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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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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당시 상황3. 예산도 적고, 정보는 부족하고4. 개발 성공과 그 이후의 곡절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사업

파일:NHK-1 백곰 지대지 미사일.jpg

NHK-1 백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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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재임기간 무기의 국산화에 관심이 많았다. 허나 당시 우리나라는 이제 막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M16 소총을 제작하던 현시창 수준이었기에 미사일 같은 첨단무기의 개발을 위한 장벽은 넘사벽으로 다가왔다.

2. 당시 상황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미사일을 독자개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사거리 70km 짜리 어네스트존 로켓 대신 미국에 사거리 120km MGM-52 랜스 지대지 로켓의 판매를 요청하였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전쟁은 좋지 않아요.'라고 생각하던 지미 카터 시절이라.... 카터 정권은 한국의 지나친 군비경쟁은 대략 좋지않다고 여겼기에 이 미사일 판매를 거절한다.
이에 당시 정부는 국방과학연구소(당시에는 기밀 유지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기계공업 회사인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를 통하여 미사일, 로켓과 관련된 연구 개발을 진행시키는 한편, 이미 우리나라가 운용 중이던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카피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은 일단은 지대공 미사일이지만 폭격기를 인수분해시킬 목적으로 탄두가 거의 지대지 미사일급으로 큰 데다가 [1] 지령유도 방식이기 때문에 비행경로를 지상에서 어느 정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이키 미사일로 제한적으로나마 지대지 사격이 가능하였다.[2]

이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국산화하는 한편, 지대지 성능을 좀 더 개량하는 사업이 바로 백곰 미사일 개발 사업이었다. 나이키 허큘리스의 지령유도 방식은 제대로 된 탄도 비행에 비해 사거리 등의 면에서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3. 예산도 적고, 정보는 부족하고

백곰 미사일은 1970년대 중, 후반에 실제로 발사시험에 성공하는 등, 상당한 사업진척을 보였다. 물론 말은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겪은 설움과 고난은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

번개사업 문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한국의 방위산업 기술력은 대전차로켓 역설계도 간신히 해낸 수준인데[3] 이걸로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구상회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정보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외의 주재무관들을 통해서 미사일 관련 정보를 구해달라고 군부에게 부탁했는데, 무관들도 미사일 전문가는 아닌지라 그나마 보내준게 현지 언론에 실린 미사일 관련 기사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그 성의라도 어디냐면서 고마워했다고.

한동안은 미국도 한국에서 백곰 사업을 진행 중인 줄 몰랐는데, 생김새가 사실상 나이키와 동일하고, 또 사업 자체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나면 연구원들은 엄중한 보안 교육을 받은 뒤 보안사령부에서 마련해준 안전가옥에서 숙식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연구원들의 가족들을 고급 식당에 초청해놓고 직접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이 '지금 연구원들은 국가의 극비 사안을 위해 해외로 출장가니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라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미 정부도 백곰 사업을 눈치챘으며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로 치자면 중국에 휴대폰 수출했더니 그거 그대로 카피해서 국산화하겠다는 꼴이었기 때문. 또한 당시 미국 정권은 여전히 한국의 장거리 미사일 보유를 반대하던 지미 카터 정권.

거기다가 미국은 당시 기술로는 100km가 넘어가면 원형 공산 오차가 100m 이상이나 되는데, 이를 화학탄 또는 으로 커버하려는 것 아니냐며, 안보담당 차관보였던 아브라모비츠까지 국과연에 달려와 개발 중지를 요구했으며, 미 8군 사령관이[4] 연구실로 달려와 행패를 부리자, 총책임자였던 이경서 박사와[5] 멱살을 잡으며 실랑이를[6]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이 만들어봐야 명중률 낮고 발사조차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대놓고 공개적으로 발사까지 성공을 해서 높은 명중률을 보였으니 미국으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당시 ICBM과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던 한국이었으니 당연했다.

