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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0:38:13

염정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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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역사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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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廉政公署 / 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 (ICAC)

1974년 2월 15일 영국령 홍콩 머레이 맥클레호스 총독[1] 시절 설립된 홍콩 부패수사 전문기관. 홍콩에서는 중국어 약칭으로 廉署(림취/염서)라 부른다. 본부 사무실은 홍콩섬 노스포인트에 있는데 MTR 홍콩섬선 쿼리베이(Quarry Bay)역 인근이다. 홍콩섬 완차이에 홍콩섬 지국이 있고 구룡반도 신계 등에도 지국을 두고 있다.

2. 상세

공무원 등 공직에 의한 비리나 부정, 민간기업은 경영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2] 수사 및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수사는 시민의 신고나 밀고 또는 염정공서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진다. 영장이 없어도 부패 혐의자의 체포가 가능하고 필요시 권총 등 무기 휴대 및 경찰특공대인 SDU 동원도 가능하다.

강력한 수사권이 있지만 용의자 기소 여부는 검찰을 거느린 율정사 몫이다.

아시아의 금융 허브이자 자유 무역항이라 많은 외국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오해와 달리 홍콩에서 돈 세탁이나 조세 피난처 노릇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 무서운 기관 때문이며 홍콩의 시중은행들의 계좌 개설 절차가 아주 까다로운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외국인이든 홍콩인이든 간에 일정한 주거[3] + HKID를 요구하며 이것이 없으면 계좌 개설이 안 된다. 중국은행 HSBC, 스탠다드차타드 등의 거대 은행이 아닌 로컬 은행들은 아예 외국인 계좌 개설을 안 받기도 한다.[4] 염정공서가 고객 정보를 요구하면 내줘야 한다. 이러니 홍콩에서 돈 세탁 및 조세포탈을 저지를 바보는 없다.[5]

물론 홍콩도 훌륭한 조세피난처의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일반적 개념의 조세피난이 아닌 관세 면제다. 아시아의 자유무역항인 데다 홍콩 정부의 정책으로 이미 1963년 부가가치세 관세가 전면 폐지되었다. 즉, 법인세 회피같은 목적이 아니라 관세회피를 위한 행위는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안 그래도 무역거점인 데다 부가가치세가 없어서 공산품류가 특히 싼 편에 속하는데 관세까지 없으니 뭐...물자 조달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실제로 중국 기업들은 홍콩 지사를 통해 우회수입을 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우며 아마존닷컴 홍콩지사 홈페이지를 통한 해외 직구가 활발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조세피난과 관세회피는 조금 다르다. 둘 다 세금을 안 낸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조세피난은 법인세 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홍콩이 조세 피난처 역할을 한다는 서술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세피난은 했다간 이 염정공서에 의해 경을 친다(...). 관세회피는 절세에 더 가깝다.

3. 역사

1950~60년대 영국령 홍콩은 겉보기에는 아시아에서 꽤 발전한 부유한 도시였으나 내부는 총독부 관료부터 하급관리와 민간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썩은 최악의 부패도시였다. 홍콩섬에선 롤스로이스가 택시로 돌아다니고 란콰이퐁이나 완차이 등의 고급 클럽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현판을 내 걸고 식민지의 특권층인 영국인 이주민들이 불야성의 문란한 파티를 벌이며 떼돈을 번 중국인 재벌들은 피난민으로 건너온 본토인 비서들을 하인차럼 부리며 큰소리를 치고 사치를 일삼았다. 그러나 같은 홍콩이지만 바다 건너 구룡반도 중일전쟁, 국공내전 때 피난 온 중국 대륙 광둥성 주민들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인 피난민들이 배 위에서까지 살며 어렵게들 살았고 섬의 사치, 향락, 번영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이때는 MTR도 해저터널도 없어서 페리로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과장보태 섬과 구룡이 다른 나라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섬 사람들은 구룡반도 주민들을 냄새 나는 중국 촌놈이라며 멀리했고 구룡반도 주민들은 섬 주민들을 황금만능주의자라고 비하하는 등 지역감정도 심했다. 이렇게 사회 자체가 불합리했고 부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홍콩인들은 차 값을 낸다는 은어로 뇌물을 표현했다. 어떤 경찰서장은 소위 차 값만으로 평생 먹고살 돈을 벌었다는데 실상은 마작을 하는 도박장을 삥뜯은 거였다.[6]

