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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2:58:31

슬래시(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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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tite for Destruction
스튜디오 앨범

1987
G N' R Lies
스튜디오 앨범

1988
Use Your Illusion I
스튜디오 앨범

1991
Use Your Illusion II
스튜디오 앨범

1991
The Spaghetti Incident?
스튜디오 앨범

1993
Use Your Illusion
컴필레이션 앨범

1998
Live Era '87–'93
라이브 앨범

1999
Greatest Hits
컴필레이션 앨범

2004
Chinese Democracy
스튜디오 앨범

2008
T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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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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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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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5년 10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키스 리처즈 제프 벡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비비 킹 척 베리 에디 밴 헤일런 듀언 올맨 피트 타운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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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조지 해리슨 스티비 레이 본 앨버트 킹 데이비드 길모어 프레디 킹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데릭 트럭스 닐 영 레스 폴 제임스 버턴 카를로스 산타나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쳇 앳킨스 프랭크 자파 버디 가이 앵거스 영 토니 아이오미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브라이언 메이 보 디들리 조니 라몬 스코티 모어 엘모어 제임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라이 쿠더 빌리 기븐스 프린스 커티스 메이필드 존 리 후커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랜디 로즈 믹 테일러 디 에지 스티브 크로퍼 톰 모렐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믹 론슨 마이크 블룸필드 휴버트 서믈린 마크 노플러 링크 레이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제리 가르시아 스티븐 스틸스 조니 그린우드 머디 워터스 리치 블랙모어
<rowcolor=#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조니 마 클라렌스 화이트 오티스 러쉬 조 월시 존 레논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앨버트 콜린스 로리 갤러거 피터 그린 로비 로버트슨 론 애시튼
<rowcolor=#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디키 베츠 로버트 프립 조니 윈터 듀언 에디 슬래시
<rowcolor=#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레슬리 웨스트 T-본 워커 존 맥로플린 리처드 톰슨 잭 화이트
<rowcolor=#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로버트 존슨 존 프루시안테 커트 코베인 딕 데일 조니 미첼
76위부터는 문서 참조.
}}}}}}}}} ||
같이 보기: 최신 버전,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롤링 스톤 선정 250대 기타리스트
105위
Slash
슬래시
파일:fb2011fbbd4bd67fe350fa23d2a51932.jpg
<colbgcolor=#C0C0C0><colcolor=#000> 본명 솔 허드슨
Saul Hudson
출생 1965년 7월 23일 ([age(1965-07-23)]세)
영국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스토크온트렌트
성장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기타리스트,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소속 그룹 {{{#!folding [ 이전 소속 그룹 펼치기 · 접기 ]
건즈 앤 로지스 (1985-1996, 2016-)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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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부모님 앤서니 허드슨
올라 J. 허드슨
배우자 르네 서란(1992 – 1997)
펄라 페라(2001 - 2014)
파트너 메간 호지
자녀 아들 런던 에밀리오 허드슨(2002년생)
아들 캐시 앤서니 허드슨(2004년생)
신체 178cm, 75kg
재산 $100,000,000 (한화 약 1000억 원)
활동 기간 1981년 – 현재
사용 악기 기타
장르 메탈, 헤비 메탈, 글램 메탈, 하드 록, 블루스 록
레이블 게펜, UZI, 블랙 프로그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

1. 개요2. 생애 및 주요 활동 내역
2.1. 생애2.2. 건즈 앤 로지스 합류 전2.3. 건즈 앤 로지스 탈퇴 후
2.3.1. 스네이크핏2.3.2. 벨벳 리볼버2.3.3. 솔로 활동2.3.4. 내한 공연
2.4. 건즈 앤 로지스 재합류
3. 디스코그래피
3.1. 건즈 앤 로지스3.2. 스네이크핏3.3. 벨벳 리볼버3.4. 솔로
4. 음악적 특징
4.1. 연주력4.2. 음반4.3. 사용 악기
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thebeast1.jpg
파일:halfman1.jpg
Half Man, Half Beast, The man called Slash
반인 반수의 사나이, 그 남자는 슬래시라 불린다.
[1]
1965년 7월 23일 출생, 잉글랜드 런던 햄프스티드 출신의 기타리스트이다. 건즈 앤 로지스[2] 벨벳 리볼버[3]의 기타리스트로 유명하다. 본명은 솔 허드슨(Saul Hudson).

