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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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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1]

1. 출생(1941/1942)과 아동기(1941/1942~1949)2. 청소년기 (1948 ~ 1960)3. 청년기 (1960 ~ 1964)4. 후계자 시절 (1974~1994)5. 집권 이후 행보 (1994 ~ 2011)
5.1. 고난의 행군 (1994 ~ 1999)5.2. 북한의 핵개발 (1993~현재)5.3. 이한영 암살 지시 (1997)5.4. 심화조 사건 (1997 ~ 2000)5.5. 선군정치 (1990년대~2011)5.6. 남북정상회담 (2000/2007)5.7. 북일정상회담 (2002/2004)
6. 뇌졸중 투병 과정(2008 ~ 2011)
6.1. 급한 후계자 선정 (2009~2011)
7. 사망 (2011년 12월 17일)8.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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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1941/1942)과 아동기(1941/1942~1949)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보로실로프[2] 근처 야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 한때는 김정일이 비야츠코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베이징에 사는 전 유격대원 리재덕의 증언에 의해 힘입은 적이 있으나 1942년 4월 18일에 작성된 야영 대원 명부에서 김정숙의 이름이 발견되면서 비야츠코에 출생설은 수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에 위치한 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3] 어린 시절의 이름은 '유라'. 러시아식 이름 유리(Юрий)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4] 킴'이다. 이 '유라'라는 이름은 10대 시절 내내 사용했고,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 둔 무렵인 1960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5] '이제 내 이름은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고 급우들에게 선언했다고 한다. 한자도 처음에는 正一이라고 했다가 80년대에 다른 이복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는 一자를 버리고 유일한 후계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일성의 한자와 맞춘 日자를 사용해 正日로 바꿨다고 한다.[6]

파일:attachment/김정일/백두산밀영.jpg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뒷산이 정일봉이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어느 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 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런게 있을리가 없으니 찾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당시 당중앙위원회에 혁명사적지부를 신설해서 빨치산들을 부장으로 임명해 수색하게 하고 백두산이 있는 량강도 책임비서들을 쪼으면서 찾으라고 십수년을 뻘짓을 해도 끝내 나오지 않자, 결국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인근 삼지연시 듣보잡이었던 어느 산봉우리가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지가 되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생일이 1942년 2월 16일인데 정일봉이 봉우리만 따졌을 때 높이가 216.42m라 하늘에서 산 높이까지 생일에 딱 맞게 점지해 주었다며 김정일이 하늘에서 내린 인물이라는 증거라고 열심히 주민들에게 선전했다.

해방 후 부모와 함께 수송선 편으로 귀국해 일본인의 자택을 압류해 만든 평양시의 수상관저에서 단란한 생활을 보냈지만 몇 년 뒤 자신의 남동생 김만일[7] 수상관저 분수대에서 놀다가 김만일이 익사했다고 한다.[8] 이때 김정일이 겁을 먹고 남동생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책망할 때마다 두고두고 이때의 일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만일이 죽은 지 한참 후(1954년)에 김일성은 김성애와의 사이에서 또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김평일로 지었다.

KBS의 다큐멘터리 <대기획 김정일>에선 김정일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동생의 익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고, 같은 방송의 다른 다큐멘터리 <김정일, 금지된 과거>에서는 아예 김정일이 동생이 익사하는 걸 방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걷어차서 자꾸만 물속에 처박았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을 통째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일단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으론 김정일과 김만일이 놀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김만일이 물에 빠졌고[9] 놀란 김정일이 허겁지겁 아버지를 불러왔으며, 놀란 김일성이 다시 자신의 주치의를 불러왔지만 이미 김만일은 숨진 후였다는 것이다. 다만 5세, 3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을 보호자 없이 방치했을 때 정말 기상천외한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누구든 알고 있다. 성인이 된 김정일이 어떤 인간이었든 간에, 5세밖에 안 된 아이가 의도적으로 동생을 살해했으리라고 무리해서 악마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순 사고사였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무튼 김정일 입장에서 이때의 일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아버지 김일성이 김성애와 일종의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멀리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도 넷째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이후 계모로 맞이한 김성애와 그의 이복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고 계모 김성애를 절대로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당당히 허락 받아 계모 김성애를 어머니 대신 "아주미(아주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10][11] 이렇게 생모와 남동생의 죽음, 계모와의 갈등을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경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게 된다.[12]

2. 청소년기 (1948 ~ 1960)

파일:김정일1960.jpg

1948년부터 50년까지 평양의 남산유치원에 다녔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 발발로 중국 길림학원에 다니다가 1952년 11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6·25 전쟁 후에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삼석인민학교(평양제4인민학교)에 다녔다.[13] 이 학교에서 있었던 기간은 5개월.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평양 제1중학교를 거쳐 평양 남산고급중학교[14]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했다.

평양 제1중학교 2학년 때 김정일은 학교 소년단 위원장에 뽑혔고, 남산고급중학교에서는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15]을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선전물에서는 당연히 그의 학업 성적이 전 과정 전 과목에서 최우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前 남산고중 교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나 김정일과 중·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축구 낚시, 사냥에 관심이 있었고 남산고중 시절 이미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것을 즐겼으며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나 긴 글을 읽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공부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성적이 중간이라도 갔던 것을 보면 기본머리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학업에 관심이 없었으나, 김일성은 김정일을 열심히 공부시키려 애를 썼다. 그로 인한 황당한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휴가를 갔는데, 그때마다 김정일을 데리고 가서 틈나면 러시아어 회화를 가르쳐주곤 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 겨울방학이 되어 김일성이 여름에 가르쳐준 러시아어를 시켜보았더니 독해, 문법은 곧잘 해냈지만, 회화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한마디도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벌컥 화를 냈다.

곧바로 교육문화성 간부들에게 '남산고중 러시아어 수업에 대한 검열 과업'이 내려졌다. 특히 남산고중 러시아어 선생들의 회화 실력이 낮은 것 같으니 자세히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어 학습검열 그루빠(그룹)'가 조직되었다. 검열 결과, 남산고중 교사들의 러시아어 실력과 교수법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남산고중 러시아어 교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모스크바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김정일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린데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교사 일부를 교체하는 선에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또 김일성은 김정일의 러시아어 교습을 위해 김형직사범대학의 교수 김현식에게 지시하여 러시아어 과외를 시켰다. 그래도 김정일은 김현식의 지도는 열심히 잘 받아서 러시아어에 능숙해지게 되었다. 김정일은 이후 푸시킨의 시를 러시아어로 발표하는 대회를 가졌고 거기서 우레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16] 이 시기를 즈음해서 어린 시절 어머니 김정숙을 잃고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김정일이 외향적이고 밝아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김정일은 어느 정도 러시아어를 기억한 모양으로 보이는데 김정일을 북러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 수행한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리인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는 김정일이 러시아 외교관들과 같이 있을 때면 러시아어를 알아듣기 때문에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 같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한 분위기였으며 가끔씩 러시아어로 몇마디를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2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을 방문한 푸틴의 특사 로슈코프 역시 김정일이 러시아어를 상당 수준으로 알아듣는 눈치였다고 증언했다. 다만 김정일이 직접 러시아어로 뭔가 말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의 골치를 썩히기는 햇으나, 그와 별개로 동급생들에게 분위기 메이커로 인기는 많았다고 한다. 러시아에 사는[17] 그의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김정일이 아무 친구와도 잘 사귀었고 무엇이든지 정열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남산고중 때 반미 시위를 주동했고 졸업 기념 앨범 제작과 졸업 파티를 주선하는 등 또래 교우들 사이에서 통솔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화, 무용, 음악회를 자주 관람했고 이들을 집에 불러다 가끔 연회를 열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3. 청년기 (1960 ~ 1964)

파일:attachment/김정일/10대시절김정일.jpg
1961년 8월의 김정일. 북한의 공식 설명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의 위대성에 대하여 밝혀주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라고 하지만 이건 후에 선전용으로 붙어낸 얘기이다.[18] 이때는 그 김정일 본인이 맞나 싶을 만큼 정말 날씬해서 '외모가 그나마 준수했던 시절' 이었다(...).