공공기관의 부정부패도 심각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소방서에선 有水放水, 無水就無水放(유수방수, 무수취무수방)(돈이 있으면 물을 뿌리고,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라며 뒷돈을 안 주면 소방호스를 안 열어주었고 구조작업 등을 했을 때는 수고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구급대는 소위 유류비를 챙겼다.[7] 병원에선 뒷돈을 찔러줘야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해 줄 정도였다. 민간 기업도 채용시 면접관에게 소위 찻값을 건네야 합격되었고 차 값을 내지 않으면 합격해도 발령을 내지 않았으며 학교 선생들도 백인이고 중국계이고 할것 없이 촌지를 챙겼다.

당연히 부패를 잡아야 할 홍콩 경찰이나 사법부도 마찬가지로 부패했으며 판사들은 영국인, 중국인 할거 없이 둘 다 썩었다. 본국인 영국 본토부터 영국병을 앓으며 부패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으니 당연하다.

그러던 중 1973년 영국 출신 홍콩 경찰 간부인 피터 핏츠로이 고드버(Peter Fitzroy Godber, 葛柏(갈박), 1922 ~ )[8]가 당시 430만 홍콩 달러[9]의 횡령을 저지르고 홍콩에서의 출국금지를 무시한 채 영국으로 튄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일제히 시위를 벌이면서 영국 중앙정부와 총독부에 고드버를 당장 홍콩으로 다시 데려오라고 들고 일어났다.

처음엔 고드버를 잡자고 시작한 시위가 더 커지면서 홍콩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마침내는 그간 불합리하던 사회, 억압적인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까지 전이되었다. 이 저항운동은 훗날 홍콩을 아시아 최고(The best of Asia)라는 소리를 듣는 곳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자 근원이 되었다.

결국 여론에 굴복한 영국 중앙정부는 홍콩 총독 산하의 독자적인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를 세웠다.[10] 이후 염정공서의 서슬 시퍼런 부패단속과 지속적인 대국민 홍보로 인해 1980년이 되면 부패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던 피터 고드버는 결국 1974년 4월 영국에서 체포되어 1975년 1월 자로 홍콩으로 송환되었는데 재판 후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출소했다.

부패 제거와 높은 경제자유도를 토대로 홍콩은 더 발전했으며 오늘날엔 다들 잘 알다시피 아시아 최고의 국제도시가 된다.

1973~1974년을 사이에 두고 홍콩의 부패방지 3륜법과 염정공서 등 반부패와 관련된 기본적인 것들이 생겼고 이것들은 영국 식민지빨로 경제적인 번영은 누렸으나 내부는 후진적이었던 당시의 홍콩을 진정한 선진도시로 바꾸었다. 당시 반부패 운동과 함께 홍콩을 청결하게 하는 클린 홍콩 운동까지 벌어졌으며 경찰은 전부 다 해고하고 젊은 경찰관을 새로 채용했다. 반부패 정책에 있어서는 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의 노력도 벌였고 그 노력은 1980년이 되자 결실을 맺었다. 1979년이 되면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홍콩 트램을 대신할 새 도시철도 MTR의 개통, 클린 홍콩 운동 등으로 인프라가 대폭 향상되고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홍콩이 되었다. 이때쯤 홍콩이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고[11] 작은 규모 특성상 부패 자체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당연히 현재 홍콩인들은 그때의 부패상은 상상도 못 한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소리는 아니었다. 경찰 해고는 경찰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로 1977년 10월 28일에 경찰관들이 염정공서 건물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직원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경렴충돌(警廉衝突)이라고 한다. 경찰과 염정공서와의 충돌은 2002년, 2010년에도 있었다.

사실 2020년대에 들어와서도 홍콩 경무처와의 관계는 사실 별로 안 좋다. 무력충돌이야 이제 없지만 수사권 문제로는 허구한 날 충돌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특히나 경제범죄인데 공무원이나 대기업이 조금이라도 엮인 사건일 때는 원칙상 경찰과 염정공서 둘 다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누가 수사할지를 놓고 아주 피터지게 싸운다.

3.1.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관련

염정공서는 1990년대 이후 부패문제가 사라지고 홍콩 반환 후에도 문제는 별반 다를 게 없었으나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자 수사 대상을 공직자 부패에서 정치로 선회했으며 정치로 수사대상을 선회한 댓가를 치르게 되었다. 바로 공권력 남용이다.

