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 | |
<colbgcolor=#000> 한자 명칭 | 一進會 |
창립일 | 1904년 8월 20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해산일 | 1910년 9월 12일[1] |
전신 | 유신회[2], 진보회[3] |
이념 |
급진주의 (
독립협회)[4] 친일 (한일합방론) 동학[5] 입헌군주주의 ( 의회민주주의) 포퓰리즘 자유민권운동[6] 아시아주의 (대동합방론) 사회진화론 ( 적자생존, 제국주의) 국수주의 (후기)[7] |
창립자 | 송병준 |
회보 | 국민신보 |
1. 개요
一 進 會1907년 일진회가 서울 남대문에 설치한 대형 아치 |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역사라는 식이었다. 2005년
문유미가 하버드대에서 일진회 연구로 박사 논문을 제출할때까지 일진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167~169쪽
최정운은 오월의 사회과학으로 유명한 사회과학 학자다.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167~169쪽
최정운은 오월의 사회과학으로 유명한 사회과학 학자다.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등이 세웠으나 진보회와 합동이후 동학세력이 주도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친일 민주화운동 단체. 일진회의 일은 日이 아닌 一이다. 애국계몽운동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분제 철폐를 추진하는 등 평등,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면모도 있었지만 그러한 이상을 이뤄줄 것마냥 주장하던 일제의 감언이설에 이용당한[8]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2. 상세
1894년 동학세력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종이 청에 차병을 요청하자 일본이 끼어들어 같이 군사를 파견하였고, 이후 조선에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9]동학파는 반란의 패배 이후 외국혐오를 포기하고 외국의 '문명'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개종한 동학파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했는데, 본 문서에 인용된 논문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엔 안중근 의사도 일본을 지지하였다. (그런 이유로 해당 행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
동학파는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일진회와 합병을 발표하고 후자의 이름으로 단결했다. 일진회의 규모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대단한 규모였다. 매일신보라는 신문에는 일진회 회원들이 총 140,72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외로 삼남 지역보다 이북 지역의 회원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농민, 무산자, 부농, 상인, 지방 사족 등 학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비기득권 세력이었다. 일진회의 회원들은 극단적인 단발사상을 가졌다.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에 손대는 행위 유교적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새로운 문명을 목표로 선정적인 발언으로 선동하였다.
초기 일진회의 집회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엘리트측은 '무식하고 문맹자'로 보인 참가자들이 모인 집회를 구경했는데, '촌스러운 사람들'이 읍내에 모여 '백성들의 개화, 그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국가의 보존'에 대해 연설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과거에 외국인 혐오 성향의 무식한 이들이었으나, 이제는 한국인 동포들에게 일본인과 친구가 되라 요청하고 있었다. 고종은 인기가 높아지는 진보회를 적대했다. 인기있는 진보회의 집회에 대해 1904년 9월에 참가자를 체포하고 지도자를 처형하라 명령했다. 10월엔 진보회에 총격을 허가하는 전보를 지방 관리들에게 보냈다.
일진회의 공식성명은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주권 개념을 포퓰리즘과 제국주의에 결합시켰다. 국민은 폭정 없이 자유와 복지를 지켜낸 '문명 제국'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민주주의 제국을 추구했다. 일진회가 옹호한 '문명 통치'엔 사정에 대한 대중적 통제가 포함됐다. 많은 지역에서 일진회와 회원들은 정부 측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일진회는 1904년부터 서울 상인들에게 자세 납부 거부를 촉구했다. 이후 일진회는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고, 이 운동은 한국 북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운동은 일본의 경제 장악에도 지장을 주었다. 일본은 황실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런 재정 통제 안정에도 지장을 준 것이다.
그래서 일본 측이 일진회와 측에서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가 세금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일부 일진회 회원에 의한 세금 감세도 뒤집었다. 그리고 개혁정치에 일진회 같은 대중세력의 개입을 비난하며 반대했다. 결국 일진회의 포퓰리즘 동원을 진압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는 이후 정합방론을 주장했다.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하되, 황실은 존치하고 내각 및 의회를 자치하는 국가형태였다. 합방청원서가 일제의 병행 단행이란 상황에 나온 기회주의라면 어느 정도 일본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어야 하는데, 정합방론은 오히려 일본에게 양보를 대폭 요구하였다. 당시 이용구의 지방자치 구상은 당시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하층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것이었다. 일진회에 참여한 민중에겐 양반 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강했다.
