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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2:14:44

우라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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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인식
3.1. 반자이 돌격과의 비교3.2. 엘랑 비탈과의 비교
4. 매체에서의 등장5. 참고 문서

1. 개요

우라 돌격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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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강철의 사신 우라!(Ура!)

영화 브레스트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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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대중매체에서 가장 유명한 돌격 장면인 동시에 우라 돌격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가장 부합하는 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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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핀란드 영화 겨울전쟁. 당시 매우 한심한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영화에서의 돌격 장면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물량을 관객에게 와닿게 연출했을 뿐이다. 다만, 해당 장면은 엔딩 장면으로 휴전이 되었다는 말에 소련군이 기뻐하며 우르르 나온 것을 핀란드군이 멍하게 쳐다보는 장면이다.그래도,영화 내에서 저만큼 숫자로 돌격하고 하루종일 폭격과 포격을 계속 벌이는 물량공세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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За Родину, за Сталина! Вперёд! Ура!!!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 전진! 우라!!!
우라 돌격이란 러시아인 특유의 다같이 "우라!"를 배틀 크라이로 외치며 돌격하는 모습을 뜻한다.

2. 상세

'우라 돌격'이란 말은 공산당 교조주의 정치장교를 통한 인민군대에 대한 통제로 구사할 수 있었던 구소련식 제파 전술(諸波 戰術)에 대한 대중매체와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조어로 실제 군사용어는 아니다.

러시아권에선 해당 돌격 행위 이전에 외치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За Родину, за Сталина!)"라는 구호가 더 유명한데 이는 해당 문구가 1938년 하산 호 전투 이후부터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되며 장병들이 저 문구를 외치며 돌격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연히 저런 긴 문구를 외치며 돌격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공산주의 선전, 선동에 의한 기술이며 현대 러시아 사학계에선 영화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는 돌격전 구호고 돌격은 우라 따위를 외치며 돌격했으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라"라는 함성은 표트르 대제가 서구에서 군에 들여와 오늘날엔 일반인에게도 퍼진 말로 아자!, 만세!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1] 그 시절에도 공격 신호 후 외치면 나머진 평범히 와! 하고 드물게 몇몇이 제식의 일환으로서가 아닌 알아서 외치는 게 전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 전진!" 정도로 짤막하게 연설하고 끝에 우라를 붙이는 게 전부다. 다만 현 러시아군 교범에서 제병합동전시 적 진지를 40m 이내에 둔 상황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정확한 시점에 우라!를 외치며 전차 뒤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도록 되어 있는[2] 점으로 볼 때 포격이나 공중공격으로 적에게 충격을 준 뒤에 충격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외치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대한민국에선 보통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 묘사된 모습을 떠올린다. 밀덕후들 사이에선 이중적인 의미를 가졌는데 소련군을 조롱하기도, 위압적인 공세를 일컫기도 한다. 이는 독소전 초기와 후기의 모습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겨울전쟁과 독소전 초기 소련군이 실시했던 제1차 세계 대전 식의 축차투입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 아군의 편성을 나눠서 순차적으로 거기다 걍 꼬라박는 거다. 물론 다같이 포밥이 되지 않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나 제대, 병과 간 유기적 연계로 사실상 하나되어 싸워야 하고[3] 이를 위해 전문적 지식을 갖춘 장교단이 필요한데 대숙청으로 이를 수행할 장교들이 처형, 수감, 해고되며 스탈린부터 초급장교까지, 즉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군사에 무지한 이들이 지휘를 맡게 되며 온갖 한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으로 대표되는 사례에선 유능한 장교들과[4] 장병들이 배치되었기에 끝까지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패가 이미 결정난 상황임에도 항복을 거부해 결국엔 독일군이 한참동안 발이 묶일 걸 감수하고 포위해 굶주림과 갈증으로 말라죽게 만들어야 했다.