2019년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이에 대해 홍콩 경찰은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당시 7월 21일 윈롱역 백색테러[12], 8월 31일 프린스에드워드역에서의 경찰 과잉진압, 경찰서 교도소에서 벌어진 여성 유치인 및 수감자 대한 성고문 의혹, 10월 경 변사체로 발견된 15세 소녀 의문사 사건 등 경찰의 여러 의혹들에 대해 염정공서에 수만 건의 진정이 쏟아졌지만 행정장관이 수장을 임명하고 수사를 지휘하는 염정공서의 특성 상 염정공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오히려 민주파 국회의원들만 탈세 등을 트집잡아 감옥으로 집어넣었는데 이게 바로 수사 대상을 정치로 선회하자 공권력 남용이 일어난 부작용이다. 그러자 시위 참가자들은 2019년 10월 20일 시위에서 염정공서 건물로 쳐들어가 현판을 떼어내고 문짝을 파괴한 뒤 현판을 화형식에 처하는 등 염정공서에 대한 반대 정서가 급속도로 확산된 적도 있으나 10-20대 어린 세대가 주로 그랬고 친중 성향의 중장년층들은 이를 질타했는데 현실적으로 염정공서를 대체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이른바 타운홀 미팅으로 무작위로 뽑힌 150명 시민과의 대화를 했다. 이 때 경찰의 폭동적 시위진압을 조사할 독립 조사위원회 구성에 대해 캐리 람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IPCC(경찰고충처리위원회) 또는 염정공서 즉 ICAC 조사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ICAC 얘기가 나오자마자 참가자 전부가 IPCC건 ICAC건 절대 타협 불가능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정도로 불신이 팽배해졌는데 경찰 공권력 남용에 있어서는 경찰노조의 입김을 배제해야 해서 공직기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 기관이 각 잡고 조사하려고 해도 경찰노조의 집요한 방해로 딴지가 걸리고 행정장관이 커트한다.

염정공서에서 이른바 반부패라고 하는 수사 활동도 결국 홍콩 행정장관의 지휘를 받는다. 결국 홍콩 행정장관 중국공산당이 임명하는 데다 염정공서 수사 방향이 정치권으로 선회되면서 염정공서의 반부패 활동은 사실상 시진핑에 반대하는 정적 숙청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똑같이 행정장관이 임명했던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시절에는 정치는 수사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시진핑이 집권한 후 부쩍 정치 관련 수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

2017년 하워드 람(민주당) 의원 납치 고문 사건 당시에도 하워드 람이 중국 대륙으로 입경해 넘어가는 시점은 아무런 통보가 없었는데 염정공서가 본토 경찰 측에 정보를 통보했다는 의심을 샀다.

2019년 11월 홍콩대학에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홍콩 시민들의 염정공서에 대한 신뢰도는 홍콩 경찰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다음으로 낮았는데 0점부터 10점까지 1점 단위로 평가한 신뢰도 지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경찰은 무려 93%의 응답자가 신뢰도 0점을 던졌고 캐리 람 행정부도 83%가 신뢰도에 0점을 던졌으며 염정공서도 무려 71%가 신뢰도 0점을 던졌다. 2007년 홍콩 반환 10주년 당시까지만 해도 99%의 응답자가 염정공서를 신뢰한다고 했다.

영국령 홍콩 시절에는 홍콩의 염정공서가 반부패 운동에 앞장섰는데 영국 정부가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는 것이라기보단 사회가 워낙 썩어서 어쩔 수 없었다. 민주주의도 말이 좋아 민주주의지 영국의 식민통치는 지극히 권위적이고 인종주의적이었다. 다만 지금보다 언론의 자유 등은 더 잘 보장되었다. 중국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홍콩 섬 내에서 영국인과 거주지조차 분리되어 있었다. 단지 1982년 구의회 설치를 시작으로 1984년 중영공동선언으로 홍콩 반환이 확정되고 1991년 이후 홍콩 반환이 임박해서야 선거권 확대 등을 해 줬을 뿐이다. 막말로 이때 영국이 홍콩을 반환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영국령이었으면 되려 인종주의식 통치가 현재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으론 영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민주적 자치 체제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중국이 방해해서[13] 반환이 확정된 뒤에야 민주주의 도입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홍콩 총독을 역임한 데이비드 윌슨이 친중파였고[14] 마지막 영국령 홍콩 총독 크리스토퍼 패튼이 현재 홍콩 입법회의 전신인 입법국 완전 직선화와 직능선거구 유권자 범위 확대 등을 실시했지만 중국에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반환 직후 중국 정부에선 입법국을 강제 해산했고 이 과정에서 저항한 민주당 우치와이 의원 등은 체포되었다.

