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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와 가운데는 현재 모습, 아래는 당대 모습을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글 |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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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1] | ||
프랑스어 | [2] | ||
국가·위치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0년 | ||
등재기준 | (i)[3], (ii)[4], (iii)[5], (iv)[6], (vi)[7] | ||
지정번호 | 91 |
언어별 명칭 | |
이탈리아어 | Foro Romano |
라틴어 | Forum Romanum |
영어 | Roman For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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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rmoream relinquo, quam latericiam accepi.
나는 벽돌로 된 (로마시를) 받아서 대리석으로 된 (로마시를) 떠나노라.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나는 벽돌로 된 (로마시를) 받아서 대리석으로 된 (로마시를) 떠나노라.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이탈리아 로마시 1구 몬티(Monti)동에 위치한 유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구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이 곳을 중심으로 로마 도심이 뻗어나갔으며, 이 곳에서 로마 공화정 시기의 개선식, 공공 연설, 선거 발표, 즉위식 등 국가의 중대사가 열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제정 시기에도 트라야누스 황제가 포룸을 짓는 등 몇백 년간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징으로 남았다. 전성기에는 제국 전역에서 가장 호화로운 장소이자 로마 문명의 핵심이었고, 수백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사실 포로 로마노는 현대 이탈리아어 지명으로,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라고 부른다.[8][9]
다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친 이후,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고 로마가 속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쇠락해갔다.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한때 장려했던 신전과 포룸들은 무너져 내렸고,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보수하기 위하여 포룸의 석재를 떼어갔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에서도 성당을 짓기 위하여 포룸의 대리석 기둥들과 장식물 등을 대거 떼어가면서 포로 로마노는 현재와 같은 폐허로 전락하였다.
2. 모습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이자 포로 로마노의 최고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복원한 그림이다. 맨 위의 황금빛 지붕 건물은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유피테르 신전으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었다. 현재는 로마 시청사가 이 곳에 세워져 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바로 아래쪽, 색색의 석재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의 광장과 이를 둘러싼 건물들이 바로 포로 로마노로, 당시 로마 권력의 심장부였다. 한편 그림 오른쪽 밑에 있는 거대한 건물군들은 '황제들의 포룸(Fori Imperiali)'라고 불리며, 포로 로마노와 인접해있기는 해도 엄연히 다른 구역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등 로마 최고의 권력자들이 이 곳에 연이어 포룸들을 지었으며, 공공 회의장이나 정부 청사 등으로 쓰였다. 다만 20세기 초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이 황제들의 포룸 유적지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도로를 만들어버렸기에 현재는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참고로 이 도로를 '비아 사크라', 즉 신성한 도로라고 부른다.
3. 역사
원래 포로 로마노가 세워진 자리는 습한 저지대로, 물이 고여있어 사람들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 다만 기원전 7세기 경 대규모의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물이 빠져나갔고,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로마 도심의 한복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포로 로마노는 당시 로마를 양분하던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의 세력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두 세력이 서로 교류하기 위하여 포로 로마노에서 만나면서 더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포로 로마노는 점차 거대한 시장판으로 변모해갔고, 인구 유동성이 로마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떠올랐다. 