있다.

9.2. 이른 민주화 가능성

만약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죽었으면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더 일찍 이루어졌을 것이란 의견이 일부 있지만 당시에는 5공 헌법이 존속하고 있었고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다. 따라서 민주화를 위해서는 우선 헌법부터 직선제로 개정해야 하는데 당시 여당이 개헌을 좌시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 말미에는 석유 파동과 더불어 경제성장률의 하락, 미국과의 갈등, 부마민주항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했는데도 결국 내부의 인사가 정권을 차지했다. 당시 하나회 신군부의 위상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전두환 본인부터가 박정희 갑작스러운 유고 인한 혼란상[65] 틈타 집권했다. 이런 10.26 사태보다 더한 대규모 혼란에 군부가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새로운 독재자를 세워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거나 군부의 권력이 공고화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역으로 이 일이 터졌기 때문에 '저 북괴놈들 한 짓을 봐라' 하고 전두환을 능가하는 독재자가 등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66]

구체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의 집권 과정처럼 현직 국무총리였던 김상협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이후 제10대 대통령 선거의 예처럼 당시 헌법 규정에 의거 3개월 이내에 대통령 선거인단을 구성해 후임자를 선출했을 것이다. 거기다 노태우의 존재도 간과하기 어려운데 노태우는 당시 명실상부한 2인자이자 12.12 군사반란에 같이 참여한 '후계자'의 자리가 공고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전두환이 사망했다고 한들 하나회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금방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앉혔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경우 장제스 사후 옌자간을 거쳐 권력을 승계받은 장징궈의 집권 과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결국 유신헌법을 계승한 5공 당시에 완전한 문민 대통령이 당선될 리가 만무한 만큼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과 같은 민주화 움직임이 다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반공연맹,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 우익/호국보훈 단체에서 좌경/친북화나 월남 패망과 같은 적화통일이 우려된다며 집회 등 실력행사에 나섰을 수 있으며 군부 유력 인사, 그 중에서도 강경 군부 인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또다른 독재자가 등극했을지언정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민주화가 더욱 뒤처졌을 가능성도 높다.

설령 민주화가 일찍 되었다고 해도 김영삼 등의 예처럼 6.25 전쟁 참전/경험자가 아직도 존재하던 터라 전 정권처럼 반공/친미 노선을 고수할 가능성이 높으며 당시 민주화 운동권 중 급진 세력이 주장하던 반미 사회주의/민중민주주의까지 용인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 사건에 희생된 전두환은 반공 분위기에 따라 사건 직후 추모 열기가 강했을 것이며 심지어 북한과 맞서 외교전을 펼치다가 죽은 순국자로 영웅화(!)되었을 가능성까지 있다. 이 경우 하나회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대량학살, 삼청교육대전두환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 자체를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67] 오히려 자국민 부하에게 암살당했던 박정희 이상으로 북한의 테러로 살해당한 전두환이 보수 세력과 기독교 우파 세력[68] 완산 전씨 종친이기도 한 사이비 목사가 대한민국에서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것을 생각해 보자.]으로부터 더욱더 우상화 신격화[69]이승만광장이라 칭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을 대놓고 숭배하는 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개신교 신자랍시고 십계명 중 1, 2계명을 대놓고 어기고 있다.] 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점은 전두환이 이 때 죽었으면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에 묻혔을 것이다.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사망했다고 가정한 이 세계에서 1997년 대법원 판결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하는 일은 당연히 없기 때문이며, 2021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언행으로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도 당연히 없다. 2024년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실제 역사에서는 전두환이 죽은 지 단 [age(2021-11-23)]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극우 인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두환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를 비판하는 영화가 흥행할 정도인데 이 세계에서는 전두환이 죽은 지 [age(1983-10-09)]년이 된다. 이 정도 기간이면 현재 젊은 세대한테는 전두환이 1979년에 죽은 박정희처럼 완전 옛날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며 북한과 맞서 싸우다가 죽은 순국자로 영웅화되어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는 훨씬 덜 했을 것이다.

10.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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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파일:attachment/burma07.png
1984년판 보도사진연감에 실린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로 희생당한 정부 수행원들의 영결식
여의도광장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행했다.

수행원 영결식 및 관련 소식들을 정리한 당시의 대한뉴스 영상이 있다.

사건 당시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도중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뉴스를 전했다.

이 테러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용한 그야말로 21세기 현재 기준으로 봐도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매우 유능하고 대단한 수준의 초특급 정부 핵심 참모+행정가들이었다.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법학,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등에서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다.

