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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6:46:31

구룡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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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있었던 이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원작의 홍콩의 2024년 액션 영화에 대한 내용은 구룡성채: 무법지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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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191919> 구룡채성
九龍寨城
Kowloon Walled City
파일:當代中國-樂活灣區-飛凡香港-九龍城寨-宣布清拆_x1.jpg
국가
[[청나라|]][[틀:국기|]][[틀:국기|]] ( 1898년- 1912년) (사실상)[1]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 1912년- 1941년) (사실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 1941년- 1945년) ( 홍콩일치시기)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1945년- 1993년) (사실상)
행정구역 구룡성구
정치체제 무정부 상태
면적 26,000㎡
인구 약 50,000명
인구 밀도 1,923,000명/㎢
위치

1. 개요2. 전경3. 역사4. 특징5. 관광 정보6. 대중문화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아편굴 투성이에 더럽고, 쥐가 득실거리고, 치외법권이며 무척 위험하죠. 홍콩 sin city[2]에요.
1990년 ' 아비정전'을 구룡채성에서 촬영했던 양조위의 회상
구룡채성()[3][4] 영국령 홍콩 구룡반도(九龍半島)에 1993년까지 존재했던 슬럼이다.

불결하고 그로테스크했지만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고층 슬럼 풍경을 자랑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당시 유명했던 홍콩 영화에서도 일종의 슬럼의 대명사급으로 자주 등장했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정신적 고향으로도 회자되며 철거 전에 일본의 기술자나 팬들이 방문해서 지도와 설계도까지 그려갈 정도였으니 확실히 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워낙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인 데다 안전상의 문제[5]도 있어서 결국 철거되었고, 현재는 그 자리에 구룡채성공원(九龍寨城公園)이 들어섰다.

'구룡성'[6]이라고도 불린다. 홍콩의 주요 공용어 광동어로는 '가우룽자이싱'으로 읽히고 표준 중국어로는 발음이 '주룽자이청'이 된다. 보통 구룡성채(九龍城砦)[7]로 불렸지만 1993년에 철거될 때 구룡채성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굴되면서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원래 구룡채성은 청나라 영국을 막는 국경 요새였으나 1898년 신구룡을 포함한 신계 지역이 영국에 99년 조차지로 넘어갈 때 여기만 청나라의 영토로 남아서 치안권이 붕뜬 치외법권이 되었고 그 결과 난민 범죄 조직이 자리를 잡아서 구룡채성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 중경삼림'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유명한 충킹맨션(重慶大廈, Chungking Mansions)과 더불어 홍콩의 양대 마굴이었다.

그나마 충킹맨션은 저렴하고 불결했지만 일단 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인 맨션일 뿐 어쨌든 제대로 된 홍콩 땅이고 일단 건물 밖을 나서기만 하면 교통도 편리하지만 구룡채성은 차원이 달랐다. 상술한 문제 때문에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으며 교통도 아주 열악했다. 충킹맨션보다도 더 열악했다. 하다못해 충킹맨션은 센트럴 가는 지하철이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스타페리 MTR 동철선 전철을 탈 수 있다. 홍콩 버스들도 대거 이 일대에 들어온다. 그러나 구룡채성은 인근에 그럴듯한 전철역이 MTR 쿤통선 록푸역, 웡타이신역이 전부였고 역세권이라는 말이 민망할 수준으로 한참 멀리 있었다.[8] 다른 점이 있다면 충킹맨션은 남아시아계 홍콩인이 장악하고[9] 구룡채성은 중국 본토 피난민이 정착하고 본토에서 밀려난 삼합회가 점령했단 정도다. 어쨌든 1993년 구룡채성이 날아간 뒤 홍콩의 흉물로는 충킹맨션만 꿋꿋이 남았다.

구룡채성과 비슷한 예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폰테 타워[10],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구 콘피난사 금융센터[11],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스캄피아 아파트[12]가 존재한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에 이름이 비슷한 구룡마을이 존재하는데 이곳도 불법 건축물로 형성된 빈민가다. 물론 구룡채성만큼은 아니지만 애초에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고층건물 슬럼 자체가 거의 보기 힘든 지형이다.

