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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루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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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Luo_Ruiqing.jpg
제3대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정체 羅瑞卿
간체 罗瑞卿
한국식 독음 나서경
영문 Luo Ruiqing
출생 1906년 5월 31일 청나라 쓰촨성 난충현
사망 1978년 8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 하이델베르크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우한 중앙군사정치학교[1] 재학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5. 문화대혁명의 시련2.6. 말년
3. 가족관계4. 저서5.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192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중국공농홍군의 군 간부로서 국민혁명군의 초공작전에 맞서 싸웠고 대장정에 참가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 시기 팔로군 장성 중 한명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안부장,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 비서장,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했고 1955년 대장 칭호를 수여받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렸으나 중상에 그쳤고 문화대혁명 이후 서독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뤄루이칭은 1906년 5월 31일 쓰촨성 난충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고 1920년 난충 북구 대림사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뤄루이칭은 난중 중학교에 진학하여 서구의 진보적 사상을 수용하고 애국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22년 학교 교사의 부당한 체벌에 맞서 7일간 동맹 휴업을 단행해 학교 측에 구타당한 학생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23년 봄, 뤄루이칭은 난충현 고등학교 입학 허가증을 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학업을 접고 견습공이 되어야 했다.

1924년, 뤄루이칭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난충현 고등학교에 재입학했다. 그는 '신청년(新青年)', '신촉보(新蜀报)' 등 공산주의 서적과 진보적 신문을 읽고 학생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해 5월, 난충 군벌 하광렬(何光烈)의 소작 징수 반대투쟁에 참가하여 동창들을 인솔해 징수위원인 진동회(秦同淮)를 체포했다.

1925년 3월 12일, 뤄루이칭은 거리로 나가 쑨원의 <연러(联俄), 연공(联共), 부조공농(扶助农工)> 3대 정책을 선전하고 임백과(任白戈)와 함께 연극 <손중산의 사망>을 공연했다. 5월 30일, 그는 학생회의 이름으로 조직된 '상하이 5.30 참사 외교후원회'에 참석해 5.30 운동을 후원하는 한편 영국,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혁명외교를 응원하는 내용의 '속달 공문'을 발표했다.

1926년 7월, 뤄루이칭은 청두로 가서 실업전문학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모자라 입학하지 못했다. 그해 10월, 그는 충칭에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쓰촨성 위원회에 근무하던 임백방(任伯芳)을 만나 그와 함께 국공합작으로 설립된 우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27년 2월 1일 항푸군사학교 6기 입대생 총대 정치 제1대대 제2대대에 편성되어 천보쥔(陳伯鈞) 등 동창들과 함께했다. 그러던 중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자, 왕징웨이가 이끄는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에게 현상금을 걸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북벌을 완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뤄루이칭은 중앙 독립사단 제1연대에 편입되어 하두인(夏斗寅) 토벌전과 쓰촨 군벌 양선(楊森) 토벌전에 참가했다.

