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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 이반 이사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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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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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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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13대 해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Серге́й Горшко́в | Sergey Gorsh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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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고르시코프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Горшко́в Sergey Georgiyevich Gorsh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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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년 2월 26일 | ||
러시아 제국 포돌스크현
카메네츠-포돌스크 (現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주 카미야네치포딜스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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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8년 5월 13일 (향년 78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15대 흑해함대 사령관 | ||
1951년 8월 2일 ~ 1955년 7월 12일 | |||
제13대 해군 총사령관 | |||
1956년 1월 5일 ~ 1985년 12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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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고로시코프 어머니 옐레나 페오도시예브나 고르시코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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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소비에트 해군 | ||
1927년 ~ 1985년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해군)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7회) 애국전쟁훈장 1등급 우샤코프 훈장 1, 2등급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쿠투조프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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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해군에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이반 이사코프와 함께 단 세 명뿐인 원수이며, 냉전 시기에 29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소련 해군 총사령관을 맡아 미국 해군과 자웅을 겨루던 소련 해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통칭 소련 해군의 어머니.2. 생애
2.1. 성장
고르시코프는 1910년 2월 26일, 카메네츠-포돌츠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주의 콜롬나에서 자랐다. 1927년 소련 해군에 입대한 뒤, 1931년 11월에 프룬제 해군학교를 졸업하고 흑해함대의 구축함 프룬제의 당직사관으로 해군 생활을 시작했다.한 달 뒤에는 프룬제의 항해사가 되었고, 1932년 3월에는 태평양함대로 전속되어 기뢰부설함 톰스크에서 복무했다. 1934년 1월, 기뢰부설함 및 소해함 여단의 기함 항해사로 승진한 고르시코프는 그 해 11월에 경비함 부란의 함장이 되었다.
1936년 12월부터 1937년 3월까지 구축함 함장 과정을 수료한 고르시코프는 구축함 라쟈시의 함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태평양함대 구축함여단의 참모장이 되었으며, 1938년 5월에는 구축함여단장이 되어 하산 호 전투에 참전했다.
같은 해 11월 고르시코프는 마무리 진수 작업을 위해 프로젝트 7형 구축함 '례쉬텔니'를 블라디보스토크로 견인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불행히도 폭풍우가 발생해 '례쉬텔니'가 난파당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대숙청이 진행되던 흉흉한 시기었기 때문에 모두가 고르시코프의 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르시코프의 상관이었던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가서 고르시코프의 무죄를 주장했고, 덕분에 고르시코프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지만 1939년 2월 구축함 여단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1939년 6월 해군 인민위원이 된 쿠즈네초프는 고르시코프를 흑해함대의 구축함 여단장으로 임명하면서 해임 처벌까지 보상해준다. 1년 뒤 1940년 6월엔 순양함 여단장을 맡았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9월에 고르시코프는 31살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한다. 고르시코프는 오데사 방어전에 참여했다가, 10월에 아조프 전단장으로 전임된다.케르치반도 북부의 상륙작전을 지휘한 고르시코프는, 1942년 8월에 소련군이 노보로시스크로 후퇴하자 아조프 소함대 역시 해산되어, 고르시코프는 노보로시스크 방어구의 해군 부사령관 겸 군사 평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고르시코프는 캅카스 전투 동안 임시로 지역을 방어하던 제47군 소속의 병력을 지휘했다.
재편성된 아조프 전단의 전단장으로 복귀한 뒤, 고르시코프는 타만 반도 상륙작전 등 흑해 일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해 여러 훈장을 수훈받게 된다. 1944년 4월 다뉴브 전단장이 된 고르시코프는 제2차 야시-키시뇨프 공세에서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병력을 지원했으며, 이후에도 베오그라드 공세와 부다페스트 공세를 지원했다.
9월에 중장으로 진급한 고르시코프는 흑해함대 전대장으로 이동했으며, 그 직책에서 종전을 맞았다.
