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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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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ism-Leninism / Марксизм-ленинизм
왼쪽부터 순서대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1. 개요2. 상세3. 특징4. 기반 이론과 개념
4.1. 근대성의 긍정4.2. 일원론적 사변철학4.3. 역사주의 사관4.4. 유물론에 대한 반영론적 해석4.5. 목적의식적인 무신론
5. 세부 이론
5.1. 경제 이론
5.1.1. 계획경제5.1.2. 생산력 이론
5.1.2.1. 관치경제5.1.2.2. 일국사회주의론5.1.2.3. 잉여노동5.1.2.4. 잉여가치
5.1.3. 집산화
5.1.3.1. 국영기업5.1.3.2. 집단농장5.1.3.3. 콤비나트
5.2. 정치 이론5.3. 사회 정책
5.3.1. 과학 분야5.3.2. 교육 분야5.3.3. 민족 이론5.3.4. 여성 이론5.3.5. 종교관
5.4. 역사 이론
5.4.1. 노농동맹론5.4.2. 유물사관
5.4.2.1. 단계론
5.4.2.1.1.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5.4.2.1.2. 인민민주주의
5.4.2.2. 제국주의론
5.4.2.2.1.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5.4.2.2.2. 민족자결주의(민족해방)
5.5. 전술 이론
5.5.1. 일국일당 원칙5.5.2. 전위당론5.5.3. 인민 전선
5.6. 인식론
5.6.1. 변증법적 유물론
5.6.1.1. 개론5.6.1.2. 물질5.6.1.3. 운동5.6.1.4. 의식5.6.1.5. 시공간성5.6.1.6. 모순성5.6.1.7. 양질전화5.6.1.8. 부정의 부정의 법칙5.6.1.9. 보편성과 개별성
5.6.2. 마르크스주의 언어학
5.7. 변증법적 유물론 발전
5.7.1. 모순론5.7.2. 문화 헤게모니
6. 논란
6.1. 과연 진짜 '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맞는가?6.2. 마르크스/레닌주의?6.3. 파시즘인가?
7. 비판
7.1. 공산주의 독재의 주역7.2. 소련중심주의의 폐해7.3.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서의 비판
8. 한국에서의 입지9. 스탈린주의로 통치했던 공산주의 지도자들10. 여담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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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Stalin-lenin.jpg
마르크스-레닌주의란, 이오시프 스탈린이 주도하여 성립된 일련의 레닌주의 사상 체계를 말한다. 스탈린이 소련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고 이와 더불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위치에 서면서, 이 사상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의 주요 사상으로써 보급되었다.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Stalinism)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반공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다. 사용되는 용례는 보통 스탈린주의보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더 폭넓게 사용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본인 스탈린주의( 호자주의 포함)와 흐루쇼프 수정주의 이후 브레즈네프 현실사회주의, 변형인 마오주의 주체사상을 포함하고 넓게는 티토주의 등의 스탈린에 비판적이지만 일국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국가이념을 모두 포함한다. 즉 흐루쇼프 이후의 ( 알바니아를 제외한[1]) 동구권은 스탈린주의 체제로 불리지는 않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로는 불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관료주의, 일국사회주의론, 일국혁명, 통일전선이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레닌주의의 기초》 (1924)라는 소책자에서 ( 나는) 레닌주의를 정의하였고 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닌주의는 보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전술과 이념이며, 특수하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론과 전술이다."

이 정의가 옳은가?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레닌주의가 제국주의 전쟁 이후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특정 비판자들에 대항하여, 레닌주의를 제국주의 시라고 규정함으로써 레닌주의의 역사적 뿌리를 올바르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레닌주의가 러시아의 특정한 조건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여, 레닌주의의 국제적인 특징을 정확하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레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그저 러시아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 뿐이라는 비판자들과는 달리, 레닌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레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저, 레닌주의에 관한 문제들(Concerning Questions of Leninism, 1926)[2]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레닌주의에 관한 문제들(1926)은 스탈린이 레닌이 사망하고 당내 권력 다툼의 와중에 작성한 공산주의자들에서 성경 취급 받는 저서다. 여기서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제국주의 시대 이후의 보편적인 마르크스주의라고 선포하여 러시아 외부의 반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비난하며 마르크스주의 일반을 자신이 해석한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로 대체시킨다. 당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에 관한 문제, 여러 내부 논쟁 등을 거쳐 지리멸렬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상 20세기 공산주의의 보편적인 정의가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은 지 5년 뒤인 1929년, 스탈린 자신은 자신의 사상을, 고전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의 관계를 정리하여 발표한 후, 정당한 후계 사상이라는 의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그 자신이 고안한 신조어로 표현했다.[3][4] 자주 오용 되곤 하는 용어인데, 마르크스 사상은 마르크스주의고, 레닌의 사상은 볼셰비즘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는 그냥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탈린이 정리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이론을 뜻하는 표현이다. 스탈린주의라는 용어는 1930년대에 라자르 카가노비치(Lazar Kaganovich)라는 소련의 정치가가 찬양의 의미에서 쓴 적이 있지만[5], 광범하게 쓰이기 시작한 건 스탈린 사후에도 한참이 지난 1956년에 열린 제 20차 소련 공산당 전당 대회부터이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죄과를 공공연히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그 이유이다.[6] 이후 스탈린주의라는 용어는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라는 사상을 스탈린의 잔학성과 연결시켜 정당성을 상실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흐루쇼프는 대숙청 시기의 스탈린의 폭력성을 비난하면서도 그 이전의 산업화 정책[7], 사회주의 사상가로서의 이념투쟁 등은 긍정하며 초기 스탈린 체제와 후기 스탈린 체제를 분리했다. 스탈린이 소련에 남긴 영향력이 막강했기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소련 체제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금의 수정을 거친 스탈린주의는 그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거나 현실사회주의라는 명목으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에 보급되었으며 이후에도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8] 즉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은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스탈린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9]

이에 맞서서 트로츠키 본인과 그 후계자들은 자신의 사상을 '트로츠키주의'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볼셰비키-레닌주의\'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남한 운동권의 유일한 정통 트로츠키주의 단위인 볼셰비키그룹의 예전 이름도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냉전기 동안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다수파를 차지했고,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해서 해빙기가[10] 왔다고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상 큰틀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며 조금의 수정을 거친 스탈린주의는 냉전 시절 부터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일부 사회주의 국가의 명목 상의 이념으로 유지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왜곡해서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이데올로그들이자 체제라며 독재를 정당화 하는 것은 물론,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에 군대를 보내서 유혈진압하는 만행은 빈번했고, 이 때문에 서구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이들을 가르켜 탱크로 사람 깔아 뭉개는거 좋아하는 "인간 도살자"라는 의미에서 탱키(tankie)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이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타협주의자, 개량주의자 반동'이란 말로 응수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반스탈린주의 좌파 진영과는 험악한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2. 상세

스탈린의 사상은 그의 정치적 경력의 본격적 출발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의 뿌리인 마르크스주의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하기 위한 전략을 상당히 세밀하게 짜 놓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 국가 권력은 혁명이 닥쳐왔을때 혁명적인 주체(전위당)들이 총력을 다해 찬탈하고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 대중을 그 전위당이 일깨운다는 형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전략이자 사회변혁 방식이긴 하나, 마르크스는 살아생전 전략가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분석한 뒤 결국 자본주의는 모순이 격화되어 붕괴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게 된다는 말만 수 차례 했고, 노동자들의 세력화를 위해 정당건설과 조직화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사회주의 혁명을 목격한 적이 없었고, 다시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경험한 적이 없다.[11] 사회주의 사회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사회주의 사회는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한 제시를 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보다 구체화하고 현실화시킨 것이 레닌주의다.[12] 레닌의 사상 중에는 현실적으로 써먹고자 만들어 놓은 사상이 굉장히 많은데, 정치적인 면에서는 일단 민주집중제가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한 재화의 배분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실 마르크스 본인은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주장한 바가 전혀 없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작이 자본론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마르크스가 평생에 걸처 주력한 작업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이지 '사회주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주장한 역사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자본주의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그 결과로 새로운 경제 체제가 나타날 것이며, 봉건제 경제가 영주귀족정을 가져오고 자본주의 체제가 도시 시민계급 중심의 정치체제를 가져온 것처럼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경제체제 역시 새로운 정치체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 새로운 경제-정치체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일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일관적으로 '나로써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 생전에 볼 수는 없을 것이다.(즉,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라는 대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다만, 인류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천적인 기대가 가득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토양 속에서 마르크스는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체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체제일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 지향점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추구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외, 민주집중제라거나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같은 구체적인 실행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아니라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13]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간략히 말하면, 각 지역에 소비에트( 평의회)를 건설하고, 그 평의회의 의견을 받아 상부에 건의하는 한 단계 더 높은 평의회를 건설하고, 국가 수도에는 그 의견을 종합하고 조율하며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최고 평의회를 건설한다는 방식이다.

이런 제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달리 시민의 의견이 중앙에 직접 전해질 수 없기에 상부의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 일부의 의견과는 달리 현대 지방자치제에서 지방 자치단체의 주된 역할은 중앙 정부에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레닌은 토론을 장려하는 듯 하면서 한번 상부에서 의견이 결정되면 하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민주집중제는 이름과는 달리 까딱하면 상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독재의 경향을 띌 수 있었고 발전 수준이 낮은 러시아 사회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농후했기에 레닌은 이를 항상 경계하며 두려워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트로츠키가 말한 혁명의 수출이었다.

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 독재의 기초가 되어버렸지만, 이는 현대 민주주의에 비유해보면 현대 민주주의가 언제든지 파시즘이나 우민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우민정치로 타락해서 몰락한 것은 아니지만, 레닌주의를 표방한 모든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강력한 중앙 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없어 전체주의화 되다가 몰락했거나 유지되고 있더라도 수많은 병폐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실제 레닌주의를 제대로 표방해 본 국가가 오직 하나, 러시아뿐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것이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후에 그것을 수용하여, 처음부터 작정하고서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닌주의 자체에 결함이 전혀 없다고 하긴 어렵다. 레닌주의 자체의 문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민주집중제 참조.

3. 특징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카를 마르크스는 1845년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에서 이전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생산관계에 의해 발전되는 미래 사회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그것을 1848년 『 공산당 선언』에서 ' 공산주의'라고 칭하였다. 이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지에서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상대는 프리드리히 헤겔이 주장한 절대정신(absoluter Geist)과 같은 이상적 상태이며, 그것은 현재적 의미에서 논해질 때 하나의 실현 가능성으로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청산하는 시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간을 상정하였고, 이 기간을 '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에 대해 투쟁하는 최상의 열기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싸움이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확정되는 과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 과정에 대한 해석에서 수많은 후대 공산주의자들의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논쟁에 참가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야 할 자세와 이들이 과도기적 단계에서 만들어나가야 할 사회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립된 이론과 테제는 훗날 레닌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레닌주의의 기반 위에서 1917년 혁명 이후 보완해야 할 점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승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에 레닌의 인식론 저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러시아어: Материализм и эмпириокритицизм. Критические заметки об одной реакционной философии)을 정리하였다. 이 저서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의 버클리적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동시대 경험주의적 유물론, 기계론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유물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레닌의 의도로부터 쓰여진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여 소위 "변유"(DIAMAT)[19]를 수립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체의 유심론적, 기계론적, 기회주의적 해석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현실 정치 측면에서도 수많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탄생한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농민·병사 위원회인 소비에트의 독재의 필요성을 서술했다. 이것은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 그리고 혁명적 독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는 사회주의정치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도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인민의 지도자 또는 수령의 독점적인 역할을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강조한 만큼 국민주권, 대의제, 법치주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에 필적하는 대표적 사상이었다.

혁명에 대한 입장은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Orthodox Marxist)라고 불리던 집단과 달랐다. 기존의 카우츠키를 신봉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 공황으로 인해 자본가는 최후의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자들과 계급대립이 정점에 이르면서, '자발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레닌주의자들은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 공황은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이미 러시아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자본의 팽창에 따른 공황, 그리고 그 공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국경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 근거를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태동했던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한 주위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 조성을 예로 들었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동자 세력이 와해되거나, 유산계급에 헌신하는 국가의 무차별적 탄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깊게 조명하지 못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계획했다. 이러한 면에서 레닌주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려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

스탈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와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공산주의라고 흔히 불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되었으며, 이 공산주의 이론은 많은 사회주의 국가의 기반이 되었다. 김일성,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호치민 등이 이 이념에서 제시하는 국가 모델과 인식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4. 기반 이론과 개념

이 문서에서 밑 문단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 역사, 사회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폭넓은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밑에 제시될 내용들을 먼저 읽고 이해해야 이론 문단의 내용을 제대로 습득할 수 있다. 이 문단을 읽고 난 뒤 레닌주의 문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주의, 합리주의, 역사주의, 유물주의, 목적의식적 무신론을 철학 전개의 기본 전제로서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인식 논쟁과 그 해석은 모두 전거에 나열된 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잇고 있다.

4.1. 근대성의 긍정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성의 한 단면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근대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며, 마르크스는 근대성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비판 이론이 등장하고, 1960년대 말에는 후기구조주의가 등장하면서 근대주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고,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한 축을 담당하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주의의 영향력이 미미해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근대성과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하는 경우나, 마르크스주의는 탈근대주의 담론에 적용하는 시도는 학술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러 권위적인 연구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주의의 일종이라고 확고히 분류되고 있다.

소련의 국정 철학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성을 긍정하고, 이것은 이전 시기와 완전히 비교될 수 있는 진보된 인류 정신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객관성, 인간의 합리적 사고, 인류의 편의를 위한 자연 개조 등을 중시하며,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근대주의의 전형이라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성을 긍정한다.

결과적으로 인간 이성이 인류를 영구적인 자유로 인도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근대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소비에트 연방 철학자인 효도르 콘스탄티노프(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는 근대 시기에서 근대성(модерность)으로 간주된 것이 부르주아 정신의 일종이었으며, 사회주의로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물질 생활이 개변하게 되면 근대성이 지양을 병행하며 확고히 유지된다고 하였다.

