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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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甲申政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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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도 | ||
<colcolor=#f0ad73> 시기 | 1884년 12월 4~11일 (양력)[1] | |
장소 |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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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박영효 등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 |
교전 세력 |
[[틀:깃발|
급진개화파 |
]][[틀:깃발| ]][[조선|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청나라| ]] |
]][[틀:깃발| ]][[조선| ]]
지휘관 |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다케조에 신이치로 시마무라 히사시 |
고종 명성황후 민영익 원세개[2]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조선-청 연합의 진압 성공 | |
영향 |
개화파 인재들의 망명 및 사망으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시달림 한성조약(조선:일본) 톈진 조약(청: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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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신정변( 甲 申 政 變)은 1884년( 갑신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쿠데타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군이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여 삼일천하로 끝났다.이 정변에서 급진 개화파는 여러 친청파들을 살해한다. 윤태준[3], 한규직[4], 이조연[5]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개화에 적극적이었던 민영목[6], 민태호[7], 그리고 조영하[8] 등 여러 온건 개화파와 친청파[9]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에게도 큰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2. 배경
2.1.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의 분열
조선 후기에 봉건 체제의 틀을 깨트리고 자본주의 및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상을 가진 급진 개화파들(일부 중인 출신 지식인 및 양반들)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뭉치게 되었다. 급진 개화파들은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 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이 시기에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위정척사는 제외하고 개화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선 뜻을 같이 했으나, 그 속도와 구체제 인사 청산 범위를 놓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온건파는 힘을 기르기 전까진 청과의 사대외교를 중단하지 않길 바랐고, 급진파는 청에의 사대를 신속히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급진 개화파들은 아편전쟁, 영토 할양 등으로 청나라가 이미 기울었고, 청나라는 저물어가는 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들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10],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박영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완고당이라고 불렀다. 유사한 표현으로 급진 개화파는 독립당, 일본당, 김씨당 등의 표현이 있고 온건 개화파는 사대당, 청국당, 혹은 민씨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상대에 대한 비칭이다. 이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당파성론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급진 개화파에 대한 표현이 아주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온건파 거두인 김홍집, 김윤식은 정변 때 급진 개화당이 내각에 넣어주었고 어윤중은 급진파, 친일파들과 가깝게 지냈다. 또한 갑오개혁 때만 봐도 온건 개화파와 민씨 척족의 대립 역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
급진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지를 모으는 한편, 개혁 운동의 수단으로써 당시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의 일본 수신사 및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다. 고종은 급진 개화파들을 원래 아꼈는데, 김옥균과 고종의 매제 박영효 등은 왕의 총애를 믿고 서구식 정책들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래서 친청파 및 청의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개화당이면서도 동시에 민씨 척족이기도 했던 민영익 집에서 두 세력이 회담을 가졌다. 묄렌도르프는 새 화폐를 찍자고 주장했다. 급진 개화파는 이미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었고, 외채가 많은데 돈 가치가 떨어지면 조선의 경제가 망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침 일본이 정부 차관을 제공하겠다 약속해왔으니 차관으로 근대화에 충당하자는 의견을 냈다.[12]
고종은 일단 양쪽을 제지시키고 김옥균을 일본에 보내 차관을 받아오게 한다. 그러나 갓 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의 정치적 역량을 의심하고 조선정계에서 이들의 지위가 무력하다고 보아 급진 개화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에게 보고함으로써 차관 도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본 정부도 자금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인데, 김옥균이 필요로 한 300만 원이라는 돈은 근대화 와중이던 일본 정부로서도 만만찮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7만 원의 돈을 지원해주었다. 김옥균은 미국무역상사를 통해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자금을 마련해보려는 시도를 하려 하나 이내 실패한다. 결국 자금 부족으로 급진 개화파가 추진하던 여러 근대화 정책이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에 책임을 지고 김옥균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의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온건 개화파들은 박영효가 저택을 팔아 마련한 병조 산하 훈련원을 없애고, 해방영이라는 수도 방위 사령부 개념의 조직을 창설한다. 민겸호의 아들 민영환의 주도였다. 게다가 1883년 고종은 미국제 무기를 구입하고 푸트 미국 공사를 통해 미국에게서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했는데 회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민영익의 주도로 청나라에서 군사 고문을 파견받게 된다. 이는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급진 개화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2.2.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발생한 1882년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의 위기였고 급진 개화파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임오군란으로 청에 간 사신들[13]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군을 움직였고, 청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한 민씨 세력은 청나라의 눈치를 보게 됐다. 청나라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외교), 위안스카이(군사), 마젠창(재정) 등 고문을 파견하고[14], 영약삼단으로 조선의 외교권에 개입하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속방 지위를 못박고, 경제적으로는 청국 상인의 조선 국내 무역이 가능하게끔 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즉 기존까지의 책봉 - 조공 관계를 근대적 종주국 - 종속국 관계로 융합하고자 한 것.
마침 청나라는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한반도 주둔군 3천 명 중 절반을 베트남 전선에 투입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기고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 정변의 실행을 서두른다.[15]
3. 전개
3.1. 정변 개시
갑신정변 주동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16] |
정변의 중심지였던 우정총국 |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寢殿)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원문][18]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무자일 2번째 기사 #
1884년 12월 4일(양력) 저녁 6시, 급진 개화파는 우정국 연회가 열릴 즈음 사전에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19]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켰다.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원문][18]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무자일 2번째 기사 #
저녁 9시경 별궁 옆 초가에 불길이 치솟자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연회 도중 김옥균의 빈번한 출입을 수상하게 여긴 민영익이 제일 먼저 나갔는데,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 흩어져 달아났으며, 이에 원래 계획했던 4영사(營使)[20] 암살은 실패한다.
사전에 포섭한 자객들로[21] 4영사 암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민영익[22]만 중상 입히는 수준으로 끝났다. 미국에 보빙사로 함께 갔던 홍영식은 사사로운 정을 저버릴 수 없어 부상당한 민영익을 묄렌도르프와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한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집에 데리고 가는데... 그 의사가 바로 드라마 제중원에 나오는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당시 민영익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터라 알렌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계획이 차질을 빚자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 공사의 태도를 확인한다. 이후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친청파와 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하고 왕을 경우궁[23]으로 옮긴다. 그리고 일본군 200명[24]과 前 광주유수 박영효가 이끄는 군대와 그들 휘하의 별기군 50명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본래 우정국 연회 장소에서 처리하려다 실패한 친청파 요인인 한규직·이조연·윤태준이 입궐하자 차례대로 죽인다.[25] 이어서 입궐하던 왕실 척족 세력인 민영목·민태호·조영하를 죽였다.[26]
3.2.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
이튿날인 12월 5일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와 새 인사를 발표했다.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27]
1.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28]
1.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1.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1.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1. 규장각을 폐지한다.[29]
1.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1. 혜상공국을 혁파한다.[30]
1.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31]
1.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32]
1.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27]
1.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28]
1.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1.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1.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1. 규장각을 폐지한다.[29]
1.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1. 혜상공국을 혁파한다.[30]
1.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31]
1.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32]
1.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일부 교섭하여 영의정에 이재원, 병조판서에 이재완, 평안도관찰사에 이재순 등 종친을 임명[33]함과 동시에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의정부좌찬성 겸 우참찬에 임명했다.
