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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rowcolor=#ffe>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윈스턴 처칠 |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 다이애나 스펜서 | 찰스 다윈 | 윌리엄 셰익스피어 | |
<rowcolor=#ffe>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이작 뉴턴 | 엘리자베스 1세 | 존 레논 | 호레이쇼 넬슨 | 올리버 크롬웰 | |
11위~100위 | |||||
<rowcolor=#ffe>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어니스트 섀클턴 | 제임스 쿡 | 로버트 베이든 파월 | 알프레드 대왕 | 아서 웰즐리 | |
<rowcolor=#ffe>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거릿 대처 | 마이클 크로포드 | 빅토리아 여왕 | 폴 매카트니 | 알렉산더 플레밍 | |
<rowcolor=#ffe>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앨런 튜링 | 마이클 패러데이 | 오와인 글린두르 | 엘리자베스 2세 | 스티븐 호킹 | |
<rowcolor=#ffe>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윌리엄 틴들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윌리엄 윌버포스 | 데이비드 보위 | 가이 포크스 | |
<rowcolor=#ffe>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레오나르드 체셔 | 에릭 모어캠브 | 데이비드 베컴 | 토머스 페인 | 부디카 | |
<rowcolor=#ffe>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 토머스 모어 | 윌리엄 블레이크 | 존 해리슨 | 헨리 8세 | |
<rowcolor=#ffe>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찰스 디킨스 | 프랭크 휘틀 | 존 필 | 존 로지 베어드 | 어나이린 베번 | |
<rowcolor=#ffe>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보이 조지 | 더글러스 베이더 | 윌리엄 월레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 존 웨슬리 | |
<rowcolor=#ffe>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아서 왕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로버트 스콧 | 이넉 파월 | |
<rowcolor=#ffe>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클리프 리처드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프레디 머큐리 | 줄리 앤드류스 | 에드워드 엘가 | |
<rowcolor=#ffe>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해리슨 | 데이비드 애튼버러 | 제임스 코널리 | 조지 스티븐슨 | |
<rowcolor=#ffe>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찰리 채플린 | 토니 블레어 | 윌리엄 캑스턴 | 바비 무어 | 제인 오스틴 | |
<rowcolor=#ffe>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윌리엄 부스 | 헨리 5세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 로버트 1세 |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 |
<rowcolor=#ffe>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무명용사 | 로비 윌리엄스 | 에드워드 제너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찰스 배비지 | |
<rowcolor=#ffe>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3세 | J. K. 롤링 | 제임스 와트 | 리처드 브랜슨 | |
<rowcolor=#ffe>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보노 ( 아일랜드인) | 존 라이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도날드 캠벨 | 헨리 2세 | |
<rowcolor=#ffe>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J. R. R. 톨킨 | 월터 롤리 | 에드워드 1세 | 반스 월리스 | |
<rowcolor=#ffe>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리처드 버튼 | 토니 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팀 버너스리 | 마리 스톱스 | |
출처 | |||||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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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9년 8월 24일 |
잉글랜드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 주 킹스턴어폰헐 | |
사망 | 1833년 7월 29일 (향년 73세) |
잉글랜드 런던 벨그라비아 | |
직업 | 정치인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모교 |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
배우자 | 바버라 앤 스푸너 (1797년 결혼) |
자녀 | 6명 |
종교 | 개신교( 성공회)[1] |
서명 | |
축일 | 7월 30일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정치인.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2. 생애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1690~1776)는 발트 교역에서 부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로버트 윌버포스(1728~1768)이다.윌버포스는 만 18세인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 공부보단 카드놀이, 술자리 등 사교 모임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었고,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소(小) 윌리엄 피트와도 친구가 된다. 다만 피트와 달리 윌버포스는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당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지지했다. 여하튼 그의 쾌락주의적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졸업에는 성공해, 만 22세인 1781년에 문학 학사 학위를, 만 29세인 1788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배우자는 바바라 앤 스푸너(1777~1847)로, 1797년 친구 토마스 배빙턴의 소개로 처음 만난 이후 바로 눈이 맞아 프로포즈하고 친구들도 놀랄 정도로 1달여만에 초고속 결혼했다. 그녀는 1800년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극복한 이후 1847년까지 나름 장수했다. 둘은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공회 교회사에서는 성공회 신자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2] 존 벤 신부(Rev. John Venn)와 더불어 18세기 성공회의 3대 복음주의자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유럽여행을 하며 1785년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는데[3], 이는 그의 생활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고 그가 노예제 반대 등 사회 운동에 힘쓰는데도 영향을 주었다. 허나 일각에선 그래서인지 윌리엄 윌버포스의 정치, 사회 활동은 진보적 시각에서 보면 후술되어있듯 몇몇 사안에선 보수적이거나 일부는 수구적이라고 보일법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는 당대 보수주의자들에겐 오히려 급진파, 국가 전복 세력이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등 묘한 포지션이었고, 이게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18세기 영국은 경제의 주된 원동력이었던 노예제 폐지 문제로 국회가 매일 대립각을 세우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윌버포스는 1784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다행인 것은 친구이자 후원자인 윌리엄 피트 총리가 반대파의 공격을 방어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피트는 그들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에게 자신의 정부에서 장관직으로 일해달라고 제안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윌버포스가 무소속 의원으로 남아 정치색이 끼지 않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기 바랐기 때문 혹은 윌버포스의 잦은 지각이나 좋지 않은 시력 문제 등으로 인해 친구지만 장관직을 수행할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 등의 추측이 있다. 어찌됐든 피트는 1806년 사망한다.
