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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7:50:35

피트 타운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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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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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05.23.
Who's Next
1971.08.14.
Quadrophenia
1973.10.26.
The Who By Numbers
1975.10.03.
Who Are You
1978.08.18.
Face Dances
1981.03.16.
It's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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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less Wire
2006.10.30.
WHO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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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23년 25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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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척 베리 지미 페이지 에디 밴 헤일런 제프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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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로제타 사프 나일 로저스 비비 킹 조니 미첼 듀언 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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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존슨 메이벨 카터 톰 모렐로 프레디 킹 스티비 레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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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로즈 앨버트 킹 커크 해밋 & 제임스 헷필드 제임스 버튼 존 프루시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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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빈센트 버디 가이 데이비드 길모어 에디 헤이즐 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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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 잭 화이트 브라이언 메이 제리 가르시아 에릭 클랩튼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엘리자베스 코튼 피트 타운젠드 앵거스 영 & 말콤 영 쳇 앳킨스 존 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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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디들리 버논 레이드 조니 그린우드 & 에드 오브라이언 조니 라몬 스티브 크루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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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자파 디 에지 커티스 메이필드 PJ 하비 엘모어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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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베를렌 존 리 후커 트레이 아나스타시오 보니 래잇 믹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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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마 서스턴 무어 & 리 라날도 알렉스 라이프슨 로버트 프립 스코티 무어
<rowcolor=#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존 메이어 피터 그린 리처드 톰슨 스티브 크루퍼 캐리 브라운스타인
66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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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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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5년 10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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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키스 리처즈 제프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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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 킹 척 베리 에디 밴 헤일런 듀언 올맨 피트 타운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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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회사 깁슨에서 2010년 발표한 "50 Greatest Guitarists of All Time"의 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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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키스 리처즈 에릭 클랩튼 척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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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벡 에디 밴 헤일런 쳇 앳킨스 로버트 존슨 피트 타운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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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타운젠드
Pete Townshend
파일:Pete-Townsend_02-3400x9999.jpg
<colbgcolor=#CC0033><colcolor=#fff> 본명 Peter Dennis Blandford Townshend
피터 데니스 블랜드포드 타운젠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45년 5월 19일 ([age(1945-05-19)]세)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미들섹스 치스윅[1]
직업 음악가, 작가, 싱어송라이터
소속 더 후 (1964 - )
딥 엔드 (1985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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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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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CC0033> 부모님 아버지: 클리프 타운젠드[2]
어머니: 베티 타운젠드
형제 폴 타운젠드 (1957 - )
사이먼 타운젠드 (1960 - )[3]
배우자 카렌 셀리아 타운젠드 (1968 - 2009, 이혼)
자녀 슬하 1남 2녀
장남 조셉 타운센드, 장녀 엠마 타운젠드,[4] 차녀 아민타 타운젠드
학력 액튼 카운티 문법학교 (졸업)
일링 미술대학교 (미학 / 중퇴)[5]
신체 183cm[6], 80kg
재산 약 $150,000,000[7]
종교 무종교 ( 불가지론)
소속 정당
(? - 1991)
불명 (1991 - )
활동 기간 1962년 - 현재
사용 악기 보컬, 기타, 키보드
장르 팝 록, 록 오페라, 아트 록, 뉴 웨이브
레이블 애틀랜틱, 폴리도르, 워너 브라더스, 데카, 리코디스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thewho.pn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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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데뷔 전2.3. 더 후2.4. 솔로 커리어
3. 음악적 특징
3.1. 기타 연주3.2. 음악가들의 평가3.3. 퍼포먼스
4. 사건사고5.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피트 타운젠드 01.jpg
파일:피트 타운젠드 02.jpg
<rowcolor=#fff,#fff> 전성기 시절 사진 (1960 - 1970년대)