2. 전경

파일:3179507dbaf9fd04e97ed1c0f69b11fd.jpg
1973년의 구룡채성 항공 사진
이때만 해도 고층건물이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솟아 있었다. 저 정도면 홍콩의 흔한 닭장아파트 수준.
파일:Gpp0Y.jpg
1993년의 구룡채성 철거 직전 항공 사진
행정상 옆의 깔끔한 건물은 모두 영국령 홍콩 땅이고 저 지저분한 건물들만 계속 무주지로 남아 있었다. 구룡채성 주변의 판자촌 소련식 아파트 단지는 1980년대에 철거되었다.
파일:attachment/구룡성채_길거리.jpg
구룡채성 길거리 사진
당시의 (불법[13]) 치과 거리. 왼쪽 구석에 코카콜라 사인이 보인다. 100년이 넘게 계속 중국의 일부로 지켜져 왔지만 서구화, 개방의 물결은 여기도 피할 수 없었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245697-16700E04000005DC-656_634x606.jpg
길거리 사이로 보이는 비행기[14]
한때 이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저공비행하는 여객기가 보이는 광경은 미디어 속의 홍콩을 묘사할 때 거의 필수적으로 나오는 클리셰이기도 했으나 성채와 카이탁 국제공항이 둘 다 사라진 이후 볼 수 없게 되었다.
영상
참고로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의 향수로 이 광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근처의 쿤통구민에게는 아주 불쾌한 것이 저 둘이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우범지대이기도 했고 항공기 소음 때문에 주거 환경도 나쁜 데다[15]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무도 이사 오려고 하지 않아서 집값이 상당히 낮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통구 구룡성구 거주민들은 중국 반환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현재 쿤통에는 카이탁 국제공항도 없어지고 대규모 쇼핑몰과 사무 단지가 들어서는 등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파일:external/jessrrr.files.wordpress.com/sam_4406.jpg
옛 구룡채성 주택가를 축소해서 만든 미니어처

3. 역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wloon_Walled_City_Early_Stage_Model_in_History_Museum.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wloon-Walled-City-1898.jpg
19세기 말 구룡채성의 모습 1898년 구룡채성의 모습
본래 구룡채성은 청나라의 요새로 청의 주전력인 팔기군이 군대로 주둔하면서[16] 홍콩섬 제2차 아편전쟁 이후에는 코앞 구룡반도 영국군을 감시하던 요새였다.[17] 그러나 1898년 베이징 조약 체결 이후 구룡채성이 있던 구룡반도 북부까지 영국의 조차지가 되었지만 구룡채성만큼은 예외적으로 청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거의 몽골팔기로 구성된 팔기군은 도주했으며 텅 빈 성채는 여전히 청의 영토라서 객가 사람들인 한족들이 빈 성채에 대거 들어가 점령했다. 이들은 객가인 특유의 전투력으로 영국군의 진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원래 평범한 성벽 마을이었으나 슬럼가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인데 우선 요새였던 이 장소가 거주지가 된 것은 홍콩의 일제강점기 홍콩일치시기부터였다. 1941년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구룡채성의 성벽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헐어낸 성벽으로는 카이탁 비행장의 확장을 시도해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을 용이하게 했다. 짧은 점령 시기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이 패퇴하여 일본군도 쫓겨나고 다시 영국 땅이 된 뒤에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중국 대륙 남부 출신 부랑민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구역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전후에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난민 문제와 관련된 일이라 상관없는데 문제는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화민국은 이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1948년 영국인 관리와 홍콩 경찰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영국령 홍콩 식민지 정부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제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중국국민당 정부도 관리를 거부하여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민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치안 공백이 곧 해결될 것 같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면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도주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 구룡채성의 치안 문제는 더럽게 꼬여버린다. 상술한 대로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구룡채성을 관리해야 할 중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쪼개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영국 정부는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다는 선언을 했지만 이번엔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수교를 거부했다. 중화민국은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실효성이 없었고 영국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개입을 거부하여 개입할 수 없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홍콩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이 지대를 굳이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관리를 포기한 상황에서 결국 구룡채성의 행정 관리 문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부랑민이 몰리기 시작해 195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난민이 몰려오는 가운데 홍콩 정부에서 수용을 거부한 난민들이 구룡채성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대약진 운동같은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피난민들이 폭증했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접경지에서는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홍콩에 밀입국하려는 중국 본토인들이 허다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대륙이 휩싸이자 지식인, 의사, 변호사 등 온갖 엘리트들이 홍콩으로 넘어와 영국, 미국 등에 망명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이들도 거지꼴이 다 돼서 구룡채성에 몸을 의탁하다 서양 선교사들이나 중국계 목사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관할 문제로 홍콩 경무처가 치안유지활동을 못하니 온갖 범죄 행위들이 벌어졌다. 살인/강도 등 강력사건이 벌어져도 어떤 경찰관도 손대지 않는, 아니, 손댈 수 없는 진정한 무법지대였다. 예를 들어 마약거래를 적발해도 홍콩 거주권자만 처벌할 수 있었다. 홍콩 거주권이 없는 성채 난민들은 사실상 무국적이라 어찌 할 도리도 없었다. 홍콩 경찰은 바로 코앞에 몽콕 경찰서 등의 경찰서 여럿을 두고 있었지만 있으나 마나였는데 성채는 소유권도 그렇고 삼합회가 판치는 곳이라 1960년대 당시 부패한 경찰들이 진입을 꺼렸다.[18]