윌버포스는 정치가로서 여러 사회 개혁에 참여했다. 노예 문제 외에도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제한하는 캠페인을 지지하거나 교도소 내부 문제 개혁에 참여했으며, 결투 역시 기독교 사회의 불명예라고 표현하며 반대했다. 또 빈곤 문제에도 신경을 써 빈자들을 위한 교육과 선교를 지원하기도 했다. 다만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을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법에 찬성해 위선자라고 욕을 먹기도 한다.
1806년 선거를 통해 노예 무역 폐지 찬성파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한 결과, 십수년간 부결되어 온 영국에서의 노예 무역 금지 법안이 1807년 찬성 283표, 반대 16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통과된다.[4] 이후 1814년에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하여 여러 운동을 조직, 법안을 만들었고 생을 마감하기 3일 전인 1833년 7월 26일, 노예제도 폐지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목격하고 29일 눈을 감았다.
사족으로 윌버포스가 주장한 노예제 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윌버포스 개인으로는 신앙 윤리적인 요소가 주된 이유였지만, 당시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큰 이유로는 현실적인 국익 문제도 걸려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금지법안에 대해 "필요에 따라선 영국이 다른 국가의 선박도 수색해서라도 노예 무역을 근절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다른 국가의 선박을 통해서 노예를 영국으로 데려오는 것에 대해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실천이었다. 그런데 이를 적용할 경우 노예 무역의 단속을 한다는 빌미로 영국 해군이 마음대로 타국 선박들을 수색, 억류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막대한 상황에서[5] 자국의 법을 억지로 타국 상선에까지 적용하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노예무역금지법을 통과시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 이익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영국은 최강의 해군을 갖춘 나라였지만, 타국의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할 정도는 아니었고,[6] 군함으로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하면 영향력이 확대되는 게 아니라 전쟁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조치였지만 법안이 통과된 때는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시행 중이던 나폴레옹 전쟁 시대였던 데에다 덤으로 미국과도 전쟁 중이던 시기였으므로, 영국은 국력뿐 아니라 명분과 실리까지 쥐고 수만 명의 노예를 바다 위에서 해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종의 반론도 있는게,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후에도 이러한 노예무역 폐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 회의에서 노예무역 폐지조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노예무역 폐지를 빌미로 타국 선박을 수색한 사례도 극히 적었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법안에 대해 미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타산적인 부분이 개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7] 산업혁명의 초입으로 흘러가는 시대의 경제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윌버포스가 정치인이었던 것만큼 그에게 동조했던 정치인들은 당시 영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 정치사에선 이 시기 인권문제에 눈을 뜬 복음주의 종교계의 운동이 정치권에 의사를 반영하는, 그러니까 "압력단체(pressure group)"로서의 정치운동이 기능했던 것에 주목하는 편이다. 요컨대 한 사람의 윌버포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배후에 노예제도의 반인륜적 야만성에 눈을 뜬 시민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윌버포스에게 정치적인 힘을 실어 시민의식을 관철한 사례로 보고 있다. 결국 윌버포스는 그들을 대표한 인물 중 하나였던 셈.
1813년 해나 모어(Hannah More)와 함께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의 글로스터셔의 마을 윈터본(Winterbourne)에 세인트 마이클스 초등학교(St Michael's Primary School)를 설립했다. 나중에 J. K. 롤링이 잠깐 거기에 다녔으며, 전 교장인 알프레드 "알피" 세실 던(Alfred "Alfie" Cecil Dunn)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알버스 덤블도어의 모티브 중 하나가 되었다. 링크. 이미지, 이미지 2. 또한 교장 중 하나인 오드리 쿡(Audrey Cooke)은 미네르바 맥고나걸의 모티브가 되었다. 기사
3. 한계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에 앞장서고 동물학대방지협회도 지지하는 등 도덕 정치를 지향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8] 종종 그렇듯 몇몇 정치, 사회 제도에 대해선 꽤나 보수주의적 시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예제 반대 캠페인을 하면서도 정작 다른 내부적인 사회 문제들은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헤이릭같은 여성 노예 해방 운동가들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 성경 드립까지 치며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가톨릭 해방을 위한 법안에도 강력히 반대하다 1813년 가서야 찬성으로 선회하기도 한다.또 신분제도 어느정도 긍정해 그의 생애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불평등한 인간의 신분제에 대한 도전과 인권에 대한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런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토머스 페인이 저술한 '인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9] 이는 당시 영국의 시민 사회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인지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은 그를 '교육받지 못한 비문명인들에겐 기독교 드립을 치며 자비로우면서 정작 문명국 내의 학대에는 관대하다'는 식으로 돌려 까기도 했다.
