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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갤러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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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갤러거 Noel Gallag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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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본명 |
노엘 토머스 데이비드 갤러거 Noel Thomas David Gallagher[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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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7년 5월 29일 ([age(1967-05-29)]세) | ||||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맨체스터 시 롱사이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2] |
||||
직업 |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작사가 | ||||
소속 |
오아시스 (1992~2009, 2024~ )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 (2011~ )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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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400AE><colcolor=#fff> 부모님 | 어머니 페기 갤러거, 아버지 토머스 갤러거[3] | |||
형제 | 형 폴 갤러거, 남동생 리암 갤러거 | ||||
배우자 |
멕 매튜스 (1997년 결혼~2001년 이혼) 사라 맥도널드 (2011년 결혼~2023년 이혼) |
||||
자녀 |
딸
아나이스 갤러거 (2000년생)[4] 아들 도노반 로리 맥도날드 갤러거 (2007년생)[A] 아들 소니 패트릭 맥도날드 갤러거 (2010년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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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2~3cm[7], 62kg, 벽안, 왼손잡이 | ||||
재산 | 약 $70,000,000[8]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사용 악기 | 기타, 보컬 | ||||
장르 | 록, 팝, 얼터너티브 록, 사이키델릭 록, 네오 사이키델릭 | ||||
레이블 | 에픽 레코드, 크리에이션 레코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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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96년, 메인 로드 |
질문:
오아시스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노엘: 나!
노엘: 나!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락 뮤지션. 영국의 로큰롤 밴드 오아시스의 리더, 메인 송라이터이자 서브보컬, 기타리스트이다.
1990년대 영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신의 동생, 데이먼 알반 등과 함께 90년대 영국 대중음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09년 해체될 때까지 록 밴드 오아시스의 메인 작곡가, 리드 기타리스트, 공동 리드 보컬로 활동했다. 오아시스를 탈퇴한 후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를 결성했다. 그는 영국 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8개의 영국 1위 싱글을 작곡하고 또 다른 싱글의 공동 작곡가이자 10개의 영국 1위 스튜디오 앨범의 단독 또는 주요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갤러거는 열두 살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21살에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드니(로드 매니저)이자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동생 리암이 나중에 오아시스가 된 더 레인이라는 밴드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리암은 그에게 매니저로 그룹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제안을 거절했던 갤러거는 밴드의 창의적 통제권을 갖고 단독 작곡가 겸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는 조건으로 밴드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밴드의 데뷔 앨범인 Definitely Maybe(1994)는 비평적,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 앨범인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1995)는 여러 나라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세 번째 정규 앨범인 Be Here Now(1997)는 영국 차트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그러나 브릿팝의 인기는 결국 하락세로 돌아섰고 오아시스는 이를 되살리는 데 실패했지만, 마지막 두 앨범인 Don't Believe the Truth(2005)와 Dig Out Your Soul(2008)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최고의 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09년 8월, 동생과의 불화로 인해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 탈퇴를 선언했다.
오아시스 탈퇴 후,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라는 독자적인 백밴드를 결성하고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오아시스가 해체한 후에도 여전히 팬들은 그를 "The Chief(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2024년 오아시스가 해체 15년만에 재결합하면서 다시 밴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활동 당시 많은 영국 음악가들이 그랬듯 노동 계급 출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노동 계급 시절을 다른 노동 계급 출신 뮤지션들보다도 더 많이 보냈다.[9]
브릿팝의 전성기, 다시말해 오아시스의 전성기 때 노엘은 동생 리암과 여러 차례 분쟁에 휘말리면서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거친 라이프스타일로 타블로이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그렇지만 노엘은 브릿팝 운동의 선구자이자 선봉장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곡을 칭찬했으며, 그의 우상 비틀즈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은 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불렀다.
2. 생애
2.1. 데뷔 이전
초등학생 때의 노엘.
어린 시절 폴, 리암과 함께 있는 노엘.
맨체스터 롱사이트에서 아일랜드 계통인 부모 페기 갤러거와 토마스 갤러거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노동 계급이었으며, 집은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갤러거 형제는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에 의해 자주 폭행을 당했다.[10] 기절할 때까지 맞다가 다시 폭력으로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다고. 이 때문에 형 폴과 함께 말더듬 증세를 겪어 4년 간 언어장애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결국 1982년 페기 갤러거는 세 아들들을 데리고 도망가게 된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지 않고, 언급이 되어도 또래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침에는 항상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일어났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악감정이 전혀 없다고 말할 정도다.[11]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갤러거 삼형제는 엄청난 문제아로 자라났는데, 특히 노엘은 자주 무단 결석을 했으며 경찰과의 트러블도 잦았다. 구체적인 예로는 절도 전과 등이 있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엔 신장 감염을 오래 앓았다고 하며, 그 이유로 다른 애들은 촌스러운 밤색 반바지 입고 등교할 때 자기만 혼자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닥터마틴을 신고 다녀서 다들 자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어렸을 때 말더듬증과 실독증을 앓고 있었으며( 난독증과 조금 다르다) 이는 오아시스 결성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노엘이 말하길 리암에게 가사를 줘서 부르게 했는데 'Don't Back In Anger, Not Today' 라고 부르길래 가사 틀렸다고 하니깐 '여기 그렇게 써 있거든?' 했다고 한다. 현재는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록 음악에는 5살 때부터 관심을 가졌다. “Far out” 잡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엘이 5살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록밴드 레드 제플린의 Led Zeppelin II를 선물해 주셨으며, 이 앨범을 들으면서 록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노엘은 비틀즈,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등 화려한 록밴드들의 엄청난 팬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살 무렵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노엘은 여러 방식으로 이 때 일화를 이야기하는데 그 때 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 한다. 선생에게 밀가루를 집어던지고 퇴학당했다고도 하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학교의 졸업식날이었다고도 이야기 한다. 잦은 무단 결석과 무단 조퇴 역시 문제였는데 어머니인 페기 갤러거는 학교의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더라도 점심 시간이 되면 급식을 먹으러 다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계속된 결석이 어머니인 페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자 그녀는 학교 선생에게 "하지만 점심 때 맨날 봤는데요?" 라고 반문하였으나 이윽고 노엘이 자신의 비행을 이실직고 했다고 한다.
또한 90년대 잡지 인터뷰에선 노엘은 훗날 '언제 음악으로 먹고 살거란 걸 알게 됐느냐'는 질문에 '내가 졸업장도 없이 학교를 나왔을 때 엄마가 어느날 밤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냐고 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거, 내가 다른 건 관심도 없지만 처음으로 몰두한 게 기타였지' 라고 답한다. 다만 노엘에 의하면 페기 갤러거는 노엘에게 '빨리 제대로 된 일을 찾아라' 라거나 '적당히 결혼해서 정착하면 좋으련만' 등의 말은 하지 않았고 그저 '그게 니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니가 실업수당 받으면서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사람은 돼야지. 내가 실망 할 일은 하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16살, 17살이 되자 엄마가 아침만 되면 자기를 걷어차면서 빨리 취업센터에 가라고도 했다고. 수조도 만들어 봤으며 제과점, 간판장이, 세탁소, 노가다 등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했다고 한다. 참고로 갤러거 형제들의 어머니는 당시 오아시스가 엄청나게 성공했음에도 그 때 그 시절 맨체스터 공영 주택에서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리암이 큰 성을 사주려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또한 정원 손질을 잘해서 품평회를 나가도 된다던가 하루종일 식물이랑 대화를 한다고 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면 자식들의 유명세에 힘입어 페기 역시 대우받는다고 서술한다.
1980년대에는 언더-5즈(Under-5s), 영 거브너(Young Guvnor)와 같은 난봉에 가까운 축구 팬클럽 활동을 하기도 하고, 마약에도 빠져 살았다. '왜 학교에 가는 대신 마리화나나 피면서 들판에 널부러져 있으면 안되나' 라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학교에 있다가 몰래 빠져나온 무리들과 함께 친구들 집에 모여서 마리화나 피면서 레코드를 듣거나 슈퍼마켓, 자전거 등을 털었다고 한다. 형제끼리도 무지막지하게 싸웠는데, 특히 연년생인 폴과 노엘, 같은 방을 썼던 리암과 노엘이 많이 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형은 독방을 쓰고 자기는 동생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걸로 보인다.
기타를 처음 치기 시작한 건 13살~14살 무렵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타를 얻게 된 경위는 본인이 그 때 그 때 다르게 이야기한다. 컨츄리DJ 노릇을 하던 자신의 아버지답게 집에 그냥 아무도 거들떠도 안보는 낡은 기타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서 한동안 집구석에 방치되어있을 때 아무도 건들지 않고 널부러져 있던 기타를 본인이 가지고 놀면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니면 아버지가 어머니 선물 사러 나갔다가 그냥 기타가 보여서(…) 선물 대신 사온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또한 다른 일화에선 당시 유명한 악기점에서 팔던 깁슨 허밍버드의 짝퉁 검은색 어쿠스틱 기타를 샀을 때가 처음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걸로 이야기 한다. 본인 말로는 진퉁 살 돈은 없었다고 한다. 숙제도 내팽겨치고 기타 연습만 했는데, 애니멀스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과 비틀즈의 'Ticket To Ride'만 주야장천 쳤다고 하며 엄마가 매우 질려했다고도 한다. 또다른 일화에선 동네의 녹음기 등의 음악 장비를 가지고 있는 자신보다 몇살 많은 남자와 함께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의 곡을 녹음했다고도 한다. 노엘이 가장 존경했던 기타리스트는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와 스미스의 조니 마였다고. 스톤 로지스의 존 스콰이어 역시 매우 존경했는데 오아시스 초창기엔 그의 연주를 포함한 모든 걸 따라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보컬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보컬이었던 스티븐 오트가 탈퇴했을 때 노엘은 도전했으나 탈락했다. 노엘이 그들의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노엘이 스톤 로지스 공연을 갔다가 만난 남자와 친분이 생겼는데 그가 맨체스터 밴드인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노엘은 그들의 공연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 오디션 기회까지 얻었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노엘에게 로디 자리를 주었고 노엘이 승낙하면서 음악 산업에 발을 들인다. 노엘이 말하길 "너 노래 좀 해볼래? 넌 우리 노래를 다 아니깐" 이래서 노래를 했으나 "망할 한 음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지만 그들이 내게 로디라도 하라고 했고 난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했지" 라고 했다. 그는 밴드 안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며 밴드와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또한 이 시기에 훗날 오아시스의 엔지니어가 될 마크 코일을 만나게 된다.
이후 1991년, 로디 일을 하던 중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리암이 밴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맨체스터에 돌아왔을 때 그들을 보러갔으며 그 자리에서 밴드 매니저를 제안받는다. 아마추어인 그들과 다르게 프로 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있기 때문. 하지만 노엘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고 결국 기타리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노엘이 말하길 '그들 이외에 같이 밴드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었으며 운명이었다'고 한다. 노엘 본인도 작곡을 해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지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그저 혼자 있을 때 부를려고 작곡했던 것이라고 한다. 리암이 있었기 때문에 밴드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들이 만든 곡들을 같이 연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노엘이 자신의 노래를 선보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밴드를 장악해 나갔다고 한다.
데뷔 초창기 시절엔 이 일화가 '자신이 밴드의 모든 작곡권과 지휘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후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노엘과 리암의 사이가 나빠진 이후 리암은 오히려 노엘 쪽에서 제발 밴드에 넣어달라고 빌었다는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실이 아니다.[12] 노엘과 리암의 형인 폴 갤러거의 경우 당시 노엘의 연인이던 루이스의 집이 밴드가 연습하던 장소와 매우 가까웠던 것을 노엘이 밴드 합류를 승락한 결정적인 이유로 언급했다. 둘의 관계에 따라 노엘의 오아시스 합류 과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확실한 것은 노엘이 인스파이럴 카페츠에 있을 때부터 리암은 노엘을 밴드에 넣고 싶었고 노엘이 로디에서 해고당한 뒤 오아시스에 합류했으며, 노엘이 오아시스의 모든 곡을 작곡하며 밴드를 운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오아시스에 가입한 후 1993년의 어느 날, 여러 클럽을 전전하던 그들은 시스터 러버스라는 여성 밴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클럽으로 원정 공연을 갔다가, 당초 그곳에 방문할 거라 예상되었던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를 사로잡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정식 계약으로 이어지며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노엘의 발언에 따르면, 이후 U2의 레코드사였던 마더 레코드에서 크리에이션보다 더 나은 계약 조건과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당시 앨런 맥기가 자신들을 얼마나 믿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푼돈에 그냥 크리에이션과 그대로 계약했다고 한다.
2.2. 오아시스
오아시스 문서 참조. 같은 오아시스의 멤버이자 동생인 리암과의 충돌 끝에 결국 2009년 8월 28일, 노엘은 밴드의 공식 웹사이트에 오아시스를 탈퇴한다는 글을 올린다.약간의 슬픔과 굉장한 안도감과 함께 여러분께 내가 오늘 밤 오아시스를 그만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고싶은대로 써갈기겠지만, 난 간단하게 '더 이상 리암과 함께 일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파리, 콘스탄츠와 밀라노에 있을 예정이었던 공연의 표를 구입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표합니다.
오아시스 해체 이후 노엘은 겜과는 자선 공연도 함께 하고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그를 제외한 오아시스 멤버들과는 별다른 교우 관계가 없는 듯 했다. 그렇지만 비디아이의 해체 이후에는 페스티벌 장에서 전 멤버들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리암과도 크리스마스에 문자를 주고 받는 등 시간이 잘 해결해주고 있었으며, 해체 15년 후인 2024년 8월 27일 재결합했다.
2.3.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자세한 내용은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음악
3.1. 기타리스트로서
노엘 갤러거 "난 나 자신을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난 앉아서 여러가지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진 않아. 난 오로지 노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지. 물론 나도 나만의 기타 스타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리듬을 치고 정확히 음을 조절하는 그런 거야. 난 내가 좋아하는 걸 연주하고,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난 기타 테크닉이나 여러가지에 대해서 연연하진 않아. 난 작곡가라구."
기자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 보지 않는다고 말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기타 히어로다."
- 2011년 MusicRadar와의 인터뷰 중
기자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 보지 않는다고 말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기타 히어로다."
- 2011년 MusicRadar와의 인터뷰 중
오아시스가 90년대에 난립한 그 무수히 많은 기타 밴드들 중 가장 성공한 극소수의 거대 락밴드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엘 갤러거는 단 한번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의 영예는 누려본 적이 없다. 응당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오아시스는 연주적인 측면에선 별다른 화두에 오르지 못했다. 연주 기술에 있어서 날고 기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음악계에서 오아시스의 음악은 기교 중심의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튠은 오로지 노래에 초점이 맞춰진 것들이었고, 악기 중심의 곡들이 대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엘은 Take It Away 재단과의 홍보 인터뷰에서도 "우리 음악에 대체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코드들은 들어가 있지 않아. 항상 쉬운 오픈 코드들 위주였지. 그게 우리 음악이 사람들에게 공감 받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였던 것 같아."라는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솔직함과 허세 부리지 않는 무덤덤함이 오히려 오아시스와 노엘의 연주를 만만하게 보게 만들었던 여지가 있었으나, 스튜디오와 작업실 등지에서 노엘의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본 여러 뮤지션들과 관계자들에 의하면 노엘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저평가 당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비틀즈의 링고 스타의 아들이자, 전설적인 밴드인 더 후의 객원 드러머였고 오아시스의 6집과 7집에서 투어와 녹음 현장을 함께 했던 드러머인 잭 스타키는 오아시스를 떠나면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 오아시스에서 연주하는 건 더 후에서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어렵다. 더 후에서는 쳐야할 드럼 솔로가 더 많다는 점과는 상관이 없다. '이봐, 오아시스 공연 정도는 난 한 손을 등 뒤로 묶고도 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병신같은 드러머들도 있지. 뭐,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x나 구릴 거라고 친구! 내 드러밍이 조금이라도 느리거나 빠르면 밴드의 모든 멤버가 그걸 알아차렸어. 그들은 내가 만나본 가장 똑똑한 뮤지션들이야.". 스타키가 원래 연주하던 밴드가 바로 그 전설적인 더 후였음을 감안한다면, 떠나가는 전 동료들을 위한 따뜻한 말이었다고 해도 오아시스를 충분히 높게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The Jam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론트맨인 폴 웰러는 그의 커리어 내내 수십년 동안 노엘이 과소평가 당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서로가 돈독한 사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웰러의 노엘에 대한 시각 자체는 충분히 핵심을 찌르는 의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해왔다.
