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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58년 6월 29일 세조에 의해 책록 3 1466년 연회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한 혐의로 인한 제명 4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3등에서 2등으로 책록 5 1455년 10월 22일 세조에 의해 책록 6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한 제명 7 1699년 숙종 때 복권 8 1691년 숙종 때 복권 9 1504년 아들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0 1455년 11월 12일 세조에 의해 책록 11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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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汀
? ~ 1466년 ( 세조 12년)
1. 개요
조선 세조 대의 무신이자 정치깡패. 본관은 청주(淸州).세종대왕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인 혜빈 양씨와는 친가로 9촌 숙질 사이로, 혜빈 양씨가 양정의 한 항렬 높은 9촌 고모뻘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갔다.
참고로 공교롭게도 후대 서로 죽고 죽였던 외척 대윤-소윤도 마찬가지로 친가로 9촌 관계였으며, 패자 쪽( 윤임ㆍ혜빈 양씨)이 승자 쪽( 문정왕후ㆍ 윤원형ㆍ양정)보다 항렬이 한 칸 더 높았고 역사의 무대에 더 일찍 데뷔했으며 장남ㆍ장손( 인종ㆍ 단종)의 후견인으로 있었으므로 명분도 더 있는 입장이었다가 일종의 역전패를 당한 것이지만, 승자 쪽이 결국은 배드 엔딩으로 역사에서 퇴장하였거나 역사적으로 악명을 남기게 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딱히 승리했다고 하기도 어렵게 된 점도 마찬가지이다.(...)
2. 생애
양정은 고려말 도첨의정승을 지낸 양기의 5대손이다. 양기는 원나라 사람으로, 공민왕의 왕비로 고려에 시집온 노국대장공주의 배종으로 수행하여 고려에 입국했다. 양정은 양기의 아들 중 양만수의 4대손으로 양만수의 동생 양지수는 혜빈 양씨의 증조부이고 양지수의 아들 호조판서 양첨식이 혜빈 양씨의 할아버지이다. 아래로 양지(楊沚)·양호(楊浩)·양형(楊泂) 등의 동생들이 있었고, 슬하에 양유원(楊有源)·양득원(楊得源)·양계원(楊繼源)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양정은 한명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에게 가담했고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두루 공을 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직접 찔러 죽이고, 숨어있던 김종서를 찾아내 살해했던 핵심 공신이 바로 양정이다.
그 후 북방 무인으로 일하다가 신숙주와 홍윤성의 야인 토벌전에도 참가했으나, 신숙주가 문관이라며 무시하고 멋대로 몰래 병사들을 이끌고 여진족들을 공격하다가 역으로 공격받아 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신숙주는 양정의 실수를 눈감아주었다. 이렇게 신숙주를 무시하다가 망신당한 일을 제외하면 딱히 세조의 공신답게 별 일은 없었지만...
3. 최후
후일 세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해 처형당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세자(예종)에게 양위할 것을 종용했다가 목이 날아간 일이 그것이다. 사실 그가 저지른 짓은 엄청난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대신이 임금에게 진지하게 양위를 종용하기는 딱 4번 있었다.- 태종 6년(1406) 8월 태종이 충성심 테스트를 하고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며 쇼를 했을 때이다. 하륜은 "정말로 선위하시려 하신다면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고, 이무(李茂)는 "세자가 20-30세는 된 뒤에 선위하시라"고 하였다.
- 세조 12년(1466) 6월 양정 사건이다.
-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자꾸 명나라로 넘어갈 눈치를 보이자 "이왕 갈거면 광해군에게 양위하고 가라"고 말하려다 말아 그나마 미수에 그친 것이다.
- 광무 7년(1907)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자 7월에 친일파 송병준이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의 뜻을 보이려면 퇴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고 종용한 일이다.
