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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8:32:44

보트피플

1. 개요2. 베트남의 보트피플3. 베트남 이외의 보트피플
3.1. 동남아시아3.2. 라틴아메리카3.3. 중동 및 아프리카3.4. 동아시아3.5. 오세아니아3.6. 유럽
4. 기타


보트피플
Boat people

1. 개요

파일:vietnamese-boat-people-1.jpg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함께 공산화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을 해로(海路)로 탈출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즉, 배를 타고 다니는 난민들. 반대로 육로를 통해 이들 국가를 탈출한 사람들은 랜드피플이라 불린다. 나라가 망하면 국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를 말해주는 전형적인 사례.

2. 베트남의 보트피플

보트 피플의 원조는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과 함께 갈 곳이 없어진 남베트남의 하층민/중산층과 상류층, 지식인, 반공주의자, 화교, 족, 미국에 협조하던 사람들, 가톨릭 신자들, 한국인 대만인, 일본인, 미국인, 영국인, 호주인, 프랑스인, 태국인, 필리핀인 등의 외국인 그룹 등이 밀항하거나 추방당한 것을 말한다.[1] 1970년대 중반기부터 1980년대 중반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최대 400만명 가량이 베트남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은 시기적으로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남베트남 패망' 하면 생각나는 사이공 함락 영상 때 패닉에 빠져 도망치는 사람들, 즉 패망 직후에 외국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며, 두 번째는 패망 이후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로, 이들이 바로 좁은 의미의 '보트 피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탈출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 수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두 번째 그룹이었으며, 대부분 농민이나 어민 같은 저소득층이었으며 학력이 낮았다. 첫 번째 그룹이 다음으로 숫자가 많았으며 남베트남의 군인들과 그 가족, 그리고 상대적으로 기득권층과 고학력자가 많이 포함된 그룹이었다. 세 번째 그룹은 가장 숫자가 적으며, 통일 이후 수감된 베트남-미국 혼혈아들이나 정치범들이었다. 구성 성분은 다르지만 베트남 공산 독재정권의 폭압이 두려워 도망쳤거나 이미 겪은 뒤 탈출한 사람들인 것은 동일하다.

이들은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 타 동남아시아로 영구 이주하거나 당시 영국 땅이었던 홍콩으로 탈출한 뒤 홍콩을 발판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로 망명하고자 하였다.[2] 일부는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프랑스나 기타 유럽 국가들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탄 보트는 제대로 된 배가 아니었고 동력도 없었기에, 운좋게 자유 진영에 도착 후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풍랑에 휩쓸리거나 식량과 식수가 떨어지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특히, 부유층의 경우에는 위에 나와있는 대로 홍콩에 정착하여 서방 세계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빈곤층은 비행기표나 배편을 구할 길이 없었기에 아예 남베트남에서 호주까지 2,000km가 넘는 항로를 떠돌았다.

이 와중에 동남아시아에서 기승이던 말라카 해협 해적들에게 잡힌 보트피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비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물자만 털어가면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고 강간, 살해당하거나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치운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규형 원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굿모닝 대통령에서 이런 보트피플을 대상으로 털던 해적들과 싸우게 된다.

화교의 경우에는 사상적인 이유로 쫓겨난것이 아닌데다가 당시 중국 베트남이 엄연히 적성국가였던 관계로 중국에 정착할 수는 있었지만 중국 정부 차원에서 커다란 지원을 했던게 아니기 때문에 이들 중 대다수는 한 동안 가난뱅이 생활을 면치 못했다.[3] 그래도 상당수의 화교들은 홍콩 앞바다에서 홍콩 경찰의 해안경비대나 영국 해군에 구조되어 구룡성채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는 그나마 돈은 만질 수 있었으니[4] 당대 보트피플 가운데서는 그나마 운 좋은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표류하는 보트피플들을 중간에 발견한 다른 나라의 선박들도 정치적인 이유나 배라는 특수성[5]으로 인해 이들을 외면했다.

그래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은 보트피플을 구조했다. 지금도 싱가포르 사회의 하층민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베트남인 보트피플들이다.[6] 태국에서도 베트남 보트피플들이 꽤 유입되었다.

1985년 11월 14일 오후 5시 남중국해에서 대한민국의 전제용 선장은 25척의 배로부터 외면당한 보트피플 96명(난민대표 피터 응우옌)[7]을 구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재용 선장은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십년간 일한 회사에서 해임되었고 정부로부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군사정권인지라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8] 이후 전제용 선장은 고향인 통영에서 멍게 양식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 이들을 구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2004년 8월 8일 LA공항에서 미국에서 정착한 베트남인들의 초청으로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 난민들은 UN난센상에 전재용 선장을 추천했다. 아쉽게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최종후보자로 올라갔었다.

