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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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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망
金日成死亡

The Death of Kim Il-sung
파일:김일성 마지막.jpg
▲ 김일성의 마지막 지시 때 모습
( 1994년 7월 6일[1])
파일:김일성 장례식.png
▲ 김일성 장례식
( 1994년 7월 19일 / 평양시 길거리)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발생일자 1994년 7월 8일 02시 (사망시점 / D-day)
1994년 7월 9일 12시 (사망사실 공표 / D+1)
1994년 7월 19일 (장례식 / D+12)
발생장소

향산특각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2]
당사자 김일성
( 1912년생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주석)
사인 심근경색
영향 - 장남 김정일의 권력 승계
- 3년 간의 유훈통치
- 남북정상회담 취소 남북관계 경색

1. 개요2. 배경3. 사망
3.1. 장의위원회 구성
4. 여파5. 암살설6. 기타

[clearfix]

1. 개요

전형규 아나운서의 김일성 사망 발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시였다는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3][4]
- 조선중앙텔레비죤 긴급 보도 중 ( 1994년 7월 9일)
1994년 7월 8일 북한에서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사망한 사건.

김일성 1994년 7월 25일에 예정된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과의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앞두고 묘향산에 위치한 개인 특각인 '향산특각'에 머무르면서 회담을 준비했으나 심근경색으로 인해 쓰러졌고 의료 조치가 지체되어 사망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세상이 무너질 듯이 울부짖으면서 슬퍼했다.[5]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에게 완전히 권력이 승계됐으며 당초 예정됐던 남북정상회담은 취소됐다. 한편 김일성 사망 직후 고난의 행군까지 닥쳐온 터라 그의 사망은 전세계적으로 '북한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상징적인 사건'처럼 인식된다.

2. 배경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하고 흥남화학을 생산 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 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내년)에는 5만 톤 만부하[6]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 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 것을 100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 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 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 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 수 있다고, 우리가.[7]
내가 이번에 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 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 놈들도 제재하지, 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 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 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 산다.
1994년 7월 6일[8] 생전 마지막 지시 中 영상[9]
1993년 NPT 가입국이었던 북한 핵개발을 몰래 진행하다가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실제 플루토늄 추출량이 신고서류와는 불일치하다는 지적을 듣고 특별사찰 요구를 받게 됐으나 '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며 '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면서 으름장을 놓고 발뺌했다. (일명 '제1차 북핵 위기') 논문[10] 미국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터라 강한 압박을 주며 갈등이 고조됐으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특사로 파견되어 북한 측에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고 반대로 핵 프로그램 중단과 NPT 탈퇴 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한편 카터 전 대통령은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정상회담도 각자에게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1994년 7월 25일에 열릴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과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은 들떴으며 회담 장소였던 묘향산으로 찾아가서 회담 준비에도 일일이 관여했다. 당시 북한은 대북제재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 되기 직전 대규모 기근 사태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남쪽 동포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온갖 현혹 전술로 남조선을 낼름 집어삼켜서 적화통일의 야망도 이뤄낼 심산'이었고 '자신이 직접 방남하여 서울에서 연설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라진·선봉경제특구를 전면 개방을 하여 남측 자본을 유치하고 자신이 구상한 오랜 적화통일 플랜인 ' 고려민주연방공화국'도 어필하려고 했다.

한편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간부들과 회의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이 올린 보고가 지금까지 가짜였으며 배급체계가 붕괴되고 공업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아들에게 화를 내고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이미 노쇠한 본인이 뚜렷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되려 김일성이 평소 습관대로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간부들은 이미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죄다 떠나 있었을 정도였다.

3. 사망

파일:김일성 초상화.jpg
파일:news-cs-22739-19940710-m-1-01-300-b1-bw-thumb-1100.jpg
<rowcolor=white> 사망 직후 공개된 초상화[11] 김일성 사망 당시 신문 보도[12]
파일:이제 만나러 갑니다 로고.png
<rowcolor=white> 갑자기 들려온 김일성 사망 소식! 애도 기간만 3년?! 슬픔까지 통제당한 北 주민들
(2021년 9월 12일 방송분 / ' 이제 만나러 갑니다' 508회)
영상(MBC / 1994.7.9.)[13] / 영상(KBS / 1994.7.9.)[14] / 영상(원본 풀버전)
1994년 7월 7일 밤에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 숙소로 쓰일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가 쓰러졌고 이튿날인 1994년 7월 8일 02시에 심근경색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남북정상회담 예정일로부터는 17일 전이었다. 사망 시점으로부터 34시간이 흐른 7월 9일 12시에 조선중앙텔레비죤 김일성의 사망을 공표했다. 참고로 당시 김일성의 사망을 발표한 아나운서는 전형규였다.