법학계에서는 이 사건에서 함태영 부통령의 아들이기도 한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순직한 것을 아깝게 여긴다. 그의 아들 함재봉은 2005년까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미국 대학으로 옮겼다. 이 때문인지 함병춘 비서실장은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서 이 사건의 순국자들을 언급할 때 유일하게 생애, 업적 등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함병춘의 사망은 한국법사회학의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평을 받았다. 함병춘은 한국 법철학과 법사상사, 법제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쳐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법학도라면, 특히 연세대학교 법학과 학생은 법철학과 법제사 등의 과목을 수강할 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확립한 체계를 배우게 되는데 법사회학 쪽에선 민법 곽윤직 교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경제계 쪽은 서석준 경제부총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당시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주요 인사들과 경제통들이 한꺼번에 가 버리는 바람에 이후 한국 경제가 기울었다는 관측이 있다. 특히 김재익 경제수석은 전두환 정부의 가장 뛰어난 경제정책통이자 사실상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던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초빙하면서 "나는 군인이라 경제는 모른다"고 털어놓았고 국가의 경제 정책을 책임져 줄 것과 더불어 자신을 경제학 기초부터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전했다. 물론 서석준이나 김재익이 추구했던 경제 발전 방식은 그 시점에 이미 한계였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행정학 및 정치학 측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외교, 안보의 핵심인 이범석 외무부 장관을 높이 치는데 이범석 장관은 소련, 중국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 북방정책'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이는 후임 노태우 정부에서 결실을 이루었다. 이기욱, 하동선 등 여러모로 후세의 비판을 받는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이 경제만은 제대로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인 핵심 행정역량들도 높이 평가된다. 이후 그나마 행정의 명수라고 평가할 만한 사람은 고건 정도였다.

대한민국의 저명한 원자력 관련 박사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 정근모는 김재익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본인의 상하이 출장, 김재익의 미얀마 출장을 앞둔 밤에 미뤄 두었던 전도를 하고자 했다. 참고로 김재익은 천주교 신자이고, 그의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은 성심수녀회 소속의 수녀다.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김 수녀님'이 바로 김재순 수녀다.[70]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였다.

그러나 나랏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김재익의 언사들에 틈을 낚아채지 못해 전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각자의 출장길에 올랐다.

역시 이 사건의 희생자인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은 바로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이다. 사건 발생 직전의 사진을 보면 표정이 굳어 있는데 심현섭이 훗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날따라 말수도 적고 표정도 어두웠다고 한다. 평소 심상우 의원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서 등의 아래 사람들에게까지도 항상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대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쾌활한 성격이었음을 고려하면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을 했던 것 같다. 심현섭이 2002년 보수정당의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한 이래 2012년 대선 때까지 줄곧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행보를 꾸준히 이어간 근본적인 동기로 이 사건이 꼽혔다.

아웅 산 테러로 사라진 인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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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다. 군인 정복이라 다른 인사들의 일반 정장과는 달리 금속제의 각종 휘장, 약장 등이 붙어 있었는데 바로 이것들이 방탄복 역할을 해 주어서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을 구한 사람이 전 육군 장성 전인범 중장이다. 당시 합참의장의 전속부관으로 중위 계급이었던 그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폭발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을 구했다.[71] 폭발 직후 잔해더미를 헤치고 올라가 "의장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는 정복 군인이 전인범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받았다. 동아일보 기사

폭탄 테러에 대해 전인범은 회고를 통해 "두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이 사건의 교훈으로 군인의 두발은 되도록 짧은 것이 좋다는 확신[72]을 가졌고 훗날 27사단장이 된 후 부대원들에게 모히칸 스타일의 두발을 하도록 (일명 이기자컷) 규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기백이 사건 당시 착용했던 정복으로, 이기백은 귀국 즉시 이 정복을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면 전시되어 있는데 확인해 보고 싶으면 육사를 방문하거나 국방TV에서 이기백 장군이 기증한 정복을 다룬 영상에서 볼 수 있다.[73]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이 사건의 순국자 중 유일한 언론인인데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취재하러 일본 홋카이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전두환의 해외순방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같이 파견된 정치부 기자 최규철은 살아남았지만 오른쪽 팔목 및 머리에 파편을 맞았고 손에도 화상을 입어 국립의료원에서 파편제거 수술 및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 기자는 출국 전 국가원수의 순방 취재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 보겠다며 카메라 렌즈 등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등 신문 사진 풀기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 안타깝게도 버마에서 찍은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카메라가 훼손되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 단, 취재하러 가기 전 호텔 로비에서 찍은 사진 연합뉴스 사진판매 코너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 기자 본인이 아닌 당시 함께 신문 사진 풀기자로 파견되었던 연합통신 최금영 사진기자가 촬영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에 나온 참사 직전 흑백사진을 찍은 인물이다. 최 기자는 공교롭게도 테러 20주기가 되던 날 숙환으로 사망했는데 생전에 테러 당일 이 기자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그때 나와 자리가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에 목이 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 동아일보 측에선 1980년 권동현 기자가 순직한 지 3년 만에 또 일어난 비보로 슬픔에 빠졌으며 사후 그는 부장대우로 추서되어 11월 1일 장덕준[74], 백광남[75] 등 나머지 순직기자 4명과 함께 영정봉안식이 거행됐다.

