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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노덕술 盧德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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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
마쓰우라 히로 松浦 鴻 |
호 | 해촌(海村) |
별명 | 일경의 호랑이 |
출생 | 1899년 6월 1일 |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 (現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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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년 4월 1일 (향년 68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 | |
본관 | 교하 노씨 |
가족 |
아버지 노발보 형 4명 배우자 민복성, 김해옥 |
학력 | 경상남도 울산보통학교 (중퇴) |
수상 |
공로상신 (1940) 훈8등서보 (1941) 화랑무공훈장 (1950, 51) 충무무공훈장 (1953)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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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경찰공무원으로, 경찰관 재직 당시 독립운동가 다수를 체포, 고문, 살해한 악질 고문 경찰로 악명을 떨쳤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고문귀' 하판락, '고문왕' 김태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한 친일 경찰의 대표격으로, 이러한 부역 행위에 따라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반민족행위자로 수록되었다.[1] 링크[2]
2. 생애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現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에서 노발보[3]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진학한 것을 보면 나름 여유롭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 추정된다.[4]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해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는데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로 진급하여[5] 1944년 수송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2.1. 친일 행적
그는 고등계의 형사로서 악질 친일 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 앞장섰으며 후술하듯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으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을 받았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였으며 그가 경찰로 지낼 동안 불렸던 별명도 일경의 호랑이였다고 한다.그의 고문수법은 매우 다양하고 악랄했는데 직접 새로운 고문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천장에 매달고 구타하기, 머리카락 뽑기, 이빨 뽑기, 손발톱 뽑기, 혀 뽑기, 코에 뜨거운 고춧물을 붓는 방식의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는 기본이고 전기 고문이나 대못상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나 잔혹했으면 일제강점기에 경찰에서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가 그의 작품이라는 설이 맴돌 정도다. 후술하듯 그 때문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독립운동가만 무려 6명이다.[6]
1927년 10월에는 좌우연합 단체인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1928년 10월에는 부산동맹휴교 사건으로 혁조회[7]가 적발되었을 때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을 비롯한 혁조회 간부 7명 등을 잡아들여 고문했는데 이때 혀 뽑기 등의 고문을 받았던 김규직, 유진흥, 양정욱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8]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된 보통학교 교원들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1929년에는 조선인 일본 유학생 강연회의 강연자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였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 참가자들과 관련자 석방을 주장한 동맹휴학 관련자들도 체포한 후 고문하였다. 1932년 5월 당시 ML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했다가 잡혀 그에게 천장에 매달려 구타를 비롯한 숱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김재학의 조카 김문한은 '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악인열전 p.133
악인열전 p.133
같은 울산 출신이던 독립운동가 이관술이 반제동맹을 지도하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활동을 하던 중 검거되어 고문당했는데 그도 고문에 가담하였다. 이관술은 이후에도 1940년 경성 콤그룹건으로,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했다.
전술한 내용들만 봐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제강점기 노덕술의 고문 사건만 10건 가까이 되는데, 당연하지만 노덕술이 일제시대에 무려 25년이나 경찰 활동을 한 것, 조선인 중에서 드물게 경시까지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겨우 10건 정도의 사건에서만 고문했을 리는 없으며, 현재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 고문 사건들도 엄청날 것이다.[9][10]
이 뿐만 아니라 1938년 혜산 사건을 수사하며 박달과 박금철[11] 등 조국광복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최연,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사찰 업무를 맡은 최운하 역시 그와 같은 반열에 든다.
그는 그러면서도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지낼 때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 이사를 지내며 군수품 수송에 앞장서는 등 일제 침략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심지어 순사부장 시절인 1923년에는 그의 외삼촌이 살인 혐의가 있는데도 놔주거나 수사를 목적으로 금품을 수수받기도 했고 1931년에는 상해죄로 잡혀온 사람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그녀에게 100원(현재 시세로 약 110만 원)[12]을 받아낸 후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사기죄로 고발당하는 등 부패한 면모를 보였다.