1960년 8월 김일성의 지시로 동독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개월만에 하차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경우처럼, 가명을 사용하여 학적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19] 월간조선 2016년 4월호

베를린에서 발행하는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지도 1994년 7월 12일 이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김정일이 김일성의 명령으로 지난 60년 동독에서 잠깐 유학했지만, 사관생도로서의 엄격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불과 1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고 썼다. 당시 기사 제목은 ‘의문의 인물 김정일에게 동독군은 너무 엄격했다’였다. 하지만 마지막 주 북한 동독 대사를 지낸 역사학자 한스 마레츠키는 이 소식을 듣고 그럴듯 하다고 여겨 직접 조사를 해보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없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적었다. 또한 당시 동독 공군은 창립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서 동독에 유학을 가봤자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었고, 오히려 동독이 소련에서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한창 주체를 강조하던 김일성이 뜬금포로 그닥 배울 것도 없고 사이도 좋지 않은 동독에 김정일을 보냈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고 70년대 문건을 보면 그냥 선전선동부나 조직지도부에 젊고 좀 패기가 있어보이는 조직원이 있으면 그게 김정일이라고 다짜고짜 추정하는 일이 많아서 가짜 김정일이 당시 보도엔 꽤 나온다.

결론적으로 김정일의 동독 유학설은 낭설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김정일은 이미 남산고중 졸업 이전부터 아버지가 자기더러 국내의 대학에 다니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고 학우들에게 말한 바가 있는데 뜬금없이 큰 정치적, 군사적 이익도 없는 동독항공군관학교로 유학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박병엽은 이에 대해서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진학 직전에 비밀리에 갔던 동독 여행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 이외에 여러 학자들도 김정일 동독유학설을 부정하는데, 김학준 교수는 이미 간 유학생들도 불러들이던 판국에 김정일을 갑자기 유학 보냈을 개연성은 낮다고 보았고, 김현식 교수와 손광주 기자가 공저한 다큐멘터리 김정일에서도 조사 후 이를 낭설로 판단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본다면 김정일은 김일성의 의지에 따라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3월에 졸업했다. 김현식의 증언을 보면 김정일이 동급생들에게 아무래도 난 아버지가 국내 대학에 가길 원했다 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도 김일성이 김정일을 국내에서 교육하기 원했음이 드러난다. 그렇지만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김정일은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남산고중을 졸업한 김정일은 당시 북한 사회 지도층에게 널리 퍼져있던 소련 유학 대신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 진학을 택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둘러보면서 안내하던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김정일에게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제 동무도 곧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입학하겠지요?"라고 묻자 "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거기에서 공부할 겁니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과 같은 강대국의 오만한 대국주의 성향에 한 방 먹이고 조국의 자존심을 지킨 사례로 북한내에서 선전되고 있다. 황장엽의 추측으로는 그가 유학을 가지 않은 것은 후계자 경쟁을 이미 미리 염두에 둔 결정일 것이라고 하지만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결정대로, 김정일은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입학날 학교 뒤에 있는 용남산 언덕을 오르면서 즉석에서 삘 받아 지었다는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시는 북한에서 유명하며 시비도 건립되었고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

이후 재학 중에 '10,000페이지 읽기 운동'까지 전개하면서 장서 5만 권을 독파하고, 갖가지 논문을 저술하면서 학구열을 불태우며 천재성을 드러냈으며, 어은동 군사 훈련에서 학우들을 모범적으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그건 지어낸 얘기이다.

사실, 김정일은 초중고 시절과 마찬가지로 학업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거의 매일 수업을 빼먹으며 중앙영화보급소로 나와서 영화를 보는 등, 영화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 중앙영화보급소에서 김정일을 위해 특별 영사실을 따로 마련해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 번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영화보급소로 달아나서 조직지도부가 발칵 뒤집혔고, 영사실에서 김정일을 찾아낸 김영주가 화가 나서 김정일 뺨을 때린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군사훈련에서 맹활약했다는 주장도 선전용으로 있어보일려고 지어낸 애기이다. 당시 김정일은 2학년 말 ~ 3학년 초의 2달 동안 평양시 룡성구역 어은동 소재 군사 훈련소에서 야영 훈련 중이었는데, 김정일은 이때도 야영지를 몰래 빠져나와 영화를 보다가 김정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한참을 찾아다니던 삼촌에게 걸려 얻어맞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김정일은 군대는커녕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장군님'으로 불리고 있고, 그가 훈련을 빼먹고 나가 버렸던 어은동 군사 훈련소는 현재 어은동 혁명사적지로 불리며 김정일을 활약을 기리는 사적지가 되어있다.

대학 시절 발표했다는 졸업 논문을 비롯한 무수한 논문들도, 자신이 쓴 것은 없고 지도 교수였던 경제학 박사 전용식이 대필해주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에 김정일은 학생 당원 신분으로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해 정치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KGB 보고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 시점에서 김일성의 경호원으로도 있었다고 하는데, 2022년 북한에서 내놓은 김정일 숭배책자 <위대한 인간 김정일>에 따르면 1965년 시점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신변을 책임진 책임부관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970년대에 작성된 KGB 문건에서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경호원으로 일했다고 되어 있으며, 북한에서 내놓은 각종 김정일 숭배 책자를 보면 김정일이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며 수령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감놔라배놔라한 일화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김대를 졸업한 후에는 1964년 6월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지냈고, 1966년에는 호위총국에서 근무하였다. 1967년에는 선전선동부 과장, 1970년 9월에는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었다.

4. 후계자 시절 (197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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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어머니의 복수? 유력 후계자가 아니었던 '김정일의 역습'
최악의 독재자 김정일ⓛ
(2023년 12월 16일 방송분)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1050361_01.jpg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힌 모습. 이때 김정일은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되면서 대외적으로도 후계자임을 인정받는다. 뒷쪽의 안경 쓴 인물은 당시 정무원부총리 겸 외교부장 허담이다. 참고로 이 사진에선 짤렸으나 허담 옆에는 부총리 강성산이, 김정일 옆에는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있었다.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40111228233702(0).jpg
집무를 수행 중인 김정일.