1927년 7월 중하순, 항푸군 우한분교는 제2방면 군관교도단으로 개편되어 동쪽으로 진군했다. 뤄루이칭은 공산당원 예융(葉鏞)의 부대에 편입되어 제2연대장 부반장이 되었다. 그러던 1927년 8월 2일, 난창에 주둔하고 있던 상당수의 부대가 난창 폭동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파쿠이는 교도단의 반란을 우려해 8월 4일 구강에서 공산당 인사들을 군 내에서 숙청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공산단 교도단 책임자 천이(陳毅)는 공산당원들을 소집해 이미 정체가 드러난 당원들을 피신시키거나 난창으로 가서 봉기군과 합세하거나 귀향하여 농민운동에 종사하기로 결정했다. 뤄루이칭은 십여 위안의 여비를 받고 우한으로 돌아갔으나8월 중순부터 9월 하산까지 열병에 걸려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뤄루이칭은 퇴원 후 우한에서 백색테러가 갈수록 심해지는 걸 목격하고 1928년 1월 우한을 떠나 후난성 창더(常德)로 향했다. 1928년 2월 리저우(澧州(에 갔을 때, 그는 임백방의 소개로 루디핑이 지휘하는 제2군 교도사 정치부 선전과에서 대위 선전원으로 근무했다. 1928년 6월 부대를 떠난 그는 그해 8월 임백방과 함께 상하이로 갔고 10월에 임백방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29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상악(湘鄂) 서소(西蘇)구 홍군과 합류하러 갔다가 교통이 끊기는 바람에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그후 그는 민시(閩西)에서 홍4군에 근무했고 민시 상항교양유격대(上杭蛟洋游擊隊)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해 5월, 상항교양유격대는 홍 59여대로 개편되었고, 뤄루이칭은 참모장을 맡았으며 다음 달에는 홍4군 제4종대 참모처 주임을 맡았다. 9월에는 홍4종대가 항주를 공격하는 종대에 참가했으며 제2종대 5지대로 배속되어 당 대표직을 맡았다. 10월에는 홍4군 주력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2종대 정치부 홍보과장으로 이동했다. 12월엔 구톈(古田)회의에 참석했고 이듬해 제2종대 정치 부주임에 부임했다.

1930년 부대 개편으로 뤄루이칭이 소속된 군대는 홍4군 11사단으로 편입되었다. 뤄루이칭은 당 대표를 거쳐 정치위원에 진급했다. 이후 지안(吉安)과 샤장(峽江)을 공략하기 위한 전투를 지휘했으며 12월에는 국민혁명군의 1차 초공작전에 맞서 용강 전투에서 적을 깊숙히 유인해 국민혁명군 18사단장 장후이짠(張輝瓚)을 생포하고 2개 여단을 섬멸했다. 이듬해, 뤄루이칭이 이끄는 군대는 동북쪽으로 진군해 탄다오위안(譚道源)의 50사단을 추격하여 3천여 명을 사살했다. 그해 3월에는 홍1군 주력부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5월 16일에는 홍군 11사단과 함께 관음애(觀音崖) 소구를 점령하였고 제28사단과 제 47사단의 주력과 함께 적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연말까지 병상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그해 12월엔 홍군 정치부 선전장관과 제4군 학교 정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32년 3월 홍1군단의 편제가 실시되었고, 뤄루이칭은 홍4군 정치위원을 맡았다. 다음달엔 장저우(漳州) 전투에 참가하여 장저우 국민혁명군 제49사단 섬멸에 기여했다. 5월엔 장시성 간난(贛南) 중앙 소구에 배치되었고 7월 10일에 홍4군을 지휘하여 난슝(南雄) 전투와 수구(水口) 전투에 참가해 광둥의 국민혁명군 15개 연대를 차례로 격파했다. 그해 8월에는 홍4군 주공을 맡아 국민혁명군 27사단을 낙안(樂安), 이황(宜黃)에서 공격해 5천여 명의 포로를 획득했고, 10월엔 건려태(建黎泰)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다음달엔 젠닝(建寧), 리촨(黎川), 타이닝(泰寧)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1933년, 뤄루이칭은 홍1군 보위국장으로 부임해 국민혁명군의 제4차 초공작전에 맞서 싸웠다. 그해 2월, 뤄루이칭과 서언강(徐彥剛)은 홍7사단을 이끌고 황피(黃陂) 전투에 참여해 국민혁명군 52사단을 섬멸했다. 3월 21일, 그는 초태강(草台岡) 전투에 참가해 국민혁명군 제11사단을 격파했다. 1934년 1월 15일, 뤄루이칭은 서금으로 가서 중화 소비에트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이후 홍1군단을 따라 삼계둑(三溪圩), 광창(廣昌), 온방(溫坊) 전투에 참여했다.