왼쪽 사진은 92년 도쿄 라이브이며 오른쪽의 사진은 92년 파리 라이브 공연의 사진이다.

2. 생애 및 주요 활동 내역

2.1. 생애

파일:8ab6242dc6a6d666a900d0c8b33882ad.jpg
파일:bff46ba56c05701239e89f69d5f64a26.jpg
어렸을 때의 모습
믿기지 않게 귀엽다
햄프스티드에서 태어나,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생활했다.

그의 가족은 슬래시가 5세가 되었을 때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다.[4] 그의 어머니는 패션 디자이너로 데이비드 보위 등의 의상을 담당했고, 그의 아버지는 디자이너로 닐 영, 조니 미첼 등의 앨범 자켓을 작업했다.

1974년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그는 어머니와 살기를 선택하였다. 어머니가 출장을 떠날 때마다 스토크온트렌트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종종 살았는데 슬래시란 별명은 이 시기에 얻었다고 한다. 가끔은 어머니가 일하는 장소에 따라가 영화/음악 스타들을 만나기도 했다. 실제로 10대 시절 마이클 솅커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출현하기도 했다.[5] 슬래시의 색깔은 영국 속의 흑인, 미국 속의 영국인, 예술가인 부모님 그리고 이혼, 영국과 미국에서의 생활 등의 아래서 형성되었다.

2.2. 건즈 앤 로지스 합류 전

파일:slash-high-school.webp
1982년 6월 4일 LA 페어팩스 고등학교에서 연주를 하는 만 16세의 슬래시

1979년에 스티븐 애들러를 만나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애들러가 기타를 쳤기 때문에 슬래시는 베이스를 배우기로 한다. 하지만 음악 선생님이 크림 레드 제플린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저게 내가 해야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 BMX 챔피언이던 슬래시는 자전거를 버리고 기타를 12시간씩 치기 시작한다.

1981년에는 '타이더스 슬론(Tidus Sloan)'이라는 밴드를 했었고, 1983년에 드디어 모터헤드의 노래 Road Crew에서 이름을 딴 '로드 크루'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친구 스티븐 애들러를 드럼으로 영입하고, 신문 광고를 통해 더프 맥케이건을 영입한다. 이때 Rocket Queen의 주요 뼈대를 작곡했다. 다만, 보컬을 구하지 못하여 밴드는 해산한다.

1982년에는 '런던'이라는 밴드에서 리듬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그 액슬 로즈 이지 스트래들린의 '할리우드 로즈'는 기타리스트와 드러머를 구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스티븐 애들러와 슬래시가 들어갔으나, 몇 개월 후 밴드는 깨진다. 졸지에 무직 신세가 된 슬래시는 리드 기타를 구하는 포이즌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당시 포이즌은 LA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 중 하나로 완성된 곡도 많은 준비된 밴드였다. 오디션에 슬래시는 최종 3인까지 남게 되었으나, 결국 C.C. 데빌에 밀려 탈락. 그 다음 해인 1986년 포이즌은 바로 데뷔하고 빌보드 200의 3위까지 오르게 된다. [6] [7] 그 사이 액슬 로즈와 이지 스트래들린의 할리우드 로즈는 트레이시 건즈의 'L.A. GUNS'와 결합하여 'GUNS N' ROSES'가 되었다. 하지만 곧 로즈와 스트래들린만 남게 된다. [8] 그들은 더프 맥케이건, 슬래시, 스티븐 애들러를 영입한다.

1985년 9월, 건즈 앤 로지스에 합류한 슬래시는 '헬'과 함께한 시간을 뒤로하고 1987년에 데뷔 했고, 록과 팝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건즈와 5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액슬 로즈와의 대립, 음악성의 문제, 멤버 교체 불만 등으로 1996년 탈퇴한다.

2.3. 건즈 앤 로지스 탈퇴 후

2.3.1. 스네이크핏

건즈 탈퇴 1년 전인 1995년에 첫 솔로 커리어 'Slash's Snakepit'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1995년에 첫번째 앨범 'It's Five O'Clock Somewhere'을 발매했다. 블루스를 기반으로 묵직한 서던록 사운드와 경쾌한 하드록 사운드의 조합이 일품이다. 보컬은 Sextus 밴드의 에릭 도버라는 사람이다. 그런지 풍 보컬이다.

1996 ~ 1998년에는 '슬래시의 블루스볼'이라는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 앨범 녹음은 하지 않았다.