정치인들은 당연스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포로 로마노에서 연설, 선거운동, 재판 등을 열었고, 이에 따라 점차 포로 로마노는 정치적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로마 왕정 시기에 로마의 왕들은 포룸에 행정 건물들을 다수 지었으며,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 곳에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을 지어 베스타를 모시는 여사제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다. 왕정이 몰락한 이후인 로마 공화정 시기에도 포로 로마노는 여전히 정치의 중심지로 남았다. 사투르누스 신전과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콩코르디아 신전 등이 이때 세워졌고, 술라는 포룸 한복판을 대리석 판석으로 포장하였다. 기원전 78년에는 공공 기록관이 들어섰고, 기원전 44년에는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시신을 이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우구스투스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실시하면서 제국의 중심에 맞게 변모시켰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율리우스 신전 등을 지었으며, 베스타 신전 등을 보수하기도 했다. 이후 로마 제국 시기에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이 바로 이 곳에서 열렸으며, 중요한 정치 행사나 개선식에 포로 로마노가 사용되었다. 다만 네 황제의 해에는 늙은 황제 갈바가 이 곳에서 암살당했으며, 오토 황제도 이 곳에서 친위대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포룸 뒤쪽에 거대한 트라야누스 포룸을 지었고, 이후 행정 업무는 대부분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이전되었다. 203년에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새로 들어섰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도 새 바실리카나 포룸들이 연이어 지어지면서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가장 호화롭고 번성한 곳이라는 영예를 몇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누릴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는 포로 로마노에 마지막 리모델링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건재했던 로마의 위상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만 이토록 화려했던 포로 로마노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핵심 지역을 모두 차지한 동로마 제국과 껍데기만 남아버린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고, 옛 수도인 로마가 서로마 제국에 소속되면서 포로 로마노도 같이 쇠락했던 것이다. 사코 디 로마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야만족들이 포로 로마노과 인근의 팔라티노 황궁에 있는 보물들을 약탈하고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재정이 모자랐던 서로마 제국은 이를 보수할 여력도 없었다. 결국 제국은 포로 로마노가 황폐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기원후 500년에는 한때 100만 명에 달하던 로마 인구가 25만 명까지 급강하했고,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를 어느 정도 보전하려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6세기 경에는 점차 포룸의 건물들이 가톨릭 성당으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도움은커녕 로마를 방문하면서 신전의 납 지붕과 대리석을 왕창 뜯어가면서 포로 로마노의 황폐화에 거들었다. 608년에 황제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이 세워지는데, 이것이 포로 로마노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었다.
8세기 경 로마에 방문한 여행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 포로 로마노는 예배당과 교회에 둘러싸인 돌더미 수준이었으며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를 보며 제국의 멸망을 한탄했다고 할 정도니 당시 얼마나 포로 로마노가 초라한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오면서 로마에 대대적인 성당 건설을 명했고, 이 시기에 가장 가까운 석재 공급지였던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황궁에서 또 대거 석재가 유출되면서 기껏 남아있던 건물들도 많은 수가 헐려나가거나 무너져 내렸다.
중세 시대 포로 로마노의 모습. 지오반니 파올로 파니니 작
이같은 채석 작업도 어느 정도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17세기부터는 자제되었으며, 포로 로마노는 주로 예술가나 철학가들이 방문하여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장소가 되었다. 1803년에는 고고학계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발굴하고 주위를 정리하는 등 본격적인 보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898년에는 이탈리아 왕국 정부 차원에서 보존 및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추가적인 훼손을 우려했고, 서두른 복원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신념 하에 신전이나 바실리카를 완전히 개건하는 것은 극히 꺼리며, 기존에 남아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유구를 발굴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다.
