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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3:36:08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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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7대 부의장
박중양
朴重陽|Bak Jung-yang
파일:Park_Jung-yang.jpg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초명 박원근(朴源根)
창씨명 호추 시게요
朴忠重陽
야마모토 신
山本信
출생 1872년 5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現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사망 1959년 4월 23일 (향년 86세)
경상북도 대구시 북부출장소 침산동 1652
(現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사인 노환, 폐질환,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해악(海岳)
일소(一笑)
본관 밀양 박씨[1][2]
직업 정치인
종교 유교 ( 성리학)
소속 조선총독부 중추원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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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상공부 주사
군부 기사
경상북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평안북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충청남도 관찰사
충청남도장관
황해도지사
충청북도지사
자제단 단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조선인 위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유학 생활과 귀국2.3. 관료 생활2.4. 국권 침탈 이후2.5. 태평양 전쟁 무렵2.6. 해방 이후
3. 저서4. 여담5. 어록

[clearfix]

1. 개요

조선 말의 관료,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신념형 친일반민족행위자. 비슷한 신념형 친일파로 윤치호, 이규완 등이 있다. 또한 이승만, 양기탁 등과 함께 3세대 개화파 인물이다.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으로 밀양 박씨 규정공파 대동보 16권 396쪽에 수록되어 있다.[3]

구한말 경상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때는 충청남도 도장관, 황해도 도지사, 충청북도 도지사 등을 지냈으며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일본식 이름은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첫 이름은 박원근(朴源根), 는 해악(海岳), 일소(一笑)이다.

흔히 친일파의 전형처럼 알려진 일본의 국내 득세를 눈치보다 편승하며 부역하기 시작한 기회주의형 친일파 인사들과 달리[4], 철저히 조선인에 대한 동족혐오 감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일본이 더 낫다고 확신한 '신념형 친일파'였다. 조선인이었음에도 자신의 동족인 조선인의 민족성을 대단히 미개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공공연하게 동족 혐오 신념을 드러내고 다녔다. 기회주의형 친일파가 일제의 패망 이후 친일 노선에서 재빨리 탈피한 데 반해 끝까지 의리(?)를 지켜 일본 제국이 조선보다 우월했다고 믿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붙잡혀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조차 대놓고 " 일본은 우리에게 죄가 없고, 나는 친일파가 맞으며 잘못은 없으니 차라리 빨리 죽이라"고 강변했다.[5] 이처럼 극단적인 자국 혐오 신념의 확신형 친일파가 된 결정적 이유로는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 인사들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연좌제의 논리로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는 조선에 충격을 받아 절망한 나머지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6] 물론 연좌제는 당연히 대단히 비인간적인 악습이지만 그렇다고 친일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1872년 5월 3일에 태어난 박중양은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7] 가계는 불확실하다. 다만 밀양 박씨 규정공파 대동보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일단은 밀양 박씨일 가능성이 높다.[8] 아버지 박정호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마름 노릇을 했다고 한다.[9] 할아버지 박기숙 등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계에 대해 정리한 블로그 글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 분량이 매우 방대하다. #

동생 박수양, 박계양 등이 있었는데, 박수양이 30대 젊은 나이에 서울을 방문했다가 적리병에 걸려서 갑자기 사망한다. 원래 선산이 양주군에 있었는데 양주군 아미타불고개 근처에 묻혔다.[10]

원래 박중양의 조상들이 살던 곳은 대구인데, 후일 대구에 정착한 이유는 일본에 상권을 넘겨주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다.[11] 실제로 후술할 대구 읍성이 철거된 이후 일본인들은 대거 성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유년기에 개화 사상을 접해 유홍기, 김옥균, 박영효 등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김옥균을 존경했는데, 그가 김옥균의 죽음 이후 친일파가 된 이유도 이와 연관이 깊다.

2.2. 유학 생활과 귀국

청년 무렵에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897년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0년에 아오야마가쿠인 중등부를 졸업하고 경시청에서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경찰 제도와 감옥 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밀정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1903년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 업무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야마모토 신(山本信)'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04년 졸업 후 귀국했다.

2.3. 관료 생활

파일:박_중_양.jpg

귀국 직후 대한제국 관리서 주사가 됐으나 사직하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 고등 통역관으로 참전해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였다. 그해 11월 돌아와서 농상공부 주사가 됐다.

1905년에 진주 판관을 거쳐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 1년간 거처하였다. 1년 후 군부기사가 되고 그해 군부 파견원으로 의친왕 일본을 방문할 때 통역관으로 의친왕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뒤 대구 판관으로 부임했다가 바로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승진했다.

이때 대구읍성 철거를 주도했다. # 당시 대구의 상권은 성 안은 조선 상인들이, 성 밖은 일본인들이 장악했는데, 일본 상인들은 대구 읍성 안까지 진출하길 원했다. 일본 상인들의 요구가 가시화되자 박중양은 대구 읍성을 헐어버렸다. 읍성은 도시의 경계를 구분 짓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당 지방을 방어하는 국가시설이다. 국방시설을 맘대로 철거한 시점에서 박중양은 이미 대한제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민생을 외적들에게 열어준 것이었다. 당연히 조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 덕분에 책임을 면했다. 박중양의 후반생 은거지가 된 대구 침산동 침산(砧山)[12]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본인들이 주선하여 선물한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 있다.[13] 대구읍성 철거 당시 박중양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 아들 박문웅과 박무웅을 도피시킬 준비를 미리 해놓았다.

