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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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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gold>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Armed Force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소련 국방부 휘장.svg
[1] 휘장
창설일 1946년 2월 26일
해체일 1994년[2]
국가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소속 소련 공산당 / 소련 국방부[3]
상비군 4,258,000명 ( 1990년)[4]
예비군 75,000,000명 (1990년)
참전 / 지원 6.25 전쟁[5](1950~1953)
베트남 전쟁[6](1960~1975)
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병역제도 징병제[7]
전신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
육군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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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55,260대
장갑차(APCs/IFVs) 70,577여 대
견인포 95,124문
헬리콥터 7,341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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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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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142기
전투기 6,890여 기
수송기 2,135여 기
폭격기 1,200여 기
정찰기 1,000여 기
조기경보기 185여 기
공중급유기 210여 기
미사일 5,361여 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5 306여 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7 54여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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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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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5여 척
순양함 32여 척
구축함 74여 척
프리깃함 32여 척
재래식 잠수함 154여 척
핵잠수함 227여 척
초계함 185여 척
고속정 430여 척
상륙함 32여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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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국방비 총합 3190억 달러(1988년)[11]
2600억 달러(1990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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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통칭 소련군()은 소련 국군 당군[13][14] 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대였다.[15]

2. 상세

파일:attachment/소련군/godotgoda.jpg
그대는 해를 거듭하며 강인해지는,
소비에트 인민의 군인이라!
[16]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 직후에는 약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냉전 말기에는 총병력이 500만 명 이상이었다.[17] 국방예산은 2,000억 달러(1982년)였다. 해마다 어마어마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중국의 국방예산이 2,400억 달러(2021년 시점)였으니, 국제 금 시세( 트로이 온스당 $400→$2,000)를 고려하면, 1982년의 소비에트 연방은 2021년의 중국이 지출한 액수의 5배만큼 국방예산에 투자했다는 뜻이다.[18]

소련군은 1917년 10월 혁명 과정에서 조직된 적위대[19]와 1918년 창설된 소비에트 러시아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ве́тской Росси́и)을 시초로 탄생했다. 이후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소련이 건국된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С СССР,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이라는 이름으로써 창설되었다.

소련 육군은 창설 초창기인 1922년부터 1946년까지는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20], 약칭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 혹은 노농적군()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1946년에는 타 국가기관의 개칭과 더불어 소련 군대(Сове́тская А́рмия)라는 명칭으로 개칭했다. 해군의 경우 마찬가지로 1922년부터 1946년까지는 로농적위함대(해군)[21], 1946년부터 1991년까지는 소련 함대(해군)[22]으로 개칭하여 소련 붕괴 시까지 유지되었다.

지상군, 공군, 방공군, 전략로켓군이 속한 소비에트 군대와 해군 함선들과 해군 비승함 직별들이 속한 소비에트 함대로 나뉘었고 여기에 각 군종이 배속되는 형태라서 서방권과 대비해 군종별 독립성이 낮은 통합군의 성격을 보였다. 즉, 소련군은 예하에 육해공을 두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군대'와 '소비에트 함대'의 단 두개 군종만 있었다고 봐도 된다는 얘기다. 계급 체계도 군대형과 함대형으로 나뉘어, 승함 직별 해군과 해안경비대[23] 등만 쓰는 함대형 계급 일부를 제외하면 군대형 계급 체계로 통일돼 있었다. 따라서 해군 소속이더라도 해안포 부대, 해군보병대, 해군 항공대와 같은 비승함 직별이나 의무병과, 법무병과와 같은 일부 직별은 군대식 계급을 썼는데, 이들의 경우 군종에 구애받지 않고 인사 이동을 수시로 했기 때문이다. 즉, 한 군의관이 공군 비행단 의무대에서 근무하다 해군 순양함으로 발령받는 식의 모습이 비교적 흔했다. 특히 오데사 군관구, 발트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는 아예 해군항공사단 자체를 파입부대로 두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각각 흑해함대, 발트함대, 북방함대의 주둔지였기도 했으며, 해당 부대들 모두 NATO군과 대치하고 있었지만 지역 특성상 함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이러한 구조가 된 것이다.[24] KGB 소속인 소련 국경수비대와 MVD(소련 내무부) 소속인 내무군은 군에 속하지 않는 준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아예 편제 자체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완전 별개의 군은 아니었던 관계로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에는 국경군도 편제 외 부대로 들어가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집단에는 아예 둘 다 편제되어 있었다. 이 둘 모두 그 지역의 사회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복 자체는 군대 소속이라면 무조건 남색, 함대 소속이라면 무조건 검은색이었다. 해군보병대 해군항공대도 비록 군대식 계급 체계를 따라갔지만 정복만큼은 검은색이었다. 이는 정치장교도 마찬가지였다.[25]
창군 초창기에는 종심작전의 창안 등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7년 대숙청으로 장병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부실해졌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초창기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소련군은 독소전쟁 초창기 추축국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험과 전략을 축적하면서 종심작전을 부활시키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성장한다.[26]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 시점에서는 군사력이 워낙 강한데다,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명시한 공산당 이론과 냉전이 겹치면서 서구권으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27]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병력과 전차, 항공기를 준비하고 육군 병력의 70% 가량을 유럽지역 국경에 공격형으로 배치하고 있었다.[28] 하지만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약 10여년 가량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고전하면서 자국이 보유한 군사역량을 크게 소모했다. 특히 소련군은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부담을 안겼고, 이는 1980년대 후반 소련 경제가 악화되면서 소련이 해체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이 소련군에서 자국군으로 전환을 마치는 1993년까지는 독립국가연합 통합군으로써 유지되었다.

3. 수뇌부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스타프카라는 일종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후에는 공산당 당원인 통수권자를 제외한 모든 수뇌부는 국방장관, 국방차관들로만 이루어졌다.

3.1. 1941년

파일:attachment/stav1941.gif
독소전쟁 발발 당시 스타프카의 구성원.

위줄부터 국방인민위원 세묜 티모셴코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세묜 부됸니 원수, 해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대장

3.2.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직전이다. 전략로켓군은 1959년에 창설되어 수뇌부 라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추가로 지상군도 1946년에야 별도로 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 때까지는 지상군 총사령관이 존재하지 않고 총참모장이 육군을 직접 지휘하는 구조였다.
최고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
최고사령관 대리[29] 노농적군 정치총국장 해군 정치총국장
파일:external/b86a38.medialib.glogster.com/portrait-of-joseph-stalin-1879-hi.jpg 파일:게오르기_주코프_160633_html_m5e46b6c0.jpg 파일:Щербаков_Александр_Сергеевич.jpg 파일:Иван_Васильевич_Рогов.jpg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 겸
대원수[30]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
상장[31]
이반 로고프
해군보병상장
총참모장 겸
지상군 총사령관
해군 총사령관 겸
해군인민위원
공군 총사령관 방공군 총사령관
파일: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사진.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znetsov1.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er_Novikov.jpg 파일:Gromadin_Mihail_Stepanovich_general_1941-45.jpg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해군원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항공상원수[32]
미하일 그로마딘
포병상장

3.3. 1985년

소련군의 전성기 시절 지휘부이다. 스탈린 사후 최고사령관 직책은 거의 폐지에 가까운 상황이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국방위원회 의장까지 겸직하여 그 역할을 수행했다.
국방위원회 의장 국방장관 군대 및 해군 정치총국장 총참모장 WP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
파일:Константи́н_Усти́нович_Черне́нко_02.jpg 파일: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2.jpg 파일:Lizichev.jpg 파일:1000000785.png 파일:빅토르 쿨리코프.jpg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
알렉세이 리지체프
대장[33]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원수
빅토르 쿨리코프
원수
지상군 총사령관 해군 총사령관 공군 총사령관 방공군 총사령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파일:바실리 페트로프 원수(컬러).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0%90%D0%B4%D0%BC%D0%B8%D1%80%D0%B0%D0%BB_%D0%93%D0%BE%D1%80%D1%88%D0%BA%D0%BE%D0%B2.jpg 파일:marshal_yefimov.jpg 파일:알렉산드르 콜두노프.jpg 파일:블라디미르 톨루브코.jpg
바실리 페트로프
원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원수
알렉산드르 예피모프
항공원수
알렉산드르 콜두노프
항공상원수
블라디미르 톨룹코
포병상원수

3.4.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인 1991년 기준이다. 스탈린 사후로는 소련 국방위원회 의장이 암묵적으로 최고사령관 역할을 해왔으나, 1990년에 "소련 대통령은 소련군 최고사령관을 겸직한다."라는 조항을 소련 헌법에 명시하면서 다시 한 번 최고사령관 직책이 활성화되었다.
최고사령관 국방장관 군대 및 해군 정치총국장 총참모장 WP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
파일:external/c510383.r83.cf2.rackcdn.com/mikhail%20gorbachev%208-165x247.jpg 파일:Yevgeny_Shaposhnikov.jpg 파일:nikolai_shlyaga.jpg 파일:Viktor_Samsonov.jpg 파일:petr_lushev.jpg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항공원수[34]
니콜라이 슐랴가
상장[35]
빅토르 삼소노프
대장
표트르 루셰프
대장
지상군 총사령관 해군 총사령관 공군 총사령관 방공군 총사령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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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세묘노프
상장
블라디미르 체르나빈
해군대장
표트르 데이네킨
항공상장
빅토르 프루드니코프
항공상장
유리 막시모프
대장

4. 발전

4.1. 창군과 발전

러시아 제국 러일전쟁 패배와 국내 혁명운동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결국 전비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제정에 뒤이어 전선을 맡았으나, 결과적으로 전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 틈을 타서 볼셰비키 당이 휘하 소수병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대다수가 군대나 군사에 정통하지 못한 비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볼 때, 군대처럼 힘있는 집단이 반란을 시도할 경우 체제가 전복되는 것도 가능했다.[36] 영관급 이상의 경험많은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세력의 편에 섰고, 이들은 공산당에 대항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당의 무력은 병사 소비에트와 연결된 적위대뿐이었다.

