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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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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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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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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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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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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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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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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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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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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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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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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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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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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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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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선전 포스터 " 모스크바를 사수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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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소비에트 지상군 병사들과 1941년형 T-34-76 전차 | 모스크바로 충원되는 소비에트 지상군 신병들 | }}} |
모스크바 공방전 Битва за Москву, Московская битва, Битва над Москвой «Операция Тайфун»[1] Die Schlacht um Moskau Battle of Moscow, defence of Mosc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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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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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로 다가오는 독일 국방군과 반격하는 소련군 | ||
날짜 | ||
1941년 10월 2일 ~ 1942년 1월 7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근교[2] | ||
교전국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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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바르바로사 작전의 중단 및 실패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 저지 |
||
전력 |
중부집단군 192만 명 - 제2기갑군[5] - 제3기갑군[6] - 제4기갑군[7] - 제2군 - 제4군 - 제9군 |
125만 명 - 서부 전선군 - 칼리닌 전선군 - 예비 전선군 - 브랸스크 전선군 |
피해 규모 | 사상자/포로 24만 8천 ~ 40만 명 | 사상자/포로 65만 ~ 128만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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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 공방전의 1분 전개 |
이 시기의 독일 국방군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칩거 중이던 크렘린에 최고로 근접해 크렘린궁을 쌍안경으로 관측도 할 수 있었는데,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 서쪽에 떨어진 힘키까지 도달했다.[9]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련이 혹독한 겨울 속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킨 이미지는 대부분 이 전투를 의미한다.
2.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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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과 실제 전투 당시 모습[10] |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모스크바 점령을 소련 침공 후 3-4달 이내로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 개전 이후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소련군을 족족 분쇄하며 수십 만의 인명 피해를 가하고 수백만 명의 포로를 확보하는데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소련군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독일군의 피해를 지속적으로 누적시키며 서서히 진격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독일군은 10월 중순 모스크바 서쪽 120 km 근방의 모자이스크 방위선까지 진격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도로와 온 토지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라스푸티차로 인해 보급과 병력의 이동이 매우 힘들어져 정지하게 되었다. 겨울이 되고 진흙탕이 전부 얼어붙자 다시 진군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이 제대로된 동계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11] 독일군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안정적인 동계 대비를 통해 이런 환경에 적응이 되어 있었다.[12]
12월 초, 독일군의 정찰 부대가[13] 크렘린에서 서쪽으로 30 k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미 주력부대는 추위와 약화된 전력, 그리고 소련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더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5일, 소련군은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들을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반격은 새해를 지나 1942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독일군을 모스크바로부터 100km까지 후퇴시키는데에 성공했다.
이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개전 사상 처음으로 독일의 공세를 좌절시켜 수도를 지켜냈지만, 100만명을 넘는 참혹한 인명 손실이 그 대가로 따랐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군이 1939년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독일군 역사상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독일군 장성의 상당수가 해임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 총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는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배경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북부[14], 중부[15], 남부 집단군[16]으로 나뉘어 세 갈래로 진격했고 각각의 목표는 당시 소련의 3대 도시였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였다. 그중 주공은 단연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를 공략하는 중부집단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기갑군[17]과 제3기갑군[18]이 있었다.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중부집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1달 만에 모스크바 바로 앞의 스몰렌스크에 도달했다. 북부집단군도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남부집단군은 고전했다. 이는 전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인 게오르기 주코프[19]가 재직 당시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함과 동시에 남서 전선군 사령관이 미하일 키르포노스라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개전 초기에 소련군 배치가 남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계획한 북부와 중부집단군의 목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남부집단군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 받고 있었다. 북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레닌그라드는 소련이 점령한 발트 3국의 도움과 발틱해를 통한 물자 운송, 독일의 우군인 핀란드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었고, 중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모스크바는 폴란드 분할 직후 변동되고 있던 소련의 서부 주력군만 재빠르게 격파하고나서는 소련 철도를 따라 그럭저럭 진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남부 집단군은 일단 지도상의 거리에서 가장 먼 캅카스(바쿠의 유전)까지 가야했으며, 가는 길은 평탄한 우크라이나였지만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발트3국과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들어가면서 소련군의 방어전략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에 독일군도 동부전선에서 남부집단군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하였지만, 북부나 중부집단군의 상황과는 달랐다.
