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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2 15:48:22

라나발로나 1세

1. 개요2. 생애3. 어록4. 기타


Ranavalona I(1778 ~ 1861)

파일:라나발로나1세.jpg
[1]

1. 개요

오늘날의 마다가스카르 지역에 있던 메리나 왕국의 여왕. 재위기간 동안 왕국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 폭군 중의 폭군으로 꼽히는 여왕이다. 말 그대로 타노스의 현실판.[2] 특유의 폭압적이고 독단적인 통치로 인해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 생애

1778년 아바드라노(Avadrano) 왕국[3]의 안드리안자피(Andrianjafy) 왕의 조카로 태어났으며[4] 원래 메리나 국왕 라다마 1세(Radama I)의 15살 연상의 왕비였고 라다마 1세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 라다마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그녀가 남편을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5] 본명은 라마보(Ramavo)였지만 "접혀진/치워진"이란 뜻의 라나발로나를 왕명(王名)으로 삼았다.

1828년 8월 11일 여왕으로 즉위한 후 장교 안드리아미하자(Andriamihaja)를 총리 겸 애인으로 삼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다마 2세를 낳았으나[6] 1831년 안드리아미하자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1833년 라이니하로(Rainiharo)를 정식 남편 겸 총리로 삼았고 19년 후 그가 죽자 라이니조하리(Rainijohary)와 또 재혼했는데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 라다마 1세의 가까운 친척들[7]을 살해했다.

재위 기간 동안 동안 무역 관계 등 서구와의 관계를 거의 완전히 끊고 서구 열강이 배후에 있는 기독교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녀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일화에 따르면 15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궁전 근처에 있는 바위로 가득 찬 협곡 150피트(약 45.7m) 상공에 밧줄로 매달고 그들에게 개종하라고 했는데 이들이 개종을 거부하자 밧줄을 끊어 이들을 모두 공개 처형했다고 한다.[8]

마다가스카르 영토 확장과 자신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전을 벌여 정복한 속주마다 초목과 식량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는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는 대량으로 처형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군인들로 하어금 학살 후 정복한 속주에 있던 귀중품들을 약탈하게 해 자신의 재산을 축적했다.

특히 탄게나(tangena)라는 관목의 열매에서 독을 추출하고 그 독을 세 조각의 닭 껍질과 함께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먹인 후 억지로 물을 먹이고 닭 껍질을 모두 토해내면 무죄, 모두 토해내지 않거나 죽으면 유죄로 판단하는 마다가스카르의 전통적 관행이었던 '탄게나 시련'[9]을 이전보다 더욱 확장시켜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평민이나 노예뿐만 아니라 궁정의 사람들에게도 적용했는데 이로 인해 그녀가 집권할 때 적게 잡아도 33년 동안 평균 3천 명, 많게는 20~40만 명이 '탄게나 시련'으로 죽었으며 심지어 1838년 한 해에만 메리나 왕국의 인구의 1/5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백성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엄청나게 죽어나갔는데 특히 마다가스카르 섬의 해안 지역에 만연했던 말라리아로 인해 죽는 군인들이 많았다.

이렇듯 그녀의 학정이 너무 가혹했던 나머지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1833년부터 1839년까지 단 6년 만에 외부의 침략 하나 없이 500만 명에서 250만 명, 즉 절반으로 줄었으며 1829년부터 1842년까지 수도 안타나나리보의 인구는 75만 명에서 13만 명으로 급락했다. 참고로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그녀의 사망으로부터 약 한 세기 후인 1960년에야 겨우 500만 명을 넘겼다. 즉 마다가스카르는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는 데 무려 120년 이상이 걸렸다는 이야기. 웬만한 국가라면 사회 시스템 붕괴와 재정 파탄으로 멸망하고도 남을 수준이다. 어떻게 보면 라나발로나 1세의 행각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너무 공포에 질려서 쿠데타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일수도.[10]