동시에 근대성은 특정 시기에 발현된 진보적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인데, 동태적 의미에서 새로운 형태인 모순의 등장, 다시 말하여,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정도라는 측면에서 이전 사회보다 훨씬 감소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포함하여, 진리로 나아가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는 현대성(современност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대다수 관변 철학자들은 현대성을 논할 때 바로 위와 같은 정의에 기초하여 논리를 전개했다.

4.2. 일원론적 사변철학

현상와 현상 이면의 본질을 나누는 반-실증주의를 내세우며, 이 모든 것을 물질의 존재 양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사변 철학으로 분류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유심론 관념론에 반대하지만, 인간 이성 일반과, 감각 일반을 확고히 나누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인간 이성 일반과 감각 일반을 나누는 방식은 심리철학 영역에서 두 개념을 근본적으로 나누는 기준과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원론은 칸트 이후 근대 시기에 논해진 독일 관념론 특유의 일원론적 사변철학을 전개한 셸링 헤겔의 이론을 토대로 했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헤겔의 사변철학 논리를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기에 논리 전개에서 기하학적 방식을 선호하고 명증을 성립하는 방법론으로서 연역론을 원칙으로 하고, 실증을 실천의 한 단면으로서 이해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30년대에 데보린 학파의 교의에 대해서 멘셰비키적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시작으로 형성된 스탈린의 사상 체계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사변 활동만을 강조하는 기조를 경계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스탈린은 사변철학의 여러 전제를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일원론을 고수하고 있기에 정신 철학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유와, 인간의 기계적 행동을 일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변증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변증법을 사유의 주요 방법론으로 하는 일원론적 사변철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정의하는 노동은 인간 해방을 통해 얻어진 완전한 사유 활동이며, 기계적 행동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노예 사회의 노예노동, 봉건 사회의 예속적 소생산과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력 산출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이성인 노동과, 완전한 노동으로까지 달성하지 못 한 상태를 고착하는 인간 내면의 수동성(기계적 행동)이 공존하여 일체의 모순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는 냉전 시기 공산당이 무신론에 기초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진리관과 선악 관념을 가지고 있던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도덕이라는 독자적인 도덕윤리의 구축을 가능하게 하였다. 과학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볼세비키 철학의 이러한 면에 대해 “신 없는 신학이자 초자연적 존재가 없는 종교”라고 평가하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를 사변철학의 틀에서 해석하던 거대한 흐름이 붕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제 노동 운동 이론을 지도하는 사령탑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변철학의 권위가 더더욱 약해졌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의 해석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사변철학의 틀에서 해석할 것을 고수하고 있다.

4.3. 역사주의 사관

역사적 사건 및 한 시대의 형성을 독립적인 개인의 합으로 보거나, 우연의 연속으로 보지 않으며, 추상적 법칙의 연속 또는 순환으로 보는 입장을 역사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헤겔의 역사주의 담론을 받아들인 학설인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전통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 또한 역사주의 사관을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 입장으로 갖고 있다. 역사주의에서도 인간 경제 활동과 그에 따른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주요 변수로 보는 유물사관을 갖고 있다.

4.4. 유물론에 대한 반영론적 해석

게오르기 플레하노프(Гео́ргий Плеха́нов)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을 차단한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헤겔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여, 계급의식의 일반성을 규정하였다. 그의 저서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К вопросу о развитии монистического взгляда на историю, 1895년)은 레닌의 철학적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플레하노프의 반영론은, 기계적 운동과 인간의 의식적 사유를 나누는 양분론에 기초하여 세계를 바라본다. 여기서 의식은 물질로부터 도출하며, 물질은 자체적인 모순 정도에 따라 그 형상(形像)이 달라진다. 플레하노프는 물질의 현상적 특성을 규정하는 핵심 변수로, 그것 자체가 겪고 있는 내부 모순 정도라고 보고 있으며, 이 내부 모순 정도는 물질이 의식을 규정할 때, 그 도출되는 의식의 성격을 규정한다. 따라서 모순이 존재하는 물질 내부의 운동, 그리고 그 운동성에 따라 도출된 모순성이 존재하는 의식성이라는 두 가지 테마가 등장한다.

여기서 플레하노프는 인간의 의식성은 바로 모순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정식화하고, 계급의식의 일반성을 바로 이 의식성을 통해 정의한다. 이에 따라 계급투쟁은 물질 세계와 의식 세계 전반의 모순을 최소화한다라는 목적의식성에 기초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플레하노프는 이 모순 최소화 과정의 구체적 사유 형태를 변증이라고 정의하고, 이 변증에 기초한 유물론이라고 하여, 스스로의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칭하였다.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이 반영론 관점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가져야 할 유물론 사상이라고 인정하였고, 훗날 기계론자들을 비판하는 자신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을 크게 인용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재정립하면서 반영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 원리로 소개하였다.

4.5. 목적의식적인 무신론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유(有)의 존재 양식으로서 물질을 설정하고 있다. 물질은 끊임이 없는 자기 모순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본질 운동을 드러내는 가장 기초적인 존재이고, 이러한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이러한 학설은 세계의 본질을 신이라고 규정하는 유신론과 반대되는 학설이며, 곧바로 무신론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일정한 생산 관계에 따른 인간 사유의 다양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추구하는 무신론은 단순 이론적 경향이나 학술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탄압, 종교 제거 운동, 문화 혁명 등 실질적인 조직 행동이 수반되는 전투적 무신론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이해되는 무신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무신론은 또 다른 의미에서 본질자(끊임이 없는 모순으로 대표되는 유의 존재 양식, 그리고 이것의 총체적인 현실이라 할 수 있는 물질)를 상정하며, 물질이 내포하는 모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목적의식적 무신론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 소부르주아적 소박실재론,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무신론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5. 세부 이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경제, 정치, 사회, 인식, 혁명투쟁 이론으로 나눠져 있다.

5.1. 경제 이론

5.1.1. 계획경제

스탈린주의 경제정책을 잘 보여주는 책인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1장 「사회주의하 경제 제도들의 특성」에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일반적 특성을 규정했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특징은 '중앙당 계획하에 진행되는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경제',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에 의한 지도 체계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경제', '소비와 공급량 조절 문제와 지역소비에트의 역량 강화'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중앙당 계획하에 진행되는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경제'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경제 발전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만약 생산력 발전에서 비약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해도 사회주의경제 발달을 불러오기 힘들며, 단기적인 성장만을 가져올 뿐인 정책이라면 그것은 중앙당의 경제 계획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 계획에서 첫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정말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맞는 것인가?"부터 따져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에 의한 지도 체계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경제'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 틀을 규정하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언급되며, 스탈린은 중앙당의 계획이라는 본질적인 부분과 인민의 요구라는 현실적인 부분을 상호비판적으로 접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계획 경제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 문제와 생산의 편향성 등을 바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한 것이다. 관료제 자체의 경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는 무계획성과 비교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보다 높은 생산력과 빠른 발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국가 주도의 집중 투자'를 들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민간투자와 법인투자의 독자적 투자를 허용해놓고, 자본의 분산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를 중심으로 투자 자본이 모이는 구조를 갖고 있기에 개개민간투자자는 안정적인 투자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따라서 소수의 독점자본의 성장만을 추동시킨다. 반면, 사회주의 경제는 관료 조직에 대한 효율적이고도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들의 통제로 이루어진 집중 투자 경제이다. 이는 집중 투자를 통해 공고한 '규모의 경제'를 재빠르게 실현할 수 있다는 점과 효율적인 분배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 외에도 제도적으로 공금금융과 지령 하달 경제의 장점을 논하고 있다. 세 번째 논점인 '소비와 공급량 조절 문제와 지역소비에트의 역량 강화'에서는 광범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통한 유통 속도와 균형성의 증가와 지역소비에트의 소비 및 공급 요구량에 따른 중앙의 상품 공급 방침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내용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국가 주도의 집중 투자를 통한 빠른 규모의 경제와 자본 집중 실현.
2.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지역소비에트를 통한 생산 하달 및 생산 요구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활용.
3. 생산력 발전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생산 물품의 효율적 분배와 가격 책정.

북한을 포함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신생독립국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그 결과 1950, 60년대에는 빠른 경제 성장과 중공업 발전을 이룩해 남한 경제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이후 김일성 우상화가 진행되고 계획경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뒤집히게 된다.

5.1.2. 생산력 이론

생산력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그와 엥겔스가 함께 쓴『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드러난다.
모든 해방은 실제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다. 증기 기관, 노새, 다축 방적기가 없이 노예 제도를 폐지할 수 없으며, 발전된 농업 구조가 없이 농노제를 폐지할 수 없다. 인간은 충분한 음식, 음료, 주택 및 의복이 없으면 해방될 수 없다. '해방'은 정신적 행위로 나올 수 없으며, 역사적 행위로 이룰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산업, 상업, 농업, 교통의 발전에 따른 역사적 조건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 『독일 이데올로기』

이러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마르크스 사후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됐다. 특히, 러시아 혁명기 당시 멘셰비키는 이를 국내 생산력 발전에 한정하여 교조적인 경제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촉발될 수 있다. 이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카를 카우츠키의 견해와 일치한 것이었다. 반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지구적 혁명론,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 등을 통하여 교조주의를 비판하였다.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 따르면, 사회주의 형성의 객관적 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필수인 것은 사실이나, 자본주의 발전도에 따른 혁명의 격발성은 국경 및 특정 국토 단위에 한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이 오직 '자본주의 성숙도에 따른 기계론적인 혁명'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서 자본주의가 필수인 이유는, 자본주의 자체가 산업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창조하는 운명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생산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모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두 조건이 핵심이며, 이후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의 모순성을 인식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기까지는 그들 스스로의 역량에 달렸으며, 당연히 자본주의 발전도에 따라 혁명의 열기는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것을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고 칭하였다. 결과적으로, 멘셰비키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계파 모두 단계론에 기반한 혁명론을 주장했으며, 전자는 기계주의, 후자는 실천주의라는 측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3장 「사회주의하 가치 이론」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실천주의에 기반한다. 사회주의경제는 노동력 산출을 통한 잉여생산 ― '자본가에게 이윤을 전유하는 잉여노동'은 '잉여가치'(독일어: Mehrwert, 剩餘價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이 자본가에게 모두 전유되는 자본주의적 착취 고리를 끊어낸 다음 얻어낸 잉여생산을 근로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며, 사회주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기초 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 자본론』에서 밝힌 '이윤율 저하 경향'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주기적 공황'을 막는 데에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며,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에서 경제를 수호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6장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불가피성」에서 만약 자본주의국가가 위와 같은 치명적인 단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으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생산력의 지속성을 이유로 들어 생산력 이론의 견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했음을 선포하고 사회주의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5.1.2.1. 관치경제
‘관제고지’(러시아어: Командные высоты, 영어: Commanding heights, 管制高地) 또는 ‘관치경제’(官治經濟)라는 개념은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제 통제 방식을 비유하며 사용한 용어이다. 생산력 이론에 기반한 공산당의 경제 지도의 기본 원칙은 바로 이 관제고지의 원칙에 있다. 이는 생산력 발전 지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내전 종전 후 소련의 산업 수준이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 수준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체감하였다. 따라서, 생산력 이론 전제 위에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본원적 축적'(독일어: Ursprüngliche Akkumulation)을 혁명적 당을 통해 이룩해야 한다는 경제 전술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바로 '관제고지'이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부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경제 정책으로서 실천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다. 소련에서는 그 첫 번째 시행으로 신경제정책을 들 수 있다. 이는 농업 부문에서 본원적 축적을 달성하려는 레닌의 첫 시도였다.

레닌 사후에는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좌익반대파에 가담했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러시아어: Евге́ний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1886 - 1937)가 1926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새로운 경제학』(Новая экономика)을 통해 가장 가열차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농업 기반이 연약하던 소련 경제의 현실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급진적인 중공업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이오시프 스탈린 계파에게는 물론이고, 대다수 볼셰비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농민을 착취하여 본원적 축적을 빠르게 달성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계파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농업 집산화가 완료된 시점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관제고지 이론에 따라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완성하였으며, 1936년 헌법 개정 때 사회주의 본원적 축적 과정을 완료했음을 공포하였다.

오늘 날의 대표적인 사례로 예를 들 때, 덩샤오핑 이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인민민주주의 정체로 규정하고, 본원적 축적을 당의 지도에 따라 감행해야 한다는 생산력 발전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들 수 있다. 즉, 개혁개방의 영향으로 부분적인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으나, 관제고지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지기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기업은 모두 공산당 산하 국가개발기구의 지령을 받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관제고지 적용은 각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구 소련의 경우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관제고지 정책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계획 경제 및 통제주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은 자신의 저서인 『The Commanding heights』에서, 누적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험성을 혼합 경제적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 할 경우 관제고지의 원칙의 도입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득세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종식될 수도 있음을 논했다.
5.1.2.2. 일국사회주의론
보통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경제정책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일국사회주의론은 선진유럽의 혁명 없이 소련 국내의 생산력 증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산력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순수 소련 자력만으로도 세계 공산화를 이룰 수 있다."라는 주장과 다르기에 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문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15년, 〈사회민주주의자〉 44호에 실린 '유럽의 슬로건'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정치·경제적 불균등한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몇몇 나라에서 심지어 한 나라에서 먼저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승리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를 수탈하고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한 후에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피억압계급과 함께 그 나라 자본가들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날 것이고, 필요하다면 착취계급과 국가에 반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것이다.