이렇게 홍콩, 영국, 중국이 모두 관여하지 않는 상황을 3불관이라고 했는데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한 이후에 이미 베이징 중영국교정상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중화민국 정부는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성채의 영유권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못한 채 붕 떠버렸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홍콩 소방처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고, 환자가 생겨도 역시 홍콩 소방처의 구급차를 못 부르고[19] 성채 내 병원에서만 취급이 가능했다. 의무교육도 제공되지 않아 구세군이 세운 유치원밖에 없었다.[20] 전기와 수도는 밖에서 무단으로 끌어다 쓰거나 자체적으로 우물을 판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충당했다. 배수관은 길거리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길을 가다가 노후한 배수관이 터져 갑작스러운 물폭탄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법의 허점을 틈타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매춘업소, 도박, 아편굴, 헤로인, 무허가 병원, 무허가 치과 등 각종 불법 업소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 업소는 고객 유치 경쟁으로 홍콩 도심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약 중독 치료소도 있었다. 이 마약 치료소는 영국인 선교사 재키 풀린저(Jakie Pullinger)가 운영했다.

이들 중국 의료인들은 말이 무허가 의료인이지 중국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정식으로 의료 활동을 해왔던 이들로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해 도망쳤다가 홍콩에서 중화민국 의사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21] 정식 개업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불법 영업을 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었다.[22] 의료 지식 없이 의술을 행하는 돌팔이는 아니었다는 소리. 공부해서 실력을 쌓고 정당하게 취득한 의사 면허인데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휴짓조각이 된 역사의 희생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운영한 병원은 존 윅에 나오는 컨티넨탈 호텔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성매매업소나 도박장같은 범죄와 연관이 높은 업소나 불법 의료시설같은 업소만 있는 건 아니고 저렴한 인건비 세금이 없다는 장점 아닌 장점 덕택에 사설 식품공장[23]이나 의류 공장, 플라스틱 공장 같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구룡채성에 많이 들어서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무허가였다.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쥐,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환경뿐만 아니라 쉬는 요일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해야 했다. 난민에게 노동법 따위가 적용될 리 없었다. 그래도 식품공장에서는 위생을 조금이나마 신경 쓴 편이었다.
파일:external/www.scmp.com/f79faa1a2372b61a7e9a8b1aebbde955.jpg
파일:external/img.hkheadline.com/201308311321151440_600w.jpg
1971년 구룡채성의 모습 1986년, 주변의 목조 주택들이 철거된 이후의 모습
이후 1970년대 들어 무허가 고층 건물이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 같은 시기 구룡채성과 비슷했던 홍콩의 다른 슬럼가들은 공영 아파트들로 재개발되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보트피플로 전락한 베트남인까지 대거 몰려들어 성채는 더욱 혼잡해졌는데, 특히 이들이 베트남 화교들이어서 베트남계 삼합회가 토착 삼합회 및 본토 삼합회와 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심할 땐 매일 밤마다 삼합회끼리 전투로 총소리가 들리기까지 했으며[24] 거의 이라크 내전 당시 바그다드와 비슷한 꼴이었다.