1977년에 이 문제가 대두되었고, 우리정부는 어디까지나 나이키 미사일의 개량이 목적이며, 미국이 나이키 미사일을 폐기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대체하는 것을 알기에 나이키 마사일의 정비 유지와 성능개량을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설득해 사거리 180km, 탄두중량 1000파운드로 제한하는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1979년에 체결하였다. 어차피 백곰으로 날릴 수 있는 최대사거리가 그 정도였고, 또 그 이상가는 사거리를 만든다는 게 당장 쉽지 않았다.[7][8]

한편 이 미사일 사업을 진행하려면 "연구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다고 치더라도, "실제 제품은 기업에서" 만들어야 했는데, 기업들이 이렇게 실패 위험이 높고 수익도 별로 안나는 군수사업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다. 군수산업이 돈 많이 번다고 소문난 것은 주로 영화나 소설 등의 영향으로, 장비 하나하나의 군 납품가격은 비싸지만 대부분 원자재와 인건비 자체가 비싸다. 또 납품되는 수량자체도 적기에 전체 판매수익을 따져보면 보통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이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취급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반 강제로 미사일을 제작할 업체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현재의 LIG넥스원의 전신격인 금성정밀이다. 2016년 5월에 당시 개발진들이 출간한 회고록을 보면, 워낙 가진 게 없다 보니 경운기 제작 회사에서 외부 동체를 만들고 로켓 연소실에 쓸 고강도 강철이 없어서 청계천에서 155mm 야포 포신을 구해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청계천에서 뭘 구했다고?![9][10]

4. 개발 성공과 그 이후의 곡절

미사일 협정을 맺은 후 미사일 개발 계획은 탄력을 받았다. 먼저 한국 연구원들은 레드스톤 미 육군 미사일연구소로 데려가 연수를 받았다.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받았으며, 가용한 예산[11] 일부로 폐업을 앞둔 미국 측 LPC 고체 추진제 제조공장 설비도 인수하였다. 이 제조공장은 나이키 미사일의 주 고객이었던 맥도넬 더글라스사 지분이 많은 곳이었는데,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우리 기술진들이 접근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고 한다. 당시 기술 이전의 초기단계는 정식 과정을 밟았지만, 그 이후의 단계부터는 차근차근 제대로 기술을 전수받는다기 보다, "상호 검토" 명분으로 " 보고 최대한 배우라"는 것에 가까웠는데, 자금 수혈이 필요한 더글러스사 덕분에 우리 기술진들이 보고 습득한 기술 범위가 넓고 효과적이었다는 후문.

무엇보다 "상호 검토" 명분 때문에, 종이나 기타 필기도구 일체를 반입 못 시키게 하는 와중에, 이 박사가 6사람만 데리고 들어가 "오직 머릿 속에 기계류, 금속류 관련지식을 담아"온 열정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연료 문제가 남아 다들 애를 먹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대덕 연구소가 설립되어 "초창기"에는 이 미사일 연료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미사일에 들어가는 주요 전자 부품과 소량 생산되는 일부 추진제 원료는 미국에서 수입했다. 참고 기사(매일경제신문)

1978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

이렇게 1979년에 미사일 사거리 지침 등으로 미국과의 문제도 해결되고, 용접팀이 쓰던 검토 시약통이 폭발하는[12] 바람에 인근 경찰서장이 쫓아오는 해프닝[13] 등 갖가지 에피소드를 남기고 몇 차례의 발사시험도 성공하는 등(물론 개발과정에서 실패도 몇 번 있었다) 사업이 진척되어 갔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사업의 진척속도가 늦어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전두환 정권 출범 후 백곰 사업이 취소되는 악재가 생긴다. 단순히 사업만 취소시킨 것이 아니라 국방과학연구소 내의 미사일 관련 연구자들도 대거 자리에서 물러난 것.

결국 백곰 사업이 취소됨에 따라 이것의 후속 사업으로 준비하던 각종 미사일 사업도 줄줄히 취소되었다. 국내에 어렵게나마 모이기 시작한 미사일 연구개발 인력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우리나라의 미사일 개발 능력은 후퇴해버리고 만다. 나중에 민간 기업에 시설과 인력을 이전 시킨 일본의 사례를 알게 된 관계자들이 아쉬워했지만[14], 이미 해체된 부서와 사람들까지 원상복귀하기엔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거 사실은 나이키 허큘리스인데 색만 바꿔 칠해 내놓은 것이냐?'며 사업을 취소시켰다는 "카더라"가 있으나, 실제로는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군 현직으로 머물던 시절에는 직접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들을 만나서 백곰사업에 대해 칭찬도 하고 그랬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백곰이 나이키 허큘리스 커스텀 도장버전이라고 생각했다기 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하여[15] 사업을 취소시킨 것이라 보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몇 년 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장관급 국무위원 16명[16]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모든 걸 지켜본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을 위협할만한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이 없음을 알고 통탄했던 것.

이에 5공 출범 후 취소됐던 백곰 사업의 후속 계획 일부를 재추진, 현무 지대지 미사일이 탄생하게 된다. 현무-1이 나이키 허큘리스와 닮은 것도 이 때문.