사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세조 12년(1466) 6월, 양정이 오랜 북방 근무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오자 세조는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고자 했다. 이에 세자와 신숙주, 한명회, 병조판서 김국광(金國光), 이조판서 한계희(韓繼禧), 도총관(都摠管) 심회(沈澮), 위장(衛將) 오자경(吳子慶), 허형손(許亨孫), 신주(辛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서거정(徐居正) 등의 대신들이 참석했고 한창 흥이 무르익던 찰나였다.
당시 논쟁 공연이란 것을 즐기던 세조는 그 날도 가장 총애하던 두 논쟁꾼인 최호원과 안효례를 데려와 논쟁을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둘은 세조가 '니들 기분 나쁜 거라도 있냐?'라고 재촉까지 했는데도 신경전을 벌이며 입을 열지 않았고, 술에 취한 세조는 "임금이 명하는데 이것들이 말을 안해? 니들이 그러고도 신하냐?"라고 화를 내며 둘을 하옥시켰다. 좌중은 급격히 싸늘해졌는데 세조가 이런 적은 한두 번은 아니었다. 술만 들어가면 까불었던 정인지[1]는 논외로 치더라도 바른 말 한 번 했다가 강맹경은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권람은 최단임 좌의정 기록을 세워야 했다. 아마 세조의 특성상 술김에 확 하옥시키긴 했어도 며칠 안 가서 풀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양정이 갑자기 세조 앞에 꿇어앉았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대화이다.
양정(楊汀)이 앞에 나아와 꿇어앉아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어찌 과도하게 근로(勤勞)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주(君主)는 만기(萬機)를 모두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양정이 대답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로지 한가하게 안일(安逸)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말하는 바는 곧 사시(四時)의 순서(順序)에 성공(成功)한 자는 물러간다는 것인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부터 왕위(王位)에서 물러나 스스로 편안하려고 했으나 감히 하지 못하였다." 하니, 양정이 말하기를, "이것이 신(臣)의 마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서방(西方)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방의 인심(人心)도 또한 이와 같던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그 누구들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도 죽고, 경(卿)도 또한 죽어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죽는다면 국가의 일은 누가 다스리겠는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차차(次次)로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하고, 즉시 승지(承旨) 등에게 명하여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게 하여 즉시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승지(承旨) 등이 부복(俯伏)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성인(聖人)은 천하를 관가(官家)로 여겨서 집안에 현명(賢明)한 아들이 없으면 도부(陶夫)를 구하여 천하를 물려 주었는데, 하물며 지금 세자(世子)의 재주가 능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이미 덕이 적어서 백성의 마음이 떠나버리었다. 양정은 정직한 신하인 까닭으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의 자리에 오래 있겠는가?" 하면서 신면(申㴐)[2]을 재촉하여 나가서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게 하니, 신면이 마지 못하여 나가서 상서원(尙瑞院)에 이르러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옥새(玉璽)를 받들고 앉아 있으므로, 또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재촉하니, 윤필상이 나가서 신면(申㴐)과 더불어 서로 이르기를, "신(臣) 등이 비록 죽더라도 어찌 감히 옥새를 받들어서 바치겠는가? 차라리 임금의 명령을 어긴 죄를 받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 등은 어찌 옥새를 가지고 오지 않는가? 옛날에 우리 태종(太宗)께서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그때의 여러 신하들이 즉시 옥새를 가져 오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도 어찌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가? 만약 큰 일이 이미 정해졌다면 어찌 대보(大寶)를 전하고 전하지 않는 데에 관계되겠는가? 그것을 속히 가지고 오라." 하고, 또 홍도상(洪道常)·정난종(鄭蘭宗)·이수남(李壽男) 등에게 명하여 이를 재촉했으나, 홍도상 등도 또한 상서원(尙瑞院)에 와서 죽어도 명령에 응하지 않기로 기약하였다.