염정공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떠나서 진짜로 부패가 너무 심했는지라 반부패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중국에 반환된 홍콩특별행정구 설립 이후에도 이어졌다. 수사 대상이 정치로 확대되기 전까진 공권력 남용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1997년 홍콩 반환으로부터 10년 후인 2007년에도 99%의 홍콩인이 염정공서를 신뢰한다고 답할 정도로 문제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수사 범위에서 정치를 제외했다. 당시 행정장관이었던 도널드 창이 친중파라고는 해도 확실한 온건 성향이었고[15] 중국 국가주석도 2008년 티베트 봉기를 빼면 조용히 지나간 후진타오였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2012년 이후 수사 방향을 정치로 선회하면서 신뢰도가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시진핑이 집권한 후인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이른바 반부패라는 것 자체에 의구심[16]을 민주파 일각에서 가지기 시작했고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반정부 민주파/본토파의 염정공서에 대한 불신이 폭발했다.

즉, 중국에 반환되었다고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불신한 게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존재감이 없어 그렇지 전임 주석들인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에는 적어도 홍콩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후진타오 시절에 홍콩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적은 있었으나 시진핑 집권 후만큼 반감이 있진 않았다.

사실 독재 체제에서 반부패 기관은 정적 숙청수단으로도 자주 쓰인다.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만 해도 리콴유가 정적을 찍어내는 수단으로 자주 써 왔다. 중국 본토에서 시진핑이 벌인 반부패 운동도 실상은 정적 숙청이며 한국에서는 박정희 5.16 군사정변 직후 이정재나 임화수 등 정치깡패를 소탕하고 국토건설단으로 내몰아 버리는 등 사회악 해소책을 내놓았고 더 나아가 전두환은 아예 대놓고 정의사회구현(...)을 외치며 실제로는 그 악명높은 삼청교육대[17]까지 운영했 단 걸 생각해 보면 된다. 이때 야당 인사 중 한 명인 김종필을 부패 혐의를 뒤집어 씌워 숙청하기도 했다.

반론을 제기하자면 영국령 홍콩 초중반 부정부패는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 1960년대 1970년대를 겪어본 홍콩 노인들이나 중장년층들은 어린 세대에게 '니들이 그때 얼마나 사회가 모두가 썩어 빠졌는지 겪어봤냐, 차값 안내면 면접도 합격 못 하고, 경찰은 발령도 안 내 주고 병원 가도 의사가 진료도 안 해 주고 죽든 말든 놔뒀다. 그거 겪어는 보고 배부른 소리 하냐'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유감스럽게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위의 차값 어쩌구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썩어빠진 부패의 일면이었다. 저때 위에서 언급했듯 구급대가 소위 유류비를 걷고 소방관들은 물세를 걷던 그런 시절이었다. 2010년대부터 홍콩에 대해 불만을 갖는 10-20대 어린 세대는 영국령 시절을 겪어 보지도 않았다. 괜히 영국령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닌 30-40대가 중도층을 형성하며 어린 세대의 과격함에 제지를 건 게 아니다. 영국령 시절 초중반에는 이런저런 사회 문제가 더 심했던 게 사실이며 빈부격차는 더 심했고 진짜로 범죄율도 높았다. 1980년대가 되어야 부패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왜 나왔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영국령 홍콩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저런 반정부 폭동도 많았고 빈부격차도 심했으며 인종주의 정책으로 한족은 돈 많아도 2차대전 이전까진 센트럴이나 미드레벨 등에 거주조차 못 하게 막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 버스 홍콩 트램, 스타페리 2층 좌석은 백인만 앉을 수 있었으며 공직자 승진 상한선도 중국인은 국장급도 못 갔고 영국인만 고위직을 다 해먹었다.[18] 이러니 공무원들이 의욕을 상실하고 너도나도 돈이나 한몫 챙기려 든 것이 당연했다. 홍콩 경찰만 해도 1960년대에 경찰서장까지만 중국인이 갈 수 있어 서장 자리에 가면 차값을 받아먹으며 이래저래 챙겼고 이래서 문제가 생겨 도피한 사람이 증지위의 부친 증계영이었다.