그 후로 러시아는 1918년부터 20년까지 러시아 내전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 후유증은 192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불안한 틈을 타고 다른 나라 군대들이 러시아를 침범하기도 했다. 미군, 일본군도 백군을 지원하며 공산세력과 싸웠지만 결국 승리는 붉은 군대에게 돌아간다.

초기의 적위대는 계급제를 완전히 없애려 했다. 붉은 군대의 전신으로도 볼 수 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은 선거로 뽑히던 전통 때문에, 적위대의 지휘관은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병 출신들이 지휘관을 맡게 됨에 따라 내전 초기에 적위대는 연패했다. 다만 이게 이유라고 보기도 어렵고 단순히 장비와 훈련도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여지가 많긴 하다. 레프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를 개편해서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위에서 능력자를 지휘관에 임명하는 체제로 바꾸고, 이름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개칭했다. 문제는 "능력자"들이 대부분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게 도입한 것이 정치장교 제도. 그러나 트로츠키 아래서 계급제도는 끝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는 계급제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부대 내에는 오로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같은 직책만이 존재하게 됐다. 예외는 장군 뿐이었기에, 군의 계급은 사실상 '병사, 장군' 이 둘 밖에 없었다. 사실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그런 직책이 계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병이나 기병들로만 싸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처음에는 이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군이 복잡해지면서 불거졌다. 복잡한 조직에서 너도나도 같은 계급이다 보니, 지휘관의 명령을 듣더라도 병사들이 잘 따르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이외엔 중간 책임자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통솔하기 힘들었지만, 전시에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누구 하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안 되는지 관심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때문에 트로츠키에 이어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37]이 된 미하일 프룬제는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었다. 그동안 붉은 군대는 500만 대군으로 성장한데다가, 기갑부대, 공수부대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계급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어, 결국 1935년 붉은 군대에 계급제도가 마침내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의 경험은 소련의 군사학과 군사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1차대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에서 내전을 겪은 소련군은 부족한 예비 전력을 철도로 이동시키면서 전선 곳곳을 틀어막았고, 간신히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위협받던 전선을 증강하기 위해 철도로 대규모 부대가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 내전은 또한 제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보병 사단들은 전쟁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여러 전선을 오가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참전자들은 준비된 전력과 전략 예비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게 되었다.

내전 과정에서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한 대다수의 전투들을 큰 경험으로 삼아, 이와 같은 전장 환경에서 모든 전술적인 작전들을 전체 전역으로 통합하여, 적 후방 깊숙한 목표를 겨냥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의 2가지 원동력은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당시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기동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기동의 전제 조건은 고도로 기동화된 공세 전력이었고, 러시아 내전에서는 이점을 무장 열차와 차량, 특히 기병 전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4.2. 종심작전의 부상

러시아 내전이 종료되고 붉은 군대는 전선군 내지 야전군 규모의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같은 1회의 전략적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누적되며 연속적이고 장기적인 작전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한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위와 같은 소련 군사학계의 논의에 공감하여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결합시킨 소련식 기동전 전술인 종심전투교리를 완성시켰다.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는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트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빨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투를 일반적인 전략의 문맥에서 본다면, 당시 소련 군인들은 개별 전투의 전술과 전체 전쟁의 전략 사이에 위치한, 용병술의 새로운 수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간적인 수준은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저술한 책 제목인 작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작전술은 전체 전략적 작전이나 전체 전역의 맥락에서 대규모 부대의 작전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상급 지휘관들의 영역이자,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군사 행동이다. 영어로는 'Operational Art'.

모든 전선에서 충분한 밀도의 부대로 적을 고착시킨 후(견제군의 역할) 선택된 지점을 보병, 포병, 전차가 결합된 충격으로 돌파할 수 있으며, 그 간극을 통하여 항공기 및 기계화 부대의 지원을 받는 기동군을 적 후방에 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종심전투교리는 1929년부터 소련군의 표준 전술로 정착됐지만 아직 공업화되지 않은 소련에게는 다소 꿈같은 전투교리였으며 그 영역이 전술 차원에만 미쳤고 아직 작전술의 범위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투하쳅스키 이론을 지지해 준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심전투 교리의 실행을 위한 대규모 기갑세력 양성 등 붉은 군대의 현대화 계획을 적극 집어넣었다. 이를 통해 1936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련 군사학계의 최고 걸작인 종심작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종심작전은 현대 러시아군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 등의 공산권 표준 전투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영국의 리델 하트와 프랑스의 샤를 드골 기동전 교리를 상부에 내놓았지만 번번이 무시당하고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또한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시대임을 감안하면 종심작전의 등장은 큰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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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훈련중인 소련군. 1935년.

그러나 결국 대숙청의 칼바람이 붉은 군대에 몰아닥쳐서 투하쳅스키가 처형당하자, 종심작전은 철저히 부정당하게 되었고 소련의 군사 사상은 크게 퇴보하고 만다. 그 결과는 겨울전쟁 독소전쟁 초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혹독한 경험을 치른 소련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숨은 투하쳅스키 지지자들에 의해 종심작전이 부활하고(앞으로 종심작전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베를린을 점령해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가상적국이었던 소련군의 군사 교리를 특수작전교범(Special tactics)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해 OPFOR Battle Book ST 100-7 (156쪽 분량) 공개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

다음은 소련군 작전술의 핵심들이다.

이를 위해서 강조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4.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6월 독소전쟁(대조국전쟁) 발발 이후, 12월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약 5개월간 소련군이 날려먹은 병력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해 약 600만으로서, 전쟁 직전의 총전력을 거의 탕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여기에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전투기와 전차의 손실량은 각각 2-3만대에 육박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첫번째로 대숙청으로 조직력과 지휘력이 매우 약화된 점, 두번째로 부적절한 병력 배치, 세번째로 2년간 실전경험을 쌓아 최강의 군대로 성장한 독일군의 가공할 전력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독일군 명장들인 하인츠 구데리안,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이 역시 참전했다.

이렇게 엄청난 병력을 날려먹었기 때문에 야전의 허리가 되는 경험 많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일선 지휘를 맡으면서 1943년 말까지 독일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전쟁터란 현세의 지옥에서 살아남으며 사관학교가 아닌 실전에서 교리를 학습하게 된 초급장교나 부사관들의 레벨업이 계속되고, 사병들도 경험을 쌓으면서 초급장교나 부사관으로 계속 승진함에 따라 소련군의 전력은 향상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대숙청 이후 쾌속 승진한 40대 고급지휘관들의[38] 지휘가 세련되어 가면서 소련군은 점점 소프트웨어 면에서 독일군에 맞설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1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독일이 1943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총력전 전 산업 총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곳에서는 아예 공장 전체의 설비가 며칠 만에 해체되어 우랄 산맥 동쪽에서 조립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의 대량 생산을 달성함으로서 초기에 손실했던 장비와 무장을 만회하고도 넘칠만큼 보급을 확보하게 되었다. 분명히 개별 무기의 성능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독일군이 우수했지만, 소련은 개별 성능은 독일에 미치지 못해도 생산 비용, 소비 자원, 생산 물량 등을 고려한 총합은 독일보다 우수한 것으로 하드웨어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특히 미군이 개입한 이후로는 소련의 정복이 아니라 전선 안정화를 목표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치타델 작전을 실시했다가 위와 같이 기량이 향상된 소련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측으로 기운다. 이후 소련군은 투하쳅스키가 생전에 꿈꾸었던 종심작전 교리를 십분 발휘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여 결국 승리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만주 작전에서 인상적인 기갑 웨이브 공세를 발휘함으로써 서방측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공포감을 줬다.

4.4. 냉전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미국에게 큰 위협을 느끼고 동유럽 위성국들과 함께 집단방위동맹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였다. 소련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방세력과 직접적으로 맞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동유럽 위성국들로 하여금 완충지대를 만들어서 2차대전과 같은 사태를 다시는 겪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보다 더 강한 국력을 보유했으며, 2차대전에서도 소련의 생산시설은 반 이상 파괴되었지만, 미국은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이 단기간에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40년대 말과 50년대 초 기준으로는 소련 입장에서 마냥 불리하지는 않았다. 미군이 총 병력 144만명 정도로 축소된 반면 소련군은 여전히 440만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재래식 전력을 대규모로 확충하고 현대화하는 것보다는 핵개발이 더 싸게 먹힌다는 게 소련 정치가들의 결론이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돈이 많이 드는 재래식 전력을 줄이고, 이 재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대신, 비교적 돈이 적게 드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으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 했다.[39] 이는 2차대전으로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고, 흐루쇼프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해임함으로써 일단 군부의 반발을 눌렀지만, 군부의 불만은 지속되었다. 이렇게 핵무기와 로켓을 강조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스푸트니크 차르 봄바이다.