2000년에는 두번째 앨범 'Ain't Life Grand'을 발매했다. 1집에 비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블루스, 하드 록은 물론, 그런지, 재즈, 레게 등 다양한 조합을 추구한 앨범. 1집과 슬래시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되었다. 보컬로는 로드 잭슨이라는 흑인 멤버로 슬래시와 함께한 보컬 중 가장 묵직한 소리를 들려준다.

2001년에 내한 공연이 예정되었었으나, 취소되었다.

스네이크핏은 2002년까지 활동하였다.

2.3.2. 벨벳 리볼버

2003년에 건즈 앤 로지스의 옛 동료 더프 맥케이건, 맷 소럼, 스톤 템플 파일럿츠의 보컬리스트 스캇 웨일랜드 그리고 슬래시의 동창 데이브 커쉬너로 결성되었다.

2004년에 첫 앨범 Contraband. 2007년, 두번째 앨범 Libertad를 발매하였다.

2008년에 스캇 웨일랜드의 탈퇴로 활동이 중지되었다.

2.3.3. 솔로 활동

2010년 3월 데뷔 23년 만에 첫번째 솔로 앨범 'Slash'를 발매했는데 거물 뮤지션들이 녹음에 다수 참여했다. 액슬 로즈를 제외한 건즈 1집의 라인업 - 더프 맥케이건, 스티븐 애들러, 이지 스트래들린- 멤버들과 퍼기( 블랙 아이드 피스), 앨리스 쿠퍼, 키드락, 이나바 코시( B'z), 레미 킬미스터( 호크윈드, 모터헤드), 오지 오스본, 이기 팝, 데이브 그롤( 너바나, 푸 파이터즈), 플리(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크리스 코넬( 사운드가든, 오디오슬레이브), 애덤 르빈( 마룬5), 마일즈 케네디( 얼터 브릿지) 등 이다.

2012년 5월에 두번째 솔로 앨범인 'Apocalyptic Love'를 발매하였다. 여러 뮤지션이 참여한 첫번째 솔로 앨범과 달리, 마일스 케네디만 메인 보컬을 전담하였다. 'Apocalyptic Love'앨범의 여러 곡들과, 동명 타이틀 곡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여전히 S급 리프 메이커라는 수식어를 유지하고 있다.

2014년 9월 세번째 솔로앨범인 'World On Fir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두번째 솔로앨범인 'Apocalyptic Love'와 마찬가지로 마일스 케네디가 보컬을 전담하였다.

2018년 9월 네번째 앨범이 발매되었다. 새 앨범명은 'Living The Dream'이다. 기존의 슬래시 스타일과 딱히 다르지 않으며 하드록과 그런지가 적절히 섞인 대중성있는 리프와 멜로디. 여전히 마일스 케네디가 참여했다. 그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가창력도 여전하다.

2022년 2월 11일 마일스 케네디와의 네번째 프로젝트 앨범인 '4'가 발매되었다. 마일스 케네디 앤 컨스피레이터스(Myles Kennedy & Conspirators)가 참여하면서 오랜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24년에는 오랜만에 마일스 케네디와 동조자들 없이 솔로앨범을 발매하였다. orgy of the damned지랄맞은 난교파티라는 제목의 블루스 앨범으로 전작보다 하드록 색채는 거의 없어지고 정통 블루스에 가까운 음악들을 선보였다. 발매 이후에는 간만에 슬래시의 블루스 볼로 활동하고 있다.

2.3.4. 내한 공연

2.4. 건즈 앤 로지스 재합류

건즈 앤 로지스는 보컬이자 리더격이였던 액슬 로즈와 나머지 맴버들간의 불화가 극도로 가열된 끝에 1990년대 중반이 되갈 즈음 로즈와 디지 리드를 뺀 나머지 맴버들의 탈퇴로 사실상 공중분해 되었다.