1980년대 들어 홍콩의 중국 반환이 확정되고 나서야 영국이 민주주의를 도입했을 뿐이다. 당장 영국은 1970년대에 최초로 홍콩 지하철과 홍함-완차이 크로스하버 해저터널을 놓을 때만 해도 이 이상으로 구룡반도 홍콩섬을 육로로 잇지 않는다고 선언했는데 그 저의 자체가 중국인이 사는 구룡과 백인이 사는 섬을 분리하려고 한 것이었다. 만일 1985년 홍콩 반환 협정이 체결되지 않고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다면 이런 생색내기도 없었을 것이다. 즉 이 시절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의 환상이나 오해와 달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절대 유토피아가 아니었고 영국은 인종주의적 통치로 대다수 중국인을 찍어 누르기 바빴으며 1950년대 1960년대에는 영국인이고 중국인이고 싹 다 부패했다. 당장 이 기구의 설립 계기를 제공한 피터 고드버부터가 영국인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국이 홍콩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할 때마다 중국이 방해한 것, 영국이 도입한 민주주의를 중국이 훼손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염정공서가 2010년대 이후 정치로 방향을 바꾸면서 공권력 남용 문제가 터졌고 행정장관이 지휘하는 특성상 시위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미온적일 수밖에 없는지라 이러한 것들에 대해 보완책을 마련하는 등 대안을 만들어 공권력 남용을 방지해야 하는 건 맞지만 무조건 대책 없이 염정공서가 나쁘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미 부정부패가 너무 만성화되어 부정부패 척결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진핑의 반부패 구호는 말뿐인 데다 정적 찍어내기 수단으로나 쓰이는 중국 대륙과는 달리 홍콩 정부는 영국령 시절 실제로 부정부패를 근절했기 때문에 시진핑의 반부패 어쩌구와는 다른 얘기다.

홍콩국가보안법 제정 이후에는 민주파, 본토파 잡기 위한 실적 기구로도 변질되었다.

4. 기타

부패 방지 확산을 위한 포스터와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으며 TVB와 합작해서 드라마도 제작하는 일도 하고 있는데 바로 1994년부터 2016년까지 2년마다 7개의 시리즈로 제작한 염정행동 시리즈가 그것이다.

2003년 7월에 홍콩 연예계의 고위 인사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수사했지만 아무 성과도 못 냈고 2010년도엔 前 TVB 사장 스티브 찬(陳志雲)을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에 넘겼지만 2013년 무죄 판결이 나와서 결과적으로 삽질이 된 흑역사가 존재한다.

2007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콩인의 99%가 ICAC를 신뢰한다고 했다.

21세기 들어 수사 대상이 경제·행정에서 정치 쪽으로 선회함과 동시에 여러 삽질과 피의자 조사수법 등이 비판을 많이 받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예전만큼의 지지를 못 얻는 듯하다.

2016년부터 다시 옛 명성을 되찾았는데 2012년부터 시작한 썬 홍 카이 그룹[19]이 연루된 전직 행정장관 도널드 창의 전횡 사건 수사 결과 마침내 2017년 2월 도널드 창을 감옥에 쳐넣는데 성공했다. 사실상 미니국가인 홍콩의 특성상 전직 행정수반을 순전히 전횡 혐의로 감옥에 보낸 것이다.

위의 내용들도 그렇고 2019년의 모습도 그렇고 여기까지만 보면 염정공서가 실패했다는 오해를 할 만하지만[20] 썩어도 준치라고 홍콩은 여전히 부패 문제에 한해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청렴한 곳 중 하나다.[21] 무엇보다 홍콩은 1960년대에 엄청나게 부패한 곳이었다. 그러한 부패 문제를 누가 해결했나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다만 주요 수사 대상이 정치권으로 선회되어 정적 축출용으로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부패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안이다.

한국에서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설치에 어느 정도 참고된 곳이다.

2023년 개봉한 양조위, 곽부성 주연의 창고영화 풍재기시가 1977년 경렴충돌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역시 2023년 개봉한 1980년대에서 1990년까지 배경의 영화 골드핑거에서 유덕화가 연기한 수사관 류치웬 역시 염정공서 소속이다. 극중에서는 양조위가 연기한 부패 기업 카르멘 그룹의 수장 청이옌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다.