영국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더 후의 리더이자 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특히나 가장 존경받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인데, 동 시대 활약했던 키스 리처즈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듬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파워 코드의 대부분을 만들어 하드록과 헤비 메탈 장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 후대의 하드 록, 헤비 메탈 밴드들은 물론이고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해 동시대에 활동했던 쟁쟁한 여러 기타리스트들과 밴드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은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하지만, 그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과격하고 역동적인 무대 퍼포먼스 측면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나이가 70대 중후반에 든 후에도 활발히 라이브 콘서트에 참여하는 노익장이기도 하다. 우드스탁 페스티벌부터 라이브 8까지 유명한 록 페스티벌에는 모두 참가한 록 음악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피트 타운젠드는 영국 서런던의 치스윅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음악가 집안이였는데, 아버지는 재즈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던 관계로 다소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아버지는 연주를 위해 자주 집을 나갔는데, 이때 어머니가 자주 바람을 피웠다고 하며, 이 때문에 피트가 어렸던 시절 부모님은 별거에 들어갔고 그는 할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재결합하였고 유대인 폴란드인 가족들과 함께 집을 공유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타운젠드는 어릴때 친구가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모험소설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또한 맨 섬이나 해변으로 가는 여행을 좋아했는데, 1956년에 여행을 가서 "록 어라운드 클락"이라는 영화를 보았고 록 음악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일레븐 플러스[8] 시험을 통과해 액튼 카운티 문법 학교에 들어갔는데 큰 코때문에 자주 왕따를 당했고, 이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1살이었던 1956년 크리스마스 때 외할머니가 싸구려 스페인 기타를 사주셨는데, 재즈 아티스트였던 그의 아버지가 코드를 몇개 알려주셨고 피트는 혼자 작곡하는법을 배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악보 읽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9]

고등학교 친구인 존 엔트위슬과 재즈그룹을 만들기도 했으나, 비틀즈가 미국 시장을 갈아 엎어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록 음악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트는 그룹의 드러머와 싸운 것을 계기로 그룹을 탈퇴한다. 그는 특히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를 좋아했다.

이후 피트는 학교 성적이 준수하지 않았던 관계로 대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어서 음악학교와 디자인 학교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디자인 학교인 일링 미술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역시 이 학교 출신이며, 피트는 대학생 시절 롤링 스톤스의 멤버가 되는 로니 우드와 같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2.2. 데뷔 전

1961년 말에 그는 스키플 밴드였던 디투어즈(Detours)에 가입했다.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를 분리했는데, 로저 달트리는 리듬 기타를 맡았고, 존 엔트위슬은 베이스를, 더그 샌덤(Doug Sandom)은 드럼을, 그리고 피트는 리드 기타를 맡았다. 그 당시 밴드의 리더는 로저 달트리였다. 본래 보컬은 콜린 도슨(Colin Dawson)이라는 사람이었지만, 리듬 기타보다는 보컬이 적성에 맞았던 로저 달트리가 콜린 도슨과 자주 싸웠다. 1962년 콜린 도슨이 밴드를 나가버림에 따라 로저 달트리가 보컬로 포지션을 옳겼으며, 따라서 피트 타운젠드가 유일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1964년, "디투어즈"가 이미 다른 밴드에서 쓰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새 밴드명을 고려하던 중, 피트 타운젠드의 대학교 룸메이트였던 리처드 번스(Richard Barnes)라는 사람이 "더 후"라는 이름을 생각해내서 그대로 밴드명이 되었다.

이름을 바꾼지 얼마 안가 키스 문이라는 한 드러머가 술을 먹고 잔뜩 먹고 들어와 더 후의 공연을 보던 도중 드러머 더그 샌덤을 팬 다음 쫓아내 마구 드럼을 친(...)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때의 드럼 연주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멤버들은 키스 문을 밴드의 멤버로 들이면서 더 후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이후 그는 밴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대학교를 중퇴한다.

2.3. 더 후

1965년, 매니저 키트 램버트(Kit Lambert)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데뷔 앨범인 My Generation을 발매하게 된다. 더 후의 첫 앨범이었던 My Generation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더 후는 단숨에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하는 거대 록밴드가 되었다.

1968년, 피트 타운젠드는 메헤르 바바를 만나 인도 철학에 심취하였고, 얼마 뒤 Tommy라는 앨범을 제작해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1970년에는 더 후 최고의 라이브 앨범이라고 불리는 Live in Leeds를 발매했다. 이런 성공가도는 1971년 정점에 다라, Who's Next 앨범을 발매해 1970년대 최고의 앨범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나 Baba O'Riley는 더 후 최고의 히트 곡이 되었다.

그는 1972년 이후 신경쇠약 등 여러 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인 커리어를 멈추지 않고 더 후의 라이브 공연과 새 앨범을 준비하였다. 1978년, 밴드의 핵심 멤버였던 키스 문이 숨졌고, 더 후는 사실상 해체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현재까지 로저 달트리와 함께 여러 라이브 콘서트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자세한 행적은 더 후 문서 참고.

2.4. 솔로 커리어

더 후 외에도 솔로 커리어를 밟았는데, 1970년대 초반에는 메헤르 바바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은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1980년 이후로는 여러 음악가들과 협업을 하는 식으로 솔로 커리어를 지속하고 있다. 에릭 클랩튼, 폴 매카트니, 존 본햄 등 여러 아티스트와 손발을 맞췄고,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하는 중이다. 특히 1985년에는 핑크 플로이드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 딥 엔드(Deep End)라는 슈퍼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소아성애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죄로 풀려나면서[10] 이후에도 록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지고 있다.