이후 액슬 로즈가 소송에서 이기며 건즈 앤 로지스의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다른 맴버들을 영입해 뉴 건즈 앤 로지스를 활동했지만, 예전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게다가 로즈와 슬래시의 사이는 극도로 안 좋아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험악했고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다면 재결성은 없을거라는 둥.. 슬래시는 암적인 존재라는 둥...),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건즈 앤 로지스가 헌액될 때도 원년 맴버들은 다 모였지만, 액슬 로즈는 끝내 참석을 거부하였다.[10]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건즈 앤 로지스의 부활을 바라는 팬들은 언젠가는 기적이 일어날거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2016년 초에 액슬 로즈, 슬래시, 더프 맥케이건이 극적으로 화해를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리고 드디어 맥케이건, 슬래시, 로즈가 뭉쳐서 건즈 앤 로지스가 부활한다. Coachella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출격하였다. 공연당시 영상. 이후엔 전미 스타디움 투어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12월에 재결합 이후 북미 투어를 돌고 남미 투어를 돌고 있다. 드러머 스티븐 애들러나 맷 소럼은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애들러는 몇몇 공연에서 한두 곡 연주를 하러 나온 적이 있다) 투어 이름은 "Not in This Lifetime Tour." 과거 액슬 로즈가 건스 앤 로지스의 재결합을 언제 다시 볼 수 있냐는 질문에 'Not in this lifetime.' 이라고 답한 일화에서 유래한 듯.

3. 디스코그래피

3.1. 건즈 앤 로지스

3.2. 스네이크핏

3.3. 벨벳 리볼버

3.4. 솔로


Slash Featuring Myles Kennedy & Conspirators
Apocalyptic Love부터 함께한 Slash Featuring Myles Kennedy & Conspirators의 멤버구성으로는 리드기타 슬래시, 보컬 마일스 케네디, 베이스 토드 컨스, 드러머 브렌트 피츠, 리듬기타 프랭크 시도리스로 구성되어있다.

4. 음악적 특징

4.1. 연주력

기술적으로 새로운 부분은 없어도 자신만의 고유한 필링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정통파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이다. 선배인 마이클 솅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그 외에도 지미 페이지 믹 테일러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지미 페이지나 믹 테일러 모두 깁슨 레스폴을 사용하는 블루스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겹쳐 보이는 면이 상당히 많다.[11] 라이브(특히 1980년대 건즈 시절)에서는 보면 틀릴 듯 말 듯 불안한 솔로를 보여줄 때가 있지만 역사적인 곡들을 썼고 위대한 멜로디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리프 메이킹과 작곡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67~70년대의 블루지한 고전 록의 색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 올드하지 않고 세련된 리프나 멜로디를 뽑아낼 수 있는 인물이다. 건즈 앤 로지스 시절의 그 유명한 Sweet Child O' Mine의 리프는 현재까지도 Smoke on the water나 Iron man에 비견가는 가장 위대한 리프로 꼽히고 있고[12] 다른 건즈 앨범이나 벨벳 리볼버, 솔로앨범까지 킬러 리프들을 뽑아내고 있다. 가히 블랙 사바스의 토니 아이오미 이후의 최고의 리프메이커라도 불려도 될 수준. 그리고 November Rain이나 Estranged같은 파워 발라드스러운 대곡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 진행을 가진 솔로 라인을 선보인다. 대다수의 곡들에서는 블루스 펜타토닉을 기반한 속주로 기타솔로를 채우지만 느린 템포의 아름다운 솔로에도 능한 것이다.

건스 앤 로지스에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던 버킷헤드가 외계인급 테크닉을 갖춘 'Top Guitar Shredder'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가끔 테크닉을 가지고 슬래시를 폄하하는 자들이 [13] 있는데, 고음으로 보컬의 질이 결정되는게 아니듯 테크닉만으로 평가하는 건 지양하자. 같은 리프를 연주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차이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기타리스트들이 있는데 슬래시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특유의 톤과 블루지한 연주로 리프 한 소절로도 슬래시라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애초에 다양한 특징과 연주 방식이 공존하는 록 기타리스트의 세계에서, 서로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애초에 슬래시와 버킷헤드는 기타리스트의 스타일 중에서도 거의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이다. 버킷헤드가 건즈에 있던 시절 Nightrain 라이브를 보면 원곡의 블루지한 릭들은 사라지고 무시무시한 속도의 스케일들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과장 조금 섞어서 똑같이 공 다룬다고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를 비교하는 수준, 슬래시는 70년대 하드록 기타리스트에 가까운 정통 블루스맨이고 버킷헤드는 독특한 화성 진행과, 메시앙 등의 현대 클래식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보이는 '조의 불분명함'을 이용한 연주 등 아방가르드 및 인더스트리얼 계열에 적합한 기교에 능한 현대음악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14]
다만 평소 연습 부족인지, 라이브 때 레코딩에 못 미치는 서툰 연주를 보여줄 때가 많다는 건 사실이다. 믹싱을 담당했던 스티브 톰슨의 인터뷰에 따르면 건즈 앤 로지스 멤버들은 자신의 파트만 연주하면 엔지니어들이 본인의 재량껏 조절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레코딩 버전은 슬래시 본인의 실력보단 엔지니어의 믹싱으로 다듬은 결과물이라는 것. 다만 이는 연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전반적인 음반의 믹싱과 마스터링, 즉 악기 배치나 음량 조절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믹싱은 연주 자체를 고치는 것이 아닌 음반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원래 연주가 형편없었는데 믹싱을 잘했다고 명반이 나올 수는 없다.[15] 그래서 연주로 먹고사는 프로가 기본기가 떨어진다고 잉베이 말름스틴에게 신나게 욕을 먹었다. 잉베이는 프로 연주자라는 사람이 기본적인 벤딩 음 하나 못 맞추면 가차없이 비판한다. 슬래시가 지미 페이지 지미 헨드릭스처럼 제대로 된 연주 기법이나 훈련 시스템이 없던 로큰롤 초창기 시절의 연주자도 아닌데 기본기가 엉망이니 잉베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맘에 안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음정을 못 맞추는게 아니라 미분음을 쓰는 거라 카더라

