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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3:35:21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colbgcolor=#000><colcolor=#fff>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Станислав Петров | Stanislav Petrov
파일:GettyImages_50803740.0.jpg
본명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Stanislav Yevgrafovich Petrov
출생 1939년 9월 7일
소련 러시아 SFSR 블라디보스토크
사망 2017년 5월 19일 (향년 77세)
러시아 프랴지노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직업 군인
최종계급 중령
복무 1972년~1984년
가족 배우자
자녀 2명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47532f62-ff11-11e4-_909832j.jpg
현역 군인 시절의 사진

1. 개요2. 생애
2.1. 전 인류를 구해낸 위대한 판단2.2. 그 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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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 중령이자 방공군 장교. 우발적 핵전쟁이 발생할 뻔했던 1983년 9월 26일에 올바른 판단을 내려 상호확증파괴가 발동되는 대참사를 막은 인물이다.

2. 생애

1939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인 예브그라프는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제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바 있다. 그는 키예프 항공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1972년에 소련 방공군 장교로 임관한다.

2.1. 전 인류를 구해낸 위대한 판단

1983년, 그 당시 세계는 당장 핵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비판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아주 최악으로 치달았고 9월 1일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1] 또한 NATO는 1983년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골자로 하는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는데 대규모 군사훈련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대규모 핵공격을 기습적으로 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소련 정부는 생각했고, 소련은 그럴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며 맞대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듬해 2월에 사망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당시부터 지병으로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지휘체계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 소련 지도부의 신경은 더 날카로웠다. 게다가 서독 이탈리아에 배치된 미국의 퍼싱 II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은 소련 본토를 사정권 안에 넣고 있었고 당연히 소련 군부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3년 9월 26일 0시, 소련의 세르푸호프-15 위성 관제센터[2]에서 느닷없는 비상경보가 울렸다. US-K 오코 대탄도탄 조기경보 인공위성으로부터 " 미국 ICBM 1발을 소련으로 발사했다"는 경보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발사한 ICBM의 숫자는 5발로 늘어났고, 관제센터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소련의 모든 핵 미사일 사일로와 이동식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고, 당시 관제센터의 당직사령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졸지에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떠안게 되었다. 당시 크렘린과의 통신선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지구 최후의 날 기계가 아직 그에게 발사권한까지 주진 않았지만, 그가 스스로 판단한 끝에 발사명령을 내리거나 서기장에게 발사명령지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가 적국의 핵 미사일 발사여부를 감시하는 최신식 탐지용 인공위성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까지도 고려해보면, 반격에 관한 상세한 고찰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겨우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핵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상부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을 믿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전 인류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경보는 울리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는 핵전쟁개시 버튼이 깜박거렸다. 그러나 그는 '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모든 ICBM을 함께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가 잡아낸 것은 단지 5개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컴퓨터의 오류이거나 탐지용 인공위성의 판단오류일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핵전쟁 취소 코드를 입력한 다음,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컴퓨터의 오류인 듯합니다.(Кажется, это ошибка компьютера.)"
몇 시간 동안 긴장감에 감싸인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핵 미사일 발사 경보는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섬광으로 잘못 인식해서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내린 판단은 정말로 도박성이 짙은 것이었다. 일단 미사일 하나가 탐지된 상황에서, 소련 관제센터는, 관제소는 미사일 하나가 날아온다고 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경보가 오류인지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일이 다섯으로 늘어났고, 지상에 설치된 레이더는 지평선 너머까지 탐지할 수 없으니 미사일이 더 탐지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거기에 몇 개의 미사일만 감지됐다고 하더라도, 미사일 몇 발을 발사하면 나타나는 EMP 효과가 소련 측의 통신망 및 레이더망을 마비시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소위 ' 블랙 아웃' 작전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페트로프는 핵미사일 탐지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문제가 이미 몇 차례 제기된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약 핵 미사일이 실제로 발사돼서 중앙과의 교신이 두절된다고 해도 알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컴퓨터의 오류로 보고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으니 영웅으로 칭송받아야만 마땅했을 것 같지만, 이 사건 이후 페트로프는 오히려 한직으로 내쫓겼다. 1983년 당시는 아직 냉전이 도사리고 있던 시기인지라 핵무기 시스템이 여전히 중요했고, 이 중요 시스템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곧 국가존망과 직관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해당 사건을 숨기기 위해 이 사건을 1급 기밀로 지정하여 페트로프를 표면적으로나마 내쫓은 것이었고, 페트로프는 그 조건을 내걸고 자신의 지위를 바친 셈이다. 물론 페트로프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린 후에 발생했던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고, 어느 쪽으로든 페트로프의 잘못은 없었기에[3] 한직에서도 군인 월급은 꼬박꼬박 지급되었다.

2.2. 그 후

제대 후 모스크바 근방에서 군인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고 있던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건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후인 1998년이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1급기밀로 취급받던 사건이 1998년에 기밀해제돼 공개적으로 드러나면서 전 세계는 그를 칭송하고 감사했으며, 세계시민상과 유엔의 표창장, 2012년에는 드레스덴 상[4]이 수여되었다.

2004년에 모스크바 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1983년에 자신이 한 일이 영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직무상 내 일이었고, 나는 단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2017년 5월 19일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을 영웅시하지 않았던 생전의 행적처럼 조용히 가족들 곁에서 세상을 떠난 탓에 4개월 뒤에야 그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3. 기타


[1] 소련이 자국의 영공을 실수로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민항 여객기를 정찰기로 오인하여 격추한 사건 [2] 2001년에 화재로 인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오코 조기경보위성 4개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현재는 재복구해 러시아군 탄도탄 감시의 컨트롤 타워를 맡고 있다. [3] 사실 생각해보면 전 인류는 둘째 치고 자국을 구한 영웅이기도 하다. 페트로프의 도박이 실패했어도 소련은 미국한테 선빵을 맞았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소련의 공격은 선제공격을 받은 것에 대한 반격을 한 것이 되지만, 페트로프가 판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했거나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판단을 내렸다면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착각'했을 것이고, 그 착각을 통해 반격을 하겠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을 공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련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선제타격한 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아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소련이 미국에게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봤자 당연히 미국은 더 큰 보복을 할 것이고 이게 반복되면 핵전쟁이 된다. 핵전쟁까지 가지 않았다고 쳐도 소련은 핵무기 시스템의 오류로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이유로 서구권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배상하는 등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페트로프의 도박 한 번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갔으니 소련 입장에서도 굉장히 다행인 셈이다. [4] '독일 드레스덴 우호협회'가 분쟁 및 폭력 해결을 위해 노력한 사람을 기념하려고 2010년부터 주는 상으로, 초대 수상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상금은 25,000유로. [5] 참고로 썸네일 뒤의 흑백 핵폭발 사진은 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6] 전술했듯이 페트로프의 판단 자체가 도박성이 매우 짙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페트로프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다 페트로프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고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