"난 걔가 작업실에서 해온 걸 항상 봐왔다. 뮤지션적으로 훌륭한 베이시스트고, 훌륭한 드러머다. 모든 걸 다 잘 한단 말이다. 걔는 과소평가 받고 있다. 사람들은 걔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작곡 능력이 뛰어나다. 멜로디가 정말 천재적이다. 요즘도 계속 그의 노래 중 하나가 머리 속에 맴돈다··· 멜로디만 잘 만든다면 그걸 어떤 코드로 칠 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엘 본인은 자신이 기타를 잘 친다는 자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엘은 이미 데뷔 초부터 자신의 기타 연주에 대한 항의와 비난을 많이 받아왔는데, 데뷔 앨범의 미국 투어에선 한 관객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관객 "헤이. 난 당신 기타 치는 게 좋아. 맘에 들어."
노엘 "그게 무슨 소리지?"
관객 "항상 모든 곡의 리프가 다 똑같잖아. 뭔가 내면의 잠재의식 같은 걸 표현하는 거 아니야?"
노엘 "그렇지 않아!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히 조금씩 뭔가 다른..."
관객 "아닌 거 같은데(...)
노엘 "(윽, 개새x. 들켜버렸군)"
노엘 "그게 무슨 소리지?"
관객 "항상 모든 곡의 리프가 다 똑같잖아. 뭔가 내면의 잠재의식 같은 걸 표현하는 거 아니야?"
노엘 "그렇지 않아!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히 조금씩 뭔가 다른..."
관객 "아닌 거 같은데(...)
노엘 "(윽, 개새x. 들켜버렸군)"
90년대에 오아시스가 데뷔했을 당시, 오아시스의 성공 가도를 옆에서 지켜 보던 몇몇 밴드들로부터 '노엘 갤러거는 초보기타연주법 책부터 사서 기타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면서 노엘의 기타 연주를 까내리곤 했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아 했다. 노엘은 언제나 본인 스스로를 작곡가라고 지칭하였으며, 기타히어로가 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했기 때문이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을 폴 매카트니나 피터 그린 정도의 기타리스트로 여겼으며, 자신이 만든 곡과 리프임에도 작업실과 라이브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기타리스트에게 그것을 맡기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간단명료하게 "난 그렇게 못 치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 예. Champagne Supernova에 나오는 후렴 기타 솔로는 노엘이 아닌 폴 웰러가 연주한 것인데, 웰러가 자신의 기타 솔로 음량을 왜 줄였냐는 언질에 노엘은 자신보다 웰러가 훨씬 잘 치는데 자신이 왜 웰러의 기타 음량을 줄이겠느냐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노엘이 존경하는 조니 마 또한 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앨범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기타 솔로를 연주해주고 있으며, 심지어 노엘의 크루 중 훌륭한 기타 테크니션 스태프가 있는지 그에게도 앨범의 기타 솔로를 연주하게끔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노엘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에고가 그렇게 강하지 않으며 그림을 항상 크게 보고, 자신이 연주하는 것보다 남이 연주하는 것이 더 뛰어난 상황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노래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이다. 심지어 Be Here Now 당시 프로 뮤지션이 아닌 배우 조니 뎁이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게끔 하였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들의 영웅들과 그 사고방식의 궤를 같이 하였는데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 더 스미스의 조니 마, U2의 디 에지, 티렉스 등에서 그가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십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모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타 솔로 탑 10 리스트 같은 부류에 나올 법한 날고 기는 기타맨들이 아니라, 언제나 작곡과 노래를 만들어 내는 송라이터적인 관점의 뮤지션들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기타연주의 이론책이나 정론책을 독파하고 사전에 실릴 수 있는 모범적인 연주를 하는 연주가들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자신만의 연주법과 접근법을 가진 연주에 있어서 개성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레논은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기타리스트를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난 괜찮은 기타리스트다. 난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 테크닉은 정말 별로다. 현란하게 연주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난 기타가 말을 하게 할 수 있다." 라고 언급한다.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 역시, 단순한 쓰리 코드 펑크 연주를 하기 때문에 뛰어난 연주자 리스트 안에서 존재감이 없지만, 그는 언제나 앨범 단 한 장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였으며, 그의 스트로크는 언제나 칼박자였다고 한다. 리듬 기타리스트들이 상대적으로 솔로와 장식 악절을 연주하는 리드 기타리스트들보다 저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티브 존스의 업적은 의미있는 것이며, 노엘 갤러거 역시 스티브 존스의 그러함을 찬송하는 것이다. 리듬 기타리스트가 갖춰야 할 덕목인 '정확한 박자의 스트러밍과 에너지로 밴드의 곡을 나아가게 하는 재능'은 음악의 세계에서 언제나 상대적인 저평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특유의 Funky한 리듬 기타로 추앙받는 Chic의 나일 로저스나 일본 굴지의 전설이자 컷팅 연주의 달인인 야마시타 타츠로 또한 엄밀히 말해 리듬 기타리스트의 범주에 들어감에도 말이다. 또한 조니 마와 디 에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기타 연주라는 측면에서의 접근론이 매우 개성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이며, 티렉스의 마크 볼란이 연주하는 그 특유의 '광선총 사운드'는 그 누가 어떤 장비를 써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노엘 갤러거는 언제나 자신이 개성 있는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왔으며,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크게 개의치도 않아 했으며, 그저 자신만의 방법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음악가로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잡지인 MusicRader는 그의 연주를 '노엘 갤러거의 연주에는 아주 아름답고 간단해보이는 매력이 있다. 믿을 수 없이 캐쥬얼하며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가 작곡한 Wonderwall이 얼마나 많은 초보 기타리스트들에게서 연주 되고 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엘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전 세계 투어를 돌면서 어느 나라의 길가나 바를 가더라도 자신이 쓴 음악을 어린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AC/DC나 레드 제플린 등으로 이미지 새겨진 대표적인 록의 퍼포먼스들, 혹은 메탈이나 재즈 장르에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연주력과 현학적인 이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기타 연주와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기타리스트일 것이다.
3.2. 작곡가로서
"노엘 갤러거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다."
- 조지 마틴 경(卿)
- 조지 마틴 경(卿)
예나 지금이나 작곡 능력은 발군이라는 평을 받으며, 이를 증명하듯이 오아시스의 거의 모든 히트곡은 그가 작곡했다.[13] 그의 창작력이 절정을 치달았던 90년대 당시에는 정규 앨범뿐만이 아니라 싱글의 B-side 곡들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노엘은 "우리 B-side 곡들은 웬만한 밴드들의 싱글보다 훌륭하다. 그들의 가장 훌륭한 곡들을 전부 다 합해도 우리 B-side 수준도 안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밴드의 프로듀서였던 오웬 모리스는 그 당시 대중들은 오아시스의 B-side곡들도 듣기 위해서 싱글을 구매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애초에 미국 시장을 겨냥해 발매될 예정이었던 B-Side 모음집인 The Masterplan이 전세계에 발매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컴필레이션 앨범인 이 The Masterplan을 정규 앨범인 Be Here Now보다 높게 평가하는 오아시스의 팬들도 많다.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 앨런 맥기는 "이 노래를 들어봐. 이게 B-side라고. 노엘 갤러거는 천재임에 틀림없어."라며 감동했다고 한다.[14] 2000년대 이후론 노엘이 더 이상 많은 노래를 쓰지 못함과 동시에, 시장의 추세에 맞추어 싱글의 B-side 곡 수를 줄이게 되면서 브릿팝 시절처럼 자투리 곡에 크게 힘을 쏟지는 않았다. 또한 그의 지독한 자가 복제 성향은 2000년대 들어서 많은 질타를 받았으며 오아시스를 트렌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성향 때문에 오아시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시금 스타디움 밴드로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 많은 부침과 방황을 겪기도 한다.
Q) 지난 내한 공연에서 'Don't Look Back In Anger'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을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한참동안 바라보더라.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노래는 더 이상 오아시스의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세상의 것이 된 노래라고.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과 당신의 수많은 노래들, 무엇이 더 오래 남을까?
A) Don't Look Back In Anger라는 노래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다. 음악은 영원하다. Live Forever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다. 그게 바로 음악이다.
-2015년 9월호, 아레나옴므플러스와의 내한 인터뷰에서 #
A) Don't Look Back In Anger라는 노래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다. 음악은 영원하다. Live Forever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다. 그게 바로 음악이다.
-2015년 9월호, 아레나옴므플러스와의 내한 인터뷰에서 #
그의 말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노동자로 살던 시절엔 항상 돈이 없었지만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너바나의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 같은 부정적인 노래를 쓰기보다는 긍정적인 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15] 그래서 나오게 된 곡이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Live Forever였다.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를 연이어 발매하며 주가를 높인 그들은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쐐기를 밖으며 단숨에 당대 최고의 밴드로 올라선다. 이무렵,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은 리암 갤러거는 난봉꾼이며, 오아시스는 30년만 지나면 잊힐 허접한 밴드라고 독설을 퍼부었지만[16], 노엘은 재능 있고 훌륭한 실력을 가진 친구라고 칭찬했다. 이후 발매된 세번째 앨범 Be Here Now는 여전히 큰 세일즈와는 달리 초기의 열광과는 별개로 낮은 평가를 받으며 상승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후 그는 밴드에 찾아온 여러 대격변, 시대의 변화, 한 번의 이혼 그리고 마약 후유증 등의 영향으로 작곡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밴드는 점점 정상에서 내려오는 듯 했다. 노엘은 마약을 끊었고, 브릿팝의 광풍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2000년대에 들어서자 그와 밴드는 전체적으로 차분해지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밴드 멤버가 변경되고 실력이 향상되면서 한층 어른스러워짐에 따라, 노엘은 다양한 방식의 작곡 성향을 드러냈고 음악적 변화에도 꾸준히 싱글 차트 1위와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그 성과를 인정 받았다.
"지금이라도 Little By Little이나, Champagne Supernova 같은 곡들은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앞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난 이제 그런 싱얼롱 조의 곡들은 질렸다고. Lyla나 Don't look back in anger 같은 곡을 도대체 몇백곡이나 써줘야 직성이 풀리나? 나도 이쯤에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어. 이번에 그런 전환점에 서 있던 나를 앞으로 나아 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데이브[17]야. 내가 새로운 타입의 곡을 써서 들려줄 때마다 '이거 좋군!, 좀 더 이런 자신의 숨겨진 면을 보여 달라고.'라고 해서 나도 이후론 지금까지의 오아시스의 스타일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어. 좀 더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고 싶었고 만약 우리가 어떤 타입의 곡을 낸다고 해도 위화감 없이 "오아시스의 클래식이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앞으로의 이상이기도 해." (2008년 11월 rockin'on : oasis)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다.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디 시절엔 스탭 명단에 드럼 테크니션으로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7집 Dig Out Your Soul에서는 본인이 드럼을 친 곡도 꽤 있고(Bag It Up, Waiting For The Rapture, Soldier On) 농담조로 "내가 체력만 되면 이생키들 다 내쫓고 나 혼자 밴드할텐데."라고 말했다.
그외 X-Files: Fight The Future의 OST( Teotihuacan)[18]와 영화 Goal!의 OST( Who Put The Weight Of The World On My Shoulders) 등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2011년에 작곡의 기술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사 쓰는 일이 자신에게 악몽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할 게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인터뷰어가 '하지만 당신은 엄청난 이야기꾼이잖아요!'라고 하자 그렇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곡을 썼더라면 지금 당신은 나를 인터뷰하고 있지도 않을 거라며 플라시보의 브라이언 몰코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말했다. 당신 앨범에 참여한 음악가들 상당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말에 '쟈니 로튼은 결코 쟈니 로튼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 더 스페셜즈도, 더 잼도 우리들에 대해 노래했어'라고 대꾸하며, 이어지는 비판에서 안 좋은 예시로 로비 윌리엄스를 들었다. 모든 게 얼마나 자신이 개 같은지에 대한 곡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겠냐고 했으며 랩 음악도 모든 게 래퍼 자신의 고투, 어떻게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출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라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노엘의 음악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솔로 2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새로 몇 곡을 썻는데 amazing하다고 한다. 3집을 준비할 때 쯤 그 데모들을 가지고 David Holmes에게 가져갔으나 ‘스튜디오에서 처음부터 같이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고 노엘이 받아들임으로써 3집의 보너스 트랙 Dead in the Water를 빼놓고는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 작업당시 작업해둔 리프를 즉석에서 떠올린 척 연주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렸다고 한다.
솔로 3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현재 15살 이후로 처음으로 집에 기타가 없으며 베이스로만 작곡을 한다고 한다. The Police 느낌이 나며, 늘 그렇듯 amazing하다고 한다.
공개하지 않은 곡이 아주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정규앨범 3개 분량의 뛰어난 곡이 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말은 데뷔 초창기 태고적부터 단골로 내뱉는 말이었다.
종합하자면,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었며, 자신의 형제인 리암 갤러거와 함께 그 자체로 90년대 영국 문화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자신의 세대를 대변하는 작곡가였으며, 그 자신조차도 자신들보다 뛰어난 밴드는 영국에 얼마든지 있다고 인정할 정도로 솔직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자신들이 이 업계 챔피언이라고 주장하는 대범함과 확신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노엘이 자주 무하마드 알리와 비교되기도 한 이유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노엘을 예술가와 아티스트라는 칭호 속에 넣기 보다 장인에 가까운 범주에서 그를 이해했으며, 그의 밴드인 오아시스 역시 음악적인 영향력보단 문화적인 영향력이 더 강한 밴드로 남아 있다.
이는 그의 기본적인 작곡 성향이 일명 '싸가지 있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인했기 때문인데, 이것이 당시 영국 음악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렸던 것이 승승장구의 이유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영국밴드들은 너무 내성적인 것 같아. 씨발 음악은 TV 같아야지. 틀면 재미있게 해줘야 된다구. 우리가 바로 그런 밴드지. (생략) 우린 스웨이드나 스미스처럼 심오한 가사를 쓰고 싶은 열망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그들이 뭘 할지, 뭘 입을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명령하길 원해. (생략)' '사람이 너무 열심히 하려고 애쓰면 이루지 못하는 법이지. 요즘 대부분의 팝스타들은 노력은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애를 쓴다는 거야.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것처럼 들려. 그에 비해 우리가 하는 건 완전히 자연스럽지.' 등의 발언을 하면서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 무언가 일장연설과 자기 과시에 가까운 스웨그를 남발하던 자신 세대와는 다르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시각으로, 다시 말해서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영감을 얻을 줄 아는 현명함으로 그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데뷔할 무렵 이미 그의 나이는 만 27세였으며, 요절한 천재들이 죽어간 나이가 돼서야 뒤늦게 데뷔했던 것이다.[19] 그만큼 그는 확실한 성공에 굶주려 있었으며 자신의 작곡 방식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데뷔 앨범이 20년뒤에도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이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행과 사고 때문이 아닌 음악 그 자체만으로 이 앨범을 사고 들을 것이라는 지혜롭고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제 데뷔한 밴드치고 너무나 '조숙한' 음악을 했던 것이다. 데뷔 앨범에서부터 이미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각자 좋아하는 밴드들의 모든 장점을 모아놓은 듯한 밴드'라고 오아시스를 소개했으며, 신인의 패기를 넘어서서 이미 큰 성공이라도 해본 듯한 사람의 관록이 보일 정도였다. 성공을 가져본 적이 없던 아마추어들의 태도라기엔 너무나 성숙했다. 결국 이미 데뷔하기도 전부터 작곡과 음악 산업에 도가 튼 듯한 애늙은이 같은 면이 오아시스를 빠르게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빠르게 '생기'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그 '생기'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노래를 대중과 관중에게 전달하는 리암 갤러거의 보컬 퍼포먼스와 컨디션에 의지하는 바 또한 컸던 것도 오아시스의 아킬레스 건이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과 주어진 틀을 깨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능적으로 진보하려는 성향이 있지만, 노엘 갤러거는 자신의 인터뷰에서처럼 언제나 '안전지대'에 머물며 훌륭한 로큰롤 팝송을 지향하고 그것이 몇백만장씩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양식을 고수했다는 데서 장인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 왔다. 이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는 오아시스가 해체한 이후에 일어났으나 이것은 당시까진 아주 먼 이야기였다.
결국 오아시스는 음악적으로 진보하고 기대감을 갖게 하며 트렌드의 선두에서 약진하는 밴드가 아닌, 자신들의 선배인 롤링 스톤즈, U2등과 같은 스타디움 밴드로서 성장하게 된다. 노엘에 의하면 '본인들은 그다지 스타디움 음악을 하는 밴드는 아니긴 하지만' 이라고 언급한다. 오아시스는 결국 프렌차이즈화 되었으며 앨범의 발매를 통한 음악적 '성과'보다는 공연과 투어 등의 음악적 '활동'에 더 무게를 싣는 밴드로서 마무리 되었다. 노엘이 끝끝내 추구해왔던 하나의 음악적 이상향은 언제나 쉽고 재밌게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를 가진 로큰롤 팝송이었으며,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아무것도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물론 예민한 그답게 자신들의 앨범에 악평을 쓰는 평론가들의 이름과 내용까지 기억해뒀다가 언급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있는 등 피드백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일종의 '왕국화' 혹은 '프렌차이즈화'했으며,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대중들에게 특정한 분야의 장인으로서 인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결국 오아시스는 그 찬란한 시작과 너저분한 마무리 내내 훌륭한 후렴구를 가진 앤섬을 무더기로 쏟아내서 공연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도 공연장으로 불러내고 이윽고는 불특정다수가 그것을 따라부르게끔 만드는 우직한 밴드 였다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큰 성공과 인지도를 얻었던 밴드였으며, 자신들의 부족한 음악적 성과와 영향력을 넘어서는 그 특유의 압도적인 문화적 지배력과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오아시스 이후 노엘은 더이상 철저히 대중의 즐거움을 겨냥하고자 하는 집착과 자신이 키워온 왕조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좀 더 자신의 내면에 파고드는데 집중하면서 자신의 틀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본인 특유의 경직된 틀과 사보타주하는 경향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다.