하지만 1964년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새롭게 등장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핵전력 강화에 더해서 재래식 전력의 대대적인 확충까지 추진하게 된다.이렇게 하여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소련이 군사비 지출로는 미국을 앞서는 상황이 되는데 이러한 군비경쟁은 소련 해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고 하였지만 급진적인 개혁, 개방 정책을 단시간에 밀어붙이다가 혼란 속에 1991년 소련은 붕괴하였고, 소련군은 해체되었다. 후신은 러시아군 참조.

4.4.1. 공군과 방공군

소련은 탄생한 1920년대부터 그 거대한 영토를 방위하기 위해 공군에 많은 투자를 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소련군하면 전차 부대와 보병들의 머릿수를 앞세운 파상 공세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소련은 그 태동기부터 강력한 공군을 건설하는데 있어 동시기 독일 못지 않은 심혈을 기울인 나라다.

소련의 공수부대와 공군은 2차 대전 시기부터 이미 위세를 떨쳤고 냉전기에도 그 영향이 이어져 냉전기간 동안 소련 공군은 숫자 면에서 미국을 훨씬 앞지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 뒤쳐져 공군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 공군에게 격납고에서 부터 산산조각난 경험 때문에 대공 미사일과 화기류 개발에 큰 관심을 쏟았다.

2차대전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한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원수는 흐루쇼프에게 대규모 공군 건설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국방비를 줄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치중하여 대공미사일과 대공무기 개발에 열심이었고, 특히 대공미사일 성능은 뛰어났다.

그러나 80년대 초까지도 전투기와 요격기는 숫적 우세를 앞세우는 저성능기 위주의 항공기가 대다수였고, 이는 이란 혁명 당시 입수된 미군 항공기와 그 교범을 분석한 소련군이 Su-27 MiG-29 등을 배치할 때까지 별다른 대책이 없이 이어진다.[41] 그나마 항공기의 속도나 기동성, 미사일의 사정거리 등의 하드웨어 수준은 미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항공 전력에게 매우 중요한 레이더, 통신 등 전자 기술은 미국에 비해 확실히 부족했다.

소련군이 대공 체계를 아래에 언급하는 공군-방공군 체계로 이원화 하였고 지상 관제소의 관제에 따라 수동적으로 대공 체계를 수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족한 전자 기술 때문에 제한된 전술기의 체급에 전자 장비를 탑재하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었고, 결국 지상 관제의 지원을 받아야 제대로 된 대공 체계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공군과 방공군을 분리하여 방공군에게 방공전투기 + 고고도 대공미사일, 군사위성을 담당시켰다. 우주군도 방공군 소속이다. 일반 공군에는 전투기와 전략, 전술 폭격기를 운용하게 했다. ICBM이나 중거리탄도탄 같은 경우는 전략로켓군에서 담당했다. 그 이외에도 특이한 점은 수송기 세력인데, 워낙 영토가 넓다보니 유사시 신속대응군 역할로서 공수부대의 규모와 임무가 매우 중요하였다. 때문에 수송기의 성능과 그 숫자 등에서 우월한 경향을 보인다. 냉전기에 생산된 소련 수송기들은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민간화물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자주 사용될 정도.

5. 병역제도

소련은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했다. 복무 기간은 육군과 공군은 2년이며 해군, KGB 내무군이나 국경경비대는 3년이었는데, 3년 복무지들은 지원제였던데다 대우가 2년 복무지들에 비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긴 복무기간에도 많은 이들이 몰렸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육군 3년, 해군 4년이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에 1년 줄였다. 현재 러시아도 징병제를 실시하지만, 복무 기간은 1년이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84만 5천명의 상비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소련의 대학생들은 ROTC처럼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련 수업만으로 예비역 장교 자격이 부여되어 일종의 대학판 면제로이드 혜택을 받았다. 현재 러시아의 대학생들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있으나, 병역 혜택 인가받은 학교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참고로 소련군에 많은 예산이 배정된 것에 비하면 소련군의 복지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는데, 사병들의 급여는 월 3루블 80 코페이카로 애들 용돈 수준의 폰돈을 받았으며, 병영식도 지역이나 부대에 따른 편차가 상당했다. 휴가일도 2년 합쳐서 10일 정도로 짧았다. 물론 그 대신에 제대하면 나라에서 직접 직장을 알선해주고, 결혼하면 집을 주던 시절이라지만, 어쨌든 당대 기준으로도 미군 등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었다. 그 대신에 주말에는 집에 가는 것이 가능했다.

6. 문제점

6.1. 정치장교의 전횡

흔히들 정치장교가 활용된 가장 큰 이유를 군에 대한 불신이라고 알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원인은 러시아 내전 시절부터 독소전쟁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의 수준이 대단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의무교육이 보편화된것은 1920년대였고, 당연히 내전 시기에는 문맹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글을 쓰기는 커녕 읽기조차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 의무교육이 보편화되면서 글을 아예 못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독소전쟁 당시에도 이렇게 교육수준이 떨어졌을 때 자랐던 세대들이 사회일선에서 한창 일하던 때였던지라 해당 세대들도 병사로 배치했다. 이렇게 병사들이 질적으로 낮다 보니 이를 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병사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치장교를 부대마다 배치하게 되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군사분야에 미숙한 정치가들이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다 보니 독소전쟁 초기까지는 그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치장교 시스템이다. 소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같은 권한에 같은 계급의 정치장교가 1:1로 따라 붙었다. 이들은 당의 이론과 지시를 군이 잘 따르도록 지시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군의 계급, 명령체계에서 독립된 조직으로 공산주의 이론이 우선적으로 교육되었다. 사실상 부대 안에 지휘관이 두 명인 셈이라,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두 배로 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군의 작전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더욱 문제를 심화시킨 요인은 정치장교들이 권한은 큰 주제에 군사적 자질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차라리 그냥 지휘관이 둘이면 또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정치장교들은 당원 출신으로 군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련군은 군인 둘이 아니라 군인 한명과 말 안 듣고 하는 일마다 꼬치꼬치 태클 거는 민간인 한명에게 지휘받고 있었다.

결국 정치장교가 있는대로 병크를 터뜨리는 사이 병사들은 무슨 명령을 따라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적 부대의 공격에 사이좋게 전멸하고 마는 식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이 가뭄에 콩나듯이 군사적 재능이 있거나 최소한 개념이라도 있는 정치장교가 있었던 부대는 다행히 두 지휘관이 쿵짝이 맞아 괜찮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사례는 드물었기 때문에 정치장교가 간섭하는 부대는 대부분 참혹한 최후를 맞기 일쑤였다.

다행히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에게 신나게 털린 이후에는 정치장교가 작전에 간섭하는 일은 사라지고 정훈, 심리상담 등의 업무만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뛰어난 지휘관들의 지휘와 병사들의 애국심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이후 소련군 내부의 각종 병영부조리 문제는 그나마 정치장교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지휘관들이 병영 내 부조리를 모른 척해도 정치장교들이 당의 뜻이라면서 근절을 추진하면 따라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정치장교는 그나마 군내에서 만연해있는 문제를 어느정도 정화하는 역할이라도 했다. 예를 들어 데도프시나나가 그 때도 심하지만 이 때는 정치장교들이 개입해서 어느정도 억제가 가능했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정치장교 또한 없어지자 러시아군은 데도프시나가 심해진 상태다.

6.2. 대숙청

위에 언급한 정치장교들은 소련군의 전투력을 작살내는 요소였고,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장성과 장교들은 이 때문에 정치장교를 없애던가 권한을 줄이려 노력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탄압했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이념적으로도 군대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당시 정식 명칭조차 '노동자 농민을 위한'인 붉은 군대가 이 따위 짓을 하는 걸 본, 혹은 참여한 장교들은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었고, 얼마 안되던 당 소속의 군인들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는 스탈린의 의심병을 부채질했고 결국 대숙청이 벌어졌다.

더불어 전시대적인 사고에 매몰되고 대숙청을 견뎌내기 위해 정치싸움이 실제 업무를 잠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던 장성들의 난횡으로 필요한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지고 그 폐해가 가장 큰 예를 들자면, 그리고리 쿨리크 육군 원수가 자기가 미는 전차인 A-43 개발에 방해된다며 T-34 개발, 생산 반대공작을 수없이 벌여 생산률을 6분의 1로 깎아버리고, 기관단총, 지뢰를 도입 못하게 막고 대구경 화포를 써야 한다며 45mm 53-K포와 76mm ZiS-3 사단포의 생산을 모조리 중지시키는 등 소련군에 온갖 군사적 삽질을 저질렀던 것이 있다. 이 와중에 T-34의 설계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코시킨 기사가 과로와 쿨리크의 방해로 인해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렇게 빨던 A-43은 실용성 문제로 생산 취소되고 대구경 화포도 2차 대전 발발 때까지도 기술적 문제로 개발 못하고 본인은 독소전쟁 때 독일군에게 포위당해서 부대도 버리고 혼자서 일반병인 것처럼 변장 탈출하는 추태를 벌이는 등 원균급의 삽질만 해대다가 훈장압수, 원수자격 박탈 처분당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전화로 스탈린 뒷담화를 까다가 결국 숙청. 그리고 스탈린은 쿨리크가 소련군에 싸지른 똥들을 2차대전 내내 엄청난 희생으로 감당해내야 했다.