우라(Ура)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야호!' 내지는 '만세!'에 해당하는 단어로, 대중매체에서는 소련군 보병들이 일제히 "우라아아아아아아아!!!!" 라는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전면 돌격하는 행태로 표현된다. 원래 어느 나라건 돌격할 때 만세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돌격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유독 일본군 반자이 돌격과 소련군의 우라 돌격은 고유명사화되어 있으나, 우라 돌격은 밀덕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일종의 조어다. 서구권에서도 Ura Charge라고 표기하기도 하나 한국처럼 우라 돌격 하나만으로 굳어져 있지 않다. 흔히 '우랴 돌격'이라고도 쓰이지만, 잘못된 표기이다.

우라!를 전투함성 및 돌격구호로 사용하는 군대 러시아/ 소련 이외에 미합중국 해병대 등 여러 나라가 있다. 미국 해병대는 남북전쟁(Civil War) 시대가 아닌 다음에야 Rah로 줄여서 "ㅇㅇ", "ㅇㅇ?", "ㅇㅇ;", "ㅇㅇ!", "ㅇㅇ..."식으로 편한 사이끼리라면 만사에 쓰며, 지휘자나 지휘관의 명령에 Hoorah(또는 Hooah)로 '알겠습니다(Understood 또는 Sir, yes sir.)'의 뜻을 대신하기도 한다.

3. 인식

러시아를 제외한 서양 밀리터리 매니아집단에서 시작된 조어로 보이며 서구 선진국의 구소련에 대한 조롱이 섞인 시각이 반영되어 '소련군은 전쟁 내 1차 대전식 우라 돌격만 해대다 추운 겨울과 인구빨로 이겼다'는 식의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5] 형벌 부대의 경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논픽션 전쟁 문학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면 '수류탄 몇 발, 혹은 2~3명에 소총 한자루를 지급받은 민방위나 죄수들이 독일군 진지 앞으로 뛰어들었고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부상자들의 신음으로 가득할 야전 병원인데 생환자가 아무도 없으니 그 날만은 적막할 지경이었다'와 같은 증언들 또한 존재한다.

이런 증언을 남긴 사람들은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소련 간호사들이나 군속들이다. 소련 참전 용사(주로 남성)들의 증언 중 저런 무의미한 공격이 언급되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전쟁 직후 소련/러시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증언만이 외부에 알려졌고 그 반대의 경우엔 입을 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자료가 적으며, 그런 공격을 직접 수행했던 병력들은 대부분 전쟁 끝까지 생존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이렇듯 보급부족과 대숙청의 여파로 타 군에선 보기 힘들 한심한 작태가 자주 보였다. 하지만 각종 매체에서 지나치게 격하되어 대중들의 인식이 심히 나빠졌다.[6]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에 대한 편견이 잘 나타나는데 이를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식으로 돌격을 하는 일은 없었다. 말같지도 않은 명령을 받고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병사가 소위 우라 돌격을 했다 해도 각개전투를 하며 최대한 수류탄을 까 넣을 거리까지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그림이었다.

소수 사례가 아닌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바실리 추이코프가 독일군의 제병협동/합동과 공군의 폭격을 방해하기 위해선 피해를 감수하고 최대한 근접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고 이는 정확했으며, 이에 맞춰 최전방을 맡은 근위군, 충격군은 선전했다.[7]

실제로 게릴라나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인 전투는 많이 있어도 대규모의, 피아구분조차 되지않는 환경에서 강력한 정규군이 치고박고 싸운 건 2차세계대전이 '기록상으론' 최초이다. 최초의 시가전에서 소련군은 1인 2수류탄 지급으로 독일군이 있을법한 건물의 모든 창문, 모든 방마다 수류탄을 던진 후 진입 하도록 지시했고, 숙련병들을 모아 길고 무거워 다루기 힘들며 단발인 모신나강, SVT-40, AVT-40등의 보병용 소총 대신에 짧고 강력한 화력투사가 가능한 기관단총과 다수의 각종 수류탄, 대전차 소총 및 공병폭약 등으로 무장시켜 특작조/습격조를 즉석에서 창설했으며, 독일군 야전본부 1층 건물에 몰래 진입하여 TNT를 터뜨려 독일군 야전 지휘관을 생매장 시키질 않나, 5층 건물의 2층까지 점령한 후 3층 돌입이 힘들자 합을 맞춘 T-34전차에 고폭탄 사격을 요청해 쏟아붓고 돌파하는 등, 현대 미군이 쓰는 시가전 교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전술을 사용했다. 무전기도 부족했는데 말이다.

