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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7:25:28

MBC 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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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0452><colcolor=#fff> 기본 정보 LG그룹 | LG스포츠 | MBC 청룡 | LG 트윈스 | LG 트윈스 2군
주요 인물 구단주 구광모 | 대표이사 김인석 | 단장 차명석 | 감독 염경엽 | 주장 박해민
경기장 1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2군 LG 챔피언스 파크
이전 동대문야구장 · 구리 LG 챔피언스 파크
우승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1990 | 1994 | 2023
역사 정보 구단 역사 | 트레이드 | 1983년 한국시리즈 | 1990년 한국시리즈 | 1994년 한국시리즈 | 1997년 한국시리즈 | 1998년 한국시리즈 | 2002년 한국시리즈 | 2023년 한국시리즈 | 역대 감독 | 사건·사고 | 암흑기( 453566, 6668587667)
주요 정보 팀 특징 | 선수단 | 등번호 | 유니폼 | 상대 전적 | 팀 응원가 ( 서울의 찬가 · 서울의 모정) | 응원단장 | 엘튜브 | 치어리더 | 제휴카드
지역 연고 경기고등학교 | 경동고등학교 | 덕수고등학교 | 배명고등학교 | 배재고등학교 | 서울고등학교 |
서울디자인고등학교 | 선린인터넷고등학교 | 성남고등학교 | 신일고등학교 | 장충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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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시즌 역대 시즌
현재 시즌 LG 트윈스/2025년
영구 결번 9 이병규 33 박용택 41 김용수
팬덤 정보 LG 트윈스 갤러리 | I love Twins | 유광잠바
라이벌전 잠실 시리즈 | 엘 꼴라시코 | 통신사 시리즈 | 엘키라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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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참가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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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1]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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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2] MBC 청룡[3] OB 베어스[4]
[1] 舊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現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2] 現 KIA 타이거즈의 전신
[3] 現 LG 트윈스의 전신
[4] 現 두산 베어스의 舊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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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BC 청룡 엠블럼(1986~1989).svg
MBC 청룡
MBC Chungyong
창단 1982년 1월 26일[1]
매각 1990년 1월 18일[2]
모기업 문화방송
연고지 서울특별시 (1982~1989)[3]
홈구장 동대문야구장 (1982[4], 1988[5], 1989[6])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982~1989)[7]

1. 개요2. 홈구장3. 구단 디자인4. 역사
4.1. 역대 프런트
4.1.1. 구단 담당 이사4.1.2. 사장4.1.3. 단장
4.2. 유명 선수4.3. 역대 시즌4.4. 유니폼4.5. 기타
5. 마스코트6. 역대 성적

[clearfix]

1. 개요

MBC 청룡 -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역사
한국프로야구 출범 MBC 청룡
(1982~1989)
LG 트윈스
( 럭키금성그룹 인수)

1982년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삼아서 문화방송이 운영하고 1989 시즌까지 존재했던 KBO 리그의 구단으로 LG 트윈스의 전신. 이후 1990년 럭키금성그룹이 인수해 팀명을 LG 트윈스로 변경했다.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KBO 리그 1호 승리 구단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안고 있다.

모기업은 당시 전국으로 방송을 송출하던 유이한 지상파 방송사[8] 문화방송으로 방송사 주도의 프로구단이라는 의의가 있다.[9] 또한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주도한 팀이기도 하다.[10]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보조색은 노란색이다.

대한민국 4대 프로 스포츠 중 유일하게 리그 창설 당시부터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창단한 구단이다.[11] 축구, 농구, 배구는 리그 창설 당시 서울 연고팀이 없었고 리그가 어느 정도 정착한 이후 서울 연고 신생 구단을 창단하거나 타 지역에서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도록 했다.[12]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특별시를 단독 연고지로 썼던 유일한 야구단이다. 참고로 현재 4대 프로 스포츠의 남자 구단 중 서울을 단독 연고지로 삼는 구단은 서울 우리카드 우리WON이 유일하다.[13]

2. 홈구장

창단 초기에는 동대문야구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난 후인 1982년 9월부터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세계선수권대회 준비 때문에 동대문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삼미 슈퍼스타즈 인천 야구장을 쓰지 못하고 제2 홈구장이던 춘천 야구장 등 전국을 순회하며 홈경기를 치른 것과 같은 이유이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의 경기장은 잠실, 동대문, 숭의 야구장이었다.