이러한 보트피플 행렬은 아시아- 오세아니아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이 추진되고 사상교육도 중지되고 나서야 진정세를 보였다.

한편 베트남 정부에서는 당연히 보트피플들을 배신자나 간첩 정도의 취급을 했으며[9] 귀국하더라도 불순분자 취급하며 상시 감시했지만 개혁개방 정책을 펴고 미국과의 수교도 이루어지면서 경제발전을 위해 보트피플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당수 보트피플들은 베트남에 투자를 하고 있고[10] 국영기업 사장으로 발탁된 인사도 있으며, 노년을 베트남에서 보내기 위해 귀국한 보트피플도 꽤있다.

물론 아직도 베트남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보트피플도 적지 않은 편이다. 사실 자기 자신들을 매국노로 취급하면서 내쫓아버리다시피했는데 반감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다.

한편으로 남베트남과 관련없이 순수히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보트피플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베트남이 통일 이후에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이 이어져서 국가예산의 상당수로 전비를 계속해서 쏟아부은 영향으로 인해 전후복구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고 남베트남과 북베트남간의 경제적인 통합도 잡음을 냈고 정책도 이에 따라가지 않아 베트남의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기[11] 때문에 돈이나 일자리를 구하려고 홍콩이나 태국, 말레이시아로 가려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위의 400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경제적인 이유로 보트피플이 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이후의 보트피플들 대다수가 경제적인 이유로 보트피플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보트피플이 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대다수는 베트남의 경제가 나아지면서 베트남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상당한 거금을 쥐고 되돌아온 경우가 많기에[12] 귀환 이후에도 잘사는 경우가 많다고, 다만 모든 이들이 거금을 쥔 건 아니고 운없게도 캄보디아로 간 보트피플의 경우에는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하며, 귀환하지 못한 보트피플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호수에서 살고 있다. 톤레사프 호수의 베트남인들인데 가보면 진짜로 어렵게들 살고 있었다.

한국에도 1990년대 초반까지 보트피플로 입국한 베트남인들이 있었고, 부산광역시에 이들이 거주하는 시설이 따로 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고 베트남 난민들은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시설도 문 닫게 된다.

한국에서 베트남계 보트피플들을 대부분 제3국가로 이주시켰기 때문에 한국에 정착한 베트남인이나 베트남계 이주민들이 상당함에도 미국이나 호주, 싱가포르 등 상당수 베트남인이 많은 국가에서 벌어지는 구 남베트남계 vs 통일 베트남계 이주민들간의 대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13]

사실 베트남계 미국인의 이미지가 커서 미국을 먼저 생각하는데 호주 싱가포르도 과거 보트피플 출신자들과 현대 베트남 이민자들이 뒤섞여 이런 갈등 양상이 큰 편이다.

특히 베트남계 싱가포르인들은 베트남 화교였던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제는 부자가 된 사람도 많지만 현대 베트남 출신 이민자들은 호커센터 등에서 품팔이하며 어렵게들 산다. 호주 역시 보트피플로 정착해 자리잡은 베트남계 호주인들과 현대 베트남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지가 다르며 둘은 사이가 안 좋다.

반 다크홈이 대표적인 보트피플 1.5세대 출신이며, 키호이콴 또한 베트남 화교 보트피플 출신이다. NewJeans 하니 역시 베트남계 호주인으로, 외가 쪽이 70년대 호주로 건너온 보트피플 이민자로 추정된다. 하니는 가족들이 보트피플 출신이라고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베트남계 호주인들의 경우 대부분 보트피플로 호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기에 보트피플로 유입된 베트남계 3세대로 추측이 가능하다. 애초 자기 가족이 난민 출신이라는 걸 밝히는 자체가 쉽지도 않다.