김정일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다. 김정일의 개인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시절에 아버지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관심 있어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황장엽을 데리고 소련의 농업 전람관을 직접 함께 방문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17살부터는 김일성의 공식 행사에 동석하면서 김일성의 경호원들을 다른 정치 국원들 대신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세부적인 사항까지 자신이 직접 검토하면서 과업 지시를 하고 또 보고를 받으며, 아버지의 공식적인 활동을 관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를 수행할 때 자리에서 일으키고 신발을 신기고 부축해가는 쇼를 자신이 계획해 실행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노친네도 아니고 4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라 부축이나 수발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지만, 이러한 김정일의 세세한 보살핌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일성 우상화에도 앞장선다. 만경대 김일성 생가, 주체사상탑, 평양 개선문 건설 등을 주도했다.

10대 시절에 이미 김일성과의 부자 관계를 자신의 정적들에게 과시하고 또한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심기를 관리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이미지 메이킹이나 권모술수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 황장엽은 성인이 되기 전의 김정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삼촌 김영주를 쫓아내고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고위 탈북자의 증언에서 확인되는 것은 김정일은 아버지에게서 당연하게 권력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치열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는 점이다. 물론 독재자의 아들로서 엄청나게 유리한 입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공산주의 국가였던 북한에서 그는 군주제 국가의 왕자처럼 김일성 사후 그의 권력을 당연히 승계하는 위치는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에게 강한 권력욕과 뛰어난 정치력이 없었다면 비슷한 신세였던 마오안칭이나 바실리 스탈린처럼 역사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제로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김정일이 설마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인) 주체사상이 아니라 정통 공산주의 이념을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당시에도 공산권 국가들에 독재자는 많이 있었지만 부자세습까지 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혈통에 대한 철저한 우상화 작업과, 당과 군의 원로들에 대한 회유,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모함과 숙청 등을 치밀하게 진행하여 공산권 국가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부자세습에 성공하게 된다.

1967년,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을 하지 않은 해방 이전 세력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갑산파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도운 공으로 김일성의 만주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 소련계, 연안계, 남로당파들을 싹 쓸어버리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욕심이 과해져서 박금철을 김일성에 버금가는 2인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대기 시작했고 김일성의 동생이란 이유로 2인자가 된 김영주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던 것을 통해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된 김일성이 갑산파를 싹 쓸어버린 후 "영화예술 분야에서 반당 종파분자들의 여독을 완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김정일은 영화광인 자신의 취미를 살려 24세의 나이에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지휘 하에 북한 내에서 혁명적 대작으로 꼽히는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유격대 5형제>, <한 자위 단원의 운명>,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특히 피바다는 직접 관람한 혁명원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예술성과 사상성이 결합된 우리식 가극을 창작하였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김일성의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진 자신의 삼촌 김영주와 벌인 충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고 1970년 9월,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70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김영주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에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를 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김일성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김정일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예술 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1972년, 김정일은 마오쩌둥 홍위병을 모방해 국가경제기관 종사원, 대학생, 대학교원, 공장·기업소의 기술자와 과학자 등의 직업을 가진 젊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 3대혁명소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소조들은 전국 각지의 공장과 협동 농장, 행정기관, 문화예술기관, 각급 학교에서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요령주의, 기관 본위주의, 관료주의 등의 악습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 투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배치되었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통제/조정/감독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쥐고서 감시한 정보를 김정일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김정일은 이 소조 활동으로 자신이 권력의 말단에서부터 주요 기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직접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지휘 계통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1973년, 결국 김영주가 건강상의 이유로 2선으로 물러나자 김정일은 1972년 10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73년 7월에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에 임명, 1973년 9월에 조직비서 및 선전비서를 겸하게 되었으며 1974년 2월, 조선로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으로 보선, 당내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 김씨 일가의 권력 사유화를 진두 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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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60년대 북한 사회는 비교적 자유롭고 유연한 사회였다. 갑산파를 비롯한 김일성의 견제 정치세력도 존재했고 주말만 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소련, 헝가리, 폴란드에서 나온 영화를 보며 나들이를 했고, 동유럽과 소련의 민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불야성의 파티를 벌였다.

하지만 1967년 도서정리사업의 피바람이 분 후, 김정일의 3대 혁명을 거치며 서방은 물론 동구권의 문물도 외국 것이니 나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상호 감시, 보고, 비판 체계는 북한 사회를 극도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물론 꽤 자유롭던 분위기를 단순히 김정일이 혼자 없앤 것은 아니고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탈스탈린주의를 표방한 이후로 차차 악화되던 북한-소련 관계와 해방 이후부터 슬슬 태동되던 북한의 통제가 나날이 강성해진 것이 이 때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김정일이 문화적으로 꽉 막혀서는 아니었고,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철저히 아버지의 구미에 맞게끔 문화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신상옥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사극을 만들 때 봉건제의 상징인 상투를 틀어선 안 된다고 교시할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꼰대적인 성향이 짙었다, 김일성은 독서를 장려했지만,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참신하거나 창의적인 작품보다는 도식적인 작품을 내놓으라고 지시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최승희와 안막을 비롯한 예술인들도 대거 숙청하고 투옥했다. 만수대텔레비죤을 개국하면서 이를 전국 방송화하지 않고 평양과 그 근교 일대에만 송출하게 한 것도 김일성이 김정일을 혼내서였다. 나중에 김정일은 후계자로 자리잡게 되자, 김일성이 숙청한 예술인들을 복권시키는 한편, 1980년대에는 일부 외국 문물 및 사극, 무협물, 사회비판물까지 허용했고,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결성을 지시하여 민요와 성악, 가곡 위주였던 북한음악계에 전자음악이라는 개념을 도입시켰으며, 두발자유화 및 여행 자유화 조치도 시도하는 등[20] 북한 기준으론 상당히 놀라운 문화적 자유화 조치를 실시한다. 재미있게도 1980년대 전두환이 집권한 뒤로는 장발단속을 중지하고, 프로 스포츠 출범과 컬러 TV 보급 및 야간통행금지 제도 폐지, 교복 자율화 조치를 시행하는 등 문화규제를 완화하는 일명 3S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김정일과 전두환이 서로 상호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이 터지면서 모두 취소되긴 한다.

김정일의 권력 확대 시도로 김영주는 1980년대까지 권력에서 동떨어진 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김성애가 전국의 여성동맹사무실의 김정숙의 사진을 팽개쳐버리고 자신과 김일성의 생모의 사진을 걸어놓자 격분한 김정일은 계모를 내치기 위해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을 시켜 김성애 일가가 부화방탕한 행동을 했는지 비밀리에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성과 사이가 돈독한 김성애를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축소하는 일이었고, 김정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게다가 이 시기에 그는 12살 어린 이복동생 김평일의 도전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는데, 김평일은 키가 180cm에 달하는 장신에다가 아버지를 닮아 원로들의 호감을 샀고,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대단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온 대학생들을 자신의 수하로 휘어잡은 인물이었다.[21] 이에 온 이북이 "다음 수령은 김평일이 되겠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김현식은 정작 김평일 본인이 그다지 권력에 관심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1972년 김일성의 회갑 잔치에서 빨치산 원로들에게 김일성이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물었다.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22]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23]이 "수령님, 당연히 수령님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위 일화는 어느 정도 과장된 부분이 있어보이는데 이미 정치국과 비서국에 들어왔고 박병엽 등의 증언에 따르면 갑산파 숙청에도 동참했고, 나이도 30대에 접어들어서 당 내에서 입지가 충분하던 김정일에게 일개 학부생에 불과한 김평일은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일성이 정말로 저런 질문을 했다면 1972년에는 거의 답정너에 가까운 쇼인 것이다.