그러나 1984년 중영공동선언이 체결되어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결정됨에 따라, 영원히 치외법권일 것 같던 구룡채성도 철거 수순에 돌입한다. 우선 경찰이 기습적으로 성채를 포위,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1986년에는 영국령 홍콩 정부가 원래 주인인 중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 하에 경찰을 동원하여 범죄자를 싹쓸이했다. 이때 기동대인 PTU와 대테러부대인 SDU, 그리고 장갑차까지 동원되어 중화기로 무장하고 버티던 삼합회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홍콩 경무처 웡타이신구 경찰국이 정식으로 이 곳을 경찰 순찰구역으로 지정했다. 홍콩 소방처의 구룡성 소방서도 개서해서 구급차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세군등 봉사단체의 마약중독자 갱생 회복 운동이 벌어져 마약에 중독됐던 사람들이 치유받게 되었으며 이곳 주민이 직접 만들어 활동한 자경단 덕분에 치안도 향상되었다.
파일:demolition of walled city 2.jpg
파일:demolition of walled city.webp
1993년 촬영된 철거되는 구룡채성의 모습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추가 논의 끝에 구룡채성의 철거를 1987년에 발표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27억 홍콩 달러를 들여 구룡채성에 살던 33,000여명의 주민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25] 보상금이 적다며 불만을 품은 주민도 있었으나 홍콩 정부는 1991년 11월부터 1992년 7월에 걸쳐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당시 공식적으로 영국령 홍콩이 아닌 중국의 영토였지만 어차피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라 영국령 홍콩 정부가 구룡채성의 철거와 공원 조성 작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홍콩 경찰이 철거 법집행에 들어간다. 철거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직전에 성채의 합법적 소유권자인 중국 정부는 탐험가들로 하여금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철거 작업은 1993년 3월 23일에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악명 높던 구룡채성의 주택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거 과정에서 그 유명한 데이비드 조던이 참여하기도 했으며 반대 피켓이 영어/중국어로 내걸려 영국과 중국 정부를 질타하는 시위도 있었으나[26] 결국 철거를 강행했다. 영국 정부가 이렇게 철거를 서두른 이유는 성채가 남은 채로 반환되면 중국 정부가 '제국주의하의 홍콩의 실상'으로 프로파간다에 쓸 거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wloon_Walled_City_Park_View_3_201007.jpg
철거 후인 2009년 9월의 모습(구룡채성공원)
홍콩 정부는 이어서 이곳을 구룡채성공원(九龍寨城公園, 까우룽짜이씽공원, Kowloon Walled City Park)으로 조성했다. 공원 조성 작업은 1995년 8월에 완료되어 공식적으로 홍콩 정부의 시정총서(市政總署, Urban Services Department)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22일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던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공식 개원 선언을 했다.

그리고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이 공원 일대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는 성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4. 특징

파일:scm_news_1.1.nws_backart1_1_0.jpg
파일:The-dark-city-ok-detalle-original.png.jpg
구룡채성의 구조를 표현한 그림[27]
건축가 유현준의 구룡성채 분석
구룡채성의 가장 큰 특징은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의 숲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계획은커녕 제대로 된 설계조차 없이 외부로 뻗어나갈 수 없는 상태에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빌딩을 높이 세우게 되었다.

중심부에는 유치원 양로원이 있었다. 중간에 고층빌딩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단층건물이 유치원과 양로원이다. 교육시설이 구세군 교회 부설 유치원밖에 없어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28] 유치원은 교사 단 2명이 있었다. 구룡채성의 유치원은 특이점이 있었다. 이는 유치원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의 아이들은 유치원 방 한켠에 잠을 재우고, 다른 한 그룹은 밥을 먹인 뒤 반대로 재운 그룹을 깨워 밥을 먹이고 미리 밥을 먹인 그룹은 다시 재우는 식의 교대작업(shift operation)을 하였다는 점이다.[29] 교사들은 구세군 교역자였으며 이들은 손 씻기 등 위생활동과 영어/ 광동어/ 표준 중국어를 가르치고 그 과정에서 라틴 문자 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어쨌든 구세군의 구호 및 선교활동 등으로 구세군은 홍콩 내에서 과거나 현재나 존재감이 아주 커졌다. 모두가 꺼리는 무법천지 무정부구역에 들어가는 것 하나만으로 당시에는 목숨을 각오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서 밖으로 나와 홍콩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현재 30대 후반~60대의 중년층이나 70대 이상 노인이 그때 구세군 유치원에 다닌 어린 아이들이었으며 어렵게 살아온 그들은 나중에 부모 세대가 되며 자녀들의 교육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홍콩에서 기독교계 사립학교가 인기있게 된 게 이때 힘들게 어린시절을 보낸 중년, 노인들의 교육열이 대대로 내려온 탓이 크다.