그럼에도 건즈시절 라이브에는 정말로 잔실수가 잦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현재는 서툴다기보단 삑사리가 종종 나는 편. 정교한 플레이어는 아니다.[16] 사실 이런 논란에는 음향도 한 몫 하는데, 일부 라이브들에서 EQ 조절에 실패하기라도 한건지 날카로운 드라이브 톤에 어울리지 않는, 미들을 과도하게 많이 올린 펑퍼짐한 사운드를 낼 때가 많다. [17] 원래도 톤 컨셉이 미들을 강조하는 편이긴 한데, 너무 과해서 기름진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현재 예전에 비해 연주 스타일이 다소 변화했다. 2010년도 전후로 바뀐 감이 있는데 예전과 달리 그 무거운 레스폴로 현란한 속주도 즐겨한다. 보컬과 달리 악기는 꾸준히 다루면 실력이 향상 되는 이유인지 테크닉적인 면이 많이 늘었다. (보컬보다 덜 할뿐 당연히 연주자도 늙으면 체력과 민첩함이 떨어지므로 한계가 있다) 물론 테크닉이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1980년대 뮤지션들이 새로운 테크닉 연마에 게으르고 연습 부족으로 라이브가 형편 없어지는데, 슬래시는 오히려 반대라는 점이 놀랍다. https://youtu.be/bC8EmPA6H6g?feature=shared

프로임에도 연습부족이면 어떡하냐는 등 여러 말들이 있지만, 사실 프로들 대부분 본인이 데뷔했던 시절의 그 실력을 가지고 쭉 가는 경우들이 많다. 전국과 해외까지 떠돌아다녀야하는 투어 일정은 물론이고 신 앨범 작업 스케쥴까지 더해지면 솔직히 연습을 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평상시 즐기던 술파티를 할 시간에 연습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술파티조차 밴드의 일정에 포함돼 있는 경우들이 다수다. 공연 후, 팬들과 교류를 위한 뒷풀이 파티나, 연예계 및 음반사의 높으신 분들이 주최하거나 혹은 참여한 파티에 가서 그들과 교류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밴드 활동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물론 소속사나 밴드의 성향에 따라 이런 스케줄이 포함이 안 될 수도 있다.

잭 와일드도 인터뷰에서 슬래시를 가리켜 "그리고 슬래시가 나왔지. 슬래시가 뭐 특별한 거라도 했나? 그냥 나와서 블루지한 솔로를 연주했을 뿐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환장했지."라며 기타 플레이는 테크닉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18]

4.2. 음반

건즈 앤 로지스에서 결국 곡을 잘 만들고 이끌어 낸 것은 슬래시가 아니라 이지 스트래들린이었다. 슬래시는 여기에 끝내주는 리프와 솔로를 얹어냈고, 그래서 건즈 앤 로지스를 떠난 이후의 슬래시는 예전만큼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다.[19] 냉정하게 말해서 테크닉은 A급 세션이 되기도 힘들고, 톤은 굉장히 올드하다. 더해서 건즈 이후의 행보는 이름값에 비해 보여준게 너무 부실했다는 평가는 피할 수 없다.

