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군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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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P | |||
소비에트 연방 원수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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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Адмирал Флота Cоветского Cоюз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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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 이반 이사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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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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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9대 노농적군 미사일-포병관리국장
그리고리 쿨리크 Григо́рий Кули́к | Grigory Kul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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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
러시아어)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Grigory Ivanovich Kul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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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호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
우크라이나어) Григорій Іванович Кулик Hryhoriy Ivanovych Kuly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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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년 11월 9일[1] | ||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 폴타바구 두드니코보 (現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폴타바군 두드니코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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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8월 24일 (향년 59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연방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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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돈스코이 묘지 | ||
재임기간 | 제9대 노농적군 미사일-포병관리국장 | ||
1940년 7월 13일 ~ 1941년 6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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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00><colcolor=#ffe400,#ffe300> 배우자 |
리디아 야코블레브나 파울 (이혼) 키라 이바노브나 시모노치 (사별) 셋째 부인 올가 야코블레나 미하일롭스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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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딸 쿨리크,(1922년생)[2] 나탈리아(1943년생)[3]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2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8년 ~ 1946년 | |||
최종 계급 |
하사관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4] (노농적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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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 기병 → 포병, 보병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스페인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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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4회) 적기훈장 (4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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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의 장성.붉은 군대의 창군 원로로서 적백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소련군 원수까지 올랐으나, 여러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련판 스기야마 하지메 또는 원균으로 비교되기도 한다. 스탈린에 대한 험담을 했다가 도청에 걸려 체포,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출생에서 적백내전
우크라이나인이다. 1890년 러시아 제국 폴타바의 두드니코보(현재 우크라이나 폴타바 도 두드니코베(Дудникове))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년을 마치고 농부로 일하다가, 1912년 11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했으며, 부사관까지 승진하고 용맹을 떨쳐 성 게오르기 4급 훈장을 받았다.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은 계급체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지휘관은 선거로 선출된다.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던 그는 바로 사단 소비에트의 위원장(사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좌경화된 그는 볼셰비키로 전향하고, 노련한 고참 혁명가인 보로실로프의 부대에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합류, 적백내전에 참전한다. 이 보로실로프와의 친분은 쿨리크에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하는데, 보리실로프는 군사적 무학자로서 포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쿨리크는 그마나 기술병과인 포병 하사관으로 잔뼈가 굵어서 보로실로프의 든든한 포병참모역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로실로프는 훗날 지도자가 되는 스탈린의 최측근이기도 했고, 당연히 쿨리크도 군내 스탈린 인맥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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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묜 티모셴코와 대화하는 모습 |
2.2. 전간기
적백내전시 쌓은 스탈린과의 친분은 그의 승진을 보장했다. 레닌의 사후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정적 트로츠키의 입김이 셌던 붉은 군대 내의 자기 사람들을 특별히 챙겼으며, 쿨리크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비호아래서 능력에 상관없이 계속 승진한다.1921년 6월에는 북캅카스 군관구의 포병 지휘관에 임명되고 1926년에 3년간 소련군 포병총감을 역임했으며 1932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제3소총군단의 지휘관이 된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군사 고문으로 개입했다.
대숙청이 진행중이던 1937년에 다시 포병총감에 부임한다. 대숙청 기간동안 군 수뇌부 대부분을 날려버린 스탈린은 쿨리크를 적극 신뢰하였고, 이후 쿨리크는 소련군의 무기 개발과 포병 전력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의외로 쿨리크는 여러 장교들과 함께 스탈린에게 '고위장교단에 대한 숙청을 멈추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5]
1939년 1월 소련 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 동년 여름 할힌골 전투에 주코프가 지휘하는 부대의 포병 운용을 맡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주코프의 지휘관을 간섭하다가 7월 해임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1940년 겨울전쟁에 참전해 소련 포병부대를 지휘했는데, 이때는 의외로 전공을 세워서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7번째 소련 원수로 승진했다. 이때 같이 원수로 진급한 사람이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총참모장, 세묜 티모셴코였다.