바로 옆에 악명 높던 카이탁 국제공항이 있어 주변의 건물은 6층 이상 짓지 못하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구룡채성은 영국령 홍콩이나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두 개의 중국도 법권이 미치지 않는 월경지대였기에 이러한 법률을 무시하고 최고 15층까지 올라가게 된다.[30] 거기에 증축 및 개축을 반복하다 보니 미로와도 같은 골목이 생겨났고[31] 닭장처럼 빽빽한 아파트가 들어차서 대낮에도 햇빛을 못 보고 전등을 켜서 살아야 하는 곳이 되었다.[32] 항상 어둡고 습기로 축축한 환경,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이 없어서 수도관이나 전기 배선 등이 천장에 늘어지게 되면서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무분별한 증축 및 개축의 결과 불과 0.03km2 잠실 야구장의 관중석 등을 합친 총 면적과 비슷한 면적에 무려 주민 5만 명이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인구밀도로 환산하면 약 190만 명/km2로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서울특별시 안에 11억 5천만 명이 사는 격이다. 구룡채성이 철거된 후 최대의 인구밀도 타이틀은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Dharavi) 슬럼가가 가져갔지만 이쪽은 약 1/3 수준인 59만 0명/km2[33]밖에 되지 않는다. 평범한 지역이라면 주거지역과 비주거지역이 나뉘는데, 이곳은 아파트로만 차있기 때문에 이처럼 인구밀도가 극악하게 높았다. 편의시설[34]도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구룡채성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런 인구밀도 높은 공간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아파트들의 옥상이 아이들의 놀이공간 겸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밤에는 약을 하는 사람들이 찾았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영상에서는 구룡채성에 살았던 사람, 성채를 연구하는 사람, 구룡채성에서 영화를 찍은 사람 등등이 등장하며 단순한 기괴한 건축물 단지가 아닌 몇 만명의 사람이 살았던 공간으로서 구룡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구룡채성에 거주했고 이후 인터넷에 탐험기를 남긴 일본인 요시다 이치로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성채의 건물주인 할아버지가 나와서 "여기 나쁜 곳 아니야, 문제 없어"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구세군 유치원도 나오고 경찰이 순찰을 돌기 시작하면서 치안이 급속도로 개선되었다는 것도 언급된다.

5. 관광 정보

침사추이 충킹맨션 앞에서 KMB 홍콩 버스 1번을 타서 구룡채성공원 정류장에 내리거나 MTR을 타고 쿤통선 록푸역에서 내린 뒤 남쪽으로 15분 정도를 가면 큰 공원이 나오는데 그 안에 구룡채성공원이 있다.

2021년 튄마선 송웡토이역이 개업하면서 MTR역에서 도보로 약 5-1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36] 이 역이 개업하기 전에는 카이탁역에서 약 30분 이상 걸렸다. 2023년 기준 MTR을 통해 록푸역에서 하차하는 경우 20분 이상을 걸어가면 공원이 나오며, 세심하게 훑어볼 수 있다. 록푸역과 구룡채성 공원 사이에는 현재 부촌이 자리잡고 있는데, 한때 구룡채성의 슬럼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한 감상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시대상은 청나라 말기 쯤, 구룡채성이 있던 역사를 볼 때 초창기에 가까운 분위기다. 공원의 관리사무소에 해당하는 곳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오래된 편에 속하는 구룡채성의 유일한 흔적이다. 공원 내에는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과 전시물이 남아 있지만 이에 대한 자료의 양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정도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건물 안에서 전시를 볼 수 있다. 마구잡이로 거주를 위한 빌딩들이 올라가면서도 이 건물만은 그대로 사용한 것을 공원 내부에 있는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거의 건물이라는 것도 사실상 양식만 보존했을 뿐이지 거의 다 보수 및 재건으로 완성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센서를 이용한 전자 사진집이 구비되어 있으나 사진의 양은 많지 않다. 3개의 방에서 프로젝터로 사진을 영사해주는 수준 정도여서 전자 사진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벽을 따라서 구룡채성의 역사가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게 그나마 남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공원의 전시 내용도 구룡채성의 탄생부터 철거까지 모든 범주를 다루고, 내용도 청나라 성채의 역사에 집중되어 있다. 초창기 구룡채성의 남문 유적 등은 잘 보존해놓고 전시하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 묻혀서 그렇지, 대포 등은 멀쩡히 보존되었다. 치외법권지라 발굴 및 관리를 못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래 문단에 나오지만 유물과 달리 관련 문서 자료가 부실하고, 공원 내부의 유물 설명 수준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자료가 죄다 대만으로 넘어가서 설명 자료에는 "이런 식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문장이 많다.

문서로 남아있고 관련 사진, 역사성 등을 지적하는 부분은 역시 현대 구룡채성, 즉 인외마경이 된 이후의 것들에 많다. 이 부분은 1980년대 홍콩 반환 협상 체결 이후 영국, 중국, 홍콩 3자가 철저하게 조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자료를 많이 전시했다.