북한측은 표면상으로는 과로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의 말년에 모든 권한은 김정일에게 쥐어진 지 오래였고 김일성이 하는 일이라곤 정치에서 손을 떼고 주석궁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 대성산혁명렬사릉을 감상하고 먹고 자는 것이었으니 과로보다는 노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북한의 주장처럼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도 일부는 맞다는 의견도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던 해인 1994년에는 북핵 문제로 인해 미국이 당장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전쟁설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으며 이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전격 방문해서 북미 간 대화를 시도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해서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이렇게 활동하다 보니 당연히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041614072730003010-001.jpg
<rowcolor=white> 안치된 김일성의 시체
생전의 김일성은 과거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며 자기가 죽으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자신을 안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정권 유지가 최우선이었던 아들 김정일은 아버지 유훈을 시원하게 씹고 시신을 엠버밍 처리해서 박제했고 주석궁은 '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탈바꿈했는데 이는 소련 레닌과 비슷하다.[15]

김일성 시신의 미라화에는 러시아 기술진들이 투입되었다. 특히 북한은 김일성의 시신에 참배 받을 때에 모양이 찌그러지면 안 된다고 보존제를 비싼 재료를 쓰는 등 경제사정도 안 좋은 주제에 시체 유지시킨다고 100만 달러 이상을 퍼부었으며 지금도 1달에 2~3번씩 방부처리, 2~3년에 1번씩 재보존처리 등 돈지랄을 하고 있다. 추정치에 따르면 만들 때 100만 달러 이상이 들었으며 지금도 연간 그에 준하는 돈을 퍼붓고 있다고 한다. 저 시체 보존만 안해도 북한은 아사자가 몇 만명은 줄어들 정도니 말 다했다.

엠버밍이란 기술은 시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것인데 한참 전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지금도 이 방법이 최상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교한 기술인데 그 대신 유지비가 미친듯이 깨지는 기술. 사실 엠버밍 기술도 고대 미라 제작 방법과 마찬가지로 썩기 쉬운 내장과 뇌는 제거하므로 그냥 껍데기만 남겨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 사망 당시 로동신문 지면[16]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망 관련 영상 재생목록. 1~8번 영상이 김일성 사망 관련이다.

3.1. 장의위원회 구성


여담으로 이중에서 북한에서 반역자로 취급되는 황장엽, 박남기, 정하철, 리봉원, 장성택 및 곁가지 김성애 등은 이후 북한 자료에서는 기록말살되어 있다.

4. 여파

북한에서 녹화한 김일성 장례식 영상[17]

김일성 사후 북한은 25개국의 대사를 교체할 때, 소위 '유훈통치'랍시고 김일성 명의로 대사 신임장을 보냈다고 한다. 이미 죽은 사람이 대사를 임명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인지라 이 신임장을 받은 국가 대부분은 이를 무효로 하고 김정일 명의로 다시 보내달라고 요구하였고 북한 대사들은 '수령님의 마지막 뜻'이라며 인정해달라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자 결국 특별 배려로 신임장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예멘 등의 몇몇 국가는 차후에 반드시 김정일 명의의 신임장을 다시 받겠다는 조건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