그러나 핵심 요직은 급진 개화파였다. 우의정에 홍영식·형조판서에 윤웅렬·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좌포도대장에 박영효·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신기선(申箕善)·좌우 양영사 겸 우포도대장 및 서리 외무 독판에 서광범·외무 아문 참의에 윤치호, 승정원 도승지에는 박영교 등이 임명되었다.[34]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 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헌종의 계비 효정 왕후의 조카이며 동시에 홍영식의 집안사람인 홍순형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 밖에 온건 개화파로 정변에 반대하지 않던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을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김옥균은 호조 참판[35]이 되어 국가의 재정을 책임졌다. 급진 개화파들은 각국에게 신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신 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3.3. 삼일천하
그러나 개혁안을 공포도 하기 전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의 주역임을 눈치챈 명성황후가 위안스카이에게 청군의 파견을 요청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회궁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변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창덕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경우궁과 달리 창덕궁은 겨우 1~200명 남짓 되는 병력으로는 수비하기 너무 넓었다. 12월 6일 오후(2일차) 청군 1,500명이 창덕궁을[36] 공격해 들어왔다. 청군과 정변군·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조선군과 청군 상당수가 사망 또는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2명이 전사, 8명이 부상을 당했다. #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으로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고,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12월 7일 셋째날이 밝자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들어 일본공사관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12시가 되자 일본 공사관에서 불이 일었다.[37] 민중의 공격이 계속되자 오후 2시 30분에 일본 공사는 한성을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김옥균·박영효 등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일본군과 함께 인천으로 따라갔다. 퇴각하는 이들 일행은 조선 군인과 민중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9명과 일본 공사 일행은 12월 8일 새벽 인천의 일본 영사관에 도착했으며, 12월 10일 배에 올라 일본으로 떠났다.[38] 이때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유혁로(柳赫魯)·변수(邊燧)[39] 등 9명이었다. 남은 행동대원들은 대역죄로 처단되고 관련자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계에서 숙청을 당하면서 개화파 세력들은 위축되었으며, 개화정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자 적반하장으로 조선 정부에게 배상하라며 군함 7척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해서 한성조약을 체결한다. 더 나아가서는 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의 알력 다툼이 심해져 훗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4. 결과
갑신정변은 본질적으로 반역이었다. 급진 개화파가 이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후 개화 자체가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윤치호는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한성에서 개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고까지 표현했다.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즉 갑신정변 때문에 개화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이다. 이로 인해 개화 정책의 추진이 늦어지고 대대적인 개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가서야 그것도 불완전한 형태로 이뤄졌다.다행히 정변을 통한 전체적 개혁을 꾀한 이들 급진 개화파들 말고도 조선의 전반적 개혁을 추구한 온건 개화파도 통리기무아문을 중심으로 개화를 추진하기는 하였다. 김홍집 등을 필두로 하는 이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사이 10년 동안에도 전신, 전등 설치, 육영공원(근대적 교육 기관) 설치, 광혜원(1885년 제중원으로 개칭) 설치, 한성주보 발간 등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덧붙여 갑신정변의 실패로 천연두의 퇴치도 늦춰지게 되었는데, 국내에 최초로 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도피했다. 기사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사 편수회와[40] 언론들은 글, 소설 등을 출간하며 김옥균 등 이들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는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들을 높이 띄우고, 이들을 반대했던 민중은 무지하다고 평가하며, 갑신정변의 실패로 근대화하지 못했기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다.
또한 조선군의 근대식 편제가 늦어지는 이유가 되었는데, 후에 위관급, 영관급을 책임져야하는 생도들이 정변에 참가하여 숙청당해 1890년도까지 제대로 된 편제가 만들어지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5. 정변 이후
조선의 정변을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화되며 일본과는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정변 이후 청은 정변에 대한 정보 획득이 늦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이홍장은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위하여 육상 전신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종도 이에 동의하여 1885년 5월 전신선의 가설에 청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1885년 9월에는 인천과 한성을 잇는 전신선을 가설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평양에 전보분국을 설치했다. 또한, 11월 말에는 의주로 이어지는 전신선을 가설했다. 청과 조선에 주재하던 위안스카이는 1894년 청일전쟁까지 전신선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의지를 보다 쉽게 관철할 수 있었다.
정변 과정에서 대립하던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청•일 양군은 철수하고, 이후 조선에 파병할 때는 상대국에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 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는데,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옥균( 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 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 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 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었다.
5.1.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의 말로
- 홍영식: 고종의 "경들은 날 놔두고 어딜 가는가?"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위안스카이와도 안면이 있었고, 벼슬도 꽤 높은 사람이라서 "죽이진 않겠지" 했던 것 같지만 오조유가 이끈 청군이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과정에서 조선군에게 살해당했다. 덤으로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이었음에도 그 일로 자결한다.
-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하여 10여 년을 방랑하며 지낸다. 내내 고종이 보낸 자객을 잘 피해다니다, 상하이에서 결국 자객 홍종우에게 리볼버로 살해당한다. 이후 시신은 보존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고, 이후 그의 시신은 오체분시를 당하고 머리는 한성에 효수되며 시신은 전국 팔도를 유람한다. 참고로 양부 김병기는 갑신정변 이후 6~7년간 옥살이 하다가 죽었고, 생부와 동생도 옥사했으며,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결했으며,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다.
- 박영효: 이후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갑오개혁 중 2차 김홍집 내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의도로 귀국. 복권되어 정부에서 일하다가 고종을 몰아내려는 반란 음모를 꾸미던 중 발각되어 다시 일본으로 탈출한다. 이후 고종이 싫어하는 인물 순위권에 꼽히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서 독립 협회에서도 박정양, 윤치호와 더불어 세력이 강했고 '박영효 대통령 음모설'까진 나왔다. 독립협회 주도로 개설된 중추원의 첫 의제였던 대신 추천에서도 한 자리했다.[41] 경술국치 후에는 후작 작위[42]를 받는 등 부유한 친일파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홍영식과 함께 참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도 열 살 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 서재필: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일가와 집안이 전부 몰락하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나중에 독립협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미국인 필립 제이슨 (Philip Jaisohn)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인 교포들을 위한 지원도 자주 했다.
- 서광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미국에 호의를 갖게 되어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조선인 최초로 학위를 획득한 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연방 하급 관료로 일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잠시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서 사법 개혁을 맡았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주미 공사로 파견되었지만[43]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파직되었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 변수: 2000년대 와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영어를 공부하고 1887년 메릴랜드 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한국 역사상 첫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44] 만 30세인 1891년 6월에 대학교를 졸업하지만 4달만이 10월 22일에 열차사고로 사망하고 미국에 그의 무덤이 지어졌다. 오랫동안 무덤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3년에서야 행적이 드러나 비석도 새롭게 세워졌다.