이때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기갑군을 남부집단군을 원조하는 데 돌린다.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 우크라이나의 자원이 더 중요하다"며 키예프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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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키예프의 소련군을 포위하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
독일군이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소련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소련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을 통해 소련 각지에서 온 병력 및 물자를 전선에 배치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생산지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7월 말, 독일군은 헤르만 괴링의 주도로 모스크바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폭격처럼 수도 모스크바를 파괴해서 소련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으나 의외로 튼튼한 모스크바의 대공 방어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모스크바에 대한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4. 독일군의 진격
4.1. 조용한 동맹국
소련이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독일은 설령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동맹국인 일본 제국에게 소련을 공격할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독소전쟁 발발 불과 2달 전에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한 바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과 교전 중이었는데 방공협정의 동맹국이 협정의 주적이자 관동군의 교전국과 손잡은 것이다.이 사건의 여파로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대신이 소련과의 조약을 맺기 한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이후 독일이 먼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 버리고 소련을 공격한 것을 본 일본은 회의를 했고, 육군을 중심으로 한 일부는 우리도 불가침 깨고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정부는 이런저런 이유[21]로 어영부영한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대일 물자 금수 조치 때문에 미국과 마찰이 계속되고 있었고, 미국의 수출 없이는 전쟁하기 힘든지라 일본은 어떻게든 미국을 달래보려 했지만 미국이 헐 노트를 통해 "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당시 일본으로선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일본도 내부에서 격론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을 공격해 전선을 더 넓히는 건 불가능했다.
그와중에 일본에 있는 소련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소련 대신 미국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이미 조르게는 바르바로사 작전 몇 달 전에 독일의 침공이 6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련에 알린 적이 있었다.[22] 당연히 스탈린의 조르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져 있었고 이에 따라 극동에 주둔했던 병력 중 일부를 서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23]
4.2. 양측의 병력 배치
태풍 작전에 참가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병력 190만, 전차 1,700~2,0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549~780대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전격전의 주역인 세 개의 기갑군(2, 3, 4)도 보유하고 있었다. 선봉이 될 전차군은 2전차군(구데리안), 3전차군(호트), 4전차군(회프너)[24] 여기에 일반 야전군인 2군(바익스), 4군( 클루게), 9군(슈트라우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초반에 최소 500만여 명의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80만 명 전사 및 330만 명 포로 포함)을 보았고, 전차와 전투기 또한 각각 2만 대씩 잃는 등 예비 병력까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 일전에 폴란드 침공 당시 점령한 폴란드 동부 지역과 소련 서부에 290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이후 작전이 경과하면서 추가로 500만 명을 동원했으나, 대숙청으로 바보가 된 소련군 장교단과 스탈린을 비롯한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겹쳐 이 병력을 모조리 날리는 처참한 결과만을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대규모 병력 집결지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앞서 말했듯이 병력 손실만 포로 60만 명을 포함한 100만여 명 및 다대한 장비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당장 모스크바 전면에 투입할 병력과 장비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방위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병력 125만, 전차 1,000여 대, 대포 7,000문, 전투기 900여 대로 전투기를 제외하고는[25] 양, 질 어느 면에서나 독일군에 비해 절망적으로 뒤져 있었다.
4.3. 독일군의 초기 진격
10월 2일, 독일군은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작전을 개시했다. 페도르 폰 보크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작전에 앞서서 "동장군이 오기 전인 11월 7일까지 작전을 끝내야 한다"고 훈시했다.독일군의 목표는 특유의 양익 돌파(Pincer and Claw 또는 Keil und Kessel) 전법으로 모스크바 정면의 소련 서부집단군과 남방의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주변에 3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야즈마를 향한 독일군의 제3, 제4전차군은 서부전선군을 양익 돌파하여 포위했으나, 여름이나 가을과는 달리 소련군은 포위되어도 대규모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저항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예비병력을 이들을 섬멸하는 데 써야 했다. 한편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바익스의 제2군은 남방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브랸스크 전선군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저항으로 독일군을 애먹였으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패배가 잇따르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위에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10월 13일에는 소련 정부의 모든 부서를 볼가 강 하류의 쿠이비셰프(現 러시아 사마라 시)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국의 외교 공관들에게 모스크바에서 탈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피난 가려는 사람과 약탈하는 사람, 또는 절망하는 사람으로 무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 며칠 내로 독일군이 모스크바 시내에 입성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가게의 점주들[26]은 가게 문을 열며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가져가라. 독일놈들이 가져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외칠 정도였다.