참고로 이 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 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발족한 재단이 그 유명한 일해재단인데 결국 전두환의 장기 집권 음모에 이용되었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전두환은 이와 같은 공격적인 수금을 통해 평생 집권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1988년 전두환 퇴임 전날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제정되면서 그의 평생집권 기도 자체가 드러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새세대 육영회, 새마음심장재단,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함께 5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다. 1988년에 '세종연구소'로 바뀌어 전형적인 국가정책연구기관으로 잔존 중이다.

당시 유족들과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테러 당시 촬영된 장면이 테러 직후에는 방영되지 않았다가 1년 뒤 9시 뉴스에서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연하지만 잔인한 장면은 최대한 편집해서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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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 때부터의 관례로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나서면 체신부 우정국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연히 해외 순방이 지속될 리가 없었으므로 해당 우표는 회수 후 폐기 처분하였다. 덕분에 아직도 액면가 이하로도 거래되는 순방 기념 우표가 많지만 이 우표는 희귀 아이템이 되어 가격대가 꽤 높은 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우표 이야기

테러 1주기인 1984년 10월 9일 파주시 임진각 관광단지에 버마 아웅 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을 건립했다. 높이 17m 탑신, 계단 등 각 17개는 희생된 17명의 위령을 상징하며 중앙 1개 지주에는 대통령이 쓴 탑명이 조각되어 있고 4개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탑 정면에 마련한 "구원의 불꽃" 대는 순국자들의 명복 영생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의선 임진강역에서 하차 후에 관광단지 쪽으로 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순직자 전원은 국가사회발전 특별유공자로 지정되었으나 한동안 역대 정부들이 테러가 북한 소행임을 명확히 하지 못해 순직자에 대한 성격이 확립되지 않아 유족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모식을 열었다. 2013년 외교통상부 주관으로 격상되었지만 대통령 화환이 없고 보훈 주무부처가 아닌지라 문제가 있었으며 2023년 40주기 가서야 비로소 국가보훈부가 추모식을 주관했다. #

위령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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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어 화제가 되었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월 9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방문 및 참배하여 아웅 산 테러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특히 반기문의 참배는 외교관 시절 은인이었던 이범석 외무부 장관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범석 장관이 반기문을 전격 발탁한 일화는 외교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반기문이 주 인도 대사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탁월한 업무 처리 능력과 겸손함, 총명함을 눈여겨 보던 이범석 당시 외무장관이 3급 부이사관급이던 외무장관 보좌관으로 그를 전격 발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반기문은 외교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테러 당시 반기문은 외교부의 지원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아웅 산 테러 소식을 전해 듣고 그 날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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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1983년 10월 11일)의 신문에 보도된 TV방송 편성표
KBS MBC편성표가 통째로 삭제되어 있다.[76]

애도 기간(1983년 10월 9일~13일)에는 추모의 뜻으로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뉴스만 방영하였다. 이전의 육영수 저격 사건이나 10·26 사건 직후에도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추모 방송 위주로 편성되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특집 드라마나 특선 영화로 조금씩 채웠고 편성표를 통째로 들어내지는 않았다. 뉴스를 제외한 전 방송이 올스톱되었고 광고 방송도 하지 않았다. 당시 유보된 광고 수익은 KBS가 10억 원이고 MBC가 13억 원으로 합쳐서 23억 원이었다.

당연히 장례식은 생중계되었다. MBC TV, KBS 1TV뿐만 아니라 2TV에서 동시 방송되었고 라디오는 KBS 제1라디오, 제2라디오, MBC 라디오에서 생중계됐다. 이러한 방침은 자율적인 건 아니고 문화공보부의 지시 결과였다.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KBS 3TV, AFKN도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KBS 3TV와 교육라디오는 정규방송을 내보내되 다큐멘터리 시간에는 진혼곡을 방송했다. 당시 방송사 ID(방송사 고지)의 배경화면도 애도 문구와 구슬픈 분위기의 음악이 삽입되었다.