3.2.1. 표절과 오마주의 경계
노엘은 무수히 많은 곡을 써내면서 표절 시비에도 자주 휘말렸는데, 이는 영국 락음악 씬에서 선배 음악인에 대한 존경의 의미에서 오마주로 여겨지는 것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다만 오아시스와 노엘의 음악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표절에 대해 엄격한 사람들에게는 오마주는 명분일 뿐 이것들은 결국 근본적으로 표절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프로젝트의 표절 의혹 곡들 모음. 오마주나 트리뷰트의 곡들, 표절로 판명된 곡, 단순히 표절 의혹만 제기된 곡, 원곡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곡들이 모두 섞여 있다.
대표적인 표절곡들로는, 당시 코카콜라 광고 삽입곡이었던 'I'd Like to Teach the World to Sing'을 표절한 Shakermaker[20]와 스티비 원더, 헨리 코스비, 실비아 모이의 'Uptight'를 표절한 'Step Out', 닐 이네스의 'How sweet to be an idiot'을 표절한 'Whatever',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에서 기타 리프를 훔쳐온 'Supersonic', [21]역시 조지 해리슨의 명곡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링고 스타를 대표하는 노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에서 따온 She's Electric[22], 티렉스의 'Get It On'의 리프를 가져와 만든 'Cigarettes and Alcohol', Wham!의 'Freedom'에 영향을 받은 'Fade Away'등 이 밖에도 많은 곡들이 있다. 또한 노엘의 솔로 앨범들에서 역시 여러 노래들과의 유사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노엘은 오마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표절 시비가 제기될 때마다 "응 맞아. 이 노래는 여기서 가져왔고, 이 노래는 저기서 가져왔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Cigarettes and Alcohol이 표절 시비에 걸렸을 때 "그래도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티렉스를 알게 됐잖아?" 라고 말했는데 대선배인 로드 스튜어트는 데뷔 1년차 신인 록밴드의 싱글 Cigarettes and Alcohol을 극찬하며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표절곡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노엘은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했다. 트래비스가 2집 The Man Who의 히트곡 Writing To Reach You 발매 당시 리더 프랜 힐리는 '라디오에서 Wonderwall을 듣다가 그 코드를 훔치고 가사를 빌려왔다'고 밝혔는데 아무도 표절이라고 안 했고, 원래 트래비스의 광팬이었던[23] 노엘은 트래비스 무대에 함께 올라 All I Wanna Do is Rock을 함께 공연했다. 이렇듯 영국 록 음악 씬에서 오마주는 선후배 간의 긍정적인 교류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그린데이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욕을 했다. 그가 그린데이를 원래 싫어하기 때문인데, 2007년 스터프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린데이의 대표 히트곡인 Boulevard of Broken Dreams를 자신들의 곡인 Wonderwall을 그대로 갖다 배꼈다면서 비판했다. 인터뷰어가 '그렇게 치면 우리도 당신이 표절한 곡을 댈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말하자, '난 전체 다 베낀 건 아니다! 적어도 품위는 가져야지. 난 최소한 내가 베낀 사람들한테 돈은 지불한다고!' 라고 밝혔다.[24]
기본적으로 노엘은 음악적으로는 반미에 가까운 성향이고 친영국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미국 밴드들인 메탈리카의 라스 울리히와 커크 해밋은 오아시스를 좋아하고, 푸 파이터즈의 데이브 그롤도 오아시스를 좋아하고, 마룬 5의 애덤 르빗이 오아시스를 좋아해도 정작 노엘은 대놓고 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다.[25] 언제나 욕을 할 땐 '우리한테 무슨 욕을 해도 좋으니 제발 에어로스미스 같다고만 하지 마라' 라던가 '미국 애들이 그린데이나 슬립낫 같은 거 듣지 말고 스트록스를 들었으면 좋겠다'고도 밝힐 만큼 미국 메이저 밴드들을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따라서 노엘은 영국 내에서라면 오아시스 음악에 영향을 받거나 조금씩 베끼는 것은 노엘 자신도 그랬 듯이 선후배 간에 서로 주고 받는 것 정도로 여기지만, 미국의 상업적인 밴드들이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베껴 가는 것에는 심히 불편해한 전력이 있다.
전체적으로 노엘의 작곡 기법에 대한 매우 절묘한 평가로 배철수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 을 꼽을 수 있겠다.
3.3. 보컬리스트로서
2024년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며 프런트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오아시스 시절엔 엄연히 동생인 리암이 밴드의 얼굴 마담이었기에 프런트맨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밴드 시작 당시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은 없었던 그가 지속적인 음악 활동과 노래 경험을 통해서 노래하는 것을 편안해 하게되고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내면서 서서히 리암과 맞먹는 무대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 이후 본인 스스로가 밴드의 프런트맨으로서 당당히 활약하고 있다.오아시스 시절의 노엘은 밴드들의 일반적인 섭리를 벗어난 행보를 보였는데, 요컨대 팀의 보컬이 아니면서도 보컬 활동을 하는 빈도가 서서히 늘어나고, 리암의 목상태가 망가진 후에는 아예 프론트맨과 맞먹었던 것이다. 이는 보컬이었던 리암의 불안정성이 큰 원인이었지만, 프론트맨이 아닐 뿐 리암의 친형이자 작곡가로서 노엘의 평소 입지가 막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컬과 같은 퍼포머에게 매우 치중되어 있는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밴드라면 어떤 곡을 쓰는가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일반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은 메인 작곡가이거나 작곡에 참여하는 비중이 매우 높으며, 이는 안그래도 넓은 프런트맨의 밴드 내 영향력을 더 넓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아시스 초창기 프런트맨 리암은 작곡에 대한 재능과 관심이 부족했고 그 옆에는 최고의 작곡가라 불리는 노엘이 있었기에 리암 대신 노엘이 작곡을 전담하게 되고 그의 영향력이 넓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아시스 전 노엘의 활동도 흥미로운데, 사실 노엘은 일반인 시절엔 프론트맨 지망생이었으며, 그렇기에 인디 밴드인 인스파이럴 카펫츠에 보컬로서 오디션을 보러 갔었다. 허나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허무하게 탈락한 후, 밴드의 로디로서 음악산업을 경험하며 만족스런 생활을 한다. 그 후 친동생의 밴드에 들어가게 된 뒤로는 밴드의 유일한 경력자이자 작곡가로서 자신의 목소리와 의견을 내며 서서히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기본적으로 노엘이 작곡한 오아시스의 모든 데모곡은 노엘의 연주와 보컬로 이루어져 있기에 노엘이 노래하는 것 자체는 밴드 내부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통 음악계에선 작곡가가 데모를 만들 거나 혹은 데모를 공연자에게 실연을 해서 직접 들려주는 경우가 많고, 그럴 경우 작곡가가 노래를 직접 하는 경우가 많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데모에서 작곡가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경우는 스스로 보컬리스트도 겸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드물다. 데모는 데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래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가이드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데모란, 노래의 핵심적인 특징을 담아내는 데 집중을 하며, 보컬의 실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노엘 역시 커리어 초창기에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케이스의 작곡가였다. 직접 8트랙 녹음기를 통해서 어쿠스틱 버전을 녹음해서 들려주거나, 밴드 멤버들 앞에서 직접 연주를 하며 불러서 가르쳐 주는 방식이었다. 리암은 노엘이 쓴 멜로디 라인을 한 두 번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익혀서 따라 부르며 보컬로서의 역량을 보여줬으며, 본헤드는 당시로선 코드 이름을 잘 모르던 노엘을 대신해서 코드를 따서 받아 적었다고 한다.
즉, 노엘이 작곡한 오아시스의 모든 곡은 노엘의 보컬 버전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노엘은 리암을 대신해서 오아시스의 모든 곡을 스스로 부를 줄 안다는 말이었다. 본래 그가 작곡하고 가사를 쓰고 편곡하고 불러 놓았던 곡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엘이 공연에서 보컬로 나설 수 있는 이유였다면, 노엘이 보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리암은 오아시스 후기 빈도가 줄어들긴 하지만, 전성기였던 초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공연을 펑크 내거나 공연 도중에 무단이탈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대체적으로 리암이 그날 관중들이 던지는 물건을 맞았다던가, 관중과 말싸움을 했다거나 공연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숙취가 심하거나 몸이 아프다던가, 목이 아프다든가 등의 이유로 노래를 부르다 말고 나가거나 갑자기 공연에 불참하는 상황들이 많았는데, 보통의 밴드 같으면 그 자리에서 공연이 중지돼서 밴드의 평판은 떨어지고, 관객들에게 티켓값을 환불해 주고, 공연 주최 측에 위약금을 무는 등의 악재가 생긴다.
노엘은 그런 불상사를 막고자 스스로 노래를 이어받아서 세트리스트를 다 소화해 내는 극적인 경험들을 많이 했었다. 나중에는 하도 익숙한지 오히려 리암이 부르다 말고 넘겨주면 좋다고 신나게 부르는 경우도 많았으나, 매우 계획적인 성향인 노엘에게 있어선 이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고 하며, '영국 최고의 밴드라기에 가봤더니 보컬은 뿔나서 나오지도 않고 웬 못생긴 놈이 걱정 말라며 대신 노래하면 관객들이 참 좋아도 하겠다'라며 자신이 프런트맨이 되는 것에 자조적인 표현도 많이 했었다. 초창기 노엘은 빈말로도 보컬 실력이 좋지 못했고, 본인의 목소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으며, 노래 역시 보컬인 리암에 맞춰 편곡된 노래들이었다.
또한 항상 기복이 심하고, 자주 악화되는 리암의 목상태도 문제였다. 리암의 창법은 매력적이지만 목에 매우 무리가 가는 방식인데 정작 초창기 리암은 관리를 하기는 커녕 술과 담배, 약물 등으로 그걸 더욱 악화시키곤 했다. 오아시스 공연 영상들을 보면 술담배가 무대 위의 리암과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오늘만 사는 것 같은 이런 락앤롤라이프는 오아시스의 인기요소 중 하나였지만 어째든 문제를 불러왔다. 흔히들 리암의 목은 2~3집 이후 악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데뷔앨범을 낸 94년 투어부터 이미 목의 문제로 인한 공연 취소가 빈번했고 밴드를 지속시키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 이것이 노엘로 하여금 본인이 보컬이 되는 곡을 앨범에 실어야겠다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오아시스 최고의 명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보컬인 리암의 다른 문제점이 있었는데, '곡을 가려서 부른다는 것' 이었다. 노엘이 썼다고 무조건 부르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듣기에 마음에 드는 곡만 불렀으며, 따라서 노엘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 하더라도 곡을 부르는 사람은 리암이니 그에게 늘 컨펌을 받아야만 했다. 가령, 훗날 'Little By Little'을 당연히 리암 보컬로 발매하려던 노엘은 리암에게 데모를 들려주자 '형이 불러. 형 보컬 중에 씨발 최고라고.'라는 말을 듣고서 노엘이, '네가 빌어먹을 보컬 아니냐?'라고 하니 '이 곡은 형이 더 나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노엘은 '리암이 이 곡의 후렴을 불렀으면 끝내줬겠지만, 걔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라는 언급을 한다.
또한 리암은 초창기 적엔 노엘이 쓴 'Take Me Away'나 'Half The World Away', 'Talk Tonight', 'Going Nowhere' 등 어쿠스틱 넘버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락커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곡조의 곡들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노엘로서는 그 곡들을 묵혀 둘 수도 없고, 리암의 목 컨디션을 소모시키는 보컬 스타일로 인해 공연 중간중간 리암의 목에 휴식을 주고자 본인이 보컬로 나서는 어쿠스틱 넘버를 B면집 등에 실었으며, 공연 중간에 어쿠스틱 세트를 집어 넣었다. 보컬인 리암의 이러한 특징들로 말미암아 본디 프론트맨이 아니었던 노엘이 자연스럽게 보컬로서 공식적인 무대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2집인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서 처음으로 B사이드가 아닌 노엘 보컬 곡을 한곡 넣게 되는데 그게 바로 'Wonderwall'의 뒤를 따르는 오아시스의 대표곡 'Don't look back in anger'다.
'Don't Look Back In Anger'의 성공으로 대중들이 노엘 역시 프론트맨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점차 노엘의 보컬을 선호하는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노엘의 어쿠스틱 세트는 많은 오아시스 팬들에게 굉장히 값어치 있는 숨겨진 보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B사이드의 곡들이기에 라이브가 귀했기 때문이고, 노엘 갤러거의 보컬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라이브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공연장에 가거나 부틀렉을 사야만 했다.
허나 동시에, 노엘이 중간중간 리암의 시간을 빼앗아 노래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노엘이 노래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팬들도 많았다. 원리원칙에 따라서 리암은 프런트맨이고, 노엘은 기타리스트였으며, 노엘이 리암보다 목소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튀어나오려 해서 건방지다는 시선도 있었으나 노엘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후 노엘은 이러한 초창기적 경험들을 발판 삼아 서서히 영향력과 존재감을 키워 나갔으며, 오아시스 해체 후 아예 완전한 솔로 뮤지션이자 프런트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엘의 보컬 특징은 시기적으로 각자 다른데, 리암의 보컬 컨디션이 초창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리다가 오아시스 해체 이후로 컨디션을 서서히 되찾은 것과는 반대로 노엘은 초창기엔 엉망이었으나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며 점점 일취월장한 케이스로 여겨진다.
초창기적엔 노래하는 재능이나 특징이 전문 프론트맨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했으며, 특별히 비범한 구석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은 솔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지만 초창기 적과는 다르게 당연히 많이 원숙해진 상태다. 물론 초창기적에도 'Don't Look Back In Anger'처럼 본인에게 어울리는 곡을 부를 경우 설득력과 호소력 있게 소화한 경우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로 어쿠스틱 곡조에 어울리는 따뜻한 톤을 가졌으며 동시에 베이직하고 건조하다. 리암의 목소리가 개성 강하며 카랑카랑하고 목소리 자체만으로 주목을 끄는 것과 정반대이다.
물론 초창기부터 이미 낼 수 있는 목소리의 범주가 리암보다 다양한 것은 분명했으나, 노래하는 재주를 익히지는 못한 탓에 노래 스타일이 단조로웠다. 노엘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 성격으로 봐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이는 리암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계속 노래를 많이 해보면서 노래하는 것을 서서히 숙련시킨 케이스가 된다. 아무리 재능이 없다고 해도, 노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매일매일 수십 년을 해오다 보면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리암의 경우엔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자신의 타고난 목소리 자체가 남다른 무기이다 보니 다소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나, 노엘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신의 평범한 목소리 톤에 의지하기보다는 좀 더 곡을 섬세하게 불러내는데 집중하는 스타일로 발전했다. 온몸의 힘을 목구멍으로 뽑아내서 내지르는 듯한 리암의 날카롭고 공격적인 스타일과 다르게 노엘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묵직한 바리톤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며[26], 따라서 노엘이 곡을 부를 경우 웅장하고 쩌렁쩌렁하게 공연장이 울리게 된다. 따라서 'The Masterplan', 'Don't Look Back In Anger', 'Acquiesce', 'Little By Little' 등 주로 후렴이 웅장한 곡들을 노엘이 잘 소화해 냈다.
노엘이 밝힌 바에 따르면, 7집 앨범의 'Waiting For The Rapture'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 톤을 찾았다고 하며, 그 곡에서의 자신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오아시스 후기로 갈수록 노엘의 보컬은 점점 일취월장하였다. 여유롭고 웅장해져갔으며 힘 있는 보컬이 되었다.
허나 오아시스 해체 이후로 솔로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나이가 중장년층에 접어들면서 목소리 톤에 변화가 생겼고, 노래를 소화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선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 톤이 약간 더 잠겼고 호흡도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떨어졌으며, 스스로도 'The Importance Of Being Idle' 같은 높은 키의 곡은 이제 부르기가 힘들다고 밝힐 정도로 컨디션이 내려갔다.
