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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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 주도 세력 |
2차 왕자의 난 |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 |
조사의의 난 | 이성계, 조사의 | |
이징옥의 난 | 이징옥 | |
단종 복위 운동 | 사육신 | |
김처의의 난 | 김처의 | |
이시애의 난 | 이시애 | |
임꺽정의 난 | 임꺽정 | |
정여립의 난 | 정여립 | |
송유진의 난 | 송유진 | |
이몽학의 난 | 이몽학 | |
이괄의 난 | 이괄 | |
이인거의 난 | 이인거 | |
삼수의 옥 | 정인중 등 노론 | |
이인좌의 난 | 이인좌 | |
나주 괘서 사건 | 윤지 | |
정유역변 | 홍상범 | |
황사영 백서 사건 | 황사영 | |
홍경래의 난 | 홍경래 | |
임술농민봉기 | 유계춘 등 진주 사람 | |
이필제의 난 | 이필제 | |
이재선 추대 사건 | 안기영 등, 이하응 | |
임오군란 | 김장손, 유춘만 등 오군영의 일원 | |
갑신정변 |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 |
1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이재면 추대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동학 농민 혁명 |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 | |
2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 |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 이두황 등 조선군 훈련대 | |
갑오의병 | 김원교, 서상철 등 | |
을미의병 | 유인석 등 조선 의병 | |
춘생문 사건 | 임최수, 이도철 등 친러파, 친미파 | |
신축민란 | 이재수 | |
을사의병 | 최익현 등 조선 의병 | |
정미의병 | 이인영 등 13도 창의군 | }}}}}}}}}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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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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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배경 | <colbgcolor=#FFF,#1f2023> 갑오사변 · 을미사변 · 삼국간섭 · 을미개혁 | |
전개 | 1차 시도 (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 아관파천) | ||
관련 인물 | 정동파 | 이범진 · 이완용 · 이재순 · 이윤용 · 안경수 · 윤웅렬 · 윤치호 · 이하영 · 민상호 · 김홍륙 · 임최수 · 이도철 · 남만리 · 이규홍 | |
친일 내각 | 김홍집 · 유길준 · 어윤중 · 김윤식 · 조희연 · 장석주 · 정병하 · 서광범 · 김종한 | ||
기타 인물 |
카를 베베르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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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 아라사공사관 (주한러시아공사관) · 미국공사관 (주한미국공사관) · 경복궁 | ||
기타 | 한러관계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일본 제국 · 독립협회 | }}}}}}}}} |
春生門 事件
1. 개요
1895년 11월 28일 조선에서 발생한 사건. 친미·친러파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해 미국공사관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아관파천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아관파천은 춘생문 사건을 검토하고 일어났다.2. 배경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촉발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만 및 요동 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넘겨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압박하여 요동 반도 할양을 무위로 돌린다.그러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하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가까이했다. 명성황후의 측근들인 민씨 척족들도 러시아와 가까웠다.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을 앞세워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진행하려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연대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결국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모의로 수배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죽인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고종을 통제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힘을 유지할 것으로 여겼다.
3. 사건의 진행
고종은 일본이 언제 자신을 암살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일본의 독살을 염려해 서양 선교사들이 제공한 통조림으로 연명할 정도였다.한편 친일 세력의 반대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여 김홍집 내각의 실각을 노렸다. 소위 정동파로 불리는 친미파와 친러파들이 이를 주도했는데 구체적으로 시종 임최수와 참령 이도철 등이 계획을 수립하고 시종원경 이재순과 정동파 이범진, 이윤용, 이완용, 윤웅렬, 윤치호, 김홍륙 등이 직간접적으로 호응했으며 친위대 중대장 남만리, 이규홍 등 장교들까지 가담했다. 서양 선교사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도 돕겠다고 나섰다.
11월 28일, 임최수 등 30여명이 훈련원에 들어간 후 친위대 병력 800여명이 경복궁으로 움직였다. 당초 계획은 건춘문을 뚫고 들어가 고종을 동소문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북장문과 춘생문 사이의 담을 넘어갔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친위대 장교인 안경수가 외부 대신 김윤식에게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려 한다고 밀고 했고 이진호도 서리 군부 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했다. 이에 궁궐의 숙위병들이 거세게 저항했고 어윤중이 친위대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해 결국 거사는 실패했다.
4. 사건 이후
수사 과정에서 사건의 배후에 김홍집 내각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법무 대신 장박이 재판장으로서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재판 결과 주범으로 몰린 임최수와 이도철은 사형에, 이민굉, 이충구, 전우기는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이재순, 안경수, 김재풍은 태형 100대 후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이후 이재순만은 종친이라는 이유로[1] 사면되었다.
일본은 거꾸로 이 사건을 국왕 탈취 사건으로 몰아 갔고 명성황후 시해범들을 석방하는 논리로 이용했다. 즉, 자신들이 경복궁에 들이닥쳐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나 이 사건이나 다를 게 없다는 억지였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세 달쯤 뒤에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 수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 1년 정도 살게 된다. ( 아관파천) [2] 이후 관련자들은 모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