MBC 청룡 같은 해에 열린 한국시리즈에도 여파가 미쳤는데 국가적 애도 기간에 야구단 버스가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좋지 않다는 이웅희 당시 MBC 사장의 지시에 따라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시리즈가 밀린 기간 동안 보너스 문제로 내부 갈등마저 커진 결과 MBC 청룡은 상대 팀이던 해태 타이거즈에게 단 1승도 하지 못한 채 패하고 말았다.

상술된 신문 기사처럼 원래 클래식이 나오는 KBS 1FM을 비롯하여 대중음악 채널인 KBS 2FM MBC FM도 장송곡과 진혼곡 등의 클래식이 방송되었다.

대구 MBC에는 이 사건과 악연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사건이 터진 다음날인 1983년 10월 10일이 음악 FM 개국일이었기 때문이다. 음악FM 개국을 하긴 했는데 추모 분위기상 당연히 축하한다며 잔칫집처럼 들썩일 수 없어 장송곡만 틀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과 바로 한 달 전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소재로 국민학생들의 글을 모은 책이 출판되었다. 북한과 소련 등 공산권에 대한 분노와 규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레이건 할아버지와 낸시 할머니에게 공산권을 혼내 달라거나 사건 처리를 감사한다는 편지 등이 수록되었는데 출판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당연히 반공 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전두환 대통령 및 미국에 대한 낯간지러운 찬양이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 사건의 희생자인 이기욱 재무부차관의 딸(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 쓴 유가족으로서의 슬픔과 비통함을 담아낸 글이 수록되기도 했다.

1984년 대학입시에서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지원하는 고득점을 기록한 수험생들이 대폭 증가하여 합격선이 많이 올라갔다. 아웅 산 사건 이후 희생자들의 출신 대학이 뉴스에 소개되었는데 김재익, 김동휘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서석준이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던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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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1983년 테러의 현장이었던 아웅 산 묘소를 방문하였는데 1983년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얀마에 도착한 후에야 이를 대외에 공개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묘소의 모습이 1983년 당시와는 많이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 당시의 테러로 인해 목조 건물은 파괴된 데다 유사 테러에 취약한 점을 감안하여 미얀마 측에서 아예 시멘트로 만든 육중한 기념탑으로 새로 바꿨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콘크리트로 복구한 아웅 산 묘소는 보안을 문제로 외부인의 출입과 촬영이 통제되었으나 다시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되었고 이 방문을 계기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를 2014년에 건립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 2019년 9월 4일에는 미얀마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으로 추모비를 참배하였다. 언론 기사

교학사 한국사 교과용도서 뉴라이트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사건이 실린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교학사의 것이 유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이 2007 개정 교육과정 당시 상당수의 교과서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와서 없어진 것은 교육 과정 각론에서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기록해도 무방하지만 기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각론에 있는 내용이 서술되지 않을 경우 그 교과서는 검정 승인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출판되지 못한다.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역사 교과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성취 기준과 학습 요소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교과서에 해당 내용을 넣는 것은 각 교과서 집필진과 출판사의 재량에 속한다.

당시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사회과 - 일반과목 - 한국사 - 영역 및 학습 내용 성취 기준에 따르면 "(마) 북한사회의 변화와 오늘날의 실상을 살펴보고, 남북한 사이에서 전개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파악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사회과 성취 기준과 학습 요소를 보면 해당 연대의 성취 기준 해설에서는 (9역09-03) "양자를 서로 갈등 또는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보다 함께 진행되어 온 것임을 이해하도록 하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국가 사회적 과제를 파악하도록 한다"고 규정해 놨으며 학습요소에는 4.19 혁명,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회 양극화가 제시되어 있다.

2014년 4월에 임명되었던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은 이 사건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인데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대통령 순방에 따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가자마자 죽을 뻔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현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가봉에서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고영환의 임무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육로로 우회해서 가봉으로 가는데 자신의 외교관 신분과 공작금(뇌물)을 이용해서 나머지 팀원들의 여권에 여권 도장을 안 찍히게 하는 것이었다. 공작원 2명(아웅 산 테러 사건에 투입된 공작원 신기철과 강민철)과 고영환 포함 총 5명+팀장, 공작원 2명, 운전기사, 외교관)과 15일 간 동행하였는데 실행 전날에 작전 취소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이 작전을 주도했는데 실행하기 전날 김일성에게 계획을 보고하니 김일성이 "25년간 아프리카 외교에 힘써왔는데, 이 일로 아프리카 52개국 전원이 북한에게 등 돌리면 엄청난 손해이니 아프리카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서 김정일이 취소 명령을 내렸다. 당시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고 남수단 수단의 영토였으며 에리트레아 역시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