결국 1972년 4월 김일성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여 "우리 집안, 우리 만경대 집안의 혈통은 김정숙 혈통입니다. 김정숙 혈통만이 백두산에서 시작된 우리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습니다."라고 교시를 내림으로써 김평일을 내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3년 여름, 김성애의 아들들을 나락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터진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아껴두고 또 아꼈던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려던 부지를 김일성이 방문했는데, 여기에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져 있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깜짝 놀라서 "뭐이야. 이게? 누구네 집이야?"라고 묻자 저택을 지키던 보초가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당비서, 김성갑[24]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이것을 보면서 대노했고 "뭐이야? 김성갑이가 여기 살아? 언제부터?"라고 외치고는 사무실에 김성갑을 불러서 간부들 앞에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했다고 한다.

그 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성격했던 김성애는 김일성을 미안하다고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딸 김경진과 아들 김평일을 데리고 김일성과 한바탕 싸우기 위해 나타났다. 처남을 조진 것이 약간 미안했던 김일성이 아내 대신에 딸 김경진에게 말을 걸며 모른척 하자 분노한 김성애가 "밥이 뭐요? 낮에 자기 처남을 그렇게 핀잔주고 비판하고 남들 앞에서 그렇게 깎아내리고, 밥이 넘어가겠소?"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일은 강성산이 했는데 왜 욕은 김성갑이 먹어야 하냐면서 마구 자기 혼자 잘 살자고 그랬나, 당신 가시어머니 잘 모시려고 그런 것인데 가시어머니가 번듯한 집에 살면 당신 위신이 떨어지나?" 라고 마구 바가지를 긁어댔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던 김일성이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려쳐서 접시를 깨버렸지만 김성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폭언을 퍼부어댔다.
"당신 부모 묘는 요란하게 꾸며놓더니, 우리 엄마는 좋은 집에 살면 안됩니까? 우리 엄마가 잘 살면 당신 배가 아파요?"

그리고 김일성이 먹던 밥상을 걷어차는 바람에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한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당연히 폭발했고, 김성애를 구타하려 했지만 김평일이 김일성의 주먹을 쥐고 말리고 김성애에겐 자기 대학 졸업할 때까진 제발 좀 참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식당에서 끌어내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의 러시아어 교사를 했던 김현식 교수의 증언으로, 나중에 김현식은 김성갑의 자녀들 과외교사도 하면서 김성애와 자주 만났는데, 그녀로부터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친족들, 친지들, 그리고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의 비리까지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는데, 사건의 원천이 된 김성갑은 자기일은 뒷전이고 아편과 성파티로 날밤을 새우는 문란한 생활을 한다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도 했고 다시 강도높은 검열과 사상검증을 실시했다. 김일성은 특히 김성갑이 아편쟁이에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여자들이나 농락한다는 사실에 분기탱천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이들 대부분은 숙청되면서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평양시 책임비서로 김성갑이 집 짓는 것을 도와준 강성산도 크게 질책을 받고 평양시 책임비서에서 해임되어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으로 좌천되어버렸고 이후로도 김정일은 강성산을 미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김성애의 권세는 유지되어[25] 1974년 1월 1일 김일성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신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 의자가 준비되었는데, 김일성을 위한 황금의자 옆에 김성애를 위한 황금의자가 나란히 놓여서, 그것을 본 김정일이 "김성애가 당 간부도 아닌데, 왜 황금의자를 두냐?" 라고 길길이 날뛰다가 김성애가 눈 앞에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손하게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김성애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었고 80년대엔 북한에서 "김정일의 최고 업적이 중앙여맹비서를 제친 것이다" 라는 농담이 돌았을 정도였다.

여러가지 정치공작의 결과, 김정일은 마침내 1974년 2월 1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 5기 제 8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공식선출되었고 '유일한 후계자'임이 공식화가 되었다. 이후 김영주를 철직시킨 뒤, 일가족을 량강도 유배를 보내버렸고 특히 사저신축 사건으로 몰락한 김평일은 1979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대사로 파견된 이래 아버지 김일성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동유럽의 해외 대사로만 근무하며 북한 땅에 발 붙이지 못 하는 야인 신세를 지금도 면치 못하고 있다. 김평일의 동생이자 똑같이 김정일에게 이복동생이 되는 김영일도 운명은 비슷했고 그는 2000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김성애는 완전히 정치적인 폐인이 된 채로 지내다가 지미 카터 방북 시에 잠깐 빛을 보곤 은거하다가 2014년 들어서 사망설이 돌고 있다. 그래도, 장수했는지 90세까진 살았다. 이때 곁가지로 지목된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김영주만 1993년에 정치국 위원, 부주석에 선출되면서 정치적으로 재기하였고 김정일 시기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신분의 정권 원로로 대접받았다. 이를 보면 김영주와 김정일의 관계만 양호했고 또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의 상징성도 무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이 권력을 잡아갈 시기에는 이른바 기쁨조라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최고 지도자의 유희팀도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인민국 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김일성의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하면서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서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신명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1976년 김정일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그가 지휘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북한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가자 정권 내에서 김정일 반대파들이 대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고 당중앙이란 호칭도 더이상 쓰지 못 하게 했다. 이에 신이 난 김정일의 반대파들이 앞을 다투어 김정일을 성토했는데, 김현식의 설명에 따르면, 사실은 이게 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페이크 작전이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문에 당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김정일을 위해서 김일성이 짐짓 김정일을 내쳐버릴듯 쇼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 김정일 반대파에요!" 라고 커밍아웃을 했던 반대파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김동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1978) 같은 일도 저질렀다.

이렇게 고도의 권모술수로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됨으로써 당정군을 모두 장악했고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김일성은 김정일을 사실상 대리청정하는 세자로 삼아서 그를 여러 분야의 전면에 내세웠다. 이 때부터 김정일은 본격적으로 김일성에 버금가는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김정일은 문화자유화를 부분적으로 단행하면서 북한주민들의 문화적 구미를 총족시키는 정책을 펼쳤지만, 동시에 북한의 경제성장률이 3% 안팍으로 침체되어가는 국면에서도 체제경쟁에 몰두하여 류경호텔 주체사상탑 건설,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비롯하여 토건사업 및 행사 개최에 많은 돈을 투입했다. 그나마 1980년대 당대에는 경기가 침체되는 선에 머물렀지만, 나중에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자 여유자금이 바닥난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닥쳐온다.