6.3. 부실한 병참 능력

분명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지만, 사실 그 내실은 부실한 측면이 많았다. 특히 방대한 전투력을 유지시킬 보급 능력과 지원 병과에서 그 열악함이 두드러졌다. 이는 소련이 무리할 정도로 군대의 체급을 키워놓는 바람에 발생한 문제였다. 당장 전투 장비의 수량을 유지하는 데만 여력을 집중하다보니 전투 분야를 뒷받침해주는 비전투 분야가 부실해진 것이다. 비전투 분야에서의 열악함은 보급, 의료, 교육 및 훈련까지 그 전반에 걸쳐 심각했다. 이러한 문제는 전신인 러시아 제국군도 가지고 있었고, 후신인 현대 러시아군에도 계승되었다.

냉전 당시 동구권과 서구권은 경제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권과 대등한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은 소련에 심각한 부담이었다. 바르샤바 조약에는 소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중진국 수준이었던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중심국가였다. 반면, NATO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이자 경제강국 및 군사강국들이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독자노선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도 준 가맹국이었다.[42] 소련과 미국만 일대일로 비교하면 70년대 후반 즈음에는 소련군의 국방비가 얼추 미군과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력과 동맹국의 양질에서는 나토가 바르샤바 조약국에 비해 넘사벽이었다.

결국 무리하게 키운 체급을 유지하느라 군수지원, 의료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실해졌다.
약이 부족했어요. 그 흔한 요오드조차 없었죠. 제때 공급이 안 되거나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거나 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네 계획경제란 거였어요. 그래서 전리품이나 수입품을 어떻게든 구해다 썼어요. 나는 늘 일본제 일회용 주사기를 20개씩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일본제 주사기는 부드러운 폴리에틸렌 포장에, 덮개를 벗기면 곧바로 주사를 놓을 수 있게 돼 있거든요. 우리 소련제 "레코르트"(소련제 주사기)는 주사기를 싼 종이가 툭하면 찢어져서 살균이 안 되기 일쑤였어요. 거기다 주사기의 반은 주사가 안 되고 주사기 플런저가 아예 움직이지 않았어요. 쓰레기나 다를 바 없었어요.
대체혈액은 유리병에 0.5리터씩 담겨 공급되었어요. 중상자 한 명을 치료하는데 2리터의 혈액이 들어가거든요. 즉 혈액 4병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아무리 머리를 쓴다 해도 어떻게 전장에서 그 병들을 한 시간이나 팔 높이만큼 쳐들고 있겠어요?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병을 날라봐야 얼마나 나를 수 있죠? 이탈리아인들이 뭘 만들었는지 아세요? 1리터짜리용 폴리에틸렌 봉지예요. 얼마나 튼튼한지 군화를 신고 그 위에서 펄쩍 뛰어도 터지질 않아요.
그리고 흔한 붕대, 살균붕대조차 소련제는 형편없었어요. 포장지가 참나무로 됐는지 붕대보다 더 무거웠죠. 태국제, 오스트리아제 같은 수입제품은... 왜 그런지 더 가늘고 하앴어요. 탄력붕대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프랑스제, 독일제가 있었지만... 전리품으로 얻었죠.
우리 국산 부목은 또 어떤 줄 아세요? 그건 스키 타기에나 좋지, 의료용 기구가 아니었어요. 그런 걸 한 사람이 몇 개나 휴대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영국제 부목을 가지고 다녔어요. 팔뚝용, 정강이용, 대퇴붕요, 이렇게 각각 신체 부위별로요. 지퍼가 달려 있고 공기를 불어넣어 부풀릴 수 있었죠. 팔을 끼워맞추고 지퍼를 채워 고정시켰어요. 그러면 부러진 뼈가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돼서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었어요.
최근 9년 동안 우리 나라에선 새로운 의료용품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어요. 붕대도 그대로, 부목도 옛날 그대로죠. 소련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먹히는 병사예요. 참을성도 제일 많고 다루기도 수월하죠. 보급품도 못 받고 보호도 못 받는 병사. 일회용 소모품이죠. 1941년에 딱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5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죠. 왜 그럴까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정찰중대 위생사관 출신 원사(старшина)의 증언.[43][44]

의료지원의 수준은 더욱 처참해서, 기껏해야 2차 세계대전 때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아프간 전쟁 소련군 참전용사가 쓴 수기에도 '그래도 대조국전쟁 때보다는 나은 의료지원을 받고 있었다'라는 비참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민간 사회의 의료 수준도 군사병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전군이 양질의 의료지원을 제공받기는 힘들었다.[45]

소련군의 열악한 야전 의료지원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대표적으로, 소련-아프간 전쟁에서의 의료지원 기록들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은 풍토병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했고, 작전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체 파병병력의 67%에 달하는 41만 5천명의 인원이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았다. 게다가 이중에서 폐렴은 무려 20%, 말라리아 4%에 이질[46] 등도 많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의 질병 입원 비율도 비슷하게 35% 정도였다.

이 논문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으로의 말라리아 감염 경로에 관한 논문이다. 여기에는 7,600명의 병사가 말라리아에 걸린 채로 그냥 전역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이중 70%는 군대에서 단 한 번도 말라리아 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반면 이후에 벌어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시 미군은 2006년부터 2008년 전체 감염자 숫자가 고작 179명,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170명에 불과했다.[47]

비전투용 군수품의 부족도 소련군에서 일상적이었다. 이는 소련 특유의 생필품 부족 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다만 이건 소련에서 악의적으로 군인 복지에 관심을 안 가져서는 아니고, 중요도가 높은 곳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자하는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정책 결정자들이 집중 투자한 분야는 자원이 넘쳐나는 반면, 그들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분야는 심각한 물자 부족이 일어나는 것이다.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군대를 보유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소련군은 수천 달러짜리 포탄을 수없이 퍼부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치약 같은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순한 보급품만이 아니라 아예 핵심 장비나 설비를 적국인 서방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시 소련의 민간 소비재에 대한 연구와 생산이 크게 뒤쳐지다보니 발생한 문제였다. 공작기계, 전자장비, 에어컨 같은 분야는 서방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수입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소련도 이런 제품들을 아예 생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서방과 기술력 및 품질에서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같은 분야는 학문의 기반 자체가 서방에 비해 크게 빈약했다. 그나마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수학, 물리 등의 기초과학은 소련도 미국과 나름 비견되는 수준을 유지했다.[48] 그러나 소련이 필요했던 고품질 전자기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민간 주도의 전자공학과 응용과학의 발전이 뒤따라야했다. 결국 끝까지 해당 분야가 지지부진했던 소련은 해당 제품들을 몰래 수입해서 사용했다.

군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소련의 농업이 부실했던 것도 약점이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식량 수출 금지를 검토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대외 식량 수입국 1위가 미국이었다. 그만큼 소련은 자국 식량 수요의 상당량을 적국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에는 비옥한 농토 지대는 매우 많았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집단농장은 소련의 농업 생산 효율을 크게 갉아먹었다. 현대 러시아 연방은 경제적 여건이 소련보다 크게 악화된 와중에도 농업의 생산성만큼은 오히려 소련보다 크게 나아졌다. 다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소련의 곡물 생산량은 세계 순위권이었고, 그 중 밀과 감자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곡물 가격 유지와 가축 사료용 떄문에 밀을 수입했다는 것이다.

6.4. 부족한 전문 인력

소련은 가용 예산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전문 인력을 모병하기보다는 2년제 징집 병력으로 인력을 끊임없이 채워넣는 방식으로 군을 운영했다. 하지만 유럽권의 대다수 국가들이 징병제를 시행하면서도 직업군인 신분의 병사들을 별도 양성하거나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부사관은 직업군인으로 분류했던 것과 달리 소련의 부사관은 전문 직업군인이 아니었다라는 점이 문제로 작용하였다.

소련군의 부사관은, 쉽게 말하자면 국군의 부분대장/분대장, 포반장, 전차장처럼 계급보다는 직책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실제로 1972년까지도 소련군은 병사들에게 짬밥 순서대로 부사관 계급장을 던져주는 수준으로 부사관을 운용했다. 병사의 상위연장이라는 부사관의 전통적인 의의를 따지자면 마냥 틀렸다고 볼 정책도 아니었고 연장/장기복무자들만 충분하다면 서구권의 부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층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군의 병사 연장복무는 최대 8년까지 밖에 받아주질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장기복무 인력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소련군 부사관 계층의 크나 큰 결함이었다.