4. 건물
4.1. 유적이 남아있는 건물
4.1.1. 신전
사진 | 복원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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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Temple of Castor and Pollux)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최후의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낸 레길리우스 호수 전투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전 495년에 지어진 신전으로,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에게 바쳐졌다. 공화정 시기에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제정 시기에는 황실의 수장고이자 도량형을 담당하는 행정 부서가 이 곳을 사용했다. 4세기 경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오직 3개의 대리석 기둥만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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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르누스 신전(Temple of Saturn) 사투르누스 신전은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497년에 지어졌으며,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로마 왕정 말기에 지어져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였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잔해는 세 번째로 지어진 신전의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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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타 신전(Temple of Vesta) 베스타 신전은 베스타 여신을 모시던 신전으로, 여신의 성화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여사제들에게는 이 성화를 절대로 꺼뜨리지 말 임무가 주어졌다. 여사제들은 순결의 의무를 졌으며, 만일 성화가 꺼진다면 로마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베스타 신전은 직경 15m의 거대한 원통형 건물이었으며,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20개로 지어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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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베누스와 로마 신전(Temple of Venus and Roma) 베누스와 로마 신전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들 중 하나로, 콜로세움과 인접해 있었다. 미의 여신이자 로마의 수호신인 베누스 여신에게 바쳐졌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위기인 121년에 지어졌다. 9세기 초의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교황 레오 4세가 그 자리에 성당을 지으라 명하여 완전히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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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파우스티나 신전(Temple of Antoninus and Faustina) 안토니누스 파우스티나 신전은 141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사별한 아내이자 황후였던 대 파우스티나 황후에게 바쳐졌으나, 피우스 황제 사후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피우스 황제도 함께 봉헌하였다. 이후 7세기 경에 가톨릭 성당으로 용도가 전환되었으며, 현재는 성당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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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신전(Temple of Caesar) 카이사르 신전은 사후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29년에 완공하였으며, 특히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나타난 혜성을 그의 영혼으로 생각하여 이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참고로 이 신전으로 인하여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포로 로마노에 자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진 인물이 되었다. 중세 시기에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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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Temple of Vespasian and Titus)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은 콩코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위치한 신전으로, 사후 신격화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기원후 79년에 완공되었으며, 중세 시기에는 대부분이 헐려 나가고 요새로도 사용되는 등 풍파를 겪었다. 이때문에 현재는 셀라의 일부,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3개만이 겨우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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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 코스마 에 데미아노 성당(Santi Cosma e Damiano) 산티 코스마 에 데미아노 성당은 작은 규모의 가톨릭 성당으로, 본디 310년대에 집정관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신전이자 도서관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527년에 아랍의 의사들이었던 성 코스모스와 성 다미안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에는 귀중한 기독교 초기 모자이크들과 성화들이 전시되어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1947년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된 결과 현재에는 가장 보존이 잘 된 옛 고대 로마 유적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
4.1.2. 회당
사진 | 복원 | 설명 |
[17] |
아에밀리아 회당(Basilica Aemilia) 아에밀리아 회당은 길이가 100m, 폭이 30m에 달하는 거대한 공공 회당으로, 16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아치가 2열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3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기원전 19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전소와 재건을 반복하였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 아에밀리아 회당을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기도 했다. 다만 410년에 고트족의 침략으로 불에 탄 이후 재건되지 못하며 현재는 유구만을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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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율리아 회당(Basilica Julia) 율리아 회당은 로마 제국 시기 원로원 의원들이나 황제가 고관과 국사를 논하던 곳으로, 지금은 기단부와 타일을 깐 바닥, 그리고 조그만 아치들 일부만이 겨우 남아있다. 갈리아 전쟁에서 가져온 전리품을 이용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지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재위기에 완공되었다. 다만 410년에 사코 디 로마가 일어나면서 부분적 파손되었고, 이후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결국 폐허로 전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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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Basilica of Maxentius)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은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포로 로마노에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회당이었다. 막센티우스 황제 시기인 312년에 완공되었으며, 8개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는 아름다운 백색 건물이었다고 전한다. 다만 지진과 풍랑, 그리고 채석 과정으로 크게 훼손되어 모습을 잃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북쪽 벽과 아치 뿐이다. |