2.2. 해방 이후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14]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운동가 중 최고 거물 중 한명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에게 모욕적인 처우로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5] 그는 백민태에게 노일환, 김웅진, 김장열, 이문원 등을 납치하여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북으로 가겠다."라는 가짜 유서를 강제로 받도록 하고 이후 암살하면 뒤처리[16]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는 지령을 내렸지만 이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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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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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체포되자 그는 그저 치안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
##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 시도하는 등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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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 증언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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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 복무 당시의 노덕술. 안경을 끼고 좌측에 두번째로 서 있는 사람이 노덕술이다.[19] |
그의 일화 가운데 유명한 것은 ' 저놈 잡아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 박성근을 고문하던 중 박성근이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박성근이 도망간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문서 참조.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 화랑무공훈장 2개와 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다고 한다.[22] 일제강점기에도 그 악행을 인정받아 1943년 일제로부터 훈8등 서보장(일제의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처럼 악랄한 일제 경찰 출신 중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경우는 모두 17명이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잠깐 군에서 예편한 것으로 보이지만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면서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2.3. 몰락
그러다가 불행 중 다행히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권세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였고 1955년 11월에는 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23] 동월 11일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전급료 몰수를 선고받았다. 1958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4.19 혁명 후에 열린 1960년 6월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이때 '빨갱이를 때려잡던 반공투사'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며 자신의 '반공투사' 경력을 살려 표를 얻고자 했으나 선거 결과는 4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친일파라고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 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자들도 많았다.[24]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까지 폭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 고향을 떠난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한 번도 고향에 온 적이 없었던 그는 투표 결과가 안 좋은 것을 알게 되고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고 한다. #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그는 낙선 3개월 후인 1960년 9월에 일본으로 망명한 선우종원이 귀국하자 선우종원을 찾아와 초라한 행색에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나 보자기를 풀어 국제 공산당 사건[25] 관련 브리핑을 전달하고 홍택희[26]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 잡아 없애라고 부탁을 하며 마지막 권력의 끈을 잡으려고 했으나 선우종원이 의연한 반응을 보이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에는 1961년경 서울경찰청 유치장에서 사식(私食)을 넣어줬다는 증언이 전하고 1964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 외에는 행적이 묘연했으나 1965년 6월에 뜬금없이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사실 1965년 5월에 서울의 한 흥신소에서 서울지검 검사였던 함정호[27]를 미행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검찰이 서울의 흥신소를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여러 불법 흥신소들이 적발되었으며 흥신소 장부를 열어보니 반 이상이 개인을 미행하는 등의 사생활 침해로 채워져 있어 물의를 빚었다. 놀랍게도 함정호를 미행하던 흥신소가 바로 노덕술이 사장으로 있던 흥신소였다! 이는 그가 몰락한 후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해방 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며 '부통령급' 위상을 가졌던 데다 헌병 중령까지 보냈던 사람이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는 꼴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지며 완벽히 몰락했는지를 보여준다.[28]
그러나 그는 재판 결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노덕술이 마지막까지 그동안 축적한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손녀뻘 친척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1967년경 그는 돈이 없다고 글씨 쓴 거나 가져가라고 했으며 자기는 친일파가 절대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그런다(자신을 친일파라 부른다)고 했고[29] 청빈해서 친척들 뒤를 봐주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과 대외 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것만큼은 자명하다. 출처 그는 1968년 4월 1일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사망했다.[30] 그나마 말년에는 사회에서 매장되고 잊혀진 채 곤궁하게 살다가 쓸쓸히 죽으며 생전 악행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가는 치른 셈이다.[31][32]
3. 여담
- 2번 결혼했다. 첫째 부인의 이름은 민복성이었으나 1952년 5월 사망했고 이후 명월관[33] 기생 출신인 김해옥(본명 김재순)과 1955년 재혼했다. 다만 손주가 아닌 손녀뻘 친척이 그에 대해 증언을 남겨야 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자식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식이 있어도 노덕술의 행적을 감안하면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으면 숨겼지 드러낼 일은 없다.[34]
- 유도 2단, 검도 2단이었다고 한다.
- 또 다른 일제 고문 형사였던 하판락[35]과도 친한 사이였다. 하판락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인터뷰에서 노덕술은 재주가 있어 일본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였고 술좌석을 잘 어울린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특히 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노덕술과 하판락은 해방 후에도 인맥이 있었는데 서대문에 같이 있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에도 마포 형무소에서 같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 상술한 노래를 잘 했다는 언급도 그렇고 아돌프 히틀러, 예브게니 프리고진처럼 예술 쪽에서는 어느 정도 재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부산시 기관지 창간을 기념하여 쓴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지며[36]( #) 붓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 그가 경찰이 아닌 예술가가 되었더라면 역사에 추악한 매국노로 오명을 남길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일까?
-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뺨을 때렸다는 설이 있으나 그가 김원봉을 고문하였다는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난 1987년 월간경향에 수록된 기사 말고는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없다. 김원봉도 이후의 대화나 증언에서 '굴욕'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는데 고문을 받았다거나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김원봉을 체포한 것 자체는 당대 기록으로도 남아 있는 사실이며 정황상 체포 이후 그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하는 점은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인 그가 당시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김원봉이 아닌 무장항일독립운동의 1인자였던 김원봉에게 굴욕을 주었다는 상황 자체다.
