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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1:23:32

김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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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옥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3년
이름 김희갑
분야 연예
옥관문화훈장(4등급)

<colbgcolor=#808080><colcolor=#fff> 김희갑
金喜甲 | Kim Hee-gap
파일:배우 김희갑.jpg
출생 1923년 7월 13일
함경남도 장진군
사망 1993년 5월 18일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
학력 장진공립보통학교 (졸업)
회령공립상업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상학 / 중퇴)
가족 배우자, 슬하 1남 5녀
데뷔 1946년 연극 〈장화홍련전〉

1. 개요2. 생애3. 출연작
3.1. 영화3.2. TV 드라마3.3. 라디오 드라마3.4. 연극3.5. 음반3.6. 광고
4. 수상 경력5. 저서6. 참고 자료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희극 및 영화배우로, 별명은 '합죽이'이며 '한국의 채플린'으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 1970년대에는 팔도강산 시리즈의 성공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2. 생애

1923년 7월 13일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태어났다. 장진공립보통학교, 회령공립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메이지대학 상학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에 중퇴 후 귀국했다. 그 뒤 전력회사에서 일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서울로 내려간 뒤 독문학자 서항석의 문하로 들어가 이듬해에 반도가극단에 입단하여 연출조수로서 프롬프터를 맡아 무대 연기를 배웠다. 1946년 10월에 상연된 연극 〈장화홍련전〉에서 사또 역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잠적하면서 대역으로 처음 무대를 밟았다. 이후 <칠공주>에서 정식 배역을 처음 맡아 <옥루몽>, <공팔용>, <에밀레종> 등지에 나오며 반도가극단에서 간판 배우로 입지를 다졌고, 1950년 6.25 전쟁으로 서울 수복 전까지 계림극장 지하에서 숨어 살다가 선무공작대(군예대)로서 전선에 투입된 적 있다. 그 뒤 가도가극단과 서라벌가극단을 거쳐 1956년 한형모 감독의 출연교섭을 받아 영화 〈청춘쌍곡선〉에 출연하여 일약 은막의 스타가 됐다.

1958년 권영순 감독 영화 <오부자>에서 양훈-양석천 콤비, 구봉서와 함께 열연하면서 '합죽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 빨간 마후라>, <삼등호텔>, <한번만 봐주세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지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1962년 <와룡선생 상경기>에선 노선생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1964년에는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아 미국 19개 도시를 순회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당시 동행했던 배석인 감독과의 인연으로 1967년 팔도강산서 황정순과 동반으로 출연해 TV 드라마판까지 합쳐서 총 6편이나 나왔다.

박정희 정권 때 재일교포 고향 방문단을 위문하는 공연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구슬프게 불러서 화제였고, 이 일을 계기로 가수로도 유명해졌다.[1][2]

팔도강산 시리즈 등 국책 홍보 영화에도 출연했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당대 높으신 분들과 친했지만 생전에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출연 영화 수만 해도 최대 700여편이나 되기도 하였다.[3] 당시 중앙일보 연재물 '청와대 비서실'에서 회고하기를 70년대 팔도강산 세계편을 찍을 때 외환관리법으로 기관에 끌려 간 적이 있으며[4] 홍콩에서 영화 사기범들에게 걸려서 곤욕을 치를뻔 했다. 그냥 사기범도 아니고 최은희와 신상옥을 북한으로 데리고 간 알선업자였으니, 하마터면 북한 인민배우 김희갑을 볼 뻔한 일[5] 1980년대 들어 영화에는 출연이 거의 없어서 주로 웃으면 복이와요같은 TV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가요무대 내지 밤무대에 출연하였고 꽃뱀에게 걸려서 신문에 잠깐 나오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활동기가 활동기인만큼 많은 그의 출연작, 특히 드라마들은 유실되었다. 특히 대표작인 팔도강산 TV판이 유실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많은 걸작 영화에서 조연으로 맹활약했고, 팔도강산 영화판에도 출연하여 영화계에서 그의 활약상이 확인이 가능하다.(유실된 것도 많다) 또 정부와 관계가 원만하여 국립영화촬영소(현 한국정책방송원)의 문화영화에 많이 출연했기 때문에 당대의 다른 인물들보다 활약상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보면 그의 다재다능함에 놀라게 될 정도이다.

연기 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0년대말 전성기 시절 임화수로부터 모진 구타를 당했다는 일화. 정치행사에 참석하라는 임화수의 요구를 김희갑이 거부하자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김희갑 구타 사건으로 유명하다. MBC가 1981년 방영한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이 에피소드를 촬영할 때[6] 김희갑이 직접 자신의 역할로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촬영일자와 해외 공연 스케줄이 겹치는 바람에 무산되면서 제작진은 긴급히 김희갑과 흡사한 외모의 연극배우 정진을 캐스팅하여 김희갑 구타사건 에피소드는 무사히 방영될 수 있었다. 정진이 배우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부터였다.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111화 후반과 112화 초반에 잠깐 등장한다. 임화수가 극장 안에서 배우들을 집합시켜 기합을 주고 최무룡을 방망이로 패다가 김희갑이 끌려오자
임화수 : 어, 김희갑이? 너 잘 왔다. 이리 와, 이 새끼야.
(쪽박과 멸치가 끌고와서는 그대로 무릎을 꿇린다.)
임화수 : 야, 합죽이! 너 이새끼야 너 죽어야 알겠어? 어?
김희갑 :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임화수 : 뭐? 뭐가 어째? 야 이 쉐끼야! 너 지난번 내 작품에, 바쁘다고 출연 거부했다면서? 어? 그리고 이번 소집때 왜 안나왔어? 어?
김희갑 : 그거야 나도 사정이 있으니까 못나오는거 아닙니까? 바쁜데에?
임화수 : 뭐라고? 사정? 너 이 새끼가!
김희갑 : 도대체 왜 때리시는겁니까?
임화수 : 뭐가 어째? 왜 때리는지는 맞고 나서 다시 물어봐 이 새끼야!