3. 베트남 이외의 보트피플

3.1. 동남아시아

흔히 보트피플 하면 남베트남 사람들만을 생각하는데 라오스, 캄보디아[14], 미얀마[15] 또한 같은 시기에 공산화되었거나 사회주의 체제의 군부 독재 때문에 이들 국가를 탈출하는 부르주아 반공주의자들이 많았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메콩강을 건너서 태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도망치면 되기 때문에 보트피플은 많지 않았지만 캄보디아에서도 태국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산 사람들은 그냥 배 타고 다른 곳으로 가야했으며 베트남을 포함하여 이들 동남아시아 국가의 보트피플 수는 100만 명에 육박했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16] 미국[17] 호주[18]으로 망명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바다를 떠돌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한국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보트피플을 받아주긴 했지만, UN의 도움으로 지원을 받아 부산에 난민촌을 만들어서 수용했을 뿐이고 정착은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제3국으로 다시 보냈다. 물론, 그 당시의 한국은 개발도상국 시절이라 미약한 경제력의 문제도 있었고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안보가 불안정해지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3국으로 보냈던 상황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보트피플의 베트남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면서 한국에 정착한 극소수의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 #

상당수의 베트남계 미국인과 몬족계 미국인 등 동남아시아계 미국인들과 미얀마계 싱가포르인, 미얀마계 말레이시아인, 몬족계 호주인, 베트남계 호주인 등이 이런 보트피플이다.

동남아시아를 떠도는 보트피플 로힝야족에 대한 보도기사도 있는데, 이 경우는 제국주의의 산물로 보는 게 맞다. 정확히는 영국이 식민 지배 과정에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 인도 북동부의 벵골인을 대거 데려와 정착시켜 노동력으로 썼는데,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뒤 주류민족인 버마족들이 종교적으로도 다르고 민족적인 반감도 큰 상황에서 이들을 몽땅 벵골인[19]으로 취급하고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옆나라인 방글라데시는 이를 곱게 보지 않지만 별 수 없는 현실이다. 안 그래도 방글라데시도 빈국인데다가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미친 나라인 판에 이들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일수도 없는 상황이다.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을 거쳐 보트피플이 생기기도 해서 2001년 대규모 아프간 난민들이 호주로의 망명을 시도하며 망망대해를 떠도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주 정부는 이들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혀서 인도네시아 뉴질랜드로 갔다.

3.2. 라틴아메리카

사실상 플로리다의 부속도서인 쿠바에서 미국으로 오는 보트피플도 종종 있는데, 대개 미국에서 거하게 돈을 벌려고 오는 인원이 다수이며 쿠바의 공산정권에 반대하며 미국으로 망명하는 이들도 소수 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1960년대의 보트피플들은 대부분 정치적 망명객으로서 원래 쿠바의 지주 계급이었던 백인 그룹이지만[20] 그 이후의 보트피플들은 대개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21] 어찌되었든 대규모는 아니더라도 보트피플 행렬이 꾸준히 이어졌다.

어찌됬든 이런 역사 덕택에 플로리다 지역에 쿠바계 미국인들이 흔하다. 특히 쿠바 공산화로 건너온 쿠바계 미국인의 경우는 전술했듯 상류층에 속한다.

하지만 쿠바에서 이를 역이용해서 여러 차례 범죄자들과 빈민들을 미국으로 보내도록 하는 작전으로 미국을 엿먹인 적이 있는데다가 미국으로써도 쿠바에서 난민들이 꾸준히 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기에 쿠바와 협약을 맺어서 육지에 도달한 보트피플만 받아들이고 바다 중간에서 구조된 보트피플들은 쿠바로 되돌려보낸다. 1999년 쿠바 보트피플 엘리안 곤살레스 사건도 그렇게 하다 벌어진 것이다.

한편 일부 공산주의 성향 미국인들이 보트피플로서 공산화된 후의 쿠바로 망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유가의 장기화로 경제가 박살났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가 급등으로 간신히 복구중인 베네수엘라에서도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바베이도스 카리브해 섬 국가/속령으로 가고 있으며, 한시적으로 모국을 떠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대 200만 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 물론 베네수엘라에서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은 이미 1980년대부터 많았기는 했지만[22] 해외여행에 제한을 취하는 국가가 아님에도[23] 보트피플이 늘어난 원인에는 석유 유가 폭락으로 베네수엘라 항공기의 비행기 티켓 가격도 이전에 비해 크게 비싸져[24] 돈 없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비행기 티켓을 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다. 물론 상류층 백인들은 진작에 스페인으로 들어가버린 지 오래다.[25]

또한 주요 대도시 지역과 브라질, 가이아나, 콜롬비아 등과는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지는 데 반하여 반대로 카리브 국가와는 제법 가깝기 때문에 카리브 국가로 배타고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브라질이나 가이아나, 콜롬비아 등으로 아예 안 가는 건 아니고, 사실 가이아나나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국경지역에서도 베네수엘라인들은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기는 하다. 그야 베네수엘라가 아무리 경제가 안 좋다해도 휘발유 값은 왕창 싸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에서는 특히 이 점을 이용해 감정이 좋지 않던 베네수엘라인들에게 엄청난 갑질을 시전 중이다.