심지어 학살 기간 동안 태어난 신생아 수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학살 피해자는 250만 명보다 많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1] 이런 악행으로 인해 그녀는 서양인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여자'[12], '여자 칼리굴라[13]'라는 멸칭을 얻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가 마다가스카르를 서양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립 정책 실시와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이었다는 재평가도 있으며 그녀가 집권할 동안 무분별한 학살만 한 것은 아니다. 영국 선교사들은 교육과 산업화에만 몰두하는 한 메리나 왕국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고 프랑스인에게 의뢰해 총, 대포를 제공한 후 제조법을 배우게 하거나 야금술, 화학 산업을 받아들이는 등 수많은 서구의 기술 혁신들을 받아들였으며 영어- 말라가시어 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어학 학교도 세워 훗날에 마다가스카르 외교에 중대한 역할을 할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고 메리나 왕국의 온 유럽인들에게 정지적으로 전통 춤을 보여주거나 전통 건축과 음악을 부흥시키는 업적도 남겼다. 때문에 마다가스카르에서는 그녀의 자립 정책을 고평가하며 그녀가 '위대한 주권자이자 애국심과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14]

이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라나발로나 1세는 무려 33년이나 권력과 부귀영화를 잃지 않았다가 1861년 8월 16일 향년 83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잠을 자다가 평온하게 사망하면서 33년 5일이라는 즉위 기간이 끝났다. 그녀의 장례식 중 화약통에 불꽃이 떨어져 일어난 폭발과 화재로 많은 구경꾼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녀의 사후 그녀의 아들인 라다마 2세가 즉위했는데 라다마 2세는 어머니의 고립주의 정책과 기독교 박해를 거부하고 서방권에 개방 정책을 펼치다가 이에 반발한 신하들과 군인들의 쿠데타로 1863년 군인들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한 1897년에 마다가스카르를 위협하고 왕실의 힘에 대한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도굴당한 후[15]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2008년에야 겨우 복원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어 위키백과의 '마다가스카르의 라나발로나 1세' 항목. 라나발로나 1세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3. 어록

나는 내 조상의 관습에 대해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ny fomban-drazako tsy mba mahamenatra ahy na mampatahotra ahy!)
그녀의 폭정에 대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항의에 라나발로나 1세가 남긴 말.
그들(기독교인)이 (기독교인들의 조국의 살아있는 상징으로서)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그들을 버리며, 그들이 나를 버렸으니 나도 그들을 버리노라!(Miala amiko ka mba ialako, mahafoy ahy ka mba foiko!)
라나발로나 1세가 1849년 한 연설 중.
영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모든 유럽인에게, 여러분이 지혜와 지식을 가르쳐 조국에 행한 선한 일을 인정하여 여러분에게 모든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전임자인 라다마에게 어떤 사람인지 목격할 수 있었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도 당신은 계속해서 내 신하들의 이익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모든 관습을 따를 수 있음을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나는 당신의 습관을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 신민 중 일부가 내 조상인 열두 대왕이 정한 규칙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면 나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 내가 받아들인 모든 생각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사람들이 와서 바꾸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에게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는 것은 당신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조상의 풍습을 다루는 것은 헛된 일이므로 나는 전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또한 종교와 관련하여 일요일이든 주중이든 세례와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유럽인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남겨 둡니다.
라나발로나 1세가 마다가스카르 내에 있던 유럽인들에게 전한 편지[16]