또한 1918년 5월 14일, 레닌은 모스크바 인민위원회 공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밝혔다.
모든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현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혁명에서 멀어지고 스스로가 부르주아의 편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국내 혁명이 국제적 규모의 노동자 혁명을 기다려야 한다면, 모든 국가가 국제적 규모의 혁명을 기다려야 하며, 결국 그 어느 국가도 혁명을 이룰 수 없다. 이에 따르면 국제 혁명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923년 1월 6일 레닌은 『협동조합에 관하여』(О кооперации)를 통하여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정치 권력은 노동 계급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정치 권력은 모든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는 협동조합 사회에서 인구를 조직하는 것이다. 과거 계급 투쟁에 관한 행동이나 정치 권력을 위한 투쟁 등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이 ‘우아한’(legitimately)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인구가 협동조합을 조직함으로써 달성할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저, 『협동조합에 관하여』

이어서 레닌은 같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실로 모든 대량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 소농 및 영세농과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의 농민에 대한 확실한 지도력 등 ― 이러한 것들이 협동조합으로부터, 오직 협동조합으로부터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과거에 협동조합을 장사치라 경멸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신경제 정책하의 지금도 그렇게 경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아직 이러한 것들은 완전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필요 충분한 모든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저, 『협동조합에 관하여』 (1923년 1월)

1938년 2월 14일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작성한 〈이바노프 동지에게 보내는 답장〉(Ответ товарищу Иванову)에는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불완전한 승리'와 세계 공산화(사회주의화)라는 '완전한 승리'를 구별하고 있으며, 일국사회주의는 전자에서 '불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기반하여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연록인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나온 글의 맥락을 더욱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전에는 한 나라에서의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는 부르주아지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나라 전부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연합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이제 이러한 견해는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조건하에서는 다양한 자본주의 나라들의 발전이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 제국주의 내부의 파국적인 모순들이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것,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혁명 운동이 성장한다는 것. ― 이 모든 사실로 인해 개별적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승리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저,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

동시에 스탈린은 같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한 나라에서 성립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투쟁력을 강화하고 농민을 지도하면서 승리한 한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최종적 승리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그 한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이 그 국가가 외국의 개입으로부터 자강할 수 있음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몇몇 국가에서의 혁명 승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다른 국가의 혁명의 발전과 지원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의 필수 과제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저,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1924년 5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룬다.”는 “(소련 국내의) 사회주의의 건설을 달성할 수 있다.”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국제 혁명이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탈린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일국사회주의'는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불완전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 더더욱 명확해진다. 따라서, 일국사회주의론은 "순수 소련 자력만으로도 세계 공산화를 이룰 수 있다."라는 것과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생산력 이론의 관점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국제 혁명의 지원이 없이 소련 내 생산력 증강은 불가능하며, 곧바로 국제 혁명을 지원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를 얻어내야 한다."라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극좌모험주의에 속한다고 비판하였으며, 소련이 혁명의 병기창이 되기 위해서는 자력으로 생산력 증강을 꾀하여 사회주의 달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2.3. 잉여노동
5.1.2.4. 잉여가치
잉여가치란, 자본주의사회를 포함한 수많은 착취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잉여노동의 성과를 자본가 개인 또는 경제적 기득권 집단에게 전유시킬 때의 가치를 의미한다. 잉여가치는 다시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나눠진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노동 시간을 높여서 얻어내는 잉여노동에 기초한 잉여가치를 의미하며,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사용되는 필요 노동 시간을 단축시켜 노동력의 가치를 열소화하여 얻은 잉여생산에 기초한 잉여가치를 의미한다. 즉, 자본주의사회를 비롯한 착취 사회는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식을 통해 기생하는 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바로 이러한 착취 고리를 끊고 잉여노동을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맞게 전환시키는 것이 생산 관계 혁명의 핵심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정치경제학에서 인정되는 자본주의하 가치 등식은 자본개, 임금재, 사치재가 서로 구분되지 않을 시 시간 변수 [math(t)]당 다음과 같은 수요-공급 가치 등식이 성립한다.

[math(x)]t = [math(Ix)]t+1 + [math(wBLx)]t+1 + [math(\lambda x)]t

여기서 [math(x)]t: 시간 t까지의 상품 산출 벡터값
[math(\lambda x)]t: 자본주의국가 내 자본가들의 소비 벡터값
[math(B)]: 노동자의 생활필수품의 벡터값
[math(I)]: 상품들의 자본투입계수
[math(L)]: 상품들의 노동투입계수
[math(w)]: 실질임금
을 의미한다.

이때 자본주의국가 내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행위로 인한 적정한 이윤율 상승 공식은 전년도 실질 경제성장률에 따른 상품 산출 벡터값을

[math(x)]t = [math(x)]0[math((1+G))]t

로 가정할 경우, 이윤율은

[math(\dfrac {S_0}{C_0+V_0} = G + \lambda(1+\dfrac {S_0}{C_0+V_0}))]

을 따른다. 이때 자본 k는

[math(k = \dfrac {V_0 + S_1}{V_0})]

를 따르게 되면서, 이윤율이 증가함에 따라 잉여가치인 {\displaystyle S_{t}} S_t도 높아진다. 그러나 {\displaystyle S_{t}} S_t는 발달 정도에 따라 임금 삭감, 노동력 산출 가치 저하 등 여러 형태로 발현되고, 그 결과 상품 소비 계층의 소비력을 억제하게 된다.

여기서 [math(G)]: 실질 경제성장률
[math(C_0)]: 불변자본(생산설비, 생산수단, 원료값)
[math(V_0)]: 가변자본(임금, 유동적 자본시장가격)
[math(S_0)]: 잉여가치
이 식에 따라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는 이윤율 팽창을 위해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증식할 것이고, 그 결과 자본주의사회는 소비저하경향에 따라 이윤율이 저하하여 주기적인 공황을 야기하다가 붕괴한다는 것이며, 스탈린은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잉여가치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현대 주류경제학에서는 잉여가치론의 근간이 되는 잉여가치 및 노동가치를 두고 '수학적으로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이 불가능하며 실증도 불가능한'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같은 논리에서 위의 공식에도 별 중요도를 두지 않는다.[20]

5.1.3. 집산화

스탈린주의 경제 정책의 핵심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혁명적 당이 생산량과 생산계획을 통제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할 기초적인 경제 형태이며, 국유화와 집산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이후에야만 성숙한 사회주의 경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교육·의료·주거 3대 무상 원칙에 기초한 국유화는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행해져야 하는 주요 경제 투쟁에 속하며, 현대의 사회민주주의 핵심 주장에 속하기도 한다.
5.1.3.1. 국영기업
국영기업에 관한 문제는 후일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 체제가 맞는지 트로츠키주의 계열을 비롯한 비스탈린주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스탈린주의의 국영기업의 소유 방식은 '전민소유'(全民所有)라 불리며,[21] 단순히 국가 기관만의 통제가 아닌, 각 지역에 속하는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경제 조직의 통제, 그리고 혁명적 당의 통제라는 삼중(三重)의 통제를 통해 운영된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의 주요 기업 형태이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경제 집산화를 시작하였고, 이 결과 소련은 1934년 기준으로 국영기업이 전체 기업 비중의 93%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명목 GDP 규모는 1928년에 비해 약 2.2배 증가하였다. 1938년은 전체 기업 비중의 97%를 차지하게 된다. 붕괴 직전인 1990년에는 전체 기업의 80%가 국영기업이었으며, 이는 다른 인민민주주의 국가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53년에 소련의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을 모방하여 경제 국유화를 단행하였는데, 자국 기업의 해외 투자금과 외채를 비롯한 자산을 동결하고 대자본과 이에 딸린 공장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는 급진적인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자본가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자살하였지만, 그 결과 사회주의 경제로 나아가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또한 자영업자 같은 소생산자들이나 기타 중소기업가의 법인의 경우는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여 국가가 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주는 방식의 집체소유(集體所有) 상태로 전환하였다. 경제 계획이 완료가 되는 1958년 시점까지 연 평균 9%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였으며, 경제 국유화의 결과로 국유기업이 전체 경제의 89.17%를 차지하게 되었다. 협동조합이 10%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99%가 국가의 직간접적 통제하에 이루어지는 기업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81년 개혁개방 이후에도 국영기업에 기초한 산업 발전을 지향했다. 2019년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20대 기업 중 12개 기업이 국영기업이며, 2018년 기준으로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간 98개 중화인민공화국 기업 중 약 90%가 국영기업이다. 북한 역시 기업 비중의 95% 이상이 국영기업이다. 이를 통해 국영기업을 통한 산업집산화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원칙적인 경제 운영 방식이자, 일반적인 운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에서 국영기업은 단순히 국가계획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 내 노동자들과, 그 기업이 속한 지역의 지역민들의 민주적인 요구도 또한 기업 운영의 변수로 작용하였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10장에서 이러한 국유화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집단 경영도 또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국영기업의 모든 이윤을 국가 및 당 기구에 종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영기업의 이윤은 곧 국가 예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하 집산화는 국가자본주의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국가자본주의하에서 국영기업은 최대 주주인 국가 투자기구 외에 다른 주요 주주의 입김이 들어간다. 또한 국가자본주의적 국영기업의 이윤은 다른 주요 주주에게 분배된다는 점에서 전혀 인민의 소유라고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집산주의와 주주자본주의의 원리를 존치한 상태에서 운영되는 집산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는 서로 지대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1.3.2. 집단농장
스탈린주의 경제정책하면 중공업 육성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집행 과정에서 부농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발에 직면한 끝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란 참사를 낳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럭저럭 잘 운영되던 제도였다. 오늘날 사회주의하면 떠오르는 몇개의 이미지 중 하나로 굳어졌다.

집단농장이란 토지국유제에 기초한 집산적 농업 생산체를 의미한다. 집단농장 정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을 내놓은 시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집단농장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토지국유제와 부분적인 토지공유제에 기초하며, 일체의 사적인 토지 소유를 금한다. 이는 불특정 다수에 의한 공동소유 및 개인 규모의 토지 임대를 금하는 것도 포함한다.
2.농업노동량은 각 국유 및 협동 농지의 특성에 따라 국가, 콜호스, 지역 농민의 공동 결정으로 책정하며, 농민은 정해진 기간 내에 콜호스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워야 할 의무가 있다.
3.농민은 각자 할당 농지에서 생산한 농축산품을 모두 국가에 납품할 의무가 있으며, 이에 따른 합리적인 형태의 보상을 받는다. 콜호스 주 농지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물의 사적인 판매 및 유통을 금하며, 개인 소농장에서 생산된 초과분에 대한 사적인 판매 및 유통은 허용한다.
4.농민은 언제든 할당된 토지에서의 임무 수행을 포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망하는 지역의 농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권리가 있다. 농민은 농업 활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것을 국가 기관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콜호스 관리국은 농업 현안을 상급 기관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이 모델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1928년 회의록인 『곡물 조달 및 농업 발전 전망』(О хлебозаготовках и перспективах развития сельского хозяйства)에서 최초로 드러난 입장이다. 이 회의록에서는 레닌이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Аграрный вопрос и «критики Маркса»)에서 밝힌 노농동맹에 기초한 산업 발전을 위한 임금 문제를 농업 상품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보급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언급되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NEP 기간 당시에 부를 축적한 부자 농민들, 소위 '부농'을 해체하고 농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농민인 '빈농'에게 유리한 사회주의적 농업 구조인 '농업 집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동시에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의 신경제정책 고수론에 기반한 부농과 소농에 기초한 농업으로는 사회주의적 산업 발전을 이루는 농업 형태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했다.
당은 부농의 사보타주 행위를 미리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당신들(NEP주의자)은 당의 적극적인 행동이 없이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107조에 따라, 선발된 관료들이 부농의 사보타주 행위를 적시에 타격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각지의 관료들이 부농과 협력하여 오히려 행정집행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온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또한 당신들은 실제 농업 생산량이 전년도 해에 계획된 농업 생산량에 미치지 못 했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 합니다. 부농들의 사보타주 행위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러한 모든 현상들의 원인을 오직 농업 자본 규모의 열악함 탓만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중략)… 현재 단속된 부농들이 숨겨놓은 농산물을 양, 단속되는 비중 그리고 추이된 부농의 수를 고려해서 농업 생산량을 추론할 때, 당신들이 경제적으로 전혀 달성될 수 없다고 말하는 농산물 생산량을 초과한다는 것은 왜 계속 잊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107조의 미온성도 문제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부농이 생산한 농산물량의 25%를 빈농에게 분배하고, 중규모 농민에게는 추가적인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 뿐입니다. 실제로 부농의 행동 범위를 제약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부농 집단은 당에서 책정한 농산물가의 평균 3배 이상의 가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농업의 집단화가 없이 사회주의 발전을 지도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
이오시프 스탈린 저, 『곡물 조달 및 농업 발전 전망』

스탈린에 따르면, NEP식의 자본주의 농업은 부농의 농업 사보타주 행위를 막기 어려운 상태를 유발한다. 따라서 농산물 물가의 폭등을 불러올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를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스탈린은 이러한 상황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계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1928년에 경제 계획이 단행되면서 콜호스(колхо́з)라는 집단농장 관리 체계가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간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농들은 작물을 태우고, 가축을 도축하여 농업 황폐화를 유도했다. 이들은 콜호스 관리들을 죽이거나 테러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많은 방해공작을 자행하였으며, 콜호스에서 활동하는 빈농의 농지에 방화를 저지르고 가축을 죽이고 달아다는 등 빈농에 대한 테러도 저질렀다. 그 결과로 홀로도모르라는 기근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농업 집산화에 대하여 "이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여기서 빈농 계급이 승리하느냐, 부농 계급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의 흥망이 결정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빈농과 콜호스를 수호하기 위해 각 농지에 민병대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치안을 강화하였으며, 빈농 중 일부를 선발한 후 무장시켜 자체적인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는 부농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업 집산화를 밀었고, 1938년에 완전한 농업 집산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시기에 따라 (3)과 (4)의 원칙이 수정된 적이 있으나, 소련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위 여섯 가지 원칙 위에 선 집단농장 체계였다. 이리하여 농민은 농업노동자이자 농업공무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러한 농업 집산화 정책을 기반으로 해서 1958년 인민공사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농축산물 무상공출제(無償供出制)에 기반한 소련의 콜호스와 달리, 인민공사는 농축산물 유상공출제(有償供出制)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후 인민공사는 개혁개방의 영향으로 1982년에 농업을 비롯한 경제 업무에 관한 권한이 모두 사라지면서 사실상 폐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12년에 농업 개혁을 단행하여 초과 생산분에 대한 자체 처분을 허용했으나, 어디까지나 위 여섯 가지 원칙의 기반에 성립된 것이다.
5.1.3.3. 콤비나트
콤비나트(러시아어: Комбинат)는 1928년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 때 등장한 사회주의국가의 일반적인 산업단지 개발법이다. 문헌적으로는 1931년 6월 23일에 행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연설에 쓰인 연설문 초안인 〈경제 건설에서의 새로운 과제들〉(Новые задачи хозяйственного строительства) 제3장에서 생산조합 결속체(콤비나트)의 효율성과 발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콤비나트는 가공 시설·기술 연구소·운송 시설·원료 생산 시설·편의 시설 등 해당 지역에 특화된 산업 시설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묶은 지역적 결합체를 의미한다. 원료 확보에 들어가는 비용 절감 효과와 제품 생산의 집중화, 그리고 유통 과정의 간소화 등의 이유로 생산 비용 절감 효과가 매우 큰 생산 결합 방식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소련에서는 철광 콤비나트와 석탄 콤비나트를 시초로 수많은 콤비나트가 건설되었다. 다른 자본주의국가도 이 방식을 모방하였는데, 대한민국 울산에 존재하는 금속·석유·화학 콤비나트가 그 예이다.