3. 음악적 특징

I wasn't trying to play beautiful music. I was confronting my audience with the awful, visceral sound of what we all knew was the single absolute of our frail existence—one day an aeroplane would carry the bomb that would destroy us all in a flash. It could happen at any time.
저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우리 모두가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 한대로 완전히 파괴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에 제 콘서트를 보러온 팬들을 볼때마다 끔찍하면서도 본능적인 사운드로 대했어요. 전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니까요.
그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2차대전이 끝났던 점도 있었고,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전후 트라우마가 자신의 송라이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작곡가로서도 더 후의 대부분의 노래를 작곡했으며, 처음의 거칠고 강렬한 앨범뿐만 아니라 뒤로 갈수록 실험적인 노래들을 선보였고, ' Baba O'Riley'나 ' Won't Get Fooled Again'같이 매우 세련된 노래도 작곡했다.


또한 가끔씩 직접 보컬을 맡는 노래[11]도 있었고, 로저와 같이 부르는 노래도 아주 많다. 백 보컬도 주로 했는데[12] 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잘 불렀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13] 그래서 이제는 로저 달트리나 피트의 동생 사이먼이 피트의 백보컬 파트까지 부를때도 있다. 위 동영상은 2016년 하이드 파크에서의 Baba O'Riley 라이브 공연 영상인데, 자신의 파트를 부를 때 끊어 부를 정도로 꽤나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14]

3.1. 기타 연주

1970년 Young Man Blues 연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자 1960년대를 상징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하나로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조지 해리슨 등과 함께 반드시 선정되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이다. 피트 타운젠드는 본인의 성격답게 과격하고 공격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파워코드를 매우 자주 사용했고 파워코드의 대다수를 정립하였다. 또한 제프 벡과 더불어 기타 연주에 피드백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리프를 중시했으며, 더 후 음악에서 화려한 솔로잉은 존 엔트위슬이 베이스로 즐겨 하였기에 키스 리처즈, 말콤 영과 마찬가지로 리드 기타리스트가 아닌 리듬 기타리스트 분류된다. 그러나 그는 위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화려한 솔로잉도 하는 리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보통 피트 타운젠드의 솔로잉은 동시대의 여러 기타리스트들처럼 블루스에 기반하여 있었다. 블루스에 기반하여 화려한 속주를 보여주기도 했고, 그루브한 솔로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여러 스타일의 솔로를 연주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보통 음악 팬들은 그를 100% 리듬 기타리스트라고 분류하진 않는다.

3.2. 음악가들의 평가

Pete Townshend was definitely the first. But not being that good a guitarist, he used to just sort of crash chords and let the guitar feedback. He didn't get into twiddling with the dials on the amplifier until much later. He's overrated in England, but at the same time you find a lot of people like Jeff Beck and Hendrix getting credit for things he started. Townshend was the first to break his guitar, and he was the first to do a lot of things. He's very good at his chord scene, too.
피트 타운젠드는 확실한 "최초"였어요.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던것은 아니지만, 크래쉬 코드 같은 것을 연주하고 기타에서 피드백 효과가 나도록 했어요. 그는 한참 후에야 앰프의 다이얼을 만지작거렸죠. 그가 영국에서 과대평가 되어있지만, 동시에 그는 그가 이룬 "최초"의 것 때문에 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기타리스트들과 비슷한 선에서 평가를 받고 있죠. 타운젠드는 기타를 박살낸 퍼포먼스의 창시자였고, 다른 최초의 것들도 많이 했어요. 코드 잡는것도 아주 잘합니다.
리치 블랙모어
Pete Townshend's a god of guitar and always will be!
피트 타운젠드는 기타의 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거에요.
브라이언 메이

3.3. 퍼포먼스

존 엔트위슬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도 그렇지만 피트 타운젠드는 다혈질이었고 거친 퍼포먼스를 자주 했다. 록밴드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기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공연 도중에 실수로 기타가 천장에 부딪혀 박살 났는데, 관중들이 환호하자 다음부터는 아예 기타를 모조리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지미 헨드릭스는 아예 공연장에서 기타에 불을 붙여 박살을 내기도 했다.
파일:타운젠드옹 슬라이딩.gif
파일:external/tbquirk.com/pete-wight.gif
파일:더 후 악기 부수기 1.gif
슬라이딩 인간풍차[15] 기타 부수기
또한 특유의 윈드밀, 슬라이딩, 점프를 하는 등 거칠고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자주 했다. 이런건 뒷 세대의 하드 록, 헤비 메탈 밴드 등에게 퍼포먼스 쪽으로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더 클래시 역시 피트의 영향을 받아 밴드를 대표하는 명반인 London Calling의 앨범 커버를 아예 기타를 부숴버리는 장면으로 채우기도 했다.