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과 의빈(儀賓) 정현조(鄭顯祖)·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등에게 명하여 옥새를 가져 오게 했으나 부(溥) 등도 또한 나가서 머뭇거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양정(楊汀)이 아직도 어탑(御榻) 아래에 있다가 부르짖기를, "임금의 명령이 이와 같은데, 승지(承旨) 등은 어째서 대보(大寶)를 가져오지 않는가?" 하면서 이를 재촉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다. 임금이 또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가서 가져오게 하니, 세자가 마지 못해서 보루문(報漏門) 밖으로 나갔다. 승지 등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대보(大寶)는 신(臣) 등이 맡아서 지키는 바이니, 신 등이 마땅히 친히 받들어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세자가 도로 들어왔으나 복명(復命)하기가 어려워서 겉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전상(殿上)에서 슬피 통곡하면서 되풀이하여 진청(陳請)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마지 않았다. 이때 밤이 이미 삼경이 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잔을 올리게 하고는 마침내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 신숙주가 물러와서 신면(申㴐)에게 이르기를, "이미 임금의 뜻을 자세히 알았으니, 임금의 노여움을 더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신면이 옥새를 받들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오니, 임금이 명하여 대보(大寶)를 강녕전(康寧殿)에 두게 하고, 신면을 불러 술잔을 올리게 하고서 말하기를, "그대는 신숙주의 아들이니, 진실로 인물(人物)이 무리가 각기 같지 않도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헤어져 나갔다. 신숙주·한명회·한계희 등은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남아 있으면서 아뢰기를, "양정(楊汀)의 말은 정상(情狀)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법사(法司)에 내려서 추국(推鞫)하여 중한 형벌을 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신숙주 등을 불러 다시 술자리를 베풀고는 전교(傳敎)하기를, "양정이 어찌 정상이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을 한 것뿐이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기를, "양정의 말은 도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은 양정이 공신(功臣)이라 하여 차마 가두어 국문(鞫問)하지는 않고 논의하다가 시간이 넘어서야 파하였다. |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과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 윤자운(尹子雲) 등이 강녕전(康寧殿)에 들어가서 양정(楊汀)에게 과죄(科罪)할 일을 친히 아뢰니, 임금께서 글로써 유시하기를, "양정(楊汀)이 나를 도와 나라를 안정시켜 이름이 훈록(勳錄)에 성대(盛大)하고 변경(邊境)을 지킨 지도 몇 해가 되었으므로, 바야흐로 칭찬하여 더욱 존중(尊重)하려고 했었으나, 성품이 본디부터 경망하고 우매하여 나의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것을 꺼려서 빨리 왕위(王位)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언설(言說)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죄주기를 청하고 종친(宗親)과 훈신(勳臣)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건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지나친 일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의로운 일과 다름이 없다. 대체로 두 마음을 품고 금장(今將)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대악(大惡)이니, 공의(公議)에 힘써 따라 사정(私情)을 끊고 죄를 정하여 8도(道)에 돌리게 하는데, 부자(父子) 이외에는 모두 연좌(緣坐)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말하기를, "양정의 죄는 비록 크지마는, 그대로 훈로(勳勞)가 있으니 참형(斬刑)은 그 자신(自身)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즉시 명하여 양정을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목 베게 하고, 그 아우 양지(楊沚)·양호(楊浩)·양형(楊泂) 등을 모두 파직하게 하고, 그 아들은 그대로 가두어 두게 하였다. 양정은 처음에 매우 미천(微賤)했으나 팔뚝 힘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임금이 정란(靖亂)할 적에 공로(功勞)가 있었으므로 존귀(尊貴)해져 양계(兩界)에서 오랫동안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훈구(勳舊)로서 오랫동안 외방에서 노고했다고 여겨서 평거(平居)할 때 늘 마음에 불만(不滿)을 품고 있었다. 그가 평안도(平安道)에 있을 적에는 교만하고 방종하여 꺼림이 없어서 사람을 죽인 것이 또한 많았었다. 한명회(韓明澮)가 여러 번 말하기를, '평안도는 양정에게 진수(鎭守)시킬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니, 임금께서도 또한 양정을 소환(召還)하려고 했으나, 그 대신할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이를 지체(遲滯)시켰더니 양정이 더욱 분개하여 원망함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주대(奏對)하는 데에 조리가 없었고 말이 문득 불손하였으므로 마침내 대륙(大戮)에 이르게 되었다. |