3. 구단 디자인

3.1. 엠블럼/심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LG 트윈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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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초대 감독은 백인천이다. 원래는 MBC 라디오 <홈런출발>, TV 아침프로 <김동엽과 함께> 진행자로 MBC와 인연이 깊었던 김동엽이 감독으로 유력했었다. 하지만 정작 김동엽 감독을 데려간 것은 해태 타이거즈였다.[14] 김영덕 감독도 고려 대상이였으나 OB 베어스가 먼저 영입해 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박현식, 배성서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백인천으로 정리가 되었다.

MBC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600만 원의 거액을 주고[15] 백인천을 영입하며 팀 창단 채비를 마쳤다. 그래서 백인천은 프로야구 원년에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16] 또한 백인천은 1989년 11월 7일 다시 MBC 청룡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이후 럭키금성그룹이 MBC 청룡을 인수해 LG 트윈스로 구단명을 바꾸며 동시에 LG 창단 감독이 되었다. 즉 백인천은 MBC 청룡의 첫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라는 소리이다.[17]

1981년 12월에 열린 연고지 선수 대상 드래프트에서 28명의 선수와, 1982년 2월 13일에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한국화장품을 거친 내야수 조호와 광주 숭의실고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홍익회에서 뛰던 투수 박석채를 뽑았다. 이렇게 합쳐 총 30명의 선수와 입단 교섭에 나섰지만 그들이 모두 MBC 청룡의 멤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4명 유대성, 이원녕, 유제룡, 김중근와는 계약에 이르지 못했고 김정호는 입단에 합의했지만 창단식 직전에 이탈하고 말았다.
창단 멤버(23명)
투수 이길환 이광권 차준섭 유종겸 김시철 정순명 하기룡 박석채
포수 최정기 유승안 김용운 신언호
내야수 김인식 김용달 정영기 김용윤 박재천 조호
외야수 이종도[[주장|
C
]] 송영운 김봉기 배수희 최정우
프로야구 원년에는 화려한 멤버를 앞세운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프로야구 공식 개막전이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팀이 시즌 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기에 그런 대진을 짠 것이다.[18] 이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이 나오면서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 해 MBC는 우승에 실패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교 팀을 보유한 서울을 연고로 둔 만큼 최고의 선수들로 팀을 꾸릴 수 있었으나 실제 MBC는 프로 원년 46승 34패로 전체 3위에 머물렸다.

그 이유는 창단 당시 MBC의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단 구성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데, 나이가 갓 40줄이 된 백인천을 감독으로 선임하다 보니 그보다 나이가 위인 인사를 코치로 데려오기가 어려웠던 터라 동년배인 이재환, 유백만 코치를 데려왔는데 이들은 시즌 내내 매사에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백인천과 배터리로서 호흡을 맞췄던 투수 출신이고, 유백만은 부산상고로 학교는 달랐지만 동기생으로 실업야구 시절 노히트노런을 네 차례나 기록했던 명 투수였다. 게다가 두 코치는 모두 투수 출신이며, 야수 출신인 백인천 감독이 선수로도 뛰는 점을 감안하면 야수 출신코치를 선임하지 못한 비효율적인 코칭스태프 구성이었다. 결국 MBC는 후기리그가 이어지던 7월 12일 충암고 감독 출신의 한동화를 수비 코치로 영입해 보강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 전문가였던 한동화의 합류 이후 내야진의 조직력이 원활해지기 시작했고, 백업 플레이 실수 등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실책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수단 구성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해 세계선수권으로 팀 합류가 불가능한 김재박 이해창을 지명한 것이다. 그러자 서울 지역 지명권을 공동으로 행사한 OB는 재빠르게 박철순을 지명했고, 이는 OB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 인해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MBC의 선수진이 크게 빈약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첫 해만큼은 고전을 면하기 어려운 면면이기도 했다. 당장 첫 해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명했던 당시 한국 야구 최고의 슈퍼스타 김재박, 이해창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투수를 좀 더 보강하지 못했던 점과 지나치게 편중된 포지션 배분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특히 포수 출신 선수들이 유별나게 많았다는 점과 마땅한 2루수 요원이 없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창단 멤버 23명 중 유승안, 김용운, 최정기, 신언호, 이종도까지 5명의 선수가 포수로서 국가대표를 지내거나 실업팀의 주전 선수로 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한 해 80경기를 치르던 그 해 주전급 포수가 두 명 이상 필요할 리는 없었다. 결국 조호와 박재천을 번갈아 기용했던 초반 15경기에서 무려 15개의 실책이 양산됐던 2루수 자리의 큰 구멍은 4월 말에 성무(공군)에서 전역하고 곧바로 입단한 이광은이 5월 2일부터 출전해 3루수를 맡고 3루에 있던 김인식이 2루로 옮기면서 비로소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수들 중에는 유승안과 김용운이 일단 주전으로서 번갈아 경기에 나서는 한편 신언호와 이종도가 외야로 나가는 교통정리가 단행됐고 그중에서도 신언호가 외야의 어느지점에서든 홈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엄청난 강견으로 센세이션을 불려 일으키긴 했다. 하지만 수비범위와 타구 판단 등 모든 면에서 안정감이 떨어졌던 외야진의 수비능력은 MBC 청룡의 숨겨진 아킬레스건이었다. [19]