흔히 홍콩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이 기대하는 구룡채성의 생활상 같은 건 프로젝터로 보는 사진 이상을 기대하면 안 된다. 구룡채성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게 다행이긴 하다. 구룡채성은 거의 홍콩의 흑역사 비슷한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흔적을 싹 지운 데다가 뭘 남기고 싶어도 부동산으로서 가치가 0에 수렴해서 남길 수도 없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청나라 시대 팔기군 주둔지로 시작한 첫 역사에 집중하는 게 낫다. 중국사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오히려 이게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룡채성공원에 가면 초기 역사라는 팔기군 주둔지 관련 자료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청나라 멸망 이후 국권을 정식으로 인수[37]한 건 중화민국이다 보니 관련 자료가 죄다 대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로 1970년대 1980년대 옛날 홍콩 영화에 나오는 성냥갑 아파트를 보고 싶다면 섹깁메이역 근처의 메이호 하우스(美何樓, Mei Ho House)가 더 나은 곳이다.[38] 원래 1960년대 건설했던 초창기 정부 아파트를 유스호스텔 겸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여기 가면 진짜로 옛날식 아파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재현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는 지하철 역세권이라 찾아가기도 더 편하고 도심지인 몽콕하고도 도보로도 갈 만큼 가깝다. 안에는 간이식 매점도 있지만 기념품점 같은 걸 기대해서는 안 되고 그냥 구멍가게 수준이다. 아니 애초에 홍콩엔 기념품점이 따로 있는 곳이라고는 빅토리아 피크나 스탠리 마켓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이렇게 구멍가게 수준의 간이식 매점뿐이다. 오히려 시내 문구점 같은 데에 기념품 비슷한 게 더 많다.

유적지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처럼 나머지를 상상으로 때우는 식의 구경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다 철거한 상태이다 보니, 구룡채성에 대한 관광을 목적으로 일부러 찾아가기에는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39]

참고로 구룡채성공원은 침사추이의 구룡공원과는 다른 곳이니 주의.[40]

6. 대중문화

이곳의 슬럼 이미지는 사진집 '어둠의 도시(City of Darkness)'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수많은 아마추어나 프리랜서[41]의 작품의 영감이 되었고 공식 매체에서는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풍경 클리셰 중 하나는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 저공비행하는 여객기가 배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난잡한 고밀도 고층건물 형태의 슬럼과 그 외벽을 장식한 네온사인 사이버펑크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성항기병 1편과 2편, 아비정전의 장면 일부가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

2018년 6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817회에서 다뤄졌다.

2014년에 일본 가와사키시에서 오픈한 대형 게임센터 웨어하우스 카와사키가 이 구룡채성의 일부를 모티브로 지어진 시설이었다. 이후 2019년 11월 19일 영업을 종료하고 철거되었다.[42] 영상

2024년 개봉한 동명의 홍콩 영화 ' 구룡성채: 무법지대'(九龍城寨之圍城)의 배경으로 나온다. 그 시절 홍콩에 대한 향수를 그린 무협액션물로 대외적으로 괜찮은 평(로튼토마토 92/85 #, IMDb 7.1 #)을 받았다. 국내에는 10월 16일 롯데시네마 단독으로 개봉했다.

아래는 구룡채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작품들이다.