1934년 10월, 뤄루이칭은 대장정에 참여해 1군단 보위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1935년에 오강을 도하하고 그해 1월 15일에 열린 준이회의에서 쭌이 외곽 경계 근무를 수행했다. 그후 5월 19일에 중앙 홍군 선발대 참모장으로 배속되어 다량산(大涼山) 지역을 통과하고 다두강(大渡河) 도하 작전에 참가했다. 그후 금산(金山)과 설산(雪山)을 넘어 마오얼가이(毛兒蓋)를 지나 반우제(達班佑)에 도착했다. 9월 20일, 홍1군과 군위 종대는 산시 간지대로 편제되었고, 뤄루이칭은 제2종대 정치부주임으로 부임했다가 머지 않아 홍1방면군 보위국장으로 전근되어 직라진(直羅鎮)전투에 참가했다.

2.2. 중일전쟁 시기

파일:Yang_Shangkun1936-2.jpg
1936년 2월 홍1군, 홍15군단 간부들. 앞줄 왼쪽부터 왕서우다오(王首道), 양상쿤, 녜룽전, 쉬햐이둥(徐海東). 뒷줄 왼쪽부터 뤄루이칭, 청쯔화(程子華), 첸광(陳光), 덩샤오핑.

뤄루이칭은 1936년 2월부터 5월까지 홍1방면군의 동정항일에 참가했다가 옌안으로 돌아가 항일 홍군대학 교육장을 맡았고 서안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대표단으로서 서안에 파견된 저우언라이를 수행했다. 1937년, 뤄루이칭은 항일 홍군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항일 군사정치대학 부총장에 부임했다. 그해 2월에는 우한에 가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열린 정치공작회의에 팔로군을 대표해 참석했다. 이후 그는 수년간 항일군사정치대학 총장을 맡아 중국 공산당 간부를 양성했다.

1939년 7월, 뤄루이칭은 중화인민대학과 북부 산시공립학교의 교수와 학생 수천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일본군의 봉쇄망을 뚫고 북부 중국 항일기지에 들어갔다. 1940년 2월 항일대학 총교가 산북에서 산시로 이전한 후, 뤄루이칭은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야전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그해 5월, 그는 팔로군 야전 정치부 주임을 맡아 태행산 전투와 백단대전에 참가했고 화북 항일 유격전을 지도했다. 또한 그는 이 시기 <현재의 저치사업 건설상의 몇몇 문제>라는 제목의 저서를 집필해 항일 유격전 정치공작의 경험을 총결산하고 일련의 정치공작 강화 방법을 제시했다.

1940년 8월, 뤄루이칭은 진지사업 순찰단을 조직해 진차지 군사지역으로 가서 부대 정비를 도왔고 1941년 4월에 화북군위 분회위원에 임명되었다. 1942년 5월 24일, 그는 팔로군 본부와 북방국 기관 조직에 참여하여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부대로 복귀했다. 1943년 초, 뤄루이칭은 명령으로 돌아가 옌안으로 돌아갔고 1944년 초 정풍운동에 참가했으며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했다. 1945년 7월, 뤄루이칭은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해 후보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5년 8월 18일,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는 중앙국 시찰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뤄루이칭은 진차지 중앙국 부서기, 진차지 부정치위원 겸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장자커우(張家口)로 이동하여 녜룽전 등과 함께 쑤이둥(織綏東)전투에 참여했다. 10월에 새로 구성된 진차지 제2여전군 정치위원에 부임했으며 다음달엔 진차지 중앙분국 제2서기, 제2정치위원 겸 정치부주임을 맡았으며 곧 청더(承德)로 가서 구베이커우(古北口)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6년 1월, 국민당, 공산당 쌍방이 군사충돌 중지에 합의했고 국민당-공산당-미국 3자 군사 협의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이때 뤄루이칭은 중공방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가을 국공내전이 발발하였고, 국민혁명군이 중원 해방구를 공격했다. 7월, 뤄루이칭은 녜룽전을 도와 다퉁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1947년 진차지 군구부대를 조직하여 바오난(保南) 전역을 지휘했고 6월 2일엔 진차지 야전군 제1정치위원으로 진급했으며, 뒤이어 청창(青滄) 전역에 참전했고 보북(保北) 전역을 지휘해 서수와 고성을 공략했다. 9월, 뤄루이칭은 대청-하북 전투를 지휘해 국민혁명군 제16군단을 섬멸했다. 11월, 그는 양더즈(楊得志)와 함께 석가장(石家莊) 전투에 참가하여 석가장에 주둔한 국민혁명군을 격파했다.