결국 10월 15일 쿠이비셰프행 열차가 소련의 상임 간부회 임원들을 실어날랐고, 스탈린은 익일 새벽에 기차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일이 되자 스탈린은 기차 탑승을 거부하고,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고 사수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때 독일군은 전방 30km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행정 부서는 쿠이비셰프로 이전되었고 다른 정부 요인들은 모두 도피시켰으면서도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 내내 크렘린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NKVD 요원들이 시내에 들어와 치안을 맡으면서 모스크바 시내는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부대들은 약탈자들을 잡는 족족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겠다고 공표했고, 진짜로 실천하며 이름값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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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진지 구축에 동원된 주민들 |
4.4. 주코프의 등장
|
<rowcolor=white> 전투 상황을 전해오는 전보를 읽는 서부전선군 사령관 주코프 대장[27] |
독소전 초반 엄청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신속히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우랄 산맥 근처에 건설해 놓은 공업 지대에서는 우선 무기를 미친 듯이 뽑아내었으며, 후방에서는 계속 새로운 사단이 창설되고 있었다. 또한, 상술했던 조르게의 첩보에 따라 극동에서 재배치된 정예 사단들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에 단련되어 동계 작전에 능했다.
4.5. 라스푸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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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진흙의 바다 | 진흙에 빠진 독일군의 3호 전차 |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루에 겨우 5~8km를 전진하였다. 한 발자국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독일군의 자랑인 기갑사단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아우구스트 폰 카게넥 중위의 일기
일단 이 시점까지 독일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0월 둘째 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 장성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는 러시아 특유의 가을 장마였다. 이 즈음은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 '진흙의 계절'로 불리는 시기로, 길은 단순한 진흙탕이 아니라 한번 빠지면 차량을 크레인으로 들어야 탈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진흙늪이 된 상태였다.[29] - 아우구스트 폰 카게넥 중위의 일기
당연히 독일군의 기갑 부대는 느려졌으며, 이때부터 전선에 대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의 T-34 전차는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소련 내의 포장 도로들은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수없이 지나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이런 장마철에는 보급품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도 어려워질 정도로 도로 사정이 더 나빠졌기 때문에 독일군은 진격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이렇게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한 T-34 전차의 성능은 좋았지만, 급박하게 공장을 뜯어다가 시베리아에 옮긴 다음에 급하게 생산한 물건인지라 스펙과는 달리 잔고장 및 기능 부조화가 두드러졌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전차 운용이 한심했기 때문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이를 작전과 전술로 물리치며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거의 50만의 병력손실을 보았으며 이는 당시 전 소련군 병력의 41%에 달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모자이스크에 강력한 방어선을 가까스로 구축했고, 마침 10월 10일부터는 주코프가 전선 지도를 담당했으므로 그가 직접 방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4.6. 동장군의 도래
10월 13일까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120km 떨어진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9만 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뚫으며 계속 전진하였으나 진흙뻘로 변한 도로 탓에 진격이 늦춰져 2주가 지난 10월 26일에야 툴라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소련군과 민간인 지원병들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월 29일에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11월 7일, 스탈린은 독일 공군의 공습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과 민간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보양하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10월 혁명[30]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각 부대에는 퍼레이드가 열리는 당일에야 이 사실을 알렸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붉은 광장에는 의료진들이 대기했다.
다행히 눈보라가 날리는 등 기상 상태가 나빠지면서 독일 공군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기념 연설에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후 금기시되었던 러시아인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31] 이와 함께 많은 군가를 작곡한 것도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이를 통해 사기는 어느 정도 고양되었고, 이를 본 스탈린은 주코프와 바실렙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나 모두 독일군에게 격퇴되었고, 소련군의 예비 병력만 소모시킬 따름이었다. 그 즈음 독일군은 수적으로는 소련군보다 2배정도 많았고, 질적으로도 소련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동안 용의주도하게 구축된 다중 방어망에 포진하고 있었고, 지형 상으로 10월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기온은 점점 떨어지면서 영하 20도 근처로 급강하했다. 땅은 얼어붙어서 독일 기갑 부대 지휘관들은 전차가 드디어 움직일 수 있다고 좋아했으나, 여름 군복만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차량 등의 중장비도 부동액이 없는 등의 이유로 인해 점차 엔진을 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일본 제국이 소련을 침공하지않고 미국을 공격할 거라는 첩보를 받은 스탈린은 즉시 동부 전선에 있던 소련군 부대 30개 사단을 제외한 전부를 모스크바로 집결시켰다. 심지어 이 소련군 부대들은 혹독한 날씨에도 잘 적응되고 무장 수준도 높았던 정예부대들이였다.