팀장은 "작전 후 가봉 앞바다 수 ㎞ 떨어진 곳에 공작선이 있으니 그곳으로 도망가라"고 했는데 고영환은 수영을 25~50m 밖에 못 했다. 고영환은 특수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순수한 외교관이었고 갑작스럽게 현지에서 발탁되었다. 게다가 동행 중 우연히 공작원 장비를 보니까 스쿠버 장비가 2명분 밖에 없었는데 아웅 산 사건과 같이 당연히 버려질 예정이었다. 고영환은 나중에 아웅 산 사건 소식을 듣고 취소 명령을 내려준 김일성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34년 후에는 그 다음 대의 김정은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근처의 또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또 비슷한 짓을 벌여 국제적으로 엄청 욕을 먹고 해당 국가와 2021년에 단교까지 갈 정도로 관계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차이점이라면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와는 달리 남한 고위 정치인을 노린 게 아니라 (즉, 대'남' 도발이 아니고) 김정은에게 잠재적 위협이 되는 같은 북한 사람인 이복 형을 제거했다는 점, 그리고 자국 공작원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이용해서 차도살인의 형태로 암살했고 암살 도구로 VX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마 이 사건이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 자국 공작원이 직접 체포되어 모든 게 탄로나 국제적으로 코너에 몰렸던 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몇몇 종북주의자들은 전두환이 천운으로 살아난 것을 빌미로 이 사건이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당연히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음모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도 더 적다. 사실 전두환의 자작극이라는 게 말도 안 되는 게 어떤 지도자가 자신의 암살 미수 자작극만을 위해 국가 발전에 필요한 최상급 인재들을 몰살해 버리는 팀킬 행위를 구상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축출하고 싶었던 인물이 있다면 이런 일까지 벌일 필요도 없고 애기 손목 비틀기보다 쉽게 경질할 수 있었으며, 애당초 전두환 입장에서 아웅산 테러로 잃은 요인들은 정권 안정에도 필요하고 신임하던 인물이 다수였다. 즉, 이 사건에서 얻을 이득이 전혀 없다. 북한하고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나 자작극 가능성을 제시해 볼 최소한의 인과관계 정도가 발생하겠지만 이후 결과를 보면 전쟁 상황조차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런 목적으로 저질러도 국내 혼란을 가중시킬 게 뻔한데 요인들을 죄다 죽이고 심지어 합참의장까지 죽을 뻔 할 정도의 상황을 만든다는 것도 언어도단이다. 말 그대로 자작극설은 제시할 논리조차 민망할 헛소리다.

2021년 7월 8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이 사건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2023년에 당시 테러범 중 김진수의 검거에 기여한 미얀마인에게 감사장이 전달됐다. #

12. 관련 자료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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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
22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2014년 12월 1일
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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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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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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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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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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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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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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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
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 ||