또한 소련군의 수적 우위를 적절히 활용한 작전계획을 우라 돌격으로 싸잡아 부르기도 한다. 공세를 가할 땐 초등학생도 알다시피 당연히 앞으로 전진하며 싸워야 하나, 어째 러시아가 했다 하면 그냥 공세가 아니라 특유의 인력 동원 능력에 대전 초기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우라 돌격이라고 불리며 앞사람이 총 맞는 동안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달려나가 이기는 것이라고 폄하된다. 이 때에도 일본군의 행태와 뒤섞여 반자이 돌격식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분명 전쟁 초기 무지한 지휘관들이 묻지마 공격, 후퇴금지와 같은 명령들로 대규모 인명피해를 냈지만, 초기의 졸전은 나치와 냉전시대 논리처럼 멍청이들이라 못싸워서가 아니라 나치 독일의 불가침조약까지 파기하며 가한 야비한 기습, 스탈린의 군사적 실책들과 함께 전쟁 전에 이미 무너져 있던 군체계와 늑장 대응 등이 겹쳐 발생한 전략적인 실패가 원인이었다. 참조

당시 소련 전차병들이 전차로 주행간 사격을 한 것도 우라 돌격의 일환으로 취급되며 놀림감이 된다. 그러나 아프리카 전역에서 그토록 보급문제에 시달리던 에르빈 롬멜조차도 전차가 앞으로 돌진하면서 포를 쏘는 걸 금지하지 않았다. 당연히 보급장교는 맞지도 않는 뻘짓이라고 지적했지만, 포탄이 난무하는 적의 방어선에 돌진하는 전차병들이 주포를 맞쏘며 나아갈 때 사기가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다, 주행간 사격이라고 무조건 안 맞는 것도 아니고 숙련도가 높은 포수는 그럭저럭 대전차포 진지같은 큰 고정목표에 피해를 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압사격이라고 해서, 어떻게는 포를 쏘고 위협하면서 돌격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고 전진하는 것보다 적들의 반격을 줄일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적들도 다가오는 표적이 그냥 반자이 돌격마냥 달리면서 돌격하는 것보다 제압사격과 동시에 돌격하는 것이 훨신 위협적이고 반격하는 것 또한 힘들것이다. 이 역시 흔히들 생각하듯이 우라!!! 하고 외치며 마구 달려나가면서 대충 막 쏴갈겨대는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엔 사통이 발달하지 않아 주행간 사격이 탄 낭비에 가까워 추축국이든 연합국이든 정지 후 사격이 기본이긴 했지만, 여러 국가의 장성들도 주행간 사격을 권장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지하지는 않았다.

물론 당시 FM적인 포사격은 운전 중 포수가 사격이 필요하다고 여겨 운전수에게 전차를 안정시켜 줄 것을 요청하면 운전수는 최대한 평평한 곳을 찾아 그 길로 운전하며 Дорожка!(다로쥐까, 길)라고 외쳤다. 그 후 포수가 Огонь! (아곤, 발사) 라고 외친 후 발사하면 탄약수가 탄피를 바닥에 던지든 수납하든 하고 차탄을 장전한 후 포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과연 돌격하면서 적들이 포탄을 쏘는 와중에 주변 탱크들은 터져나가는 상황에서 저렇게 냉정하게 하나하나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얼마나 되겠는가? 거기다 평지가 대부분인 러시아 지형에선 저런 짓을 모든 탱크가 했다간 바로 상대방이 맞추기 좋은 고정포대 1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돌격하면서 한두발 쏘며 위협하다 적당한 사정거리에 목표물이 나오면 위와 같이 어느정도 탱크를 안정시키고 발사하는 게 타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에서도 기본 상식이였다. 거기다 주행간 사격 시 명중률이 꽝인 것도 아니라서 전차학교 졸업 시험 기록을 보면 BT-7의 경우 10x10m 크기의 목표에 대해 1km의 거리에서 25~30km/h의 속력으로 주행 중 25~30%의 명중률을 보였으며, 포신 안정장치 장착 시 53~66%의 명중률을 기록하였다. 이는 전차병 학교의 최종 시험이었다. 위의 통계도 전차병 학교의 기록에 기반한다. 즉, 최소 5발을 쐈다 하면 2발은 명중시켰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대전 후기 소련이 워낙 위압적으로 밀어붙히며 공세를 실시하자 이를 보고 우라 돌격이라 하기도 하는 등 이중적인 의미도 가졌다. 일부 소련군 매니아들이 지나치게 추켜세우기도 하나 사실 그 우라 돌격이라는 건 공세상황에서 그냥 적기에 충분한 포격지원에 보전합동하며 목표지점에 대한 제압을 위해 돌격을 하는 게 다고, 그건 다들 해 왔던 것이었지만, 소련의 경우 특유의 제파식 전술과 습격조, 단위수가 다른 엄청난 규모의 전투, 빠르게 깊숙히 훅 들어가는 종심침투, 각종 기만책, 정보전으로 유명해졌다.