2018년 중남미 난민 캐러밴 북상 사건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캐러밴 수용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캐러밴 난민들은 대부분 멕시코 티후아나로 돌려보내졌고 미국 대신 멕시코 정착을 택했다.[26]

3.3. 중동 및 아프리카

2010년대 아랍의 봄 이후 아프리카와 중동 난민들이 난민선을 타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기 시작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시리아인들도 지중해로 보트피플 러시 중이다. 지중해의 경우는 그나마 난민들을 잘 대하는 편이지만, 이 케이스도 단기항해가 대부분이라 난민들과 적당히 나눠먹어도 살 수 있고 유럽 국가들이 나중에 추방하건 어쩌건 일단 구조는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소 완화되긴 해도 여전히 진행 중인 리비아 내전의 경우도 이런 사례에 해당된다. 심지어 시리아보다 먼저 일어났다.

아프리카에서는 소말리아 난민들이 바다 건너 근처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예멘이 평화로웠을 때는 소말리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사람들이 난민으로 왔지만 예멘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내전이 나타나자 예멘 난민들도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서 다른 나라로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난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유럽 국가, 특히 남유럽 국가에서는 난민 수용에 반발하는 우파 정당이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난민 구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지중해 난민들은 굉장히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난민선을 탈 돈이 없는 사람은 한쪽 신장 같은 장기를 팔아 배에 승선하는가 하면, 여성 난민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을 막기 위해 조기폐경 위험이 있는 독한 피임주사를 맞고 승선한다고 한다.

승선을 했다고 해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난민선은 안전한 배가 아닌 인신 매매업자들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모터보트나 고무보트에 불과하며 배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다 해적들에게 배 엔진 등을 약탈당해 표류하거나 최악의 경우 침몰해서 승선원 전원이 사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난민선 침몰 사고로 2015년 지중해 난민선 침몰 사고, 2023년 메시니아 난민선 침몰 사고 등이 있다.

3.4. 동아시아

어떻게 보면 근현대 중국 문화대혁명 천안문 6.4 항쟁에서 도망친 일부 반공 성향의 중국인들과 국공내전 시기에 대만으로 유입된 외성인[27], 반환된 홍콩을 떠나는 홍콩인들도 보트피플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공산화된 국가에서 탈출했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갈수록 국수주의적으로 변하는 중국에 의해 정착을 하고도 심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캐나다가 특히 이렇게 탈출한 홍콩인들이 대거 건너가 리치먼드라는 도시를 세웠다.

일부 탈북자들도 드물게 바다를 건너서 탈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북한에서 일부 해안 지역에 전기철조망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인지 바다로 탈출하는 탈북자들은 많지 않게 되었다. 가끔 목숨 걸고 해로 탈출을 하는 탈북자들은 일본 근해에서 해상보안청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되어 해상보안청 직원들의 PTSD를 만드는 요인이 된다.

2022년 러시아 동원령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인 2명이 쪽배를 타고 10월에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도망친 사건이 일어났다. # 네티즌들은 신종 보트피플이라며 그 파도 심한 베링 해를 쪽배 타고 넘는 게 가능하냐고 경악했다. 시베리아 남성 12명이 2014년에 도망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미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 중이다.

한국 동해상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트를 타고 오는 러시아인 보트피플이 나오고 있다. #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에서 이들을 전원 구조 및 신변을 확보했다.

드물지만 한국이 한창 못살던 1950년대 1960년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더 나가서 북미로 가려던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부산항에서 일본 고베시 등으로 가서 미국의 서부 지역 등지로 가려던 이들이다. 물론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북미가 그런 거고 일본으로는 사실 꽤 많은 한국인이 이렇게 밀항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개발의 성과가 나오며 삶의 질이 올라가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까지 개최되고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자 이제는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3.5. 오세아니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군도에서 가장 심각한 내전을 치렀던 부건빌 내전에서도 부건빌 섬을 떠났던 주민들도 배를 타고 다른 섬들로 도망쳐야 했었다. 섬에서 일어난 내전인데다가 섬의 특성상 육지로 도망갈 길이 없었다보니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군도라는 조건상 여러 개로 나누어진 작은 섬들이어도 섬 사이의 바다 간격이 상대적으로 좁고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데다 그나마 그렇게 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다보니 많은 시간 동안 넓은 바다를 건너는 형태는 아니었다.