설상가상으로 백인천 감독과 MBC 구단 프런트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프로야구를 먼저 경험하고 온 백인천 감독은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구단에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기보다 보수적인 MBC 프런트와 충돌만 낳았다.

1983년엔 전년도 국제대회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던 김재박[20]과 이해창이 팀에 합류하면서 MBC의 내외야는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포수로는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차동열[21]과 신인 박철영이 합류했다. 투수쪽에서는 신인 오영일의 가세로 하기룡, 이길환과 함께 10승 투수 3인방을 구성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 마이너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던 이원국의 영입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백인천 감독이 구단과의 계약 문제를 둘려 싼 이견과 사생활 문제로[22] 인해 중도 퇴진하고(선수 신분은 유지) 이후 한동안 유백만 코치의 대행 체제로 운영하다 결국 전기리그 막바지 김동엽 감독을 사령탑에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백인천 감독은 후기리그 들어 삼미 슈퍼스타즈에 트레이드 되었다. 후기 들어 코칭스태프가 안정되면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고 추운 날씨에 적응을 실패하여 부진한 이원국 대신 하기룡, 오영일, 이길환, 유종겸, 이광권 등 다섯명의 국내파 선수가 고르게 100이닝 이상 씩 분담하며 아낀 체력을 바탕으로 8월 31일에는 처음 단독선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우승경쟁 상대였던 삼미와 해태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30승 1무 19패로 후기리그 1위를 차지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선수들이 리그 우승 보너스 문제로 불만을 가져 거의 태업하다시피하며 패퇴한다.

1983년 11월 5일 한국시리즈 졸전의 책임을 물어 김동엽 감독을 해임한 MBC 청룡은 동아대 감독으로 있던 어우홍 감독을 후임 3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1984년 개막 직후 5경기에서 4승 1패로 순항했으나 4월 중순부터 그 달 말까지 12경기에서는 무려 1승 11패로 고꾸라지는가 하면 5월과 6윌 사이에는 다시 20승 11패로 솟구쳐 오르는 롤러코스터식 흐름이 반복됐다. 급등락하는 성적 앞에서 의연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에이스 하기룡을 5월에만 선발과 구원 가리지 않고 9번이나 투입하는가 하면 사실상 6월에 접어들면서 전기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희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승왕 욕심에 이틀 간격으로 구원승과 완투승을 반복하는 무리를 방치한 것이 특히 아쉬웠다. 그 결과 하기룡은 전기리그에서는 10승을 수확하며 다승 선두로 기세를 올렸지만 후기리그 들어 방전된 그는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5승 만을 추가하는데 그쳤고 특히 롯데, OB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던 8월 중순에는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오히려 팀 연패를 이어가는 고리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85년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즌 초반 에이스 역할을 하던 하기룡이 4월 말부터 좀처럼 승수를 쌓지 못하고 경기초반 무너지기 반복했고 하기룡과 더불어 청룡 마운드의 양대 기둥이었던 오영일 마저 1승과 1패를 반복하며 전혀 필승의 확신을 주지 못했지만 끝내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해 전기리그 내내 화제의 중심이었던 18연패의 기록을 세운 삼미에게 청룡은 그 연패를 끊는 완봉승을 헌납해가며[23] 5위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MBC 청룡은 6월 17일 어우홍 감독을 해임하고 전임자인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김동엽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선수단 전원을 합숙시키며 또 한번 후기리그 둘풍을 꿈꾸었지만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다. 1985년에 청룡은 전기리그 5위에 이어 후기리그 6위로 추락하며, 처음으로 시즌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전기리그에서 삼미가 3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승률을 기록해준 덕분에 1년 기준으로 최저승률팀의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서울을 공동연고지로 가지고 있던 MBC 청룡과 OB 베어스가 지명권 분할이 이루어졌다. 1986년은 1983년부터 시행한 연고지 출신 선수들에 대한 무제한 지명권은 폐지되었지만 10명까지는 보장을 받고 있었기에 실제로 별 차이는 없었다. 신인 지명행사에서 MBC 청룡은 김건우 김태원을 선택했다. 그 뒤로 국가대표 포수 서효인, 내야수 민경삼, 투수 이재홍과 이바오로, 외야수 이경재까지 모두 일곱 명을 지명했다.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신인왕 김건우가 18승을 올렸고 9구원승, 26세이브를 기록한 구원왕 김용수를 앞세운 황금계투와 이광은, 김상훈이 버티던 타선의 조화를 앞세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뻔했으나 실패했다. 두 명의 투수를 제외하면 4년차 오영일이 12승, 원년멤버 유종겸이 10승으로 그나마 제 몫을 해주었을 뿐 에이스 하기룡이 6승으로 부진했고 차세대 에이스로 큰 기대를 모았던 김태원이 2승으로 부진했던 것이 아쉬웠다. 게다가 부지런히 뛰며 메우긴 했지만 7개 구단 중 가장 팀 홈런이 적었기 때문에(33개)[24] 짧은 방망이가 결정적인 고비마다 분위기를 반전 시키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리그에서 4위에 그쳤던 청룡은 후기리그에서 해태-OB와 치열한 선두경쟁을 했지만 결국 최종전 결과로 인해 아쉽게 3위로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25] 여담으로 1986년의 팀 승률은 청보-빙그레로 인한 극심한 승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0.590인데 MBC 청룡 역대 최고승률이다.

