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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2:16:38

진윈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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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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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15,16,17대 국무총리
정체 靳雲鵬
간체 靳云鹏
한국식 독음 근운붕
영문 Jin Yunpeng
익청(翼青)
출생 1877년 청나라 산동성 제녕
사망 1951년 1월 3일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천진무비학당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불교
국무총리
재임 기간
대행 1919년 9월 24일 ~ 1919년 11월 5일
15대 1919년 11월 5일 ~ 1920년 5월 14일
16대 1920년 8월 9일 ~ 1921년 5월 14일
17대 1921년 5월 14일 ~ 1921년 12월 18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1차 진윈펑 내각2.3. 2차 진윈펑 내각2.4. 국민혁명 시기2.5. 말년과 죽음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안휘군벌에 속해 있었으나 돤치루이의 독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안복구락부와는 거리를 두어 쉬수정 등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877년 산동성 제녕에서 태어났다. 1895년 입대하여 위안스카이 휘하에 들어갔고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하여 운남군 제19진 총참의를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차이어의 운남신군과 맞섰으나 패했다.

중화민국 건국 이후 1912년 육군 5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육군차장을 거쳐 1913년 산동도독 서리가 되었으며 1914년에 정식으로 산동장군에 임명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한 후 1등 백작에 봉해졌다. 1915년 12월 25일, 운남에서 탕지야오, 차이어, 량치차오 등이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여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펑궈장, 장쉰, 리춘 등과 함께 연명으로 완강하게 위안스카이의 퇴위를 요구하다가 장회지에게 산동장군 자리를 내주고 퇴출당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안휘군벌의 일원이 되어 쉬수정, 우광신[1], 푸량쭤와 함께 안휘파 4대금강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

2.2. 1차 진윈펑 내각

1917년 진윈펑은 대총통 펑궈장의 시종무관이 되었다. 1918년 참전독판공서참모장으로 일본과 중일군사협정을 체결했다. 1918년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한 이후 첸넝쉰 내각이 들어섰는데 첸넝쉰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대총통 쉬스창의 지원을 받아 안복구락부 내부에서 쉬수정을 싫어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기미구락부를 성립시켰는데 이때 진윈펑도 기미구락부에 포함되어 직계와 봉계의 지지를 받았다. 1919년 1월 돤즈구이에 이어 육군총장에 임명되었다.

첸넝쉰 내각은 5.4운동을 이유로 사직했고 그 뒤를 이은 궁신잔 내각도 재정 문제로 사퇴하면서 육군총장이던 진윈펑이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었다. 이후 돤치루이를 견제하려는 차오쿤, 장쭤린의 지지로 1919년 9월 24일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0월 31일 중의원이 진윈펑의 국무총리 임명을 승인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쉬수정은 안복구락부를 멀리하는 진윈펑을 좋게 보지 않아 그의 임명에 반대했고 안복계 이사호를 재정총장에 임명하는 것에 동의하고 나서야 12월 3일 참의원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진윈펑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며 무력통일을 신봉하는 돤치루이와 충돌을 빚었다. 1920년 3월 호남에 주둔하던 우페이푸가 북상하자 돤치루이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하남독군 자오티를 자신의 처남인 우광신으로 교체하려는 하남독군 교체 파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돤치루이는 진윈펑에게 마구 비난을 퍼부었고 반대로 차오쿤은 우광신의 하남독군 임명을 인정할 수 없다고 압박하여 2월 27일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쉬스창의 만류로 2월 29일 사직이 반려되었다. 하지만 진윈펑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돤치루이가 안복구락부를 이용하여 주수모를 새 총리로 기용하자고 주장하며 진윈펑 내각을 흔들었고 3월 4일 안복 삼총장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내각 붕괴 직전에 이르렀으나 쉬스창의 중재로 삼총장이 사퇴를 철회하여 내각 붕괴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돤치루이는 노골적으로 진윈펑의 하야를 요구했다. 버티지 못한 진윈펑은 1920년 5월 9일 사직을 결정하고 차오쿤과 장쭤린에게 이를 알린 후 5월 14일 하야했다. 이후 해군총장 싸전빙이 총리를 대리하는 사이 쉬스창은 주수모를 총리로 내세웠으나 장쭤린이 진윈펑의 사직을 만류하며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중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기도했고 진윈펑은 이를 장쭤린에게 알렸다. 장쭤린은 봉천으로 돌아가 관내진출을 준비했고 돤치루이가 직예군벌 토벌령을 내리면서 1920년 안직전쟁이 발발했다. 참전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을 거느린 환계였지만 이들은 실전경험이 부족했고 안직전쟁에서 환계는 직계와 봉계의 연합군에게 허망하게 패배했다. 정권을 잡은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자신의 사돈인 진윈펑을 지지하여 1920년 8월 11일 진윈펑이 다시 총리가 되었다. 진윈펑은 차오쿤의 의형제이기도 했으며 우페이푸와 동향사람이라 직예군벌 역시 진윈펑을 지지했다.