2.3. 전후
고르시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 11월에 흑해함대 참모장이 되었고, 1951년 8월에는 흑해함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1953년 8월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1955년 7월, 심근경색를 겪고 병가를 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의 추천으로 해군 제1부사령관에 임명된 고르시코프는 쿠즈네초프의 업무를 대행하다가 같은해 12월 쿠즈네초프가 주코프에 의해 해임되어 1956년 1월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취임한다.[2]
2.4. 해군 총사령관
<colbgcolor=#cd0000> |
1968년 2월 23일자 타임지 표지 |
간단히 예를 들어 말하자면이런 개념이다.
이에 따라 고르시코프는 소련 해군의 발전에 힘써 킨다급 미사일순양함, 크레스타급 순양함, 카라급 순양함 등 현대식 수상함을 갖추기 시작했고, 모스크바급 대잠 항공순양함, 키예프급 항공 중순양함에 이어 1980년대 초반부터는 키로프급 핵추진 순양함과 슬라바급 순양함 같은 막강한 대형 수상함을 취역시켰다.
해군 항공 전력도 현대화되어 수백 대에 달하는 Tu-16, Tu-22M 폭격기들이 Kh-22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탑재하고 미국 해군의 항모전단을 겨냥했으며, Ka-25, Ka-27, Mi-14 헬리콥터가 배치되었다. 정찰 자산도 늘어나 대양 곳곳에는 Tu-142, Il-38 대잠초계기와 더불어 각종 정보수집함들이 미국 해군을 감시했으며, US-A, US-P 해양정찰위성으로 구성된 르젠다 시스템을 구축해 미국 해군의 동태를 추적했다.
잠수함 전력도 미국 해군을 제외한 북대서양 조약기구 해군 전체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여 노벰버급 원자력 잠수함부터 빅터급, 알파급, 시에라급, 아쿨라급 원자력 잠수함과 에코급, 찰리급, 오스카급 유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그리고 양키급, 델타급, 타이푼급 전략 탄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과 같은 강력한 전력을 갖추었으며, 특히 1972년에 등장한 델타급은 소련의 연안에서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체계였고, 타이푼급은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1970년에는 크반트 연구소를 방문해 해군용 Carat 컴퓨터의 개발을 의뢰하는 등 그야말로 소련 해군을 위해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고르시코프 덕분에 소련 해군은 서방 세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 내부에서는 1975년 순양함 격차 논쟁과 같은 정치적 논쟁까지 벌어졌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경제도 붕괴되면서 신생 러시아 연방 해군은 어쩔 수 없이 고르시코프의 유산 상당 부분을 스크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고르시코프의 유산은 러시아 연방 해군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되었고, 그 덕에 소련 해군에 비해 규모가 큰 폭으로 축소된 러시아 연방 해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급격한 팽창 이전까지 한동안 세계 2위의 해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colbgcolor=#cd0000> |
해군 군관 정복을 입은 노년의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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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승전 20주년 퍼레이드 당시의 모습[3] |
3. 여담
저서도 제법 있는 편인데, 가장 유명한 책으로는 < 국가의 해양력>이 있다. 한글 번역도 되었기 때문에, 해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읽어봐도 좋은 책이다. 다만 가짜 전쟁의 개념을 몰라 오역을 하거나, 영문의 문장 구조를 잘못 파악해 독소전쟁 개전 초기 상황에 대한 서술을 엉뚱하게 서술하는 등 곳곳에서 번역이 엉망이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역자가 번역한 영역본을 구해 읽는 것을 권한다. 러시아어가 가능하다면 러시아어본을 구해서 읽으면 한역본에서 나타나는 무의미한 용어 구분에서 오는 혼동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소련인이 쓴 만큼 영국과 미국을 까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까지는 않으며 오히려 지상군 위주의 소련 전략가들을 더 많이 깐다.통칭 소련 해군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전임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이 주코프와 흐루쇼프의 정치질로 해군에서 쫓겨나자 그를 철저히 짓밟고 다시는 못 올라오게 막았다. 권력싸움으로 생각하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고르시코프는 쿠즈네초프가 사망한 뒤에 사후복권까지 막아 결국 쿠즈네초프는 고르시코프가 사망한 1988년에서야 복권될 수 있었다. 심지어 쿠즈네초프 사후, 197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쿠즈네초프 탄생 75주년 기념 행사[5]도 취소할 것을 종용하고 행사가 취소되지 않자 쿠즈네초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해군 제독과 장교들을 출장을 이유로 모스크바에서 대거 내쫓을 정도였다. 이때 행사에 참석했던 한 역사가는 이에 대해 "고르시코프의 살리에리 증후군은 항상 나를 놀랍게 한다."라고 비평했다. 이밖에도 다차와 집을 수리해달라는 쿠즈네초프의 요청서를 취소시키기도 하고, 쿠즈네초프가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들에 대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연금으로 협박해 묵살시키기도 했다.