5.2. 정치 이론

5.2.1. 민주집중제

민주집중제 문서 참고. 레닌은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상향식 의견 수렴과 상부의 결정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민주집중제를 의회민주주의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웠고, 곧 이는 모든 공산국가들의 기본 정치 이념이 되었다.

5.2.2.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러시아어: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й патриотизм, 영어: Socialist patriotism) 또는 민중애국주의는 레닌이 최초로 주장한 애국주의이며, 기존의 애국주의와 큰 차이를 보여주는 계급투쟁적 애국주의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략적 발생과 소비에트 제도의 성립이 공고히 되기 위해서라면 기존의 제국주의 성향을 띤 애국주의가 아닌 차별화된 애국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과정에서 필요한 계급투쟁, 사회주의의 영구적 추구를 목적으로 개조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가 되었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유물사관에 충실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방침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에서의 알맞은 애국주의"를 규정한다. 이 개념은 레닌과 당대 러시아 좌익 작가들에 의해서 흔히 주장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가 사회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애국주의 타이틀과 상반되게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기존 애국주의가 내포한 문제점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기존의 애국주의를 '부르주아적 애국주의'라고 부른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사명감을 가진 모든 나라들이 가져야 할 애국에 대한 논했다. 애국주의의 장점인 사회 단결요소, 체제 유지의 견고함을 가져가야 한다는 주의를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 애국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목표성은 제국주의와 인종의 구분이 없는 전인민국가가 형성한다는 목표하에 진행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세계에 존재에는 모든 약소국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의 착취와 억압 아래에서 해방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 정당성도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레닌의 민족 자결로도 이어지게 된다. 비슷한 정치 방향으로는 좌익 내셔널리즘이 있다. 그러나, 좌익 내셔널리즘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세기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도 변화했으며, 탄생부터 공산주의 혁명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공산당에게 충성하라는 내용은 기존의 애국주의의 쓰임새와 같다.

레닌이 이걸 주창하게 된 계기는 러시아 내전에서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각기계층에 속하는 농민들이 생활고로 분열되어서 혁명 조직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아야했고, 이런 문제점들이 증폭한 결과 내전 막바지인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나면서 레닌은 사회주의화 된 애국주의의 필요성을 느끼게되었다.

여러 가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들과 애국주의를 결합해 소련 공산당 내 좌익 작가들과 함께 완성된 이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인민들에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친국가적 정서를 심어주게된다.[22]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 능률 상승과 체제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스탈린 사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퇴색해 1970년대 소련의 헌법이 개정되고 나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5.3. 사회 정책

5.3.1. 과학 분야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걸맞은 과학관의 정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보여지는 과학관은 유물론자이자 마르크스가 비판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과학관의 반복이었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 과학관은 주로 포이어바흐의 저작에 의존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1843년 저작인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와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변증법 논의에서 실용화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큰 영향을 받는데, 이는 『볼셰비키당사』 제4장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1장 「과학으로서의 철학」과 제8장 「유물론적 변증법의 인식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장에서 스탈린은 기본적으로 흔히 사회에서 말해지는 과학인 자연과학과 철학은 하나이며, 그것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다음과 같은 전개를 통하여 성립시킬 수 있다.
1. 모든 물질은 운동을 하며, 물질 층위에서의 필연성에 기초한 기계적 운동을 물질 운동이라고 한다. 자연과학의 선두 학문인 물리학은 이를 연구한다.
2.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 물질이 없이 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3. 모든 의식은 운동을 하며, 의식 층위에서의 필연성에 기초한 의식 행위를 의식 운동이라고 한다.
4. 고대 노예주의 철학에서 중세 영주의 철학, 그리고 자본가의 철학은 지금까지 '의식 운동'에 대하여 물질에서 동떨어진 신비로운 무언가라고 하였지만, 현재 물리학과 심리학의 성과에 따라 이것은 물질의 운동에 기초한 반영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5. (2)와 (4)에 따라, 물질의 기계적 운동과 의식 행위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거짓이다.
6. 따라서, 물질 연구의 선두인 '과학'(Наука)과 의식 운동에 대한 성찰인 '철학'(Философия)은 하나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6번의 결론에 따라 과학과 철학의 동일성을 규정하였고, 이후 논의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 이론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다."라는 것을 정식하였다. 형이상학 또는 관념론 철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철학'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과학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들은 과학과 적대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대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입장은 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물질에 선차성을 두는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보편·진리를 주장하며, 현상과 물자체를 나눈나는 점에서 존재론적 과학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학관은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사회에서 자연과학과 철학 연구를 진행할 때 재차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과학관은 논리실증주의 측면에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하학적 논리에 따라 정당화된 것이고, 그 이후의 변증법 논의도 또한 이 과학관에 기초한 기하학적 논의였기에, 이 과학관이 물질 일반에 적용되지 못 할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은 커다란 직격탄을 맞게 된다. 특히, 1번을 부정할 경우, '변증법적 대립에 의한 발전'이라는 보편성이 깨지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논의되는 갈등을 통한 사회 발전은 논리적으로 이어지기 힘들어진다. 또한 2번을 부정할 경우, 의식은 물질과는 독립된 영역에서 존재하거나, 인식과 인지를 동일하게 보는 속류유물론(기계론적 경험주의)에서 말하는 의식,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1번과 2번,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거짓이 된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밝힌 '노동'의 성격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5.3.2. 교육 분야

레닌은 『공산주의청년학생론』(Задачи союзов молодёжи)에서 청년들이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선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맥적 이론만 아는 것이 아닌 실천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인텔리겐치아는 약자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등 교육기관은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얻은 잉여자본으로 만들어지며,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은 착취당하는 노동자 없이 존재가 불가능하지만, 이러한 고등 교육기관에 몸담을 수 있는 계층은 주로 중상류층 이상의 자녀들이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한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로 세워진 교육기관인 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받은 인텔리겐치아는 이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아야하며,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법칙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기관은 국유화되고, 더 이상 착취 자본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을 이루는 재원들은 모두 노동의 결과물이란 점이다. 공산주의 대중계급의 집단적 노동 산물인 교육기관에서 종사하는 지식인은 역시 노동계급에게 봉사해야 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패거리를 형성하기 위한 '장(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교육을 '낡은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교육의 특징은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란 점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교육 방식이 이론과 실천을 괴리시키는 가장 악질적인 교육 방법이라고 봤으며, 장기적인 지식 발전을 저해하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청년 다수는 자본가의 하수인 역할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근대, 근대를 포함해서 축적된 지식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마르크스주의만을 아는 것이 아닌, 그 전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인문과학적 이론을 학습한 상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20년 10월 2일 러시아 공산청년동맹 제3회 전러시아 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이 책을 통하여, 혹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그대로 공산주의 이론과 과학은 주로 마르크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위대한 천재였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을 19세기에 태어난 한 천재적인 공산주의자 한 명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학설은 전 세계 수백만, 수천만 무산계급에게 교훈이 되었고,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에서 이 학설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마르크스의 학설은 혁명적인 수백, 수천만 계급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얻어진 인간 지식의 확고한 토대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의 발전법칙을 연구한 결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공산주의로 인도된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그의 생전에 발달되었던 모든 학문의 성과를 완전히 소화하여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상세하며 심오한 연구를 진행시킨 결과, 처음으로 위의 내용을 과학적 방법론의 하나인 연역법을 통해 증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것을 단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고작용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바로잡고 비판하였으며 노동운동의 현실을 통하여 검증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형식에 제한되거나 부르주아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도저히 이끌어 낼 수 없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무산계급 문화를 논할 때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오직 인류의 전발전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과거의 문화를 개혁할 때에만 비로소 무산계급 문화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무산계급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산계급 문화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전적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산계급 문화는 자본가, 지주, 탐욕스러운 관료의 압제 아래에서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의 보고를 합법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크고 작은 다양한 지식의 샘은 모두 무산계급 문화라는 바다로 인도되어 흘러들어왔으며 현재에도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혁명적으로 뜯어고친 경제학이 인류 사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을 명시해 주고 계급투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결국 무산계급 혁명이 개시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주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 대표자들과 새로운 교육을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낡은 학교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라고 공격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낡은 학교 교육 가운데서도 유용한 부분은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낡은 학교 교육은 젊은이들의 머리에 너무나 많은 지식의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게다가 그 지식의 90%는 쓸모없는 것이고 나머지 10%조차 왜곡된 것인데, 이런 것을 낡은 학교로부터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내린 결론만으로 한정하거나 공산당의 슬로건만을 암기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창조한 문화유산에 대한 모든 지식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입식 교육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적인 사실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학생의 두뇌를 발달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획득한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공산주의 학설은 내용 없는 공허한 것, 단지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간판으로 되어버릴 것이고 공산당원은 단순한 허풍선이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지식, 즉 과거의 문화유산을 단순히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억지로 머릿속에 틀어넣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인간이 되는데 필수적인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자신의 두뇌를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공산주의자가 중요하고 힘든 활동은 그다지 하지 않으면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할 사실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책에서 이미 내린 결론만을 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하여 허풍을 떤다면 그는 참으로 한심한 공산주의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매우 해롭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보다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그 이상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공산당원답지 못 한 사람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 ( 1920년)

이 연설을 통해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과학적 방법론을 신뢰하며, 지성주의자이자 각종 지식을 쌓아서 선험적인 종합판단을 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 한 합리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사후 스탈린이 채택하였고 소련의 교육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5.3.3. 민족 이론

스탈린주의의 민족이론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1913년 소책자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 저서가 쓰여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초반, 당시 중앙유럽, 동유럽, 러시아 국내의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각 나라에 퍼진 민족감정 문제에 숙련이 덜 된 상태였다. 때문에 서로 과거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럽 지역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자민족의 이익, 즉, 분리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했었으며, 심지어 '민족실체론'을 주장하며 각 민족의 지엽적 특성을 통하여 타민족과 우열을 나누는 행위를 사회주의자들 스스로가 행하기도 하였다.(이오시프 스탈린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모든 경향을 유대인의 시온주의, 타타르족의 이슬람주의, 소수민족의 국민주의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태동은 국제주의적 연대를 감행해야 할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단결하지 못 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같은 연도 11월부터 민족 문제에 대한 책자를 저작하기 시작한다.

이 저서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민족'(또는 국민, nation)이란 개념에 대해 '공통된 언어, 영토, 경제 생활, 문화 이 네 가지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구성하에 기초하여 형성된 집단'이라 정의하였다. 예를 들어, 이 네 가지가 모두 충족하는 집단은 같은 국민성(nationality)을 가진 집단이며, 단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이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충족하지 못 하는 집단일 경우 그 집단은 어떠한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질적인 민족집단이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민족'과 '타민족'이라는 개념은 유동적이며, 절대적이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생물학적 의미에서 '혈족'(ethnic)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들어와서 민족(nation)의 단위를 이루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 한다고 하였다. 원래 이 개념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카를 카우츠키가 먼저 사용했던 개념이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비판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는 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규명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각 '민족'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율화된 문화를 발전시키며 현재까지 이르렀을 것이라는 가설을 배격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있어서 '민족'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요인, 감정에 기초한 집단이며 그것은 역시 심리적 요인에 따라 흩어질 수도, 또는 다시 뭉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각 '민족'이 처한 지리적 여건에 따라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경제 생활도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과거 역사에서 각 '민족'의 발달은 경제 생활에서 한정된 부분을 없애기 위한 타민족과의 교류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문화와 역사성을 공유하는 민족(nation) 집단이 가진 각 문화에 어떠한 이론적 실체성을 넣은 다음에 완전한 문화적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사회주의의 옷을 입은 국민주의(nationalism)일 뿐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문화, 경제적 고립을 가져오는 반혁명의 일종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비판은 당시 러시아 제국 내 영토에서 각 식민지 국가의 민족성에 기초한 분리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이 이론에 근거하여 스탈린은 당시 러시아 내에 존재하던 일부 소수민족은 완전히 러시아화가 되었기에 사실상 그들은 스스로의 분리주의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준거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진화론과 민족실체론적 사고가 강하게 베여져 있었던 당시 유럽인들의 사고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위 입장에 기초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 정책은 극도의 현실주의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5.3.4. 여성 이론

스탈린주의의 여성이론은 기본적으로 당성(黨性)에 충실한 인간을 만든다는 근본적인 관점에 의해 전개된다. 즉, 당성의 입장에서 양성의 지엽적인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에서 여성인권, 여성지위는 그것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적하에 이루어진 면이 크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사회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정체이므로, '남성은 남성의 몸과 자연적 본능, 여성은 여성의 몸과 자연적 본능'이라는 성차별적 양분화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필연적이다. 즉, 자본이 지배하는 곳은 남성이 지배하는 곳이다."라고 주장하여 진정한 여성 해방의 길은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는데, 위와 같은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10월 혁명 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어떤 방향으로 양성 평등 정책을 이어나갈지에 대해선, 독일의 여성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인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그는 당시 유럽의 부르주아적 신념을 가진 근대적 여성들이 투쟁을 지나치게 문화 일면적 투쟁으로 지도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동성애와 극단적인 자유연애주의 및 성개방주의(性開放主義) 등과 연계하여 여성운동을 지도하는 것을 상당히 불필요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나열된 것들은 실제로는 부르주아사회의 저열한 관습을 수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이 가져온 '가사노동에서의 해방'과 '여성의 기본적 선택권 존중'을 성평등 층위에서 커다란 발전이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성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애지 못 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가 인성(人性)에 대해서 '유적존재(Gattungswesen)로서의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욕구하는 개인과, 그것을 이루는 개인, 그리고 이루지 못 하는 개인, 이 세 가지 측면에 기초한 인성론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이라는 정의 아래에서,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도 또한 여성의 특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등가교환이라는 궤변에 익숙한 역사 단계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가진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측면을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외면적인 인지로 '여성성에 따른 욕망하는 여성', '남성성에 따른 욕망하는 남성'이라는 개념을 만들 것이므로, 이 개념 아래에서 여성의 노동도 '욕망하는 여성의 여성적 노동'이라는, '노동'과는 분리된 제2의 무언가로 취급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하에서 여성은 분업에 익숙한 노동자들이 상품을 목도하면서 겪는 인간소외 이전에 본연 인간 노동으로부터 떨어진 행위를 산출하는 별도의 존재라는 틀에서 머물게 되면서 더더욱 심각한 인간소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의 기득권자들과 옹호 세력은 이를 '다양성', '다원성'이라는 이름하에 조장하고 옹호할 것이다.