손병희는 원래 일진회에서 활동했으나, 지도부들이 을사늑약에 찬성하자 이들과 연을 끊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이용구와 그 추종자들은 독립해서 시천교를 차렸다. 그런데 교리상으로는 천도교와 시천교가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분리 후에도 시천교였다가 천도교로 전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도교였다가 손병희와 대판 싸우고 시천교로 가버리는[10]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처럼 양국이 동등한 관계로 합병되자는 주장이였다. 즉,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대한제국의 황제를 겸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에서 유럽식 동군연합은 생소한 제도였고, 정작 일제는 대한제국을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면서 사실상 일진회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어버렸다. 이용구가 나중에 합방을 청원하면서 쓴 표현으로는 '정합방(政合邦)'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일본 쪽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주장이었다.[11]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이용가치가 사라진 일진회는 일본에게 강제해산당한다. 해산비 명목으로 15만 엔을 주었다고 하지만, 신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돌아간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후 송병준의 경우는 나름 친일 경력을 발판삼아 재빨리 주류 사회로 발돋움한 것 같지만, 일진회원(=시천교도)들의 실질적 책임자이자 교주였던 이용구는 자기가 일제에 속고 배신당한 덕택에 2천만 한국인을 일본의 2류 국민으로 전락시켰다는 자괴감 속에 중병을 앓다가 1912년 일본 스마에서 사망한다. 이후 시천교는 송병준계와 김연국계가 갈등하다가, 김연국이 교주가 되어서 교도들을 싹 데리고 상제교(=천진교)로 독립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일진회나 시천교라고 하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매우 복잡한 대중단체로 평가받는다. 재평가의 시작은 2005년부터다. 그 이전엔 단순한 친일 매국단체라는 인식이었으나, 2005년 이후엔 대한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대중적인 포퓰리즘 단체였으나 대한제국 말기에는 복잡한 이유로 친일 매국 단체로 타락했다는 평가이다.
문유미와 김종준의 박사학위 논문이 재평가의 시작이며, 학계에서 이들 연구는 인정받는다. 문유미는 일진회 회원들이 '국민권리'와 '복지'를 위해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에 대한 자발적 원조' '독립을 위한 한국 저항의 적극적 파괴'를 수행했으며, 일진회의 포퓰리즘은 일본 제국의 '문명화 임무'를 능가했지만, 곧 일본 하의 한국 사회에서 '불륜성'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다면서 평가하였다.
김종준의 박사학위논문
문유미의 박사학위논문 Populist collaborators : the Ilchinhoe and the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1896-1910
3. 관련 인물
- 강근도
- 강영균
- 강홍범
- 김명준
- 송병준
- 양재익
- 염중모
- 윤갑병
- 이용구
-
서상윤(徐相允)
1876 ~ ?
경성부 한성에서 관료 서주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세때 과거시험에서 병과 5위로 합격했다. # #
-
윤길병(尹吉炳) / 윤시병(尹始炳)
1853년 ~ ? / 1859년 2월 1일 ~ 1932년 2월 5일
형제 지간이며, 일진회에서 활동했다. 형 윤길병은 충청북도 관찰사와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를 역임하였다.