6. 갑신정변 참여자들이 밝힌 실패 이유
6.1.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평가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어리석어
원세개에게 당했다.'
요약하면, 내가 주도자인데 원세개에게 속았으니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즉, 갑신정변의 몸통은 자신이란 이야기다.6.2. 박영효의 평가
'(김)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 동경에서
윤치호를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6.3. 서재필의 평가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뒤 재지 않고 반대만 내세운 일반 민중의 무지몰락 때문이었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한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
6.4. 윤웅렬과 윤치호의 분석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다. 원래 윤웅렬은 군대를 동원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일이 틀어지는 것 같자 발을 뺐다.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윤웅렬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아 자신이 엮이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그 윤웅렬의 말을 윤치호 일기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1.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 제2.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 제3. 인심이 불복(不服)하여 변(變)이 안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 제4. 청군이 곁에 앉아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병대(兵隊)를 몰아 들어갈 것이다.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사소한 일본병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 제5, 설상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 이는 국왕과 왕비전(王妃殿)의 의향을 위배한 것이다. 군부모(君父母)의 뜻을 거스르고 능히 그 위세(位勢)를 지킬 수 있겠는가? 실패할 다섯째 이유이다.
- 제6. 만약,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의 당(黨)이 많아서 조정을 채울 수 있다면 혹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두 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인(淸人)이 있고, 안으로 군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붕당(朋黨)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성(順成)함을 꾀할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또 우리 부자(父子)를 끌어 들여 같은 무리로 삼으려 하니 두렵다. 그러나 이에 좇으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되면 망하게 되니 가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삼전(三殿:
임금,
왕비,
세자) 성위(聖位)께서는 바야흐로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어 혼자 힘으로라도 난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김씨(김옥균)의 당(黨)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형조판서에 제수된 원인이다. 그런 즉 지금의 형세로는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여 해치려고 하니 어찌 두렵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우선 이리로 도망쳐 와서 다시 뒷일을 의논하려는 것이다.[46]
윤치호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국민 가운데 한 사람도 독립당의 사업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외다. 첫째로 임금님 몸에 손을 대이어 억지로 정사를 변혁하였다는 것. 둘째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것으로 크게 오해를 사서 아주 역적으로 몰렸던 것입니다.'
참고로 갑신정변에 대한 윤치호의 의견은 굉장히 부정적이며, 훗날 조선의 독립에 냉소 및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아아. 김옥균 무리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위로 나라 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했으며, 공적으로는 개화 등의 일을 완전히 탕패(蕩敗)시켰고, 사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가족을 몽땅 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 생각을 잘못해 모든 일이 실패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냐!
< 윤치호 일기> 중에서.
< 윤치호 일기> 중에서.
사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이 부자의 이야기만으로도 대부분 다 나오고 있고, 실제로 현재의 연구도 저것과 별 차이가 없다.
7. 평가
7.1. 긍정적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이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미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 모험인데 단지 입지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변일당의 권력욕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당장에 오늘날 갑신정변을 비판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들이 내세운 14개조 정강 항목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개혁의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일본을 모델로 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순 없다. 온건개화파가 모델로 삼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청나라는 양무운동이 청일전쟁과 의화단 운동의 패배로 결국 조국 독립을 유지 못함으로써 무능이 드러난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온건개혁의 한계를 느끼고 일본 권력구조의 근간인 봉건제와 신분제 폐지를 과감하게 이루었고 결국 부강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보았을 때 일본을 모델로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유교의 전제정적 신분구조를 유지하면서 자력갱생을 시도해보아야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서구식으로 국민교육 보급과 1차산업 위주 구조에서 탈피를 시도하도록 개혁을 하면, 결국 양반의 경제적 권력근간인 대지주로서 권위가 약화되고 양반의 권력은 약화되게 된다. 그래서 갑오개혁 때까지 끝끝내 토지개혁은 양보하지 않았음에서 기득권이 중요시 여긴 대상을 알 수 있다.[47]
일본을 끌어들인 것 역시 불가피한 사정에 가깝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후 청에 의해 군사,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상태였다. 특히 군사적으로 청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주둔하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으며 이를 비판한 한성순보를 청이 문제 삼은 사건도 있었다.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해도 청나라의 개입을 막을 역량이 없었고, 이런 점에서도 일본을 끌어들인 건 불가피한 사항이었다.
갑신정변은 반역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평가 절하될 이유는 없다. 왕에게 적대한 것으로만 치면 프랑스 혁명도 반역이다. 단지 반역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시기 설정이 서툴렀다는 데에 비판의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7.2. 부정적
기본적으로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려는 면이 보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을 거의 담지 못한 실패한 정변의 본보기이다.가장 큰 문제는 자체적인 군사력이 없어서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였다는 것. 한마디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갈아치우면 일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정변의 성공을 위해서는 충분한 무력과 그 무력을 사용하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사실 쿠데타는 비밀 엄수가 최우선이기에 직접 행동에 나서는 병력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당장 코앞에 있는 비무장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은 스스로 지녀야 함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유사시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라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48] 쿠데타는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정권을 얻으려는 주동자들이라면 모를까 타국군은 수 틀리면 도망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국가 방어도 아니고 남의 나라 쿠데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군인 따위는 없는 게 당연하다. 모티브가 된 메이지 유신은 주축 세력인 삿초 동맹이 오랜 봉건제의 영향으로 중앙 에도 막부와는 독립된 자체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49] 막대한 차이가 있었다.
외세를 끌어온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서로 다른 외세 사이의 힘의 격차 정도는 인식하고 있어야 했다. 당시 조선은 청국군이 주둔해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청나라는 당연히 개입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즉, 청국군 전체는 아니어도 주둔군을 압도하거나 혹은 주둔군의 개입을 무마할 뒷공작 정도는 있어야 했다. 이 점은 조선시대의 여러 반정보다 갑신정변의 난이도가 높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구한말 이전 조선은 사대를 했을지언정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일단 정권은 소규모 병력으로 쉽게 엎을 수 있었고 정통성만 확보한다면 중국으로부터의 승인은 나중에 받아도 무방했다. 그런데 당시 갑신정변 세력의 무력이 되어줄 소규모의 일본 공사관 수비대는 청국의 조선 주둔군과 맞서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고, 일본 공사는 10년 전 오쿠보 도시미치가 보여준 것처럼 청군에 대항할 의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지 세력을 확고히 확보하지 못한 것도 문제이다. 위에서 보듯 물리적 힘으로 반대파를 압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국내 정치 세력만이라도 잘 확보해야 했는데, 조선 국왕 고종에 대한 설득도 (사실상 속인 것이나 다름없어) 불충분했다. 하다못해 한성 내의 유력층, 일반 민중들을 끌어왔다면 상황이 불리해졌어도 3일보다는 더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계급에 기반한 혁명이라는 역사적 의의라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50][51]
다만 민중의 지지는 애초에 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민중들은 왕을 따르고 보위하는 근왕 이념이 강했기에 왕이 이들을 역적으로 선포한 이상 민중도 이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52] 광복 후에도 왕실을 지지하던 백성이 적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때는 근왕의식이 더욱 강했다. 더불어 양반 권력의 근간인 토지 제도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이전 개혁의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중들은 14개조 정강의 내용에 공감하거나 개혁의 진정성이 있다는 인상을 받기 힘들었을 것. 더불어 외세를 몰아낸다는 이유로 또 다른 외세를 끌고 오는, 심지어 그나마 전통적 중화의 이미지라도 있는 청을 내몰고 오랑캐 취급을 했던 일본을 들이는 모습에 민중들이 거부감을 느꼈음은 자명하다.