김정수의 교통사고 사망과 함께 시작했던 1987년 전기리그는 개막 5연패와 함께 시작하며 삐걱거렸다. 플레잉 코치를 맡은 김재박은 수비가 흔들렸고, 지난해 에이스 김건우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맞았다. 정삼흠이 분전했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으며 김용수와 유종겸은 팀을 이탈해있을 때가 많았다. 하기룡과 이광권은 사실상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빙그레에도 밀리며 6위까지 내려왔다가 겨우 5위로 마쳤다. 결국 올스타전 직후 김동엽 감독은 선수단 투표와 함께 청룡에서만 2번째 경질을 당했고, 유백만 2군 코치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일본에서 온 투수코치였던 미즈타니 히사노부였다. 후기리그에서 김건우와 김용수가 폼을 되찾고 부활하며 팀은 한창 치열한 2위 경쟁을 하는 가운데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면서 팀은 에이스를 잃게 되고 결국 시즌 막바지 해태와 롯데에 추월당해 후기 4위로 가을야구에 실패했다.

결국 김건우의 부상과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겹쳐 1988년과 1989년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1988년에는 이용철이 신인왕, 김상훈이 타격왕에 올랐으나 전기 태평양에도 밀린 꼴찌, 후기 OB와 공동 5위로 팀 역사상 처음으로 승률 4할에 미달하여 종합 6위에 그쳤다. 전후기리그가 사라지고 단일리그가 된 1989년에는 전반기까지는 가을야구가 주어지는 4위 경쟁을 하다 후반기 11연패를 당하며 꼴찌까지 떨어진 끝에 막판 8연승으로 롯데를 반 게임차로 겨우 앞서 꼴찌를 모면했다.

1983년 준우승 이후 가을야구는 커녕 바닥과 가까운 성적을 꾸준히 지속한 탓에 야구단 운영에 대한 브랜드 홍보 효과가 떨어지면서[26] 매각 순위 1순위가 되었다. 1989년 시즌 종료 직후부터 MBC가 야구단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가장 먼저 움직인 기업은 럭키금성그룹이었다. 당시 럭키금성을 이끌던 구자경 회장은 프로야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엄청난 한으로 삼았고[27] 1984년부터 KBO가 신규 구단 창단을 추진할 때면 줄기차게 리그 참가 의사를 내비쳤다. 결국 1989년 12월 중순부터 매각 협상을 본격화했고 1990년 1월 18일에 매각대금 총액 130억원의 조건으로[28] 매각됐다. 매각 조인식이 보도된 당시 MBC 뉴스데스크 기사 영상. 이 과정에서 계열사 럭키금성스포츠 측은 야구단 운영권만 넘겨받았고 MBC 청룡은 존속법인으로 1993년 6월까지 유지되다가 MBC 아카데미에 흡수되었다.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인기 구단이었고 경기 호황 시대에 맞춰 급격한 수익을 얻고 있던 전국 단위 TV 방송국을 모기업으로 뒀으며 매주 꾸준히 팀 경기가 전국에 생중계된다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청룡 구단 운영의 실체는 개판 중의 개판이었다. 우선 KBO 규약에 프로야구팀은 '자본금 2억 이상의 상법상의 주식회사'여야 한다는 규약이 있었는데, 다른 5개 팀은 이미 창단년도인 1982년에 맞춰 주식회사로 전환시킨 상태였지만 MBC 혼자만 1985년까지 밍기적 대다 겨우 독립법인화 되었다.