- 상술한 것처럼 노덕술의 재산이 현재 가치로 100억 원을 넘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무리수 수준의 주장이다. 1949년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7000원[37] 안팎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덕술의 재산은 600만~700만 원 남짓, 당시 평균적인 근로자의 7~8년치 봉급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치가 대폭 하락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1945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으로는 3억 5300만~4억 1200만 원 수준이며, 일제시대 소비자물가지수 기준점인 1936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50억 2300만~58억 6000만 원이 된다.
- 전두환 대통령이 오랫동안 떵떵거리던 시절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진두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내무부 치안본부의 대공수사단장)과 매우 깊은 인연이 있었다.[38] 실제로 박처원은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서 경찰에 입문했는데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노덕술이였다는 것을 보면 정황상 노덕술을 상관으로 모시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비슷한 경우로 김창룡이 있다. 노덕술이 공산게릴라의 공격에 대처할 치안전문가가 필요하여 이승만이 빼 준 인물이었다면 김창룡은 군내 좌익 숙청을 목적으로 고른 인물이었으니 맡은 임무도 비슷하고 둘이 초래한 부작용, 생전에 어느 정도 만행의 대가를 제대로 치른 것도 비슷했다.[39]
- 고향에 살던 그의 친척들은 그의 실체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친척들은 노덕술을 ' 장생포가 낳은 큰 인물'로 여기며 해방 후에는 위세가 부통령급이었던 데다 ' 수사를 너무 잘해 가지고 자꾸 계급이 올라갔다'[40]고 말하기도 했으며 이들 중 한 명은 "할아버지 이후 장생포에 사는 노씨 집안에서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다"라고 말했고 그의 생가는 한동안 '큰 인물이 난 터'로 알려졌다고 한다. #
- 그의 생가는 지금도 남아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그의 친척뻘 후손이 살다가 오늘날에는 회사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
- 2014년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선정 기준은 울산 출신이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서 활동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후보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결국 당연히 취소되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를 빼면서 그가 가한 고문의 대표적 피해자인 울산 출신 독립투사 이관술도 '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같이 빼 버렸다.[41]
- 을사오적, 송병준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악명이 높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보니 사후에도 온갖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 노태우 정부 때 국무총리였던 노재봉의 아버지가 노덕술이다 -> 노재봉의 아버지는 라전모방 창업주였던 노준용이었다.
- 발췌 개헌에 노덕술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 노덕술은 죽은 뒤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노덕술의 무덤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노덕술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면 서울의소리, 민족문제연구소, 애국국민운동대연합 등의 시민단체들이 이미 해결했을 것이다.[42]
- 노덕술이 마지막까지 살던 집터에 10.26 사건이 일어난 궁정동 안전가옥[43]이 지어졌다. -> 노덕술의 집은 정확히는 오늘날의 무궁화동산 자리 맞은편에 있었다.
4. 관련 자료
- 임기상 (2015).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 임종금 (2016). 《대한민국 악인열전》
- 53년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이 '자랑스런 울산인'?
- 친일에서 독재까지 고문·조작의 달인 노덕술
- 이승만이 비호했던 노덕술, 유권자가 단죄
- 한홍구TV '친일나라의 국보 1호 노덕술' 3부작 1부 2부 3부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신충식이 연기했으며, 1990년 8.15 특집극 《반민특위》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 1985년 KBS 광복 40주년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배우 신동훈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박칠용이 연기했다.
- 2002년~2003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서영탁이 연기했다.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노덕술과 김창룡을 모티브로 가상의 악역 박창주( 박상면 분)가 역할을 대신한다. 예외적으로 34회에서 딱 한 번 등장하는데 계급상 박창주보다 훨씬 상관이다. 배우는 윤관용.
- 2019년작 MBC 특별기획 드라마 이몽에서 나오는 친일경찰 노정술(허성태 분)이 이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5.1.1. 수사반장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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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포상금 받는 거 봤냐?!!
(독백하며)그게 돈이 얼만데 전액 기부라니?!!
너 내가 그렇게 경찰 되라고 가르쳤어?!