1991년 12월 24일에는 조선인민군 중대정치지도원대회를 통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데 이어 1992년에는 오진우와 함께 원수 계급을 받으면서 마침내 군 통수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결국,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떠한 보고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장님에 귀머거리에다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황장엽의 주장에 따르면 '최고 고문'의 자리까지 사실상 밀려나게 되었다. 심지어, 김일성은 말년에 자신의 생일에 아들 김정일에게 아첨을 하고 김정일의 50번째 생일인 1992년 2월 16일에는 송시 ' 광명성 찬가' 를 직접 써서 바치기도 했다. 참고자료[26]

공산주의 국가 최강독재자 스탈린 마오쩌둥도 안 한 권력의 부자 세습이라는 현대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를 만들었고 북한을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 전제군주제로 바꿔버렸다.[27]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북한만의 현상은 아닌 것이, 3대 세습을 먼저 달성한 니카라과 소모사 가문의 전례가 있으며 장제스, 리콴유, 알 아사드, 알리예프는 2대 세습에 성공했고, 독립국은 아니지만 러시아 체첸 공화국 카디로프 역시 2대 세습에 성공했다. 이는 후세인, 카다피, 차우셰스쿠도 따라하려고 했다.[28] 다만, 북한은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저렇게 추한 짓거리를 해서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29] 북한도 비판 여론을 눈치채고는 김정은 집권 극초기까지는 김정일이 실력으로 승계받았다고 밝히며 혈연 세습 주장을 부정해왔다.[30]

이를 두고 봉건왕국이니 뭐니 하는 비난들이 특히 1950년대에 숙청돼서 중국과 소련으로 망명한 사람들로부터 많이 나오긴 했지만, 학계에서는 1980년대의 이정식의 연구를 필두로 소련과 중국에서 후계자가 계승한 이후 선대 수령을 격하하거나( 흐루쇼프) 후계자의 난( 류사오치, 린뱌오)이 일어난 꼴을 많이 본 상황에서 유독 체제 변혁을 거부한 김일성이 자신의 혁명을 이어나갈 것은 아들 뿐이라고 여겨 맡긴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김정일 본인도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기술은 탁월했고 여러모로 기를 썼기 때문에, 만약 김정일이 아예 무능력하고 정치적 업적이 없는 한량에 불과했다면 권력 승계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5. 집권 이후 행보 (1994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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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의 밀실 파티?
최악의 독재자 김정일②
(2023년 12월 23일 방송분)

김일성이 죽고 난 뒤 장례를 치를 때 장의위원 명단에 제1순위로 이름을 올려 '애도기간'을 강요했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첫 활동으로 낮 12시에 특별중대방송[31]을 통해 평양시에 청류다리(2단계)와 금릉2동굴을 건설할데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51호'[32])라고 온세계에 말해버린 황당한 해프닝[33]이 있었다.[34]

그리고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자신도 같은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에 질린 모양인데 김일성 사망 직후부터 유진 벨 재단을 통해 미국에 접촉하여 제세동기와 내시경 수술기를 보내달라고 계속 졸라댔다. 결국 1999년 5월에 미국 측에서 의료기구들을 보내주었고, 북한에서 꽤 잘 썼는지 내시경 수술기 소모품을 계속 보내달라고 귀찮게 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 8월, 3명의 의사들을 불러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응급의료와 심장의학 관련한 연수를 받게 했다. 2000년 6월, 김정일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소련 의학은 미국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면서 소련 의학에 대한 불신을 표명했다. 이후 측근 김국태도 뉴욕에 비밀리에 보내서 수술을 받게 해주었다.

5.1. 고난의 행군 (1994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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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북한의 핵개발 (1993~현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북한의 핵개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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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한영 암살 지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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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의 생전 모습

1982년 남으로 탈북한 처조카 이한영이 1996년 방송에서 김정일 자신의 음란하고 사치스런 사생활을 폭로[35]하자 1997년 2월 15일 공작원을 보내 분당 아파트에서 이한영을 암살했다. 공작원들은 이한영을 암살한 직후 연락선을 타고 북한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하여 이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한영 암살 사건 문서 참조.

5.4. 심화조 사건 (1997 ~ 2000)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심화조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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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집권 초기였던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약 25,000명을 대거 숙청했다. 마치 부친인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최고권력자 위치에 오른 것처럼, 김정일 역시 초반 자신을 레임덕 신세로 만들려는 정적들을 완전히 숙청하여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최고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5.5. 선군정치 (1990년대~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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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남북정상회담 (200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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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평양공항에서 악수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과 2007년, 2차례 이루어졌다.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헌정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방북하여 김정일과 회담하였다.[36] 6월 15일 두 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 서울에서 이루어졌고, 대북사업 자체는 원활하게 추진되어갔다. 다만 회담문에도 명시되어있는 김정일의 답방은 끝내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직후 조명록의 미국 방문이 있었으며, 김정일은 클린턴을 미국으로 초청하면서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도모하였다. 이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들 김정은 시대에야 현실화되었으나, 미국은 대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미사일 문제를 논하게 하였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의 방북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우려 사흘이나 연회를 열면서 이를 축하했다고 한다. 미국 국무장관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한 올브라이트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프로젝트에 대한 중단을 요구하자 김정일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1. 외화 벌이, 2. 남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대응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미국이 북한이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해줄 것과 남한에 추가적으로 무기를 배치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미국 외교가에서 김정일은 광증에 시달리는 히키코모리 취급이었고, 김정일은 미국 측에 자신이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대단히 명석한 인물임을 보여주기 위해 고도의 준비를 하였다. 올브라이트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김정일에게 계속 던졌지만, 김정일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보좌관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모두 높은 수준의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미국 측이 제시한 14항 군축 관련 질문서에도 김정일은 요점을 잘 짚어서 대단히 기술적인 문제들까지 상세히 답변하였고 민감한 부분이나 자신이 모르는 부분은 교묘하게 잘 넘겼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김정일은 자신이 미국 측을 잘 상대했다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이듬해 푸틴을 만나기 위한 시베리아 기차여행에 동행한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에게 올브라이트가 자신을 취조하려들었지만 자신이 잘 상대했다고 자랑하였다. 회담이 끝난 후 올브라이트는 마이클 조던이 싸인한 농구공을 주었고 언제든지 자신에게 전화를 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했는데, 김정일은 북한이 현대화됐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메일 주소를 대신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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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4일,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37]

2번째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역시 2박 3일 일정으로 개최되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육로로 평양까지 이동해 김정일을 만났다. 10.4 남북공동선언은 6.15 공동선언의 기본 내용을 확장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직접적인 종전 선언에 대한 남북정상의 의지와 향후 계획에 대한 천명까지 담겼다. 그러나 이듬 해인 2008년 금강산에서 발생한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대북사업의 주요 상품이었던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이 폐지되며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으며 남북정상회담은 이 후 10여 년간 열리지 못했다.

5.7. 북일정상회담 (200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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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김정일-고이즈미[38]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총리와 2차례 북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조총련의 존재와 70~80년대 사이 벌어진 일본인 납북 사건등으로 인해 오랜시간 악화되어있던 북일관계 개선을 위해 추진되었다. 2002년 치러진 1차 회담에서 김정일은 일본인 납북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명했고, 이와 동시에 납북자 가족 5명을 일본으로 송환시켜주었다. 2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두 국가의 공식수교 가능성도 점쳐졌으나 이뤄지지 못했고, 이 후 북한 핵실험으로 양국 사이가 악화되며 2023년 현재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공식국교를 맺지 않은 상태이다.

6. 뇌졸중 투병 과정(2008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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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수척해버린 김정일.

21세기가 되고 나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6개월 사이에 완전 해골이 될 정도로 살이 확 빠지기도 했다. 넘쳐나던 뱃살마저 사라지고 없어졌다. 췌장암에 걸려서 길어도 2011~13년에는 사망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가 하면 1년 정도 남았다는 설도 나왔다. 2009년 12월 1일 피습 사망 루머가 퍼지면서 코스피 지수와 코스닥 지수가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사망 소식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병명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췌장암에 걸린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왔으나 그냥 머리 빠진 거 보고 때려맞춘 것에 가까웠다. #

실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장으로 끝나는 장기가 모두 안 좋았다고 하며 식후에 5종류의 약을 먹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약을 먹으면서 "아, 나는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 거냐?"라고 뇌까렸다고 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70세로 죽었다.