1948년 1월, 뤄루이칭은 양더즈와 함께 진차지 야전군을 지휘하여 국민혁명군 32사단을 격파하고 35군단장 노영린(魯英麟)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1948년 5월, 뤄루이칭은 화북군구 정치부주임 겸 제2병단 제1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후 그는 부대를 이끌고 구북구, 창리, 석문진, 장수 등지에서 3만여 명의 국민혁명군을 섬멸했고 12월에 공산군 100만여 명이 국민혁명군 60만명과 격돌한 핑진전역(平津戰役)에 참가해 국민혁명군 제35군단 섬멸에 기여했다.

1949년 1월, 뤄루이칭은 제2병단을 거느리고 베이징 북부로 진입해 베이징을 포위했다. 그후 화북군구 정치부 주임겸 19병단 정치위원에 부임했다. 같은 해 3월,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기 2중 전회식에 참석했고 태원 전선 사령부 부정치위원과 종전위 제1 부서기 및 태원군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태원 전투를 지휘했다. 4월 하순, 그는 주사제(周士第)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의 공세를 지원해 인민해방군이 타이위안 산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그후 6월에 태원을 떠나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중앙군사위 공안부장에 임명되었고, 9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파일:MaoZedong_and_LuoRuiqing.jpg
1953년경 뤄루이칭과 마오쩌둥.

1949년 10월 1일, 뤄루이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석했고 뒤이어 제1차 전국 공안공작회의를 주재하여 공안기관의 조직 업무 및 방침을 토론했다. 이후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정무위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위원, 정무원 정치법률위원회 부주임, 정법판공실 주임, 중앙인민정부 공안부장에 잇달아 선임되었으며, 다음달에는 베이지시 공안국장을 겸임했다. 1951년 7월, 공안부장 명의로 '도시 호구 관리 임시조례'를 발표한 뤄루이칭은 이해부터 전국적으로 삼반오반운동을 개시했다. 1953년에는 중앙인민공안 학습 원장을 겸임했으며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 대장 계급에 진급하고 1급 독립자유훈장, 1급 해방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뤄루이칭은 제1차 전국 공안정치공작회의를 주재해 반공산당 인사 숙청 및 경제 보위 업무 문제를 논의했고 이듬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치안관리 처벌조례>와 호적 등기 조례 등의 법률을 제정했고 1958년엔 베이징 친청 교도소 건설을 착수해 1960년부터 정치범을 수용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그는 1959년 이후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 부부장, 중앙 군사위 비서장,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국방공업사무실 주임, 중앙군사위 상무위원, 중앙 서기처 서기에 잇달아 임명되었다. 또한 1961년 허룽, 녜룽전의 주재로 열린 국방과학위원회 북대하공작회의에 참석해 국방공업 건설전설의 발전을 위한 과학연구에 지원하는 안건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렇듯 출세를 거듭하던 뤄루이칭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온다.

2.5. 문화대혁명의 시련

파일:b603712307c7f76317d8b1503fac5580_w.jpg
두 다리가 부러진 채 홍위병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뤄루이칭.