스탈린의 명령 제227호로 인해 자살성 돌격이 잦아지게 되었고, 의외로 독일군의 보급품을 거덜내 전략적인 관점에선 큰 도움이 된 전술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명령 제227호[8]가 발령된 날은 42년 7월 28일인데, 이때는 이미 소련군이 태세를 추스르기 시작하던 때이며, 독일 태풍 작전을 맹렬한 반격으로 막아낸 지 한참 후이다.

그리고 한 달 반쯤 뒤엔 복병들 때문에 독일군이 마구 죽어나간 것으로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졌다. 당연히 우라 돌격과는 전혀 상관 없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아주 전형적인 도시전이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양측의 저격병과 특공대가 적이 남긴 흔적과 첩보 정보를 추적하며 서로를 사냥하던 방식이었다. 독일군이고 소련군이고 돌격할 여지가 없었다. 전술에 대한 견해는 어지간히 멍청한 게 아닌 다음에야 누가 농담삼아 한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만일 정말로 소련군이 다같이 달려나가 몸으로 총알을 받아주었다면 독일군은 오히려 복잡하고 돌파하기 어려운 도심에 진입하지도 않고 무모한 공격만 쏟아붓는 소련군을 손쉽게 격퇴하며 보급품을 아끼면서 전선을 훨씬 쉽게 돌파했을 것이다.

가끔 전쟁과 평화 영화 같은 걸 이야기하며 러시아군 특허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도 돌격할 때 우라라고 외치며 돌격하는 것 뿐이지,결국 우라라고 샤우팅 치는 건 특허 맞다 이 영화 전투씬에 나오는 전열보병 프랑스, 동유럽, 영국 등 유럽 다수의 나라들이 모두 공유한 병종이다. 시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백병전을 위해 돌격을 할 때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고취시키고 뛰어든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사실 전투 중에 고함을 지르며 적을 동요시켜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것은 선사시대 채집수렵꾼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깊은 전술이다. 유럽에선 Hoorah를 나라마다 자기네식으로 발음해 쓰였다. 러시아의 경우엔 h는 묵음, l은 치경음이 되는 특색을 가졌을 뿐이다. 전열보병 항목에 나오듯이 미군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똑같이 이랬다. 현재 미 해병대에선 Hoo↗ah↘로 변형돼 '예 알씀다', 'ㅇㅇ' 정도로 쓰인다. 무슬림들은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기도 했고, 단순한 만세 대신 욕을 하거나 죽으라고 악을 쓰는 경우도 충분히 많았다.

3.1. 반자이 돌격과의 비교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우라 돌격을 시전한 참전용사들에게 석고대죄를 해야 할 정도로 차이가 심각하다.