애초에 MBC 청룡은 3S 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방송사가 참가해야 프로야구가 활성화된다는 이해관계를 통해 창단된 팀[29]이라는 한계가 있었던 데다가, MBC는 공식적으로 딱히 누구의 소유권이 있는 기업[30]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독은 사장이 모셔온 전문가라는 인식도 못 받았던데다 그냥 '특정 부서의 長' 정도로만 여겨지는 바람에[31] 야구 좀 본다 싶은 사람들이 개나 소나 다 운영에 대해 태클을 걸었다고 한다.

야구에 대해서 아는 점이 없는 MBC의 고위 임원들이 툭하면 구단 운영에 간섭하는 바람에 창단 후 초기 몇년간 몇 가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다. 고위 임원 A는 청룡 코치진에게 "왜 선발 투수 9이닝을 다 던져야 하느냐?[32] 투수 1명이 1이닝씩 담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임원 B는 "야구장 외야가 그렇게 넓은데 그 빈 공간으로 공을 보내는 연습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나무 배트와 공 같은 장비 구입을 위해 예산을 청구해 올리면 간부들은 "공 놀이 하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느냐", "공은 한 박스만 쓰고 부족하면 그때 얘기해라", "부러진 방망이는 못 박아서 다시 쓰고 공은 수선해서 쓰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황당한 지적을 하기도 했다. 전지훈련을 하러 상대적으로 겨울 기후가 따뜻한 강원도 강릉시에 가려고 했는데 "뭐하러 그 먼 곳까지 가서 훈련을 하느냐? 그냥 맨날 쓰는 건국대 야구장에서 훈련하는 게 어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특히나 1981년까지 문화방송 사장이었던 친정부 인사 이진희가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했고, 직접 MBC 청룡의 구단주로서 KBO의 총재직까지 겸임할 생각까지 했다는 증언이 있을 만큼 이진희 사장 재직까지만 해도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았으나, 막상 82년 프로야구 개막할 때가 되어선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영전하는 바람에 구단 고위층에 운영에 전문적이고 주도적으로 나갈 사람이 없었다.[33] 다만 립서비스일지는 모르겠으나 김용수가 MBC의 지원은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감독의 잦은 교체가 가져온 혼란을 들 수 있다. 창단 첫해부터 1989년까지 MBC를 거쳐간 감독만 8명. 1984년부터 6년간의 암흑기에는 5명이 MBC 감독 명함을 받아들었다. 수시로 감독을 갈아치우는 구단에서 감독이 힘을 갖고 자기야구를 제대로 펼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불러들인 1986년이 대표적인 예다. 그해 MBC는 일본에서 미즈타니 코치를 투수코치로 영입해 투수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김동엽 감독이 취재진에게 오늘 우리 팀 선발투수가 누구냐고 물어봐야 할 정도였으니 제대로 된 리더십이 발휘될 일이 없었다.

거기다 선수단의 파워도 다른 구단에 비해 센 편이었는데, 선수단의 항의에 의해 감독이 잘려나간 게 3번이었다. 좋은 성적을 냈던 김동엽은 1983년엔 이해창의 내부 고발, 1987년엔 선수단 투표로 인해 해고당했고, 1989년도 감독인 배성서[34] 정삼흠 항명사건 등 불화 끝에 퇴진했다.

연고지, 홈구장, 기존 MBC 청룡의 팬과 MBC 청룡이 점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가 인수 과정에서 그대로 LG 트윈스로 이어졌다. 팀의 통산 기록도 MBC-LG를 이어서 기록한다.

4.1. 역대 프런트

4.1.1. 구단 담당 이사

4.1.2. 사장

1985년 법인화 후 사장제가 신설되었다.

4.1.3. 단장

4.2. 유명 선수

백인천, 이종도, 하기룡, 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김건우, 이광권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이 활약하였으며, 1990년에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되고, LG 트윈스로 이어지게 된다.
파일:MBCbluedragon41.png
MBC 청룡
No.41 김용수
파일:attachment/백인천/백인천4할.pn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31008233549123.jpg
MBC 청룡
No.2 백인천 No.5 이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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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No.34 하기룡 No.1 정삼흠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28063624_2.jpg 파일:attachment/김건우/김건우1.png
MBC 청룡
No.1 이해창 No.28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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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No.9 김상훈 No.7 김재박 No.33 이광은
파일:attachment/2005021412105111001.jpg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151605344_ddddd.jpg
MBC 청룡
No.27/42 심재원 No.20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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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1 이길환
No.24 김기범 No.32 신언호
No.35 김태원 No.36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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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8 김동엽