1959년 루산회의 때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를 비판했던 황커청(黃克誠) 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이 경질되었다. 인민해방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린뱌오는 뤄루이칭을 참모총장에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뤄루이칭이 "패도(霸道)"적 성향이 있다고 여기고 린뱌오에게 "뤄루이칭은 칼이다. 당신은 그에게 찔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린뱌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제안에 동의해 뤄루이칭을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이리하여 뤄루이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군사위원회 사무총장 겸 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을 맡아 공산당과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곧 뤄루이칭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허룽을 비롯한 일부 장성들은 뤄루이칭을 지지했고, 예젠잉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은 뤄루이칭과 대립했다. 그러던 1965년 8월, 예젠잉이 린뱌오를 방문해 뤄루이칭 문제를 논의했다. 린뱌오는 뤄루이칭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밖에서 일을 꾸미고 있고 그의 장자는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예젠잉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주석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뤄루이칭의 일은 지금 당장은 내버려두고 나중에 중앙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린뱌오는 1965년 11월 18일 예고도 없이 5원칙을 발표했다.
1. 모주석의 업적을 배우고 익힐 것이며, 특히 모주석의 책을 전군에 배포하여 "가장 강력한 교육"으로서 전군이 숙지하게 한다.
2. '사개제일(四個第一)'[2]을 준수하고 '사상의 실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3. 주요 간부는 풀뿌리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4. 진정으로 우수한 장병을 과감히 요직에 발탁한다.
5. 강한 기술과 접전, 야간 전투 전술을 열심히 익힌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린뱌오가 제시한 5원칙을 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인민들의 숭배의식을 이용하여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변질시켰고 마오쩌둥이 하는 행동은 모두 옳으며 그의 '탁월한 정치'를 따르자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에 뤄루이칭은 반대를 표명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1965년 11월 30일, 린뱌오는 자신의 부인 예췬(葉群)에게 자신이 쓴 편지와 모종의 자료를 갖고 항저우에 있는 마오를 찾아가 뤄루이칭 문제를 보고하도록 했다. 당시 마오에게 보고한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과 자료에 따르면 뤄루이칭이 군권을 탈취하려 한다며 뤄루이칭이 린뱌오의 군에서의 '정치우선' 주장에 반대한 것 등을 근거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마오쩌둥은 12월 2일 '탁월한 정치'에 대한 보고서를 당 중앙에 보내 "탁월한 정치를 믿지 않는 절충주의 (또는 기회주의)는 누구나 경계해야 한다."며 뤄루이칭에게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12월 8~15일, 마오쩌둥은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뤄루이칭은 원난성 쿤밍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그러던 12월 10일, 당 중앙은 뤄루이칭에게 돌연 상하이에서 열리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뤄루이칭은 영문을 모른 채 급히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영접 나온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페이시옌(陳丕顯)과 공군사령관 우파시옌(吳法憲)은 뤄루이칭을 회의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안내해 사실상 연금시켰다.

한편, 회의장에서는 린뱌오의 부인 예췬이 자신이 마오쩌둥과 면담한 내용을 공개하고 뤄루이칭이 1965년 6월에 사망한 공군사령관 류아러우(柳亞樓)와 밀담했다는 내용을 진술했다. 그녀는 뤄루이칭과 류아러우가 의논했다는 4가지 사안을 설명했다.
1. 린뱌오는 조만간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지 않으면 물러나게 해야 한다. 현재 물러나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2. (병약한) 린뱌오의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
3. 이후 린뱌오는 다시는 군대의 일에 많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뤄 총장이 (군대의 일을)잘 처리하고 있다.
4. (군대의) 모든 것은 뤄(루이칭)가 관여하기 때문에 린쫑이 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또한 예췬은 뤄루이칭이 린뱌오를 ‘똥통을 깔고 앉아서 똥을 누울 수 없다’고 욕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헀다. 그녀는 회의장에서 "뤄루이칭이 어떻게 린뱌오의 퇴진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세차례에 걸쳐 뤄루이칭을 성토했다.