4. 평가
4.1. 정병욱
의병이 ‘처단’했던 지방 일진회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선 수가 적지 않았다. 하야시 유스케에 따르면 일진회는 존립기간(1904~1910년) 동안 10만인 내외의 회원 수를 유지하여 당시 어떤 단체에 비해서도 회원이 많았다. 상당수는 지방회원이었다. 구성원도 다양했다. 농민(초기에 참여한 동학계 진보회원들이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무산자에서 부농, 상인, 지방 사족에 이르기까지. 1907년 이후 중류층 이상의 엽관 세력이 증가했다. 김종준이 적확하게 명명했듯이 그들은 ‘비기득권’층이었다. 지방에서 일진회원은 기득권 세력과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다투었다. 때로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때로는 민중을 수탈하며. 뒤로 갈수록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 문유미의 표현대로 지역 사회를 뒤집어 놓았다(Subverting Local Society). 분단과 내전. 과연 외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먼저 외세를 이용한 것도 지배층이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조선 지배층의 차병借兵,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참혹했다. 이제 달라진 점은 일진회 지방회원에서 보듯이 기득권층에 맞서려는 층의 외연이 넓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들이 외세를 이용했다.
[낯선 삼일운동 ②] 단천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 어떤 결심_정병욱 By 한국역사연구회 - 2020년 5월 10일
http://www.koreanhistory.org/7955
[낯선 삼일운동 ②] 단천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 어떤 결심_정병욱 By 한국역사연구회 - 2020년 5월 10일
http://www.koreanhistory.org/7955
4.2. 서영희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에 나타난 일진회의 정합방론은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하되 황실은 존치하고 내각 및 의회를 자치하는 국가형태로서, '내정자치'를 통해 그동안 정권참여를 갈망해온 민당의 정치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표방하였다.
(...)합방청원서가 일제의 병합 단행 임박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일본측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었어야 하는데, 정합방론은 오히려 일본측의 대폭 양보를 요구하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진회의 정합방론이 합방청원서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궤변이고 견강부회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러한 정체 수립을 기대했던 것인지 그 신뢰성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용구 역시 내각과 의회를 통한 내정자치를 주장하면서도 현존하는 지배권력으로서 통감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군회, 면회 등 지방자치제의 전통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적으로 일본의 부현회와 같은 지방자치 참여를 차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즉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 권력지향적 계몽운동단체들과 제휴가 지속되었더라면 합방이후에 안정적인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것이 최고 목표였을 것이나 그것이 좌절된 이후에는 일진회 단독으로라도 지방권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지방자치 구상으로도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하층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일정 정도는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과거 최제우의 동학에 의해 동원되고 일부 각성되었던 소민들의 정치적 욕망은 일진회의 정합방론의 틀을 빌어 다시 한번 왜곡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진회에 참여한 소민들에게는 오래동안 억눌려온 양반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자주독립 유지라는 대의명분보다 우선하였을 수도 있다.
서영희, 국민신보를 통해 본 일진회의 합방론과 합방정국의 동향, 역사와현실,(69), 2008, 43~44(2007년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주한 학술연구용역비로 연구됨.)
(...)합방청원서가 일제의 병합 단행 임박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일본측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었어야 하는데, 정합방론은 오히려 일본측의 대폭 양보를 요구하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진회의 정합방론이 합방청원서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궤변이고 견강부회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러한 정체 수립을 기대했던 것인지 그 신뢰성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용구 역시 내각과 의회를 통한 내정자치를 주장하면서도 현존하는 지배권력으로서 통감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군회, 면회 등 지방자치제의 전통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적으로 일본의 부현회와 같은 지방자치 참여를 차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즉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 권력지향적 계몽운동단체들과 제휴가 지속되었더라면 합방이후에 안정적인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것이 최고 목표였을 것이나 그것이 좌절된 이후에는 일진회 단독으로라도 지방권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지방자치 구상으로도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하층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일정 정도는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과거 최제우의 동학에 의해 동원되고 일부 각성되었던 소민들의 정치적 욕망은 일진회의 정합방론의 틀을 빌어 다시 한번 왜곡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진회에 참여한 소민들에게는 오래동안 억눌려온 양반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자주독립 유지라는 대의명분보다 우선하였을 수도 있다.
서영희, 국민신보를 통해 본 일진회의 합방론과 합방정국의 동향, 역사와현실,(69), 2008, 43~44(2007년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주한 학술연구용역비로 연구됨.)