우선 차이점을 보면 작전 실행을 누가 결정하냐부터 차이가 난다. 반자이 어택은 그냥 대책도, 전략도 오로지 현장의 장교가 결정한다. 정말 기본 교리대로 닥돌할 건지, 아니면 기존의 교리를 스스로 재창조하든지 둘 중 하나였는데, 뭐가 됐든 반자이 돌격은 결국 적 진지를 향해 무작정 돌격하는 거지만, 우라 돌격은 진짜 전방 세간살림이 싸그리 털리고 남은 게 없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반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적의 취약점을 찾은 후 체계적인 화력 지원 하에서[9] 적에게 돌격하는 모범적인 충격 전술로서의 돌격이다.

물론 우라 돌격도 가끔씩 화력 지원은 커녕 기관총 엄호도 없이 총만 들고 돌격할 때가 있긴 했는데 이는 독소전 초반 소련군들이 포위당해 보급품도 없는데 항복하면 죽을 게 뻔해서 기왕 죽는거 나치놈들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달려들거나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어보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쓴 수단이다. 게다가 현 러시아군 교범에도 제병합동작전 시 적 진지에 수류탄 투척 후라는 단서 조건이 붙어있을 정도로, 우라 돌격은 폭발등으로 인한 충격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최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무슨 무장을 들고 있건 무슨 무기를 들고있건 일절 파악안하고 냅다 어택땅을 시켜버렸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때부터 당시 유럽 최강 육군이던 프랑스 군을 따라 화력과 유동적인 화포 운용으로 적을 잘게 쪼개버린 후 기병이나 전차, 혹은 보병의 총검돌격으로 파편이 난 적을 조각내는 전술을 채용했다. 이는 물론 효과적이었고, 사실 크게 보아 문제는 없는 전술이다. 영국의 순항전차, 보병전차 개념도 사실 이 전술에서 사용되는 기병을 순항전차가 맡고, 발달된 진지들을 뚫어나갈 보병을 보병전차가 돕는 형태로 발전시켜서 이 전술을 계속 우려먹기 위해 만들어진 거다. 1차 대전 때 프랑스가 개박살난 건 이게 참호 기관총 그리고 철조망 지뢰의 발달로 보불전쟁 때까지만 먹혔는데 프랑스는 그걸 몰랐고, 전쟁 동안 그 교훈을 반영하기엔 프랑스 군이 너무 급박했다는 것뿐.

문제는 러일전쟁에서 다른 열강들은 '와, 화력전이 답이구나. 소국도 대국을 쓸어버리네 ㄷㄷ;;' 했는데 일본 혼자만 '와, 우리 같은 소국이 화력전을 하면 가랑이가 찢어지겠구나. 그럼 돈도 없으니 저렴한 보병돌격만 발달시키자!'[10] 라는 결론을 얻어서 그만... 아무리 총알과 포탄이 아깝다지만 약소국들이나 게릴라들이 들을 엿먹인 방식 들이 저격과 폭파를 위시한 비정규전이었다는 점, 멀쩡한 보병 돌격을 성공시킨 1차대전 말기 협상국이나 2차대전 때의 소련, 태평양 전쟁에서의 미국이 돌격 성공을 위해 정교한 작전과 발달된 무기체계를 잔뜩 퍼붓고도 인명 피해를 내며 그 성과를 거뒀다는 걸 보면, 당시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앞뒤가 바뀐 황당한 미래예측을 해 버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경험으로 항모교리로 전향한 해군을 빼면 별다른 전과 없이 빈집털이하다 승전국이 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수도. 해군이 육군의 발전 수준을 다 뺏어갔나보다