사실 양정의 성격을 보면, 정말 불만이 많았다면 이 정도는 양반일 것이다. 세조 본인이 제일 큰 적으로 여긴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친 이는 임어을운이지만 그 아들인 김승규를 죽인 이는 본인인 만큼 공도 나름 있다. 문제는 그런 공을 세우고도 변방에서 고생해야 했는데 이쯤되면 인조 때의 어떤 반란이 생각나지 않는가? 양정의 공이 이괄보다 크지는 않아도 적어도 세조 말마따나 10년 넘게 변방이나 지키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즉 공에 비해 보상이 작은데 불만이 있다면 세조에게 양위를 요구할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직접 군대를 끌고 와서 쓸어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절제사 직을 맡았을 정도로 함경도에서 군권을 많이 쥐고 있었기에 불만이 있다면 양위가 아니라 폐위를 시키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도 있다. 그래서인지 박시백 화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중앙에 불려와서 화려한 한양생활이 시작될텐데 왜 굳이 그런 말을 꺼냈겠냐며 불만이 있다면 변방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고생하며 나라를 지키는데 중앙에 있는 왕과 대신들은 이렇게 노닥거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
그러나 세조는 결국 양정이 죽은 3년 만에 예종에게 양위했다.(...) 양위한 다음 날 죽었기는 한데 과연, 죽을 상황이 아니었으면 양위하기나 했을지...
4. 기타
- 세조의 공신이나 세조의 미움을 사서 세조에게 처형당한 공신이 1명 더 있는데 바로 봉석주이다.[4] 양정이 그냥 세조에게 양위하라고만 했다면 봉석주는 아예 세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겁이 나서 자백했다가 죄가 너무 중하여 1465년 자기 아들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런데 어째 양위 드립을 한 양정은 유명한데 역모를 꾸민 봉석주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양정이 그냥 망언만 한 정도라면 봉석주는 아예 자기가 옹립한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대역죄인인데 말이다. 역대급 사건의 주모자임에도 양정의 양위 파동과는 달리 봉석주의 역모가 나오는 대중매체는 아직 하나도 없다. 봉석주가 처형당한 해는 1465년으로 봉석주가 처형당한 다음 해 1466년에 양정이 세조에게 저런 양위 드립을 친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역모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세조와 훈구파들에게 양정이 저런 망언을 한 것인데 정말 간도 크다.
5. 대중매체
- 1984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서는 배우 장보규가 연기했다. 장보규 배우는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들에서 양정 역 외에도 회천문 시리즈 -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 인현왕후 시리즈 - 민장도(남인 측 민암의 아들로 장희재와 정치적 동지, 갑술환국 때 곤장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사함 / 참고로 KBS 2002-2003 장희빈 드라마에서 김학철 배우가 맡았던 역이 민장도 역), 대원군 시리즈 - 일본 공사 다케조에(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과의 약속을 저버림) 등을 연기했다.
- 1990년 KBS 드라마 < 파천무>에서는 배우 송종원이 연기했다. 험상궂은 얼굴에 사람 잡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행보로 작중 등장인물들이 '짐승 같은 인간'이라 부를 정도로 광폭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가 단종의 사망까지만 그린 탓에 최후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세조가 공신들에게 "너희들이 역적질을 하지 않는 한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주고 평생 보살펴 주겠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역적 발언을 하다가 목이 달아난 양정의 최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1994년 KBS 드라마 < 한명회>에서는 배우 선동혁[5]이 연기했다. 한명회의 추천을 받아 수양대군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여 극 초반부터 한명회와 친하게 지내고 한명회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등 비중있게 등장하며 최후도 상세하게 묘사된다. 공이 큰데도 외지를 맴돈다는 불만은 있었지만 세조의 충신으로 나오는데 한양으로 돌아온 후 한센병으로 얼굴까지 망가진 세조의 꼬라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 "산송장에 가까운 전하를 옥좌에 앉혀두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 차라리 물러나 몸 관리나 하며 천수를 누리시는게 진정 전하를 위한 길이다"라는 이유로 세조더러 물러나라 청했다가 결국 목이 달아나는데 양정이 참수당할 때 한명회가 곁에서 그걸 지켜본다.