4.3. 역대 시즌

4.4. 유니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LG 트윈스/유니폼 문서
3.1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5. 기타

파일:청룡 트윈스.png
트윈스의 시작, 청룡

5.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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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는 당연히 청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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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혔지만 2022년 KBO 올스타전에서 KBO 40주년을 기념하여 현대 유니콘스,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OB 베어스 등의 예전 마스코트들과 함께 잠시나마 부활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원년의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당시 삼미 투수였던 감사용을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도 작중 네이구루미를 입은 마스코트로 등장한다. 삼미가 연패에 빠지자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은 성난 팬들을 피해서 삼미 투수 인호봉이 청룡의 인형탈을 목격한 뒤 "난 용대가리다."라고 말하며 인형탈을 쓰고 빠져나오다가 걸리는 장면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당시 실제 선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영화에서 웃기려고 만든 허구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 다만 영화처럼 인형탈을 쓴 선수가 인호봉 선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6.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경기수 승률
MBC 청룡
1982 3위/6팀[40] 3위 80 46 0 34 0.575
1983 1위/6팀[41] 준우승 100 55 2 43 0.561
1984 4위/6팀[42][43] 4위 100 51 1 48 0.515
1985 5위/6팀[44] 5위 110 44 1 65 0.404
1986 3위/7팀[45] 3위 108 59 8 41 0.590
1987 5위/7팀[46] 5위 108 50 7 51 0.495
1988 6위/7팀[47] 6위 108 40 4 64 0.385
1989 6위/7팀 6위 120 49 4 67 0.423
LG 트윈스
1990 1위/7팀 우승 120 71 0 49 0.592
1991 6위/8팀 6위 126 53 1 72 0.425
1992 7위/8팀 7위 126 53 3 70 0.433
1993 4위/8팀 4위 126 66 3 57 0.536
1994 1위/8팀 우승 126 81 0 45 0.643
1995 2위/8팀 3위 126 74 4 48 0.603
1996 7위/8팀 7위 126 50 5 71 0.417
1997 2위/8팀 준우승 126 73 2 51 0.587
1998 3위/8팀 준우승 126 63 1 62 0.504
1999 매3위/4팀[48] 3위 132 61 1 70 0.466
2000 1위/4팀[49] 4위 133 67 3 63 0.515
2001 6위/8팀 6위 133 58 8 67 0.464
2002 4위/8팀 준우승 133 66 6 61 0.520
2003 6위/8팀 6위 133 60 2 71 0.458
2004 6위/8팀 6위 133 59 4 70 0.457
2005 6위/8팀 6위 126 54 1 71 0.432
2006 8위/8팀 8위 126 47 4 75 0.385
2007 5위/8팀 5위 126 58 6 62 0.483
2008 8위/8팀 8위 126 46 0 80 0.365
2009 7위/8팀 7위 133 54 4 75 0.406
2010 6위/8팀 6위 133 57 5 71 0.429
2011 6위/8팀 6위 133 59 2 72 0.450
2012 7위/8팀 7위 133 57 4 72 0.442
2013 2위/9팀 3위 128 74 0 54 0.578
2014 4위/9팀 4위 128 62 2 64 0.492
2015 9위/10팀 9위 144 64 2 78 0.451
2016 4위/10팀 4위 144 71 2 71 0.500
2017 6위/10팀 6위 144 69 3 72 0.489
2018 8위/10팀 8위 144 68 1 75 0.476
2019 4위/10팀 4위 144 79 1 64 0.552
2020 4위/10팀 4위 144 79 4 61 0.564
2021 3위/10팀 4위 144 72 14 58 0.554
2022 2위/10팀 3위 144 87 2 55 0.613
2023 1위/10팀 우승 144 86 2 56 0.606
2024 3위/10팀 3위 144 76 2 66 0.535
2025 위/10팀
KBO 통산 42시즌 V3 5347 2592 129 2626 0.497

