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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21:30:31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소련군정 1948년 8월 25일 1957년 8월 27일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2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 개요2. 전개3. 대의원 명단
3.1. 북한지역3.2. 남한지역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1948년 8월 25일에 실시된 최초의 최고인민회의 선거로 이 회의에서 선거된 1기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 내각을 선거하여 9월 9일, 북한 정권을 출범시켰다.

2. 전개

1948년 7월 9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올리고 입법기관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는 8월 25일을 기해 대의원 선거를 한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어 북조선인민회의 29차 상임위원회 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선거일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한 규정의 승인에 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한 중앙선거위원회 조직에 관하여> 등을 채택하였다.

7월 13일, 30차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북한 내부의 212개 선거구가 조직되었으며 7월 12일~7월 13일 사이에 개최된 북로당 2차 전원회의도 헌법 실시와 대의원 선거 문제를 논의하였다. 7월 18일에 김두봉 태극기 폐지와 새 국기 제정 담화를 발표하였다. 북한 정권은 군중대회를 실시하는 한편, 무려 44만명의 선전원을 동원하여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7월 24일에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흑연탄광 노동자들의 종업원대회에서 강동군 승호선거구 대의원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8월 6일까지 총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되었다.

투표 방법이 현재의 북한 선거와는 약간 달랐는데, 반대투표를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펜으로 X표를 해서 투표함에 넣어야 하는 현재의 선거와는 달리 찬성과 반대 두 개의 투표함이 있어서 둘 중 한 곳에 표를 넣으면 되고 투표함은 가려져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나마 민주적인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투표함이 가려져 있어도 어느쪽으로 손을 뻗어서 표를 넣는지에 따라 반대 투표를 했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비밀투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1] 또한 복수의 후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후보를 뽑는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와는 달리 애초에 북조선민전이라는 정부 단체에서 공천한 한명의 후보에 대해 찬반투표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선거와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이 때는 212개 지역 중 15개 지역에서는 복수후보가 출마했다. 그나마 이후의 선거와 달랐던 점은 반대표가 1.5% 정도나마 존재했고 의석수 중 조선로동당의 비율이 낮고 무소속의 비율이 높았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확고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8월 25일 새벽 6시부터 투표가 시작, 오후 12시에 북한 전역에서 투표가 종료되었다. 총 452만 6065명의 선거자들이 등록되어 452만 4932명이 투표, 99.97%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52표가 무효처리 되고 445만 6621명이 찬성투표하여 98.49%의 찬성율을 기록했다. 8월 28일에 중앙선거위원회가 선거결과를 발표했다. 북로당 102명, 조선민주당 35명, 천도교청우당 35명, 무소속 40명 등 총 212명의 대의원이 선거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남한 지역에서 투표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제헌국회를 친일파, 지주, 자본가들만 참여한 반인민적 반동기관이라고 비난하면서 남조선선거추진지도위원회를 조직, 7월 15일부터 8월 10일까지 공작원을 파견하여 지하선거를 조직하였다. 남한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거를 추진했고 대표자들을 월북시켰다. 8월 21일부터 8월 26일까지 해주 남산에서 월북한 인민대표자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으며 360명의 남한 출신 대의원들을 선거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 유권자 868만 1746명 중 77.5%인 672만 2407명이 투표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북한의 헛소리라고 공개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공박하였다.

3. 대의원 명단

3.1. 북한지역

3.2. 남한지역

4. 결과

총 57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1948년 9월 2일, 572명의 대의원 중 528명이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 참석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허헌, 부의장으로 김달현 리영이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김두봉, 서기장 강량욱 등이 선거되었다.

9월 4일,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대의원 중 남자가 503명, 여자가 69명으로 출신성분을 따지면 노동자가 120명(20.9%), 농민이 194명(34%), 사무원이 152명(26.7%), 수공업자 7명(1.24%), 상인 22명(3.84%), 기업가 29명(5.1%), 문화인 33명(5.8%), 전 지주 1명(0.02%), 종교인 14명(2.4%)였다. 나이 구성으로는 20~30세가 73명으로 12.8%, 31~40세가 223명으로 39%, 41~50세가 174명으로 30.4%, 51~60세가 77명으로 13.4%, 61~70세가 21명으로 3.7%, 71세 이상은 4명으로 0.7%였다. 20~30대가 무려 과반을 넘는 북한 역사상 가장 젊은 최고인민회의였다.

학력으로는 대학 전문이 227명으로 39.6%, 중학교 졸업이 147명으로 25.8%, 소학교 졸업이 198명으로 34.6%였다.