물론 단순한 기량의 하락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그리고 오아시스 시절에는 간헐적으로 소화하던 보컬을 이젠 풀타임으로 투어 내내 소화해야 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 등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솔로 활동 이후 목 관리에 대한 부분은 노엘이 철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 담배를 줄이고 젊은 시절에는 죽어도 안 가던 체육관도 다니고 자전거도 열심히 탄다고 한다. 다이어트에도 신경 써서, 노엘이 솔로 3집부터는 살을 엄청나게 빼고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1,2집 시절의 곡을 그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게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살을 얼마나 뺐는지 바지 사이즈가 26인 것이 공연 중 사진에 찍힌 적도 있다.
나이가 많이 들었고, 동시에 솔로로서 공연 전체를 책임지게 되다 보니 보컬의 힘과 웅장함은 오아시스 시절에 비해서 떨어졌지만, 좀 더 보컬의 완급 조절에 신경 쓰는 모습이 늘었다고 할 수 있다. 솔로 활동 시의 밴드 사운드가 오아시스 시절의 볼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박해진 것 또한 보컬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노엘이 보컬로서는 별다른 재능이 없던 오아시스 초창기에 비하면 지금은 어엿한 한 명의 프런트맨으로서 공연을 책임질 정도로 숙련되었다는 것이다.
4. 사용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대표적인 모델들만 나무위키에서 나열하지만 더 자세히는 정리된 사이트가 있다.4.1.1. 에피폰 레스폴 스탠다드
Supersonic 뮤직 비디오 |
4.1.2. 깁슨 레스폴 스탠다드
1994년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Live Forever 라이브 |
4.1.3. 1972년산 깁슨 레스폴 커스텀
줄스 홀랜드 Whatever 라이브 |
4.1.4. 1982 깁슨 플라잉 V
D'You Know What I Mean? 뮤직 비디오 |
4.1.5. 에피폰 리비에라
Don't Look Back In Anger 뮤직 비디오 |
2022년 시그니처 모델을 발매했다.
4.1.6. 1993년산 에피폰 쉐라톤
1996년 넵워스 2일차 Some Might Say 라이브 |
4.1.7. 에피폰 쉐라톤 " 유니온 잭"
1996년 메인로드 1일차 Morning Glory 라이브 |
4.1.8. 1960년산 깁슨 ES-355
2008년 웸블리 Champagne Supernova 라이브 |
노엘은 90년대 말에 파리의 한 기타샵에서 ES-355를 하나 더 구매하게 된다. 기타샵에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랑 거의 비슷한 녀석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ES-355를 하나 더 구매 했는데 알고보니 서로 시리얼 넘버가 딱 1 차이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조사를 해보니 깁슨의 서로 다른 장인에 의해 같은 날 만들어진 기타였는데 막상 사운드 체크를 해보니 파리에서 산 녀석은 완전 쓰레기(...)였다고 한다. 빅스비, 넥, 튜너 등이 기타에 무슨 짓을 해도 해결이 안 될 정도로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안 좋았다고.
참고로 2009년 오아시스 파리 투어 때 리암이 부순 기타는 노엘이 최초로 샀고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ES-355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부숴진 그 기타는 픽가드가 좀 더 크고 노엘의 넘버 1 ES-355는 픽가드가 작다. 부숴진 기타는 파리의 유명한 기타 리페어맨에게 수리를 맡겨 수리하였고 2022년 5월 이 기타가 경매에 나와 무려 389,900유로(2022년 8월 환율 기준으로 5억원)에 낙찰되었다.
2022년 8월 30일 깁슨에서 시그니처를 발매하였다. # 전세계 200대 한정으로 나왔으며 깁슨 생산 라인중 가장 고가 라인업인 머피랩 시리즈로 나와 출시가 9999달러, 한화로 1400만 원이란 엄청난 가격으로 출시되었다.[33] 노엘도 본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시그니처 모델의 퀄리티에 만족하는지 자신의 오리지널 기타는 이제 자기 스튜디오에 보관하면서 사용하고 바깥 활동에는 복각품을 사용한다고 한다.
4.2. 어쿠스틱 기타
4.2.1. 에피폰 EJ-200
1994년 MTV Most Wanted Live Forever 라이브 |
4.2.2. 깁슨 J-150
Little By Little 뮤직 비디오 |
노엘의 메인 어쿠스틱 기타. 깁슨의 J-200 시리즈에서 파생된 모델이며 2000년대 중후반부터 노엘의 솔로 활동 어쿠스틱 곡 라이브나 스튜디오 녹음에서 항상 사용된다.[34]
특이 사항으로는 기타의 넥 부분과 바디가 접해있는 부분 위쪽에 아디다스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노엘의 아디다스 사랑을 볼 수 있는 부분.
깁슨에서 빈티지 선버스트 색상이 시그니처로 출시됐으며, 200대 한정판으로 나왔다.
5. 대한민국과 노엘
지난 번에 서울에 왔을 때가 내 생일이었지? 그런데 서울에 올 때마다 매일이 내 생일 같아.
(So last time I was in Seoul, it was my birthday, right? But it would seem that everyday is my birthday every time I come to Seoul.)
2015년 4월 3일 서울 공연에서
(So last time I was in Seoul, it was my birthday, right? But it would seem that everyday is my birthday every time I come to Seoul.)
2015년 4월 3일 서울 공연에서
매번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마다, 너희가 나에게 이 노래를 불러줬지. 근데 이번엔, 내가 너희에게 불러줄게.
(Everytime I come to Korea, you all sing this song for me. But this time, I'm gonna sing it for you. )
2023년 11월 25일 명화홀 공연에서 Live Forever를 부르기 전에
(Everytime I come to Korea, you all sing this song for me. But this time, I'm gonna sing it for you. )
2023년 11월 25일 명화홀 공연에서 Live Forever를 부르기 전에
노엘 갤러거, 한국에서 가장 친근한 48세. 2015년 5월 21일 오전에 기사가 게재되고 며칠 동안 네이버 메인 뮤직란에 걸려 있었다.
90년대 브릿팝 열풍에 힘입어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주자가 Oasis였기에, 당시 PC통신 락음악 동호회에서 노엘은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당시 일본 음악 잡지의 인기 투표에서 노엘이 동생 리암을 압도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에서의 인기는 노엘이 리암보다 많았으나, 같은 시기 영국 음악 잡지를 보면 표지 모델로 등장해도 리암이 센터이고 노엘이 살짝 밀렸다. 오아시스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를 제외하면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건 리암이었다.
그러나 오아시스 후기로 갈수록 탄탄한 작곡 실력만큼이나 보컬 면에서도 노엘이 인정받으면서 리암 못지 않은 인기를 얻게 되었고, 영국의 주간 남성 잡지인 Zoo Magazine 독자들이 선정한 '2007년 영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100 Coolest British Men of 2007)' 1위에 노엘 갤러거가 선정되었다. # 이때 2위가 스티븐 제라드, 3위가 닥터 후의 데이비드 테넌트, 4위가 007 주인공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였고 리암은 22위였다. 이듬해에도 노엘은 3위에 랭크. 여기에 2010년 이후로는 노엘의 성공적인 솔로 활동과는 반대로 1집과 2집의 연이은 저조한 판매량에 비디아이가 해체하면서 완전히 상태가 역전됐던 때도 있었다. 두 형제가 모두 솔로로 전향한 이후엔 두 사람 모두 비등비등하다. [35] 노엘 갤러거의 인기는 기존부터 워낙 높았기에 그 인기가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거친 언행의 인터뷰와 별개로, 팬들에게 친절하고 사인도 잘 해주는 등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걸로 유명하다. 오아시스 첫 내한 당시 Mnet 인터뷰에서 노엘이 먼저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으로 잡고 인터뷰에 응해서 기자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사연이 있다. 녹음기에 시계로 인한 잡음이 들어갈까봐 기자를 배려해준 것. 인터뷰어의 용돈 농담에 지갑을 꺼내 있는 잔돈을 주기도 했다. 비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엘의 인터뷰 준비는 언제나 훌륭하며, 언제나 인터뷰할 때는 핸드폰을 꺼놓고 상대방이 편하게 인터뷰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고 한다.
솔로로 내한왔을 때도 혼자서 코엑스로 쇼핑을 나갔던 노엘답게,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소에서 가까운 압구정으로 나갔다가 마침 SM엔터테인먼트의 사옥 앞을 지나게 됐는데, 그 앞에 모여있던 동방신기의 소녀팬들 중 몇 명이 노엘을 알아보고 따라갔다. 차마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열심히 따라오는 한국 소녀들을 보다못한 노엘이 너희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가 자신의 팬임을 알고 선선히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이돌 가수의 플카를 들고 서있던 소녀팬들인 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알아볼 줄은 노엘이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몇번의 한국의 투어 방문 후 노엘의 한국 팬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2015년 최근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색소폰 연주자일거야! 한국에 가봤나? 말그대로 아시아의 아일랜드야. 거기서 공연하면 더블린 공연같아. 한국 팬들은 미쳤어. 아주 정신이 나갔다고. 진짜로." [36][37]라고 한국에 대해 언급했다. 다른 국가에 비해 10대 팬층이 두터운 것도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38] 출처
(2015년 7월 23일, 노엘이 내한 직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
나아가, 노엘이 한국에서 받은 열광적인 반응은 본인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남북관계에도 관심을 갖게 만든 듯 하다. 자신이 한국에 가면 공연장 안팎에서 만나는 한국인 팬들은 그렇게 열정적일 수가 없고, 흥이 넘쳐나는데, 같은 뿌리를 가진 휴전선 위쪽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억압된 상황에서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해져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북한에 방문해보고 싶다거나, 북한에 가지 못한다면 내한 일정 중 시간을 내서 DMZ에라도 방문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외의 매체에서 많이 하는 편. #1 #2
5.1. 2012년
2012년 5월 28일 솔로 데뷔 이후 첫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장소는 2011년 비디아이가 공연을 했던 AX-KOREA. 그리고 티켓팅 시작 2분만에 매진. 희망은 취소표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고침 전쟁이 벌어졌었다.참고로 이 때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노엘이 공연 도중 미국인 기타리스트[39]를 소개하자, 관객들은 큰 소리로 "USA"라고 외쳤다. 그러다가 제대로 필 받은 관객들이 "KOREA"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노엘은 "중국인은 없어? 일본인은?" 이라며 궁금해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노엘이 일본을 언급하자 야유 아닌 야유를 보냈고, 이에 노엘은 "너네는 일본이랑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 이웃나라인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라고 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대놓고 "리암! 리암!"을 외쳤다고 한다. 이에 제대로 당황한 노엘은 "너네 사람 엿 먹일 줄 아는 구나..."라고 했다고.
그러나 노엘의 입국에 맞춰 공항에 몰려 있던 팬들에 의해 일본에서 산 자켓에 테러를 당했는데, "한국 최정예 요원들을 투입하여 범인을 찾아 달라." 분통을 터뜨리며 범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인터뷰가 워낙 재미있어서 팬이 아닌 사람들도 즐겨 찾는 영상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엘의 한국 인지도가 음악 팬들을 넘어 한층 더 급증하게 된 훈훈한 사건.
2012년 5월 25일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 후지 록 페스티벌에도 참여한다고 언급했다. 이후 후지 록 페스티벌 둘째날 헤드라이너로 공연하였다.
5.2. 2015년
2015년 4월 3일/4일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장소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시어터, 오프닝 밴드는 바이 바이 배드맨이 맡았다. 공연 앵콜을 부르기 전 앵콜브레이크 때 팬들이 Live Forever를 불러달라고 떼창을 하며 불러달라고 성원했지만 세트리스트에 충실했는데, 후일 인터뷰에서 노엘은 이날 한국 팬들의 Live Forever 떼창을 찬양했다. 공연 당일 노엘은 기자회견에서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질문에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다고 답해서 걱정을 많이 샀는데, 3년 전의 내한 공연보다 10분 더 길게 공연했고, 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아빠 미소를 지으며 팬들을 바라보는 노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한 기념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주체는 피키캐스트에 인터뷰어는 에릭남. 센스 넘치는 에릭남의 노엘의 특징을 활용한 알찬 인터뷰와 처음엔 점잔 빼다가 뒤로 갈수록 노엘의 거침없는 독설과 재치 넘치는 자막이 압권. 3년 전 자켓에 매직을 그은 범인을 여전히 용서하지 않는 중이다. 다만 Gigs를 Goods로 잘못듣고 번역하는 등 오역이 눈에 띄었다.
2015년 7월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주최측에서 발표하기 전에 인천공항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7월에 한국에 올 거냐는 질문에 노엘이 "Yeah!"라고 대답해주면서 오피셜을 능가하는 본인피셜, 노피셜 발표가 되었다. 1년에 두 번 한국에 공연하러 온다는 사실에 팬들은 물론 국내 언론도 흥분하였고, 실제 페스티벌에서도 모든 관중을 독점하며 헤드라이너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18곡의 세트리스트는 단독 내한 공연과 버금갔고, 특히 Champagne Supernova 플래시 이벤트는 노엘이 음향을 조율하느라 1분 가까이 관객석을 등지고 있었는데, 돌아보면서 마주하게 된 수많은 '초신성'들의 향연에 정말 환한 미소를 지으며, Amazing이라는 표현으로 화답했다. 이 영상은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다.
5.3. 2018년
2018년 5월 3일, 3번째 단독 내한이 확정됐다. 날짜는 8월 16일로, 주최는 라이브 네이션 엔터테인먼트다. 당연히 국내 오아시스 팬덤은 열광. 일본 SUMMER SONIC 페스티벌 전에 한번 들린 것으로 보인다.2018년 8월 15일 광복절, 다음날 있을 단독 내한을 위하여 인천공항을 통해 9시 30분경 입국했다. 내한을 주재하는 라이브 네이션 코리아측에서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달라고 사전 공지를 했지만, 노엘 갤러거는 한국 팬들을 위해서 직접 유성펜을 지참하고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팬들에게 일일이 싸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르는 줄 없이 대부분 말이다!
다만 라네코 측에서 질서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사정했지만, 줄의 길이가 짧고 뚜겁게 분포되어 있는 열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질서의 붕괴가 일어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정면의 열은 줄이 길고 얇게 분포되어 노엘이 대부분 다 싸인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노엘 갤러거의 내한공연 3년주기설이 나오기도 했다. 오아시스로 내한한 2006, 2009, 솔로로 내한한 2012, 2015, 2018.
5.4. 2019년
3년주기를 깨버리고 2019년 5월 19일 1년도 안 되어 한국 내한을 확정지었다!2019년 5월 18일 오후 2시경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 19, 20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공연에서 노엘은 그동안 해준 적이 손에 꼽는 Live Forever를 관객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연주해주었으며 20일에는 맨시티의 FA컵 우승을 축하하며 전광판에 콤파니의 사진을 띄우고 Wonderwall을 연주하는 팬심을 과시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집안 곳곳에 태극기를 걸어 놨다는 얘기를 했다. 링크
5.5. 2023년
11월 28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4년 6개월만의 단독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 7월 28일 노엘은 자신의 인스타에 한글로 “곧 보자, 이 아름다운 놈들아!라고 포스팅하며 내한 소식을 알렸다.이후 8월 17일 추가 공연이 확정됐다. 이번엔 “너네 노래하는 거 보려고 공연추가" 라고 포스트. 이로써 11월 27, 28일 양일간 공연을 진행하게 됐다.
그런데 10월 17일, 명화 라이브홀에서 11월 25일에 진행될 특별 추가 공연이 확정되었다. “특별공연 추가, 너네 나라에 오는 건 끝내주는 일이야" 라는 말과 함께. 결국 노엘의 이번 내한 일정에 25일, 27일, 28일 삼일간의 공연 일정이 잡히게 되었다.
11월 25일, 명화 라이브홀에서의 사운드 체크 중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일부 팬을 잠시 공연장으로 초대하여 사인을 해주고 사운드 체크를 구경하도록 해주었다.
11월 27일 잠실실내체육관 공연 풀버전
12월 3일, JTBC 뉴스룸에 사전녹화분으로 출연하였다. 약 7분 간의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마디를 해달라는 앵커의 부탁에 "이번 내한에서 받은 선물을 전부 영국으로 가져가려면 5,000달러를 내야하니, 앞으로는 영국으로 직접 보내달라"라고 말하기도. 앨범 뒷면에 매니지먼트 주소가 있으니 거기로 보내라고 한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 역시 빼놓지 않았다.[40] 또 한국에 처음 온 순간 사랑에 빠졌고, 서울의 관객들은 전 세계 최고의 관객 중 하나라고 말하는 등 한국 팬들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울공연 중 가장 멋진 순간으로는 플레시 이벤트를 꼽았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당신 여권을 빼앗아버리겠다"라는 플래카드였다고.