갑신정변을 옹호하는 입장은 3가지가 있다.
- 갑신정변의 내용이 일부 갑오개혁에 이어진다.
- 보수파를 제거한 공로가 있다.
- 어차피 조정이 막장이었으니까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우선 갑오개혁 자체는 김홍집을 비롯한 온건 개화파에 뿌리를 둔 갑오파의 조선 관료들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그 시작을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시작해 외세의 개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갑오개혁에는 항상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 외세가 갑신정변 당시 손잡았던 그 일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비슷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그 비슷하다는 부분은 근대국가에서 일반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여기서 오해하는 부분이 갑오개혁을 급진 개화파에 뿌리를 둔 갑신정변 세력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는 온건 개화파 출신인 김홍집과 관료들이 한 것이다. 먼저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급진 개화파와 김홍집의 온건 개화파는 정작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 덕분에 조정에 다시 참여하기는 했지만 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온건 개화파의 권력을 빼앗기위해 쿠데타 같은 비열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만 하였다. 실제로 급진 개화파 박영효는 또다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망쳤다. 급진 개화파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적도 없었다. 갑오개혁은 오로지 온건 개화파 출신인 김홍집과 그를 따르는 관료들이 이뤄낸 성과였다.
두 번째는 수구파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진정한 수구파라고 볼 수 있는 위정척사파들은 이미 임오군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몰락했기에 당시 조정에는 개화파들이 주류였다. 애시당초 수구파는 거의 없었고 나머지는 비주류로 전락해서 제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김옥균 일당이 개혁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파(온건 개화파)를 수구파라는 억지논리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민씨 세력은 외척이니 죽이고, 개화 반대파는 반대파니까 죽이고자 했고 일부 온건 개화파들도 죽이고자 했다. 상단에 기록된 윤웅렬의 이야기 가운데,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라고 했는데, 이 신하들이 바로 온건 개화파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시영, 이상재, 민영익 등은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에도 참여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들의 상당수를 제거하고 자기들도 제거되면서 조정 내의 개화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더구나 죽은 사람만 봐도 윤태준[53], 한규직[54], 이조연[55] 등 영선사 출신으로 새로운 군제 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민씨 중에서 개화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인 민영목[56], 민태호[57], 민영익, 민응식[58]의 소위 4민 중에서 민영목과 민태호는 죽었고, 민영익은 부상당하면서 이들이 극렬 급진 개화파 배제론자가 되게 만들었고, 이외에도 조영하[59] 등도 같이 죽었는데 이들 주요 인물들 중에서 개혁에 근본적으로 방해가 되었을 인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갑신정변의 배경은 우정국 창립 축하 연회였고, 여기에 참석하려고 했던 이들이나 수호를 맡았던 이들이 죽은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윤치호의 언급처럼 갑신정변 실패 후 민심에 이반이 생겨 10년간 개화의 ㄱ자도 못 꺼내는 10년간의 후퇴가 일어난 최악의 형태로 실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은 조정이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가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문제가 있다. 갑신정변의 트리거로 꼽히는 3가지로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오지 못한 것, 민영익이 온건 개화파로 선회한 것, 박영효가 이끌던 군대가 친군영에 흡수된 것 등을 꼽는데 이것은 모두 개화의 좌절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 감소일 뿐이다. 급진 개화파는 개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탐관오리가 있다거나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 아니라[60], 친일이 아니라 친청이고[61], 자신들이 아니라 온건 개화파 주도로 정국이 운영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절대 다수의 급진 개화파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고, 그 개화를 자신들이 하려고 노력했다. 즉, 개화에 대한 제한적 지식과 외부와의 연줄에 의거해서 자신의 권력욕과 의지를 추구했다. 급진 개화파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김홍집 정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몇 안되는 예외이고, 일제 시대에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키우기 시작한다. 사해당파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지만, 정작 관직 분배를 한 것은 온건 개화파가 아니라 종친 우대라는 명목으로 대원군 계파에게 분배한 것이다. 대원군계가 개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일이다.
만일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외세를 최초로 조직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급진 개화파이고, 그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면 그 성공 가능성과 이후 상황을 모두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급진 개화파가 보여준 시각은 독립 협회 시기까지 미뤄보아도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62] 그걸 위해서 너무나도 큰 도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최악급으로 나왔다. '미국의 독립 전쟁처럼 일단 일본의 지원을 받고 나중에 힘을 길러서 일본으로부터 자립해 나갔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면 지나친 가정이기에 언급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이런 소리 하던 사람들[63]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고려할 대상이 못된다. 만의 하나 일본군이 청국군에게 승리해 정변이 오래 지속됐다 하더라도 남의 땅에서 죽어준 데에 대한 대가를 일본 측에서 당연히 요구할 수밖에 없을 텐데 정변 주동자들이 이를 무마할 만한 외교적 대책이 있었는지도 알기 어렵다.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롤모델로 삼았다고는 했는데, 민씨척족들이나 온건 개화파들을 회유를 통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보다 정변을 일으켜서 무자비하게 제거하려는 방식을 생각해 보았을때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웅번들 중 가장 과격한 조슈 번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조슈 번도 금문의 변때 교토 황궁을 대포로 포격하고 고메이 천황을 납치하려고 시도해서 조적(朝賊)으로 낙인찍혔는데 다른 웅번들( 사쓰마 번, 토사 번)의 도움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다. 즉 다른 웅번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조슈 번도 급진 개화파처럼 패망할 운명이었다. 조슈 번한테 나름 천운이 따라준 것이다. 급진 개화파는 한마디로 천운이 따라주지 않은 언럭키 조슈 번이었던 것. 차라리 롤모델로 조슈 번이 아니라 다른 번들을 포용한 공의정체론을 주장한 토사 번 노선으로 선택했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싹 제거된 덕분에 일본이 세력 확장을 꾀했을 때 기존의 친일파들이 배제되어서 외부의 친일파들을 파견하거나(박영효), 그나마 협상 가능한 온건 개화파들을 끌어들이는(김홍집, 박정양)[64] 우회적인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후 일본의 침투는 조정과 고종에게 대단한 경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변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청의 반발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데, 애초에 일본군은 제대로 교전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후퇴했을 뿐이다.