[1] 피해자 24명 중 한국 측 17명과 미얀마 측 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미얀마 측 군경 3명이 검거 작전 중 순직했다. [2] 범인 3명 중 1명은 체포 작전 중 사살당했으며, 1명은 미얀마 당국에 의해 사형 당했고, 나머지 1명인 강민철은 무기수로 복역 중 2008년에 옥사했다. [3] 미얀마. [4] 사진 속 대통령 전용기는 대한항공 소속의 보잉 747SP (HL7457) 모델이다. [5]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6] 허화평, 허문도, 허삼수 [7] 이범석이 개새끼라는 표현까지 쓴 걸로 봐서 이범석이 비서실장을 하던 시절에 비서실보좌관과 정무수석을 지냈던 허화평으로 추정하는 시선이 꽤 있다. 당시 허화평은 대통령 집무실 바로 맞은편에 자기 사무실을 차려 놓는 등 대놓고 월권을 행사해서 다른 이들이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 [8] 출발 당시 특집 방송들을 보면 비가 내리던 궂은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으며 당시 양곤 국제공항의 활주로가 짧아서 기존 전용기 대신 다른 비행기를 임대해 개조했다고 한다. [9] 대표적으로 1981년 아세안 5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및 필리핀) 순방과 1982년 아프리카 5개국 (자이르,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 캐나다 순방 등 취임 2년 동안 12개 국가를 방문했다. [10]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이며 당시 심현섭은 13살이었다. 당시 당 총재는 전두환이었다. [11] 시험 삼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가 우연찮게 테러 직전의 장면을 흑백 사진으로 찍었다. 테러로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다. 이 사진으로 1983년 한국기자협회 특종상과 한국신문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2] 이 때 사용했던 최금영 기자의 카메라는 연합뉴스 사옥 1층에 전시되어 있다. 기종은 니콘 F3. [13]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이재관 공보비서관. [14] 당일 아침에 영빈관에서 대통령에게 언론 관련 보고를 하고 나서려는 찰나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붙잡았고 늦게 나온 그가 타야 할 차는 이미 누가 타고 가버린 뒤였다고 한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묘소로 향하는 와중에 멀리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15]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이었다. 당시 총재는 전두환이었다. [1942~2016] [17] 10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전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8] 여담으로 서석준 부총리의 외동딸인 서이영은 12년 뒤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 3대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영의 막내아들이다. [20] 사건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만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4일만에 숨지고 말았다. [21] 전 호남전기 및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명예회장.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22] 이 사건으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이다. 1949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실향민으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나왔으며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거쳐, 1973년에 동아일보로 이직했다. 1968년 제16회 국전 사진전 입선을 비롯해 한국국제 사진살롱 등 각종 보도사진전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1970~1980년대 초까지 걸작급 보도사진들을 남긴 거장이기도 하며 대표적으로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의 참상을 다룬 <11월 11일의 일기>, 1978년 동아일보 컬러사진 1호 <하늘을 보다> 등을 남겼고 1983년에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항목에 실린 '33년만에 만난 오누이의 절규' 사진을 찍었다.( 상세 정보) [23]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김진수 소좌는 당시 부상이 매우 심각해 고통을 줄여 주려던 인도적 차원에 맞춰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24]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인 1887년에 지어졌다. 군부 독재 시절 수천 명의 정치범을 수용했고 열악한 환경과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별칭이 '지옥의 형무소'다. [25] 이는 1.21 사태를 비롯하여 1960년대에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잠입할 때마다 북한에서 상투적으로 내세운 핑계이다. '자신들이 보낸 간첩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이 파쑈 도당에 반대해서 궐기한 것'이라고 책임도 회피하고 동시에 남한 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구실로 삼은 것이다. 베트남 전쟁 때도 비슷하게 돌아갔다. [26]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라종일 교수에 의하면 그냥 외무장관의 무례에 열받아서 2층으로 올라간 것이고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심술이 나 일부러 안 내려오고 2분 간 늦장 피운 거라고 한다. [27] <전두환 회고록>에 따른 오피셜 기록 [28] 라종일 교수의 <아웅 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117쪽. 당시 경호원의 말에 따르면 미얀마의 나팔이 손상이 심해서 경호처장이 나팔이 되는 건지 시범 연주를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2021년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전인범 장군과 MBC 카메라기자였던 이재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사건 현장에서 진혼곡은 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팔수의 실수는 더더욱 아니었고 대통령이 오기 전 기기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나팔수는 나팔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테스트 삼아 불어 본 것이라고 증언했다. [29] <대통령 비서실장론> 함성득, 151쪽 [30] 다른 전향한 간첩들의 수기를 봐도 자기는 최선을 다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장비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의 변명이 종종 나온다. [31] 원래는 테러 사건 전날 저녁에 묘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32] 참고로 최근 들어 화장 없이 엠버밍 과정을 통해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해 매장된 사람으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있다. 