1907년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와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고, 대구읍성 철거 때와 전라남도 재직 시의 면세 등의 수완으로 이임 때는 금시계를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전에 충청남도 관찰사가 됐다. 일본의 한국 병탄에 슬퍼하지 않고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며 팔아먹은 나라에서 공직생활을 이어나갔다.

2.4. 국권 침탈 이후

파일:160px-1933.03.01_朴重陽.jpg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충청남도 도장관을 거쳤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자제단 본부를 조직, 발기하여 단장을 맡고, 대구 자제단과 경성 자제단을 이끌었다.[14] 전국에서는 3.1 만세 운동 해산 권고 운동, 만세 반대 운동과 시위대 해산, 진압 운동을 벌였다. 1921년 황해도지사, 1923년에는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에는 속리산에 갔다가 길이 비포장 도로라서 보은군청 토목 기사를 시켜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길을 닦았다. 농번기에 농민을 동원하니 원망이 자자하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획을 밀어붙여 1주일가량 걸려 비포장 2차선 도로를 설치했다.[15] 농번기 강제 동원에 일당도 주지 않자 보은군민들은 화가 나서 보은군청 공무원과 토목기수를 단체로 밟아버리며 집단 난타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같은 해에 사람을 차로 치어 생명을 위독하게 한 일도 있었으며, 속리산에 갔다가 여승을 강간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16]으로 사직하고 대기 발령 조치되었다가 1925년 사퇴했다. 1927년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

1928년 다시 황해도 도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어 1939년까지 재직했다. 1936년부터는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에 여러 번 조선인의 참정권 허용론을 건의하였다. 물론 이는 조선을 명백한 일본의 통치 하에 둔 상태에서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기존 친일파들의 자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친일 논리에 기반한 건의였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서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위원이 총 97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이때 박중양은 박영철(朴榮喆), 김연수 등과 함께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조선인 위원으로 위촉되어 총독의 자문 사항을 심의했다.

2.5. 태평양 전쟁 무렵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그해 10월 22일 부민관에서 출범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아 태평양 전쟁 학병 출전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 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일본 육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고자 자비를 들여 싱가포르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1942년 조선인 몫의 일본 귀족원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17], 처음엔 웬일인지 고사했다.[18]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5년 4월 3일에 박상준(朴相駿) 등 6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귀족원 의원과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되었다.
파일:박중양이.jpg

벼슬이 높아지고 중년 나이가 되자 박중양은 개화장(開化杖)[19]이라는 지팡이를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박작대기)'였다.[20]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 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 직접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끔씩 고급 음식점에 출입하기도 했다. 박중양은 지배층 일본인에게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어지간히 지위가 높다는 일본인조차 박중양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새로 온 도지사 고등법원장, 교장, 판사 등이 박중양한테 부임 인사를 왔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키미 키타카(君、来たか。/ 자네 왔는가?)"라고 했다고 하며, 밉게 보인 순사는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이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지위가 자신보다 낮은 일본인들에게 갑질도 하고 싫은 소리도 거침없이 했다.

1910년대에 노점상 할머니의 물건을 발로 차는 일본인 순사를 막대기로 두드려 패고, 순사 입에 땅에 떨어진 떡을 물리게 하여 시장바닥에 조리돌림을 시켜서 민심을 수습한 일화가 있다. 이를 두고 일본 제국의 일원이 된 조선인을 황국의 순사가 괴롭힐 수 없다는 교묘한 친일 사상에 입각한 행동이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사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박중양은 일본인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 사람이었고 백성들에게 횡포가 심해서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일제가 내선일체 사상을 본격적으로 주입하며 표면적으로 본국인과 조선인을 같이 동원하려 한 것은 1930년대 이후다.

2.6. 해방 이후

파일:朴重陽.jpg

해방 이후 박중양은 당연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려 규탄받았지만 오히려 일본 제국을 변호하며 자신에게 엄벌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장관 존 리드 하지, 아서 러치, 이승만을 찾아가서는" 나같은 놈이 진짜 친일파이니 나를 죽이면 된다." 하고 강변했다. '좁은 조선이 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 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21]는 것이다.

고위직으로 활동한만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은 당연하고, 이후 1949년 1월에 반민특위가 친일행위 혐의로 체포하였다. 반민특위 조사관의 진술에 의하면 박중양을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22]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로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박중양은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あ、ここが昔の第一銀行だね、そう!そう!(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 그래!)”고 한다. 출처(하단)[23]

민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이광수, 최남선이나 질질 짜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빈 최린 등과도 다른 시종일관 뻔뻔한 태도에 반민특위 조사관이나 방청객들 모두 의아해하다가 점점 공판에서 쏟아내는 항변에 아연실색했고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박중양은 모든 반응을 무시했다.