구데리안은 "신속히 동복을 보급 바람"이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사령부는 "앞으로는 이러한 불필요한 요청은 하지 말 것"이라는 답변만 보내올 뿐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하겠다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미처 동복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일단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야 하므로 나름대로 월동 장비를 장만했지만 수량이 부족한 데다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을 반영하지 않은 빈약한 장비였고, 결정적으로 광궤를 사용한 소련의 철도 설비를 제대로 표준궤로 개궤하지 못해서 연료와 탄약, 식량 같은 기본 보급 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월동 장비가 아직 폴란드에 못박혀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점점 거세지는 소련군의 저항 외에도 이런 동장군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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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들 |
굶주리고 헐벗은 병사들이 초라한 오두막을 두고 싸우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
하인츠 구데리안의 회고록 중
해당 겨울이 유별나게 추운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당시 모스크바 근교의 온도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추웠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모스크바의 기온은 가장 추웠을 때가 야간 영하 21도, 주간 영하 12도였으며 평균 영하 17도 정도였다. 이것은 6.25 전쟁의 장진호 전투[32]에 비하면 거의 초겨울 수준의 추위에 불과했고, 현대 한국의 서울 한겨울 기온보다 조금 추운 정도일 뿐이다.[33] 그러나 독일군은 하계 전투복을 입은 병력이 80%를 넘길 정도로 어떤 동계장비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패망의 시작이었다.[34]
동계 장비가 부족한 독일군은 수십만 명의 동상 환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작전지로 서유럽만을 고려한[35] 독일군의 무기들은 이런 혹한 때문에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전차의 조준경은 얼어붙었고, 소총과 권총 역시 얼어붙어 방아쇠를 당기기도 어려웠으며, 윤활유는 굳어 버려서 트럭은 1시간 동안 예열시켜야 했고, 포신 안에도 얼음이 달라붙어 포격이 불가능해졌다. 보급 용도로 여전히 다수를 이용했던 군마도 상당수가 얼어 죽었다.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은 전사한 소련군 장병의 시신에서 동복을 벗겨내는 것이었으나, 동복도 시신과 얼어 붙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심지어는 톱으로 시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솥에서 끓인 후 장갑이나 장화를 벗겨냈다. 그래서 부상병들은 자신이 부상당하면 신속하게 동복을 벗어 동복이 없는 전우에게 주었다고한다. 또한 옴, 이질,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투와 추위 외의 질병으로도 많은 병력이 사망하였다. 심지어 설사병으로 하루에 설사를 30번이나 하는 병사들도 있었다.[36]
뿐 만 아니라 소련 공군을 박살내며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던 루프트바페도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야전 비행장에서 마땅한 방한 장비도 없는 채 전투기들이 그대로 주기되느라 엔진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부득이하게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엔진을 상시 가동해야 했다. 이는 연료의 소모를 야기했고 공중전 싸움에서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 독일군의 전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 떨어진 힘키까지 진격했다. 이곳 버스정류장 노선표의 종착역은 붉은 광장이였으며 비록 전시에 버스가 다니진 않았지만 독일군 정찰 부대는 망원경으로 크렘린 궁전의 첨탑을 볼 수 있었을 정도로 가까웠으며, 이것이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크렘린이었다.
12월 5일 구데리안은 정지를 명령했고 다른 방면의 독일군도 진격의 한계에 이르러 멈추게 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독일군이 최대로 진격한 지점인 힘키에 있는 문제의 버스정류장 위치엔 이케아 힘키점이 있었으나 #, 2024년 7월 현재 폐점한 상태다.
5. 소련군의 반격
5.1. 주코프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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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진군하는 독일군에 맞서 반격하는 소련군 |
구데리안이 멈춰 버린 12월 5일에 드디어 주코프는 공세로 나왔다. 소련군 부대는 동계 장비를 완비하고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였으므로 헐벗고 굶주린 독일군은 도저히 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독일은 이미 소련의 예비 병력이 소진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때까지 비교적 무명이었던 주코프의 공세는 통렬했고 독일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돌파당했다. 이 때 소련군은 기갑부대는 물론이고 공수부대와 스키부대까지 편성해 독일군의 보급망을 파괴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독일군 부대들이 격파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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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방한복과 동계 위장복을 완벽히 갖춘 소련군[39] |
애초에 전쟁을 3달 내에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쪽은 바로 독일 군부였다. 초기에 독일 군부 장성 일부는 독소전쟁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오래 버틸 것이라고 생각하고 10주 안에 다 끝날 수 있다고 장담한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안에 태클을 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개전 이후 수백만 명의 포로를 잡으면서 승승장구하며 진격하자 진짜로 이 전쟁을 그 기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독일의 피해는 착실히 누적되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막심해지고 있었다. 독일 중부집단군은 손해가 너무 막심해서 재편성도 할 겸 역시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을 원조하기 위해 키예프 방면으로 돌려졌을 정도였다. 또한 기후 등에 대한 허술한 사전 조사는 병력의 속도를 늦추어 그만큼 독일을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승리를 모두 동장군 덕분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러시아인도 똑같은 인간인지라 특별히 추위에 강한 건 아니다. 단지 상대적으로 익숙하기에 대비를 잘 하는 것 뿐. 그 소련군 역시 겨울전쟁 때는 핀란드군에게 죽은 수보다 얼어죽은 수가 더 많았다. 중요한 건 소련군은 동계전투를 위해 충분한 장비를 준비했지만 독일군은 수적, 질적으로 소련군보다 우위를 점했을지언정 그러한 우위와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미 11월부터 진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오버페이스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다 끝내야 한다는 강박과 "소련군은 이미 분쇄되었다"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소련군은 건재했고, 또한 철저히 준비했으며 아직도 전력을 끊임 없이 증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것이다.