정말 웃긴 것은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만수무강연구소' 를 건립하고 이에 많은 돈을 들인다는 건데, 아무리 의사가 노력해도 본인이 자기 관리를 전혀 안 한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39] 아버지 김일성은 그래도 아들 김정일만큼 문란하지도 않았고 말년기에 뒤늦게나마 음주와 흡연을 줄이고 오침에 드는 등 자기관리에 신경을 써서 80이 넘을 때까지 나름 건강하게 살다가 갔지만 그 부분에서도 김정일이 더욱 실패한 것이다.

훗날 밝혀지기로는 2008년 8월 15일에 이미 심각한 뇌졸중을 겪어 3달 동안 거의 자리에 누워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라종일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장성택의 길'에서 김정일이 쓰러진 상태에서 김정일의 역할을 대신했던 사람은 장성택이였다고 말하며 그가 아니었다면 북한이 매우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당시 북한 간부들은 북한 내의 의료진으로 김정일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장성택이 해외 의료진을 초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김정일과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프랑스의 루 박사를 초빙하여 몇 차례에 걸쳐 치료하도록 시켰다. 이에 김정일은 약 80일 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회복되었다.

주성하 기자가 밝힌 내용을 보면 루 박사가 초대되었을 때 북한에서 10명의 CT 사진을 보여주었고 이에 증상이 심각하다고 보인 환자를 루 박사가 진료하겠다고 말하자 무려 7시간이 넘는 회의를 한 후 집중치료실로 루 박사를 데려갔다. 그 병상에 있던 사람은 바로 김정일로 뇌졸중으로 인해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루 박사는 김정일 10일 동안 치료하였고 9월과 10월에도 프랑스와 북한을 오가면서 김정일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웬 젊은 사람이 김정일을 매우 극진히 보살폈는데 그가 바로 김정은이었다고 한다. 한편 김정일의 건강이 회복되고 있을 당시 국정원에서 "김정일이 칫솔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40]

장성택은 김정일이 쓰러졌다는 것을 알리면 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2008년 북한 수립 60주년 9·9절 행사에 김정일이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이에 행사장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김정일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매우 당황했으며 몇 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김정일이 불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이에 9·9절 행사는 대대적으로 축소된 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정일에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주장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김정일은 치료를 받고 80일만에 공식석상에 나서기는 했지만 뇌졸중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라종일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김정일이 의식을 회복하고 외부 활동은 했지만 건강은 최악이었다고 증언하며, 신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는지 특히 이미 고인이 된 김일성을 마치 생존한 인물처럼 언급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주장했다.

뇌졸중이 발병한 뒤 병석에서 일어난 김정일은 어느날 함흥에 있는 2·8 비날론 공장 현지지도에 나섰다. 이 공장은 월북자 출신의 화학자 리승기 박사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든 공장으로 석회석을 주원료로 삼아 화학섬유 비날론을 생산했지만 섬유의 질이 떨어지고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통에 가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이였다. 하지만 비날론 공장은 김정일의 방문에 즈음해 설비를 정비하고 생산라인을 전면 가동했던 것처럼 위장시킨 상태였다. 이 때 시찰에 나선 김정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제품을 보고 흐뭇해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무들 이 비날론을 포장하시오. 수령님께 가져다 보여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이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할 말을 잃고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병세가 짙어지면서 김정일은 때때로 극과 극을 오갔으며, 주변을 의심하면서 이것저것 앞뒤가 맞지 않은 지시를 했다. 당시에 하태경 열린북한통신 대표는 김정일이 호위병들이 보는데도 술을 먹으면서 자주 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하며 "신경과 의사들에게 체크를 해보니까 (뇌졸중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있을 수 있다. 우울증이 나타나면 동반증세가 무엇이 있는가 했더니 술 담배가 그렇게 당긴다고 하더라"고 전했다.[41] 한마디로 음주와 흡연이 뇌졸중 후유증에 따른 우울증 때문이라는 것. 또 김정일이 현지 지도나 지방 시찰에 나간 것이 2009년에 전년도에 비해 1.5배 늘었다면서 "사실은 자기 건강을 위해서 오히려 운동을 많이 해야 하니까 그것을 핑계삼아서 많이 돌아다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본다"고 주장했다. #

김정일은 이처럼 뇌줄중에서 어렵게 회복은 했지만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에 참모들은 해외에서 의료진을 초빙했다. 모두 엄격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가운데 이뤄졌으며, 중국의 중의사들을 불러들였을 당시에는 김정일 병세에 관한 정보 유출을 막고자 여러 명의 디코이[42]도 동원됐다. 라종일 교수는 당시 상황과 관련된 증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국에서 한의사(중의사)들을 불러 들였을 때에는 그를 포함해서 그와 유사한 체형의 유사 질환을 앓는 10여 명의 환자를 얼굴을 가리고 함께 진맥하도록 해서 그의 건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중국에서 온 한의사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증상의 환자를 여럿 진찰했지만 그들 중 누가 김정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챙길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 따라 증상의 경중 차이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

6.1. 급한 후계자 선정 (200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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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뇌졸중으로부터 의식을 회복한 후 처음 당면한 문제가 후계 문제였다. 이에 김정일은 병상 곁에 근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들, 즉 황순희, 김옥 그리고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까지 내보내고 장성택, 김경희 부부만을 남게 했다. 그러고는 바로 ‘혁명의 후계자’를 누구로 해야 하는가 물었다. 김경희는 이때 이미 술과 마약 중독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한 상태였기에 그녀는 말없이 남편을 쳐다보았다. 장성택은 평소 김정일이 마음을 두고 있는 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보기에도 해외에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김정남이나 유약한 김정철보다 김정은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김정은을 잘 보좌하면서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이에 장성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 막내 아드님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김정일은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얼굴에 안도와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고 하며, 한참 만에 김정일이 말했다.
'그래, 막내를 세웁시다. 그러나 내가 공개하라고 할 때까지 이것은 비밀로 하십시오'

그 후 김정일은 군부대나 당 중앙위원회 행사들에 김정은을 동반해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43]

훗날 밝혀지기로는 한미 정보당국도 김정일이 오래 못살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기사에 의하면 2008년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의 머리 부위에 대한 CT(컴퓨터단층촬영) 한미 정보당국이 자료를 입수했으며 이를 토대로 그의 여생을 3~5년으로 판단했었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한 적도 있다. # 당시 김정일이 쓰러진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그의 CT 스캔 영상을 입수, 뇌 상태를 상세히 검토한 뒤 '여생이 3~5년'이라고 판단했었다. 그 이유는 3~5년 이내 뇌졸중이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그 이유였으며, 김정일의 병세로 봤을 때 재발할 경우 '연명이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44] 그리고 당시 김정일이 당뇨병을 앓아온 것도 파악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정일이 2008년 11월 회복한 뒤 김정은에 대한 권력승계 작업에 매진했고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잇따라 방문했지만, 권력승계를 둘러싼 스트레스가 결과적으로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당시에 이명박 정부가 갑작스럽게 통일을 강조하며 대북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북한 붕괴론을 확산시킨 데는 이 같은 정보판단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1년 6월 21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며 “한밤 중에 그렇게 올 것이기 때문에 항상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일이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오해를 살까 봐 말을 안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뜬금없는 북한 붕괴론이란 지적이 많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불과 6개월 뒤인 2011년 12월 17일 갑자기 사망하며 3~5년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2008년 한미 양국의 예측이 적중했다. 최진욱 통일연구원장은 “이명박정부는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에 대해 큰 기대감이 없었기에 갑작스런 통일에 대비하자는 어젠다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더라도 김 전 위원장의 심각한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당국의 한 인사는 “이명박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 정권이 붕괴될 걸로 봤다”며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들 김정은에게 왕위가 이양됐다”고 말했다. #