4. 기타
- 그의 자식 중 셋째였던 새뮤얼 윌버포스는 훗날 영국 성공회 주교로 활동하는데, 과학사에 길이 남을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그 원숭이는 당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중 어느 쪽 조상입니까?"라고 말했다가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에게 "나는 진리를 왜곡하려 드는 당신같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의 자손이 되겠습니다."라고 반격을 당한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 다만 새뮤얼 윌버포스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새뮤얼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에 민감했고, 진화론이 인종차별에 악용될 것이라고 생각해 반감을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10] 허나 그건 악용하는 사람들의 문제지 진화론의 문제는 아닌지라[11] 걍 어거지 쉴드라는 의견도 있다.
5. 매체
- 어메이징 그레이스: 주연으로 나온다. 귀족으로 나름 편히 살 수 있던 그가 발벗고 나서서 노예제를 폐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현실을 상당히 잘 재현한 영화이며, 윌버포스와 클래펌 파의 정치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적인 정치운동인 설탕 불매운동과 포스터 및 배지 제작, 서명운동 등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 일을 진행하면서 윌버포스가 어떻게 몸이 망가져 가는지도[12] 가감없이 보여준다.
6. 어록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후로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789년 노예 소유주들을 겨냥하여 한 말로 노예선의 잔혹함과 공포를 생생히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1789년 노예 소유주들을 겨냥하여 한 말로 노예선의 잔혹함과 공포를 생생히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1]
"
William Wilberforce",
BBC
[2]
Sunday School Movement를 주도한 사람으로, 기독교 교육 계통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취급한다.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이 넘쳐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교리교육과 문법교육을 비롯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로버트 레이크스이다.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운영하는 "주일학교"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3]
윌버포스는 어렸을 때도 친척의 영향으로 비순응주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 등으로 멀어지는데 이 시기에 다시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4]
참고로 미국에선 비슷한 시기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노예 무역을 금지시켰다.
[5]
당시 영국은 전세계 노예무역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다.
[6]
애초에 자국의 상선이 공해상에서 타국 군함에게 타국의 법으로 강제수색을 당하는데 가만히 참을 나라는 없다. 만약 국제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3류 국가 이하에다 반쯤은 식민지 수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식민지나 노예무역은커녕 일반적인 국제무역조차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7]
이 시기 미국에서 남부는 노예제를 남북전쟁 후까지 실질적으로 유지한 반면에 북부에서는 진작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북부 사람들이 더 선하고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니라, 공업이 발달한 북부 특성상 한 곳에서 오래 일하며 숙식까지 제공해 주어야 하는 흑인노예보다는 임금이 저렴한 일반 노동자나 이민자를 쓰는 게 더 효율적이어서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북부가 더 리버럴한 기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 결국 한쪽만 강조하기보단 여러 부분이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
[8]
윌버포스는 기독교의 공적, 사적 영역 활성화와 개인의 신앙 준수가 경건한 도덕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성리학적 도덕 정치를 지향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오늘날 와선 일부는 수구적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여지도 있겠다.
[9]
페인은 인권을 저술한 후 영국정부에서 박해를 받다
망명 생활을 하게 되는데, 당시 영국 총리가 윌버포스의 친구 피트였던 영향도 있을듯하다.
[10]
실제 진화론이 이후 제국주의나 우생학적 사고에 일부 악용되기도 한다. 다만
찰스 다윈은 인종차별에 부정적이었다.
[11]
당장 창조론자나 비진화론자 중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어
용불용설에 나오듯이 진화론의 시초쯤 되는
라마르크가 죽을 때 조사로 비웃던 조르주 쿠비에(Georges Cuvier,1769~1832)만 해도 종의 정착이라면서 창조 후 종은 그 모습 그대로라고 진화론과 반대였음에도 흑인과 아시아인은 원숭이라고
인종차별을 주장했고 신이 원래부터 차별하여 백인과 차별을 두었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참고로 쿠비에는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와서
서커스 구경거리로 비참하게 살던 흑인 여인
사라 바트만이 죽자 해부하곤 원숭이에 가깝다고 주장하던 인물인데 같이 해부에 참여한 다른 이들이 백인과 차이가 없다고 반론할 때도 화를 낸 바 있다. 즉, 진화론만 악용된게 아닌 것이다.
[12]
고질적인 위장병과 불면증 치료를 위하여
아편을 처방받아 복용했는데, 이로 인한 중독증상이 영화에 상당히 사실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윌버포스가 이러한 중독증상을 통한 환상을 보는 것을 아예 영화의 진행으로 활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