즉, 모스크바의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였고 반면에 독일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다 끝낼 수 있다는 오만과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한시바삐 끝내야만 한다는 강박이 결합하여 이러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근방까지 도달했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최초로 전략적인 차원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2기갑군을 이끌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가장 먼저 후퇴했고, 제2기갑군의 상급부대였던 제4군의 귄터 폰 클루게는 처음에는 그와 전화로 크게 싸웠으나[41]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는 집단군 전체를 150km 정도 후퇴시키기를 희망하였고 12월 14일에는 그 역시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와 함께 공식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처음에는 보크의 주장대로 150km 정도 물러난 지점에도 마땅한 방어선이 없다는 점과 철수 과정에서 중장비의 상당수를 망실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거부하였으나[42] 15일에 알프레트 요들을 통해서 제한적인 철수를 승인하였고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 ~ 200km 밖으로 후퇴했다. 한편 북부집단군을 지휘하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또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를 희망하였으나 히틀러는 이것이 레닌그라드의 포위가 풀리는 원인이 될 것을 우려하여 결정을 미루었다. 이에 레프는 독단적으로 후퇴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를 숨기고 다시 후퇴를 요청하여 16일에 히틀러에게 후퇴를 완전히 승인받았다.
5.2. 독일군의 대규모 인사
일단 대규모 철수를 승인하기는 하였으나 모스크바로부터 1,500km 밖에 있는 동프로이센의 기지에서 지도만 보고 있으면, 최후의 목표인 모스크바로부터 마지막 30km만을 남겨둔 채 후퇴하게된 것에 대하여 히틀러는 매우 불쾌해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도저히 공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진격이 멈춘 지역은 도시나 마을이 아닌 허허벌판이라 추위를 막을 시설이 하나도 없었고 월동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건 후퇴한 지점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모스크바에 도달한다면 독일군은 시가전을 치르는 대신 포위한 다음 굶겨죽이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스탈린그라드 전투 꼴이 나지는 않겠지만 겨울을 어떻게 버틸지는 정말 대책이 없었다.이후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에 대하여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12월 25일 구데리안이, 1월 8일에 회프너가 해임되었다. 슈트라우스는 바로 파면되었고,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는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건강을 핑계로 자진사임했다. 한편 독일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이보다 이른 19일에 건강을 이유로 사의를 표했고 히틀러가 이를 받아들여 해임하였으며,[43] 그 후임자를 두고 독일군에서는 여러 명을 물망에 올리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을 겸임하겠다고 나섰다. 전후에 많은 장교들은 이것이 프로이센 장교단에 대한 히틀러의 우위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지만 의외로 그 당시 시점에서는 큰 불만은 없었다. 심지어 히틀러와 이런저런 갈등을 빚었던 프란츠 할더조차도 브라우히치보다는 히틀러와 손발을 잘 맞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의 의외로 건조한 반응이었고 일부에서는 환영하는 반응도 있었다. 다만 국방군 최고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은 의외로 탐탁찮아했는데 이는 기존에 육군 최고사령관이 담당하던 업무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44]
하지만 정작 진짜로 독단적인 후퇴를 강행한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는 자리를 지켰다.