4. 기타



[1]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라 사후인 1905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얼굴 확대 버전(흑백) [2] 죽인 사람 수, 인구 대비 학살 비율이 폴 포트보다 높다. 그나마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정도가 인구 대비 인명손실 비율에서 라나발로나에 비견되는데(이쪽은 전쟁도 없이 단 10년 만에 적도 기니 인구의 50~75%를 없애버렸다) 이쪽은 그가 집권할 당시 모국의 인구가 30만명 안팎 수준이라서 다소 논외로 해야 한다. 도봉구 대통령 응게마 [3] 메리나 왕국이 4분할되었을 때 존재하던 왕국 중 하나로, 오늘날 마다가스카르의 중부 고원에 있었다. [4] ?~1787, 조카만큼은 아니었어도 만만찮은 폭군이었다고 한다. [5] 이에 대해서는 라나발로나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다. [6] 라다마 2세의 아버지는 라다마 1세로 공표되었지만 라다마 1세가 1828년 7월 죽었는데 라다마 2세는 1829년 9월 태어났다. 14개월 전후의 임신 기간을 갖는 동물은 기린이나 범고래 정도뿐이므로 라나발로나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애초에 본인이 낳은 아이가 맞는지도 불확실하다. 맞다면 라나발로나는 51세 라다마를 낳았다는 소리가 된다. [7] 라다마 1세의 어머니와 라다마 1세의 또 다른 두 아내, 라다마 1세가 가장 아끼던 조카와 그 조카의 아버지&딸 [8] 오늘날 이 자리에는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9] 거짓말탐지기의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죄를 확신하면 거침없이 삼켜 독이 위장에 빠르게 작용해 독이 퍼지기 전에 토하게 되고 유죄일 경우 불안감에 주저하며 삼키기 때문에 독이 늦게 퍼져 구토해내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보인다. [10]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에서도 쿠데타가 (본인 주장대로라면) 20차례나 있었다는 것과 대조된다. 물론 정황상 상당수가 정적 탄압을 위해 조작한 쿠데타 음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11] 마다가스카르는 2020년에는 출산율이 3.92로 최빈국치고는 낮은 편이지만 1960년에는 출산율이 오늘날의 니제르보다도 높은 무려 7.3명이었다고 한다. [12] 세계사를 통틀어서 그녀와 비교할 만한 수준의 악녀 킬링필드의 숨겨진 핵심 인물인 이엥 티릿 정도밖에 없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인간성이 워낙 막장이라 그렇지 악행의 스케일은 라나발로나와 티릿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13] 다만 칼리굴라에 있어서도 이 별명이 매우 억울할 수밖에 없는데 대중들에게 알려진 칼리굴라의 만행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슷하게 절대다수가 당대의 찌라시에 불과하던 게 사실처럼 유포된 것으로 결론났다. 참고로 칼리굴라와 네로 등 폭군으로 알려진 로마 황제에 의해 죽은 사람의 수는 간접 연루된 사람까지 합쳐도 수천명에 불과하며 라나발로나의 250만 명과 비교할 수치가 아니다. [14] 옛 중국 농민들이 서태후에 대해 가졌던 인식과도 유사하다. [15] 그녀의 무덤에는 진주 같은 보석과 왕관이 부장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16] 그녀가 문맹이었으므로 그녀가 구술하는 것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이 쓰는 방식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17]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도 끔찍한 굶주림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국민들의 해외 이주로 70여년 동안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 [18] 전염병도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재해에 들어간다. 실제로 흑사병 당시 유럽의 사망률이 라나발로나 1세 시기 메리나 왕국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19] 다만 영토 확장을 위한 내전으로 인구를 줄인 라나발로나 1세와는 달리 응게마는 그 어떠한 전란도 없는 순수 폭정만으로 저 정도 인명 손실을 입혔고, 더구나 19세기 중반에 활동하여 사진은커녕 생전에 그린 초상화도 남아있지 않은 머나먼 옛날 인물인 라나발로나와 달리 응게마는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하여 컬러 영상 자료도 남아있는 비교적 최근에 활동한 인물이란 것을 감안하면 관점에 따라서는 응게마가 라나발로나보다 더 심각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덤으로 라나발로나는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지만 응게마는 중증 정신이상자였고, 후술하듯 처참할 정도로 죗값을 제대로 치른 응게마와는 정반대로 라나발로나는 인구의 절반을 죽인 후에도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83세에 사망했으며, 순수 인명 살상규모로 따지자면 라나발로나는 응게마는 말할 것도 없고 폴 포트도 능가한다. 라나발로나 2승, 응게마 2승, 무승부 1개 [20] 이는 상술한 응게마도 마찬가지. [21] 참고로 마다가스카르에는 19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로마식 알파벳이 도입되었고 이전에는 14세기부터 아랍 문자 기반의 소라베(Sorabe)라는 문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