결국 꼭지가 돌아버린 임화수는 방망이가 아닌 주먹으로 김희갑을 죽도록 패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112화에서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까지 폭행했으며, 신문에까지 기사가 나는 것도 모자라 4컷 만화 고바우 영감에까지 나온다. 참고로 작 중 김희갑이 임화수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나 사실 임화수보다 2살 어리다. 게다가 나레이션이 하술하듯이 김희갑은 검경과 신문사에 인맥이 있어 임화수를 그대로 역관광 보냈다. 이 일로 임화수는 유치장에 가게 되나 곧 풀려난다.
"이른바 김희갑 구타 사건. 지금도 연예가에 화제거리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임화수를 한때 최악의 위기 속에 몰아넣게 되는데…" - 야인시대 111화
이른바 김희갑 구타 사건.
김희갑은 함경도 장진 출신으로, 많은 연예인들 가운데 그 성격이 곧고 경우가 밝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강한 성격이 결국은 임화수의 비위를 긁게 되고 병원 신세를 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이다.
김희갑은 임화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박성환이 그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고, 검찰의 강 모 부장검사도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것은 결코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임화수의 폭력을 눈여겨보던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이때다 싶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임화수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도 임화수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6대 주요 일간지에서는 김희갑 폭력 사건을 무려 1주일간 대서특필, 임화수의 모든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야인시대 112화 中 내레이션

1985년에는 북한에서 남북 예술공연단 일원으로 출연하여 고향인 함경남도 장진을 방문하였고, 1989년에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후 무대 출연을 삼가고 1992년 회고록 <어느 광대의 사랑>을 냈다. 말년에는 심장병으로 고생했으며, 1993년 5월 14일에 폐렴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가 동월 18일, 만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 5녀가 있다. 김정일이 김희갑의 연기를 대단히 좋아했는데, 최은희는 만담가 신불출도 북한에서 별볼일 없이 죽었는데 김희갑을 데려온들 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번은 북측에서 김희갑에게 편지를 쓰라고 마구 윽박질러서 김희갑에게 자신이 북한에서 잘 산다는 안부편지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임화수 유족이나 지인들이 김희갑이 잘못하여 맞은 짓이라는 주장을 하다 김희갑 유족들의 분노어린 반발과 고소 엄포에 찍소리 못하고 입다물던 적이 있다.

또 1970년대 초반 농심의 초기 전속모델이었다.

사후 남양주 모란공원에 안장되었고 훗날에 부인과 합장했다. 관련 자료

3. 출연작

3.1. 영화

3.2. TV 드라마

3.3. 라디오 드라마

3.4. 연극

3.5. 음반

3.6. 광고

4. 수상 경력

5. 저서

6. 참고 자료

7. 대중매체에서



[1] 그 노래를 부를 가수로 김정구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가 가끔 코믹한 노래도 불렀던 가수였기에 분위기가 안 살수 있다는 판단하에 김희갑이 대신 나갔다. [2] 그런데 가수는 본업이 아니었고, 배우로서는 심각한 역할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희극에 출연하였다. 영화에서의 역할만으로 보면 동 시대에 활약했고 (나중에 본격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구봉서도 김희갑과 성격이 비슷하다. [3]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도 알 수 있듯, 1993년 한국 극화물 전반을 통틀어 최다/최고령(연극 500여편 및 영화 300여편, 당시 80세) 출연기록을 보유해 기네스북에 오른 고설봉은 물론이요, 한국 영화 중흥기인 1960~70년대에는 신성일, 황해, 위키 리 등 당대 인기 배우들이나 이순재 등 21세기에도 활동하는 원로들조차 영화 수백편을 찍어서 본인들도 몇 편인지 기억을 못 한다. [4]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해외 여행은 관광 목적은 안 되고 공무 출장, 해외 영업 관련 출장이나 해외 취업 등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가지고 갈 외화도 극히 적었다. [5] 다만 여기에는 다른 얘기가 있는데, 그 알선업자는 순수한 알선업자였고 북한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혹은 최은희 부부가 월북을 한 것을 남한에서 납치로 몰았다는 이야기, 진실은 저 너머에. [6] 임화수 역은 오지명이 맡았다. [7] 홍콩과의 합작 영화. [8] 주한 미국공보원 제작. [9] 국립영화촬영소 제작. [10] 제작은 1961년에 했다. [11] 제작은 1961년에 했다. [12] 시인 구상이 <세대> 1967년 4월호에 발표한 시나리오가 원작이며, 동년 7월 일본에서 현지 촬영을 했으나 내용상 일본색이 짙어서 국민 사정 탓에 상영이 막혔다. [A] 문화영화. [A] 문화영화. [15] 제작은 1968년에 했다. [16] 홍콩과의 합작 영화. [17] 제작은 1977년에 했다. [18] 제작은 1984년에 했다. [19] 원래 1968년에 개봉할 뻔했으나, 박정희 정권의 외압으로 성사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20] 진짜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