2009년 들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설이 파다해지고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설이 돌았다. 그런데 2010년 1월 9일에는 '북한 인민 생활에는 걸린 것(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발언은 김일성의 1994년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선언, 1996년 김일성종합대학 연설의 '식량 부족으로 무정부상태가 되고 있다' 발언 등으로 유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난의 행군을 어찌되었건 북한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마무리하고 2012년 강성대국을 목표로 주장하며 '나름대로 살 만하다' 는 주장을 하던 와중에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

아무튼 자신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체감한 김정일은 2010년 들어서 자국 내 지지 기반이 약한 아들내미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껀수들을 벌어와서 그 공을 아들에게 먹여주는 식으로 뛰었다고 한다. 저리도 열심히 뛰었던 걸 보면, '저 정도 노력을 좀 더 일찍 북한 주민들을 위해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45]

7. 사망 (2011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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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7일 08시 30분에 김정일 심근경색 및 심장성 쇼크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8.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1973년 7월 1983년?
조선로동당 5,6기 중앙위원회 비서
1973년 9월 17일 1997년 10월 8일? 5기 7중전회에서 선출
6차 당대회에서 재선
총비서로 추대?
조선로동당 5기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4년 2월 13일 1980년 10월 14일 5기 8중전회에서 보선
6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1974년 2월 13일 1997년 10월 8일? 5기 8중전회에서 임명
6차 당대회에서 재선?
총비서로 추대?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1980년 10월 14일 2011년 12월 17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3차 당대표자회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9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0년 5월 26일 1993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위원장으로 승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1년 12월 24일 2011년 12월 17일 6기 18중전회에서 추대
임기 중 사망
9, 10, 11, 12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1993년 4월 9일 2011년 12월 17일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조선로동당 총비서
1997년 10월 8일 2011년 12월 17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연명으로 추대
3차 당대표자회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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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4년 정식 승계 시부터 2011년 사망 전까지는 아버지 김일성처럼 안경을 안 쓰고 입을 굳게 닫은 초상화를 썼다.( 동아일보 기사) 초상화 그림은 이 사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2] 우수리스크. [3] 남파공작원으로 내려와 감옥살이를 하다가 '수기'를 남긴 김진계의 경우 수기에서 김정일화의 방송 내용은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우상숭배의 한 예였다. 백두산 밀영에서 나무에 새겨진 김정일 탄생을 알리는 글귀를 찾아냈고 또 그것을 찾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는 보도는 고구려 주몽의 탄생설화처럼 신화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일 수 있으나 과학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시도일 뿐이다. 그것은 지나친 정도를 넘어서서 내게 거부감만 일으켰다.라는 말을 남겼다. 즉,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은 북한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자원입대를 하여 전선에서 3년을 보냈으며, 북한에 대해 큰 악의감이 사실상 없던,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것에 따라 남한 정부와 미국에 대한 반감을 아주 강하게 가지고 있던 남파공작원 김진계가 보기에도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하)』, 현장문학사, 1990, 321~322쪽. [4] '이르세노비치'는 러시아식 이름에 있는 부칭(父稱)이다. 아버지 '일성'의 러시아식 표기는 '이르센'인데 여기에 남성 접미사 '-오비치'를 붙인 호칭이다. [5] 북한에서는 신학기가 가을이라고 한다. [6] 그러나 한국 전통 작명법에 따르면 뼈대있는 가문일수록 임금이나 자기 직계 조상의 이름자를 일부러 피하여 이름을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김정일과 김정은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자를 일부러 취해 쓰는 것은 전통 유교사상의 잣대로 보자면 그야말로 근본없는 개족보 가문의 행태이다. 선대의 이름자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의 통자(通字)나 편휘(偏諱) 관습에 가깝다. [7] 러시아 이름으로 슈라 [8] 버전에 따라서 다른데, 5호댁(2023년 기준, 경루동) 분수대에서 빠져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영상 [9] 김정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김일성의 당시 주치의의 아들인 세르게이 리는 "당시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 둘만 거기 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빠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10] 심지어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식날 김성애가 참석하자 졸업식장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졸업식이 며칠 연기되었다고 한다. [11] 물론 김성애를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 사망하여 기억이 많지 않을텐데도 친어머니인 김정숙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것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김일성이 왜 김성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냐고 하자 조국이 하나이듯 어머니도 하나이며 오직 김정숙만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12]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 넘게 복무하다가 제대한 후 고난의 행군 때문에 탈북한 이영국은, 김정일이 당 비서들이나 호위사령관이 검문을 받지 않고 자신의 관저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일을 개판으로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거침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김경희는 아무도 감히 막을 수도 없었고 또 왜 김경희는 검문하지 않았냐고 김정일이 화내는 일도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13] 김정일이 잠시 지나간 자리조차 우상화가 되는 곳이 북한인데, 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 또한 우상화가 안 될 수가 없다. 2015년 2월 16일 밤에 방송된 조선중앙텔레비죤 프로그램에서는 김정일 옆 자리에 앉게 된 일흔의 노인이 김정일과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데, 김정일 칭찬으로 가득하다. 점심 식사시간에 잡곡밥과 오이절임 같이 평범한 애들이 먹는 도시락을 싸왔다던지, 1954년 1월 중순에는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에게 가죽 외투를 공짜로 주었다던지 주로 방송에서 강조하는 건 '장군님은 부자와는 달리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옷차림에 평범한 식사 등등 다른 일반 애들과 다를 바 없는 인민학교 시절을 살았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그램 후반부에서는 만경대 가문 출신임을 강조, 그 다음으로는 김정일이 직접 창작했다는 음악이 나왔다. 