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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2:57:17

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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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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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이왕(왕공족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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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이왕
2.1.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2.2.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2.2.1. 창덕약궁 이왕세자(昌德若宮李王世子)
3. 둘러보기

1. 개요

이왕(李王)은 대한제국 경술국치로 일본제국에게 멸망한 후 일제가 옛 대한제국 황실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만든 지위로 왕공족의 수장이었다. 왕공족은 이왕가라고도 불렸다.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비황족 왕작이다. 이는 이왕과 류큐 번왕뿐인데, 류큐 번왕이 제2차 류큐처분에 의해 7년만에 폐지되었으므로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 유일한 비황족 왕작이었다.

일제는 고종과의 협상 끝에 구 황실을 명목상 천황의 가문인 일본 황실보다는 낮고 오등작을 가진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친왕급 위치로 대우했다. 이 신분을 왕공족이라고 하며 이왕은 이 왕공족의 수장이다.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 합병된 류큐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가 잠시 주어졌던 번왕 지위마저 박탈당하고 고작 후작 작위를 받았던 것에 비하더라도, 일제가 전례없는 왕공족 제도까지 만들어 구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내 모든 명문 화족 가문들보다도 우대하기로 한 것은 일제 입장에서는 분명 파격적인 대우였다.

왕공족은 원래 갖고 있던 재산과 일본 정부에서 제공하는 자금과 지위 덕택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방자가 이왕가에 시집 간다니까 다른 일본 황족들이 부러워했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 2006년 동아일보 기사[1]

일본 정부는 이왕가에 품위 유지비로 엄청난 돈을 지원해 줬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금전 지원을 끊지 않았다. 이에 일본 내에서도 불만이 많았으며 어중간한 위치의 본토 화족들도 정부 지원을 받는 이왕가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왕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일제의 녹을 받는 이왕가와 독립운동에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황족들을 향한 실망 때문에 독립운동[2] 시기나 해방 이후나 제정 복고 논의는 사라지게 된다. 광복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반환한 데다 1947년 신적강하를 거쳐 이왕가 지위가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졌고 1948년 한반도는 남쪽, 북쪽의 정부 구성 인물들이 모두 옛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화정을 채택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구한말 시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군주제를 폐하려 했다는 사유로 고문까지 받아본 인물이며 강경한 공화주의자였기에 옛 황족들의 귀국을 차단하고 이미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창덕궁에서 살지 못하도록 막는 등 복권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2. 역대 이왕

2.1.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

[ruby(德壽宮, ruby=とくじゆきう)][宮] [ruby(李太王, ruby=りたいわう)][4]
묘호 이름 재위기간 비고
고종(高宗) 이희(李熙)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태황제에서 덕수궁
이태왕으로 강등(격하)

2.2.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ruby(昌德宮, ruby=しやうとくきう)][宮] [ruby(李王, ruby=りわう)][6]
대수 왕명 이름 재위기간
1대 순종(純宗) 이척(李坧)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6일
2대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A] 이은(李垠) 1926년 4월 27일 ~ 1947년 10월 18일

2.2.1. 창덕약궁 이왕세자(昌德若宮李王世子)

[ruby(昌德若宮, ruby=しやうとくのわかみや)][8][9][10]  [ruby(李王世子, ruby=りわうせいし)][11]
대수 시호 이름 재위기간
1대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A] 이은(李垠)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6일
2대 회은황세손(懷恩皇世孫)[A]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 ~ 1947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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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1]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전답만 1억 5천만 평에 이르며 헥타르로 계산하면 5만 헥타르에 달한다. 여의도가 주변 한강 둔치를 합쳐야 450헥타르인 걸 감안하면 여의도 100배에 달하는 넓은 전답을 소유했던 셈이다. [2] 임시정부부터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宮] 일본 궁가의 미야고처럼 ‘도쿠주노미야’, ‘쇼토쿠노미야’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조선 왕공족의 궁은 한국 전통대로 원칙적으로 음독하여 ‘도쿠주큐’, ‘쇼토쿠큐’로 읽었다. [4] 발음 및 현행 가나 표기는 도쿠주큐 리타이오(とくじゅきゅう りたいおう). [宮] [6] 발음 및 현행 가나 표기는 쇼토쿠큐 리오(しょうとくきゅう りおう). [A]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이다. [8] 와카미야(약궁, 若宮)는 일본에서 궁가의 후계자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 왕공족의 궁호는 일본 황족의 미야고와 달리 한국의 독법을 따라 원칙적으로 음독하였으나, 한국에서는 왕족의 궁호는 본인에게만 붙는 것이었기에 용법이 없어 미야고의 용법을 준용한 것으로 보인다. [9] 한국의 왕자 궁호는 원칙적으로 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 개인에게만 붙는 것이었기에 세습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예외적으로 방계의 왕손이 즉위한 경우에 한해 생부에게는 대원군을 추봉하고 종법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 궁호를 종손에게 세습해 온 것으로 간주하고 예우하였다. 방계 왕손 국왕의 직계 선조들에게 일일이 가상의 궁호를 지어내서 추봉해 주기도 번잡했나 보다. 물론 일반적으로 왕의 생부가 살아있었으면 그 생부가 즉위했었을 것이므로 흥선대원군을 제외하면 모두가 사후 추봉이었기에 별도로 궁가의 후계자를 호칭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세습되는 궁호'란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나 등장하는 개념이었고, 생존자를 부르는 호칭은 아니었다. [10] 예를 들어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의 경우 왕의 생부로서 대원군호를 받고, 종법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숙종의 6남으로서 계동궁호를 받은 연령군이 나오므로, 연령군의 역대 종손들이 계동궁호를 세습한 것으로 하여 왕자궁호를 이은 것으로 한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까지 3대 계동궁이 되는 셈. 이러한 세습 왕자궁호는 왕위에 오른 종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멸해야 했는데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4남이었으므로(…) 계동궁호는 남연군의 장남 흥녕군이 이어받았다는 점이며, 흥선대원군은 다시 새로운 왕자궁호로 운현궁호를 받는다. 여기서 또 고종은 아버지는 물론 장남인 친형마저 살아있었으므로(…) 운현궁의 종통 역시 고종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친형 이재면이 받게 되는 형식이 된 것이다. 살아있는 왕족이 궁가를 세습하는 것 자체가 조선의 예법에서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수준의,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던 것. 그럼에도 조선의 종법은 선왕의 적장자인 세자가 아니었던 이상 선왕의 적자여도 차남이면 시비가 걸리고 친부와 양부가 모두 세자여도 시비가 걸리는 판이었기에 고종은 이런 과정이라도 안 거칠 수가 없었던 것. [11] 당시의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따른 표기. 발음 및 현행 가나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쇼토쿠노와카미야(しょうとくのわかみや)리오세이시. [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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