4.1.3.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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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h of Septimius Severus)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 북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개선문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3년에 지어졌다. 세베루스 황제 사후 2명의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에 올랐는데, 이후 황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카라칼라는 게타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렸고, 이때문에 개선문에 새겨졌던 게타의 모습도 지워졌다. 현재는 포로 로마노에서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로, 포로 로마노의 상징물들 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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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개선문(Arch of Titus) 티투스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의 남동쪽에 위치한 개선문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티투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81년에 세웠다. 71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의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이 부조에 몇 남아있지 않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유대교의 상징인 메노라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우아한 균형미 덕분에 16세기 이래 수많은 개선문들의 모델이 되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도 이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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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봉헌된 개선문으로, 대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1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로마 시에서 가장 거대한 개선문이었으며, 높이는 21m, 너비는 29m이다. 3개의 문이 있으며, 가장 가운데 문의 높이는 11.5m, 너비는 6.5m 정도이다. 개선문을 만들 때 처음부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전임 황제들이 지은 건물들에서 부조와 석재를 떼어와 만들었다고 한다. |
4.1.4.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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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아(Regia) 레기아는 로마 왕정 시기 로마의 왕들이 살던 궁전으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는 로마 최고 종교지도자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베스타 신전과 안토니누스 파우스티나 신전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었으며, 현재는 불타 사라져 기단부분만이 겨우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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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아 율리아(Curia Julia) 쿠리아 율리아는 원로원의 공식 회의장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착공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완공되었다. 7세기 경 성당으로 용도가 전환된 덕에 아직까지도 로마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에 지붕과 위쪽 널을 리모델링하면서 이 부분만 현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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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리움(Tabularium) 타불라리움은 고대 로마의 공식 기록 보관소로, 카피톨리누스 언덕 발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78년에 술라의 명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화재로 인하여 불탔다가 다시 재건되었다.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불탔으며, 중세 시기에 유적 위에 거주용 건물이 지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에도 1층은 고대 유적이고 그 위에 3층짜리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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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쿠스 데오룸 콘센티움(Portico Dii Consentes) 포티쿠스 데오룸 콘센티움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발치에 자리한 건축물로, 한때 무너져 내린 대리석 돌더미였던 것을 1835년에 다시 복구하여 현재에 이른다. 367년에 마지막으로 개건되었으며, 12개의 방이 있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업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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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리움 베스타에(House of the Vestals) 아트리움 베스타에는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순결한 여사제들이 주거하던 건물이었다. 베스타 신전 뒷편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3층짜리 건물로 50여 개에 달하는 방이 있었다. 동쪽 끝에는 베스타 의식을 창립한 로마의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쇠락하면서 11세기 경에 이미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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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아눔(Mamertine Prison) 툴리아눔은 고대 로마 시기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기원전 640년에 처음으로 완공되었으며 이후 끊임없이 개축과 보수 작업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렀다. 다만 중세에는 감옥에서 성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베드로가 이 곳에 갇혔다는 전설 덕분에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 외에도 골족의 전설적 지도자인 베르킨게토릭스도 이 곳에 포로로 끌려와 수감된 바 있다고 전해진다. |