반면 소련군의 경우, 매체에서 자주 보이거나 흔히들 생각하는 그러한 돌격은 준비도 빈약한 상황에 기습으로 무기조차 못 들려주고 보병들을 내보내야 했던 전쟁 초기에나 잠깐 있었을 뿐, 시간이 흘러 전쟁 중후반 즈음부터는 생산 시설이나 무기체계 등의 전쟁 준비가 갖춰지면서 완벽히 없어졌다. 반자이 돌격은 그냥 알보병 돌격이지만, 우라 돌격은 T-34 IS-2, Il-2 등의 지원 및 엄폐물을 담당하는 차량, 항공기 폭격과 카츄사등의 포병지원을 빵빵하게 받으면서 돌격한다. 당장에 일선에서 소련의 우라 돌격을 당해본 독일군 회고록을 보면 공격 전 독일 포병과 기갑부대의 반격의 씨앗을 송두리채 뽑아버리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양의 포탄 비를 퍼부어버려 적 진지를 초토화 시켜버린 후, 엄청난 물량의 T-34와 그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보병들이 다함께 전진하면서 상대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답 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전쟁이 시작돼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바로 위에 언급한 '화력지원은 커녕 엄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만 들고 병력들이 돌격하던' 시기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가용 가능한 모든 화력을 끌어다 우라 돌격을 지원해 주었다. 총, 칼, 탄약은 기본이고 개별 보병 단위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인 수류탄, 총류탄도 명당 5-6개씩 넉넉히 쥐어주고 이마저도 부족하자 급조가 가능한 화염병까지 쥐어줬다.[11] 핀란드인들이 소련에게 좋은 선물을 준 듯 하다 심지어 파파샤 모신나강도 쥐어주기 부족했을 때는 민간에 있던 총도 끌어모아 어떻게든 빵빵한 화력을 안겨주려 노력했다.

이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방어에 나선 전투 중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우라 돌격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데, 독일군의 전차사단이 북서쪽에서 진격하자 카츄사 로켓 일제사격으로 대부분 격파하고, 장사포를 잽싸게 볼가강 너머에 안전하게 배치하면서 꾸준히 포격지원을 해 주었다. 독일 공군에 의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보병들은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 바로 건너편의 건물까지 병력을 배치했다. 10m 채 안되는 양군간의 거리 때문에 큰 문제였던 독일 공군의 폭격은 아군오사 문제로 인해 전투기가 출격도 못했다.

또한 지속적인 근접전으로 인해 무지막지하게 소모된 병력을 지속적으로 최대한 빨리 충원하기 위해 거점들을 지하로로 연결하기도 하고, 지원병력과 보급품이 건너오는 볼가강 도하지점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점령당해도 빠르게 수복해 기차역까지 몰아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근접전은 노련한 병사들로 20~30명 규모의 습격조들을 편성해 기관단총과 대검, 야삽, 다수의 수류탄으로 무장시키고 필요에 따라 강행침입을 위한 폭약과 거기에 더해 경야포,[12] 실내전을 위한 화염방사기, 대전차소총,[13] T-34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이들은 몰래 건물의 사각지대에서 통로개척 후 수류탄을 마구 까넣은 뒤 기관단총,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쓸어버리길 선호했다.

소련의 공세는 종심작전이론에 따라 한 번의 전투에 집중하지 않았고 전술적 승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여러 제대가 유연히, 치밀하게 연계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전투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연계되는 전략적 성공,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전쟁 자체를 승리로 종결짓는 것까지 목표로 둔다. 이를 위해 대규모의 공군과 기갑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노력해 T-34 Il-2 등의 양산을 통해서 상당한 수를 확보했다.

또한 소련군은 정보전에도 우위를 점했고, 이 정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작계에 반영됐다. 작전 수행 이전에 적에게 역정보를 잔뜩 흘린 후, 무전침묵속에 병력들을 완벽히 숨겨가며 이동시켜 미리 작전 지점에 배치해두고,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공병들이 조용히 철조망/지뢰 등의 장애물들을 치우고, 정찰병이 화기진지들을 관측한 뒤 일시에 항공폭격 및 포격으로 방어체계에 구멍을 내었다. 특히 대전차 진지들에 화력을 집중했다. 공군은 적 예비대의 투입이 어렵게 도로를 폭격해 끊었다.