맷 모건의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내한공연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하며 한국 팬들을 다시 한 번 극찬했다. # 또한 내년 여름 한국의 락페스티벌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한다.[41]
5.6. 2024년
3월 14일, 내한일정이 공개됐다. # 공연 날짜는 7월 26일. 지난 2023년 11월 공연 이후 불과 약 8개월 만이다. 지난번 내한이후 노엘이 페스티벌에 참가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락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올 줄 알았으나 이번에도 단독으로 내한한다. 장소는 일산신도시 킨텍스홀. 특별 게스트로는 최근 인디씬에서 가장 핫한 실리카겔이 오프닝 무대에 선다고 한다.6. 축구
2013-14 시즌 맨체스터 시티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2014년 5월 11일, 그라운드에 내려온 노엘이 주장 완장을 차고 기뻐하는 모습[44]
동생 리암과 함께 맨체스터 시티의 골수팬이자 축덕이다. 오아시스에 있을 때도, 나온 후에도, 틈만나면 스포츠 방송에 나와 맨체스터 시티에 대한 입담을 과시하며, 심지어 FA 컵 조추첨을 하기도 한다. 덕분에 팬카페만큼이나 축구 커뮤니티에 관련 게시글이 자주 올라오고 해외 축구 기사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며, 심지어 EPL 중계 시 관객석의 노엘이 카메라에 잡히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곤 했다. 특히 2010년대 이후로 맨체스터 시티가 강팀으로 거듭나자 딱히 오아시스나 락음악에 관심이 없는 축구 팬들도 노엘이 누구인지는 알 정도가 되어버렸다.
노엘의 말에 따르면 음악적 재능은 원래 주어진 것이지만, 축구는 자신이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밴드를 하지 않았으면 축구 암표 판매원처럼 어떻게든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영국에서 살아가는 노동 계급 젊은이들에겐 흔한 일인데 영국 노동 계급 젊은이들에게 본인이 응원하는 축구 팀은 단순히 응원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종교라고 볼 수 있으며[45] 보통 어릴 때 같이 나고 자란 동네친구들은 같은 동네 팀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동네 문화의 한 축이 축구인 셈이다.[46]
이러한 점들에서 알 수 있듯, 노엘은 맨체스터 시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심지어 90년대 팀이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 시절인 3부 리그로 떨어졌던 흑역사를 겪던 시절에 오아시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90년대 후반에도 노엘은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꼬박꼬박 맨체스터 시티 경기를 찾았다. 모두가 맨유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반골의식으로 맨시티 팬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고[47] 사촌들이 모두 맨유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반항으로 아버지와 함께 맨시티의 팬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다.[48] 공연을 할 때에도 항상 맨시티의 저지를 걸어두며 심지어 유로 2012에 잉글랜드 경기를 보러 갔을 때에도 맨체스터 시티를 나타내는 걸개를 걸고 경기를 관람했다.
사실 노엘이나 리암의 축구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자신들이 어린 시절 자라왔던 맨체스터 버니지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이 라디오에서 축구 경기 중계를 듣는 것뿐이었다 한다. 노엘은 "맨체스터에서 자란다면 가질 수 있는 꿈은 두가지 밖에 없다. 축구 선수가 되거나 락스타가 되거나."라고 말하였으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신의 집에서 맨체스터 시티 경기장의 불빛이 보였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극도로 혐오하며, 맨유와 그 팬들을 조롱하는 어록도 수두룩하다. "유나이티드 팬들이 기름을 살 때마다 우리 수중으로 돈이 들어온다니 너무나 기쁘다."라는 그 유명한 짤방 외에도, 맨유에서 수비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던 게리 네빌의 수염을 모두 뽑아버리겠다며 으르렁거린 적도 있다. 형제 모두가 게리 네빌을 특히 싫어했는데 훗날 게리 네빌과 대면하며 별 문제 없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80년대 노동자로 살아갈때는 맨시티의 훌리건짓[49][50]을 하기도 했으며 때문에 국내 오아시스 팬들은 맨체스터 시티에 당연히 높은 호감을 보인다.
축구로는 관람하는 것만 지독히 좋아할 뿐, 잘 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노엘이 축구를 하면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뻗어 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집에서 축구를 보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한다고 한다. 안절부절하면서,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고 하며 딸인 아나이스가 그 모습을 볼때면 아빠 무섭다고 좀 가만히 앉아서 보라고 얘기를 한다는데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노엘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좋아한다. 월드컵 7회 연속 진출, 2002년 4강까지 알고 있고, 판타스틱하고, 헤어 스타일도 멋있는 팀이라고 칭찬했다. 2009년 7월 내한 인터뷰였다. 심지어 남한과 북한이 경기하는 일정까지 알고 있다. 일정이 맞았으면 (공연 다음날이 축구 경기인데, 아침에 출국) 보러 갔을 것이고, 당연하지만 남한이 이기길 바란다고 한다. 2009년 4월 내한 인터뷰
알싸 같은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인터뷰가 올라올 때, 예전에 노엘을 잘 모르는 네티즌들이 "도대체 노엘 갤러거가 누구길래 인터뷰를 하면 기사가 됨?"이라고 묻기도 했다. 사실 다른 밴드의 뮤지션들도 좋아하는 축구 클럽이 있긴 하지만, 노엘처럼 열정적으로 축구계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은 거의 없다. 이제는 아예 무려 축구 전문가 타이틀을 달고서 전현직 축구 스타들과 함께 축구 방송 패널로 출연한다. 그리고 노엘이 한국에서 재미난 형님으로 통하게 되면서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노엘의 인터뷰를 당연하게 여기고 꾸준히 번역 업로드 중. 맨시티 외 EPL 다른 클럽 팬카페에도 노엘의 인터뷰는 인기가 좋다.
지독한 축덕이지만 생각만큼 잉글랜드 국대를 안 좋아한다. 사실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 자체가 클럽 축구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현지 팬들 중에는 국대에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은 팬들도 심심찮게 보이며[51] 갤러거 형제가 아일랜드 혈통이고 잉글랜드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말 그대로 출신지만 잉글랜드인 것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맨시티가 잘나가기 전까지는 잉글랜드 국대 주전급 선수들을 그렇게 많이 배출하지 않았던 점도 있고[52], 노엘이 싫어하는 맨유, 첼시, 리버풀 소속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있다 보니 마음놓고 응원하기 껄끄러운듯.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피식 웃으며 "4강만 가도 잘한거지"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010년에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 영입에 대해서 인터뷰를 했는데 맨체스터 시티 사장인 개리 쿡이 자기랑 밥 먹으면서 영입할 선수들 목록을 냅킨에 써서 보여줬다고 한다.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종종 밝혔고, 1997년 인터뷰에서는 Be Here Now의 높은 판매량 덕분에 현금을 많이 확보해서 구단 인수에 대해 변호사와 상의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현재 구단주가 어마어마한 자본을 뿌리면서 클럽을 발전시키고 있는 바람에 그 꿈은 이루기 힘들게 되었다. 물론 이에 불만은 없고 만수르 구단주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중이며, 맨체스터 시티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비난에 "X발. 우리는 그동안 거지였으니까 돈 좀 써도 돼."라고 반응하기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쓰자면 "윤리? 시장 원리? 귤까. 시발 너네들은 돈 물쓰듯 써놓고 우리가 쓰기 시작하니까 난리네. 전통? 우리가 30년동안 거지였다는 그 빌어먹을 전통?"이라고 반응했다.
2011년 4월 17일(한국 시각)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4강전 맨체스터 더비에서 모습을 보였는데, 야야 투레의 선제골을 보자 매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축구 관련으로 인터뷰는 심심하면 하는 수준이고 1년에 한두번씩 EPL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BBC의 매치 오브 더 데이에 출연하기도 한다.
2011년 맨시티가 FA컵에서 우승할때 기뻐하던 모습이다. 맨시티로서도 무려 35년만에 들어올린 우승컵이기 때문인데 1976년 EFL컵 우승 이후로 얻은 우승컵이었다.
인생의 의미란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얘기가 축구 얘기였다. 이때 진행자가 "맨시티의 우승이 섹스나, 명성, 가족보다 좋은가요?"라고 묻자 "물론이죠. 제 아내도 이해해줍니다."라고 대답했다.
'적중률 100%' 갤러거, 맨시티 승부차기 우승 예언 화제 캐피털 원 컵 결승적 직전의 인터뷰가 경기 내용과 승부차기 순서, 결과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맨시티 리포터 스컬리와 투어에도 함께할 만큼 절친에다가 공식 채널로 독점 인터뷰 영상, 전용캠 영상까지 갖고 있고 우승 직후 맥주병을 들고드레싱 룸에 난입하여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얼싸안으며 필드에서 함께 기념사진 촬영도 하는 등, 유명인 서포터의 차원을 넘어서 아예 팀의 일원처럼 어울리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인터뷰를 하며[53] 하도 공식채널에 얼굴을 비추다 보니 공식 홍보대사같이 느껴질 지경이다.
2018년 영국에서 열린 FIFA 어워드에서 시상자로 초청받았는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뒤에 지나간 사람이 그랬다.
2018/2019 시즌 들어 부진에 빠져있는 맨유를 보고 조롱하기도 했다.
18/19 시즌 챔스 결승에서 토트넘을 응원한다고 해서 많은 팬들이 의아해 했으나 그 이유가 리버풀이 존X 싫어서[54]라고 한다.[55] 팬들 반응은 "그래 어쩐지 저 양반이 순순히 토트넘을 응원하나 했다."
또한, 우사인 볼트의 팬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사인 볼트는 유명한 맨유 팬인데, 인터뷰에서 이 소릴 듣자 노엘은 "누구에게나 병신같은 면은 있는 법이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박지성에 대한 질문을 받자 끝까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2021-22 시즌에는 빌라와의 최종전에서 맨시티가 기적 같은 역전극을 쓰며 우승을 달성하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후벵 디아스의 아버지와 부딪혀 다치는 해프닝도 있었다. 영국 BBC와 토크스포츠에 따르면, 스카이박스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갤러거는 “우리가 앉아 있는 곳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후벵의 가족이 있었다. (역전골이 터지자) 나는 미친놈처럼 주변을 뛰어다니며 내 아들은 우승컵처럼 패스했고 모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뒤돌아서는 순간 후벵 디아스의 아버지가 내게로 달려오다 머리로 나를 받았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은 피로 덮였다. 2분 동안 기억을 잃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가 (찢어진 부위를) 꿰맸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갤러거는 “윗입술을 꿰매고, 두 눈 주위는 멍이 들어 까맣게 변했다. 내려가 경기장 복도로 들어서자 펩이 울상이 돼 달려왔고 서로 껴안았다. 그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 됐느냐’고 물었고 나는 ‘가서 선수들과 함께 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갤러거는 후벵 다아스의 아버지는 다치지 않았다며 “그는 덩치가 곰 같았다. 내 치아를 모두 부러뜨릴 뻔 했다”고 덧붙였다.
2022-23 시즌에는 맨시티가 역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 미국 샌디에이고의 맨시티 공식 서포터 클럽인 블루풋 바 앤 라운지에서 경기를 보며 우승이 확정되자 좋아라 노래를 부르며 축하했다.
2023-24 시즌에는 맨시티의 Definitely Maybe 30주년을 기념해 4번째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한다 #. 또, 컵대회 폰트도 노엘 갤러거의 손글씨다.
2024-25 시즌 챔피언스 리그의 리그 단계에서 스포르팅 CP vs 맨체스터 시티 경기의 해설을 맡았다. 펩 과르디올라와 이번 시즌 떠오르고 있는 아모림과의 전략 대결이 기대되는 경기였는데 시작 4분만에 필 포든의 선제골이 나오고 이후 맨시티쪽에서 경기를 쉽게 풀어나가자 갤러거는 “이 정도로 쉬울줄은 몰랐네요.”[56]라는 말을 하며 경기는 맨시티쪽으로 기울어지는 줄 알았으나… 이후 요케레스의 해트트릭과 아라우호의 골이 나오면서 경기는 스포르팅의 4:1 승리로 끝났다…
6.1. 유명한 축구 선수들과의 인연
축구 선수들과도 친분이 깊은데 리버풀 FC의 제이미 캐러거와 맨체스터 시티 선수였던 조이 바튼, 그리고 유벤투스의 레전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와도 매우 친분이 깊다고 한다. 예전에는 친구인 델피에로에게 전화해 맨시티로 이적하라고 땡깡을 놓는다던지 온다면 주급을 자신이 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술 먹고 술주정부린 거였지만, 델피에로의 에이전트는 이 제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실제로 맨시티 행을 고민했었다고. 2006년에는 델피에로의 초대로 2006 독일 월드컵 4강전과 결승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4강전에서 이탈리아가 이기자 델피에로는 노엘에게 결승 보러 올때 꼭 똑같은 옷 입고 와달라고 요청했고 노엘은 같은 옷을 입고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우승했다.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57] 칭찬 뿐만 아니라 비판도 날카롭다. 노엘은 첼시의 주장 존 테리를 상당히 안 좋아한다. 존 테리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존 테리는 사생활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그런 면이 노엘에게는 무척 좋지 않게 비추어졌다. 2009년 여름 존 테리와 맨체스터 시티가 접촉했다는 뉴스가 떴을 때도, 노엘은 존 테리의 영입을 반대하는 인터뷰를 했다. 게다가 존 테리가 불륜을 저지른 여자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의 웨인 브리지의 약혼녀였다. 평소에 존 테리를 싫어했던 노엘이 이 사건으로 노발대발한 건 당연했던 일. 대충 노엘 갤러거가 했던 인터뷰를 요약하자면 "존 테리 그 자식은 완전히 씨X놈이야. 내가 그 개X끼를 만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어."
반대로 첼시 출신의 조 콜은 오아시스의 열성 팬으로, 14살 소년 시절 처음 CD플레이어를 구입한 계기가 오아시스 2집 앨범의 Wonderwall을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때 이미 오아시스 콘서트 장에 갔었고 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어린 팬이었을 거라 회상했다. 노엘은 한때 좋아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감독 중 하나가 주제 무리뉴였고 첼시의 주장 존 테리를 싫어하는 것이 첼시 팀에 대한 노엘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데 무리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된 이후로는 예전처럼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듯. 맨체스터 더비 전 인터뷰에서 "무리뉴는 케빈 더브라위너와 다비드 실바를 죽이라고 명령했을거야." 라고 말하기도 했고, 특별 게스트로 맨체스터 더비를 해설 스튜디오에서 시청한 이후 무리뉴의 인터뷰를 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거야. 조세" 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무리뉴는 위선자다" 식의 까칠한 반응을 보인 적도 있다.
2008년 웨인 루니와 벌어진 기타 해프닝은 유명하다. 오아시스의 팬인 루니에게 보낼 뜻깊은 선물을 위해 루니의 부인 콜린이 노엘에게 깁슨 레스폴을 보내 그의 친필 서명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노엘은 기타를 맨시티의 상징인 연파랑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맨시티의 응원가인 Blue Moon 가사를 잔뜩 적어서 돌려보낸다.[58] 이에 루니는 크게 재미있어하며 그 해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시원하게 100호 골을 넣은 다음 세리머니 사진을 찍어 노엘에게 보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타는 2015년까지 루니의 집에 잘 보관되어있는 것으로 드러났다.[59]
2015년 2월 27일, 2집 발매를 앞두고 그레이엄 노튼쇼에 출연했는데 맨유의 레전드 데이비드 베컴과 같이 출연했다. 이때 뮤직비디오 찍기 싫다고 투덜대던 노엘은 갑자기 옆에 앉은 베컴을 향해 "내 뮤직비디오에 나올래요?"했는데 베컴은 약간 당황했다가 "좋죠!!(would be lovely)"라고 답했고, 자신은 물론 아이들도 오아시스의 팬이며 맨체스터에서 경기가 있을 때 노엘과 만나 악수도 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역시 오아시스의 열성 팬으로 이적 직후인 2009년 인터뷰에서 맨체스터가 그리운 이유 중 하나로 오아시스를 꼽았다. 처음 맨체스터에 왔을 땐 오아시스가 누군지 모르고 테크노 음악을 좋아했지만, 맨체스터에 있으면서 그들이 누군지 모르고 계속 지낼 수는 없죠. 영국 선수들은 드레싱 룸 안에서 오아시스 노래 듣는 걸 좋아해요. 저는 맨체스터에서 그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너무 긴장해서 말을 걸어보긴 힘들었고요. 쉽게 친근하게 다가갈 외모는 아닌 듯 하지만 창조적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아요.라고 진솔하게 인터뷰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Champagne Supernova라고 한다. 친한 선수들끼리 돈을 모아 오아시스를 초청, 자신들만을 위한 오아시스 공연을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맨유 선수로서 오아시스 공연장에 가긴 여러 모로 힘들었을 테니 이런 차선책까지 떠올렸던 모양이다.
리오넬 메시 역시 국대 동료 테베즈의 소개로 오아시스의 팬이 되었고 Don't Look Back In Anger와 Roll It Over를 좋아하는 노래로 꼽았다.