4.3. 김종준
일진회의 문명화론은 기본적으로 독립협회의 그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일진회는 독립협회 이래 문명개화론자들이 공유하던 문명화론 항목 중 민권과 인민의 생명재산 보호를 가장 중시했으며, 상대적으로 대외적인 국권과 자주독립 문제는 경시했다. 민권이 보장되는 문명화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친일과 애국은 같이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일진회의 인민주의적 특성으로도 설명되나, 일진회가 점차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충실해지면서민권론은 공허한 것이 되어 갔다. 일진회가 합방론을 주창하자 국권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일진회 문명화론의 특성은 더욱더 사라지게 되었다. 오히려 일진회는 합방성명서에서 국수론적 어휘들을 내보이고 있고, 유생들이 이를 지지하는 현상까지 발견된다. 이를 일진회 문명화론의 귀결로 보기는 어렵고, 두가지 점에서 변질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일진회 문명화론은 본래 독립협회계에 의해서 제창된 것이기 때문에 동학계가 주도하는 후기로 갈수록 논리가 실천에 종속되어 갔다는 점이다. 둘째, 일진회가 합방 주창으로 나아가게 된 데에는 대륙낭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이다. 민권론에서 국권론으로의 변화 자체가 바로
대륙낭인들이 겪었던 경험이기도 했다.
김종준. (2011). 국권상실에 대한 일진회의 인식 -문명화론과 합방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0, 95-120.
김종준. (2011). 국권상실에 대한 일진회의 인식 -문명화론과 합방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0, 95-120.
한국근대사에서 1906년 9월 천도교가 일진회원들을 출교시킨 조치, 즉 천도교와 일진회의 분리 사건은 일진회의 친일 행각과 천도교의 결백함을 보여주는 사례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한 인식 속에 전제되어 있는 명제는, 일진회는 일관되게 친일매국단체였다는 것과 천도교는 근대화된 민족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일진회가 벌인 민권운동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져 온 만큼, 천도교와 일진회의 분리 사건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본래 천도교와 일진회 세력이 어떻게 해서 함께 할 수 있었는지, 양자의 결합과 분리 과정에 대하여 당대와 후대의 인식은 어떠하였는지, 관련된 인물들의 사상을 살핀다면 양자의 분리 과정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는 없는지 등등 새로운 의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 천도교와 일진회는 정치적 지향과 문명화론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도 세력과 지지 기반의 계층적 성격도 겹쳐 있었다. 손병희와 이용구, 즉 천도교와 일진회 모두 대중의 다양한 욕구들을 수용해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당대 상황에서 이는 외세에 대한 의존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일진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 것이고, 천도교는 한 발 물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준. (2024). 1906년 천도교와 일진회의 분리 과정 재고찰. 역사문화연구, (), 135-164.
… 천도교와 일진회는 정치적 지향과 문명화론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도 세력과 지지 기반의 계층적 성격도 겹쳐 있었다. 손병희와 이용구, 즉 천도교와 일진회 모두 대중의 다양한 욕구들을 수용해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당대 상황에서 이는 외세에 대한 의존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일진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 것이고, 천도교는 한 발 물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준. (2024). 1906년 천도교와 일진회의 분리 과정 재고찰. 역사문화연구, (), 135-164.
고종과 일진회가 각각 가지고 있었던 국가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이들은 당대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새로 만들어질 국가는 이전의 전통국가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름’을 어떻게 규정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근대성’에 대한 인식 차이가 나타났다. 전통을 어느 정도 유지할 것인지, 인민의 정치 참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일본의 간섭을 어느 선까지 수용할 것인지 등등을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이들 문제는 특히 ‘군주권’에 대한 인식으로 집중되었다. 고종은 전통유학에 기반하여 군주권을 강화한 상태에서 개혁 사업에 나서려고 했고, 일진회는 인민의 정치 참여를 위해 군주권을 상징적인 자리에 묶어 두려고 했다. 일본 측 역시 고종을 반일 운동의 구심점으로 파악하고 일진회라는 대중 조직을 이용하여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즉, 국내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굴절되어 버렸고, 결국 식민지화로 귀결되면서 고종도 일진회도 힘을 상실했다.
김종준(Kim Jong Jun). "고종과 일진회의 엇갈린 근대국가 인식." 史學硏究 0.133 (2019): 457-501.