이렇게 공군 및 포병이 한 차례 쓸어버려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뒤에 지상에선 앞서 미리 배치돼있던 습격조 병력들이 급습해 남은 적 방어체계를 무력화 하며 내부에 자리잡아 교란한 뒤 전투를 시작하거나 바로 근위 소총사단 위주로 편성된 1제대가 얇게 적 방어선에 접촉을 유지해 적을 견제해 적 부대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방어선의 취약점과 화기진지를 찾아 추가 포격 밎 공중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별의 보병 1명만으로도 충실한 화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개인용 화기 체계가 매우 발달한 현대를 기준으로 봐도 71발이라는 대용량 탄창을 장비할 수 있어 전투 지속력이 좋은 PPSh-41만을 무장한 소대가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공군은 이 때 지상군 지원만이 아닌 적의 예비대에 대한 감시 및 공격을 병행한다. 기계화된 2제대가 이렇게 형성된 취약점을 돌파 후 돌파구를 유지하면, 전차사단이 깊숙히 침투하여 종심을 유린해 적 전선 전체가 붕괴된다. 바그라티온 작전, 만주 작전이 좋은 예이다. 비교대상인 일본 만주군은 1주일만에 항복시켰다.

간단히 말해서 우라 돌격은 튼튼한 후방지원을 등에 업고, 각종 무장 및 훈련을 통해 개별 보병의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후, 적의 약점을 기습적으로 찔러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이고, 반자이 돌격은 전술이고 후방지원이고 뭐고 없이 무조건 돌격하는 하급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일본군도 반자이 돌격할때 최대한 기관총과 화포들을 동원해 지원사격을 해주기는 했으며, 반자이 돌격의 성공을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화력증강이 필요하다 여겼는지 기관단총 또한 개발시도 했다. 즉, 완전히 모르는건 아니었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준비는 시도했다. 아마 이 모든것이 갖춰졌다면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우라 돌격과 많이 흡사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1945년 패전하기까지 일본군이 써먹는 시늉이라도 한건 기관총과 화포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화포는 정확도가 떨어지는데다 숫자도 매우 적어서 전황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기관총이란건 탄띠식은 고사하고 장탄수가 40발을 넘지 않는 탄창 방식, 보탄판 방식, 클립 방식 등 1차 세계대전때에나 쓰였을 물건밖에 없는데다 그마저도 물량이 너무 적어서 전쟁 말기쯤 되면 기관총을 지급받는 보병부대가 드물어질 수준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반자이 돌격은 대부분 알보병이 몸으로 때우는 전술로 남게 되었다. 전쟁 말기까지 가도 어떻게 보면 1960년대까지의 인민해방군과 비슷한 상황[14]이었지만, 지상에서 싸웠기에 포위섬멸을 시도할 정도로 병력을 집중시킬수 있었던 인민해방군과는 달리 본토와 멀리 떨어진 섬까지 격침위험을 안고 병력을 일일이 수송해야 해서 제한된 병력수로 미군을 상대할수밖에 없었던 일본군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3.2. 엘랑 비탈과의 비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보여주었던 엘랑 비탈 돌격과는 차라리 비교할 만하다. 물론 이 엘랑 비탈 돌격은 반자이 돌격에 영향을 준 착검돌격식 돌격방법인 만큼 이 역시도 우라 돌격에 비교하는 것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반자이 돌격과 비교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1차대전 초기의 엘랑 비탈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총검 끼고 "비바 라 프랑스!" 라면서 돌격하는 반자이 돌격과 별다를 바 없는 행위였지만, 1차대전의 참호전 앞에 대처할 방법은 당시로썬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1차대전 초기에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 제국 또한 그런 무모한 반자이식 착검 돌격을 했다. 그리고 엄연히 "초기" 에 일어났던 일일 뿐이다.[15]

1916년부터는 프랑스도 야포의 지원 하에 엘랑 비탈을 시행했으며, 1917년부터는 프랑스도 전차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차 지원까지 받았다. 1917년 말에 일어났던 말메종 전투, 그리고 1918년 8월부터 시작된 백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야포와 전차를 앞세운 엘랑비탈 돌격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그 결과 독일제국을 1차 대전에서 패배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다.