이 음모에 한몫 거든 일본 입장에서 평가하더라도 갑신정변은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은 그나마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순수하게 호의를 가지고 문명 개화의 파트너로서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일본통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고, 조선 왕실에서도 정변을 후원한 일본 정부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철저하게 축출당하고 청의 영향력은 극적으로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상황은 10년 뒤에 청일전쟁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에 큰 역할을 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 정계를 떠나야 했다. 남의 나라에서 쿠데타를 주도한 데다가 실패해서 일본의 국익에 큰 해를 끼쳤으니 외교관으로서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갑신정변을 고종과 민씨 세력이 이끄는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외환죄에 해당한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끌어들인 영선사 일행을 꼽을 수 있는데, 임오군란은 내부 반란에 대해서 기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 군세를 끌어들여서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외국과 내통하여 해당 정부에 대항한다'는 외환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이후 청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당시 조선 왕실을 포함한 세력들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으며 수긍했다.
반면, 갑신정변은?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 탈취를 기도했다. 이들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급박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빌려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외환 유치죄에 해당한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온건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해서 개화가 늦어질 수도 있다 같은 것은 외환죄에 대한 범죄 조각 사유가 될 수 없다. 이들과 비교될 만한 조선시대 인물이라면 황사영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나중에 벌어진 을미사변에도 갑신정변에서 행동대원으로 참여했던 유혁로, 정난교가 명성황후 시해하는데 가담했다. 이정도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조선왕가 입장에서는 반역을 밥먹듯이 해대는 무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에서 급진 개화파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개화에 협조직이었던 친청파 인사들을 대부분 숙청한 것이 큰 문제이다. 광무개혁이 큰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갑신정변에서 숙청당한 온건개화파들이 있었다면 광무개혁 당시의 문제점인 재정 부족, 인재 부족, 일제 침략의 세 문제점 중 하나가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온건개화파들이 있었다면 광무개혁이 더욱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일제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재가 부족해서 이완용같은 자에게 주목할 정도였으니 이때 온건 개화파가 숙청당한 것이 결국 일제 침탈의 원인이 된 셈이다.
8. 대중매체에서
KBS 명성황후 85회[65]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에선 빠질 없는 소재인데, 단독 작품으론 1973년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 삼일천하>가 있으며 제작은 안양영화가 맡았다. 같은 해 극단 '실험극장'이 오영진 작가의 연극 작품 <동천홍>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 바 있으며, 연출은 나영세가 맡았다. 이 작품은 1976년 동대극예술연구회, 2004년 실험극장이 각각 다시 공연했고, 1981년 1월 8일자 KBS2 <TV문학관> '횃불'로 영상화된 바 있고 극본은 정하연, 연출은 정병식 PD가 맡았다.
이후 1981년 KBS2 일요사극 <매천야록> 12회와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 풍운> 43~45회, 1990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28~29회, 1996년 KBS 대하드라마 < 찬란한 여명> 85~86회, 2001년작 KBS 특별기획 드라마 < 명성황후> 85회 등지에서 다뤄졌는데, 특히 <명성황후>에선 갑신정변 자체가 고종과 급진 개화파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식으로 그려졌다.
원세개와 청국의 무례한 태도에 질려버린 고종이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들에게 전권을 넘겨주고 개혁을 시행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하지만 정변 도중 급진 개화파들이 민태호와 조영하 등을 고종의 허락도 없이 살해함으로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이후 경기감사 심상훈의 밀서[66]를 전달받은 명성왕후가 고종을 설득해 창덕궁으로 환궁하고 곧바로 이어진 청군의 공격으로 정변은 실패한다.
9. 여담
당시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 청프전쟁 상황에 따라 계획되었던 일본 자유당 민병대의 추가 지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거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어도)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처벌 과정에서 연좌제를 보고 조선을 야만스럽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급진 개화파의 가족들까지 몰살하고[67] 홍종우에게 암살된 김옥균의 시체를 사지절단하여 조선팔도에 전시하고 양화도에 그의 목을 효수하자, 조선을 야만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탈아론을 발표하며 조선 정벌 등 제국주의 사상을 내세운다.덧붙여, 일본 내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등 민간 친 급진 개화파 인사는 조선 정부의 형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사형 자체가 아니라 사형 방식의 잔혹함과 정변에 관련이 없는 가족들에게까지 벌을 내린 전근대성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의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조선 독립당의 처형'이라는 사설의 내용을 보면, 그도 주모자의 처형은 어쩔 수 없지만 죄가 없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 처 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한 것에 대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 행위라 비판하였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타락한 인물이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은 1885년 3월에 그는 탈아론을 기고한다. 그리고 김옥균은 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고 일본은 그를 조선 정부에 추방하지 않고 보호국을 담당했는데, 김옥균이 청으로 간 틈에 암살 당하자 외교적 마찰로 이어졌고, 조선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의외일 수 있으나 북한에서는 1950년대 학계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봉건 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단, 이는 카를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사적 유물론)에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혁명 이후 무산 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역사의 순서가 있다는 원칙이 있다보니 부르주아 혁명 위치에 갑신정변을 억지로 넣어서 끼워맞춘 것뿐이다. 실제 갑신정변 주체는 서양 사회의 주축이었던 부르주아에 비하면 한줌에 지나지 않는 미소한 세력이었던 데다가, 부르주아에 대응될 수 있는 조선의 상공업자 계층과 딱히 관련이 깊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혁명을 이루지도 못한채 실패하기도 했고.[68][69]
2024년 12월 3일에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발발했다가 갑신정변으로부터 정확히 140년 뒤인 다음날 새벽 국회로부터 계엄 해제 요청을 받아들여 계엄이 해제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삼일 천하'에 빗대 '3시간 천하'로 묘사하였다. #
[1]
위 전개도에서 보듯 음력으로는 10월 17~24일이다. 아울러 1884년은
갑신년이기에 '갑신정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조선에서 양력을 도입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10년 뒤인
갑오개혁(1894년) 시기이다.
[2]
신해혁명 이전이기에 한국 한자음으로 표기한다. 중국명은 위안스카이
[3]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서 청과 일본을 오갔다. 친군후영사.
[4]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 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 개편 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 개화파의 한 가지 불만이었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5]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
[6]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 통상 수호 조약을 포함한 외교 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오경석, 박규수 등의 인물도 함께 했다. 사망시에는 해상 방어 사령관인 해방 총관이었다.
[7]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
[8]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 대원군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 대비와 대원군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 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 수호 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 신정 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 관계인 인물.
[9]
친 명성황후 세력으로 어느정도 개화 성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개화파로는 분류되지 않는 이들.
위정척사파와는 엄연히 다르다.
[10]
권세가인 남양 홍씨, 아버지는 영의정 홍순목, 본인은 종2품 병조 참판. 신사 유람단(조사 시찰단)의 일원이기도 하였으며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도 건너갔었던 인물이다. 우정국 사건도 사실 이사람 없었으면 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우정국 총판이었다.(이것은 조선시대 병조에서 군사와 우편업무까지 담당했기 때문이다.)
[11]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개화당, 반대파는 완고당이라 불렀는데 이 시기 왕후의 영향력 자체가 의심스러운 데다, 온건 개화파를 통으로 수구당에 묶어서 민씨 세력으로 넣는 이 논리는 나중에 일제가 아주 잘 써먹었다.