12월 16일, 뤄루이칭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으로부터 마오쩌둥이 12월 2일에 한 말을 전해듣고 마오쩌둥과 면담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주말에는 마오쩌둥이 만날 수 없다."고 하자 린뱌오와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런 그에게 감정적으로 대답했다.
"너무 순진하다.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

이후 린뱌오는 뤄루이칭에게 자아비판서를 작성하고 군 복무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뤄루이칭은 이를 따랐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중앙 사무국장과 국무위원장의 두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6년 3월 4일, '중앙 공작단'은 뤄루이칭을 고발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는데, 참석자들은 군사위 상임위, 각 본부, 공안부, 국방공사, 국방과위, 군사과 인사들이었다. 이 회의에서 뤄루이칭은 " 마오이즘을 적대시했으며 독단적으로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고 반당 음모를 꾸며 군대 내 독립 왕국을 구축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3월 18일, 뤄루이칭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3층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두발꿈치 뼈가 부러지는 중상만 입고 베이징 병원에 보내져 치료받았다. 뤄루이칭의 자살미수사건은 당에게 책임을 전가하려했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더욱 혹독해졌다. 같은 해 5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을 때, 류사오치는 "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陸定一), 양상쿤의 '반당적 오류'를 비판하며 이들 4명의 직무를 모두 정지 및 폐지하기로 했다. 뤄루이칭은 이로 인해 중앙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등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1966년 10월, 뤄루이칭은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12월에 홍위병에게 붙들려 해전구 나도장의 베이징 위수구 부대 주둔지로 압송되었다. 1967년 4월 3일, 상처가 장기간 낫지 않아 해방군 총병원에 보내져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 중에 자주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조리돌림 당했고 온갖 신체적, 언어적 공격을 당했다. 1969년 초, 뤄루이칭은 왼쪽 종아리 절단과 왼쪽 넓적다리 뼈 절제 수술을 하였다.1973년 1월, 관심증고혈압 등의 병으로 입원하여 치료하였고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1973년 9.13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그를 복권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11월 21일,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원회에 참석해 "린뱌오 일당의 모함을 듣고 뤄루이칭을 잘못 처결했다."라고 말했다. 1975년 8월, 뤄루이칭은 업무를 회복하여 중국공군위 고문을 맡았다.

2.6. 말년

1977년 8월, 뤄루이칭은 중앙군사위 상무위원과 비서장에 복귀해 덩샤오핑의 군정비와 문화대혁명 청산을 돕고 진리의 표준에 대한 대토론을 적극 지지하고 참여하였으며 화궈펑이 주창한 양개범시의 오류를 비판했다.

1978년 7월, 뤄루이칭은 서독 하이델부르크대 골과 병원에 가서 다리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8월 3일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틀뒤 뤄루이칭의 영구가 전용기를 통해 베이징으로 운송되어 덩샤오핑, 예젠잉의 추모를 받았다. 1978년 8월 12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추도회를 열었고 천안문 광장, 신화문, 외교부는 조기를 계양했으며 덩샤오핑은 추도사를 발표했다. 뤄루이칭의 유골은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치되었다.

3. 가족관계

뤄루이칭은 1941년 4월 3일 팔로군의 총지휘부가 소재한 쭤취안현(左权县)에서 1922년생의 하오즈핑(郝治平)과 결혼했다. 그녀는 1938년에 팔로군에 입대하고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이후 제8연대 정치부서에서 일했고 공안 당위원회 사무실 비서, 정치부서 고문의 일반 직원이었고 1955년 대령의 계급을 수여 받았다. 남편이 실각하고 박해받았을 때 그녀 역시 홍위병들에게 시달렸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남편이 복권하면서 그녀 역시 원래의 직위를 되찾았다. 그녀는 2018년 현재까지 살아있다.

4. 저서

5. 참고 문헌


[1] 황푸군관학교 우한 분교 [2] 인적요소 우선, 정치공작 우선, 이데올로기 공작 우선, 사고 생활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