5. 암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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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시크릿 코드 '120'] 김일성 사망 미스터리? 김일성의 죽음에 김정일이 개입했을까?
(2021년 9월 12일 방송분 / ' 이제 만나러 갑니다' 508회)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에 사망한 장소는 묘향산이었다. 그는 에어컨의 찬바람에 습관이 들지 않아서 항상 여름철에 백두산이나 묘향산 초대소에 가곤 했다. 묘향산은 북한에서도 아주 외진 산골이고 기본적으로 산에 올라가면 대기 온도가 낮아진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됐던 1994년의 여름 묘향산 초대소는 기온이 20~27도에 맞춰져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일성이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해 묘향산에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북한 어느 곳에 가더라도 늘 함께 따라다니는 호위성원들이 수십 명이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묘향산 초대소에서 죽은 후 북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니, 수령님께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셨다고 하는데 부관들은 그럼 수령님께서 심장마비로 서거하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이에 대한 측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돌아간 전날 아침에 9시가 됐는데도 수령님이 안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부관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으면 늦게까지 주무신다고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조금 더 있다가 똑똑 두드려서 “수령님. 벌써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랬는데도 말이 없자 열고 들어가 보니까 마지막 순간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당시 주치의원은 묘향산 초대소에 동행했지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자동심장충격기(AED)가 없었다. 곧바로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심장 구급 기계를 직승기(헬리콥터)에 띄워 보냈지만 7월 8일 당시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착륙하기 어려웠고 의료진과 심장 소생기를 실은 직승기가 내리다가 떨어져서 폭파했다. 결국 헬기에 탑승했던 의료진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러한 설명에도 사람들은 실제 마음속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북한에 봉화병원이라는 김씨 일가를 위한 큰 병원이 있고 몇백 명이 김일성의 건강을 보는데 묘향산에 갔을 때 심장 소생기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일인가 싶다고 하는데 심장 제세동기는 따라갈 수 없다. 지금의 공공장소에 설치된 휴대용 AED는 미국 ZOLL사에 의해 1992년에 특허를 얻은 당시 최신 중의 최신 의료장비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공공장소에 의무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들어서인데 1994년 북한에 그런게 있을 리가. 게다가 82세의 고령에 상당히 조치가 늦었음을 감안하면 설령 AED가 있어도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 당대 권력승계는 이미 김정일로 원만히 이루어진 후였기 때문에 굳이 허수아비 노인을 죽일 이유도 없었다. 허무맹랑한 음모론으로 보이고 노인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애시당초에 1994년 기준으로 82세면 남북한의 평균수명보다 10년 더 오래산것이며,[22] 2020년대 기준으로도 살만큼 살았다는 반응이 나올 나이이다.