다만 슬래시의 솔로 이후 행보는 상당히 나아지는 편이고, 음악성을 단지 '상업성'의 논리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자신의 타이틀격 밴드를 떠난데다가 음악도 많이 달라졌는데 당연히 올드 팬들의 실망 역시 따를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편이다. 그나마 새로운 음악을 팬들에게 꾸준히 선보인다는 점에서 현 건즈 앤 로지스보다 낫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일스 케네디와의 투어도 하면서, 2집 낸 지 1년만에 3집을 내는 등, 나이는 들었어도 활동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또 담배, 술, 마약도 끊으면서 라이브 때 컨디션은 어느 때 보다도 좋다. 건즈 앤 로지스가 멤버 교체로 원성을 사고 액슬 로즈의 급 노화[20]로 라이브가 부실해진 것에 비하면 오히려 승승장구라고 볼 수도…
사실 지금 솔로 활동에서 보여주는 음악은 전성기 때 건즈 앤 로지스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헤비메탈에 근간을 둔다는 점은 여전히 건즈의 영향이 느껴지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 얼터너티브 록의 성향이 곡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기량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올드한 블루스나 원초적인 하드록 냄새는, 흔히 아이돌 타이틀을 내세우는 양산형 얼터 밴드들과는 차별화가 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일부 건즈 팬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음악 성향이 변화하는 것은, 한없이 성장하는 음악가의 인생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응원을 해주자. [21]

액슬 로즈와 슬래시의 비교라면, 클래식 건즈의 해체 이후 현재(2019년)까지 로즈는 Chinese Democracy 1장, 슬래시는 스네이크핏 2장, 벨벳 리볼버 2장, 솔로앨범 4장을 발매했다. 여기서 Chinese Democracy 1장이 슬래시의 8장의 앨범을 압도하는가 하면 그것도 의문이다. 당장 벨벳 리볼버만해도 물론 수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긴 힘들지만 그래미에서 '베스트 하드락 퍼포먼스'를 수상했기 때문에.

슬래시라는 록뮤지션/기타리스트 자체의 행보라면, 현재의 록 역사에 손에 꼽히는 기타리스트로서의 슬래시가 1993년 이후, 26년의 넘는 활동 중 보여준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 볼수도 있을것이다. 그럼 1993년부터 슬래시보다 종합적으로 뛰어난 기타리스트는 누가 얼마나 있었는가? 슬래시 탓보다는 그냥 록씬이 무너지고, 기타히어로가 나오질 않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슬래시가 리스트 밖의 기타리스트 인 것은 아니지만, 터무니 없이 고평가되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슬래시가 어쩌면 운이 좋았다 라고 할 수도, 아니면 슬래시가 성실했다 라고 할 수도 있다.

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팬들은 슬래시의 프로듀싱 능력에 의문을 가지며, 슬래시를 프리마돈나 스타일의 보컬리스트가 곁에 있어야만 완성되는 타입의 기타리스트이자 뮤지션으로 평한다. 이러한 슬래시의 한계는 건즈 시절부터 벨벳 리볼버, 솔로 앨범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앨범 내 곡들 간 퀄리티 편차가 커 밀도 높은 명반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게 부정적인 팬들의 평가다. 따라서 이들 중 대다수는 액슬 로즈와 슬래시의 조합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4.3. 사용 악기

Gibson의 슬래시 컬렉션 비디오
1987년 크리스 데리그가 만든 59년 레스폴 복제품을 썼다. 여기에는 던컨의 알니코2 픽업이 들어가 있었다. 이 레스폴로 건스 1집 Appetite For Destruction 녹음을 하게 된다. Sweet Child O' Mine의 상징적인 기타 사운드는 복제 레스폴과 던컨 픽업이 만든 소리이다. 이 복제 레스폴은 결코 나쁜 품질이 아니고 59년의 스펙과 나무를 최대한 따라서 만든 것이다. 87년 복제 레스폴의 엄청난 성공은 이후 깁슨 커스텀에서 히스토릭 모델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이다. 슬래시는 이 기타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1991년 Use Your Illusion 앨범 시점의 인터뷰를 보면 기타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크리스 데리그가 이미 고인이 된 시점이여서 불가능했다고 한다.위자 보드도 해봤는데 안됐다고 했다. (출처 : 본인 입으로 말하고 있다 #)