호주 시드니 카브라마타라는 동네가 베트남계 보트피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베트남어 간판도 흔하다. 호주는 동남아시아와 가까워서 거리가 먼 미국에 비해서도 훨씬 많은 인도차이나반도 보트피플이 정착한 나라다. [28]

3.6. 유럽

영국 런던에도 보트피플이 있다. 정확히는 탈주민이 아니고 배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런던의 살인적인 집값 때문. 월세로 집에서 산다 해도 웬만한 가격으론 사람이 살 만한 집을 구하기 힘들다. 좀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은 비싸다. 전세는 그냥 답이 없는 수준. 그래서 런던의 강 같은 데서 보트를 사서 거기에 조리시설 화장실 침실 난로 등을 구비해놓고 살면 그럭저럭 노숙하지 않고 살 수는 있어 보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좀 된다. 네덜란드 같은 경우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소개되었듯이 진즉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4. 기타

대한민국 공군중에서도 인트라넷에 상주하거나 자주 접속하며, 수없는 인트라넷 사이트를 떠도는 장병들을 일컫는 대한민국 공군의 은어로 쓰이기도 한다. 공군은 다른 군에 비해 병사를 대상으로 한 인트라넷 사이트(병사 홈페이지, 병홈이라고 한다) 개설이 비교적 활발한 편인데, 이러한 병홈중에서도 타 비행단 병사에게도 가입이 개방되는[29]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사이트의 경우 슬슬 장병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턴가 공군 병사들의 자유게시판으로서 자리매김된다. 문제는 대놓고 실명제임에도 DC 싸닥션 날릴 것같은 글들이 수시로 올라오곤 한다는 것이다.[30]덕분에 이러한 인트라넷 사이트들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모양인지 몇 달간 어찌어찌 잘 굴러가나 싶다가도 결국 터져나가고 또 다른 사이트가 생성되길 반복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사이트들을 끊임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상위 항목처럼 나라를 잃고 불안정한 보트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도는 것과 같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1] 특히 화교의 경우에 중월전쟁이 벌어지면서 사실상 강제적으로 중국 대륙으로 추방당하거나, 배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홍콩/ 마카오/ 대만 등으로 이주하든지 해야했다. 그 화교들이 홍콩으로 건너가 구룡성채의 반을 점령한다. [2] 물론 홍콩으로 간 경우에는 홍콩에 도착한 뒤 일부만 구미권으로 갔지 대부분 현지에 남아버려야 했고 구룡성채에 야금야금 들어와 토착 삼합회와 충돌하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은 기후나 풍토도 달라서 어려움이 많았기에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경우 갱단으로 악명이 높아지기도 했다. 같은 동남아시아인 말레이반도 태국, 필리핀으로 유입된 부류들은 처음부터 멀지 않고 기후나 풍토가 베트남과 완전히 비슷한지라 영구 이주를 원해서 나중에 그 나라에 귀화해서 현지에 동화되었다. 당장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가도 일부 기성세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베트남 출신 화교들이 꽤 많다. [3] 당시에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가량으로 베트남과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4]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베트남과 홍콩의 경제적인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던 것도 있다.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이었던데 반해서 홍콩은 5,000달러대를 찍었으니 말 다 했다. 베트남은 1987년 도이모이 정책 후에도 가난한 나라였던 반면 홍콩은 1984년에 완전히 선진국에 진입해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한다. [5] 제한된 생필품만으로 버텨야 한다. [6] 호커센터나 쇼핑몰에서 청소나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화교계 보트 피플이다. 이건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이다. [7] 피터 누엔이라고도 한다. 