요즘은 노엘이 맨시티 선수들 중에서 다비드 실바를 가장 좋아하는지 인터뷰마다 다비드 실바를 칭찬하고 있다. 2015년 5월 초, NBC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다비드 실바는 내 아내와 함께 자도 된다."고 과격한 애정 표현을 해서 노엘의 지극한 아내 사랑을 알던 한국의 노엘 팬들과 축구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을 주는 듯 했으나, 이런 류의 비유는 영국 현지에서는 축구 팬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사라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ㅎㅎ 이미 흑발의 작은 남자(노엘)와 함께 하고 있으니 키가 크고 금발을 원해. 데이비드 베컴 같은?"하고 더더욱 쿨한 유머로 받아주면서 한국의 누리꾼들까지 빵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실바는 사라에게 차였지만, 캐피털 컵 우승 직후 실바의 유니폼을 선물 받은 노엘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60]
7. 짤방
자세한 내용은 오아시스(밴드)/짤방/노엘 갤러거 문서 참고하십시오.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독설가로 유명한 노엘인 만큼,[61] 그의 주옥같은 어록 짤방의 수가 매우 많다.
8. 재산
노엘의 2015년 기준 순자산액(net worth)은 $60 million(6천만 달러, 한화 약 680억원)정도로 추정되었으며, 5년 뒤인 2020년 기준으로는 7,000만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재산이 약 1000만 달러 정도 증식됐다. 물론 이것은 전부 추정치임을 감안해야 한다. 크게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정확한 순 재산 수치는 노엘이 재산 서류라도 공개하지 않는 이상 대중들은 당연히 모른다. 또한 200여개의 백카탈로그를 가진 작곡가답게 현재의 현금보다 보유하고 있는 저작권의 자산가치가 매우 높은 편으로, 노엘이 가진 오아시스 곡 저작권의 가치는 약 2억달러에 가깝게 추정되고 있다.부의 상징 블랙 아멕스를 사용한다. 노엘이 자신의 블랙 카드를 보여주면서 약 올리는 영상에서 알려진 사실인데, 이것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시기의 일이다. 이미 15년도 넘게 지나서 노엘이 아직도 이 카드를 유지하고 있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돈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이 카드를 유지할 지 아닐 지는 고객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노엘은 자신의 레이블을 직접 운영하고 있고[62] 자신의 백밴드 규모도 키워놨기 때문에 고정적인 지출은 상당할 것이다. 코로나 시기 디지털 싱글과 EP, 베스트 앨범 발매 등의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음악적으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곡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자금 지출이 큰 정규 앨범이나 피지컬 음반의 제작비 회수가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모든 활동을 직접 하기에 자유로운 만큼 인건비, 음반 제작비, 홍보비, 비디오 촬영, 투어 경비, 녹음실 운용 등의 비용 역시 높을 것이며, 활동 수익을 100프로 가져가는 대신 코로나 시기 각종 페스티벌도 거의 락다운 된 상황에서의 수익 감소 혹은 손실을 경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노엘은 온전한 사운드를 위해 비용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실하며, 앨범의 풍성함이나 투어라이브의 퀄리티를 보면 알 수 있듯 음악에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앨범판매량은 인디 아티스트로서는 큰 편이지만, 문제는 고정 팬들의 순간 화력으로 인한 반짝 1위가 대부분이고,[63] 앨범 수익이 솔로 1집을 제외하면 오아시스 시절에 비해서는 크지 않다.
앨범판매가 수익의 큰 파이를 차지하던 90년대와 달리 현재 노엘과 같은 싱어송라이터의 수익은 투어와 저작권 수익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노엘은 코로나 락다운이 해제된 이후 하이플라잉버즈로 글라스톤베리를 비롯한 각종 페스티벌, 영국 아레나투어, 월드투어 등 왕성하게 투어를 돌고 있으며, 음원 또한 정규 4집 발매 이후 바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스트리밍이 제대로 정착되기 한참 전인 2011년에 발매된 솔로1집이 스트리밍 사이트들에서 다시 한번 관심을 받고 있는데 당시 싱글 If I had gun은 오아시스 Top5 곡에 비견될만큼 재생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솔로 활동의 수익 구조 역시 안정적으로 보임에도 여전히 노엘에게는 오아시스 시기의 앨범 저작권료가 수익의 매우 큰 부분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연유에서 노엘은 리암을 포함한 역대 오아시스 멤버들 중에서 가장 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역대 모든 멤버들의 재산을 다 합쳐도 노엘의 재산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동생인 리암은 의외로 명성에 비하면 재산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 90년대부터 이미 보석금, 위자료 등의 방탕한 생활과 여러 번의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와 양육비까지 날려먹은 재산이 어마어마 해서, 솔로가 되고 나서 한 인터뷰에선 자기 재산이 한 때 겨우 100만 파운드가 전부였단 발언도 했다. 100만 파운드면 한국 원화로 약 16억 정도다. 물론 보통 서민이 보기에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돈으론 런던에서 좋은 집 구하기도 힘들다고 발언했다.
노엘의 경우엔 물론 그도 2000년대 초반 리암과 거의 동시에 이혼을 한 차례 겪긴 했고[64], 그러면서 위자료도 많이 내면서 재산이 깎였으나 그 이후로 사생활에서 금전적인 출혈을 일으킬 만한 사고가 없었고,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내내 내리막을 걸었던 오아시스가 6집 발매 무렵에 갑자기 브릿팝 시절의 공로를 인정 받았는지[65] 다시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으면서 저작권료가 다시 어마어마하게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노엘이 자신의 블랙 아멕스를 자랑하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노엘의 성격상 카드가 생기고 얼마 안 지나서 기고만장하게 자랑하고 싶었던 듯 하다. 물론 이것은 6집 자체가 성공했기 때문에 기세등등 한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싱글들이 특히 성공했었다. 게다가 노엘은 리암과 다르게 부동산도 상당히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아시스 시절부터 걸핏하면 이비자에 별장을 샀네, 팔았네 말이 많았고, 별장을 샀더니 요트를 줬다던가 집이 몇 채가 더 있다던가 등등 언급이 많았다.
게다가 원래 노엘은 아멕스 카드를 자주 자랑했었는데, 90년대 3집 앨범 무렵에는 아멕스 센츄리온이 아니라 아멕스 플래티넘 등급 카드를 자랑했었다.[66] 한 10년쯤 지나면서 저작권료가 정산이 되고 음악계 입지도 확고해지면서 재산이 증식된 것으로 보여진다.
당연하게도, 오아시스 명의로 발매된 거의 모든 곡의 저작권이 노엘의 것이다. 오아시스가 15년간 앨범을 7집까지 낼 동안 노엘 외의 나머지 모든 멤버들의 앨범 곡 수를 다 합쳐도 15곡이 전부다.[67] 그마저도 브릿팝 시기 시절엔 전무했다. 오아시스의 자금줄인 1,2,3집의 모든 저작권은 노엘에게 있다. 게다가 해체 이후 발매된 그들의 사실상 유일한 그레이티스트 힛츠 앨범인 'Time Flies'가 언제나 uk차트 순위권에 잊을 만하면 빈번하게 들어가는 효자 앨범이 되었으니 노엘의 주머니 사정은 언제나 풍족할 것이다. 게다가 전세계에서도 세대가 바뀌면서 오아시스의 현역 시절을 겪지 못한 어린 팬들이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고자 베스트 앨범과 브릿팝 시절의 1,2,3집 앨범 등을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것으로 인해 단독 저작권자인 노엘의 자금은 마를 날이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최근 사라와 이혼함으로써 위자료로 재산의 50%를 지불했다.
9. 그 외
2008년 2월 1일, JAY-Z가 2008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전 페스티벌의 표가 2시간 만에 매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총 137,500석 중 100,000석도 채우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락밴드와는 상반되는 힙합 가수를 내세운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 발언 이후 노엘은 집중 포화를 당했으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게 된다.노엘은 전통적으로 기타 연주가 주를 이루는 페스티벌에서 제이지를 헤드라인으로 지정한 주최 측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 "만약 부숴지지도 않았고 문제도 없다면 고치려 들지 마. 만약 네가 부숴버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가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제이지라고? 어림도 없지. 난 글래스톤베리에서 힙합은 안 볼거야."
- "우린 기타를 연주하지 않아, 노엘. 하지만 힙합은 다른 음악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이 헤드라인 쇼는 당연한 진행 과정이야. 랩은 아직도 진화하고 있지. 플라티늄 앨범이 된 Bronx 와 런 디엠씨의 멤버 아프리카 밤바타의 디제잉에서부터 그래미상 랩부문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까지, 난 그저 다음 차례일 뿐이야. 우린 서로의 음악 장르를 존중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해."
-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건 내가 제이지는 글래스톤베리에서 공연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겠지. 그건 진짜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니까. 전엔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누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글래스톤베리가 티켓 매진 실패했는데 이게 만약 제이지 때문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더라구. 거기서부터 내가 Speakers' Corner(영국에 있는 자유발언대)의 주황색 발판 위에 서서 '들어봐, 형제 자매들. 이번년도 글래스톤베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러니까 말이야, 만약 내가 '맥도날드에 있는 치킨 샌드위치들은 말 그대로 틀려 먹었어'라고 한다 해서 그게 세상 모든 닭들이나 샌드위치를 욕하게 되는 건 아니란 소리야. 전에 도쿄에서 제이지를 만났는데 거기서 그의 공연을 본 적이 있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괜찮더라. 우린 모두 크리스 마틴을 친구로 두기도 한걸. 난 그저 힙합의 충격적인 표현을 싫어하는 남자일 뿐이야. 랩퍼나 힙합,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진 않아. 80년대 랩이 한창 영감을 주고 있을 때 맨체스터에서 열린 데프잼 투어에 갔던 적도 있어.[68] Public Enemy는 굉장했지. 근데 항상 지위나 재산에 대해서 만 얘기하고 있어서 나한텐 그다지 와닿지 않았어."
- "노엘이랑 말해본 지는 꽤 됐지만 그가 연락하려고 한단 소리를 들었어. 난 아무 유감 없고, 모든 게 다 괜찮아. 언제나 말해왔지만 난 그냥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내 초창기 인터뷰들을 보라구. 난 언제나 사람들이 쉽게 파악하기 위해 음악에 규정짓는 선들과 분류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해 왔었지."라꼬 했으며 또한 앞으로 어떤 가수와 작업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아무나. 오아시스도 뭐. 상관없어"라고 대답하였다.
왼손잡이이다. 왼손잡이 항목에서 상당히 늦게 추가되었다. 기타를 오른손으로 치기 때문에 덜 알려져서 그런 듯 하다. 커트 코베인은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기타를 써서 왼손잡이임이 널리 알려 졌듯 기타 치는 손에 따라 어느 손잡이인지 알려지는 정도가 상당히 다른 것 때문에 그런 것. 본인 말로는 오른손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기타 치는 거라고 한다.
스톤 로지스가 밴드를 시작한 이유라고 한다. 더 스미스처럼 밴드를 하려면 대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아니면 더 잼의 폴 웰러가 되는 수밖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과 똑같은 스톤 로지스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 한다. Sally Cinnamon을 처음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터뷰 영상
인터뷰에서 종종 케이크, 초코바 등등 달달한 군것질 거리 들을 언급 하다 보니 단 것 덕후 기믹이 붙기도. 요크셔 티[69] 를 굉장히 좋아해 Love Music Love Food : The Rockstar Cookbook이라는 레시피북 겸 사진집 에서는 아예 요크셔 티와 연결지어서 나오기도. 나름의 밀크티 레시피도 가지고 있다. 아래 이미지는 책에서 나온 노엘식 요크셔 밀크티 만드는 방법이다.
이 인터뷰와 해당 레시피를 적절히 참조하면,
1. 티백과 설탕을 채운다 (요크셔 티백)
2. 팔팔 끓인 물을 컵 위쪽의 1인치까지만 채우고 3분 동안 태운다.
3. 티백을 꾹 짜서[70] 빼낸다.
4. 우유를 마지막에 넣는다. 이 때 차 색이 노란색 봉지에 든 캐러멜[71]같은 색이여야 한다.
5. 마신다.
참으로 간단하다.
인터뷰에서 초창기의 건방진 이미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당시에는 말로는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같이 아무도 아닌 무명들이 할수 있으면 너희들도 할수 있다"는 얘기를 전달하고자 싶었다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리암을 욕하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술 취한 자신의 동생이 Red Indian 같아 보인다고 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붉은 색(red)"에 비유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해당한다.[72]
GQ 시상식에서 시상식에 참석한 대사 윌리엄 헤이그를 향해 "지금 세계에서 정리해야 될 일이 많은데 여기에 오고 참 잘 하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물의를 빚었다.
연기를 정말 못해서 팬들은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한다. 노엘도 뮤직비디오 촬영이 달갑지는 않은듯. 뮤비 촬영은 재밌냐는 기자의 질문에 뮤비에서 싫어라고 답했었다. |노엘이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에서의 장면이다. 38초 쯤 뒤에 서있는 사람이 바로 노엘.
자동차를 좋아해 몇 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운전은 하지 않는다. 운전에는 관심이 없으며 운전기사가 있기 때문에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아시스의 기타리스트였던 본헤드의 딸 루시의 후견인이다.
공연을 할 때 속옷을 입지 않는다고 밝혔다. # 그러나 레딧에서의 AMA(Ask Me Anything)에서 농담이었다고 다시 밝혔다.
런던 지하철에서 자주 보이신다 카더라
데이빗 보위가 사망했을 때 "왕이 떠났다"라고 트윗을 남겼다. 안 깐 가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누구나 다 까는 노엘이지만 데이빗 보위만큼은 존 레논과 동급으로 모양이다.[73] 이후 노엘 갤러거의 음악 스타일이 데이빗 보위를 연상케 하는 풍미로 바뀌게 된다.
2013년엔 원 디렉션을 까댔다는 것이 밝혀졌다. 별 다른건 아니지만 특이사항 이라면 노엘에게 한 소리를 들은 원 디렉션은 "노엘 갤러거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초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멤버의 말에 따르면 데이먼 알반도 노엘 갤러거와 함께 원 디렉션을 깠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원디렉션의 곧 출시될 앨범이 오아시스 풍이라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노엘은 '원디렉션에서 해리만 만나봤는데 좋은 녀석'이라 칭찬하면서 멤버 제인이 탈퇴한 것에 폭언을 동원해가며 맹렬히 비판했다.
2012 NME awards에서 "Godlike genius"라는 부문의 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노엘을 위한 상이라 할 수 있다.
수상소감(한국어자막)
상 트로피.[74]
2015년 7월에는 NME를 통해 한 록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나온 Avicii를 디스했는데, 또 그뿐만 아니라 EDM이라는 장르 자체를 디스 하다시피 했다.[75][76] 이게 일파만파 퍼지면서 디스 당한 DJ들이 NME를 통하거나 간접적으로 노엘을 디스하는 중. 그런데 NME 독자들은 "그래서 너네는 누구인데?" 하며 듣보잡 취급했다. 그런데 그 깠던 헤드라이너가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와 협업을 했다.
2015년 12월 8일 영국 링컨에서 열린 콘서트에 5년만에 전 오아시스 멤버 겜 아처와 함께 무대에 섰다. 같이 Wonderwall을 포함한 오아시스 시절 노래 4곡과 하이플라잉버즈의 곡, 커버곡 등을 연주. http://www.nme.com/news/noel-gallagher/90186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당시 민중들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해야하는 정치인들이 맡은 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에 대해 질타하기도 했다. # 번역본. 브렉시트 선거 기간 동안 다른 영국 연예인들과 달리 그가 침묵을 지키자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 2017년 11월 노엘 갤러거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은 브렉시트에 반대했으나, 자신 같은 사람이 이런 중대사에 참여하는 게 옳은지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투표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77] 그러면서 브렉시트를 "파시즘"이라 부르며 선거 무효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보야 말로 "파시즘"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의 도입과 말미에 그는 잔류파들에게 그 자신도 브렉시트를 좋아하지 않으나, 어쨌든 브렉시트는 국민들이 합법적으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밝히며, "씨X 극복 좀 해라"(F**king get over it)라는 정말로 노엘 갤러거다운 멘트를 남긴 후 이젠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주장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영국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동당 지지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다만, 노동당을 지지하는 정도만 극단적일 뿐 노동당 내에서는 비교적 중도 진보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78]
중도좌파 성향이 매우 강해서 과거 토니 블레어를 극단적으로 지지했다.[79] 노엘은 브릿 어워드에서 수상 소감으로 토니 블레어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도 있고 노동당이 발간하는 잡지에 " 토니 블레어의 연설에 눈물을 흘렸다"는 인터뷰도 했다. 당시 노동당의 노선은 젊음과 신선함이기도 했고 노엘의 이런 행보가 이쁘게 보였는지 노엘은 토니 블레어의 파티에 초청받아 다우닝 가 10번지에 방문하기도 했다. 오아시스의 선풍적인 인기는 노동자 계급의, 이른바 아웃사이더들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당시의 대중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에 상당부분 기인하는데 노엘이 총리 관저에 방문하자 '노동자 계급 출신이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상류층의 일부가 되었다'며 많은 대중들이 노엘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노엘은 "약에 취한 상태에서 총리로부터 술 한잔 하러 오라는 편지를 받아봐라. 거기에 안 갈 사람이 있겠냐"며 나름의 자기 변호를 했지만 리암이 " 형은 거기에 환장(mad fer it)해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치적으로 꽤나 진성이었던듯. 여담으로 리암은 초청받지 못했고 만약 받았더라도 관심 없어서 안갔을거라 한다. 오아시스의 라이벌이었던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초청은 받았지만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게 뻔해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블레어가 이라크 전쟁 파병, 대처리즘을 통한 우클릭을 시도하자 상당한 독설을 가했다.