[1] 법인 설립은 1985년 8월에 했다. [2] 단, 야구단만 LG스포츠(당시 럭키금성스포츠)에 매각했고 법인은 매각 금액이 완불될 때(1993년 6월)까지 존속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페이퍼 컴퍼니로 존속하다가 1991년 1월부터 MBC 방송문화원이 되었다. 현재는 성격이 다른 MBC 아카데미라는 회사가 되었다가 2021년을 끝으로 MBC C&I에 합병되어 청산되었다. [3] OB 베어스보다도 먼저 서울에 터를 잡은 최초의 서울 연고 구단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LG 트윈스 팬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 [4]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날 때까지 사용했다. [5]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동안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6] 198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기간 동안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7]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1982 시즌 초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1982 시즌 말미부터 사용했다. 이후 LG 트윈스로 이어진다. [8] 청룡 야구단이 있을 당시 지상파 방송사라고는 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뿐이었다. 이전의 지상파 민간 방송사였던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았고 1990년에 문을 연 서울방송은 청룡이 LG로 넘어간 이후에 생겼다. [9] 이와 비슷한 구단으로 실업-프로농구의 SBS 스타즈(現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가 있었고, MBC가 게임 채널을 운영하며 e스포츠에 발을 들여놓을 때 MBC GAME HERO라는 구단을 운영한 적도 있다. 2010년대에 내팽겨쳤지만. [10] 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 [11] 현재 LG 트윈스와 같은 홈구장을 쓰는 두산 베어스 OB 베어스의 경우 서울에 연고를 두고 창단하려했지만 강력한 MBC의 반발과 어떻게든 프로야구를 시작시키려던 정권의 사정이 겹쳐져 충청도 연고 구단이 생길때 까지 충청도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복귀를 보장해주겠다는 삼성의 중재안에 따라 원년부터 1984년까지 충청도를 연고지로 삼았다가 1985년 서울로 올라왔다. [12] 축구는 리그 출범 당시 유공 코끼리에게 서울·인천·경기 연고권을 배당했지만 지역 순회 방식으로 리그를 치렀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홈 앤드 어웨이 방식 채택 이후 최초로 등장한 실질적 의미의 원조 서울 연고 축구단은 1989년 창단한 일화 천마로 볼 수 있다. KBL은 중립지로 선정되어 연고할 수 없다가 당시까지 챔프전 우승 경험을 갖춘 부산 기아, 대전 현대, 수원 삼성, 청주 SK 등 4개 구단 중 서울 입성을 희망하는 2개 구단에 서울 연고권 개방을 선언했고 결국 삼성과 SK의 서울 입성을 허가했다. 배구는 리그 출범 4년차를 맞은 2008년에 서울 연고권을 개방해서 신생 구단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의 창단과 인천 GS칼텍스 여자배구단의 서울 입성을 허가했다. [13] K리그에는 1부 리그 구단인 서울 이랜드 FC 외에도 2부 리그 구단인 서울 FC도 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을 뿐 두 리그를 별개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복수의 구단이 서울을 연고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 해태 타이거즈의 박건배 구단주와 박종세 단장이 김동엽 감독과는 경복고등학교 동문이었다. [15] 계약금 2,000만 원과 연봉 3,600만 원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특히 연봉의 경우 감독 몫으로 1,200만 원, 선수 몫으로 2,400만 원이었는데 당시 대우 수준으로 2,400만 원은 최고급 대우였다. 이때 돈 2,400만 원이면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16] 플레잉 코치(코치 겸 선수)는 몇 명 더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용득, 지연규, 나경민 등이 선수생활 말년에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그런데 이들이 플레잉코치 시절 선수로 출장한 것은 몇 경기 안 돼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 백인천은 MBC를 나와 삼미로 이적했을 때도 플레잉 코치를 하였다. [17] 거기에 더해 백인천은 한국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이기도 했으며 초대 타율왕이었다. [18]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OB는 시즌 전엔 4위 정도의 전력을 가진 것으로 예상되었다. OB의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할 박철순이 몇년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었기에 해외야구 정보가 거의 없던 당시 한국에선 박철순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고, 또한 그가 시즌 전 연습경기에서 한국 공인구에 적응하느라 고전했기 때문이다. [19]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부터 LG의 외야진은 현재까지 최강이다. 