케이온!!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히라사와 유이는 이분과 존 레논을 섞어서 만든 캐릭터로 보인다. 애니메이션 내에서 특유의 윈드밀 퍼포먼스를 시전하기도.

4. 사건사고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은 소아성애자가 절대 아니고 아동 학대를 진중하게 다루는 책을 쓰기 위해 봤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로저 달트리를 비롯한 주변인들도 피트는 아동 성범죄를 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증언하여 풀려났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피트 타운젠드의 컴퓨터에서 아동 포르노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난 것이다. 링크. 그가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하여 신용카드 결제를 한 기록은 있으나, 사진을 다운받은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주변인들의 증언이 통한 것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수사가 진행 중임을 미리 알고 있지 않은 한, 사전에 증거를 인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드에서 이미지가 한 장이라도 발견되었다면 게리 글리터와 같은 말로를 맞았을 것이다. 노인네가 하드 포맷을 할 줄은 알겠냐고 생각한 듯 2012년 그는 자서전인 <Who I Am>에서 영국 은행들이 소아성애자 커뮤니티의 수익을 올리는 데 공모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이트에 접속했다고 해명했다. 즉, 신용카드 결제 가능 여부만 확인한 것이지, 사진을 볼 의도는 없었기에 사진은 다운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는 무죄라는 것이다.

5. 기타



[1] 현 런던 치스윅. 그레이터 런던이 만들어지면서 근교 지역도 모두 런던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피트의 고향도 편입되었다. [2] 재즈 뮤지션이었다. [3] 현재 형의 밴드에서 백업 기타 및 배킹 보컬을 맡고 있다. [4] 1969년 출생. 작가, 칼럼리스트로 활동한다. 엠마가 태어난 날 피트가 하품을 하는 사진이 있다. [5] 전설적인 프론트맨인 프레디 머큐리도 이 학교를 나왔다. [6] 평생을 함께한 음악적 동료 로저 달트리와는 키차이가 무려 15cm다. [7] # 한화 약 2,000억원. [8] 영국에서 만 11세에 치르는 상급학교 진학 시험 [9] 비틀즈 멤버들도 악보 읽을 줄 몰랐고, 프레디 머큐리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 등 여러 전설적인 록스타들도 악보 보는 법을 몰랐다. 대체로 집이나 학교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만을 가지고 독학으로 작곡법을 배운 아티스트들은 악보를 보기보다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기호를 만들어 작곡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도 현재는 악보를 읽을 줄 알지만, 악보를 보는게 오히려 더 불편하여 클래식 곡을 작곡할 때를 빼고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지한다고. [10] 자세한 건 아래 참조. [11] A Legal Matter, Odorono, Our Love Was, I Can't Reach You, Sunrise, Going Mobile, I'm One 등등 수많은 곡들 누가 보컬이야 [12] My generation, Substitute 등 매우 많은 곡들. [13] 다만 그럼에도 노래를 부를 때가 있는데, 젊은 시절에 비해서는 로저 달트리와 같이 목소리가 꽤 굵어졌다. [14] 헌데 역으로 목소리가 굵어지고 거칠어져 젊은 시절에 비해 샤우팅 창법이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15] 그를 상징하는 퍼포먼스. 이 퍼포먼스는 케이온!에서도 패러디되었다. [16] 존 엔트위슬은 제외. [17]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로저의 가슴이 드러난 의상 때문에 짜증나 죽을 뻔했다고 한다... [18] 정확히는 키스 리처즈가 믹 재거는 불알만 크고 음경은 작다고 디스하자 “내가 얘랑 섹스 할 때 봤는데 크던데?” 라고 믹 재거를 옹호해줄 때 말한 것이다. [19] 비록 1년간의 차이가 나긴 하지만 전년도인 1959년제 레스폴이(스탠더드 모델) 전설 중의 전설 명기라는 평을 받고 있으니 두 모델 간의 품질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면... [20] 폴 매카트니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났을 만도 한 게...폴 매카트니는 이 공연의 개최를 위해 쿠르트 발트하임과 힘을 합치기까지 했다. [21] 재미있게도 같이 밴드를 했던 로저 달트리는 최근 제러미 코빈을 공산주의자라며 비난하고, 브렉시트에 동조하면서 미투 운동을 맹비난하는 등 보수라고 보일만한 행적을 보이고 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보컬 듀오라고 불리던 둘이 정작 정치 성향은 상극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