5.3. 스탈린의 무리한 반격 계획과 소강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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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모스크바 전투를 그린 스탈린 우상화 그림[45] |
스탈린은 더욱더 대담한 작전을 폈으나 독일 공군은 강력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어서 제공권 없이 전진하는 소련군은 독일 공군의 폭격에 큰 피해를 입어 소련군의 반격은 무디어졌고, 결국 1942년 1월 7일 마침내 소련군도 공세를 멈추어 전선은 소강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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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홀름 포위망 안의 독일군 점령지에 착륙한 독일군 수송기 |
한편 독일군의 후퇴는 르제프에 거대한 돌출부를 형성했고 독일군의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이 돌출부는 모스크바에 대한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독일군을 일소하기 위한 토성작전과 함께 실시한 화성 작전, 일명 르제프 전투는 이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나, 소련군은 발터 모델의 방어에 막혀 큰 피해를 보았다. 하필이면 연루된 인물이 소련군 최고의 명장 주코프였는지라[46] 이 전투는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는 현재 주코프의 흑역사로 여겨진다. 단, 유의할 점은 이 설은 데이비드 글랜츠의 개인적인 설이고, 워낙 자료가 모자라 아직 학계의 정설은 없다는 거다. 그러나 어쨌든 화성 작전 이후 독일군은 이 돌출부에 소련의 주공이 집중될 것을 우려하여 일단 후퇴해 물러났다.
6. 결과와 의의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방어전이 성공하면서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한 바르바로사 작전은 제대로 물먹게 되었고, 모스크바 공략에서만 40만에 달하는 피해를 봤다.[47] 소련군은 방어전에서의 손실과 불필요한 반격 작전에서의 피해를 합쳐 대략 100만에 달하는 병력이 희생됐다.[48] 그 외에 모스크바를 요새화하느라 시민들은 통행의 부자유, 거주지 상실 등의 피해를 봤다.소련군은 1942년 봄에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군단을, 하르코프 방면에서는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군단을 내세워 각각 독일측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면서 오히려 방위망에 구멍을 내 버렸다. 특히 블라소프의 경우는 북부집단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힐러의 포위망에 제2충격군을 무리하게 몰아넣다가 아예 역습을 당해 병력이 증발하였다.[49] 주코프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 르제프에 주둔한 9군을 4면에서 포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제1차 르제프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여러모로 유리했던 동계 전투였음에도 9군의 신임 사령관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휘말려 오히려 소련군이 궤멸적 피해를 입으며 1943년 봄까지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직접 지휘하는 소련군 주력 부대가 르제프 전투에서 말 그대로 갈려 버렸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대차게 물먹었던 히틀러는 소련의 반격을 격퇴하고 이후에도 연이은 승전에 다시 허파에 바람이라도 채웠는지 이전보다 더더욱 대담한 청색 작전을 전개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는 청색 작전은 독소전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독소간의 대규모 기갑전을 통해 주도권을 노린 쿠르스크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공방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 육군에게 첫번째로 대규모 패배를 안긴 전투다.[50] 소련은 모스크바를 끝끝내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독일 육군도 이제 보니 말짱 허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물론 그 사기의 고양이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 수뇌부의 무리한 역습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의 심리적인 붕괴를 막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수많은 보병장비와 지원장비들을 손실했고 결국 전차 생산에 동원되어야 하는 군수공장들이 엉뚱하게도 보병장비와 동계장비 생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일군의 만성적인 전차 부족을 초래했다. 게다가 수십만의 숙련공들이 병력 공백을 메꾸기 위해 징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략적인 면에서 독일의 손실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주코프는 후에 동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어떤 전투였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자신은 쿠르스크 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닌 모스크바 공방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정치, 경제, 군사, 철도, 문화 등 어느 부문에서나 그 중요성과 위상이 상당히 큰 도시였고, 특히 철도의 경우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유럽 러시아의 모든 보급이 한방에 끝장나버릴 지경이었다. 더욱이 모스크바 공방전은 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독일군에 뒤져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거둔 승리였고,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에게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쿠르스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못지 않으며,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군의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대체역사: 만약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나는 상황이 왔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바로 항복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아돌프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51]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과 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도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어도 참전했을 것이다.8. 기타
- 러시아에서 매년 11월 7일에 이 모스크바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11월 7일, 10월 혁명 군사 퍼레이드를 마친 장병들이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바로 전선으로 떠났던 것을 기념하는 소규모 군사, 민간 합동 퍼레이드가 열린다. 2010년 11월 7일 퍼레이드. 원래는 소련 건국 계기가 된 1917년 11월 7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였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인 소련이 해체된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순수히 1941년 11월 7일의 모스크바 수호를 기념하는 퍼레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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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전투의 참전 용사인 마르크 리샨스키가 작사하고, 이삭 두나옙스키가 작곡한 모스크바 찬가
<Дорогая моя столица>(<Моя Москва>) (<사랑하는 나의 수도(모스크바)여>)도 바로 이 모스크바 공방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듣기)
노래의 3절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Мы запомним суровую осень,우리는 혹독했던 가을을 기억하네
Скрежет танков и отблеск штыков, 전차 소리와 대검의 그림자를
Самых храбрых твоих сынов, 그대의 아들들 중 가장 용감했던
바로 이 노래가 위 동영상의 퍼레이드에서 러시아 국가 다음에 연주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위 동영상 34:08부터 모스크바 공방전을 상징하는 군가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슬라브 여인의 작별 가사의 여러 가지 버전 중 하나에 나오는 '그는 1941년에 모스크바를 수호했고'라는 가사가 바로 이 모스크바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 이 전투에서 소련군 20군을 이끌고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 주코프 버금가는 활약을 하여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로부터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던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이듬해 봄에 독일군에 포로가 된 후 전향하여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라는 괴뢰정부를 이끌고 나치에 부역하였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소련에 체포되어 NKVD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 이 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던 소련군은 SU-100Y와 SU-14 등 각종 시제 기갑차량들을 투입시켰다. 그러나 그 중 딱히 인상적인 전과를 남긴 차량은 없었다. 투입되었던 몇몇 차량들은 운좋게 살아남아 현재 애국공원에 전시 중이다.