그러다보니 부사관의 수준이 분대장급의 하급 지휘자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고[49] 장교마저도 수년마다 근무지를 옮겼기에 한 부대에 장기간 머물며 윗 계급에게 부대 운영에 대한 조언, 아랫 계급에게는 장비조작등의 노하우를 전달해줄 인원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는 그래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병사들이 군에 남아 부사관으로써 제 역할을 다하니 문제가 크지 않았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역시 이들을 군대의 등뼈라고 칭찬했을 정도였을 정도. 그럼에도 인사체계의 한계 상 이들도 언젠가는 전역을 해야 했고, 남고자 한다면 장교로 밖에 길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정통한 부사관이 급속도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정교한 최신 장비를 사용하는 부대일수록 이 문제점이 두드러졌는데, 복잡한 군사 장비를 가장 오래 다뤄본 병사도 8년이 한계였고 그나마 대다수는 2년차에 집에 가버렸다. 장교들도 그 계급 특성 상 근무지를 자주 옮길 수밖에 없다보니 해당 장비에 대한 미숙련 인력만이 부대에 남아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괜히 타국의 군대가 징병제를 유지하더라도 최신 장비를 다루는 병과에 한정하여 직업 병사를 양성하거나, 부사관 같은 하급 간부들을 조직의 중핵으로 여기고 육성하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소련군도 자신들의 문제점은 잘 인지하고 있어서 1972년부터 준사관 제도를 시행, 준사관들을 대거 뽑아 이들에게 상급 부사관의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준위 계급은 2년 병사복무를 마치거나 그 이상 복무 중인 이들이 지원 가능했는데, 그 병사들 중에서 우수한 자원은 이미 장교로 지원하고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세계 최대급 병력을 자랑한 소련군이다 보니 그만큼 장교 수요도 많아 장교로의 지원과 임관도 쉬운 편이라 우수한 인재들은 다 장교로 몰려드는 바람에 생긴 사단이었다.

또한 준사관 제도가 실시된 이후, 병사의 연장복무 제도는 사라졌다. 그나마 서방의 부사관과 유사하던 부분조차도 없어지니 소련군에게 부사관이란 병사들이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볼 정도의 최고참도, 자진해서 군대에 더 남아있으려던 열정적인 애국자도, 충분히 숙달되어 장비조작만큼은 빠삭한 인력도 아닌 '그냥 병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북한의 초기복무사관과 유사한, 정확히는 북한이 훗날 따라하게 되는 장기복무 기술부사관 제도 역시 일찍이 등장했지만 이미 쉽게 준사관이 될 수 있는 마당에 과연 누가 부사관을 하려고 들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부사관의 업무를 준사관에게 떠넘기는 제도가 잘 먹혀들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병사들에게 지지를 받는 부사관에서 다시 그 부사관들의 존경을 받는 준사관이 되는, 선발에 선발을 거쳐 임관되는 서방의 준위와 달리, 아랫계급 땜빵을 친다는 느낌으로 계급장을 찍어낸 소련군 준사관이기에 준위를 보는 시선이 서방과 같을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준사관은 초창기 소련군의 부사관처럼 장교로 임관 못하는 2급 자원정도로 여겨지고 말았다. 부사관을 대체하려던 준사관이 당대 부사관의 부정적인 인식도 함께 대체해버린 셈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준사관의 지원율은 소련군 초창기 부사관처럼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사관과 마찬가지로 붉은 군대가 해체될 때까지도 준사관에 대한 예우와 인식도 서구권에 근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탕트 시기에 서방의 군대를 방문한 소련군 장성들이 서방의 부사관단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소련 해체 후 신생 러시아군은 유의미한 부사관단을 양성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2008년에 부사관 양성체계를 마련하였다.

6.5. 낮은 훈련 수준

미군보다 부족한 경제력으로 3배 이상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던 소련군의 특성상 기초군사훈련 역시 당대의 NATO군 대비 크게 떨어졌는데, 베트남전기의 미군 역시 징병제임에도 9주간의 훈련을 시켰고, 프랑스군 서독군의 경우는 무려 3개월간에 가까운 기초군사훈련을 시켰지만, 소련군은 겨우 6주간의 훈련기간을 가졌으며, 그마저도 실질적인 훈련은 약 4주에 불과했다.[50]

단순히 훈련기간만 짧은 것도 아니고, 훈련 시수 역시 짧았는데, 1960년대의 베트남전기의 징병제 미군역시 주당 44시간에 총 352시간의 훈련 시간을 가진 반면, 소련군은 1990년에도 주당 48시간에 192시간의 훈련 시간을 가졌으며, 이마저도 정훈 교육을 굉장히 중시하던 소련군 특성상 이것을 제외할 시 144~168시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60년대 미군의 훈련 수준의 절반도 안되던 양이었다. 현대 한국군처럼 훈련 시간이 짧아도 개개인의 교육 수준이 높다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지만 소련의 평균 의무교육기간은 보통 10년[51]이라 서방권보다 2년이 짧았고, 소련의 대학생들은 장교 자원으로써 합법적으로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열악한 군수능력과 조직체계상의 약점은 소련군의 훈련수준 역시 저하시켰다. 북한군처럼 개막장은 아니었지만 훈련량은 확실히 부족했는데, NATO군 전차승무원이 일반적으로 연간 100~200발의 전차포 교탄을 소모할 때 소련군은 정예사단이 연간 50발, 보통은 20여발 수준의 전차포 사격을 수행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신뢰성 및 부품 수급 문제 때문에 전차 기동훈련은 끽해야 중대급이었으며, 전차병의 훈련 수준도 NATO군에 요구되는 것보다 크게 낮았다.[52] 미군 M1 에이브람스 전차병들이 2,000m 거리에서 등장한 표적을 12초 이내에 90% 확률로 격파할 것을 요구받은 데 반해 소련군은 최대유효사거리 내의 표적을 60초 이내에 격파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차탄 사격 시간도 미군은 5초, 소련군은 12초.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 레오파르트 2도 미군 M1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능상 서방 신예 3세대 전차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고? CAT '85의 성적을 보면 M60 전차이나 레오파르트 1, 치프틴 전차 같은 구형 전차들의 퍼포먼스가 3세대 전차들보다 좀 떨어지긴 했지만 표적과 교전하는 데 16.2초 이상 걸린 전차는 단 하나도 없었다.[53]

소련군은 충분한 교탄과 부품을 일선에 보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부대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을 단기 징집으로 유지하는 조직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충분한 훈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차소대 내에 2년 이상 야전에서 근무하면서 훈련한 병력이 1/4을 넘기는 소대는 극히 드물었으며, 사실 2년 이상 복무한 인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병을 유지하면서도 전문적 부사관을 육성해 부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 대가는 BGM-71 TOW 탑재 지프를 동축기관총 5~7발로 격파할 수 있다는 비실전적, 아니 비현실적인 훈련기준이었다.[54][55]

심지어 이런 문제는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페츠나츠 또한 전원이 2년 복무하는 징집병 중에서 임의로 인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부대의 부사관 역시 한국군의 병장 계급 비슷하게 징집병 중에서 복무기간이 긴 병사에게 그냥 주어진 것. 그나마 스페츠나츠의 명성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병사도 많았다고 하며, 이들을 정규직 부사관 학교에 보내어 못 버티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훈련시키는 식으로 인적자원의 질을 좀 더 높여보려는 시도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 상층부의 인식에서도 조금 더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 병사 정도였다. CIA 자료를 보면 실질적으로 특수전에 관해 훈련받은 기간은 부대에 따라 다르지만 공수훈련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약 2달에서 3달정도로 예측되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특수전을 하기에는 훈련기간이 너무 짧기때문에 잘봐야 수색대나 레인저 정도의 훈련 강도라 봐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전에서 일반 보병부대보다 이들의 전과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것보다는 임무의 특성상 소련군에서 이례적으로 자율판단과 행동을 허가받았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소련군 내에서 몇 안되는 '병사 개개인의 창의성, 독창성'을 인정받은 병종이라 게릴라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스페츠나츠들과 교환훈련을 하게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이들의 사격, 전술 능력에 대하여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평가를 하였으며, 그 분야에서 도리어 여타 동유럽 특수부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56] 실제 사례에서도 인질 구출 작전에서 인질의 안전보다는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때려잡는데 더 집중한다거나, 버스 인질극 제압 시범을 보일 때 수류탄과 폭약으로 버스를 아주 박살내버리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작 전문적인 특수부대가 나온 건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가 되고 나서 체첸 저항세력과 마피아를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일상화되면서부터다. 일례로 1997년 스베르들롭스크 주에서 열린 스페츠나츠 대회(Spetsnaz Competition)에서 미군 특수부대 최초로 참가한 델타 포스 출신 전술사격 교관 마이크 페넌 같은 경우 스페츠나츠를 "실력에 비해 많이 과장됐다"고 평가했다.