2.3. 붉은 군대의 현대화를 방해한 희대의 똥별
여기까지만 보면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지휘관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무능한 데다가 이와는 별도로 자신의 사사로운 주관을 내세워서 군의 현대화 작업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전간기에 그를 보좌한 니콜라이 보로노프 포병원수는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쿨리크는 지나치게 독선적이며 독단적이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분명치도 않았다. 일단 부하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고는 "명령에 복종할래 영창갈래?"라고 위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나에게 다시 와서 그의 명령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세묜 티모셴코가 이끌고 미하일 코시킨 기사가 만들던 T-34를 반대했는데 황당하게도 코시킨을 지원하는 리하초프를 싫어해서였다. 코시킨 기사의 상관인 리하초프가 자신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T-34의 채용을 막기 위해 애를 썼는데. "T-34에 탑재될 76.2mm 주포는 너무 약하니 107mm 주포를 탑재하라", "이런 전차보다는 BT 계열의 쾌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사사건건 훼방을 놨던 것이다. 이런 상부의 방해와 과로가 겹쳐, 코시킨은 결국 1940년 9월 26일,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 이후 수석 기술자가 된 모로조프가 재설계했지만 쿨리크는 끈질기게 훼방을 놓았는데, 심지어 T-34M( A-43)의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기존 T-34의 생산을 중지할 것을 제의하는 판국이었다.[6]
이렇게 온힘을 다해서 방해하는 쿨리크에다가 여러가지 악재까지 더 겹쳐서 1940년 제183 공장과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 생산될 약 600대의 T-34/76은 겨우 117대만이 생산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쿨리크가 그렇게 밀던 A-43은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 T-34의 생산라인에 차질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폐기된다. 이 여파로 인하여 독소 전선에 투입할 전차가 없어 트럭엔진 올리고 항공기용 기관포를 주무장으로 올린 T-60같은 위력정찰용으로나 쓸 경전차 비스무리가 최전선에 대량투입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기갑무기의 경우엔 당시 획일화된 대규모 전차 작전이나 전술도 없었을 뿐더러 현대화에 앞서 대부분이 대숙청으로 인해 죽어서 쿨리크 원수 이외에 대부분의 장성들도 전차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던 시기라 저런 뻘소리가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데그탸료프 기관단총같은 개인용 기관단총을 경시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기관단총은 정확한 사격이 필요없는 경찰용이라는 것이었다. 이런지라 탄약 낭비한다며 개발과 생산 진척을 떨어뜨려 그의 입김이 셌을 동안에는 PPSh-41이 제대로 양산되지 못했다. 또한 지뢰가 쓸데없다고 반대하질 않나, 독일군의 전차에 대항해 전차포와 대전차포의 대구경화를 지향해야 한다면서 45mm포와 76mm포의 생산을 모조리 중지해버렸다. 후일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이보다 대구경 포를 운영할 기술력이 불가능한 시기에 무작정 생산중지만 해대다 보니 그렇게 좋아하던 대구경포는 기술적 문제로 2차대전 발발시까지 생산하지 못했다...이는 독소전쟁 대처를 제대로 못하게 하고 수천 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로 이어졌다.[7]
2.4. 독소전쟁
겨울전쟁 당시의 공훈으로 원수로 승진한 그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전선에 나선다. 6월 23일에 제 3 기계화군단과 제 10 군단을 이끌고 독일군을 저지하려다 오히려 포위되었고, 2주만에 군복에 계급장, 병과장등 모든 표식을 떼고 혼자서 겨우 탈출하였다. 이때 NKVD는 쿨리크를 기소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했으나, 쿨리크는 그때까지는 스탈린의 신임을 유지하고 있었던 듯, 다른 전선으로 전보되는 것으로 끝났다. 11월 우크라이나의 케르치 반도 수비를 맡은 그는 상부의 허가 없이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때도 전투중 만취해 있는 등의 근무태만 및 무능을 보였다. 케르치 반도를 잃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레닌그라드 공방전로 전보되어 주코프와 함께 전선을 담당하지만 다시 무능을 보이고 작전상 실책을 범해 해임 당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스탈린도 이런 무능한 부하를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군사재판에 넘겨버렸다. 그는 여러 패전과 명령불복종, 근무불성실 (작전중 만취)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벌로 1942년 2월 19일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적기훈장등의 수훈을 취소당하고, 원수계급도 박탈당한다. 그나마 처형당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스탈린은 과거의 친분을 생각해 그나마 배려해준 듯 하다. 2월 24일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에서도 철직되었다.
이후 후방의 예비부대를 지휘하다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당시 다시 제4근위군에 사령관에 임명되어 기회를 얻었으나 작전 지휘에 다시 무능을 보였고 그리하여 주코프가 직접 해임하였다.
이후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국방부에서 근무하였는데, 스탈린은 옛정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 같으면 처형감인 실패를 몇 번 용서해 주었지만, 쿨리크는 자신이 좌천된 것을 스탈린 탓으로 돌리는 불경한 짓거리를 했다. 여기에 공사도 불분명하지 않아서 국방부 공금을 마음대로 유용하여 자신의 별장의 집기를 사거나 병사들을 자기 별장의 미화에 동원하는 짓거리를 벌였다. 이런 행태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징계를 받았고 공산당에서 추방되고, 1946년 예편 처분을 받았다.