- 콜 오브 듀티 2 소련군 미션 첫번째가 모스크바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 고려인 유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추서자인 알렉산드르 민이 참전한 첫번째 전투다.
[1]
태풍 작전
[2]
모스크바 시내까지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3]
이후 남부집단군의 제17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후임 제3기갑군 사령관은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장군이 맡게 된다.
[4]
본래 서부전선군 사령관은
세묜 티모셴코였으나 주코프로 교체되었다.
[5]
1941년 10월 5일 기갑집단에서 기갑군으로 승격
[6]
1942년 1월 1일 기갑집단에서 기갑군으로 승격
[7]
1942년 1월 1일 기갑집단에서 기갑군으로 승격
[8]
출처 :
내셔널 지오그래픽 제2차 세계 대전 다큐멘터리 3부: 유대인 대학살
[9]
베를린에서 모스크바의
크렘린까지 약 1,500km이다.
평양에서
서울과의 직선거리가 195km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서강대학교 일대까지
북한군이 치고 내려온 셈이다.
[10]
영상은 모스크바의 반격(Moscow Strikes Back)이라는 전투 당시 촬영된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몇 안되는 모스크바 전투의 실상을 담은 영상 자료 중 하나로 제15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이다.
[11]
독일 측에서는 전쟁이 겨울까지 장기화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물론 소련 군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식과는 달리 소련 측 또한 동사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긴 했다. 단지 동복 구비 등으로 독일 측에 비해 장비적으로 대비가 더 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독일군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여름 군복을 입고 다녀야 했다.
[13]
주력 부대는 한참 뒤에 있었으며 보급선은 그보다도 더 뒤에 있었다.
[14]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15]
페도어 폰 보크 원수
[16]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17]
하인츠 구데리안
[18]
헤르만 호트
[19]
당시 총참모장
[20]
구데리안은 이것이 패인이라고 전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기계화 부대장"에 기록해놨으나 현재 전쟁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편 없이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기는 힘들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1]
대소 강경주의 기조였던 군내 파벌의
숙군, 소련과의 무력 분쟁에서의 참패 등.
[22]
당시 스탈린은 이를 독일이 일본을 도울려고 흘린 미끼라고 생각해 무시했다. 동부의 소련군을 서부에 배치하면 일본에 대한 방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23]
소련도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병력을 다 배치하지는 못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에도 항시 최소 30개 이상의 정예 사단을 극동에 주둔시켰다.
[24]
작전 시작 시점에는 구데리안의 2 기갑군만 야전군이었고 호트와 회프너의 군은 아직 기갑집단이었다. 이 두 기갑집단은 소련군의 반격 시점인 1942년 1월 1일에 기갑군으로 승격된다.
[25]
그나마 그 900여 기의 전투기 중에서도 가용 전력은 545기에 불과했다. 반격 당시에는 1,376기로 증가했다.
[26]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따라 모든 시장은 국영이었고, 따라서 점주들은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27]
그 왼쪽은 불가닌
정치장교(후에 국방장관, 원수), 그 왼쪽은 서부전선군 참모장인
바실리 소콜롭스키 중장(후에 소련군 총참모장, 원수)이다.