6.6. 열악한 장병 복지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군인들은 러시아 제국 때부터 대우가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군 대우는 육, 해군을 가리지 않고 정말 열악해서, 포템킨 반란 같은 반란이 터지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1917년 2월 혁명 당시 러시아군에 식량 배급을 달라며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자신들의 가족 등 지인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그대로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제국이 전복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군은 제정 말기에 자국민들로부터 학살자, 전쟁범죄자 소굴, 인민의 적 수준의 취급을 받았고, 소련군도 이 영향으로 나치 독일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국민 내에서의 평가가 썩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중들을 향해 발포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고, 이러한 모습은 소련의 선전 영화였던 전함 포템킨과 같이 비인간적으로 그려질 정도였다. 소련군 역시 공산당 독재 아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받으면서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에서 시위를 벌이던 자국민에게 발포, 26명이 숨지기도 했고, 1990년 리가, 바쿠, 트빌리시같은 각 공화국 수도에서 독립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에게 발포해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현대 러시아군 또한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1996년과 1998년 체첸 전쟁에서의 전쟁범죄로부터[57]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사실 이럴 만도 한 게 러시아 제국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절부터 높으신 분들의 졸개가 되어서 민중을 가장 억압하고 착취한 게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이 착취에 앞장선 이유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땅이 너무 광대하고[58] 척박해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59] 그러다 보니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별로 없었기에 사실상 군인들이 대부분의 행정 일들을 도맡아서 했는데, 땅이 척박하고 인구수도 많지 않기에 생산력이 적어서 군인들이 세금으로 가져갈 것이 없으니 착취했다고 보면 된다.[60]

러시아 제국군은 나폴레옹이 쳐들어오자 적을 막는답시고 민가를 싸그리 불태워버렸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군인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으며,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백군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라며 잔혹하게 학살했고, 적군은 조국을 지켜야 한답시고 농민들이 애써 수확한 농산물을 모두 징발하니 러시아 민중들 입장에서는 군인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들의 계급이 2단계로 간소화 되어 있었고, 또한 병 생활을 잘 아는 부사관급 간부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없다시피하니 사병 간의 계급 갈등과 구타, 갈취, 내무부조리도 군 전반에 만연하였다. 그나마 장교 계층이 비교적 부대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병들끼리도 공감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선을 넘은 경우는 당에 꼰질러서 반동으로 몰아버리면 문자 그대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태가 됨으로 관리가 된 편이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게된 장교층이 군을 대거 이탈하면서 신생 러시아군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군대를 빠져나갈 수 있다면 징병 인력들이 병역을 기피하려고 하는 풍조를 낳음으로써 징집 자원이 사회 취약계층에 한정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소련군의 장병대우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위관급, 영관급 장교들의 대우 또한 좋은 편에 속한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물론 장교들은 복지나 대우 면에서 일반 병사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대 타군에서 근무하던 동일직종에 비하면 여러가지 제약사항이 많았다.

가령 1976년 MiG-25기를 몰고 망명한 소련 방공군 중위 빅토르 벨렌코의 경우, 미 공군기지에서 공군 병사들이 거주하는 관사촌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벨렌코는 견학 이후 자신이 근무하던 소련 방공군 기지 내 병사들은 50명에서 60명 정도가 함께 거주하는 막사에서 생활하며, 가족들과 자유로운 면회가 어렵고 자살이나 탈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증언했다.[61] 벨렌코 이외에도 1989년 알렉산드르 주예프(Aleksandr Zuyev, 1961~2001) 대위가 당시 소련공군의 최신 전투기였던 MiG-29을 몰고 귀순한 사례가 있었다.

7. 개입한 전쟁 및 분쟁

8.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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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방부의 끝판왕이다. 어느 나라든 타군에 비해서 육군이 규모가 크긴 하지만, 두 대륙에 걸친 대륙국가라 그런지 현재 기준으로 육해공 영역별로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춰져 있는 미군과는 다르게 육군 혼자서만 100만 명 이상을 찍을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었으며, 하단에 적힌 편제란에서 육군을 제외한 인원을 다 합쳐야 육군 인원을 겨우 넘었다.[62] 육군때문에 다른 군종들이 상당히 빈약해 보이지만 해군, 공군과 같은 타 군종에도 상당한 투자를 했으며 실제로도 소련 해군은 미 해군 다음으로 막강한 군대로 평가되었다. 하단 편제들을 보면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과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1. 국방부

8.2. 지상군

8.2.1. 전략방면군

8.2.1.1. 극동전략방면군
8.2.1.2. 남부전략방면군
8.2.1.3. 남서부전략방면군
8.2.1.4. 서부전략방면군

8.2.2. 군관구

8.2.2.1. 모스크바 군관구
수도라는 특성상 온갖 좋은 장비가 배치되어 있고 특히 미사일 방어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군의 중요 자산으로 이용된다.
8.2.2.2. 레닌그라드 군관구
배치된 육군은 유사 시 노르웨이 침공군이자, 소련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전략적 요충지인 콜라 반도 방어군이었다. 그러나 지상군 이상으로 공군과 방공군의 최중요 방어 거점이기도 했다. 이 지역이 함락당하면 미군은 바로 모스크바에 미사일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은 해공군의 최신예 무기와 정예 부대들을 이 지역에 집중 배치했다. 그리고 북해로부터 미국 항모전단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Tu-16, Tu-22M을 비롯한 다수의 대함 폭격기들과 방공 미사일들이 촘촘히 배치되었다.
8.2.2.3. 발트 군관구

칼리닌그라드 발트 3국을 담당하던 군관구로 유사시 폴란드 인민군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발트 3국의 독립 이후 철수하거나 해체되었다.
8.2.2.4. 벨라루스 군관구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 1. 그러다보니 막강한 지상군과 이를 백업하는 공군이 배치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대부분 전력이 해체되거나 벨라루스군 자산에 편입되었다.
8.2.2.5. 카르파티아 군관구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 2. 체코슬로바키아군을 백업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8.2.2.6. 키예프 군관구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 3.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8.2.2.7. 오데사 군관구

소련의 서유럽 침공시 전략예비대 4. 소련 붕괴 이후 해체되거나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8.2.2.8. 볼가 군관구
8.2.2.9. 우랄 군관구
8.2.2.10. 북캅카스 군관구
8.2.2.11. 투르키스탄 군관구
8.2.2.12. 시베리아 군관구
8.2.2.13. 자캅카스 군관구
8.2.2.14. 자바이칼 군관구
8.2.2.15. 극동 군관구

관할 영역이 가장 넓은 군관구였으며, 때문에 규모도 타 군관구에 비해 비대한 편이다.
8.2.2.16. 중앙아시아 군관구

중국-소련 국경분쟁 이후 새로 창설되었다.

8.2.3. 해외 주둔 소련군집단

8.2.3.1.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
동독 주둔 소련군 부대로 1980년대에는 최대 50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했고, 철수 직전에도 33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했다. 사령부는 뷘스도르프에 위치했으며, 나치 독일을 붕괴시키고 가장 먼저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의 주요 영토들을 유린한 부대인만큼 최정예 부대였기에 당연히 최신 장비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전술 핵무기들이 배치되었고, SS-12 스케일보드 탄도미사일들도 배치되어 서유럽의 주요 대도시들을 겨냥했다. 전시에는 동독군을 지원하며 서독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한동안 주둔하다가 1994년에 철수했다.
8.2.3.2. 북부군집단

폴란드 주둔 소련군 부대로 사령부는 레그니차에 위치했었다.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대신에 바르샤바 조약 기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후방 전략적 요충지라는 특성상 여러가지의 전투지원 및 방공, 항공 부대 등의 독립 연대와 대대들이 다수 주둔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수의 전술 핵무기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유사시 폴란드군의 덴마크 침공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8.2.3.3. 중앙군집단
체코슬로바키아 주둔 소련군 부대로 사령부는 밀로비체에 위치했으며, 전시에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의 서독 침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8.2.3.4. 남부군집단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주둔하며 전시에 루마니아와 헝가리, 불가리아를 지원하는 소련군 부대로 사령부는 부다페스트에 위치했으며, 전시에 이들 국가의 그리스와 튀르키예 침공을 지원하는 부대였다.

8.3. 해군

8.4. 공군

8.5. 방공군

8.6. 전략로켓군

8.7. 공수군

8.8. 해외 파병 부대

9. 훈장

훈장(상훈)/소련 참조.

10. 군가

아래는 소련군의 유명한 군가들이다. 대체로 소련군가에는 러시아 민요풍의 노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애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하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며, 음악적으로 봐도 훌륭하다. 소련군(현재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의 공식 합창단인 붉은 군대 합창단[73]은 웅장한 선율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1990년에는 한국에도 방한하여 연주회를 가진적이 있다. 소련의 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군가/소련-러시아 항목을 참조할 것.



대표적인 소련 군가 초원.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하라. 월드 인 컨플릭트 트레일러로 쓰여 유명하다. 그러나 몇몇사람들은 소련 군가 하면 미제가 만든 어떤 게임 노래부터 떠올린다

10.1. 영상

1967년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소련 국가가 나오는 부분 영상 1979년 10월 혁명 기념일[74]
1990년 소련의 마지막 전승 기념일 행사 일본이 안보교범용으로 만든 영상, 소련 육군의 주요 무기체계를 설명한다.
소련 해군에 관한 교범 영상 소련 공군 및 방공군에 관한 영상
소련군 1945~1990 제식

11. 장비, 차량,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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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차량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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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계급

1918년~1935년 계급

소련군은 자본주의 계급 사회와 그 구체적 발현 형태인 제국주의의 타파를 목표로 한 소련에서 창설된 '노동자•농민의 인민군대'에서 기원한다.[75] 그런 기원을 갖기에 차마 '계급'을 도입할 수 없었고 이는 군 지휘체계의 혼란을 가져왔다. 10월 혁명 이후 폐지한 군 계급을 그대로 되살리자니 자가당착에 빠진 소련군은 급한대로 K-1에서 K-14까지 임무의 중요도에 따른 직위 체계와 인식표를 도입했다. 어깨끈 조차 권위의 상징이라면서 혐오했던 이 시기 소련에서 계급장을 도입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엄격한 상명하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순전히 믿음에 기반한 조직체계가 1935년까지 별 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1935년~1940년 계급

1935년 대숙청 시기 군 지휘관에 대응하는 NKVD 계급 체계가 추가 되었다.