레드 제플린 지미 페이지, 씬 리지의 게리 무어, 블랙 레이블 소사이어티의 잭 와일드와 같이 Gibson Les Paul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로 깁슨 레스폴 모델을 애용한다. 특히 페이지의 상징과도 같은 더블 넥 기타인 Gibson EDS-1275도 애용해서 EDS-1275 모델의 대표 주자로도 꼽힌다.[22]

21세기가 된 현 시점에는 거의 깁슨 레스폴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몇십 년 간 Gibson Les Paul만을 사용한 대표적인 레스폴 애용자로서, 현재는 깁슨 및 Epiphone에 그의 시그니처 모델이 항상 나와 있고 또 심심하면 나온다. 슬래시는 은퇴하고 나면 깁슨사에서 한자리 할 것이라는 농담이 있지만 딱히 농담도 아니다. 깁슨과 에피폰을 합쳐서 10종이 넘는 시그니쳐가 발매되었다.[23] 그를 거쳐간 수많은 시그니처 레스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모델은 90년대 솔로시절 사용하던 붉은색 바디에 폼나게 뱀 인레이가 들어간 Snakepit 시그니처인데 [24] 물론 시그니처 모델이 다 그렇듯이 가격은 간지에 걸맞은 가격으로 꽤나 고가이다. 그 밖에 Gibson에서 출시한 Appetite for Destruction 모델은 8000달러를 호가하며 현재 단종돼서 해외 중고 사이트에서 가끔 볼 수 있는데, 가격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평범한 레스폴 유저라면 슬래시 시그니처 픽업을 따로 사서 쓰는게 가격 대 성능비가 낫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 이외로 사용하는 악기는 B.C. Rich의 모킹버드 [25] 와 깁슨 ES-335를 사용하는 외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26] [27]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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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리츠 공연, 액슬 로즈가 슬래시를 소개하며. [2] 후술하겠지만, 20년도 넘게 건즈의 멤버가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3] 2012년 이후에는 활동이 없으니 사실상 해체 [4] 의외로 미국 국적은 30대에 들어선 이후인 1996년에 취득했다. [5] # [6] 만일 슬래시가 오디션에 성공했다면 포이즌의 데뷔 앨범 자켓에서 곱게 메이크업 한 슬래시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7] 이 일화를 가지고 동시대에 LA 클럽씬에서 활동하던 JETBOY의 멤버 빌리는 슬래시가 항상 포이즌 류의 글램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 싫어하는 사람이 립스틱 바르고 '포이즌'에 오디션을 보냐며 모순 덩어리라고 비난했다. 슬래시는 훗날 회상하길 "포이즌은 싫었지만 성공하고 싶은 야심이 있었기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라고 말했다. [8] 건즈는 건즈 앤 로지스를 탈퇴한 뒤 다시 'L.A. GUNS'를 결성한다. [9] 데프톤즈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멤버의 죽음을 앞둔 터였기도 해서… [10] 후에 로즈가 회고하면서 말하기로는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참석하려고 준비를 하면서 옛 동료들에게 이를 알리던 도중, 스티븐 애들러에게 슬래시도 참석한다는 말을 듣자 마자 참석을 거부해버렸다고... [11] 솅커 역시 기술적인 특별한 면은 없지만, 자신의 필링과 스타일 및 애드리브에 뛰어나서, 앨범보단 무대 위에서 더 돋보였던 인물이다. [12] BBC 선정 가장 위대한 기타 리프 순위의 2위에 올랐다. 10위권 안의 모든 리프 중 가장 후대에 나온 곡이다. 70년대에 나온 전설적인 고전들과 경쟁해서 2위까지 올라간 것. 참고로 1위는 Whole Lotta Love. [13] 대표적으로 잉베이 말름스틴 같은 기타리스트들 [14] 증4도 등의, 화성적으로 불안한 음도를 계속 쌓는다던지. [15] 산울림 초기 명반을 보면 믹싱이나 마스터링이 충격적인 수준으로 끔찍하지만 음악 자체가 명곡들이기에 명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믹싱과 마스터링은 좋은 재료를 다듬어 주는 정도의 역할이다. [16] 밴딩 음정을 못 맞춘다고 종종 까인다…허나 이건 기타 컨디션의 영향도 많이 타기 때문에… 튜닝 틀어진 기타로 속주하면서 밴딩으로 음정 맞추는 이런 괴수도 있긴 하지만 [17] 두 번째 내한 때도 좁고 밀폐된 공간 때문인지 기타 사운드는 시원찮았다. [18] 1994년 즈음에 슬래시가 술에 취해 잭 와일드의 기타를 부숴서 잭이 "그 녀석 보면 죽여버릴 거야!" 