[12]
일본은 개화당을 꼬드겨 조선에의 영향력을 높이려 했고, 개화당도 이를 알고 반은 이용, 반은 경계하고 있었다.
[13]
영선사로 파견되어 청에 머무르고 있었던
김윤식과
어윤중이다.
[14]
그런데 이 고문들 중에서 묄렌도르프 같은 비청국 출신 고문들은 오히려 조선을 편들었다. 돈만 제대로 주면 누구나 도와주는 것이 당시 고문들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고문들도 외국에서는 조선 먹으라고 하더니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막으라고 하였다.
[15]
청불전쟁 당시 청나라의 군대는 직예에서 이홍장의 북양군과 장지동 등 강남지역 독무들이 양성한 남양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런데 청불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프랑스와 싸운 청나라군은 양광지역의 남양군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프랑스군과 맞붙고 있다 하더라도 북양군과 강남지역의 남양군들은 멀쩡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군은 북양군 출신이기에 이동할 이유가 별다르게 없었음에도 급진개화파들은 이들이 빠져서 조선에 신경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16]
가슴팍에 저렇게 손을 넣는 포즈는
나폴레옹이 한 것으로 유명한데, 나폴레옹뿐 아니라 '숨겨진 손'이라 하여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상류층, 근엄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흔히
나폴레옹이 배가 아파 문지르고 있던 포즈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원문]
是夜, 郵政局設落成宴, 總辦洪英植主之。 宴將終, 見牆外火起。 時閔泳翊, 以區右營使, 亦與會, 爲救火, 先起出門外。 有何許凶徒數名, 揮劍迎擊, 泳翊被刺還仆堂上。 座皆驚散, 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自座中起走, 入闕內, 直至寢殿, 急奏有變, 請亟移御避之。 上離次景祐宮, 各殿、宮, 亦蒼皇步從。 玉均等, 以上命求日本公使來援, 夜深, 日本公使竹添進一郞率兵來護衛。 [18] 실록의 특성상 (적을 땐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었을 수 있을지언정) 정변이 다 수습된 다음에 정리되고 남은 기록이겠지만 '여러 명의 흉도들', (주동자들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다' 등 자작극임을 파악하지 못한 입장에서 기사가 작성되어있다. [19] 궐의 고씨 성을 가진 궁녀를 포섭해 폭약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궁녀는 7척 장신에 웬만한 남자 뺨치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수호전의 등장 인물인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붙잡혀 조리돌림당한 끝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20] 전영사, 후영사, 좌영사, 우영사 [21] 그중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22] 보빙사 정사로 미국에 방문하여 프린스 민이라 불리고 대접받았다. 고종의 조카이자 명성왕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임오군란 이후 민씨 척족들이 원세개에 빌붙어 친청파로 기울었기에 결국 친족들의 대세를 따라 급진 개화파와 대적한다. 그리고 이때 민영익의 친부 민태호는 목숨을 건진 아들과 달리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23]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6-2.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지금은 없어졌고 터만 남아있다. [24] 이때 고종이 '日使來衛'라는 쪽지를 써서 일본 공사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어필이 위조일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사건 당시 고종은 일본 공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25] 이들을 죽인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중앙군은 4영(좌/우/전/후영)으로 개편되었는데, 피습된 민영익은 우영사였고, 한규직은 전영사, 이조연은 좌영사, 윤태준은 후영사였다. 즉, 이들이 당시 중앙군 지휘관이었으며, 이들을 관리 감독할 위치였던 병조판서 민영묵도 난군의 총에 맞아서 사망했다. [26] 이때 김옥균 등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와서 국왕과 왕후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가운데, 뭔가 눈치챈 왕후가 "이것이 청군의 소행인가, 아님 일본의 소행인가?"라고 날카롭게 묻자 김옥균은 "청군..."이라고 얼버무렸다. [27] 한마디로 신분제 폐지. [28] 토지 제도 개혁이 아닌 조세 제도 개혁이다. [29] 규장각이 세도정치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30] 전근대적인 특정 상인의 특권 폐지. [31] 4영은 임오군란 이후 재편된 중앙군으로 민씨 척족과 청나라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에 개화당은 이들을 자신들의 군사 기반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32] 재정의 일원화. [33] 대부분의 종친들은 고종파와 흥선대원군파로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34] 윤웅렬과 아들 윤치호는 개화당 사람으로 정변 이전까지는 준비에 동참하였으나, 정변 당시에는 발을 빼고 있었다.(정변은 사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으면서 군대를 육성하고, 함경남병사 윤웅렬의 군대를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반대파가 박영효를 사직시키고, 윤웅렬의 군대 남하를 막았다. 이에 윤웅렬은 개화당의 군사부족을 깨닫고 사실상 나 몰라라 했다.) 신기선은 정변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한 바가 없기에 정변 이후 유배만 갔다. [35] 참고로 호조판서를 공석으로 두었다. 고로 김옥균이 호조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 [36] 청군 외에도 4영의 조선군 일부도 함께 하였다. [37]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38] 이때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 숨어있었는데 고종의 명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온 묄렌도르프가 그 배의 선장에게 반역자가 숨어있으니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했으나, 선장이 '내 배에 탄 사람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의지로 없다고 거짓말하고 허공에 총을 한발 쏘면서 그들을 넘기지 않은 채 제물포를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게 사실은 훗날 김옥균을 찬양하는 일제강점기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지어 공신력 있는 역사 만화들에도 버젓히 나오지만 사실은 야사라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공사는 하나부사도 아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였다. 게다가 일본 선장 한 사람이 권총 들었다고 그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건 그야말로 넌센스다. [39] 이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로 유학을 가 한국인 최초의 학사학위자가 된다. 메릴랜드대 기숙사 건물 중 하나에 그 이름이 헌정되었다. [40] 박영효가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41] 그런데 대신 추천 자체가 중추원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월권이고, 추천된 인물이 죄다 박영효, 서재필 등 고종에게 찍힌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추원 해산 → 독립 협회 강제 해산의 순서를 밟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덤으로 관료 추천은 필적 감정까지 해서 누가 누굴 추천했는지 모조리 색출했다고. [42] 일본이 처음 조선귀족으로 서임한 후작은 단 6명이었는데, 이들 중 4명은 왕족, 나머지 둘은 왕실의 인척인데 박영효는 철종의 고명딸 영혜옹주와 결혼한 부마였고,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인 국구였다. 그 유명한 이완용도 처음에는 백작으로 서임되었다가 나중에야 후작으로 승작되었다. [43] 당시 서광범은 이중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인이 주미조선 대사로 파견된 셈이다. [44] 한국 최초 미국 유학생은 1884년 거버너 담마 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입학한 유길준이고, 대학입학은 변수의 동문인 민주호와 함께했다. [45] 일제 강점기인 동광에서 이광수와 인터뷰한 것을 다시 1934년 동아일보가 인용한 기록이다. [46] 사실 이 단락은 윤웅렬이 자신이 발을 뺀 것을 싹 제외하고 변명하고 있는 대목이므로 실패의 배경만을 언급할 때는 잘 인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실패 확률이 높다고 봐서 발을 제대로 빼려고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한다. [47] 단, 갑신정변도 토지 개혁에 큰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48] 군대가 내부 사조직을 경계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핵심 인사들을 연결하는 사조직이 있으면 소수 인물로도 지휘 계통을 뒤집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주축이 된 하나회는 전체 군대 규모에 비하자면 한줌에 불과했지만 결국에 정권 쟁탈에 성공했다. [49] 또한 불만 세력을 대체로 외곽에 떨어뜨려놓는 도자마 다이묘 정책으로 인해 사쓰마, 조슈 등 외곽 번들은 애초에 중앙에 대한 충성도가 썩 높지도 않았다. [50] 즉, 북한에서 사회발전론에 의해 끼워맞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갑신정변의 의의가 조금이나마 실체화될 수 있었다. 