2.5. 최후
지원을 위해 투입된 제4근위군의 지휘를 쿨리크가 담당했는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걸 본 적이 없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이렇게 독소전쟁에서 아무 활약도 못한데다가, 군에서 불명예스럽게 예편되자,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었고, 그는 계속 스탈린의 뒷담을 하는 등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베리야가 감독하는 NKVD는 도청을 광범위하게 하고 있었는데, 쿨리크는 과거 부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런 도청에 걸려서 체포되었다.[8] 스탈린은 이 무능한 부하에게 계속 기회를 주었지만, 자신의 욕을 하다 걸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1947년 1월 11일에 반혁명적 그룹 가입 등의 날조된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3년 뒤인 1950년 8월 24일에 쿨리크는 처형당했다.
스탈린 사후 반혁명죄가 날조된 것이 입증되어 무죄 판결을 받고, 1957년 9월 28일에 원수 계급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가 복권되었다.[9] 물론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기 때문에 여전히 무능한 원수로 꼽힌다.
3. 여담
- 소련군 역사상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수 계급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 첫째부인은 당시 독일계 소련인이었다. 이후 아내는 부농 출신이었고, 독일계였기 때문에 그는 출세를 위해 이혼했다. 두번째 부인은 세르비아계 귀족의 딸이었는데, 이 장인이 바로 차르의 비밀경찰이였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나쁜 쿨리크의 부인도 대숙청에 반동 세력으로 지목되어 결국 NKVD에 체포, 처형되었다. 아내가 숙청되었음에도,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가 죽은 후 얼마 안 가 1940년 32세 차이가 나는 18세의 여성과 재혼하였다. 스탈린이 그의 결혼식에 참가할 정도로 이 때만 해도 스탈린은 그를 신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 흐루쇼프 시절 그가 복권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그가 자란 콜모마츠코에(Kolmomatskoe) 마을은 그의 이름을 따 쿨리코보라고 불렸다.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가 탈러시아화, 탈소련화를 걸으면서 이 이름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 부됸니와 마찬가지로 투표로 지휘관에 올라 붉은 군대에 가담했는데, 러시아군 시절과 붉은 군대 초기에는 용맹도 떨쳤고, 동료들과도 친화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웬일인지 매우 오만하고 태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2차 대전 이후 쿨리크와 함께 근무한 여러 원수들이 펴낸 회고록에 나온 쿨리크의 인물 평은 한결같이 좋지 않다. 한 러시아 군사평론가는 그가 포병 대대장이나 여단장급 지휘관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권력자와의 친분으로 능력에 맞지 않게 고속승진하면서 오만해진 듯 하다.
4. 진급 이력
- 1935년 11월 20일: 군단장
- 1937년 6월 14일: 제2사령관
- 1939년 2월 8일: 제1사령관
- 1940년 5월 7일: 원수
- 1942년 3월 17일: 소장 (강등)[10]
- 1943년 4월 14일: 중장[11]
- 1945년 7월 19일: 소장 (강등)
- 1957년 9월 28일: 원수 (사후 복권)[12]
[1]
구력:
10월 28일
[2]
리디아 소생
[3]
올가 소생
[4]
전시에
소장으로 4계급 강등당하고 1943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가 1945년에 소장 계급으로 다시 강등당한 후 1년 후에 예편당했으나 사후 1957년에 복권되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5]
이렇게 쿨리크와 편지를 보낸 사브첸코, 알릴루예프, 파블로프는 모두 독소전쟁을 전후해 처형된다. (알릴루예프는 의문사) 스탈린의 뒤끝을 보여주는 일화다. 알릴루예프는 스탈린의 처남이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한다.
[6]
사실 A-43은 T-34 초기형에서 단점으로 거론되었던 2인용 포탑 대신 3인용 포탑을 사용하고 여러 가지 설계상의 문제점을 개선할 목적으로 개발되던 것이라 완전히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Zaloga, S., Sarson, P., T-34/76 Medium Tank 1941-1945, 1997, 13) 개발이 T-34의 생산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쿨리크 본인이 사사로운 취향때문에 T-34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시키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7]
독소전 초기 독일군은
4호 전차와
3호 전차가 주력이었고 심지어
2호 전차와
LT vz. 38까지 투입할 정도였는데 소련군이 제 때에 이 포들을 양산해 대량 배치했으면 독일군 기갑부대에 상당한 소모를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8]
이때 쿨리크와 술 마시며 험담을 하다가 같이 체포된
바실리 고르도프 상장과, 리발첸코 소장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독소전쟁 당시 실책을 벌여서 스탈린의 눈밖에 난 바 있다. 고르도프는
르제프 전투에서 큰 실책을 범해 스타브카에서 직접 경고장을 받았고, 리발첸코 소장은 1944년 공세에서 무능을 보여 해임된 바 있다.
[9]
이유는 스탈린 비판을 제창한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하여 스탈린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숙청당한 이들 전부 명예회복 대상이 되었다.
[10]
1942년 3월 17일자 소련 인민위원회 결의안 제358호.
[11]
1943년 4월 14일자 소련 인민위원회 결의안 제391호.
[12]
복권 당시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인물들은 일괄적으로 복권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