김종준(Kim Jong Jun). "고종과 일진회의 엇갈린 근대국가 인식." 史學硏究 0.133 (2019): 457-501.
… 또한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민권운동의 시기, 주체별 형태와 참여층의 유형화를 시도하였다. 시기는 크게 1898년, 1904년, 1908년의 세 분절점이 존재한다. 1898년은 이미 많이 연구된 것처럼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때이고, 1904년은 일진회에 의해 정치운동이 재개된 시점이다. 그런데 이 때 정부 권력의 약화가 외세의 개입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는 하나, 정부, 황제권이 하루아침에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주체 및 참여층과 관련해서 1904년 일진회의 설립에 주목해야 한다. 일진회의 생명재산 보호라는 구호는, 지역의 동학 계열 중하층민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상당히 실천적 성격을 띨 수 있었다. 중앙 고위관직자들의 탄핵과 아울러 지방관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진회의 모습은 민권운동의 실질적 효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는 황제권과 관련된 역둔토 영역에서 일진회의 분쟁 참여가 개혁으로 인식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종준. (2013). 대한제국기 민권운동 연구의 재인식. 한국학연구, 31, 573-606.
김종준. (2013). 대한제국기 민권운동 연구의 재인식. 한국학연구, 31, 573-606.
4.4. 결론
위의 연구에서 나온 것처럼 일진회의 행동 이유엔 오랫동안 소민들을 억눌러온 양반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있었다. 동학 시절 각성되었던 일부 욕구가 일진회로 재표출된 것이었다.그래서 위원회에서도 일진회라고 다 친일반민족행위로 선정하진 않고, 어느 정도 조건을 충족해야 선정됐다.
일진회원 간부 중 1908년 12월 이후 특정 행적이 존재해야만 선정됐고, 없으면 예비후보에 올라도 탈락된다.[12]
선악 이분법이 그렇게 단순한 단체는 아니었다. 일진회에 대한 재평가는 문유미[13]와 김종준의 박사학위 논문이 자세하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일진회 연구로 문유미와 김종준이 유명하다는 건 학계에선 유명하다. 학계에서의 유명세와 달리 대중매체에서의 반영은 아직 없다.
[1]
경술국치 이후 반개월도 안되어 일제에 의해 토사구팽되었다.
[2]
유신회 창립 이틀 후에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3]
이용구가 친일, 아시아주의 성향 동학 계열 인물들을 모아 설립한 단체이다.
[4]
일진회는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후신으로 볼 수 있으며 실제로도 독립협회의 이념과 추구하는 지향점을 거의 그대로 추구했다.
[5]
동학의 교주 손병희부터가 일진회에서 활동했으며, 이용구 역시 동학교도로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출신이다. 일반 회원들 역시 동학 신자이거나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출신 하층민들이 많았다. 한편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이후 동학 교단은 정치현실주의, 문명개화론으로 선회하여 일본의 대한제국에서의 우위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강과 개혁을 추진하려는 노선을 취하게 된다.
[6]
실제로 일진회의 노선과 굴절, 실패는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단 참조
[7]
친일 매국 단체가 왠 국수주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일진회는 후기로 갈수록 본래의 자유민권운동적 성격은 옅어진 반면 아시아주의적, 국수주의적 성향은 점점 짙어져 갔다.
[8]
애초에 이들이 원하는 '한일합방'은 일본과 한국이 주권을 가진 채로 합병하는 것이었지, 일제강점기처럼 국권을 피탈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제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9]
트위터,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카페 등에서 고종의 청군 차병이 조작이란 주장이 유포됐으나, 해당 주장들은 광범위한 자료조작과 학계 조작임이 확인됐다.
동학농민혁명 문서로.
[10]
대표적인 인물이 이용구 사후 시천교주가 된 김연국.
[11]
당시 재미교포 신문 신한민보는 이런 일진회의 동군연합 주장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
[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2, 186~188
[13]
구하긴 쉬운데 언어가 영어다. 미국에서 일진회 연구로 박사학위논문 취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