1940년~1943년 계급

1940년 독소전쟁 직전에 계급장이 개편되었다. 이때까지도 소련군의 상징과도 같은 휘황찬란한 견장은 도입되지 않았다. 다소 조잡하게 생긴 단순한 무늬의 견장만이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1943년~1955년 계급

1943년 독소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늘어난 군 인력에 맞춰 대대적 계급제 개편이 있었다. 전쟁 중 사기고양의 목적을 더해 러시아 제국 시절 쓰던 화려한 견장이 재도입되었다. 우리가 아는 소련군 특유의 금빛 견장은 이때 처음 도입된 것이다. 이후로도 큰 변화없이 소련이 망할 때까지 이 계급장 디자인은 계속 쓰이게 된다.

1955년~1991년 계급

1955년에는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기존 디자인과 체계에 변동이 있었다. 그리고 포병, 항공, 전차병, 통신병, 공병 외의 다른 병과들은 모두 계급체계가 통일되었고, 해군항공대와 해군보병대 등의 해군 비승함 직별들은 함대식 계급 체계를 쓰지 않고 군대식 계급 체계로 통일되었다.

13. 한국계 인물

소련이 다민족 국가였던 만큼 고려인 출신의 소련군인도 있었다. 일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련군이 관동군을 섬멸한 뒤 내려온 1945년 북한 지역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14. 기타

소련제 무기와 장구류는 서방과 다른 개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밀리터리 매니아 중에는 이쪽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병사들이 우샨카를 착용했기 때문인지 우샨카는 소련군 또는 러시아군, 이 이미지가 나아가 전반적인 러시아인 남성의 복장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우샨카 못지 않게 정모 또한 소련군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전군 (해군 제외)에게 양말 대신 발싸개를 지급했다. 우리가 흔히 양말도 못 사는 거지나 쓴다고 '거지 발싸개'라고 부르는 그 발싸개다.[77] 발싸개는 제대로 싸지 않으면 양말보다도 심각한 발 부상이나 물집을 불러오기 십상이었고 통풍이 잘 안되어 발냄새가 엄청났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하자마자 독립국가들은 전원이 군에서 발싸개를 퇴출시키고 양말을 지급하였으나, 심지어 러시아는 2012년에 국방장관이 올해야말로 군에서 발싸개를 완전히 퇴출하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는 소련이 양말을 못만들어서가 아니라 군화의 구조때문이었다. 당시 비슷한 위도에 위치해있던 서방 국가 군대들이 양말을 배급했고, 소련도 민간인들도 양말을 사서 신었으면 신었지 발싸개는 잘 신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은 라스푸티차를 염두에 두고 승마부츠를 개량한 형태의 전투화를 신었는데, 이 소련 전투화는 서양전투화와 달리 발목을 꽉 잡아주지 못해서 라스푸티차 상황에서 걸을 때마다 양말이 벗겨지는(발목 부분이 흘러내리는)걸 막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양말을 신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에 발싸개를 지급했던것이다. 물론 행군이 아닌 평시에야 발싸개를 신는 것이 더 불편했지만 말이다. 물론 소련에서도 편의를 위해 운동화나 서방식 전투화를 쓰는 부대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병력은 양말 대신 발싸개를 지급 받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선상 근무가 많아 육군과 같은 군화를 착용하기 어려운 소련 해군에는 양말을 배급했다.

소련군의 영향을 받은 북한군도 1990년대까지는 발싸개를 지급했다. 1990년대 MiG-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철수 대위가 발싸개를 하고 왔을 때, 일부 언론에서 엘리트 공군 비행사에게도 경제난 때문에 양말을 지급하지 못했냐고 묻자, 이철수 대위가 직접 "소련식 비행화를 신을 때는 양말보다 발싸개가 더 편리하다"고 반박한 바 있다.[78]