윗 글에서 백곰 사업이 전두환 정권 출범 후 취소되었다고 하는 부분은 정확하지 않다. ADD 구상회 박사 회고록[17]에 의하면

백곰 미사일 개발지시는 비공식적으로는 1971년 12월 27일 1차 번개사업 사격 시험이 끝난 후였고 국방부 정식 공문으로는 1972년 4월 14일에 내려졌다.

당시 보안을 위해서 항공공업 육성계획이라는 가명으로 진행되었고 원 계획은 76년까지 개발완료였으며 시험발사 성공은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 안흥종합시험장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 때 백곰 후속사업이었던 K2, K3 및 K5 유도탄 개발계획이 취소된 건 맞지만 백곰사업은 이미 완료됐기 때문에 취소당한 게 아니다.

5. 관련 문서



[1] 나이키 미사일은 개발 당시 핵탄두를 탑재하여 폭격기 편대를 일시에 삭제시킬 생각도 하고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핵탄두로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아작내는 독은 독으로 제거한다는 방안도 검토했다. 다만 소련과 서로 지나친 군비경쟁을 막기 위해 핵으로 핵미사일 날리기는 서로 안하기로 합의. [2] 미군은 아예 지대지용으로 확산탄(클러스터탄) 버전의 탄두도 개발하려 하였으나 취소했다. [3] 중장거리 야포만 해도, 포신은 통일중공업, 포를 받치는 이동형 거치대 및 포다리 등은 대우중공업에서 맡아, 155mm 견인포를 개발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범발사를 하는데, 포탄은 그럭저럭 발사돼 사거리까지 날아갔지만, 지탱하는 포다리가 끊어지는 사고가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들 대통령 얼굴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데, 다행히 박 대통령은 그냥 웃음만 짓고 갔으며, 이후에도 별 탈없이 넘어갔다는 후문. [4] 이름을 워커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름이 비슷한 존 위컴을 워커로 오인하였거나, 대구의 캠프 워커 비행장과 관련해 기억에 착오가 온 듯 하다 [5]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6] 주한미군 사령관이 이 박사에게 "당신 기억해두겠다"(=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이 가도록 하겠다)고 위협조의 말을 남기자, 이 박사가 "당신이 우리 연구소에서 이렇게 행패를 부린 일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7] 사실 시스템만 고치면 180km -> 300km로 사거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더글라스社와 합의를 해야 고칠 수 있다고 [8] 흔히 이 미사일 사거리 지침의 체결을 아래에 언급할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알고 있으나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9]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 비화에서도 볼 수 있듯, 전쟁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런 무기류나 그 몸체를 구하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산에서 한국 전쟁 시기의 불발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2010년대까지 전쟁을 치른 이라크에서는 결혼식 하객으로 간 신랑 친구들이 "실탄으로" 축하 예포를 쏴주는 우정(?)을 과시한 사례도 있다. [10] 국내에서 처음 M1 소총을 복제했을 때도 부품과 재료, 시간이 부족하자 고물상에서 총기나 군수품을 주워와서(...) 만들었다. [11] 총책임자였던 이 박사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예산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공동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더글라스社측 협상자로 나온 미국인이(이 박사의 동기) 공동연구개발비로 3,000만$을 요구한 걸 거절하고, "우리 연구진들이 그쪽 연구진들과 상호 검토하는 선"으로 200만$로 가격을 낮췄고, 다시 "동기 디스카운트"를 요구해 150만$ -> 100만$까지 가격을 낮췄다고. [12] 붉은 시약을 뿌려 말린 후 하얀 시약을 뿌리면, 붉은 시약이 거품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이 스프레이를 수거해 소각하는 데, 덜 쓴 스프레이를 직원들이(용접팀 5사람 中 3사람은 그냥 일반 공직자분들이었다고 한다) 가져가 소각하는 바람에 소각장에서 폭발하고 만 것 [13] 사고(?) 다음날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금일봉을 하사했다고 한다. 다들 '상부에 보고가 예쁘게 들어간 덕에 오히려 격려차 오시지 않았겠느냐' 추정했다고. 하지만, 개발 성공 포상에서는 이 팀의 공직자들이, 고생한 것에 상응하는 처우를 못 받았다는 후문. [14] 민간에 기술을 이전하면, 그간 축적한 기술을 보존-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 [15] 미국측은 일단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조건으로 백곰 사업진행을 허가하였지만 좋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16] 다른 한 분은 당시 사진 기자로 명성이 있었던 이중현 씨(동아일보). [17] 한국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고록 [1] 한국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고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