실제로 볼셰비키 혁명 이후 여성 노동권 및 혼인 관계 내에서의 평등권 확립, 자유로운 이혼 촉진, 여성 투표권 및 선거권 보장, 가부장제 철폐를 위한 각종 법률이 만들어졌으며, 낙태도 또한 합법화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빈곤 여성의 매매춘과 탁아소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여성 인권 문제가 거론 되었는 데에 반해 소련은 보육원, 탁아소 정책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진행 되어 있었으며, 연방 성립 초기부터 여성이 거리낌없이 고급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23]. 당시 이러한 상황을 본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존 리드는 소련 방문 당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소련의 여성 정책을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에 이루어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층위에서 논의된 여성이론은 주로 "여성 해방의 유일한 길은 정치경제적으로 낡은 생산 관계를 끊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의 전형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이념적 흐름은 급진적 문화주의 담론을 거부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는데, 다양한 여성주의 사조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사회주의국가 학계 내에서 여성주의 발전은 정체된 상태로 있었다. 미국의 여성주의 이론가인 케이트 밀렛(Kate Millett, 1934 - 2017)은 자신의 저서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가부장제 철폐에 기여한 혁명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1930년을 기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군사국가화·반혁명분쇄·중공업화라는 명목하에 국가주의 정책을 감행하면서 소련은 가부장제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실례로 스탈린은 1930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여성 해방 기구인 제노텔(Женотдел)을 폐쇄하였고, 1936년에서 1944년까지 낙태를 금지하였다. 1944년에는 '모성영웅'(Мать-героиня)이라는 상훈 제도를 만들여 여성을 가부장제의 틀에 맞추려는 시도를 했다.

5.3.5. 종교관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공산당 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 등에서 종교의 반인민적 정체성을 비판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밝힌 종교비판을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종교는 인간의 삶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와 강한 연결고리를 가진 것이자, 인간이 이성지적 존재로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종교성도 또한 사라질 수 없다."라는 전제를 비판했다. 카를 마르크스 입장에서 종교는 인간의 지식 활동에 커다란 제약이 있을 때 등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숙한 인간이 제반사물을 인식하면서 생기는 각종 모순성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고 그 폭발적인 모순성의 집적체로서 나온 것이 바로 종교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간이 낡은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변증법적 투쟁을 하면 할수록 종교성은 사라지게 되며 결국 완전히 사리지게 되는 지점이 오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회주의와 종교』(Социализм и религия)라는 책자에서 종교를 비판했다. 이 책자에서 비판되는 요소는 종교가 가진 기만성이었다. 종교는 '영원히 평안한 내세'를 내세워서 인민의 자선심과 복종심을 둘 다 고양하였으며, 진정 인민이 스스로 행동해야 할 시기에는 복종심을 고양시켜 봉건영주들의 정치적 지배를 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간 러시아는 동방정교회라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국가 법 체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인민에 대해 상당히 야만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가 행한 종교 비판을 근거로 하여, 낡은 생산관계를 청산하려는 인간의 이데올로기 투쟁 영역에서 과학에 기반한 무신론과 반(反)과학에 기반한 유신론 사이의 투쟁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1909년 저서인 『노동자당이 종교에 대해 가져야 하는 태도』(Об отношении рабочей партии к религии)에 따르면, 그의 입장은 1905년보다 훨씬 급진적인 입장이 되어있다. 이 책자에 따르면 그는 국가 제도와 종교는 확실히 분리해야 하며, 혁명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은 인민의 무신화(無神化)를 위해서 과학과 무신론을 보급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가 종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에 해당하며, 과학과 무신론의 보급 작업은 종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수많은 사회주의국가가 헌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되, 당적 차원에서는 별도로 포교 행위를 엄단하고, 종교인을 무신론자로 전향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실제로 소련을 비롯한 여러 공산권은 '국가 무신론'이라는 명분하에 수많은 종교인을 탄압하였고 종교 시설도 파괴하였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대중이 종교에 접근하지 못 하도록 막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종교의 세 가지 특징으로 반과학(Anti-Science), 반유물론(Anti-Materialism), 반이성(Anti-Reason)을 들었다.

5.4. 역사 이론

5.4.1. 노농동맹론

레닌은 '혁명의 제1단계'(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1905년 ~ 1917년 2월)와 '혁명의 제2단계'(사회주의혁명, 1917년 4월 ~ 1917년 10월)를 구분한 다음, 전자에서는 전체 농민과의 동맹, 후자에서는 빈농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농동맹을 노선을 주장했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시기인 1907년에 저술을 완료한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농민의 혁명성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는 농민의 경제사적 역할과 재화 소유 방식을 분석했을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토지를 사회주의적 경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농민을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부르주아'로 분류하고, 전자와의 협력을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동시에 농업도 또한 사회주의에 걸맞은 생산관계 형태가 노동집약적 산업과는 별도로, 또는 서로 연계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주장의 준거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자본주의 농업 발전의 두 가지 길'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여기서 논해지는 두 가지 길 중 첫 번째는 당시 유럽에서 농업생산력이 상당히 높았던 프랑스를 기준으로 논해진 것으로, 대토지 소유자가 국내 농업에 대한 온건적인 개혁 정책을 전개하여 자본주의화를 앞당기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 양상은 소위,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레닌은 이를 ‘융커 모델’이라고 칭한다) ― 훗날, 트로츠키는 자신의 저서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러시아어: Рабочее государство, термидор и бонапартизм)에서 스탈린의 군사국가화와 농업 집산화 등의 정책을 '보나파르트주의'라고 칭했는데, 바로 이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 두 번째는, 식민지 곡물을 이출하여 국내 지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광범위한 자영농 계층은 붕괴하게 되고 다수의 농업노동자인 빈농을 파생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은 프랑스의 그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이뤄진다. 이 경로는 바로 영국의 모델이다. 그는 동시에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거친 자본주의화하의 지대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는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도 또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맞아들면서 기존의 '소수의 대지주와 압도다수의 소농'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농업 체계가 흔들리고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화 된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로 발전한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이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농업 경제도 잉여가치 독식이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에, 농민도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일정 수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에 기반하여 1917년 2월 혁명의 이후 성립된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더 진보된 농업 경제 구조화를 막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사회주의혁명 달성 후 레닌은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혁명적 농민을 빈농·소농·영세농으로 규정하였고, 중농과 부농은 이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단순히 농업노동자가 아닌, 자립 불가능할 정도의 자영 영세농도 또한 혁명성이 존재하는 혁명적 농민으로 취급한 것이다.

결국 농업의 자본주의화는 봉건적 농업에 비해 진보된 것이나, 농업 노동력의 착취는 여전하며, 대다수 농민은 언제든 자립 불가능한 수준의 소농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력은 정체기를 맞을 것이기에 농민과 농업의 빈곤화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농민이 산업노동자와 같은 혁명의 유적존재로서 거듭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된다. 결과적으로, 토지의 사회주의화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빈농의 인간해방을 위한 것이기에, 레닌은 빈농의 혁명성을 중시하였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농업의 하부 구조 변혁은 상업 이후의 산업이라는 공간의 변혁 속도에 비해서 매우 늦고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는 즉, 농민이 혁명적 변화를 체감하는 것에서 근로대중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이론 농민의 역사적 성격 농민의 혁명성 자본주의 농업 생산구조에 대한 견해 농업문제 대책 사회주의 농업생산구조에 대한 견해
볼셰비키 (소)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인정 발전 토지국유제 가능
멘셰비키 (소)부르주아 불인정 발전 소농자치제 불가능
나드로니키주의 공산주의 형성 주체 인정 퇴보 토지공유제 원시적 농업공동체를 사회주의의 기반이라 생각

소비에트 정부 성립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농정부인가?"라는 논쟁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정부가 노농동맹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노농정부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논의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산업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광범한 노동계급)·농민(빈농·소농·영세농)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의 경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노동자국가'(Workers' State)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저 표에서 맨 밑에 있는 나드로니키주의가 생소할 수 있는데, 저 표만 봐도 다른 일반적인 공산주의와는 핀트가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부터 레닌이 나드로니키주의에게 가한 비판을 살펴보자.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진보적 귀족과 러시아 농촌 내 농민에게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브 나로드에서 파생된 당시 인민주의라고 불린 나로드니키주의(Народничество) 에 대하여 레닌은 농업 발전의 모든 양상을 거부한 극단적인 정체적 사고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농업 소유 구조에서 완전한 악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인간의 선의에서 벗어난 반인류적 구조인 것이며, 과거의 원시적 농업 형태가 선에 해당하는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이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레닌은 당시 유럽국가의 산업 발전과 농업 구조의 변혁을 실증적으로 검토하였고, 마르크스주의의 지대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는 이전 봉건적 농업 구조에 대해서 발전된 양상이라고 보았다. 부농, 소규모 자영농, 임차농, 농업 프롤레타리아가 다양하게 혼재되었으며, 경자유전의 원칙이 지켜지는 자본주의 농업은 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킨 결과물로 나온 것이며, 기본적으로 이 과정에서 지주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켰다. 즉, 이전의 봉건적 농업 구조에 비해 '농지'라는 생산수단에 대해서 인민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기반하여 레닌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경제 문제에 도덕주의라는 허울을 들씌웠다고 비판하였다. 즉, 그들의 주장은 고대사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모든 소유 구조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주장이란 것이다. 레닌에게 있어서 이 인민주의 운동은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이었다.
5.4.1.1. 멘셰비키에 대한 비판
당시 교조주의 입장에서 농업 문제를 바라봤던 율리 마르토프와 레프 트로츠키[주의]를 비롯한 멘셰비키 일원들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강령을 두고 '농본주의'(Аграризм)라고 비판하였다. 멘셰비키들은 농업은 중세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그 발전성을 완전히 다했다고 보았다. 즉,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완전히 산업노동자의 수중에 달린 것이며, 농업의 발전은 자본주의 상태에서 완전히 끝난 것이다. 즉, 이러한 역사 과정 속에서 농민은 자본주의 사회하에서 발전된 토지 소유 구조를 대변하는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버릴 수 없게 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혁명에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는, 혁명성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토지는 원칙적으로 생산수단에 속했기에 농민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층이라고 파악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농민을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주장을 앞서 서술된 농업 발전의 보편성 예시를 들어 비판하였다. 첫 번째로, 만약 자본주의사회의 농업 구조가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고 지속 가능한 수준의 수익을 줄 수 있는 구조라면, 또한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자본주의사회 내에서 경제사적 기득권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멘셰비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 농업 구조는 발전을 다한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농민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배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토지'는 '토지 소유자에게 있어서 생산수단'의 성격이 있는 동시에 '허용받은 프롤레타리아가 다루는 (부르주아의)생산수단'과도 같은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농업 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수익이 소수의 자영농에게 몰리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부농을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하고, 부농은 다수의 소농에게 농지를 임대하여 '농지'를 '토지 소유자에게 있어서 생산수단'이라기보다는 '허용받은 프롤레타리아가 다루는 (부르주아의)생산수단'과 같은 것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토지를 임차하는 임차농은 사실상 봉건 사회의 농노나 소작농과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임차농의 수가 임대의 주체인 지주(부농)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이며, 그것은 자본주의 농업 구조의 일반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당시 멘셰비키는 소농을 포함한 모든 농민을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라고 규정하여 타도 및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현실에 전혀 맞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지도 않다는 것이 레닌의 비판이었다. 두 번째로는, 농업은 공산제 사회에서 노예제 사회로 넘어왔을 때, 그리고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넘어왔을 때 항상 변혁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러한 변화의 양상이 자본주의라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 향하는 중간 단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실증적으로도 자본주의 농업 소유 구조는 농업 생산 구조의 완벽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농지 임대를 금지시켜서 소농의 수가 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농업생산력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하 농업 구조는 다수의 소농과 극소수의 부농의 양극 상태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생산력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시키면서 적은 생산력을 유지하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구조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산업의 양태와 자연스러운 발전 구조를 이루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레닌의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의 노동이 경제적 기득권에 의해 잉여가치로 전유될 수 있거나, 실제 이런 상태에 있는 모든 계층' 즉, 자본주의국가에서 경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놓여져 있는 모든 계층에게 혁명성을 부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노동자와 빈농만이 아닌, 영세자영업자, 지식인도 또한 혁명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비판했던 멘셰비키의 입장이 훗날에 형성된 트로츠키주의가 그대로 고수하였다고 깠는데, 이들은 '노동자에 의해 지도되는 농민'만이 가능할 뿐, 대등한 위치에서의 노농동맹은 불가능하며, 혁명의 동력은 오직 산업프롤레타리아라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며 비판했다. 또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우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농업자본을 희생시켜야 한다."라는 농업희생론(農業犧牲論)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멘셰비키의 입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며 깠는데 두개 모두 적절한 비판은 아니며, 두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한 억까에 가깝다.