실제로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당시에 비해서는 조금 더 발전하여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런데 그나마 독립협회가 포섭한 백성은 자기들 영향력 범위에 닿는 도성 한정이었고, 더구나 그 '지지'란 것도 근본적으로 '근왕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51] 다만 의의와는 별개로 정변 성공률이 크게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당시 조선의 상공업 계층이란 것이 그리 거대한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52] 임오군란만은 예외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임오군란의 경우에는 민중들도 당시 군란 수뇌부라 볼 수 있는 구식군인들한테 나름 호응을 해줬기 때문이다. 다만 임오군란도 목표는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원성의 대상이던 민겸호를 비롯한 척족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고, 국왕은 제거대상이 아니었다. 근왕의식이 강한 민중들이 군란에 참여한 것은 군인들을 등쳐먹은 민겸호 같은 간신배는 국왕을 위해서 제거하는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호응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3]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 청과 일본올 오갔다. 친군후영사. [54]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 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 개편 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 개화파의 한 가지 불만이었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55]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 [56] 오경석, 박규수와 함께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 통상 수호 조약을 포함한 외교 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망시에는 해상 방어 사령관인 해방 총관이었다. [57]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 [58] 갑신정변 당시 유일하게 칼을 맞지 않은 인물답게 개화 쪽 역할은 적다. 방곡령 당시 일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노력한 인물. [59] 신정 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 관계이다.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 대원군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 대비와 대원군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 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 수호 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 [60] 민씨 척족에 대한 문제점을 적어두었는데, 정작 민영익이 이탈하기 전까지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의 집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61]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민씨 세력의 상당수는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면서 청과 연줄이 생겨서 청에서 진행하던 양무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온건 개화파가 되었고, 보다 세력이 작고 젊었던 이들은 수신사나 보빙사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결과 일본과 미국에 연줄이 생겼고 당시 일본에서 진행하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 개화파가 되었다. 단적으로 민영익이 급진 개화파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정사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차이와 의식는 없었다. [62] 주동자들은 직접 칼을 들고 반대파들을 척살할 만큼 개인적인 무예는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여자를 괴롭히던 불량배를 때려눕히고 그 여성과 결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문무양도인 것과는 별개로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웠다는게 문제였다. [63] 여기에는 갑신정변 때 안 죽은 박영효 등이 포함된다. [64] 이 둘은 모두 조사 시찰단 파견 경력이 있다. [65] KBS 홈페이지 제공. 모든 회차를 다시보기할 수 있다. [66] 밀서의 내용은 '개화파들의 진짜 목적은 명성왕후를 폐위시키고 대원군을 청국에서 데려와 섭정으로 앉히는 것이다. 고종을 설득해 창덕궁으로 환궁하면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개화파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다.' [67] 박영효와 홍영식 같은 경우는 집안이 매우 좋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이 고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가문의 영향이 컸다. [68] 이후 등장하는 독립협회나 황국협회에서는 상인들의 지원 등이 나타나곤 한다. 다만 이들 세력도 '부르주아'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어쨌든 간에 갑신정변 세력보다는 상인 계층과 연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69] 이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철저히 입각하면 그럼 한반도에 자본주의 혁명이 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일어났느냐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 배경에서 나온 게 우리 민족이 아닌 일본이 식민통치를 통해 근대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해주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여전히 근대사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是夜, 郵政局設落成宴, 總辦洪英植主之。 宴將終, 見牆外火起。 時閔泳翊, 以區右營使, 亦與會, 爲救火, 先起出門外。 有何許凶徒數名, 揮劍迎擊, 泳翊被刺還仆堂上。 座皆驚散, 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自座中起走, 入闕內, 直至寢殿, 急奏有變, 請亟移御避之。 上離次景祐宮, 各殿、宮, 亦蒼皇步從。 玉均等, 以上命求日本公使來援, 夜深, 日本公使竹添進一郞率兵來護衛。 [18] 실록의 특성상 (적을 땐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었을 수 있을지언정) 정변이 다 수습된 다음에 정리되고 남은 기록이겠지만 '여러 명의 흉도들', (주동자들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다' 등 자작극임을 파악하지 못한 입장에서 기사가 작성되어있다. [19] 궐의 고씨 성을 가진 궁녀를 포섭해 폭약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궁녀는 7척 장신에 웬만한 남자 뺨치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수호전의 등장 인물인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붙잡혀 조리돌림당한 끝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20] 전영사, 후영사, 좌영사, 우영사 [21] 그중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22] 보빙사 정사로 미국에 방문하여 프린스 민이라 불리고 대접받았다. 고종의 조카이자 명성왕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임오군란 이후 민씨 척족들이 원세개에 빌붙어 친청파로 기울었기에 결국 친족들의 대세를 따라 급진 개화파와 대적한다. 그리고 이때 민영익의 친부 민태호는 목숨을 건진 아들과 달리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23]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6-2.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지금은 없어졌고 터만 남아있다. [24] 이때 고종이 '日使來衛'라는 쪽지를 써서 일본 공사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어필이 위조일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사건 당시 고종은 일본 공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25] 이들을 죽인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중앙군은 4영(좌/우/전/후영)으로 개편되었는데, 피습된 민영익은 우영사였고, 한규직은 전영사, 이조연은 좌영사, 윤태준은 후영사였다. 즉, 이들이 당시 중앙군 지휘관이었으며, 이들을 관리 감독할 위치였던 병조판서 민영묵도 난군의 총에 맞아서 사망했다. [26] 이때 김옥균 등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와서 국왕과 왕후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가운데, 뭔가 눈치챈 왕후가 "이것이 청군의 소행인가, 아님 일본의 소행인가?"라고 날카롭게 묻자 김옥균은 "청군..."이라고 얼버무렸다. [27] 한마디로 신분제 폐지. [28] 토지 제도 개혁이 아닌 조세 제도 개혁이다. [29] 규장각이 세도정치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30] 전근대적인 특정 상인의 특권 폐지. [31] 4영은 임오군란 이후 재편된 중앙군으로 민씨 척족과 청나라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에 개화당은 이들을 자신들의 군사 기반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32] 재정의 일원화. [33] 대부분의 종친들은 고종파와 흥선대원군파로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34] 윤웅렬과 아들 윤치호는 개화당 사람으로 정변 이전까지는 준비에 동참하였으나, 정변 당시에는 발을 빼고 있었다.(정변은 사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으면서 군대를 육성하고, 함경남병사 윤웅렬의 군대를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반대파가 박영효를 사직시키고, 윤웅렬의 군대 남하를 막았다. 이에 윤웅렬은 개화당의 군사부족을 깨닫고 사실상 나 몰라라 했다.) 신기선은 정변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한 바가 없기에 정변 이후 유배만 갔다. [35] 참고로 호조판서를 공석으로 두었다. 