라는 발언을 한 것을 근거로 둘 사이가 험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슬래시 솔로 앨범 투어에 잭이 초대되어 블루스 잼을 하기도 했고 설령 사이가 험악했다 하더라도 그 사건도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19] 물론 벨벳 리볼버 1집은 건즈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기록했다. 다만 2집은… [20] 인터넷에 Axl Rose disaster로 검색해 보면 말그대로 재앙에 가까운 라이브를 볼 수 있다. [21] 그래도 공연에서는 올드 건즈 곡들이 꽤나 셋 리스트에 들어있는 편이다. 특히 sweet child o' mine이나 마지막의 paradise city는 거의 빠지지 않는 편. [22] Knockin' On Heaven's Door를 연주할때 자주 사용하는데 지미 페이지와 더불어 더블넥을 가장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23] 2010년대쯤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슬래시에게 에피폰 시그니처도 혹시 사용하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답변은 깁슨만 쓴다는 것. [24] 여담으로 가왕 조용필이 해당 모델의 소유자 중 하나이다. 1998 ~ 1999년 콘서트와 방송에서 이 시그니처로 기타 연주를 했고, 지금도 보유 중으로 알려져 있다. [25] X JAPAN hide가 자주 썼던 페르난데스(버니)의 시그니처 모델(MG 시리즈)의 오리지널 모델이기도 하다. [26] 트레몰로 암을 이용한 주법을 위한 듯 하다. [27] 사실 슬래시는 건즈 초기에 레스폴을 처음 연주하기 전에는 Jackson B.C. Rich의 모델을 메인으로 연주했다. [28] 잭슨의 내한공연에서도 무대에 올랐다. [29] 그 중 하나가 끝부분에 몰핑 기법이 들어간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모은 Black or White이다. 사실 Black Or White에서 앞부분 인트로만 슬래시가 치고 나머지는 다른 기타리스트가 쳤다. 원래 배킹까지 다 쳤는데 마이클 잭슨이 맘에 들지 않아서 인트로만 쓰고 나머지는 폐기처리 했다고. 그 대신 Give in to Me에선 모든 기타 파트를 슬래시가 맡았으며 뮤직비디오까지 함께 출연하였다. 싱글 컷 되진 않았지만 전성기 슬래시의 엄청난 기타 솔로를 들을 수 있는 노래. [30] 뮤비에서 뿐 아니라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항상 올라간다. [31] 앨범 부클릿에 로즈가 감사를 적어 넣은 솔로이다. [32] 이것 또한 마이클 솅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솅커 역시 무대 위에선 특유의 리듬감과 즉흥 애드립으로 앨범 버전 보다 라이브 버전이 더 귀가 즐겁다. [33] 긴 팔 다리를 이용한 특유의 간지폭풍 포즈 (탑햇에 선글라스 쓰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담배 한대 꼬나 문 다음 기타가 무릎까지 올 정도로 스트랩을 내리고 양 다리를 벌린 연주 자세)는 그야말로 '레스폴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34] 사실 이 자세가 연주하기에는 엄청 불편한 포즈라, 설령 삑사리가 나더라도 이해 해주자. 대신 간지에는 플러스 아닌가? 하지만 삑사리도 지난 세기 이야기로, 최근엔 잘 안낸다. [35] 코카인같은 흥분제 계열의 마약과 헤로인을 섞어서 투약하는 방식. [36] 더프 맥케이건이나 스티븐 애들러처럼, GNR의 오리지널 라인업의 멤버들은 하나 둘씩 마약이나 알콜중독에 시달렸고, 한번 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다행인 점은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모두 근절했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다. 그 친구들은 1987년 LA에서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가 똑같이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진짜 2분동안 사망선고를 받았을때 믹 마스와 함께 식스가 실린 구급차에 탔던 멤버들이다. [37] 야짤의 경우 여성의 유방이 그대로 나오는 건 기본이고 성기 등이 나오는 경우도 간혹 보이곤 한다. 참고로 이런 사진을 올리면 검열에 걸려 영구정지 크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희화 & 순화한 버전을 쓰는데, 그럼에도 수위가 상당히 센 편. 그러니 이런 방면에 민감하다면 주의하자. [38] 상단의 기타 컬렉션 리뷰 영상에서도 Slash Can Talk? 라는 댓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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