1938년 한창 대숙청이 진행되고 있을 때 구축함 하나를 날려먹은 고르시코프를 상관이었던 쿠즈네초프가 목숨 걸고 쉴드쳐 구해주기도 하고, 총사령관직 병가를 낼 때 직접 자신의 직무 대리로 추천했을 정도로 쿠즈네초프는 고르시코프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맞은 것이었다. 정작 고르시코프는 생전 쿠즈네초프가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고 자신에 대해 안좋은 소리들이 나오자 크게 기분 나빠했다고 한다. <국가의 해양력>에서 소련 해군의 활약상을 쓴 부분에도 당시 쿠즈네초프가 해군장관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1982년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사령원으로 재직하며, 중국 해군력의 발전을 이끌었던 류화칭 제독이 1954년 소련의 보로실로프 해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을 당시에 고르시코프의 지도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류화칭 제독의 별명은 다름아닌 중국의 고르시코프다.
소련 해군이 고르시코프의 노력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 유명세는 미국에도 알려져, 고르시코프는 톰 클랜시의 출세작인 붉은 10월에 등장한다. 극 중의 인물인 마르코 라미우스가 쓴 잠수함 관련 논문을 주의깊게 보고, 라미우스의 유능함을 인정해 타이푼급 전략 탄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7번 함인 붉은 10월의 함장으로 임명하는 사람이며, 라미우스가 붉은 10월을 몰고 미국으로 망명하려 하자, 결국 붉은 10월을 격침시키기로 결정한다.
러시아 연방 해군은 고르시코프를 기리는 의미에서, 키예프급 항공 중순양함 4번 함의 함명을 바쿠에서 어드미럴 고르시코프로 변경했으나, 해당 함이 인도로 매각되어 인도 해군의 비크라마디티야가 되자, 어드미럴 고르시코프급 호위함에 고르시코프의 이름을 붙였다.
4. 진급 이력
- 1936년 3월 17일: 대위
- 1937년: 소령
- 1939년 9월: 중령
- 1940년: 대령
- 1941년 9월 16일: 소장
- 1944년 9월 25일: 중장
- 1953년 8월 3일: 상장
- 1962년 4월 28일: 대장
- 1967년 10월 28일: 원수
5. 수훈 목록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수훈
- 1등 우샤코프 훈장
- 1등 쿠투조프 훈장
- 레닌 상 수상
- 소련 국가 포상
- 세바스토폴, 블라디보스톡 등 명예 시민
6. 관련 문서
[1]
혼전성은 니키튜코바(Никитюкова).
[2]
당시 소련 국방부는
국방장관 - 제1국방차관 - 국방차관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였다. 제1국방차관은
소련군 총참모장/
바르샤바 조약기구 통합군 최고사령관/군수산업사령관 세 명이었으며, 그 밑에 육군/해군/공군/방공군/전략로켓군 사령관 다섯 명이 당연직으로 국방차관을 겸임하였다.
[3]
왼쪽부터
바실리 소콜롭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필리프 골리코프, 고르시코프,
게오르기 주코프,
키릴 모스칼렌코,
안드레이 예료멘코
[4]
소련군에는 정년이 없기에 은퇴를 원하지 않는 상장 이상의 고위 장성들은 총감찰단으로 이직해 현역 생활을 지속했다.
[5]
어릴때 입대하는 과정에서 나이를 2년 속이느라 쿠즈네초프의 공식 생일은 1902년이었다.
분류
- 소련군 원수
- 소련 해군 총사령관
- 독소전쟁/군인
- 1910년 출생
- 1988년 사망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수흐바타르 훈장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5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9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10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11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5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6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7기 중앙위원회 위원
- 흐멜니츠키주 출신 인물
-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