제러미 코빈 류가 표방하는 민주사회주의 보단 대략 리버럴에 가까워 보인다. 이로 인하여 코빈 체제가 지속되자 노동당의 급진화에 분노하며 한때 본인이 숭배했다가 다시 미친듯이 두들겨깐 토니 블레어를 '상식이 통했던 유일한 정치인'이라며 재평가했다. 다만 영국의 2-30대의 젊은 층이 코빈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상황에서 '맨체스터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스타가 되더니 사회 복지 확장을 위해 조금만 부를 포기하자는 여론에 자신의 출신도 잊고 팬들을 배신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토리 갤러거(Tory Gallagher)'가 다 되었다고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물론 이런 비판은 적절하지 않은 게 노엘은 원래부터 극렬 블레어 지지자였고, 전형적인 리버럴 성향이며 극좌에 반대할 뿐 보수당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는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보수당을 까왔고 보수당 지지자인 필 콜린스 역시 깠다.
2020년 9월 코로나 사태로 인한 마스크 착용이 필수화되는 현상에 대해 자유를 뺏는 것이며 본인은 그냥 벌금 내고 마스크 안 쓰겠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한 술 더 떠 10월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아내의 생일 파티를 지정 시간을 넘긴 늦게까지 열어 한 국회의원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에릭 클랩튼이나 이안 브라운 같은 나이든 스타들이 마스크부터 록다운까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정책을 반대하고 백신에 의구심을 표명해서 논란을 일으킨 가운데 노엘도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80]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브렉시트 투표에 대하여 ' 일반 대중들은 수준이 떨어져서 투표할 자격이 없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본인도 그곳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던지 본인은 브렉시트에 반대했지만, 스스로 투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투표하지 않았다고 한다.[81] 이러한 점에 대해서 동생인 리암 갤러거에게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불평만 한다'며 또다시 까였다.
전설적인 모델 중 하나인 케이트 모스와 매우 친하다. 둘다 약쟁이에, 1990년대 중반 영국의 청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보니 자연스레 문화적 접점이 많았던 듯하다. 정확히는 케이트 모스가 90년대 당시 배우 조니 뎁과 사귀고 있을 무렵에, 노엘이 3집 앨범을 위한 데모들을 작업하기 위해 머스티크섬으로 여행 겸 출장을 갔는데, 그 때 노엘과 맥 커플과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 커플이 커플 동반으로 함께 가서 놀았다. 이 때 찍힌 사진을 보면 양 커플이 후줄근 한 복장으로 길을 걸으면서 조니 뎁이 파파라치를 향해서 뻐큐를 날리는 사진이다. 그래서 노엘과 조니 뎁은 서로 친분이 있다. 조니 뎁이 앨범 녹음에도 참여했다. 물론 노엘이 조니 뎁과의 친분을 거의 언급하질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 친해도 그렇게 막 친한 건 아닌지 애초에 노엘도 조니 뎁보다는 케이트 모스와 더 친한 모습이고, 둘이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찍힌 사진들이 꽤 많다. 공식 석상에서도 노엘과 케이트가 함께 발표자로 나온 적도 있고, 케이트가 노엘을 무릎에 앉히고 자연스레 대화하는 모습도 있다.
대다수의 밴드들이 그렇듯이 오아시스도 일본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노엘은 일본은 월드투어에서 항상 하이라이트라고 언급했으며, 일본의 라이브에서 신곡을 연주하거나 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공연 이 외 시간에는 쇼핑 등을 즐기기도 했는데 음식이나 서비스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고. 참고로 반농담으로 일본에서 후쿠오카가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스펠링에 FUK이 들어가서 재미있다고 한다. #
동생으로 자주 착각당한다고 한다. #
9.1. 성대모사왕
영어 사투리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라디오나 방송에서 개인기처럼 시전하고는 하는데, 그 장면만 모아놓은 비디오를 보면 스코틀랜드 사투리, 아일랜드 사투리, 요크셔 사투리, 남부 런던 사투리, 리버풀(스카우즈), 에스추어리, 호주 영어, 미국 영어, 프랑스식 영어까지 골고루 들어 있다.
9.2. 사생활
어릴 때부터 여자친구가 끊긴 적이 없다고 한다. 오아시스 데뷔 이전부터 평범한 직장인인 루이즈 존스라는 여인과 1988년부터 동거를 해 왔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헤어지고 재결합을 반복하는 등 대단히 격정적이었다고. Live Forever를 듣고 쓰레기라고 까거나 그녀가 한 말에서 영감을 받아 쓴 Married with Children의 가사를 보면 상당히 까칠한걸로 보인다. 1994년 노엘이 오아시스로 데뷔를 하고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노엘은 그녀를 소울메이트라 표현했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진으로는 잘 티나지 않지만 심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다신 사랑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1집 레코딩 시기 내내 그리워했을 정도다.이후 MTV의 캐스터 레베카 드 루보와 잠시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룸메이트인 멕 메튜스가 더 마음에 들어 오래가지 못하고 멕과 사귀게 된다. 멕은 언론계열 종사자였지만 재벌과 연예계 인사들과 친밀한 파티광이었는데 마침 한창 약과 파티에 빠져 있던 노엘도 동참한다. 멕은 케이트 모스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당시 케이트 모스와 사귀던 조니 뎁도 가세해 신나게 놀러다녔다고 한다. 이후 둘은 1997년 6월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고 2000년 딸 아나이스를 낳게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노엘은 약을 끊고 이전과 같은 생활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파티광이었던 멕은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했고 런던의 파티를 그리워했는데, 점점 두 사람 사이의 골이 깊어지며 리암이 당시 부인이었던 팻시 켄짓과 결별을 선언한 지 두 달만인 2000년 9월에 그들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별거기간 도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투어 도중 이탈하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스페인의 이비사 섬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 있던 클럽 '스페이스'에서 홍보 매니저로 일하던 사라 맥도날드를 만나게 된다. 본인 왈, 바람은 빨리 이혼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전까지는 아내에게 불성실했던 적이 없다고 한다. 이후 2001년 1월 정식으로 이혼하고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물어주게 된다.
2002년 경 사라와도 잠시 헤어지지만 곧 재결합하고 2007년 9월 아들 도노반 로이 맥도날드 갤러거, 2010년 10월 아들 소니 갤러거를 낳고 2011년 정식으로 결혼하며 잘 살았다. Dig Out Your Soul의 Waiting For The Rapture은 그녀와의 만남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고, 솔로 1집의 If I Had A Gun은 그녀에게 바치는 곡이다. 인터뷰나 공연에서 그녀를 '러블리 와이프' '러블리 사라'라고 칭하고 생일 축하를 할 때도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라 부르는 등 사랑꾼의 면모를 과시했다.
딸인 아나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모델로 활동 중이고 간간히 TV 리포터로도 활동 중이다. 사진 작가로도 활동하였다. 노엘의 투어에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사라를 포함한 노엘의 가족과도 잘 지내고 있다. 손목에 도노반과 소니의 이름타투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마트에 갔다가 그를 보고 놀란 팬이 "노엘 갤러거, 전설!!"이라고 말하자 "있잖아요... 엄밀히 따져서 전설이 되려면 그 전에 죽어야 하죠." 라고 대답해 아버지에게 비싼 학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리암이 시비를 걸었을 정도로 예전에는 노엘의 친딸이 아니라는 루머가 있었지만 자라면서 금발 노엘이라고 불릴 정도로 노엘과 빼닮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생모인 멕 메튜스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인 도노반은 아버지의 절친인 러셀 브랜드를 면전에서 까고 갖고 싶은 선물을 묻자 "날 놀래켜 봐(Surprise me)"라고 대답할 정도로 비범하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잘 물려받았는지 뻐큐를 날리는 사진이 상당히 많다.
막내 아들 소니는 엄마를 쏙 빼닮은 천사같은 얼굴과 달리 형 못지 않은 파괴력의 소유자로 추정되며, 이비사에서 헤나를 했다가 아빠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
2023년 1월 14일, 노엘과 사라가 이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 썬, 데일리메일, NME 등에서 기사가 나왔다. 이혼했지만 자녀들은 함께 돌볼 것이라고 한다.
노엘의 가족은 Team NG라 부르며 리암의 자식들과는 달리 눈썹이 크게 짙은 편은 아니다.
9.3. 노엘의 실제 키는?
프로필상 키는 173~4cm이다. 본인의 2000년 1월 더 가디언과의 잡지 인터뷰로는 5피트 8과 1/2인치 약 174cm라고 한다.[82] # 실제로는 젊은 시절 약 174cm, 50대가 넘은 현재는 살짝 줄어서 172~3cm 전후로 추정된다.170cm인 제이크 버그와 비교했을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프로필상 같은 키인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비교해도 노엘이 조금 더 크다. 다만 축구선수들은 스터드가 있는 축구화를 신고 측정한 키를 등록하기에 이는 감안해야 할 사항이다.
사발레타의 프로필 키는 174cm지만 축구 선수들은 공식 프로필을 잴 때 스터드를 포함해서 잰다. 즉 2~3cm 늘어난 키를 공식 프로필에 올린다.
노엘은 자신의 키와 몸무게와 신발 사이즈를 간간히 밝혀 왔는데, 자신을 늘 5피트 7~8인치 정도로 소개한다. 노엘을 만나는 인터뷰어들이 노엘을 보면 생각보다 작은 키에 항상 놀라곤 하는 걸 보면[83]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는 것보단 실제로 더 작게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다.[84] 몸무게는 90년대 당시에는 60kg 정도라고 말했다.[85] 발 사이즈는 서양 기준 240mm~245mm 정도라고. 본인 말로는 발이 유독 작다고 한다. 종종 라디오에서 아무한테나 여자 발이라고 놀리는데 자기 발에 대한 자조적인 느낌도 있다.
10. 디스코그래피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border-radius:5px;" {{{#!wiki style="margin: 0 -5px -0px; {{{#ffffff,#fff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5px 0px -10px"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 | |||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2011. 10. 17. |
Chasing Yesterday 2015. 02. 25. |
Who Built The Moon? 2017. 11. 24. |
Council Skies 2023. 06. 02. |
}}}}}}}}}}}} }}}}}} |
11. 콜라보레이션
11.1. 음악
11.1.1. OST
노엘은 OST에도 종종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THE X-FILES의 OST로 사용하기 위해 작곡한 'Teotihuacan'이다. 이 곡은 노래가 없는 연주곡인데, 전자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노엘은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고[86]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맥을 집에 들여놓고 사용한다. 실제로 이 곡 역시 컴퓨터 작업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직접 악기를 연주한 다음에 스튜디오에서 여러 효과를 줘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11.2. 패션
밴드활동 때부터 아디다스 저지, 후드를 자주 착용했다. 잘 안알려진 사실인데, 2011년에 아디다스에서 노엘 갤러거 한정 스니커즈를 발매한 적이 있다. 지금도 미개봉 신품을 구입할 수 있다. 아디다스와 노엘의 관계는 가까웠다. 노엘이 어쿠스틱 공연에서 사용하는 기타 중에 픽가드에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이 있고, 노엘 본인도 아디다스 스니커즈를 꾸준히 수집해왔다. 2010년에는 이안 브라운과 함께 아디다스 광고에 출연했다.
12. 관련 문서
[1]
갤러거는 Ó Gallachóir(오 골리허)라는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비롯된 성이다. 즉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2]
아일랜드는 모계나 부계 어느 쪽이라도 아일랜드 출신이 있으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노엘 갤러거는 인터뷰에서 아일랜드 시민권이 있다고 밝힌 바 있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1순위로 '맨체스터 사람'이며 2순위로는 '영국인(British)'이고 3순위가 '아일랜드인'이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시티와 함께 셀틱을 지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리암의 경우, 아일랜드계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지만 노엘 갤러거는 아일랜드인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 어린 시절엔 게일릭 풋볼 선수였기도 했다.
[3]
페기 갤러거와 갤러거 형제들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하던 가정폭력범으로 1976년부터 별거했으며 1982년 노엘이 15살일 때 어머니 페기 갤러거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4]
멕 매튜스 소생
[A]
사라 맥도널드 소생
[A]
[7]
보통 5피트 8과 1/2인치로 알려져 있으며, cm로 환산시 약 174cm이다. 하지만 신발을 신고 잰 키이고, 나이가 중년으로 접어 들어 키가 줄었으므로 실질적인 키는 172~173cm로 여겨지며, 본인 또한 그렇게 말한다.
[8]
# 한화 약 930억 원.
[9]
1967년생 뮤지션이 1994년에 데뷔했으니 20대 후반에 성공했고, 자연스럽게 20대 초반까지는 여느 노동 계급 젊은이들과 다름없는 삶을 보내며 틈틈이 작곡을 했다.
[10]
폴과 노엘이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으면 깨우겠다고 침대를 엎어 버리고, 울면 운다고 때리고, 말을 더듬으면 고쳐야겠다고 때렸다고 한다. 막내인 리암만은 때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과 노엘이 집에 없을 때 리암도 종종 때렸다고 한다.
[11]
다만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악감정이 없다고 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보이는 그의 반응을 보자면 자신의 아버지를 현재까지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오아시스 초창기에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를 고용하여 오아시스 투어 현장에 데려왔을때 노엘이 보인 불안 증세와 그 이후로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 많은 상처를 입은 듯.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 대해 악감정이 없는 걸 뛰어넘어서 아버지로 인정을 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2000년도 Behind the Music 인터뷰에서 비슷한 요지의 발언을 했다. 또한, 노엘보다는 아니지만 못지않게 학대를 당했던 동생 리암도 1997년 MTV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앞으로도 용서할 마음 없다고 언급하였다.
1997년 12월 25일 MTV Uncut 인터뷰
[12]
비디아이의 실패 이후 리암은 노엘에게 빌다시피 오아시스 재결합을 요청하고 거절당했는데, 그 뒤로 리암은 노엘이 자신에게 빌었다는 식의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다.
[13]
특히
3집까지는 밴드 내의 모든 곡을 노엘이 작곡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오아시스의 전성기였던
1집,
2집의 모든 곡을 작곡했다는 말이다.
[14]
웃기게도 노엘은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는 B-Side에 넣기는 아까운 곡이었다고 크게 후회하였다.
[15]
절대 너바나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Lock the box 인터뷰에서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런만큼, 난 씨발 그런게 싫었다고. 사람들이 헤로인에 취해와서, 씨발 자기는 자신이 싫고 죽고 싶다고 하는 거, 우리는 싫다고. 존나 쓰레기거든. 그렇다고 내가 그거에 반발해서 쓴건 아니고, 그냥 그게 내 생각이였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16]
이말에 리암은 조지 해리슨을 젖꼭지 같은 인간이라고 말하며 화냈다.
[17]
프로듀서 데이브 사디 (Dave Sardy). 오아시스 7집 Dig Out Your Soul의 프로듀싱 및 믹싱을 담당했다.
[18]
참고로,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매우 짙은 곡이다.
[19]
대표적인 예시로 노엘과 동년배인
커트 코베인은 오아시스가
Supersonic으로 데뷔하기 6일 전에 이미
자살로 세상을 등진 상태였다.
[20]
코카콜라에서 소송이 걸리자 노엘은 공연에서 어쿠스틱 라이브를 하며 "우리 모두 같이 펩시를 마셔요"라고 한다.
[21]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해리슨의 My Sweet Lord도 표절소송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
[22]
나중에
G-DRAGON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그 곡이다. 웃기게도 표절시비가 난 부분은 노엘 갤러거가 조지해리슨에게서 베껴온 바로 그 소절이다.
[23]
트래비스가 스코틀랜드 로컬 밴드였던 시절부터 노엘은 트래비스를 오아시스 투어 오프닝 밴드로 세웠다.
[24]
실제로 명백한 표절이나 인용으로 밝혀진 곡들인 Whatever나 Shakermaker는 크레딧에 원곡의 작곡가들 이름도 같이 올라가 있다. 사실 나머지 곡들도 따져보면 밑도 끝도 없지만 법적인 소송이 들어온 곡들은 극소수기 때문에, 일단 소송이 들어오는 곡들에 대해서는 크레딧을 올려주는 원만한 합의를 하는 편이다.