고로 김옥균이 호조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 [36] 청군 외에도 4영의 조선군 일부도 함께 하였다. [37]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38] 이때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 숨어있었는데 고종의 명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온 묄렌도르프가 그 배의 선장에게 반역자가 숨어있으니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했으나, 선장이 '내 배에 탄 사람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의지로 없다고 거짓말하고 허공에 총을 한발 쏘면서 그들을 넘기지 않은 채 제물포를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게 사실은 훗날 김옥균을 찬양하는 일제강점기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지어 공신력 있는 역사 만화들에도 버젓히 나오지만 사실은 야사라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공사는 하나부사도 아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였다. 게다가 일본 선장 한 사람이 권총 들었다고 그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건 그야말로 넌센스다. [39] 이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로 유학을 가 한국인 최초의 학사학위자가 된다. 메릴랜드대 기숙사 건물 중 하나에 그 이름이 헌정되었다. [40] 박영효가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41] 그런데 대신 추천 자체가 중추원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월권이고, 추천된 인물이 죄다 박영효, 서재필 등 고종에게 찍힌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추원 해산 → 독립 협회 강제 해산의 순서를 밟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덤으로 관료 추천은 필적 감정까지 해서 누가 누굴 추천했는지 모조리 색출했다고. [42] 일본이 처음 조선귀족으로 서임한 후작은 단 6명이었는데, 이들 중 4명은 왕족, 나머지 둘은 왕실의 인척인데 박영효는 철종의 고명딸 영혜옹주와 결혼한 부마였고,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인 국구였다. 그 유명한 이완용도 처음에는 백작으로 서임되었다가 나중에야 후작으로 승작되었다. [43] 당시 서광범은 이중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인이 주미조선 대사로 파견된 셈이다. [44] 한국 최초 미국 유학생은 1884년 거버너 담마 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입학한 유길준이고, 대학입학은 변수의 동문인 민주호와 함께했다. [45] 일제 강점기인 동광에서 이광수와 인터뷰한 것을 다시 1934년 동아일보가 인용한 기록이다. [46] 사실 이 단락은 윤웅렬이 자신이 발을 뺀 것을 싹 제외하고 변명하고 있는 대목이므로 실패의 배경만을 언급할 때는 잘 인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실패 확률이 높다고 봐서 발을 제대로 빼려고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한다. [47] 단, 갑신정변도 토지 개혁에 큰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48] 군대가 내부 사조직을 경계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핵심 인사들을 연결하는 사조직이 있으면 소수 인물로도 지휘 계통을 뒤집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주축이 된 하나회는 전체 군대 규모에 비하자면 한줌에 불과했지만 결국에 정권 쟁탈에 성공했다. [49] 또한 불만 세력을 대체로 외곽에 떨어뜨려놓는 도자마 다이묘 정책으로 인해 사쓰마, 조슈 등 외곽 번들은 애초에 중앙에 대한 충성도가 썩 높지도 않았다. [50] 즉, 북한에서 사회발전론에 의해 끼워맞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갑신정변의 의의가 조금이나마 실체화될 수 있었다. 실제로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당시에 비해서는 조금 더 발전하여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런데 그나마 독립협회가 포섭한 백성은 자기들 영향력 범위에 닿는 도성 한정이었고, 더구나 그 '지지'란 것도 근본적으로 '근왕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51] 다만 의의와는 별개로 정변 성공률이 크게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당시 조선의 상공업 계층이란 것이 그리 거대한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52] 임오군란만은 예외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임오군란의 경우에는 민중들도 당시 군란 수뇌부라 볼 수 있는 구식군인들한테 나름 호응을 해줬기 때문이다. 다만 임오군란도 목표는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원성의 대상이던 민겸호를 비롯한 척족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고, 국왕은 제거대상이 아니었다. 근왕의식이 강한 민중들이 군란에 참여한 것은 군인들을 등쳐먹은 민겸호 같은 간신배는 국왕을 위해서 제거하는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호응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3]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 청과 일본올 오갔다. 친군후영사. [54]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 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 개편 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 개화파의 한 가지 불만이었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55]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 [56] 오경석, 박규수와 함께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 통상 수호 조약을 포함한 외교 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망시에는 해상 방어 사령관인 해방 총관이었다. [57]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 [58] 갑신정변 당시 유일하게 칼을 맞지 않은 인물답게 개화 쪽 역할은 적다. 방곡령 당시 일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노력한 인물. [59] 신정 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 관계이다.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 대원군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 대비와 대원군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 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 수호 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 [60] 민씨 척족에 대한 문제점을 적어두었는데, 정작 민영익이 이탈하기 전까지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의 집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61]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민씨 세력의 상당수는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면서 청과 연줄이 생겨서 청에서 진행하던 양무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온건 개화파가 되었고, 보다 세력이 작고 젊었던 이들은 수신사나 보빙사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결과 일본과 미국에 연줄이 생겼고 당시 일본에서 진행하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 개화파가 되었다. 단적으로 민영익이 급진 개화파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정사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차이와 의식는 없었다. [62] 주동자들은 직접 칼을 들고 반대파들을 척살할 만큼 개인적인 무예는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여자를 괴롭히던 불량배를 때려눕히고 그 여성과 결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문무양도인 것과는 별개로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웠다는게 문제였다. [63] 여기에는 갑신정변 때 안 죽은 박영효 등이 포함된다. [64] 이 둘은 모두 조사 시찰단 파견 경력이 있다. [65] KBS 홈페이지 제공. 모든 회차를 다시보기할 수 있다. [66] 밀서의 내용은 '개화파들의 진짜 목적은 명성왕후를 폐위시키고 대원군을 청국에서 데려와 섭정으로 앉히는 것이다. 고종을 설득해 창덕궁으로 환궁하면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개화파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다.' [67] 박영효와 홍영식 같은 경우는 집안이 매우 좋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이 고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가문의 영향이 컸다. [68] 이후 등장하는 독립협회나 황국협회에서는 상인들의 지원 등이 나타나곤 한다. 다만 이들 세력도 '부르주아'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어쨌든 간에 갑신정변 세력보다는 상인 계층과 연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69] 이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철저히 입각하면 그럼 한반도에 자본주의 혁명이 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일어났느냐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 배경에서 나온 게 우리 민족이 아닌 일본이 식민통치를 통해 근대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해주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여전히 근대사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