[28]
당시 소련군 참모총장은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였으나 만성
폐결핵 환자였기 때문에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 격무에 시달리다가 건강을 몹시 해쳤고, 그리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주코프에 총참모장 자리를 넘기고 보직없이 보내다가, 주코프가 야전으로 나가자 다시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역시 스트레스가 많이 받는 작전 입안을 하기에는 건강이 너무 나빴고, 모스크바 방위전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29]
실제로 이시기엔 러시아 거의 전역에 비가 2주정도 계속 내리는데, 그 뒤로 길은 정말 뻘밭이 되어 버려서 운동화를 신고 가면 버려야 하는 수준이 된다. 그래서 러시아 방한화가 기본적으로 높은 이유가 이런 뻘밭에도 잘 다닐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눈도 저렇게 녹으면 뻘밭이 되어 버린다.
[30]
'10월' 혁명인데 행사를 11월에 하는 이유는 소련에서만 쓰던 율리우스력과 보편적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2월 혁명 역시 3월 혁명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1]
원래 소련 시절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여 11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병식을 개최했으나, 이후 소련이 해체된 후 볼셰비즘과 무관한 러시아 연방이 성립되었어도 이 모스크바 방위전 승리 기념을 명목으로 1995년부터 계속 11월 7일마다 '명예 퍼레이드'란 이름으로 열병식을 개최한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 차원의 행사이고, 러시아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다.
[32]
평균 영하 35도, 최저 야간 영하 41도.
[33]
물론 서울의 겨울이 동일한 위도의 어떤 도시보다도 압도적으로 춥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긴 한다.
[34]
다수의 독일군 장성들이 전후에 "너무 추워서 패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 거짓말인 이유다. 동계장비만 충분했다면 넘기기 어려운 겨울도 아니었다.
[35]
서유럽은 겨울철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혹한에 대비할 필요가 적었다.
[36]
이런식으로 설사를 너무 많이 하면 몸에 있는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므로 당연히 몸에 큰 문제가 생긴다.
[37]
천조각을 꿰멘 이음새를 말한다.
[38]
설사를 자주하니 바지벗다가 얼어죽지 말고 그냥 솔기를 뜯어두라는 것이다.
[39]
왼쪽에 있는 전차는
T-60 전차 이다.
[40]
대한민국에서는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식의 기술을 하고 있다.
[41]
이 때문에
결투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클루게가 결투를 신청한 건 구데리안이 클루게가 밀어붙이던 성채작전을 반대해 벌어진 일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다.
[42]
이 점은 히틀러의 망상이 아니라 후퇴를 요청한 보크 본인도 인정했던 부분이다.
[43]
실제로 브라우히치는 심장질환으로 여러차례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한동안 병상에서 업무를 봐야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44]
물론 육군 최고사령관 자리를 차지한 히틀러가 해야할 일이었지만 이 인간이 그렇게 부지런한 인간이 아니라서...
[45]
스탈린이 멋지게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는 크렘린 궁에서 전황을 보고받을 뿐이었고 방어전의 실질적인 총지휘는 주코프가 맡았다. 애초에 중세, 하다못해 근대라면 모를까 현대전에서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잠깐 짬을 내서 시찰하는 정도도 아니고 아예 최전선에서 전선을 통제하며 직접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다만 독일군이 스탈린이 있는 모스크바까지 근접했으니(정찰 부대의 망원경으로 크렘린 궁 첨탑이 보였다) 전방은 아니어도 간당간당했던건 사실이긴 하다.
[46]
게다가 어떻게 본다면 공세 명령을 내린 스탈린조차도 간접적으로 이 전투에 책임이 있는 셈이었다.
[47]
1941년 11월: 145,000명, 1941년 12월: 103,600명, 1942년 1월: 144,900명
[48]
데이비드 글랜츠의 저서 '거인들의 전쟁(When Titans Clashed)'에 의하면 소련군은 방어 국면에서만 65만 8,279명의 피해를 입었고 이후 1월 7일까지의 반격 국면에서 또다시 37만 955명의 손실을 냈다고 한다.
[49]
하지만 이건 블라소프의 실책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인 게 처음부터 제2충격군 사령관은 키릴 메레츠코프였고, 그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진격했지만 후속 부대가 돌파구를 받쳐주지 않아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지휘하는 독일군에게 오히려 6월에 역포위되어 섬멸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블라소프는 그런
풍전등화 상황에서 사령관이 되었고, 이미 전멸 직전이던 당시 소련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블라소프라도 어차피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50]
사실 독일군 최초의 대패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지만, 독일 육군이 참가한 전투가 아니라서 논외다.
[51]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
[52]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던 이반 판필로프 소장 휘하 제316소총병 사단 1075소총병 연대 2대대 4중대 소속 병사들로, 4시간의 전투 끝에 18대의 독일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훗날 사기 진작을 위해 만들어낸 날조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