심지어 비밀번호를 찍던 시절에도 수준급 외야수는 계속해서 나왔다 [20] 1982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나오긴 했다. [21] 원년 롯데의 주전 포수였던 차동열은 심재원, 한문연, 김호근이 보강되면서 자리가 없어진 상태였고 마침 MBC에서 김재박의 본격 가세로 역시 자리가 사라진 정영기를 내주고 차동열을 데려왔다. [22] 당시 백인천과 살던 부인은 재일 한국인이었는데 한국 정착 문제와 시부모 봉양 문제 등을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 부인과 매우 안 좋게 결별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사유가 간통이었다. [23] 하지만 그 18연패를 끊은 다음 날 삼미는 구단 매각을 발표했고, 청보 핀토스가 후기 리그부터 삼미를 대신하여 참가했다. [24] 1위는 해태 99개 [25] 최종전에서 청룡이 해태를 이긴 가운데 OB는 홈에서 최동원의 3년 연속 20승 여부가 걸려있던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배하면 후기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9회말까지 OB는 최동원에 막혀 3-1로 지고 있었으나 9회말에 최동원을 공략하며 3-4 역전승을 거두면서 MBC 청룡의 가을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6] 경영난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MBC는 1988 서울 올림픽과 경기 호황에 따라 매년 매출이 급속히 늘어 수백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시당초 당시 광고 판매율이 거의 100%에 달하던 상황이었고 SBS도 없었던 시절이기에 영상 광고 시장을 KBS와 사실상 독점하는 체제였다. 1988년에 발생한 MBC의 총파업도 민주화 이후 공정 언론보도와 보도 등 3개부문 국장 3배수 추천제 관철 등을 쟁취하기 위한 파업이었다. [27] 프로야구 출범 준비 당시 청와대가 럭키금성 측에 부산·경남 연고팀 창단 의사를 타진했는데 하필이면 이 때 구자경 회장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제때 대답을 못했다. 결국 부산·경남 연고팀의 주인은 롯데로 넘어갔고 구자경 회장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웬만해서 화를 잘 안 내던 구 회장이 프로야구단 창단 의견 전달을 보류한 고위 참모들을 향해 대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28] 청룡 야구단 법인 운영권 인수비용이 100억원이었고 나머지 30억원은 MBC에 광고협찬을 하는 조건의 금액이었다. 인수비용 100억원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간 분할 납부했다. [29] 한국프로농구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생긴 팀이 있었다. 바로 안양 SBS 스타즈. 다만 SBS는 이미 실업농구 시절부터 팀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MBC 청룡과 다르다. [30] 당시 MBC가 공식적으로 KBS(1988년 이후에는 방송문화진흥회)가 지분의 다수를 차지한 (준)공영방송이었기 때문. 딱히 주인이 없다는 점은 후에 창단된 kt도 마찬가지여서(KT는 민영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공기업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전문가나 팬들이 불안해했다. [31] 높으신 분들 시선으로 봤을 땐 인사부장, 운영부장, 영업부장 정도로만 봤다고 생각하면 쉽다. [32]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완투형 투수를 찾기 쉽지 않지만 청룡이 있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선발투수는 완투 능력을 갖춰야 성공한다는 야구 문화가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윤학길이 무려 100번이나 완투를 할 수 있던 것은 그 시절의 야구 문화도 한 몫을 했다. [33] 같은 MBC 계열로 보면 본사의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채널을 지지해 주던 사장이 퇴임한 이후 게임채널 폐국과 음악채널 개국을 주도한 사장이 들어오면서 폐국된 MBC GAME의 사례가 있으며, 야구에서는 kt 창단 초창기에 창단에 관심 있던 사장이 물러나면서 중구난방스러운 운영으로 비판 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34] 선교사 케네스 배(본명 배준호)의 아버지이자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이었다. [35] 1970년대 경향신문 MBC가 한 식구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쓰던 사옥이다. [36] 이계진 전 국회의원(전 KBS 아나운서)의 수필집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서 발췌. [37] 역시나 이계진 아나운서의 책. 이외에도 많은 KBS 출신들의 증언이 한가득이다. 사실 방송국 내에서 타 방송사 언급이 자유로워진 것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아서, MBC 청룡이 인수된지 한참 후인 2000년대에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는 대놓고 타 방송사를 언급하기가 어려워 고육지책으로 X본부 등의 용어를 쓰는 게 고작이었다. 하물며 그것보다도 훨씬 방송문화가 보수적이었을 80년대에, 유일한 라이벌 방송국 이름을 경기 내내 호명하는 것은 KBS 입장에서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SBS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바뀐 1990년 이후에 생겼기에(SBS는 1990년 11월 14일에 법인 설립,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방송은 각각 1991년 3월 20일과 12월 9일 개국) 청룡 시절 경기는 단 한 번도 중계한 적이 없다. [38] 아이러니하게도 두 경기 모두 상대가 타이 거즈다. [39] 1986-89 유니폼이 대부분이다. [40] 전기 3위, 후기 3위 [41] 전기 3위, 후기 1위 [42] 전기 3위, 후기 3위 [43] 종합 승률만 따지면 3위지만 4위였던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함으로 인해 종합순위는 4위가 되었다. [44] 전기 5위, 후기 6위 [45] 전기 4위, 후기 3위 [46] 전기 5위, 후기 4위 [47] 전기 7위, 후기 6위 [48] 전체 6위 [49] 전체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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