15. 대중매체

16. 관련 문서


[1] 국기를 군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출처 [2] 러시아 내의 소련군이 아니다. 소련 해체의 여파로 혼란이 너무 가중되어 해체 후 소련군의 병영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독일민주공화국을 비롯하여 공산권 각지에 주둔해있던 소련군 병사들이 철수를 거부하며 자신의 사단이 '소련군' 사단이라 자처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일에 남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소련이 해체된지 3년이 지난 94년이 돼서야 지원을 받아 마지막 '소련군'이 철수하였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소련군'이라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3] 출처 [4] 세계 1위 [5] 미참전국. 군사 고문단 및 무기 지원, 극비리에 소련 공군 참전. [6] 미참전국. 군사 고문단 및 무기 지원. [7] 독소전쟁 동안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징병제가 적용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여자들은 대부분 군대를 떠난 상황에 다시 남성징병제로 전환한 탓에 상비군과 예비군 인원 수가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난다. [A] 1985년 기준 [A] [A] [11] 세계 1위 [12] 세계 2위 [13] 국가의 방위 및 소련군의 제일 영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소련 최고회의, 소련 장관회의가 실행한다. 소련군( 국경경비대 내무군 제외)을 직접 지도하는 것은 소련 국방장관을 총 책임자로 하는 소련 국방부가 담당한다.(출처: 소비에트 군사학 대백과. 바예니즈다트 1978년 기준.) [14] 전신인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는 당군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국군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했다. 당 중앙과 정치국이 권력의 핵심이고 중앙위원회에 군을 지도할 권한이 있긴 했지만, 노농 국방위원회와 혁명군사위원회, 소련 국방위원회 등의 최고 군사 기관들은 모두 국가 기관이었고, 소련의 헌법상으로도 군사 분야는 정부 당국의 관할로,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최고 기관은 당 조직이 아닌 국가 기관인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로 명시되어 있었다. [15] 상비군 총합 최대규모는 독소전쟁당시 달성했었는데 무려 규모가 34,476,700명으로, 1000만을 훌쩍넘었으며, 세계 전사를 다 뒤져봐도 이정도 규모를 자랑하는 군대는 역사상 소련군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16] 1988년 소련 '조국 수호자의 날'(День защи́тника Оте́чества, 2월 23일) 기념 포스터. [17] 대전 말기인 1945년 기준으로 무려 13개 전선군( 집단군)을 굴렸다. 2023년 한국의 48만 상비군을 다 모아도 집단군을 편성하려면 예비군까지 전부 끌어와야 가능하다. [18] 파일:ShFR3.png
그림에서 보듯이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의 소련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섰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의 집권으로 미국도 군사비를 늘림에 따라 다시 미국의 국방비가 소련을 능가했고 1980년대 초중반의 국방비는 미국과 소련이 비슷했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력은 미국의 반밖에 안 되었다. 소련의 이런 국방비 몰빵은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국도 1980년대처럼 국방비를 계속 투자했다가는 큰일날 뻔했다. 그나마 냉전이 해소된 조지 H. W. 부시 집권 후부터 대폭 삭감하면서 1990년대에 미국의 국민경제가 부흥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에 지출하는 전비의 증액에 따라서 미국도 2000년대의 후반기부터 경기 침체에 접어들게 된다.
[19] Кра́сная гва́рдия. 훗날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도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20] РККА,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21] РККФ,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ий Кра́сный Флот [22] Вое́нно-Морский Флот(직역하면 해양군사선단, 즉 "함대"이다. 서구권의 "fleet"에 해당하는 단어는 선단, 기단, 함대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한자어 함대는 군함의 집단이란 단일 뜻만을 갖고 있다. 즉, 해양군사함대라는 기존의 번역은 겹말이 포함된 오역이다.) СССР, ВМФ СССР [23] 소련 국경수비대 소속 [24] 우리나라로 치면 사령관이 육군으로 고정되어 있는 국직부대에 해군 장병이 파입된 격이다. 특히 발트해 북극해는 한번 얼면 답이 없기 때문에 시간끌기나 얼음 깨기 담당으로 배치시켰을 수도 있다. [25] 참고로 해군 비승함 직별은 정복에 수장이 없다. [26] 붉은 군대가 초기의 막장상태에서 크고 아름다운 무적의 스팀롤러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책으론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이 있다. [27] 실제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주된 임무는 전쟁 발발시 나토군을 분쇄하고 서유럽으로 진주하는 것이었다. [28] 사실 순수공격형이라기보다는, 나토군이 침공 징후를 보일 때 선빵을 날린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세형 수비. [29] 전쟁 중간에 스탈린에게서 통수권을 이양받는다. [30]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이 터지자 국방장관이던 현역 군인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서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나갔고, 스탈린은 공석이 된 국방장관을 전쟁 끝까지 겸직했다. [31] 정치장교 [32] 공병, 전차병, 통신병, 포병, 항공 병과의 장교들은 상장 - 대장 - 원수로 가지 않고, 상장 - 00원수 - 00상원수 - 원수로 올라간다. 여기서 00은 앞서 말한 5개의 병과이다. 병과원수는 육해군 대장에 대응되는 계급이며 병과상원수는 원수와 대장 사이에 있는 계급이라고 보면 된다. 해군항공대 조종사도 항공원수 계급을 부여받은 걸로 봐선 해당 병과의 장교들은 군종 불문하고 모두 이러한 계급체계로 굴러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수 계급은 육군과 해군에만 존재하기에, 항공상원수가 원수로 진급할 시 자동으로 육군으로 전군되고, 함대는 이론상 병과원수 - 병과상원수 - 원수로 진급하는 구조였을 듯 하다. 이는 최상위 계급이 단일 계급으로 존재하는 모든 공산권 군대의 공통점이며, 김일철, 리병철이 그 예시이다. [33] 정치장교 [34] 원래는 드미트리 야조프 원수가 국방장관이었으나, 8월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실각되었다. [35] 정치장교 [36] 실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곱지 못한 시선은 정치장교 제도의 창설과 훗날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벌어진 대숙청의 기조가 됐다. [37] 정확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38] 1945년 종전 당시 원수까지 오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가 전쟁 발발 당시 만 44세(1897년생), 그리고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45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46세였고 대장까지 오른 바실리 추이코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41세, 이반 체르냐홉스키는 겨우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39] 이 전략은 1960년대 중국과 1990년대 북한이 따라한다. 자꾸 이 항목에서 1960년대 미국의 핵전력을 들어 소련이 핵개발 대신 재래식 전력에 집착했다는 설을 푸는 밀덕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는 흐루쇼프 회고록 및 소련사만 봐도 바로 나온다. 흐루쇼프가 2차대전의 영웅인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 및 공군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를 해임한 것은 이들이 지나치게 재래식 전력 확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40] 공산오차는 미국제 ICBM에 비해 뒤떨어졌으나 수는 미국에 비해 훨씬 많았다. 즉 딸리는 공산오차를 물량으로 씹어먹으려 했던 셈. [41] 실제로 베트남전, 4차 중동전쟁 등을 보면 미국산 전투기들을 괴롭힌 것은 오히려 적 전투기보다도 대공포와 대공미사일이었다. [42] 참조 블로그 [43] 출처: 아연 소년들, pp. 114-1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박은정 옮김. [44] 같은 책에서는 군인이 피복이나 철모나 통조림 등을 받고 보니 1930~50년대 생산품이더라는 다른 증언도 나온다. [45] 다만 살릴 수 있는 부상을 당했는데 조치가 안 돼서 죽었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사망직전인 중상자라면 가망이 없어서 포기하는 정도였다. 애초에 이 지경이면 현대 미군을 제외하고는 살릴 방법이 없다. [46] 그냥 설사만 하고 마는 병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CDC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110만명이 사망하는 병이고, 전장에서는 매우 흔하다. 그나마 그 피해를 최소화한 군대는 미군 정도. [47] Falling rates of malaria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in Afghanistan substantiate findings of high compliance with daily chemo prophylaxis, - Remington L. Nevin, 2012/12 [48] 소련은 이런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성과도 꽤 냈다.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나 확률과정론 같은 분야는 거의 소련에서 완성된 학문이었다. [49] 본래 전통적으로 상사급 부사관은 보병 소대장을 맡을 수 있는 계급이었다. 독일군은 부사관 소대장 편제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 그런 면에서 보면 같은 보병이더라도 소련군의 부사관은 타국에 비해 낮은 지휘자 역할만 할당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성장의 가능성도 막혀있는 체계이다. [50] 실제로는 6주였지만, 실질적으로 받는 훈련을 받는 기간이 4주 정도밖에 되지 않다보니, 냉전기 CIA에서는 소련군의 훈련기간을 약 4주로 예측했었다. [51] 유치원기간까지 합치면 이보다 길어지기는 한다. [52] 여기에는 미군과 소련군의 방침 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군은 '운용하기 쉽고, 수리하기 쉬운' 엔진을 만든 반면, 소련군은 '만들기 쉽고 잔고장은 적은' 엔진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장은 내구도로 버티다가 치명적 손상에는 엔진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대처한 것.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생산과 효율 측면에서는 뛰어났을지 몰라도 실제 훈련과 야전상황에서는 좋지 못했다. [53] 다만 이 기준은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한 두번 정도 훈련받은 신병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나 낮기 때문에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훈련도를 조정했을 가능성은 높다. [54] Zaloga, Steven J.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 Osprey Publishing, 1989 [55] 해당 서적의 한국어 번역은 여기로 [56] 실제로 미국, 영국의 특수부대원 출신들에게 동유럽 최고의 특수부대를 뽑아보라고 하면 러시아의 알파 그룹 등은 언급도 안 되고, 폴란드 그롬은 거의 반드시 언급된다. [57] 체첸 반군의 악명높은 공격과 테러, 잔인한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체첸 점령 이후 대테러작전이라는 명목 아래 자치스트카(Зачистка)를 진행, 수많은 체첸 민간인을 학살했다. [58] 지금이야 철도와 비행기 등이 있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이동수단이라고 해봐야 말뿐이었다. [59] 지금이야 화학비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각종 기계들을 활용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철저하게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해야했다. 철저히 노동력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척박한 땅이다 보니 농사 짓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잘 안 살려고 했다(중세까지의 기록을 봐도 심심치 않게 러시아 농노들이 서유럽쪽으로 도망쳤다는 기록들이 있다). [60] 러시아 지역은 옛날엔 생각 외로 엄청나게 가난했다. 수확철이 되면 사람들은 농산물의 냄새를 맡으며 풀뿌리, 벌레, 나뭇잎들을 씹어먹었다는 얘기들도 있을 정도다. [61] Soviet Defector Depicts Grim Life at MIG‐25 Base, David Binder, New York Times, Jan 13. 1977. 출처 [62] 현재 대한민국 국군도 해군, 공군, 해병대 다 합쳐도 육군 하나 규모가 안 될 정도로 육방부이다. 이유는 북한군 때문. 한 때 독일군도 분단 시절에는 육군이 상대적으로 비대했었다. [63] 소련 공산당 직속이지만 지휘 체계상 소련 국방부로 파입되어 있는 구조이며, 소련 국방부와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다. [64] Army를 육군으로 번역하는 관례때문에 Soviet Army가 소련 육군으로 오역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데, 소련 육군은 Soviet Ground Forces라는 명칭이 따로 있으며, 러시아어로도 이 둘의 명칭은 따로 존재한다. [65] 소비에트 군대에 비해 상당히 조촐해 보이지만 해군 내에도 해군보병대, 해군항공대 유닛이 존재했고, 또 SLBM과 함대공 미사일까지 관리하는 등, 소비에트 군대와 소비에트 함대의 유닛들이 일대일 대응이 가능했기에 마냥 만만하게만 볼 전력은 아니었다. [66] 병참, 의료같은 지원 임무를 주로 행했다. [67] 소련군 병력 수에 합산되지 않는 명목 상의 준군사조직이지만, 전성기 시절 병력 수만 28만이나 되며 자체 스페츠나츠 전차까지 보유하고, 훈련 수준도 높은 정예군이었다. [68] 평시에는 내무부 관할이나, 전시에는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다. [69] 공수군과 같은 독립병종이었으며, 전략로켓군 주관으로 최고사령부 포병예비군 소속으로 창설되었다고 한다. 사령관은 전략로켓군 출신이 주로 담당했다. [70] 제3 충격군이라고도 부른다. [71] 창설연도가 무려 1920년으로 그야말로 초창기부터 탄생한 사단. [72] 주로 방공부대였다. [73]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저것도 줄인 것이고 진짜는 '적기훈장을 두번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의의 러시아군 정통 가무 앙상블이다. [74] 이 해를 끝으로 80년대부터 진행 구성이 많이 변경되었다. [75] 소련의 국군이 된 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6년, 소비에트 연방군이 창설되면서부터다. 소련군은 정치장교가 도입되어 당군과 국군을 혼합한 군대였다. [76] 소련군 경력은 위조된 기록으로 완전한 거짓이다. [77] Footwraps (위키피디아, 영어) [78] 발싸개는 양말보다 빨리 건조가 되고 구멍이 뚫려도 돌려서 싸면 구멍이 덮어지는 장점이 있다. [79] 로켓에 산 채로 구워지거나, 수십 미터짜리 통나무에 얻어 맞고 폭포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며, 외계 우주선 엔진에 빨려들어가기도 한다. 그 중 제일 압권은 불개미 때에 잡아먹히는 이 장면. [80] 이거 하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배경 노래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 [81] 배틀필드 1에서 이들의 전신인 볼셰비키 적군이 멀티 진영으로 등장하기는 한다. [82] 아쉽게도 이때 소련군이 많이 사용했던 방서용 부니햇은 등장하지 않는다. [83] 소련군은 자기네 황제에게 총알을 박아본 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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