5.4.2. 유물사관

레닌이 사적유물론의 단계론적 측면을 무시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멘셰비키와 카를 카우츠키의 단계론 해석에만 머무는 주장이다.[25][26]

스탈린은 레닌이 오히려 단계론의 취지에 어긋나는 극좌모험주의적 주장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가했으며,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의 단계론 해석에서 정통마르크스주의의 교조성을 철저히 비판하고 현실에 맞게 이론을 보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이라는 개념과 20세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단계로 이르렀다는 제국주의론이라는 것이다.
5.4.2.1. 단계론
레닌은 자신의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러시아가 기존의 농경에 기반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혁명의 진입기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또한 1917년 4월테제에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이제 자본주의로의 도약이 완료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에 부응하여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산업노동자 계급이 선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멘셰비키와 자주 충돌을 야기하는 입장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와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판했었는데, 이는 멘셰비키가 이 두 가지를 결정론적으로 연계시켜서, "국내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가 없다면, 사회주의로의 혁명도 또한 절대불가."라는 국민주의·교조주의적 해석을 가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서 멘셰비키와 이에 동조하는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레닌의 이러한 지론은 생산력 발전을 국가의 단위가 아닌, 세계의 단위에서 보아야 한다는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왔다. 생산력의 과잉 시대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 혁명의 고조는 제국주의 분쟁의 중심지인 유럽에서 산발적이며, 분산적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유럽 프롤레타리아 중에서 가장 계급적으로 각성된 의식을 갖고 있다."라는 그의 언급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후 1년 후인 1918년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и ренегат Каутский)라는 저서를 통하여 독일 내 수정주의자들과 이른바 카우츠키류의 교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논의 차원을 오직 국경으로 선이 그어진 국내 안에서의 생산력 발전에 국한한다는 점이서 비슷한 반혁명 사조라고 비판하였다.
5.4.2.1.1.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
한편, 번외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아시아 생산양식에 관한 입장을 한번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봉건제와 차별화 된 정체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유물사관의 입장에 따라 당시 아시아 사회를 노예제와 봉건제의 성격이 혼재된 정체적 사회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이에 기반하여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봉건제의 상태와 다른 것이며, 모든 경제 요소에 대한 소유 권리를 하나의 전제군주에게 전유한 전제주의 체제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아시아의 생산양식을 봉건제와 다른, 특수한 무언가라고 보지 않았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동시대에 판별했던 아시아 사회에 대해 '봉건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즉, 스탈린은 당시 아시아에 대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도식에 맞춰서 해석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동양의 전근대사회의 성격을 서양 봉건사회와 비슷한 단계의 사회로 간주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인정되지 않는다. 스탈린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양의 전근대 국가도 또한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발전성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산업화 시대 당시 반식민지(反植民地) 대열에 선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전근대의 자국을 봉건사회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들어서 아시아의 생산양식에 대한 카를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계론적 해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령,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양의 사회구성체는 서양의 사회구성체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 되며, 동양 사회를 자체적인 발전성이 없는 정체된 사회로 봤다는 점에서 이 사관은 제국주의 침탈에 이용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북아 지역의 사회도 봉건사회로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 사회는 봉건제의 성격보다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췄기 때문에 역시 논쟁의 여지가 크다. 두 문제와 관련된 논쟁은 역사를 보는 관점 중 하나인 역사주의 도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및 비판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4.2.1.2. 인민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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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개념과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영향은 전지구적이라는 세계혁명적 관점에 기반하여 10월 혁명을 동부 유럽 지역 사회주의혁명의 시초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서유럽에 비해 뒤쳐진 상태란 것은 그도 인정한 바였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본주의적 본원 축적을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의 방식으로 축적하게 되는데, 1936년 12월 5일 전 연방 소비에트 제8차 대회는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헌법(스탈린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 기간을 포함하여 1918년에서 1936년 사이까지를 사회주의 발전 단계라고 규정하게 되었으며, 헌법이 채택된 시점에서 소련은 더이상 자국을 사회주의 발전 단계가 아닌,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국가'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 발전 단계’가 사회주의와 이질적인 특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1918년에서 1936년 사이의 사회 구성도 사회주의로 보고 있었으며, 1936년 이후에 대해서도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하고 수많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공산화되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유럽 지역의 혁명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한반도 이북 지역도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규정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따른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 뿐만이 아닌, 민족자본가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중산쁘띠부르주아의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으며, 원칙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정체였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인 마오쩌둥은 1940년에 펴낸 저서 『신민주주의론』에서 중국 혁명의 성격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은 인민민주주의 노선과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많은 공산당 통치 국가가 국호에 '사회주의'를 넣지 않고, '민주주의인민', '인민', '인민민주주의' 등을 넣은 것도 위와 같은 단계론에 기반한 것이다.

이 상태하에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하급인민위원회에 따른 지역 관리, 토지개혁 등을 수행하여 자본주의 잔재를 잠식하고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집단에 의한 반혁명기도를 분쇄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는 목적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민민주주의' 또는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명확한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산업노동자·빈농이 지도하는 혁명적 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차별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5.4.2.2. 제국주의론
5.4.2.2.1.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의 불균등 발전'(러시아어: Неравномерное экономическое и политическое развитие)을 정식화하였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불균등성 ― 사적 소유와 이윤추구, 그리고 생산의 무정부성으로부터 촉발되는 ― 에 기반하고 있다. 소소유 및 소생산에 기반한 소영업가들은 자본주의 스스로가 갖고 있는 성질인 불균등성에 의해 몰락하게 될 것이며, 이익이 소수 대자본에 집중할 것이다. 그 결과 독점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원료 생산지와 강매지를 찾기 위해 제국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레닌은 영국이 인도를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한 18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하였으며, 대륙 유럽의 경우는 1860년대 말 식민지 팽창을 시작한 프랑스를 기점으로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는 여전히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가는 시기였기에 제국주의 포화 상태는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가 이 시기에 세계혁명론을 주장한 이유가 바로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이러한 단계에 머문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불균등성이 제국주의 수준에 미치지 못 한다면, 자본주의국가는 '서로 협력하는 경제 관계로서의 상호의존성'을 버리지 못 한다. 결국, 일국혁명은 '자본주의세계의 공고한 연합'에 의해 진압될 것이다. 레닌은 바로 이 사건이 1871년 파리 코뮌 진압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제국주의 팽창이 극에 달하면서 성숙한 제국주의국가가 성립되고 다른 제국주의국가와의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제국주의국가는 더는 다른 제국주의국가와 협력 관계를 가지지 않게 되며, 자본 경쟁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제국주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필연적으로 제국주의국가는 저발전된 자본주의국가 또는 봉건국가를 자국의 제국주의 팽창을 위해 정치·외교·경제적으로 재분할하기에 이른다.

레닌은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민이 전쟁에 나가 죽을 것이며, 기아·역병·학살을 동반한 전쟁의 참상은 이전의 전쟁과는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제국주의 체제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광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제국주의를 진압하는 대의에서 일국혁명의 정당성이 생기게 된다. 제국주의세력의 세계 재분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약한 고리'가 등장하게 되며, 그 약한 고리에서 혁명이 일어날 경우, 제국주의블록은 연합된 저항력을 보이지 못 하게 된다. 레닌은 바로 그 재분할의 결과가 제1차 세계대전이며, 약한 고리는 차르 체제의 러시아 제국이라고 하였다.

불균등 발전법칙에 따르면, 제국주의국가는 필연적으로 이윤율을 증가시켜 자본을 팽창하기 위해 지속적인 세계 재분할 시도를 감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차르 러시아의 경우와 같이 '약한 고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고 제국주의국가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대립(경쟁)'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 혁명에 쉽게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제국주의 체제는 혁명에 의해 무너지게 되고 자본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레닌은 제국주의시대에서 보편성을 갖는 혁명은 세계혁명이 아닌 일국혁명이라고 하였다. 즉, 그에게 세계혁명은 불균등성이 심화되지 않은 자본주의 단계에서나 유의미하며,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약한 고리'에 집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일국혁명이 더 선호되는 것이다.
5.4.2.2.2. 민족자결주의(민족해방)
정치·경제의 불균등 발전'에 따라 제국주의국가는 생존을 위해서 계속 세계를 재구조화 ― 내정간섭, 침략전쟁 등을 동반한 재구조화이다. ― 하는 데에 치중할 것이고 그 결과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약한 고리'가 생기게 된다. 동시에, 제국주의국가는 초과이윤 혜택을 국내 인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각종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더불어 노사협조주의에 기초한 노동자 기만 전략을 사용할 것이고, 이를 가속화하는 이른바 '노동귀족'(독일어: Arbeiteraristokratie)은 자본가와 타협하여 '사회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기회주의 노선으로 점철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자발적인 혁명을 더더욱 어렵게 한다. 유럽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독일 혁명의 실패와 헝가리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과 기타 볼세비키 일원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결과로 중국과 같은 아시아를 새로운 혁명의 발산지로 여겼다. 레닌이 보기에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이 재분할 대상으로 여기는 핵심 국가로, '약한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확률이 높은 지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20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공산당이 1921년에 창건됐고, 레닌이 지도하는 소련은 반제국주의 연대라는 명분으로 쑨원의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중국 혁명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모순'(民族矛盾)이란 개념을 새로 만들고, 중국 혁명의 성격을 재진단하게 되는 핵심 사건이었다. 오늘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언급되는 '민족 모순'은 어디까지나 '계급 모순'을 통해 파생된 문제로 여겨진다. 이는 불균등 발전 법칙에 따를 경우 쉽게 이어지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자본주의는 폭발적인 계급 모순을 내재하고 있는 생산관계이다. 결국 제국주의가 약소 민족을 억압하면서 생기는 '민족 모순'은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이는 '계급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계급 모순은 곧 민족 모순이며, 민족 모순은 곧 계급 모순으로 화한다.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국주의 단계에 올라선 시점에서 제국주의국가는 대중 통치에 대한 식민지 지배 구조의 의존도가 상당한 것인 바, 이러한 의미에서 약소 민족의 '민족' 개념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체제의 약한 고리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칙적으로 반제민족주의자들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장려한다.

5.5. 전술 이론

5.5.1. 일국일당 원칙

러시아 내전 도중인 1920년 8월 7일, 레닌은 제2차 코민테른 대회를 통하여 각 식민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당의 조직과 동시에 당은 오직 하나여야 하며, 종파주의 활동을 엄금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국일당원칙은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중국의 경우는 약 1년 후에 중국 공산당이 창건되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도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당 조직 원칙에서 파당주의로 대표되는 종파주의는 엄금되며, 한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세부적 주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당에 단결된 상태여야 한다.

5.5.2. 전위당론

레닌은 당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들이 전위당의 단결이 없이는 서로 종파 분쟁에 휩쓸려서 혁명의 퇴조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공신력이 없는 지휘체가 없이 이들이 적극적으로 파업을 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는 전복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때문에, 공산주의 및 기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알고있는 소수의 혁명가들이 전위대를 만들어 직접적인 폭력 투쟁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전위당론(Vanguardism, 前衛黨論)이라고 한다. 이는 사회주의적 대중정당론을 주장했던 멘세비키와 전적으로 대립되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세부적 주장 차이는 다음과 같다.
분파 입당 조건 당의 주요 역할 당의 규율 당의 운영 방식
볼셰비키 산업노동자, 농민, 빈민, 혁명적 병사 및 지식인 중 선발된 우수한 자 하나의 목적 의식으로 단결한 통일성에 기반하여 노동운동, 무장봉기, 이념투쟁 등을 직접 지휘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혁명적 집단주의에 근거하여 엄격한 당성(黨性)을 유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한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
멘셰비키 혁명에 동참하는 모든 대중 혁명 세력 사이의 느슨한 연대를 통한 외연 확대와 이에 기반한 노동운동 지원 개인성과 자유의사주의의 기초 위에서 혁명 활동에 맞는 규율을 성립 외부 조직, 당원, 당 지도부의 자유참여에 의한 운영원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당 조직 이론은 서로 화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나게 되었고 결국 1912년 서로 독립적인 당(黨)임을 선언하였다. 1918년 이후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당(러시아 공산당)의 독단주의와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을 요구했으며, 1927년부터는 해외에 망명한 멘셰비키들에 의해 해당주의(解黨主義)가 주장됐지만, 전위당론은 여전히 공산당의 기본적인 조직 원리이자, 당 조직론으로 굳어진 상태이다.

5.5.3. 인민 전선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은 1919년 창립과 동시에 각국의 공산당 지부에 사회민주주의자를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맹공 태세는 1930년대 독일의 나치 집권 등의 수많은 반동적 사건이 터졌을 때도 유지되었다. 결국 1935년 8월 25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중심으로 반파쇼인민전선론이 채택되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통일전선(United front, 統一戰線)이라 불리는 것의 시초이다. 주요 골자는 반파쇼 항쟁을 위하여 각국의 민족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5.6. 인식론

스탈린은 레닌주의 인식론을 계승하였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였으며, 사실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과도 같은 부분이다.

5.6.1. 변증법적 유물론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국정 철학으로 교조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유물론 서적을 저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볼셰비키당사』 제4장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있다. 스탈린 사후인 1958년에 저작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와 1960년에 핀란드 출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오토 빌겔모비치 쿠시넨(러시아어: Отто Вильгельмович Куусинен)이 저술 및 출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는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체계화 하여 정리한 서적에 해당된다.

칼 마르크스의 동료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변증법에서 3대 핵심 법칙으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ㆍ양질전화ㆍ부정의 부정을 내세웠다. 스탈린은 이 입장을 계승하였는데, 1938년 초판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기에 몇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부정의 부정에 관련된 변증법 논의에 큰 이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사후인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출판된 변증법적 유물론 교재는 다시 이 법칙이 추가되었다.
5.6.1.1. 개론
이오시프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일반론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고, 이전의 형이상학적 변증법과 철저히 구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은 물질 구성의 통일된 전체이며, 개물 상태로서의 자연도 또한 물질 구성의 통일된 전체의 산물이자 그 자체이다.
2. 자연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상태이다.
3. 자연 개물에서 의식으로의 발전은 양질전화로서 나타난다.
4.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각 대립물은 투쟁을 제반발전법칙으로 갖고 있으며, 그것의 발전은 종래의 구조에 대한 질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기에 혁명적이다.