이 날은 김정일의 생일으로서, 조선중앙텔레비전은 24시간 내내 김정일 찬양방송 일색이었다. [14] 남한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 [15] 위원장은 교사가 맡는다. [16] 여담으로 이후 김현식 교수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현식 교수는 옛 정을 상기하며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작성했지만, 서한을 다 쓰기 전에 김정일이 죽었다. [17] 객관성이 보장된다. [18] 사실 이때는 김정일이 아직 스무살이던 시기이고,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기도 전일 뿐더러 김일성도 아직 완전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전이었다. [19] 1984년 안기부가 작성한 대외비 문건에서 언급하였다. [20] 다만 두발자유화 조치는 청년들 사이에서 히피 스타일 장발이 유행하자 바로 그만두었고, 여행 자유화도 1989년에 시도했으나 몇달 안가서 평양 주민들만 제외하고 중지했다. [21] 북한 관련 프로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난 후 김평일이 대학생들을 모두 모은 후 "우리 모두 전장으로 가서 승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통일의 광장으로 모시자"며 학생들을 독려한 후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자원입대했다고 한다. 정황상 졸병으로 입대한 것이 아니라 장교급의 군관으로 군생활을 한 것 같다. [2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 군주 앞에서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작살난 양반들 많은 걸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23]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 중 하나로 최룡해의 부친. [24] 김정일의 계모 김성애의 남동생. 그런데 해군 정치위원이었다는 것은 김현식의 증언이고, 소련 외교문서에는 평양시 당위원회 제2비서라고 되어 있다. [25] 김성애의 오빠, 김성갑의 형이 다름아닌 김광협 장군이다. 게다가 김성애가 김일성 본인과 혈연이다. 하지만 김정일과는 혈연이 아니다. [26] 원본은 다음과 같다.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이를 " 인류사 최고의 명서체"인 것처럼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파일:김일성 글씨.jpg [27] 스탈린과 마오쩌둥 역시 김일성 못지 않은 공산국가 독재자로 꼽히지만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들만큼은 김일성과 달리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의 실천으로 잘 키웠다. 스탈린의 경우 독소전쟁 당시 아들이 위관급 장교로 입대하여 나치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 독일 국방군 측에서 원수급의 나치 독일군 장군과 포로 교환을 하자고 했는데,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당연히 스탈린이 아들을 위해 승낙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스탈린은 '어떻게 원수를 중위와 바꾼단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은 중일전쟁과 같이 중국의 외부의 침략으로 직접 교전당사국이 된 것도 아니고 국공내전과 같이 중국의 운명을 놓고 촌각을 다투는 전쟁도 아닌 김일성이 일으킨 외국의 전쟁 6.25 전쟁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을 듣고 조용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로서 어떻게 아들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무자비하고 잔혹해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그들이 지도자로서 자녀에게 특혜를 주지 않는 공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둘 다 그나마 멀쩡한 장남들이 사망하고 차기 후계자가 가능한 차남들이 서로 결격사유가 있었기에(바실리 스탈린 - 알콜중독/마오안칭 - 정신지체) 세습을 할 수 없던 사정도 존재한다. [28] 후세인의 경우에는 차남 쿠세이 후세인을, 카다피는 차남 사이프 카다피를, 차우셰스쿠는 차남 니쿠 차우셰스쿠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후세인과 카다피는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미국의 공격으로 몰락하여 각각 과도정부와 혁명군에 의해 처형되었고 차우셰스쿠도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혁명으로 축출되어 처형 당했다. [29] 실제로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자들과 진보 단체들은 김일성의 아들이 북한의 차기 지도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반동 거짓 선전이 분명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고 한다. # 1990년 10월 소련의 정치주간지 '노브에 브레미야'에서도 한국-소련 수교 후 한반도 정책에 관한 논설에서 북한의 사회주의를 '세습적 군주제도'에 빗대며 북한을 신랄히 비판, 북한 정권에 대한 경의표명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30] 다만 김정은이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메꾸고자 백두혈통 드립을 시작하면서 '능력으로 세습받았다' 드립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1] 제3방송 등을 통해서는 새벽부터 필청을 명령하였고, 대외에서도 수신 가능한 방송으로는 오전 10시부터 4차례에 걸쳐 예고했다. [32] 해당 명령 번호는 이후 김정은과 그 똘마니들의 대장 진급을 발표할 때 다시 쓰였다. [33] 탈북작가 도명학의 의견에 따르면, 이북에서는 숟가락으로 파도 굴을 팠다고 주장할 만큼 인민들을 동원해 전쟁용 굴 (갱도)을 하도 오랫동안 뚫어서 굴이 많다고 할 뿐이지, 터널을 잘 뚫어서 굴이 많은 게 아니라고 하며, 남굴사 병신같은 주장을 현지인의 경험으로 역시나 부정했다. 링크된 동영상의 3분부터 참조. [34] 여담으로 금릉2동굴은 약 800m (2리)의 편도2차선 쌍굴식 자동차 터널이다. 아무리 남한에서 그 당시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비롯한 중대재해가 많이 발생했어서 남한을 핑계삼아 동문서답한 것이라고 분석되었다지만, 영상에서 10리니 5리니 하는 것보다도 훨씬 짧은 이딴 걸 가지고 김정일은 대내외에 '우리 이런 터널도 뚫을 줄 안다!'라고 (그것도 자기네 체제의 ''이 죽고 난 다음 온 세계가 민감해진 상황에서) 자랑하고 선전하고 다닌 것이고, 후일 김일성종합대학을 통해 '세계를 놀래운 중대방송'이라면서 어떻게든 사회주의의 순기능과 엮어 자화자찬하려는 철딱서니없는 짓을 국가(체제) 단위로 하였다. [35] 사실 탈북 이후 조용히 살고자 하였으나 남한에서의 생활고 때문에 이모부 김정일의 사생활을 방송에서 대놓고 폭로했다. [36]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평양공항 트랩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현재까지도 남북경협사업 관련 행사나 매체 등에서 자료화면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37] 노무현은 168cm이기 때문에 육안상 키가 비슷해보이는 김정일이 키높이 구두를 신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김정일은 공식적으론 162cm이며 157~160cm이라는 설도 있고 키가 162cm면 노무현과 저 정도로 비슷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키높이 구두를 신었음이 확실시된다. [38] 고이즈미 역시 169cm이기에 김정일이 키높이 구두를 신었음을 확실시할 수 있다. [39] 본인의 자기 관리가 건강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영화에서도 언급될 정도인데 킬러의 보디가드에서 라이언 레이놀즈가 연기한 주인공 브라이스가 고객의 장례를 치르면서 경호원이 총알로부터 막아줄 수는 있어도 매일 마요네즈를 먹는 것은 못 막는다며 자신이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별의별 수단을 다 써도 소용 없다는 말을 한다. 김정일 역시 수많은 인민들을 참혹하게 죽이고 기본적 의료혜택조차 못 받게 해놓고서 본인만을 위해 저렇게 어마어마한 공을 들여도 결국 자기관리에 실패해 질병으로 고통 받고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드러냈다. [40] 당시 이 발표에 김정일의 칫솔질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중요한 정보원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으나 훗날 밝혀지기로는 북한에서 프랑스로 보낸 CT 사진을 한미 정보당국이 입수하여 이를 분석하였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41] 실제로 김정일은 2000년 담배를 끊었다가 말년에 다시 폈다 [42] 대역 또는 카게무샤라기에는 그저 김정일도 타인들 사이에 숨었다는 점에서 디코이가 더 의미에 부합하는 표현이다. [43] 장성택의 길 232 페이지 [44] 한편 미국의 기자 2명이 북한 국경에서 납치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빌 클린턴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을 만났는데 수행원 중에는 클린턴의 주치의가 있었고 그는 김정일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종합해본 결론은 길어야 3년 정도였다고.. 참고로 미국은 오래 전부터 각국의 독재자들의 건강을 파악해왔는데 가령 소련의 브레주네프의 죽음도 예측했었다고 한다. [45] 다만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김정일의 악마적 면모를 생각하면 그저 별 의미 없는 푸념에 불과하니 씁쓸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