572인 대의원의 소속 정당은 다음과 같다.
조선로동당원은 남북로당을 다 합쳐서 의외로 상당히 적은 27.4%에 해당하는 157명(북한지역 122명, 남한지역 55명)에 불과했다. 천도교청우당이 35명, 조선사회민주당이 35명, 근로인민당이 20명, 민주독립당이 20명, 인민공화당이 20명, 기타 단체 171명, 무소속이 144명이었다. 다만 북한 지역만 국한한다면 조선로동당원이 우세하였다. 가끔 이 결과만 보고서 당시 선거가 이후의 북한 선거와는 달리 조선로동당에게 불리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로동당 남북로당 이외에 기타 민청과 같은 로동당의 관제 단체들과 이후 조선로동당에 합당될 사회주의 정당까지 합치면 40%대는 된다. 물론 그래도 과반엔 미달하긴 하지만 북한 지역만 보면 60%정도는 된다. 조선로동당 혼자서 80% 이상을 먹어치운 다음 선거 이후 선거랑은 그래도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9월 8일 헌법 독회가 있었고 만장일치로 이를 채택했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을 선거함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수립하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북한 역사상 가장 많은 대의원을 선출한 선거였으며 해당 기록은 1977년 제6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7명 더 많은 579명을 선거한 후에야 깨지게 된다.

5. 참고문헌


[1]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두 손을 쥐고 동시에 투표함에 넣은 뒤에 손을 펴서 투표를 한 뒤에 빼는 규칙이 있었지만 북한 당국에서는 일부러 이 규칙을 알리지 않았다. [2] 강규찬의 아내. [3] 고진희의 남편. [4] 김원봉 조선민족혁명당을 개칭한 이름이다 [5] 한민당 내에서 토지개혁 신탁통치 문제로 인해 당 주류와 갈등을 빚고 탈당 원세훈 김약수 등이 모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대한 사회단체. 좌우합작운동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구를 천명했으며, 김규식이 의장을 맡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여당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내부 갈등이 격화되어 김규식은 총재 사퇴를 선언하고, 김약수계는 집단 탈당하여 조선공화당을 창당했으며, 원세훈계는 조선농민당을 창당하면서 해체되었다. [6]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 중 한 사람이자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로, 해방 정국의 좌익 세력 중 유일하게 기독교 좌파에 속했다. 결성식장을 교회 우익 단체 청년들이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창당 과정에서 조직적인 방해를 받았다. 미군정을 비판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하며 자신들이 반민족적 교회 지도자라 간주한 이들을 친일파와 싸잡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며, 김창준 목사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당 자체는 이후에도 지하에서 유지되었으나, 1949년 10월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7] 1946년 11월에 강순, 이지탁, 황현철 등이 창당한 정당.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창당할 당시 포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2석을 배정받았으나, 남북연석회의 당시 지도부 다수가 월북하여 해산되었다. [8] 1946년 이극로, 권동진, 윤치형 등이 만든 사회단체. 청우당, 사민당 등과 함께 남북합작간담회를 주최했고, 일본 재일교포 차별을 규탄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선언해 좌우 인사들 간의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극로가 민족독립당 및 민족자주연맹 창당에 합류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9]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통일국가수립운동을 위한 세력 확대라는 좌파의 조직적 목적과, 유교계 내부에서 김창숙 중심의 유도회총본부가 우경적 성향을 띄는 것에 불만을 가진 좌파 성향의 유림 세력이 결집되어 만든 사상 전무후무한 좌익 유림 계열 단체로, 영남 원로 유림 김응섭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명륜학교(현 성균관대학교) 출신 좌익 성향 청년들과 사서연역회 출신자들이 참여했다. 유교 개혁 평등 사회 구현을 외쳤으나, 사람들에게 두터운 인망을 가졌던 김창숙의 유도회가 이미 서울과 지역 향촌 사회를 장악한 상황인지라 크게 세를 확장하는데 실패하고 몰락하였다. [10] 김병세가 이끌던 남한판 천도교청우당.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도 참여하였으나 의석을 얻지 못했고, 얼마 안가 해체되었다. 이후 월북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천도교청우당과 합쳐진다. [11] 전신은 대동회로, 대동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 독서모임인 대동사를 모체로 해방 직후에 초기 유교계 통합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점차 좌파 정치단체로 변화하였다. 출범 시기 대동회는 일제하 명륜학원 출신들로 구성된 청년 유림 단체로서 해방정국 초기에 유교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했다. 초기에는 유림 내부 통합의 추진력을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유교적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적 달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김창숙을 비롯한 유교계 독립운동 원로들이 유교계 통합을 주도하고 김구의 반탁노선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반발한 대동회 청년유림들은 표면적인 중간파 노선에서 이탈하여 1946년 하반기부터 민족대동회로 확대⋅개편하여 적극적인 통일국가수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분단을 피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대동회 주축 세력은 결국 북한을 택했고 그 결과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 이황직. (2014). 해방정국의 청년 유교단체 ‘대동회’ 연구. 사회이론, 45, 10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