이어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주요 함의이자 이것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2.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3.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이행으로서 발전
4.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5. 변증의 일반적 도식으로서 부정의 부정 법칙 (스탈린 사후에 추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관념론 철학과 비교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1. 세계는 객관 실재의 총체로서 물질이다.
2. 존재(Бытие)는 모든 객관 실재의 가리키며, 물질의 자기 운동과 다르지 않다.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며, 의식은 변증 투쟁을 통하여 변화·발전하고 객관 실재의 모순 정도를 통일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자연 법칙에 관한 지식은 사회·역사 발전 법칙, 객관적 인식론(물리학·심리학 등), 분석적 생물학에 따라 규정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과학을 규준한다. 따라서, 변증법의 논리 위에 세워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경제적 생산력에 따라 진행되는 사회 발전 경로는 나선적 발전성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문명화 된 인간과, 그렇게 되지 못 한 인간을 공산주의 철학 일반론에 따라 구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관점은 인지심리학 이론가인 레프 비고츠키(Лев Выготский, 1896 - 1934) 등이 나올 수 있는, 인지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지만, 70년대부터 거듭된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 DIAMAT 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생산 관계와 생산력 간의 모순으로 인해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기존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넘어서 모든 자연물의 대립과 투쟁을 통한 변화-발전을 교조화 했던 소련의 정통 변증법적 유물론 진영에게 이론적 수정의 경향성을 불러왔다.
5.6.1.2. 물질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물질은 기본적으로 불멸성을 가지며, 유(有)의 존재 양식 일반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정의하는 물질 개념은 과학에서 다루는 물질 개념을 포함하면서도, 철학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형식논리학을 비판하였다. 그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과 같은, 쪼개지지 않는 미세한 고체라는 물질 관점이 형식논리학이 갖는 물질 관점의 한계라고 비판하였고, 근대 이후 과학의 성과를 옹호하는 한편, 물질이 각 대립물 사이에서 진행되는 투쟁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현상하는 것이라고 봤다.

물질은 대립물의 투쟁, 상호 통일의 과정 자체이며, 끊임없이 자기 운동하는 실체이자 존재 본질이고, 의식을 파생하며, 각 모순의 진행 수준을 매개하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물질에 대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의를 접수하고 이것은 유(有)의 존재 양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물질은 만물의 제일 근원이며, ‘있음’ 그 자체로서 보편적인 존재 양식이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질 상위에서 물질을 창조하는 그 어떠한 존재가 존재할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며, 만유(萬有)가 물질의 스스로의 존재 양식이면서 동시에 파생물이라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

유(有)의 존재 양식은 그것이 본래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동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존재 그 자체를 규정한다는 성격에서 정적 성격을 갖고 있다. 동적 성격에서 유의 존재 양식은 과학에서 인식하는 물질의 성격으로 작용한다. 근원 물질과 그 물질로부터 생겨난 여러 입자는 상호 작용을 통해 다양한 입자를 만들어낸다. 근원 물질은 만유를 파생하는 동시에, 그것의 성질 일반을 규정하는 최상위의 원리이다.
5.6.1.3. 운동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연상태의 모든 물질이 '대립물의 투쟁' 상태에 있다고 분석하였고, 이것을 운동(Движением, 運動)의 일반성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만물은 운동 상태에 있는데, 가시적으로는 멈춰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간이 대립물을 실제적으로 관찰할 때는 그들 투쟁 상태에서 규정되는 한 단계의 양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 양태는 시간성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이 변화는 폭발적이고 혁명적이나 가시적·감각적으로 관찰하면 여전히 멈춰있는 형태로 보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운동은 각 대립물의 상호 투쟁을 의미하며, 모순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운동의 존재는 모순 진행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운동은 각 대립물의 상호 연관을 칭하는 것인데, 이는 의식 행위인 변증 투쟁을 포괄하고 있다. 이는 “사변적 사유는 오직 사유가 모순을 자기 내에 굳건히 붙잡고 있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다.”라고 한 헤겔의 입장을 계승한 것인데,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변적 사유는 계급 의식으로 여겨지고, 계급 의식은 모순을 이해·파악하면서, 모순이 갖는 투쟁의 성격을 그대로 존속하기 때문이다.

사물 현상들이 상호 의존하고 제약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 현상은 요소와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속성에 맞게 운동하며 다른 사물 현상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사물현상들을 연관과 운동의 견지에서 고찰하여야 그 본질과 속성, 운동법칙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성과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과학적 방도를 찾을 수 있다.

물질의 존재형식으로 '운동 상태'를 들고, 다양한 입자를 거론한다. 당시 양자역학이 발달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스탈린은 영국의 과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의 물리학 연구 성과를 거론하면서, 원자도 또한 투쟁 상태인 다수의 입자 상태로 나눌 수 있으며, 그 나눠진 입자도 또한 투쟁 상태인 다수의 다른 입자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전자, 양성자 등도 운동의 한 존재형식인 것이다.
5.6.1.4. 의식
의식(Сознание, 意識)은 물질의 반영으로, 물질이 없으면 의식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식은 독자적으로 탄생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이 창조된다면 의식은 필시 모순을 갖고 있기에 변증법적 과정을 도출시키는 원인자로 작용하고, 이러한 점에서 의식은 인간이 행하는 변증 투쟁의 주요 재료로 된다.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 발전과 과학 발전, 그리고 제도화 등도 모두 인간의 의식 활동에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 제4장에서는 사유에 따른 투쟁 행위를 의식 활동으로 규정하며, 물질 반영을 통한 사유의 창조는 물질에서 의식으로 나아가는 일반적 경로라고 규정하였다. 예를 들어, 인간이 '사과'라는 과일을 관찰하고 그것의 맛, 색, 식물학적 특성 등을 고려해야겠다는 의식으로의 발전이 진행된다면 이것을 위의 발전형식의 한 예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고도의 활동은 높은 지능을 가진 인간에게서 특출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의식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조건적 반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1. 인간이 가진 물질적 특성과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 특성에 따른 기계적인 반응.
2. 사물 인지에 따른 기계적 반응인 가시적 인지에 따른 모든 후속 행위.

즉, 인간이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특수한 물질에 따른 기계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의식 행위가 아닌, 대립물의 운동 ― 물질 자체의 기계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도 역시 변증 과정에 포함이 되는 요소이나, 의식은 아니다. ― 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뜨거운 것에 닿아서 자연스럽게 그것으로부터 멀리 피하게 된다면 이것은 의식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가시적 영역에서 보여지는 것에 대한 후속 행위도 또한 의식 활동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전자와 같은 의식과 후자와 같은 감각도 또한 물질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둘 다 물질성을 내재한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둘은 하나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는 물질이 필수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고차적 의식 행위를 하는 '이성적 인간'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내용을 갖고 있는 인간의 의식과 그로 인한 모든 의식적 활동이 외부로 작용할 때, 그 의식을 그대로 대상에게 이전되지는 않는다고 보았으며, 의식이 ‘이성의 논리가 작용하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즉시 그것은 현상 세계의 물적 자극으로 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대상은 사유 주체가 가진 변증법적 모순성을 곧바로 이을 수 없으며, 사유 주체의 실천은 대상에게 일종의 ‘복잡성이 증대된 물적 자극’인 것이다. 이러한 물적 자극을 파생시킨 사유 주체가 가진 변증법적 내용을 대상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집단적인 실천과 투쟁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스탈린은 의식이 순수한 형태로 대상에게 이전될 수 있다는 류의 모든 믿음은 관념론적 허상이며 비과학에 지나지 않다고 하였다.

의식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레닌의 『철학 노트』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그는 착취사회의 철학을 연구했고 그 철학들이 갖는 '의식에 대한 규정성'을 밝혔다. 예를 들어, 고대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플라톤은 인간이 갖는 의식과 세계 사이가 갖는 형이상학적 연결성을 기하학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자기의식을 부정하고 오로지 대상의식만이 존재한다고 봤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으며, 부르주아 철학자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은 오직 그것의 합법칙성을 자기의식 속에서만 찾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 철학은 인간 의식과 세계운동의 합법칙성을 고려하려는 시도인 점에서 발전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의식과 대상의식 사이의 연결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열렸다고 서술했으며, 이후 고도의 의식 활동인 노동과 인간해방이라는 두 주제를 밀접하게 연결하여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최초의 철학자가 카를 마르크스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헤겔이 정의한 사유의 성격을 ‘이성적 인식’으로 대체하였다. 가령, 대립물의 투쟁으로서 현상하는 물질, 그 물질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정도를 포함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서 변증 없이 한계가 존재하면서도, 이성적 의식은 사유 일반이 갖는 〈대립물의 통일〉을 추구한다. 대립물의 통일을 추구하는 이성적 인식(사유)의 성격은 다시 각 의식의 모순성을 파악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모순의 발전적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스탈린은 이성적 의식은 계급 의식이라고 하였다. 계급 의식은 제반 경제 활동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인식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5.6.1.5. 시공간성
이오시프 스탈린은 물질 자체의 매개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항시 따라오나, 그의 반영인 의식이 전달되는 모든 과정은 공간성만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관념론 철학과 상당히 비교되는 것인데, 상당 부분의 관념론 철학은 절대계인 의식 세계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라는 것을 전제로, 그러한 반영성을 갖춘 의식은 변증법적 과정에 들어설 때 절대계의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기에 인과율의 대표적 표식인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으나, 그러한 의식도 어떠한 추상적인 작용으로 되기에 공간성은 필연적으로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투쟁 행위는 이러한 의식성과 그것을 둘러싼 또 다른 물질 세계의 중첩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시간성과 공간성 두 가지의 이중적 성격을 모두 담는다고 하였다. 시공간성 논의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초월적 관념론부터 시작됐지만, 칸트는 의식 활동에서 나타나는 '관념'(Idea)에 실체성을 부여한 동시에 관념과 질료(Hyle)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을 두었으므로 유물론에서 논의되는 시공간 논의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의식 활동이 작용적 성질을 전혀 갖춘 것이 아닌, 완전한 무(無)의 것 ― 여기서 논해지는 '무'(無)는 프리드리히 헤겔이 밝힌 변증법 과정에서 반정립을 통해 부정되는 이전의 정(正)이 갖는 '존재의 지위에서 탈거된 상태로서의 無'와는 다르다. ― 이면, 의식 활동은 있을 수 없으며, 의식 활동은 물질 차원에서 연장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완전히 독립된 무언가라면 이것은 유물론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든 대립물의 투쟁과 의식 활동에는 공간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후 일반상대성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으로 되고, 양자역학의 발달이 추동되면서 공간성과 시간성을 따로 분리하기 어려워졌고, 소련 유물론 학파는 별도의 의식적 공간성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만드는 계통과, 의식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에 의한 반영은 물질에 의한 운동의 복잡성 증대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계통으로 나뉘게 된다.
5.6.1.6. 모순성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라는 '양질전화', 그리고 발전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인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대해 언급했고, 모순성(Противоречие, 矛盾性) 부분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라는 주제로 다루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대립물의 통일'은 원래부터 모순을 줄이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따르면, 모순성은 모든 의식 활동으로부터 인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의식은 모순성을 갖고 있으나, 동시에 그 모순성을 인식하고 변화·발전으로 향하는 적극성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사유 자체이다. 스탈린은 의식의 모순성과 그 모순을 발전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화하였다.
1. 물질은 각 상호 모순을 체화하는 대립물의 총체이며, 이를 물질이라고 한다.
2. 의식은, 그 의식을 파생시킨 대립물의 총체로서 물질이 갖는 모순을 포함한다.
3. 모순성이 존재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자유의 요건을 충족할 수 없으나, 이 의식에 대한 경험적 실천과 내재적인 성찰 과정인 변증 행위는 자유의지적이다.
4. 모순성이 변하면 양태도 변화하며, 변증법적 투쟁 상태에 있는 모든 의식은 그것이 변증법의 층위에서 머무는 한 '존재'(Бытие)라고 볼 수 있다.
5. 모순성을 인식한 의식은 자유의지적이며, 모순성을 인식하지 못 한 인식은 기계·감각 인지이며, 이는 결정론적이다.
6. 물질의 기계적 운동으로 대표되는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Неантагонистический противоречие)미며, 노동과 그 노동 이하의 산출 행위에 연계된 생산력, 그리고 생산관계 사이의 의식 모순은 '적대적 모순'(Антагонистические противоречие)이라고 한다. 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나, 후자는 폭력, 그리고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다.
7. 투쟁 당면에서 발전의 본질을 담당하는 모순은 '주요 모순'(Основное противоречие)이며, 이 주요 모순으로부터 파생된 모순은 '파생 모순'(Полученное противоречие) 또는 '부차 모순'(Вторичное противоречие)이다.

(2)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무언가에 대해 사유(변증)할 때라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기계적인 인지는 자유가 아닌, 사물의 반영성에 수동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2)에서 (3)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의식 행위 안에서의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의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양질전화' 목록에서 상세히 논한다.

스탈린은 유인원이 생물학적 진화를 통하여 거듭 현생인류로 발전하였을 때 추상성에 대한 접근도도 또한 높아졌고, 그 결과로 자연만물에 대한 의식 행위를 해나가면서 스스로 모순을 체험하고 체화하는 동시에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투쟁 행위를 이어나갔다고 봤다.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일반법칙으로 '양태'로서 나타난 것이 경제사적 층위에 있고,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단계론에서 말하는 발전 양상의 흐름이라고 하였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제5장의 변증법에 관한 내용을 해석했을 때, 모순성에 따른 양태의 변화 양상은 단순히 경제사적(역사적) 층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 발전도 이러한 모순성의 인식에 따른 발전의 연장선이라고 하였으며,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와 그것의 해결 방식에도 또한 모순성 인식에 기초한 모순의 발전적 전환에 있다고 봤다.