이전에는 미국 호놀룰루에서 서거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국 상하이에서 사망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사례가 있다. [33] 대표적으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임기 중 사망하여 이 방법으로 운구되었다. 엠버밍이 가능한 인사였지만 소박한 생활을 하는 본인 성품에 따라 화장으로 결정된 듯 하다. [34] 40년 후 전 개그맨 서세원 캄보디아에서 사망했을 때 현지에서 화장한 후에 한국까지 비행기로 운구하였다. 캄보디아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냉동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40년 전 버마에서도 가능했던 냉동보관 및 엠버밍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서 씨가 현지에서 사업을 실패해 형편이 나빴다지만 서정희, 서동주 등 한국의 유족과 방송가 동료들이 십시일반 모아 운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화장 결정은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이후 디스패치, MBC 실화탐사대, 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 여러 언론이 서 씨의 프로포폴 무단 투약 의혹과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 센 총리 일가와의 유착 의혹을 제기하자 "서 씨의 화장은 그의 시신이 한국에서 부검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결정"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35] 부대장인 강창수 소장은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총참마장으로 안동에서 사살된 강건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공산당 엘리트 코스인 만경당학원과 김일성대학을 나와서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한다. [36] '동건 애국호'라는 말도 있음. 재일동포 '문동건'이 북한에 기증한 화물선이며 1982년 8월 22일 가봉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암살 작전에도 이 배가 쓰였다. 다만 가봉 대통령궁에서 폭탄을 터트릴 미친 계획이라 뒷수습이 안 될 것 같아 하루 전날 작전이 취소되었다. 이 때 작전에 협조했다가 탈북한 3등 서기관이 고영환이며 당시 가봉까지 침투한 북한 공작원 2명 중 한명이 아웅 산 사건 이후 체포된 공작원이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37] 소이탄은 불발하여 버마 측이 회수해 갔다. 북한의 특수공작 때 이용한 장비들은 어째 정상 작동을 안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38] 출처: 유중원, 〈외톨이 테러리스트〉 [39] 전두환을 시해하려한 남한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북한과의 외교에 있어서 섣부른 단정을 안 하기 위한 생각이었던 듯 하다. [40] 처음에는 불교로 개종했지만 영치금을 지원해 주는 동료 죄수를 따라 기독교로 또 개종했다는 말도 있다. 기불릭? [41] 교도관 우 세인 테이의 회고록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부터라고도 한다. [42] 그와 비슷한 김현희의 회고록 등 [43] 아웅 산 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 [44] 크리스탈 송신기로 3S2S 0.9인치였다. 가용 거리는 50마일이고 원격조정용 고성능 단추가 달렸다. [45] 트랜지스터 콘덴서 자석 코일로 구성되어 있고 배터리는 1.5VC였다. [46] 폭발물 설치 장소로부터 반경 2㎞ 안에서 조종이 가능한 것이었다. 원격조정장치에 사용된 배터리는 최장 3개월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 일본 히다치 제품이었다. [47] 중량 5㎏의 불발탄. 감식 결과 폭발 시 80m 이내의 인명을 모두 살상할 수 있는 고성능 폭탄이었다. [48] 직경 10㎝에 길이 30㎝ 가량의 원통형이었다. [49] 그러나 국민들이 그렇게 나왔을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당시 국민들의 대다수가 6.25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해 본 민간인들이 또 전쟁을 하자고 나서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도 개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50] 한홍구 등 진보 성향 역사학자들이나 진보 인사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전두환 정권의 결정이 옳았다고 인정했다. [51]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6. [52]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7~229. [53] 그렇지 않더라도 북한이 미얀마에 외교적으로 암수를 쓸 여지는 있었다. 이면교섭으로라도 붙잡힌 테러범들을 구출한다던지…정작 북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54]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단순한 건국 공로자의 위치를 넘어서 국부 이상의 신성불가침 수준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다른 나라로 따지자면 베트남의 호찌민, 인도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샤 마수드,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정도의 위치를 가진 위인이다. 게다가 아웅 산 본인도 테러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에 당시 미얀마인들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55]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이 정부 수립 이후 일본과 수교할 때까지 17년(1948~1965) 걸렸고, 독립 이후 프랑스가 보복 차원으로 인력 철수와 인프라 파괴 등 온갖 방해 공작들을 저질러 극심한 피해를 입은 기니가 프랑스와 수교를 끊은 기간이 10년(1965~1975)이었으니 아웅 산 묘소 테러가 미얀마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유발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56] 물론 오만은 나중에 이를 번복하고 1992년 북한과 수교했으며 호주는 노동당 내각 시절에 북한과 이미 수교했기 때문에 21세기 들어서 남북정상회담으로 북괴의 이미지가 좀 유해지면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독일도 북한과 수교했다. [57] 이 때문에 차우셰스쿠는 말년에 다시 친소, 친동구권 외교로 선회했고 1981년 폴란드 사태 당시 소련의 무력개입을 주장하는 등 강경파로 선회했으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자신의 정권의 보험으로 써먹으려고 한 정황도 있다. 