[1] 홍콩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총독으로, 염정공서 설립 외에도 크로스 하버 터널과 MTR 쿤통선, 췬완선 개통으로 홍콩섬 구룡반도 간 이동 편의 개선 및 교통 편의 확보, 신계 일부 개발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2] 주로 횡령죄 및 사문서 위조, 탈세 등. 도박사들이 걸려 있는 프로축구 승부조작도 염정공서가 수사하며 돈 세탁도 주요 수사 대상이다. [3] 무려 홍콩 정부의 주택국으로부터 거주증명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확실한 주거지가 있다면 부동산 사무실에 요청하면 해 준다만 절차가 꽤나 번거롭고 귀찮다. [4] 앞의 셋은 워낙 국제적인 영업망이 넓기 때문에 외국인 계좌 개설을 안 받으면 영업을 할 수 없는 은행들이다. [5] 이웃 마카오는 금융 관계법이 허술해 돈 세탁 및 조세 피난처로 각광받는데 그 중 중국 본토의 공산당원들도 주요 고객이다. [6] 물론 민간에서 돈을 뜯기도 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겪었던 어느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매 절기( 오월절, 중추절, 동지 등)마다 돈을 뜯었다고(...). [7] 이 시기는 홍콩 소방처가 현대화되기 전으로 이런 문제는 1979년 소방훈련학교 건립, 영국에서의 간부단 파견, 해외 유학, 젊고 유능한 신임 대원의 대규모 채용 등으로 질이 향상되어 없어졌다. [8] 인터넷에서는 그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100세가 넘는다. [9] 지금 가치로 따지면 한국 돈으로 약 60억 정도 되는 금액이다. [10] 이 기구 수장은 심지어 영국 왕/여왕의 통제도 받지 않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했다! [11] 동시기 한국보다는 훨씬 잘 살긴 했으나 선진국 진입은 1979년에서 1980년 사이의 일이다. 한국은 대체로 2000년대부터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평가된다. [12] 시위대 및 민주파가 검은색 옷을 입고 나오고 친중파는 흰색 옷을 입고 나와서 친중파가 민주파를 공격하는 행동은 곧 백색테러가 되었다. 홍콩 관광을 갈 일이 있다면 검은색 옷이나 흰색 옷은 준비하지 말고 파란색 옷이나 초록색 옷을 준비해 갈 것을 추천하기도 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어느새 잊혀진 일이 되었다.. [13] 영국령 시절부터 중국이 홍콩에 정보원들을 파견해 공작 활동을 벌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67폭동도 이런 공작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왕립 홍콩 경찰에 영국 MI5가 파견나와 근무했을 정도다. [14] 실제로 친중파라는 점 때문에 총독을 연임하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15] 그의 임기 도중에 대규모 정치 사건사고가 없기도 했다. 과묵한 성격 탓에 성향 논란을 만들지 않은 면도 있고... [16] 2012년 집권한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반부패 명분으로 중국에서 대숙청 2019년 지금도 하고 있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반부패와 질서를 명목으로 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1인 독재를 익히 아는 홍콩인들이 반부패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17]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4일까지 존속. [18] 1988년 홍콩 영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2에서도 경무처장 등 경찰 고위직이 성룡이 일하는 경찰서에 쳐들어 오는데 모두 영국인들이다. [19] 원래 동남아시아 중국계 자본이었는데 본거지는 사실상 홍콩이 된 지 오래다. 완차이에 썬홍카이 빌딩을 보유 중이며 그 외 여러 쇼핑몰이 이 회사가 개발한 곳들이다. [20] 애초에 실제로 부패를 해결해서 도입목표를 달성했던 조직에 실패 운운하는것도 웃기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는 후술할 한국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염정공서를 모티브로 했고 이 염정공서가 성공 사례다 보니 염정공서가 실패했다는 식으로 모 특정 정당 지지세력에게 가짜 뉴스를 교육한 내용이 퍼진 탓이 크다. [21] 적어도 공무원들이 뒷돈 받아먹거나 금융당국이 돈세탁 등을 눈감아 주는 등의 짓은 안 한다는 소리다. 주기적으로 염정공서에서 감찰하는 데다 약간이라도 수상하면 바로 소환해서 조사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대로 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