4.1.5.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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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스의 기둥(Column of Phocas) 포카스의 기둥은 동로마 제국 시기인 608년에 황제 포카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둥으로, 포로 로마노에 최후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있으며, 이 기둥 밑에는 포카스를 찬양하는 내용의 라틴어 글이 적혀 있다. 원래는 꼭대기에 동상도 있었는데, 이라클리오스의 반란으로 포카스가 죽임을 당한 뒤 기록말살형으로 동상도 같이 끌어내려졌다. |
4.2. 완전히 사라진 건물
현재 포로 로마노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물들에는 콩코르디아 신전, 야누스 신전, 티베리우스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사투르누스 제단, 오피미아 회당, 셈프로니아 회당, 불칸 신전, 베누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 등 셀 수 없이 많으며, 고고학계에서는 사실상 대부분의 포로 로마노 내부의 주요 건축물들이 몇 백년 간의 파괴와 훼손을 거치면서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사진 | 설명 |
콩코르디아 신전(Temple of Concord) 콩코르디아 신전은 평화의 여신인 콩코르디아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367년 경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기원전 121년에 한 번, 그리고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에 또 한 번 개건하였다. 신전 꼭대기에는 니케의 신상이 서있었으며,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복원되었다. 제단 중앙에는 콩코르디아 여신이 평화의 여신 팍스와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 여신과 함께 모셔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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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 신전(Temple of Janus) 야누스 신전은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게 바쳐진 소규모의 신전이다. 로마의 누마 폼필리우스 왕이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진정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구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이었으나, 내부는 신상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협소한 편이었다고 한다. 야누스 신전의 문은 전쟁 시기에는 열린 상태로, 평화로운 시기에는 닫힌 상태로 두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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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개선문(Arch of Augustus) 포로 로마노 동쪽 끝단에 위치했던 개선문. 로마 시내에 지어진 삼문식 개선문들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지어졌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후 로마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개선문을 지어주기로 합의하며 처음 건설되었다. 다만 13세기에 쓰여진 로마 여행록에 이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의 폐허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었던 것을 보면 13세기가 되기도 전에 이미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부지 면적은 17.75m x 5.25m 정도로 추정. |
5. 기타
1764년 10월 15일, 맨발의 수사들이 유피테르 신전 안에서 저녁 찬송을 부르던 차에,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폐허 속에서 사색하던 나에게 이 도시의 쇠퇴와 멸망에 대하여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
에드워드 기번
엄청난 벽돌과 시멘트의 퇴적물들이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엄청난 사치, 무엇을 위한 거대한 문명이었던가? 이것의 주변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들처럼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거인의 집을 짓기 위해 쌓았던 건축자재를 보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에밀 졸라[25]
장기간에 걸친 로마의 지배를 증오했던 이 세계는 이 경이로운 제국의 심장부를 파괴시키고 깨뜨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 비록 엎드려 있고 죽어 있다 할지라도 훼손된 잔해들이 여전히 공포와 증오로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유적 자체를 파묻어 버렸다. -
미셸 드 몽테뉴[26]
포로 로마노는 한때 로마 제국의 심장부이자 가장 화려한 장소였기에, 로마 제국이 쇠망한 이후에 함께 쇠락해버린 포로 로마노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비애감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으로 로마사의 거두로 꼽히는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 집필을 결심한 곳이 바로 이 포로 로마노이며, 지오반니 파올로 파니니, 에드워드 리어, 장 밥티스트 라망트 등 유럽의 주요 화가들이 포로 로마노의 유적들의 쓸쓸한 분위기를 주제로 화폭에 담았다. 특히 화가의 감성을 중시했던
낭만주의 양식이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시기에는 '한때 세계 최고의 영화를 누렸으나 현재는 폐허에 불과한' 포로 로마노만큼 화가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주제도 없었으니, 이때 포로 로마노에 대한 그림들이 다수 만들어지고는 했다.이 낭만주의 시대의 영향은 현대까지도 남아있는데, 로봇 3원칙으로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파운데이션 시리즈에 등장하는 은하제국의 수도 행성 트랜터가 바로 이 로마와 포로 로마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27] 심지어는 얼음과 불의 노래의 고대 제국 발리리아 자유국도 한때 강성했던 제국, 그리고 현재는 폐허라는 점에서 포로 로마노와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이다.
서구권에서는 이를 이용한 짤도 있다. 놀랍게도 같은 장소를 묘사한 그림과 사진으로, 세베루스 개선문이나 남아있는 소수의 기둥들로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이 사진으로 비교해보면 현재의 포로 로마노는 얼마나 많이 폐허가 됐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게임 문명 4에서는 로마 문명의 고유 건물로 나왔다. 정확히는 그냥 포룸이긴 하지만. 시장을 대체하며 위인 생성률을 높여 주는데, 위인이 빨리 나와서 나쁠 것은 전혀 없지만 같은 보너스를 주는 철학적 특성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
[2]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
[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8]
고대 군항이던 타란툼이 현대 이탈리아 지명으로는
타란토이고 네아폴리스는
나폴리인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9]
이 포룸이라는 단어는 영단어 '
포럼(forum)'의 어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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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는 1893년에 로마를 여행했고, 이 때 포로 로마노의 거대한 유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26]
미셸 드 몽테뉴는 1580년 경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포로 로마노의 폐허를 방문했다.
[27]
트랜터는 한때 전 은하계를 지배하는 행성이었으나, 제국의 쇠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행성의 금속 건물들을 떼어 파는 것으로 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