물론 조약 기구가 붕괴되면서 실패했지만. [58] 참고로 북한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및 호주와 수교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호주 측이 북한의 교화소 상황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개입하려고 했고 선전용 교도소를 보여주면서 유들유들하게 대처한 중국과 달리 북한은 내정간섭이라고 그야말로 발광했다. [59] 실제 역사에서 가장 단명한 대통령은 향년 61세로 사망한 박정희이다. [60] 전두환은 57세에 퇴임해서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연소로 퇴임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61] 한국은 대통령부터가 직접 미친 개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겠다며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노발대발 뛰었다. 이내 특전사 대대를 보내 북한군 초소에 직접 쳐들어가 북한군을 마구 두들겨 팼고 미국은 전술핵 투발이 가능한 폭격기와 원자력 항모전단을 한반도 인근으로 출동시켰다. [62] 그러나 노태우도 베트남 전쟁에 대대장으로 1년 참전한 것 외에는 실전 경험이 없다. 전군을 총지휘하는 것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일이다. 무엇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꼭 전쟁 전문가여야 할 필요도 없다. [63] 그러나 실제 노태우는 한 번도 하나회와 군을 꽉 쥐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 임기 내내 전두환의 직계인 하나회 '성골' 이종구 김진영, 그리고 한참 전에 전역했지만 여전히 군 내 영향력이 상당한 허화평 허삼수의 눈치도 봐야 했다. 심지어 민병돈은 대놓고 노태우를 들이 받은 적도 있다. [64] 때문에 똥별들이 아군을 죄다 맨땅에 들이박는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한국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도 국방부가 징징대는 이유는 약자 코스프레로 예산을 타내려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세계 군사력 1위인 미국도 예산 타내려고 이라크 상대로 질 거라고 징징댄 전적이 있었다. 이외에는 주한미군을 남기기 위한 대외적인 홍보일 가능성도 높다. 물론 북한의 상황이 워낙 현시창이라 지금은 싸우면 진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에 노선을 살짝 틀어 '육군은 우리만으로 커버할 수 있으나, 주한미군의 공군과 정찰자산이 필요하다'는 말로 선회하고 있다. [65] 당시 김재규를 체포했던 인물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66] 독재자들이 어떤 사건으로 위협을 겪으면 이를 명분으로 반대파 탄압을 강화하는 것은 역사상으로 흔한 일이다. 이승만 김일성도 6.25 전쟁을 정적 숙청, 국민 탄압에 이용했다. [67] 사실 악인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으면 그 악인의 악행들이 묻힌 채 비극적인 최후만 부각되며 미화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사치 문제나 민씨 일족들의 부정부패 조장으로 비판받는 명성황후 을미사변으로 일제에 의해 시해되면서 생전의 악행들이 모조리 가려지며 뮤지컬이나 드라마 등에서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비극적인 여인으로 미화되는 일이 잦으며,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고 불릴 정도의 잔악한 통치로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힌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최측근이었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쿠데타로 축출된 후 처형되어 악행들이 가려진 채 '조카에게 죽은 대통령'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나왔고 이라크 사담 후세인도 스스로 사형을 택하면서 이라크 국내에서 동정 여론이 일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때문에 자신들의 무수한 악행들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피해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오는 판이며, 벨기에 콩고 자유국에서의 레오폴드 2세의 학정이 가려진 이유 중 하나가 얼마 안 가 벨기에의 강간이 서양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26 사태로 피살당한 박정희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박정희 시대에 향수를 품은 노인 세대들이 박정희 뿐만 아니라 그의 딸까지도 떠받드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사도세자도 엄연한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아버지의 손에 죽은 비극적인 최후와 살인의 원인이 된 정신병 아버지가 조장했다는 것 때문에 대중적으로 살인마 이미지가 거의 없어졌다. [68] 전두환과 같은 [69] 전광훈과 그 패거 리들 광화문광장 [70] 함께 언급되는 '주 수녀님'은 중국인 주매분 수녀로, 초창기 성심여중고 교장이자 기업인 조안 리의 은사였다. [71] 상관의 사진을 촬영해야 했는데 마침 필름이 다 떨어져 새 필름을 가지러 주차장에 있던 차로 되돌아간 참에 폭탄이 터졌기에 아슬아슬하게 폭발에 직격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72] 다만 이는 전 장군 개인의 의견이고 이미 실전을 수없이 겪었음에도 규정으로 말단 이병에게조차 올백 정도의 헤어스타일을 허용하는 미군, 특히 21세기 들어 두발과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고 다니는 미국 특수부대원의 모습 등을 통해 반박되기도 한다. 물론 전 장군의 말도 맞는 측면은 있다. (미군에서 머리나 수염을 기르게 하는 건 일반 부대는 대민 작전에서의 신뢰 혹은 긍정적 평가를 얻기 위해서이고 특수부대는 작전지역 침투 시 위장을 위한 것이니까) 전투를 위해서라면 머리를 짧게 자르도록 한다. [73] 영상에 출연한 전인범 중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이기백 장군의 상태는 돌아가시지는 않겠지만 예후는 장담하지 못함 수준으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겨우 의식을 찾은 후 보좌하던 전인범과 몇 개의 문답을 나눴는데 첫 번째 질문으로 "대통령은 괜찮으시냐?", 두 번째 질문으로 "지금 몇 시인가?", 그렇게 진지한 두 문답 이후 나온 세 번째 질문이 " 너 밥은 먹었냐?" 였다고 한다. [74]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 중 한 명으로 훈춘 대학살 취재차 간도에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상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중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하. 대한민국 최초의 종군기자이자 순직기자로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다. [75] 1966년 월남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11월 28일 비둘기 부대를 취재하고 사이공으로 귀환하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사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76] 교육방송인 EBS의 전신인 KBS 3TV만 정규방송을 진행하였다. [77] 이들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78] 단, 김진수 북한군 소좌는 진모씨로 가명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