-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에서는 배우 손호균이 연기했다. 굉장히 괄괄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김질을 보고 "네놈은 집현전 학자들을 팔아먹고 부귀영화 잘도 누리냐?"하고 힐난을 한다. 세조에게 양위 운운한 것은 변방을 전전한 것에 대한 진심어린 원망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며 세조에게 양위하라고 강권한다. 처형 직전에는 "내 장담하건대 네놈의 아들놈은 절대 보위에 못 오를 것이다."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처형된 이후 세조는 "한명회가 뒤에서 사주하지 않았다면 그 놈이 어찌 그랬겠는가"라며 한명회를 더욱 멀리하지만 양정이 독단으로 벌인 일.
- 2011년 JTBC 드라마 <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조경훈이 연기했다. 계유정난에서 악역 포스를 내뿜으며 단종의 충신들을 죽인다. 이후 힘든 북방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같은 정난공신들이 양정을 고생했다고 위로해주기는커녕 조롱하고 놀려먹으며 양정은 세조가 있는 궁궐에서 펑펑 울며 "어찌 저한테 이러실 수 있냐"고 울부짖는데 계유정난 당시 악역 포스는 어디로 가고 안쓰럽게 보인다. 결국 세조에게 양위 드립을 쳤다가 사형당하며 "네놈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정난공신들에게 양정의 죽음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 정난공신들이 한명회의 집에 찾아가서 "양정이 저렇게 될 때까지 뭐했냐"며 한명회가 차려준 밥상을 뒤집고 한명회의 옷을 더럽히고 한명회의 집 바닥에 침을 뱉는다. 한명회의 아내는 "그렇게 억울하면 지들이 대신 죽어줄 것이지 왜 여기와서 행패냐"며 정난공신들에게 삿대질을 하고 남편에게는 "저런 말 신경쓰지 말라"고 하나 한명회도 양정의 죽음이 충격이었는지 갑자기 실성한 듯 울면서 "전하,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정녕 우리의 결의를 잊으신 것입니까?"라며 흐느낀다. 물론 한명회의 아내는 "이 사람이 실성했냐"며 당황한다.
- 박시백은 자신의 저서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래도 이제 호화로운 한양 생활이 시작되는 마당에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북방에서 병사들과 같이 고생을 하여 노고를 아는 인물이 한양에서 세조와 신하들이 노는 꼴을 보고 속이 뒤틀려서 그랬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
- 2019년 개봉한 영화 < 광대들: 풍문조작단>에서도 양위 에피소드가 짧게 나온다.
[1]
이 양반은 술먹고 대놓고 반말을 하는등 술먹고 사고를 많이 쳤지만 워낙 업적이 많은데다 나이도 많아서 세조가 봐줬고, 83세까지 무탈하게 장수했다.
[2]
신숙주의 아들이다.
[3]
'소설 한명회'에서는 세조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실 세조는 말기에 꿈에 혜빈 양씨가 나타나서 침을 뱉은 자리에 종기가 났고 이로 인해 크게 고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정말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만큼 스트레스도 매우 컸을 테고.
[4]
봉석주는 토색질로 악명이 높았는데
용재총화의 기록에 보면 나무상인들이 강원도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뗏목으로 묶어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오는데 봉석주가 하인들을 시켜서 출발하기 전날 밤에 몰래 뗏목 나무들에 못을 박아놓고는 한양에 도착하면 '내 이름이 쓰인 못이 박힌 나무는 모두 내 산에서 벤 나무다' 라고 나무상인들을 협박하여 갈취하는 등 갈취를 상습적으로 했다 한다.
[5]
1995년 KBS 드라마 <
서궁>에서는
최명길 역,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이숙번 역, 2008년 KBS 드라마 2014년 <
대왕 세종>에서는
최윤덕 역,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이지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