6. 기타



[1] 사망 2일 전 모습이다. 즉, 이 모습이 김일성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실 7일 밤에 쓰러져서 8일 새벽에 사망한 것이므로 사실상 사망 전날이기도 하다. [2] 2023년 기준으로는 자강도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3] 이때 전형규는 사망한 날짜와 사인, 그리고 마지막 전문을 다소 천천히 말하는데 해당 부분을 주민들에게 정확하게 인식시키고자 속도 조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사실 이런 식으로 지도자 사망 소식을 방송에서 알린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이 먼저였다. [5] 심화조 사건을 일으켰던 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에 대한 거부 정서와는 많이 달랐다. 장학봉 같은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비록 1950년대 중반 이후라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궁핍과 불만이 심했지만 열성자 대회 등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서로 고발하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김일성 집권기 중반까지만 해도 배급도 '정상적'으로 되어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는 듯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상류층은 정말 제대로 받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소 정치적으로 낮은 계층은 적은 양의 배급이 대단히 많아보이는 선전만을 듣고 사는 영향도 있기는 했으며 유일지도체제가 완비되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줄곧 우상화 교육을 받다 보니 김일성을 마치 ''처럼 여기는 기류도 한몫 했다. [6] 한국식 표현으로는 과부하, 완전 가동. 특이한 한자어인데다가 북한이니까 중국식 표현을 지향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김일성은 중국식 한자어를 말하면서 그대로 쓰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어에서는 이런 표현이 일을 열심히 하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북한에서는 중국과는 쓰임이 달라 기계에다가만 이런 표현을 쓴다. '부하'라는 말은 많이 쓰이고는 했으니까 북한에서 만든 신조어에 가까운 표현으로 보인다. [7] 1990년대 초반 기준으로 북한의 전력 생산과 공업 가동률이 이미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간부들에게 생산을 정상화하라고 촉구하는 대목이다. [8] 사망 2일 전이다. [9] 문서 최상단에 당시 김일성의 모습이 나온다. [10] 도경옥 등(2023), '비핵화 합의와 이행의 법‧제도적 문제: 주요 비핵화 사례를 중심으로' , KINU 연구총서 22-17, pp.227~230, 서울: 통일연구원 [11] 이 초상화는 만수대창작사 소속 화가 김성민이 그렸으며 이전에는 1968년부터 50대의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닫은 걸 썼다.( 참고) 초상화의 모티브는 1986년 6월 24일 있던 서해갑문 준공식에서 찍힌 모습이다. # [12] 사망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 조간 최종판. 저것과 거의 비슷한 판형의 호외가 사망 당일 오후 급히 인쇄되어 뿌려졌다. 한국에서는 김준석 KBS 기자를 통해 KBS가 HAM으로 조선중앙방송 12시 정각 특별방송을 녹취하여 제일 먼저 타전했다. [13] MBC 뉴스데스크 방송분. 제목은 7월 4일이지만 실제로는 7월 9일자 뉴스다. [14] KBS 뉴스 9 방송분. [15] 본인은 김일성과 같이 의미가 큰 곳에 소중한 사람과 같이 묻히기를 원했으나 후대가 그를 무시하고 선대 지도자를 이용하기 위해 시신을 전시품처럼 처리해 버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16] 출처 반디에 대해 다룬 2013년 9월 월간조선 기사다. [17] 여담으로 고정 댓글이 가장 작위적이고 과장되게 우는 사람들을 정리한 타임라인이다. '아아아아'하며 영혼 없는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는 주민, "기계를 어색하게 손수건 같은 걸로 문지르며"(서양인은 김일성이 봐준 기계를 추모의 의미로 정성껏 다루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흐느끼는 주민 등이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하며, 근조 화환을 '이상하게' 다루는 모습도 서양인에게는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진 것으로 보인다. 보면 김정일 사망 당시 주민 반응보다 더한 호러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 [18] 물론 지역간 사소한 이동을 하는데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통제가 강화된 것에 대한 불만은 당대에도 많기는 했지만 이러한 통제정책을 거부할만한 여력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기독교도 들이나 지주 같은 대항세력이 소련의 힘까지 빌린 김일성에 패배하여 남쪽으로 피신을 가면서 거세된 지 오래되었고, 특히 잘사는 곳만 본 외국인을 중심으로 북한이 잘산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하게 하여 주민들의 인식을 왜곡시켰다. 지방에서는 김길선의 증언으로도 1960년대 지방에선 어느 집이건 강냉이밥이라도 두 끼나 먹지 세 끼 챙겨먹는 집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심지어 빵을 사먹을 수 있는 소련을 부러워하는 시각도 존재했다고 한다. # 하지만 소련 이외의 남한 같은 곳보다는 확실히 김만철 일가의 사례에서 보듯 잘산다고 세뇌를 당했기 때문에 아주 못사는 줄은 몰랐다. 세상에 부럼없어라 같은 프로파간다와 어린이들에게 김일성, 김정일 생일 때마다 과자, 사탕 같은 '선물'을 주며 어린이들에게 김씨 부자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세뇌시킨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기에도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해외 정보를 철저히 차단했으며, '무삼의료'라는 무상의료도 남들보다 넉넉한 것이라고 세뇌당하고, 온갖 동원 등으로 나라에다가 준 거에 비해 매우 적은 연금도 아주 넉넉한 것이라고 세뇌를 당하는 것이다. [19] 다만 김정일 사망 당시에는 고난의 행군의 여파도 있고 고난의 행군이 끝난 후에도 굶어죽는 일만 줄어들었지, 여전히 상당수의 인민은 하루 3끼를 먹는것 조차 벅찬 궁핍한 삶을 면치 못한 것은 매한가지인지라 반동 취급을 면하기 위해 억지로 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특히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 외부 문물이 조금씩 들어와서 자신이 못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우가 많았다. 김일성 당시에도 지방에서는 당간부 등이 아니면 쌀밥을 잘 못 먹거나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는 했지만 그게 남한이나 일본보다 잘 사는 걸로 세뇌를 당한 것이고, 불만이나 열악한 경제적 현실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런 믿음이 더 강화되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들은 김일성 사망 당시 말할 수 없던 일제가 더 나은 부분이 있다는 주장도 할 수 있었다. [20] 사망 발표가 토요일에 발표되어서 낮방송을 했기 때문에 TV 뉴스에 방영될 수 있었다. 만약 평일에 발표되었으면 KBS 제1라디오를 통해 먼저 보도되었을 것이다. [21] 현재는 위성방송 등이 보편화되어 있고 북한도 일단은 디지털 송신을 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북한의 뉴스시간대인 오후 8시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TV뉴스에 관련 소식 영상이 입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조선중앙TV의 중대 발표를 생중계한 적이 있고 그 외 대남도발 관련 북한의 중대발표가 있을 때 조선중앙TV를 연결해 생중계한다. [22] 1993년 기준으로 남한의 평균수명은 73세, 북한의 평균수명은 72세 내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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