2.3. 2차 진윈펑 내각

하지만 진윈펑 내각이 출범하자마자 직계와 봉계의 세력싸움이 벌어졌다. 쉬스창은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진윈펑에게 명해 1921년 4월 25일, 톈진에서 진윈펑,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이 참여한 4거두 회의를 열게 했으나 군비 배분 문제, 광동의 쑨원 문제 등으로 갈등이 심각했다. 직예성장이며 차오쿤의 동생인 조예가 봉천군벌이 직예군벌의 여섯배나 되는 금액을 타갔다고 비난하자[2] 진윈펑은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 내무 행정 살림살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도처에 국세가 걷히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입 벌려 중앙의 군비 타령이니 내각의 살림살이를 한번 형님이 맡아 해 보시오."

그러자 조예는 화가 나서 살림 못하면 꺼지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찻잔을 던졌고 진윈펑이 맞받아 싸우는 드잡이가 벌어졌다.(...) 화가 난 진윈펑은 사직하려 했으나 차오쿤, 장쭤린, 왕잔위안이 연명으로 진윈펑 내각 지지 통전을 발표하면서 체면을 회복한 진윈펑은 사퇴를 취소했지만 이때 육군총장직에는 물러나 채성훈을 후임으로 삼았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진윈펑은 일부러 왕잔위안, 차오쿤, 장쭤린과 도박을 해서 큰 돈을 잃어주고 이들을 기생집에 데려가 대접하여 정치적 불화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직예군벌은 진윈펑이 장쭤린의 사돈이라 봉천군벌에 편향적이라고 비난했으며 봉천군벌은 진윈펑이 우페이푸를 양호순열사로 임명한 일을 두고 직예군벌에 편향적이라고 비난했다. 두 군벌 사이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 된 진윈펑은 1921년에 찾아온 심각한 경제난에 대처하지 못하고 1921년 11월 교육부, 참모부의 파업에 이어 육군총장 채성훈, 해군총장 이정신, 사법총장 동강 등이 모두 사직을 청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진윈펑 내각에 불만이 많던 봉천, 직예 양 세력과 은행단을 장악한 교통계는 진윈펑 내각이 무너지게 방치하였다.

12월 12일, 교통계의 예궁차오(葉恭綽)와 장쭤린이 톈진에서 회담했는데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을 반드시 개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쭤린에게 의지하려던 진윈펑은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1921년 12월 17일 총사퇴하고 톈진의 외국 조계지에 은거하였다. 12월 18일 쉬스창이 진윈펑의 사직을 비준하면서 외교총장 옌후이칭이 내각총리 대리로 있다가 량스이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량스이 내각도 우페이푸의 공격으로 한달만에 붕괴되고 직계와 봉계의 갈등이 폭발하여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2.4. 국민혁명 시기