7. 관련 문서



[1] 법률상으로는 1898년부터 1993년까지. [2] 제법 오래된 표현이다. 1930년대에 마피아의 소굴이었고 부정부패로 막장을 달리던 도시인 매사추세츠 린(Lynn) 지역의 별명이 신 시티다. 그 이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별명으로 쓰이다가 후에 이것에서 모티브를 딴 프랭크 밀러의 만화 씬 시티가 연재되기도 했다. [3] Gau2lung4zaai6sing4. [4] 九龍城砦(Gau2lung4sing4zaai6). 寨와 砦는 통자(通字)다. 당시 주민들도 성채복리회(城砦福利會, 일종의 상가 번영회)와 같이 城砦로 많이 썼다. [5] 근처에 카이탁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안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보통 비행기 이착륙 시 안전상의 이유로 근처에 건물을 아예 짓지 못하거나 짓더라도 높이 제한이 있지만 구룡채성은 누구의 땅도 아니었고 따라서 규제도 없었기 때문에 비행기 이착륙 시 정말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높이까지 건물을 올렸다. 당시 카이탁 국제공항에 드나드는 조종사들도 이착륙이 가장 어려운 공항으로 회자했다고도 한다. 안그래도 구룡채성 뒤에 있는 라이언락 때문에 원래 착륙하기 어려웠는데 구룡채성이 더해지니 그 난이도가 하늘을 찔렀다. [6] 이 흔적은 홍콩 행정구역 이름에 구룡성구라는 식으로 남아 있다. [7] 광동어로는 '가우룽싱자이', 표준중국어로는 '주룽청자이'. [8] 2021년에야 MTR 튄마선이 들어와 이 일대에 송웡토이역이 생겼다. [9] 대부분 이슬람 시크교 신자들이다. 홍콩에 온 인도인 그룹은 펀자브 출신들이라 그렇다. 힌두교도는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홍콩 반환 이후에 이민 온 사람들이다. [10] 5층까지 쓰레기가 쌓인 슬럼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쓰레기를 치우고 재도색 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깨끗해졌다. [11] 이쪽은 퇴거조치가 완료되었다. [12] 현재는 철거되었다. [13] 후술하겠지만 법적으로는 중국 소속이었지만 통치영역이 전혀 미치지 못해서 의사 면허가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14] 참고로 지나가는 비행기는 캐세이퍼시픽항공 A330이다. A330과 구룡채성이 공존할 수 있는 시기는 1994년 뿐인데, 공교롭게도 캐세이퍼시픽항공이 A330의 첫 인도 고객이기에 가능했다. 구룡채성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깔끔한 외관의 낮은 건물들이 좌우로 있는 사진을 보아 구룡채성은 아닌 그 근방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구룡채성 내부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고 불결한 고층건물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15] 카이탁 공항은 커퓨 타임 없이 24시간 돌아갔다. 심지어 쿤통구에는 MTR 쿤통선 차량사업소도 있다. 카이탁은 없어졌지만 차량사업소는 당연히 지금도 남아 있다. [16] 원래 팔기는 만주족의 팔기만주 및 몽골인의 팔기몽고 등 기병이 주축이었으나 이 때 팔기는 화기수 및 수군인 팔기한인의 대거 방출과 팔기만주의 전력 쇠퇴로 대부분 없어지고 몽골팔기인 팔기몽고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대부분이 한족으로 구성된 녹영과 신식 군대인 상승군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아편전쟁 당시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등이 이끌던 몽골팔기가 분전했으나 전열보병에 다 쓸려나갔으며 팔기몽고의 지도자인 내몽골 왕공부터가 오랜 평화에 젖어 유목민 기상을 잃고 전투 감각도 잃은 상태였다. [17] 원래 설치 목적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중국 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와 미묘하게나마 연결되기는 한다. [18] 성채의 소유권이 강조되는 게 사실 염정공서 발족 전 경찰 조직이 부패했고, 부패한 경찰간부들이 삼합회와 유착해 일종의 핑계를 삼은 것이 크다. 1980년 이후 성채 얘기가 싹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부패가 일소되면서부터 일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잘해야 경찰서장밖에 못 해서 서장직에 오르면 100% 한 몫 단단히 챙겨 퇴직할 생각만 했다.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나온 것이 1950년대 1960년대 풍 이야기이다. [19] 만약 대연각호텔 화재, 조엘마 빌딩 화재급으로 화재 규모가 컸거나 카이탁 국제공항쪽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가 구룡채성 쪽으로 추락했다면 9.11 테러에 버금가는 인명피해를 냈을 수도 있다. [20] 당시 서양인 선교사이나 중국인 목회자들에 따르면 유치원에서는 영어와 광동어 교육 및 기본적인 위생상식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표준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여기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이후 세대는 성채 밖으로 나와 영어가 능숙하고 중국 본토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홍콩인으로 살게 된다. [21] 당시 홍콩은 영국령이었으므로 영국 의사 면허로만 의료 행위가 가능했다. [22] 사실 법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들은 무면허 의료인이 아니다. 