이를 두고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이광수, 최남선 등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나 반성과 같은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24]

법정에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하였고 양반, 상놈 같은 신분 차별이나 지역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조선 총독부에 대한 반감은 일본인에 대한 맹목적인 편견의 결과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인격자라고 주장하여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광수 등 대부분 친일파가 자신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식으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과는 대조적. 공판 기간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한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작 박중양이 그렇게 찬양하던 일본 역시 지역 갈등이 강하고 신분제를 폐지했다지만 부라쿠민을 차별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리켜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나라라고 비판했는데 일본제국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국민을 비국민으로 몰아 억압했고 군인들에게 카미카제를 강요하는 등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국가였건만 박중양은 일본제국에 아무런 비판 의식이 없었다. 박중양이 얼마나 편협적인 시각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

그리고 그렇게 조선이 증오스럽고 동경하는 일본인이 되고 싶으면 왜 진작에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조선에 살고 있냐며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박중양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조선인을 향한 박중양의 어록도 본인을 향해 하는 말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가짜 애국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이들을 비아냥대는 내용의 자료를 대량 인쇄, 배포했고 소주영 정신과에서 정신감정을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명동성모병원에도 끌려갔다. 나중에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당할 위기에 있다가 1959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그로부터 4개월도 지나지 않은 1959년 8월 14일 아들 박문웅도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3. 저서

4. 여담

5. 어록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때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
이완용은 시대가 낳은 피해자요 희생자였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김윤식, 권형진[25], 조희연,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짓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 잘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26]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
한국인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다른 사람 욕설, 험담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노력하고 큰 결과물을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만큼의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불평불만을 품는 자들이 많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
조선인들은 나는 깨끗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깨끗함, 착함과 선량함을 요구한다.


[1] 규정공파 22세손, 시조 66세손. 족보)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선 박중양의 본관을 반남 박씨로 기술하였는데, 이름 끝의 양(陽) 자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중양과 그의 형제들을 제외하면 일족 중 반남 박씨 항렬을 쓴 사람이 전혀 없으며, 그들 형제 이름조차도 실은 개명한 이름이다. 그리고 밀양 박씨 규정공파 족보에 이 일족의 이름이 나오기에 일반적으로 밀양 박씨로 보는 편이다. [3] 고조부 得煥- 증조부 行默- 조부 基𪬵-부 鼎鎬 - 본인 重陽(초명 원근) - 아들 淳聖(일명 문웅)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4] 사실 매국노들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 윤덕영처럼 철저히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판 경우가 있는 반면 고영희처럼 개화파 출신 매국노도 있고 이근택처럼 현실에 좌절하여 타락한 경우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 조중응처럼 조선을 다른 외세로부터 지킬 방법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경우까지 있다. [5] 반면 이광수 같은 기회주의형 친일 인사들은 반민특위에게 싹싹 빌었으며, 김원근 같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협력했고, 자신의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을 솔직하게 구술했다. 그리고 이종형 같은 반공주의자로 신분을 세탁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라고 우겨댔다. [6] 이 사건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후쿠자와 유키치(1984년부터 2024년까지 만 엔 지폐에 그려진 인물로 유명하다.)가 조선 국민을 위해서 조선 멸망을 축하한다고까지 말하게 된 계기도 김옥균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였다. [7] 이방, 호방 등 아전 [8] 박중양이 대한제국에 제출한 자신의 이력서에 스스로 밀양 박씨라 기록했으니 이게 맞을 것이다. [9] 아버지 박정호의 벼슬은 박중양이 출세해서 추증된 '증직'이다. [10] 이 아미타불고개가 의정부시 자일동 자금동의 아미타불고개인지는 알 수 없다. [11] 출처 [12] 일명 박짝때기산, 현 침산공원 [13] 출처 [14] 3.1 운동 해산과 유언비어 척결, 시위자 귀가 설득 등을 하던 단체였다. [15] 출처 [16] 술에 취한 상태에서 양순재라는 이름의 비구니를 겁탈한 뒤 자살하는 것을 방조했다. 이 일로 동아일보는 1925년 3월부터 한 달 가까이 박중양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 [17]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 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1997년) pp.235 [18] 이미 1932년에 박영효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9]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산처럼 손잡이가 둥글게 굽은 지팡이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없다가 근대화 이후에 들어온 지팡이라고 '개화장'(개화 지팡이)이라고 불렸다. [20] 출처 [21] 현암 조상원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년) 381페이지 [22] 현재 서울 KB국민은행 명동 본점 자리 [23] 다만 이 출처에서는 박중양이 백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이었다느니,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였다느니, 일자무식에 돈 한 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등 (상단에 서술되어 있듯 박중양은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했다.) 잘못된 정보도 있기 때문에 신뢰성이 다소 의심스럽다. [24] 갑신정변 이후 목격한 조선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한 신념형 친일파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근대 문명국가로 진입한 일본을 매우 동경했다. [25] 權瀅鎭, 1858 ~ 1907. 4. 28. [26] 기생하여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