이후 중앙은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계가 차지했다. 직계는 1923년 회선 사건을 일으켜 직계의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했으나 중국국민당이나 안휘군벌의 잔여세력, 만주에서 세력을 보전한 봉천군벌의 불만을 사고 있었고 1924년 9월 직예군벌이 상하이를 탐내서 절강독군이자 안휘군벌인 루융샹을 상대로 일으킨 강절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2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벌은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펑위샹이 내부에서 일으킨 북경정변으로 몰락했고 봉천군벌이 천하를 차지했다. 하지만 봉천군벌도 강남으로 무리한 확장을 하다가 직예군벌의 잔여세력인 강소독판 쑨촨팡이 일으킨 손봉전쟁에서 패하였고 이어 반봉사건까지 겪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봉천군벌은 펑위샹을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우페이푸, 쑨촨팡, 옌시산과 연합하여 1926년 직봉풍전쟁을 벌여 펑위샹을 토벌했다.그동안 진윈펑은 톈진에서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1926년 돤치루이 임시집정정부가 대고구 사건과 3.18 시위 이후 국민군의 압박으로 하야하자 우페이푸는 차오쿤 헌법의 회복과 국무원 복구를 선언했다. 주도권 싸움에서 역습을 당한 봉천군벌은 진윈펑을 내각총리로 주장했지만 우페이푸는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지지했다. 결국 옌후이칭이 국무총리로 복직하면서 진윈펑의 내각 조직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데 1926년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양호와 하남을 지배하던 우페이푸 국민혁명군에게 두들겨 맞아 몰락하고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도 국민혁명군의 공격에 몰락했다. 이때 쑨촨팡은 진윈펑을 돤치루이의 대표로 초청하여 우광신, 유종기, 양문개, 우페이푸의 대표 웅병기 등과 함께 난징에서 회의를 열고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려 했지만 진윈펑이 돤치루이를 영수로 추대할 것을 주장하자 우페이푸의 대표 웅병기가 진윈펑을 마구 비난하면서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장쭝창을 중심으로 북양군벌의 단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쑨촨팡, 장쭝창 등은 장쭤린을 중심으로 뭉쳐 장쭤린을 안국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중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구실로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려 했다. 1926년 12월 22일, 장쭤린은 우쥔성, 장쭤샹 등과 논의하여 진윈펑을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려 했고 진윈펑은 신이 나서 총리에 취임하려 했지만 우페이푸가 진윈펑을 반대하면서 진윈펑의 국무총리 임명은 다시 한번 무산되었고 대신 국무총리 서리 겸 외교총장 구웨이쥔이 1927년 1월 12일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장쭤린이 대원수에 취임하면서 판푸 내각이 수립될 때도 배제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면서 베이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쭤린은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려 했는데 이때 진윈펑도 장쭤린과 함께 기차에 타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톈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영사관에서 진윈펑의 친우인 사카니시 리하치로가 사람을 보내 진윈펑에게 할말이 있으니 하차할 것을 청했고 이에 진윈펑은 판푸와 같이[3] 톈진에 내려 자택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황고둔 사건이 터져 장쭤린이 죽은 것을 듣게 되었다. 진윈펑이 톈진에서 내린 것은 진윈펑이 휘말려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본의 계획으로 추정된다. 장쭤린이 죽은 것을 알고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2.5. 말년과 죽음

정치적 후원자였던 장쭤린이 몰락한 이후 그야말로 완전히 별볼일 없는 인물이 되어서 존재감없이 살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경 공부로 소일을 보냈다.[4] 중일전쟁 국공내전까지 지켜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톈진에 거주했으며 1951년 톈진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취퉁펑을 대신 꼽는 경우도 있다. [2] 조예의 주장으로는 직예군벌은 고작 50만원의 군비를 타갔지만 봉천군벌은 200만원을 타가고 거기에다 100만원의 추가 지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3] 판푸의 경우, 장쭝창을 만나야 한다고 내렸다. [4] 이때 같이 절을 다니던 사람이 쑨촨팡인데 쑨촨팡은 1935년 불공을 드리던 중 자신의 죽인 시공빈의 딸 스젠차오에게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