가만히 좀 있어봐![44]
몰라서 물어?!!! 종남백화점!!!!![45]
2024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서는 최달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배우 오용이 맡았다. 자기 앞길만 생각하는, 택시운전사의 권영무 중령에 버금가는 기회주의자다. 경찰서장과 치안국 제2부국장으로 일하며 정치깡패 이정재 등에게 돈과 뇌물을 받아서 출세에 눈먼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당시 유대천 반장이 자신의 친일파 행적을 알리자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 내 이익을 위해서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해쳐도 좋다' 하는 식으로 백도석과 강형사에게 상해를 돈 주고 사주하며 죄책감을 안 느꼈는데 이런 반지성주의를 통해 이 양반이 얼마나 소시오패스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백도석에게 "몰라서 물어?!!! 종남백화점!!!!!" 이라고 화내는 모습과 "가만히 좀 있어봐!" 하고 백도석에게 명령하며 소리치는 모습은
- [열람주의]
V/H/S 2의 사이비 교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악랄한 모습을 보인다.
5.1.2. 관련 문서
5.2. 기타 창작물
-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의 맨 마지막 장면에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은 후 석방된 염석진이 노덕술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는 의견이 많다. 노덕술은 이후 잠깐이나마 떵떵거리며 잘 살았지만 염석진은 안옥윤과 명우의 총탄에 사살된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을 대리만족시킨 것으로 보인다.
-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현대의 토지대장 건으로 나오마사를 만나고 있던 어진에게 가배차를 내온 신입 순사보로 등장. 이화관에 와서 소담에게 치근덕대는 바람에 거물 기업가의 부인을 건드린 파렴치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 순사보 자리에서 짤리고, 소담에 의해 양쪽 검지손가락이 다 잘린 뒤 모르핀에 취해서 빈민가에서 난동을 피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로 등장이 없을 줄 알았으나...[46]
[1]
물론
김덕기도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이긴 했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고문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고 본인도 반민특위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2명을 손수 사살했단 것은 인정해도 고문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2]
다만 해당 만화에서는 김원봉을 고문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말년에나마 처참하게 몰락한 노덕술이 마지막까지 잘 먹고 잘 살다 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3]
1930년 9월 사망했다.
[4]
1919년 기준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3.9%였으나 한국 거주 일본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91.4%였다.
#
[5]
일제강점기에 경시를 단 조선인은 35년 지배 기간 동안 21명뿐이었다. 즉, 그는 친일을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 그 이상을 간 것이다. 다만 그런 그도 조선인 경찰 중 최고봉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인 경찰 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사람은 1944년에 황해도청 경찰부장을 역임한
윤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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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고로 확실히 확인된 유명 친일파의 고문치사 및 살인 수를 비교하면 일제 고문 경찰
하판락은 1명을 고문치사케 했고 노덕술의 선배인
김태석은 고문치사시킨 사람은 없다.
김덕기는 독립운동가 2명을 손수 엽총을 쏴 살해했으며
신상묵은 독립운동가 4명을 고문치사케 했다. 비록 경찰이 아니라 밀정이긴 했지만
이종형은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17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7]
19~23세 정도의 젊은 학생 150여명의 회원이 있던 항일조직이었다.
[8]
정확히 말해 김규직은 옥사했고 유진흥과 양정욱은 병보석으로 가출옥된 후 얼마 안 가 사망했다.
[9]
특히 반민특위 습격 사건에 휘말리면서 유실된 노덕술의 고문 관련 기록들이 상당할 것이다. 반민특위 습격을 누가 주도했는지를 생각하면...
[10]
실제로 노덕술 고문 피해자의 손자가 노덕술 관련 유튜브 영상에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 일가를 소작인으로 둔 부농 집안이었으며,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모두 노덕술의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으며, 덤으로 노덕술은 울산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의령,
평양으로 근무지를 옮길 정도로 일제의 총애를 받는 경찰이었다고 한다.
댓글 참조
[11]
이 둘은 훗날 북한 초기 정치 세력 중 하나인 '
갑산파'의 일원이 되었다.
[12]
기사에서는 800만 원으로 명기되었다.
[13]
이것이 노덕술의 반공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4]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15]
이때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이 함께 하였다. 검찰의 기소문에서 밝혀지길 이 계획의 재정분야는
박흥식, 언론분야는
이종형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16]
여기서 이 뒤처리의 의미는 "
38선에서 월북하려는 반민특위 위원들을 저지하자 저항하여 사살하였다"라는 수사발표를 한다는 뜻이었다.
[17]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9.6원도 되지 않았다.
[18]
출처 악인열전 p.137
[19]
여담으로 우측에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최난수라는 인물로 노덕술과 똑같은 친일 경찰 출신에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고 했던 자다.
[20]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했다.
[21]
다만
한홍구 등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역자 처리 과정의 주도 인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22]
전자는 1950년과 1951년에, 후자는 1953년에 받았다고 하지만 국가보훈처, 국가기록원에도 노덕술이 한국전쟁 당시 진짜
북한군과 맞서 싸운 공로를 입증할 자료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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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확히는 시가 4억 6천만 환(4600만 원)의 미 군수물자를 밀수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수사를 가장하고 물품을 운반하는 대가로 600만 환(60만 원)을 수수받은 것이었다고 한다.