애초에 구룡채성은 법적으로는 영국령 홍콩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였기 때문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가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의료행위에 대한 법적 규제나 행정기관의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23] 국수, 생선, 딤섬, 에그타르트 등의 식품 가공. 당시 홍콩 유명 레스토랑에 대부분 납품하였다. [24] 삼합회는 각종 중화기 중동이나 러시아 등에서 밀수해서 총격전에 심심치 않게 중화기를 동원하였다. [25] 인당 약 82,000홍콩 달러로,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현재 한화 약 3,000만 원에 육박한다. [26] 대책없이 난민을 거리에 내몬다는 이유였는데 당연히 난민에겐 정부 아파트를 근처의 록푸 등에 분양해주고 보상을 쥐어줘서 내보냈다. [27] 하단을 살펴보면 그냥 작은 마을 정도였던 성채가 어떻게 요새화되었는지 볼 수 있다. [28]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면서 성채 밖으로 나와 늦은 나이에 교육을 받았다. 현재도 그 당시 성채에서 살다가 나온 노인들 중 교육을 못 받아 문맹인 노인들이 있다. [29] 구세군이 세운 유치원은 작고 열악했다. 교사는 단 2명, 창문도 없는 방에서 선풍기 하나가 전부인 환경이었다. 영국인 선교사과 중국인 목사들이 사명감만으로 운영한 곳이었다. [30] 이곳엔 당연하게도 엘리베이터는 없다. 5층 이하 공옥(公屋)들은 구룡반도 한복판 집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공간이 없어 얄짤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31] 그래도 골목마다 이정표가 있었으며, 식당이 몰려있는 골목, 매춘골목, 공장골목 등으로 나뉘어있었다고 한다. [32] 위 영상의 건축가 유현준의 분석에 의하면 건폐율이 약 90~95% 정도외부와 접하지 않는 면적이 약 70% 대라고 추측이 된다고 한다. [33] 사실 이쪽도 서울시 안에 3억 5,700만 명이 사는 셈이라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34] 구청,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35] 구룡채성 내부를 돌면서 320여 장의 사진을 찍고 32명을 인터뷰한 사진집이다. 홍콩 내 라이프스타일샵인 GOD의 일부 점포에서는 원서로 팔기도 한다. [36] B3출구를 이용하면 가장 가까운데, 개찰구에서 출구까지 조금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출구로 나와서 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37] 청나라 멸망 때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인 쑨원한테 주권을 양도하고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황실의 안녕을 보존한다는 정식 문서를 체결하였다. 그래서 당시 청나라가 가지고 있던 자료는 국공내전 중에 장제스가 싹 다 대만으로 가져갔다. 이때 문화재까지 전부 쓸어간 덕에 엄청난 양의 문화재도 보전할 수 있었는데, 그 문화재 전시 및 관리용으로 건립한 것이 지금의 국립고궁박물원이다. [38] 또는 인근 초이훙역 초이훙 아파트로 갈 수도 있다. [39] 이 공원이 홍콩 최대의 슬럼이었다는 생각에 잠겨 근방 부촌의 주민들이 운동하고 있는 공원을 보면서 걸어 감상하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관광이다. 의외로 운동기구나 공원조성은 깔끔하게 잘 이루어져 있는 편이다. 관광객들이 거의 없는 곳이지만, 공원 상주 직원들 또한 관광객들에게 상당히 친절한 편이다. [40] '채성'이라는 글자가 없으면 십중팔구 침사추이 북부의 구룡공원을 지칭한다. [41] 3D, 영상 [42] 이 오락실은 일본의 미디어 대여 서비스업체인 GEO에서 운영하는 오락실 중 하나였다. 라인업은 여느 일본의 대도시에 있을 법한 대형 오락실과 비슷한 편이다. 참고로 이 웨어하우스는 관동을 중심으로 다수의 점포가 운영중인데, 카와사키급의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각 점포별로 특별한 개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이타마현의 이와츠키점이나 미하시점이 상당히 규모가 크며 동굴풍이나 아시아풍으로 지어져 있다. [43] 추격전 씬인데 가사는 산뜻한 사랑 노래라는 점이 아이러니. [44] 거리를 순회하는 쓰레기 수거차가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고 초 단위로 포인트를 통과한다. 그리고 이를 뒤쫓는 쿠사나기 소령의 공안9과는 도시구조를 3D 맵핑하여 뒤쫓고 실제 홍콩에는 없는 고가도로나 VTOL기(현재는 V-22 오스프리 등이 실용화되어 있다) 등이 등장한다. [45] 원판에서는 동생인 사키 류지가, 애니판에서는 형인 사키 류타가 등장한다. 원판에서 사키 류타가 이진칸 호텔 살인사건 당시에 범인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46] 작중에서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47] 어느 정도냐면 고층건물 바닥이 여기저기 빠졌는데, 보수는 고사하고 그냥 길다란 나무 판자를 깔아놓은 게 다일 정도. [48] 특히 저롱성채의 모티브는 주성치의 가난한 유년기 시절 지냈던 집주변의 기억을 살린 것이기도 하다. 또 사조영웅전 곽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우가촌인 것도 패러디했다. [49] '끝나는 Day by Day'. 국내에는 '일상에 고하는 작별'로 번역되었다. [50] 2기 유성의 제미니에서 DVD/BD 영상특전으로 나왔다. 총 4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