표기가 혼란한 이유는 응우옌 참고. [8] 실로 어이가 없는게 반공이 국시라는 정권이 공산당 싫어서 도망친 사람들 구조한 사람을 상은 못 줄 망정 들들 볶아댄것이다. [9] 물론 그와 별개로 이들이 베트남에서 빠져나가는 건 묵인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으로 전비를 꾸준히 지출해야했던 영향으로 경제성장이 지지부진해서 위협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 베트남 공산당 입장에서 체제에 위협이 되는 위험분자들이 빠져나가는 효과도 있었고 불교계의 반발도 고려해야되는 데다가 바로 옆동네에서 자본주의자를 죽인답시고 킬링필드란 미친 짓거리를 벌이며 자국민을 학살하던 크메르 루주 정권과 확실히 차별화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정수준의 돈만 내면 나가든지 말든지 하면서 방조했다. [10] 실제 베트남 부동산 시장의 큰 손 가운데 하나가 베트남계 이주민들이다. [11] 현재 베트남 화폐의 가치가 한국 화폐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것도 1980년대의 인플레이션으로 화폐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12] 대체로 미화 수백에서 천 수백 달러 정도, 물론 다른 나라에서 장착하기에는 심하게 부족한 돈이지만 1990년대 초반 당시 베트남 기준으로는 상당한 금액이다. [13]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베트남인의 상당수는 도이모이 정책 시행 이후 취업비자나 국제결혼, 유학 등의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한국에 정착한 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베트남전을 아주 어린 시절에 겪었거나 전쟁 자체를 겪지 않은 이들이 많다보니 미국이나 호주, 싱가포르처럼 교민 간에 이념갈등은 없는 편이다. [14] 참고로 캄보디아의 대부분의 보트피플은 피난의 이유가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캄보디아의 사람들은 폴 포트라는 광기의 독재자가 지배하던 킬링필드라는 지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보트피플이 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15]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미얀마는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고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장기독재를 하는 형태였다. [16] 가장 가까워서 제일 많은 숫자가 유입되었다. 싱가포르에는 아예 미얀마인 공동체가 크게 생겼다. [17] 미국은 거리가 터무니없이 멀어 소수가 홍콩을 거쳐 갔다. 몬족계 미국인들이 라오스에서 유입된 난민 출신들이다. [18] 호주 역시 가까워서 많은 숫자가 유입되었다. [19] 식민지배 전에도 아라칸에 살던 인도-아리아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부르던 명칭이 로힝야였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이들도 진짜로 영국으로 인해 들어온 이들과 함께 전부 벵골인들로 취급했다. 그리고 유럽/북미 등 서양 매체에서는 이 "벵골인"들을 모조리 로힝야로 취급한다. 그래서 "로힝야"인들이 영국의 산물이란 것은 완전히 들어맞는 말이 아니다. 물론 "진짜" 로힝야보다 영국 지배 하에서 들어온 벵골인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한다. [20] 오늘날에는 이들이 스페인계 미국인으로도 자주 분류된다. 애초 양상이 대부분의 히스패닉 그룹과 크게 달라서 외양으로는 일반적인 미국 백인하고 구분조차 안 된다. [21] 쿠바는 중남미에서 그럭저럭 복지나 교육, 의료 같은 것이 괜찮기는 하지만 정작 1인당 GDP가 후달려서 봉급 수준이 심하게 짜기 때문에(쿠바 평균 월급수준이 미국에서 2~3일 정도만 최저임금 수준으로 일해도 벌 수 있는 수준이다.) 굳이 쿠바에서 돈 벌려고 투잡이나 쓰리잡을 뛰는 것보다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어쨌든 수십 배의 돈을 벌 수 있는 미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트피플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다. [22] 플로리다 남부 지역에 베네수엘라 출신 주민들이 많이 살고있다. [23] 사실 베네수엘라는 경제가 막장화되기 이전에는 금액과 횟수에 제한이 있기는 해도, 해외여행가는데 우대환율을 적용했던 나라였다. [24] 사실 이전에 비해 비싸졌다기는 보다, 공식환율은 제기능을 못하는데 반해 암시장 환율이 미쳐 날뛰다보니 비행기 표값이 체감상으로 왕창 비싸져서 생긴 문제로 사실 2015년 이전까지는 최저임금 받는 일반인들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25] 애초 이쪽 상류층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가 다 그렇듯 스페인, 이탈리아의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 [26] 대신 반작용으로 2018년 이후 티후아나의 치안이 굉장히 나빠졌다. 캐러밴 난민에 포함된 엘살바도르 갱들이나 아이티 갱들이 대거 멕시코 북부에 유입되고 토착 카르텔과 싸우기 시작해서다. [27] 특히 이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건너왔다. [28] 당장 보트피플들이 왜 구 영국령이던 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로 먼저 갔는지 생각하면 이해가 될 거다. [29] 인트라넷도 서버에 한계가 있다는 특성상 트래픽(...)을 보기 때문에 인원 과포화를 막기 위해 같은 비행단 출신만 우선 받고 그 외에는 전역하는 사람 수만큼 선착순 가입제를 도입하는 경우도 있다. [30] 글의 수위와는 관계 없지만, 심지어는 인트라넷으로 위키를 구축이라도 하려는건지, 장문의 항목을 직접 타이핑으로 작성하여 퍼오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 사이트가 터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