195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당시 소비자물가지수(1955년 1원(10환) = 2024년 110원)를 고려하면 6600만 원을 수수받은 셈이며(덤으로 저 밀수 물자의 2024년 가치는 50억 6000만 원 상당이다), 덤으로 600만 환을 1955년 8월 기준 실질환율(1달러=802환)으로 환산하면 달러로 환산하면 57만 4000달러(2024년 가치로 약 670만 달러) 정도의 군수물자를 밀수하는 과정에서 7481달러(2024년 가치로 약 87157달러)를 수수받은 셈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뇌물이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과 미국조차 1인당 GDP가 2578달러(2024년 가치로 약 30034달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미친 수준의 뇌물이다. 저렇게나 받아먹고도 이런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게 더 대단하다.
[24]
실제로 죄악이 노덕술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던 최악의 친일파
이종형도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기도 했다.
[25]
선우종원을
장면 총리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선우종원은 8년여간 일본으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26]
1948년에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노덕술의 지휘 하에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27]
훗날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2024년 현재도 생존 중이다.
[28]
참고로 당시 노덕술의 구속을 다룬 신문기사들에서는 '흥신소 대표' 노덕술이 전직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었다는 것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29]
설령 노덕술이 진심으로 친일 성향이 아니었다면 더욱 가관인 게 노덕술은 별다른 신념도 없는데도 출세를 위해 당대의 기득권에 빌붙으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말이 된다.
[30]
기존에는 노덕술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31]
사실 진짜 악질 중의 악질 친일파들은
김태석,
김덕기,
이종형처럼 제 명에 가지 못하거나,
하판락처럼 잘 사나 싶다가 말년에 그로 인한
피해자의 노력과 폭로로 모든 만행이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다만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은 하판락이 이미 누릴 건 다 누린 후였다), 노덕술과
신상묵처럼 다른 범죄로 구속되어 망신을 당하게 되는 등 끝이 좋지는 않았다. 매국노들의 후손들도
이종찬,
민복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순용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므로 논외) 일제강점기의 위세를 유지한 경우는 전무하다.
[32]
심지어 예전에는 노덕술에 대해 '몰년 미상', '군에서 예편한 후 잠적했다' 등으로 기록된 자료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도 아닌 군 예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탐사기자였던
조갑제도 1987년 한국의 고문기술자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다룬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을 쓰면서 당시까지 구할 수 있는 일제 고문경찰 관련 자료들을 다 긁어모아도 석방 후 노덕술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
[33]
明月館, 1909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 요릿집.
참고자료
[34]
민복기 전 대법원장도 현역이던 동안
자기 아버지의
정체를 숨겨야 했으며,
조선귀족&친일반민족행위자 중 마지막 생존자인
고중덕도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35]
그 역시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의 악행,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사후에는 두고두고 악질 친일파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었다. 그나마 마지막에는 밀수에 가담한 것이 들통나 군에서 쫓겨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는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고 알거지 신세로 죽으며 생전에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른 노덕술과는 달리 하판락은 무려 1990년대 후반까지도(!) 만행이 공론화되지 않은 채 잘 먹고 잘 살았다.
[36]
시 자체는 노덕술을
애국심을 가진 영웅처럼 묘사하며
유체이탈 화법을 쓰고 있다.
[37]
1949년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면 6만~7만 원 남짓에 불과하다.
[38]
참고로 이쪽도 21세기에 사망한 사람인데도 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9]
다만 노덕술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 자택에서 병사했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1956년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40]
쿠레바야시 아사오도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 누명을 씌우며 출세한 인물이다.
[41]
이관술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데 이관술은 오직
대한민국 땅에서 끝까지 살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
[42]
당장 노덕술이
6.25 전쟁 시기에 훈장 3개를 수여받은 것이 밝혀진 것만 해도 전국민적으로 공분이 들끓었는데 현충원에 묻혀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훈장 수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공분이 들끓었을 것이다.
[43]
오늘날의 무궁화동산 자리에 있었다.
[44]
백도석에게 화내면 명령하는 장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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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석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종남
백화점의 영업을 정지시켰을 때 화내면서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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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제안으로 어진의 저택에 비행기 자폭테러를 일으켰고, 핀을 뽑은 수류탄을 쥔 채 어진과 동반자살을 꾀했으나 어진이 그대로 벽장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칼이나 전기 충격기, 수류탄처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은 벽장 반입 금지) 본인만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