4. 매체에서의 등장

5. 참고 문서



[1]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할 때 '꼬레야 우라!(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출처: Боевой устав по подготовке и ведению общевойскового боя (предыдущее название — Боевой устав сухопутных войск) часть 3, взвод, отделение, танк. Глава III «Наступление». [3] 예로 기동전중이나 이후 대전 중 실용화된 종심작전이론에 따른 적 방어 라인을 다방향에서 공격함으로써 아군의 주공 방향을 속여 적 지휘관이 기동방어나 종심방어를 위해 편성한 예비대를 이상한 데 땜빵하는데 소모하게 하기 위한 작전 중 적 진지를 아군의 사거리 안에 두기 위한 돌격 등. [4] 이미 겨울전쟁에서의 경험으로 장교들이 복직되기 시작해 백군출신 장교도 있었다. [5] 어느 한국 역사학자가 러시아에 유학갈 일이 있어서 현지 친구에게 '한국에서는 소련이 추위 덕분에 독소전쟁을 이겼다고 알려져 있다'라고 말하자 친구가 '쯧쯧, 전쟁은 날씨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인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날씨가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쟁의 결정적 승패를 가리는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 집단의 행보라는 것. [6] 아무개가 대충 떠든 말이긴 하지만, 이에 대해 어느 주한미군은 "쪽빠리들이 태평양에서 미친 짓 많이 했잖아.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빨갱이들한테 투영하는 거지. 사람들은 대체로 군사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까. 나머진 대체로 또라이들이야. 쿨해보이는 비디오게임식 전술 지랄에 빠져선 사격장에 바디아머 입고 나타나는 미친놈들. 걔넨 입대할 부랄도, 전술학원 등록할 돈도 없어."라고 말했다. [7]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전술의 천재라 불리며 막을 수 없다고 불렸던 정예 독일군이 소련군의 분대 단위까지 나가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정교한 전술에 독일군이 수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내며 학을 뗀 전투이다. [8]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이 명령 집행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군법재판 당할 수준의 무질서한 패주나 탈영 같은 행동을 즉결 심판하는 수준. 통념처럼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전투 중 재집결지를 설정하고 이동했다고 해당 소/중대장을 처벌하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 미군도 작전도주했다가 걸리면 얄짤없이 사형이다. [9] 다연장 로켓포, 야포, 항공기 지원, 그마저도 없으면 박격포, 수류탄, 총류탄, 하여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지원 수단 등이 있었다. [10] 일본이 당시 얼마나 많은 돈을 전에 쏟아부었냐면 무려 6년치 국방 예산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뒤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목적으로 미국과 영국이 도와준 것이라 그렇다. 거기다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러시아 - 일본 간 해상전을 제외하면 그렇게 돈을 쏟아 붓고도 정작 육군의 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컸다.(이때 진지에서 쏘아 대던 러시아 군의 기관총에 피해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걸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초라 보는 시각도 있다.) 이렇게 희생도 컸고 돈도 많이 드니까 돈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갈아넣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소련도 몰려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인명경시 사상과 수많은 군인들을 퍼부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스탈린이 '포탄을 들이붓는 게 인민을 들이붓는 것보다 낫다'고 독려하면서 우라 돌격의 교리도 바뀐 점을 생각하면 이건 뭐... [11] 이는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에서도 구현되는데, 디미트리가 막 구조된 이후 화력이 부족하자 아예 화염병을 쓰라며 처음부터 화염병이 4개나 쥐어진다. 수류탄은 죽은 나치군에게 루팅해서 쓰라고 조언해주는 레즈노프는 덤. [12] 멀리서 안전히 중요건물에 통로를 개척할 수 있어서 애용되었다. [13] 시가지의 엄폐물 대부분을 관통할 수 있어 대인을 겸했다. [14] 제대로 가용가능한 자원이 일반 보병과 박격포 계열의 소구경 화포밖에 없는 상태 [15] 하지만 일본은 이런 무작정 돌격이 뒤떨어진 전술로 버려진 이후에도 사용했다. [16] 이 작품은 러시아 영화로 오드리 헵번이 나온 1956년작인 미국영화가 아니다. 829만 루블로 제작한 이 영화는 러시아에서만 5800만 루블을 벌어들이고 해외 각지로 수출됐다. 감독인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는 1970년 미국과 합작인 워털루도 감독했다. [17] 1차대전 러시아 제국군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18] 딱 봐도 45mm 대전차포이다. [19] 그것도 여러개 묶은 집속수류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