[25]
라스 울리히와는 티격태격하면서 친한 사이인 듯 하지만, 정확히는 라스가 오아시스의 광팬으로 치근덕거리는 형식이고 노엘은 츤데레처럼 반응하는 관계에 가깝다. 리암이나 나머지 멤버들은 라스 울리히나 메탈리카에 이렇다 저렇다 언급은 없는 편. 메탈리카 쪽에서도 라스와 커크만 오아시스를 좋아하는 거지
제임스 헷필드는 비틀즈 배끼기만 급급한 놈들이라고 오아시스 음악을 싫어한다. 데이브 그롤은 리암과 친한 편이며 오아시스 자체를 좋아하지만 노엘과 친분이 깊지는 않은 편으로 알려졌고, 마룬 5의 프론트맨인 애덤 르빗은 오아시스 광팬이고 멤버들도 좋아해서 오아시스 곡들을 커버하거나 리허설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근데 정작 노엘은 오아시스 당시 마룬 5와 같은 페스티벌에 출연했을 때 무대 위에서 관중들에게 '마룬 5 나올 때 다들 화장실 갖다오세요' 라며 그들을 조롱했고, 행사장에서 실제로 마룬 5 멤버들과 만났을 때도 노엘에게 '당신들의 음악을 듣고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라고 하자 노엘이 'Rock N Roll Star를 듣고 그딴 걸 한다고?' 라며 농담 삼아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마룬 5의 한 멤버가 '그만 하시죠. 이 친구는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라고 화내자 노엘이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뭘 그러나 허허' 하면서 당황해하고, 옆에서 듣던 겜이 '아 이 친구 진심은 아니에요' 라면서 수습하자 마룬 5 멤버들도 '원래 그러신 분인 거 알아요. 저희가 영광이죠.' 라면서 넘어갔다. 그러나 언론에는 이미 노엘이 마룬 5를 조롱한 걸로 나와서 노엘이 똥줄탔다는 얘기가 있었다.
[26]
음색 자체는 테너이며, 오히려 리암이 바리톤이다.
[27]
비틀즈가 썼을 정도면 차고 넘치는 브랜드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에피폰은 1969년 이후에 깁슨의 저가 라인에 포지셔닝되었지, 비틀즈가 애용하던 60년대 중반에는 오히려 고급 라인에 속했다.
[28]
이 기타는 오늘날에는 깁슨의 영광의 시절이라며 히스토릭이라는 이름으로 7~800만원을 호가하는 값에 복각품을 판매할 정도로 가치 있는 기타이다. 심지어 1960년 원년산은 억 소리가 나는 가격을 자랑한다.
[29]
00년대부터 리비에라는 스몰 험버커 픽업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8-90년대 일제 리비에라는 쉐라톤2 마냥 일반 험버커 픽업으로 생산되었다. 2022년 시그니처 모델도 이를 반영하여 일반 험버커 모델로 생산되었다.
[30]
노엘은 와인 레드 색을, 본헤드는 갈색 타바코 색을 샀는데 본헤드는 오아시스에서 탈퇴하고 자기 기타를 가져가지 않아서 아직도 노엘이 갖고있다고 한다(...).
[31]
맨체스터 시티의 전 홈구장
[32]
이는
조니 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니 마는 노엘 갤러거가 존경하는 아티스트이며 조니 마도
더 스미스 시절 체리 컬러 ES-355를 사용하였다.
스웨이드의
버나드 버틀러도 조니 마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로 체리 컬러 ES-355를 메인 기타로 사용하고 있다.
[33]
출시한지 3시간 만에 품절되었으며 현재 프리미엄가가 어마어마하게 붙어가고 있다.
[34]
하이플라잉버즈 활동 때는 오아시스 활동 때보다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 곡이 많아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하플버 활동 때는 두가지 색상 (빈티지 선버스트, 내추럴)을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35]
최근 리암의 정규 3집 발매 이후엔 리암의 인기가 살짝 더 높은 경향이 있다.
[36]
"I cannot wait to meet the South Korean guy with a saxophone in hand, lord knows what he'll be dressed in like, but he will be the preeminent saxophonist in all of Korea. Koreans, they are considered the Irish of Asia. They are mental. Have you been to Korea? The gigs are like playing in Dublin. It is insane. Insane." 21:36초부터 나온다
[37]
노엘 갤러거는 100%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며, 결혼하기 전까지는 죽으면 아일랜드에 묻히고싶어했을 정도로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편이다. 그러니까 집에 온 것 같다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
[38]
교복을 입고 공연장에 온 관객들도,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
[39]
당시 함께 활동하던 팀 스미스로 추정된다.
[40]
그리고 팬들은 국제우편 요금이 비싸다며 '아저씨가 우리보다 돈 많잖아', '착불로 보내면 되나요?'라는 반응(...)
[41]
아마 펜타포트 헤드라이너로 참석할 듯 했으나.
[42]
그럴만도 한게 올해로 만57세이고 동생과 달리 몇십년 동안 목소리의 변화없이 큰성량으로 고음을 내는건 쉽지않기 때문이다.
[43]
여기에서 "축구"는
[44]
The Chief라는 그의 별명과도 잘 어울린다. 이날의 엔딩 BGM도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울려퍼졌다.
[45]
그래서인지 여담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유명 축구인들 중에서는 대부분
노동당 지지자가 많다. 스포츠계가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계급투표 경향이 짙은 영국, 특히 축구계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서민, 노동자들이 즐기는 서민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며, 축구선수들도 노동 계급 출신인 경우가 많기 때문. 대다수 노동 계급의 젊은이들이 어릴 때부터 축구를 즐긴다. 물론, 스스로를
토리라고 밝힌
프랭크 램퍼드와 같은 예외도 드물게나마 있긴 하다.
[46]
다만 굳이 영국만 이런 게 아니라 유럽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이렇다. 축구 구단 창단 역사를 보면 노동자들이 쉬는 날에 모여 축구하며 만들어진 팀이 그 시작이 많다. 아니면 교회에서 운영하거나 군인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던 팀이 축구팀 첫 시작이다. 다만 영국이 축구의 원조격이고 역사가 매우 길기에 확실히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친생활적이고 로컬느낌이 강한것도 사실이다.
[47]
단 1967년 노엘이 태어났을 때는 우승컵을 쓸어 담던 맨시티의 전성기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맨체스터 내에서 두 팀의 팬덤 크기는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굳이 이럴 이유는 없다. 2010년대 이후의 전성기가 너무 강렬해서 간과하기 쉽지만 1960년대에는 리그 우승 및 국내컵과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등을 들어올리던 맨시티의 첫 전성기 시절이었다.
[48]
그냥 외국에서는 거주지나 출생지에 맞춰서 지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게 아마 들어맞을 것이다. 그레이터맨체스터주 내의 지역별 여론을 보면 맨유 팬덤은 북서쪽, 맨시티 팬덤은 남동쪽에 거의 반반에 가깝게 분포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노엘은 남동쪽인 Longsight에서 태어나 Burnage에서 자랐으므로 자연스레 맨시티 팬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도 강남이나 서초에서는
FC 서울보다는
성남이 훨씬 가까워서 그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49]
이는 오아시스가 패션에 있어서는
캐주얼족으로 분류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50]
사실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10대 후반~20대 초반 영국의 노동계급 젊은이들중에 의외로 많은 숫자가 훌리건에 가담해 있다. 골수 훌리건 조직인 펌(firm)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노동계급 젊은이들이다. 아니, 훌리건 이전에 영국의 축구문화 자체가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51]
지금은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부임 후 세대교체를 진행하며 조금은 나아졌지만, 한때 잉글랜드 국대는 선수들조차도 클럽별로 파벌이 나뉘어 화합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밥도 클럽별로 따로 먹었다고 할 정도. 선수들도 이러니 팬들도 마찬가지라서 모 다큐에서는 한 맨유팬이 "잉글국대의 2번의 월드컵 우승보다 맨유의 1번의 리그 우승이 더 중요하다." 라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팬들이 이렇게 무관심하거나 크게 열정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니 주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유럽 전체에 해당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물론
월드컵이나
UEFA 유로를 제외하면 웬만한
A매치에 대한 관심도가 클럽 축구 경기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큰 국제 메이저 대회가 되면 국가간의 자존심을 건 국가대표팀 경기에 당연히 모든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예외도 없진 않은데, 지역 색깔이 강한 지역의 축구팀의 팬이라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국제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이상 국가대표팀에 대한 관심은 미지근한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아틀레틱 빌바오인데,
스페인 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에도 이 지역 여론은
마드리드에 비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FC 바르셀로나 팬들의 경우는 다소 미묘했는데, 꾸준히 독립 여론이 있을 정도로 지역색이 강한
카탈루냐 지역을 대표하는 클럽이긴 하지만 당시 국대의 주축이 바르사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시티 FC 역시 같은 지역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있긴 하지만 해당 지역 내에서의 지지도는 아무래도 맨시티가 더 높고, 지역을 대표하는 클럽이라는 의식도 맨유 팬들에 비해 더욱 강한 경향이 있는데, 노엘 갤러거도 아마 이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맨유 팬 중에서도 국가대표팀보다 클럽팀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경우도 없진 않을 테지만,
웨인 루니,
리오 퍼디난드,
게리 네빌 등의 맨유 소속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한 만큼 국가대표팀에 대한 주목도도 그리 미지근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52]
만수르 인수 후 강팀으로 떠오른 뒤에도 국대 주전급 선수는 몇 없었다. 2010년대 중반까지
조 하트 외에는 없다시피 했을 정도. 현재는
카일 워커,
존 스톤스,
필 포든 등이 국대에서도 주력 선수로 뛰고 있긴 하다.
[53]
반대로 팀에서 팀 멤버와 인터뷰를 시키기도 한다. 발로텔리와 펩 등에게 그랬다.
[54]
hate는 사실 그냥 싫어한다는 의미보다는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는 의미가 더 크니, 속된 말로 존X 극혐이라고 말했다고 봐도 된다.
[55]
진짜로 I fxcking hate Liverpool이라고 했다.
#
[56]
“I wasn’t expecting this to be so easy.”
[57]
한국 축구 월간지인 베스트 일레븐에서 2014 월드컵을 앞두고 편집장 컬럼에서 "우리도 축구에 진정으로 미친 유명인을 보고 싶다."라는 글이 나올때 거론되던 해외 유명인 중 하나가 노엘 갤러거였다. 이름없던 가수 시절, 팀이 2부리그로 강등당하고 있던 시절에도 맨체스터 시티 경기를 보러 자주 가고,이젠 맨시티가 엄청난 돈다발 구단주를 만나서 리그 우승도 하고 리그 강호가 되자 감격한다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흔하게 보이고 공식자리에서 맨시티 팬을 자랑하고 오랜 팬 경력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부럽다라고 쓰던 적도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월드컵 다가오면 연예인이니 뭐니
갑툭튀하여 자기를 홍보하는데 축구와 월드컵을 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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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노엘이 응원하는
맨시티와 루니의 소속 구단인
맨유는,
맨체스터 더비라는 격렬한
더비 매치를 가질 만큼 서로가 경쟁의식이 큰
라이벌 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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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니의 잉글랜드 국가대표 역대 최다골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루니가
게리 리네커에게 기타를 자랑했다. 그것 말고도
폴 매카트니가 사인해준 기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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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박지성이 맨유시절에 영국에서 인터뷰를 할 때 '오아시스 vs 비틀즈'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오아시스를 몰랐던 박지성은 '오아시스가 누구죠?'라고 질문했고 인터뷰어가 '맨체스터를 기반으로 둔 밴드입니다'라고 하자 '그럼 오아시스로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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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의
독설가 목록에도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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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리암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인디밴드였던 오아시스의 해체 이후 현재 리암은 대기업인 워너 뮤직에 매니지먼트 적을 두어 케어를 받고 있고, 노엘은 자신의 레이블인 사워 매시를 설립해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리암으로선 비디 아이 해체 이후 자금력도 기반도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리암의 솔로 커리어가 성공적이었다는 데는 워너의 전문 작곡가들 및 각종 음악적 지원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회사에서 돈을 그만큼 대주고 수익을 공유하는 만큼 오아시스 시절과 다르게 음악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줄었기에 리암도 음악적인 고민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노엘은 대형 밴드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엮인 여러가지 상황을 신경써야 하는 오아시스 때보다 더 자유롭게 원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 노엘은 자본력이 있기에 실험적인 리스크도 스스로 감내할 수 있었다는 상황적인 양면성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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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오아시스 시절부터의 고질병으로 고정 팬덤이 확고할 경우 나타나는 현상인데, 해체 후에도 노엘과 리암의 앨범 발매 시마다 보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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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이비자 나이트 클럽 가서 한 여자와 바람을 폈다가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는데 그게 2번째 부인인 사라다. 노엘 말로는 바람은 그냥 빨리 이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밝힐 만큼 멕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서 이미 별거 중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미 서로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혼만 바라보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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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시기에 브릿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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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겐 유명한 '아마존 가면 나무들 다 불질러야겠다'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멕스 카드를 카메라에 들이대며 약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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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 수익이 될 만한 싱글로 발매된 곡은 리암의 'Songbird'와 'I'm Outta Time' 단 두 곡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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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D'You Know What I Mean?은 힙합 그룹
N.W.A 의
Straight Outta Compton 이라는 곡의 드럼 루프를 기초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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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셔 티는
홍차 중에서 가장 서민 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로 적은 양으로도 향이 진하게 우러나, 주로 스트레이트보단
밀크티로 많이 만들어 마시는 홍차라고. 그러나 노엘이 마시는 요크셔 레드를 국내에서 구하려면 힘들다. 만약 마셔보고 싶다면 직구를 해서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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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겠지만 티백을 꾹 짜는 행위는 차 맛을 아주 해치는 행위다.
탄닌 성분이 우러나와 떫어진다. 본문의 경우엔 설탕과 우유를 넣으므로 진하게 맛을 내려면 큰 문제는 안될 수 있지만, 대중적이고 많이 마시는 브랜드인 트와이닝의 홍차조차 티백을 꾹 눌러짜내면 떫은 맛이 나기 쉽고 심지어는 티백의 종이 맛이 나기 때문에 향에 민감한 사람들은 티백 짜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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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ty Street Toffees라는 캐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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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과 흑인을 white과 black으로 지칭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이다. urban dictionary에 등재된 표현과 그것의 인종차별적임은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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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모리세이를 통해 연을 맺은 적이 있으며
의외로 둘 사이 교류가 간간이 있었다고.
2014년 브릿 어워즈에서 케이트 모스와 함께 데이빗 보위에게 돌아간 최고 남성 솔로 가수상을 대리수상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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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NME어워드 트로피는 다 저렇게 생겼다.
NME매거진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어워드 내내 술 퍼먹다가 헤롱헤롱 하면서 수상소감 하는 뮤지션들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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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을 라이브로 볼 가치가 있느냐, 단순히 무대에서 CD를 재생하는(CD-playing) 것 뿐이라는 발언을 했다. 2011년에는
EDM은 그 어떤 사람 fuck도 만들 수 있다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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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1996년에 노엘 갤러거는
케미컬 브라더스의 Setting Sun이라는 곡에 피쳐링한 적이 있다. 커다란 오해가 있는데 케미컬 브라더스는 90년대 후반 UK 테크노 특히 빅비트 붐을 이끌었던 빅비트의 대표적인 일렉트로닉 듀오이며 동시에 EDM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EDM은 2010년대에 등장한 페스티벌 중심의 전자음악으로서 일렉트로닉 음악의 하나의 스타일일뿐이지 전자음악=EDM은 완전히 잘못된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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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리암은 이에 대해 "투표를 하지 않고 매사에 의견이 있는 놈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Nothing worse than the cunt who doesn't vote then has an opinion on everything)"는 트윗을 올리며 노엘의 태도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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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온건 성향으로는 비 지스의 맏형이자 유일한 생존자
배리 깁이 있다. 따라서
로저 워터스같은 급진 진보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제레미 코빈은 아예 공산주의라며 망할 당나귀거리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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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블레어는 21세기 들어
신자유주의 영국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고, 명목적으로 유럽 내 최대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당 내에서도 친시장적인 인물이다. 블레어계(Blairite)는 노동당 내에서도 우파에 속하기에 '중도좌파' 라는 기준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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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엘은 나중에 백신을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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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토니 블레어에게 국민들 의견도 안 물어보고 이라크 전쟁에 파병한 치들이라는 악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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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밴드가 예수보다 크다고 했지. 근데 내가 말한건 키가 크다고 말한거야. 예수는 5피트 7인치(약 170cm)라고 알고 있거든. 나는 5피트 8과 1/2인치(174cm)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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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키가 작지만 그가 이룬 걸 생각하면 그깟 키가 대수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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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아도 확실히 동생인 리암보다 체구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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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 키에 맞는 몸무게 혹은 살짝 마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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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팟에 음악을 넣는 것도
겜 아처가 대신 해줘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