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17대 우랄 군관구 사령관
드미트리 렐류셴코 Дми́трий Лелюше́нко | Dmitry Lelyushen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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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드미트리 다닐로비치 렐류셴코 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Dmitry Danilovich Lelyushen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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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11월 2일[1] | ||
러시아 제국 노보쿠즈네촙카 마을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로스토프주 노보쿠즈네촙카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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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7년 7월 20일 (향년 85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17대 우랄 군관구 사령관 | ||
1958년 1월 ~ 1960년 6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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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복무 | 노농적군 | |
1919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87년 | |||
최종 계급 | 대장 (소비에트 지상군) | ||
병과 | 기병 → 기갑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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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레닌훈장 (6회) 10월 혁명 훈장 적기훈장 (4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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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여름엔 노동, 겨울엔 학업을 병행했다.2.1. 러시아 내전
약 1년 동안 보리스 두멘코의 지휘 하에 백군을 상대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두 번의 부상을 입고 렐류셴코가 맡던 말 두 마리가 죽었다.2.2. 제2차 세계 대전
2.2.1. 겨울전쟁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렐류셴코는 만네르헤임선을 돌파해 핀란드 공화국군의 요새를 파괴하며 제23소총군단을 지원했다. 1940년 2월 11일, 렐류셴코는 타이팔렌-이오키강을 따라 15개의 방어선을 뚫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2.2.2. 독소전쟁
제21기계화군단장으로 임명돼 발트해 방어전에 참전했다. 1941년 6월 28일, 다우가프필스 인근에서 독일 국방군의 공세를 막아내란 명령을 받았다. 독일 육군이 항공 지원을 못 받고 있던 틈을 타 적군을 15~20km 정도 몰아낸 뒤 몇 시간 동안 시가전을 치렀다.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렐류셴코의 기갑부대가 승리했다. 10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렐류셴코에게 제1근위특수소총군단을 지휘할 것을 명령했다. 브랸스크 전선이 돌파되자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오룔을 지나 모스크바로 빠르게 접근했다. 렐류셴코는 9일 동안 제4기갑여단장 미하일 카투코프와 협동해 구데리안 부대의 진격을 막았다. 8일부터 제5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진격 당시 전장에 버려진 T-28 중형전차 18대를 견인해 전력을 보충하게 됐다. 17일 부상으로 입원했다.1941년 11월 18일, 제30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모스크바 공방전을 지휘했다. 12월 6일, 독일 육군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고전을 치르다 제1충격군의 도움을 받아 독일 육군 소속 기계화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 1개에 큰 손실을 입혔다. 르제프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하르코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뒤 부상을 입고 수보로프 훈장을 받았다. 1944년 3월 29일,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4전차군을 훌륭하게 지휘해 제4전차군은 제4근위전차군으로 개칭됐다. 1945년 4월 6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렐류셴코는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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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13일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당시 파벨 테지코프 중령의 보고를 듣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