(7)을 통하여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다. 가령, 주요 모순을 부차 모순으로, 부차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하여 혁명역량자원을 편성한다면 혁명에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5.6.1.7. 양질전화
『변증법적 유물론』 제6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어떻게 기계적 물질일 뿐인 인간이 추상적 사유로의 진화가 가능했냐에 대해 양질전화(Закон перехода количественных изменений в качественные, 量質轉化)의 논리로 설명한다. 스탈린은 모든 분자 구조는 물질이고 따라서 분자의 집적체인 인간도 또한 물질이라고 하였으며, 그 증거로 생물학 분야에서 진화론의 발달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을 이를 요약하며 “의식은 물질 발전의 한 산물이다.”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모든 이질적인 물질의 혼재는 근원물질의 나열이며, 그것에 '질적인 변화'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양적인 변화'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에서 논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사물은 원자(atom)라는 쪼개지지 않는 성질의 단순 나열이라고 한 동시에 그것의 질적으로의 전환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후대에 등장한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나열 속에서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유의지(ataraxia)의 발현의 가능성을 논했다. 물론 후자의 개념은 '인간의 쾌락'이라는 층위에서만 자유의지를 다뤘기에 한계가 있었으나 이러한 류의 철학은 '자기의식의 철학'이라는 최초의 형태를 가져왔으며, 스토아 학파라는 통일적인 유물주의 사고로 나아가는 데에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 갖는 의식적 활동은 물질에 내재된 본질적 속성이며, 그것은 근원물질의 양적 배열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 행위가 갖는 시초적 운동성은 물질의 일반성의 발현에서 추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스탈린은 이러한 '인식 활동에서의 자유의지성'은 오직 본질적인 대립물의 투쟁에서 도출된 양질전화로부터만 나올 수 있으며, 인간은 고차적인 물질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대립물의 투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속성을 포함하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물질의 산물이기에 동시에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이며, 해방의 가능성이 열린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추가하여 스탈린은 '잘못된 진리'를 설파하는 종교, 그리고 사유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시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류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철학은 오히려 인간에게 예속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5.6.1.8. 부정의 부정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독일어: Das Gesetz der Negation der Negation, 러시아어: Закон отрицания отрицания)이라는 말은 프리드리히 헤겔의 '삼단법'으로부터 생겨난 용어이며, 이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신의 저서 『반뒤링론』에서 유물론의 변증법 문제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재정립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각 분야에서 제반물질이 갖고 있는 보편적 속성으로의 다가감'의 원인으로서 변증법을 명시하고 있다. 이후 1958년에 출판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에서는 다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문화 층위에서의 혁명은 그것이 문화 혁명이라는 것을 표식할 수 있는 공통된 속성이 존재하며, 경제나 정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회주의국가에서 문화는 전위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능동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며, 경제는 국유화와 노농동맹에 기초한 계획 경제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정치는 혁명적 당을 중심으로 뭉친 노동자·농민의 직접 통치 기구인 소비에트의 보편화로 대표된다. 모든 인류는 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인류는 낡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삶을 꾸리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간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형태의 모순성을 다시 체득하게 되고 다시 투쟁 상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러한 모순 관계에서 해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쏟을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매단계에서 나타나는 모순 정도의 차별성에 따라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따른 변증 과정의 진척도는 느릴 수도, 빠를 수도 있으며, 반동의 가능성도 갖고 있는데 따라서 이 발전 양상은 선형적인 동시에 나선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6.1.9. 보편성과 개별성
『변증법적 유물론』 제7장에서는 「보편과 개별」·「내용과 형식」·「본질과 현상」·「원인과 결과」·「필연과 우연」·「가능과 현실」·「진리와 오류」라는 일곱 가지 소주제를 논하고 있는데, 모든 소주제는 보편성(Общее, 普遍性)과 개별성(Особенное, 個別性)을 밝힌다는 목적하에 쓰여진 부분이라 본 문서에서는 보편성과 개별성에 대해서만 다룬다.

이 주제에 따르면,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변증 단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닌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붉은색 수성물감이 들어간 붉은 빛을 보이는 물, 초록색 유성물감이 들어간 초록 빛을 보이는 기름이 있다고 가정할 때, 변증 단계에서 '색'(色)을 중시한다면 해당 액체의 색깔이 보편적인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 특성은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다른 단계에서 해당 복합물의 액체 속성을 중시한다면, 그것은 물과 기름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요소로, 그리고 색깔은 개별적인 요소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보편 및 개별 판단은 그 물적 토대에 기초한 판단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 머물러있다. 즉, 보편성과 개별성은 본질적 층위에서 매 변증 단계에 따라 내용이 변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단일함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보편성과 개별성이란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에서 보편적인 것은 경제사적 층위에서 논해지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첨예한 계급모순, 또는 다른 모순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모순은 인류사에서 인류의 진보를 이끈 주된 변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개별성도 또한 혁명의 보편성을 견지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된다. 개별성은 본질적으로 보편성으로부터 나온 파편화 된 단면이라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개별성은 혁명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족 모순, 인종 모순 등 다양한 것들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스탈린은 이를 '단일성'(Единичное, 單一性)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매단계에서 개별성으로 취급되는 것도 변증 과정에서 보편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일반적 성질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변증법과 구분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변증법은 처음부터 고정된 보편성을 미리 정해놓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취급하며, 개별성은 영원히 개별적인 것이고, 보편적인 것은 영원히 보편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변증주의에서 실천은 중시되지 않으며, 오직 외부에 실체하는 진리라는 신비적 요소(객관적 관념론)와, 내적인 주관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라는 주정주의(主情主義)적 진리관(주관적 관념론)만을 강조한다.

보편성과 개별성을 정립한 것에 기반하여 나머지 여섯 가지 소주제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내용(Содержание)형식(Форма): 혁명가들의 집단 토론을 통해 결정된 내용은 시간적으로 이전에 관찰된 것에 기반한 내용이다. 이러한 점에서 결정된 내용은 형식이다. 반면, 실질적 내용은 실천의 과정에서 계속 변화한다. 혁명가들은 관찰을 통해 실증된 사실에 기반하여 내용은 유동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며, 형식주의에 얽매여서 안 된다
2. 본질(Сущность)현상(Явление): 기본적으로 '본질'은 다양한 '현상'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사유의 논리성으로만 본질을 안다고 자부하면서, 현상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논리와 다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서 본질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매 실천에 따라, 그리고 그 실천을 통해 행해지는 변증 과정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물론 '내용과 형식'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기반하여 유동적인 실천과 계획을 실행해야 하지만, 현상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부분을 놓쳐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투쟁은 본질과 현상, 이 두 가지의 개념을 연결시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3. 원인(Причина)결과(Следствие): 결과는 변증 단계에 맞춰서 돌아가는 발전 정도와 수많은 변수의 조합이다. 만약 모든 결과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원인자만 따지게 된다면 비현실적인 몽상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현실적인 원인자와 이데올로기적 원인자, 이 두 가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4. 필연(Необходимость)우연(Случайность): 우리가 흔히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계적 반응에 따른 개연의 결과라는 점에서 개연과 커다란 차별성이 없다. 동시에 공산주의 최종 승리로 나아가는 변증 투쟁의 진보성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두 성찰은 모두 과학적 견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기계적 반응에 따른 개연성, 우연성을 후자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전자를 능동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5. 가능(Возможность)현실(Действительность):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따른 혁명의 가능성과 보편적 척도에 대한 인식과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문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낙관과 냉혹한 현실주의라는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유리(遊離)하지 않게 해야 한다.
6. 진리(Правда)오류(Ошибка): 진리는 주정(主情)적이거나,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며, 실천 없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진리는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알아내는 것이며, 매 변증 단계에 따라 그 내용도 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 능력은 완전하지 않기에 실천의 과정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혁명가들은 이 오류를 범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오류는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투쟁에서 빈번히 나타날 수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혁명적 반성(反省)을 불러오며, 이것도 역시 실천의 일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을 결합하여 혁명을 이끄는 것은 상당히 난해한 작업이며, 철저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각국 혁명적 당 중앙위원회는 국가의 특성, 각 지역의 특색 등 기층단위의 구체적인 사안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중핵으로 취급하는 보편성과 연결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연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보편성과 개별성은 둘 다 중시된다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러한 관점은 개별성(감성적으로 주어진 것) 안에 보편성(이성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으며, 보편성 안에 개별성이 있다는 합리주의적 전제로 설명될 수 있다. 바로 혁명사업은 현실(reality)에서 추상(abstracting)으로, 추상에서 현실로 넘나드는 역동성의 연속인 것이다.

5.6.2. 마르크스주의 언어학

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언어'가 각 사회 환경에 따라 특정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언어 활동은 인간 스스로가 사회적 활동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논리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언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사고를 매개하는 본질적인 활동이다."라는 언어결정론(독일어: Sprachdeterminismus, 言語決定論)적 입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가 이후 논의될 수 있는 기호논리학이나 구조주의적 관점을 완전히 반대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 중에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은 1920년대 말부터 니콜라스 마르의 언어상부구조론(言語上部構造論)과 발렌틴 볼로쉬노프의 구조주의 사이의 경쟁 형태로 발전하였다. 마르의 언어상부구조론은 언어를 대상의식의 순수한 형태 중 하나라고 규정한 후 언어도 또한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상부구조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마르는 이에 따라 '봉건주의 언어', '부르주아 언어', '프롤레타리아 언어'를 세밀하게 분류화하였고, 이것은 사회 발전의 단계론적 측면을 똑같이 적용받은 결과라고 하였다. 반면, 볼로쉬노프의 구조주의 관점은 언어가 '이데올로기'라는 층위에서 다뤄질 수 있을 뿐, 그것은 상부구조라는 반영적 측면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규정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언어와, 사회주의 시대의 언어는 단어나 문법적 측면에서 사실상 달라진 점이 없기에 질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없고, 질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상부구조라고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단, 사회 발전의 정도, 즉, 하부구조 및 상부구조의 발전에 따라 현실에서 쓰여지는 각종 언어 행위의 해석점이 달라질 수 있다. 소련 언어학계에서는 마르의 관점이 널리 퍼져있었기에 언어상부구조론이 더 강력한 세를 떨치고 있었다.

1950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마르크스주의 언어학』(Марксизм и вопросы языкознания)이라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언어의 일반적 속성을 언어도구론(言語道具論)과 반영주의(反映主義)에 기반하여 규정하였고, 이 결과로 니콜라스 마르의 언어 이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언어 이론 내에서 비주류 이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따르면, 언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갖는 사회 활동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실용적인 요소일 뿐, 질적 차원에서 상승과 하강을 병행하는 의식의 구성물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언어의 일반성은 순수한 형태의 대상의식이라고 하기 어렵기에 상부 구조가 아니다. 그는 언어가 기호라는 것을 인정한 선에서 언어는 동시에 물리적 속성으로 이루어진 감각질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칼 마르크스의 언어 이론에 충실한 입장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이론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검토할 때, 칼 마르크스는 기호논리주의(記號論理主義)자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입장을 철저히 비판한 학자로 여겨진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칼 마르크스가 헤겔주의에 기반한 철저한 반영주의자였다는 것을 언어 이론 해석의 핵심 요소로 놓았다.

5.7. 변증법적 유물론 발전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주의가 갖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이론을 정립하였고 생산력주의 틀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논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론적 발전은 꾸준히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 1937)의 문화 헤게모니(Egemonia culturale) 이론과 중국의 공산주의자인 마오쩌둥의 모순론(矛盾論)을 받아들인 것이 있다.

5.7.1. 모순론

마오쩌둥은 모순을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다.[27]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즉,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또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기조를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단죄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5.7.2. 문화 헤게모니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저서 『옥중수고』에서 지식인을 '문화, 사상 등의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지식인을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으로 구별하였다. 전자는 기존 사회 체계에 뿌리를 박은 지식을 흡수한 지식인이며, 일반적인 지식인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계급이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혁명적인 상황에 도취되어 혁명의 지지자가 될 수 있지만, 이들이 가진 의식상 기존의 이데올로그를 수호하는 계급적 성격을 버리기 힘들며, 기본적으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그람시는 혁명의 주도 세력인 프롤레타리아에서 지식인이 나와야 함을 강조했는데, 바로 이것이 유기적 지식인이다. 유기적 지식인의 계급적 성격을 프롤레타리아이며, 혁명 상황에서 변증 정도를 체화하는 존재이다. 이 집단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시시각각 스스로가 갖고 있는 지식 양태를 적절히 변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실천을 통해 사회에 적용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그람시는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계급에서 유기적 지식인을 창조해내야 함을 강조한 동시에 전통적 지식인도 전략·전술적 측면에서 포섭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구성의 원인이 자본가 계급이 스스로 창조해낸 문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람시는 이 문화라는 요소가 반영주의적 견해에서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나,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정치 무대는 '정해진 온순한 목적'과 '목적에 수반하는 폭발적인 수단'이 양립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여기서 이탈리아 공화주의 사상가인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의 현실주의를 채택하여 수단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이 수단은 바로 '문화 패권'이라는 것이 그람시의 견해이며, 이 치밀한 사고에 진지전·기동전이라는 개념을 더하였다. 진지전은 말그대로 참호를 파서 장구한 전략을 통해 상대의 참호 지형을 점유해나가는 방식으로 행하는 전술을 의미한다. 이 전술은 부르주아 문화 패권이 매우 강한 서유럽에서 행해져야 할 기본적인 투쟁 노선이며, 유기적 지식인이 이것을 담당해야 한다. 반면, 기동전은 가용 가능한 전투 인력을 차출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술을 의미한다. 이 전략은 노동자의 전투적 의식이 강한 러시아 등지와 같은 곳에서 유용한 방식으로 이 방식으로 형성된 정권이 바로 소련이라고 하였다.

그람시는 문화 영역과 정치 영역 내에서 다양한 변수를 분석하여 서유럽의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로 나아가느냐를 치밀하게 고민했다. 그의 저서 『옥중수고』에는 서유럽의 혁명이 진지전을 통하여 어떻게 범적인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성립된 개념이 '역사적 블록'과 '수동혁명' 개념이다. 여기서 수동혁명이란 상부구조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계급이 다양한 계급적, 비계급적 집단을 포섭하는 반혁명 행위를 일컬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집단 내 정치적 블록이 형성되는데 이를 '역사적 블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동혁명의 범용성은 진지전을 통해 공산주의로 나아가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같은 층위 내에서 거론될 수 있다. 이 혁명집단의 문화 투쟁은 수동혁명으로 규정되지 않으나, 이들은 진지전을 통하여 다양한 계급적, 비계급적 집단을 지배계급이 그러한 것처럼 똑같이 포섭할 수 있다.

그람시는 위와 같은 견해 외에도 국가주의, 군주제, 도시-농촌 문제, 시민사회 등 수많은 지형에 관한 혁명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경제결정론적 사고에 경도된 혁명이 서유럽에서 실패하는 이유를 규명하였으며, 문화 투쟁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의 투쟁 영역을 밝혔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화 투쟁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6. 논란

6.1. 과연 진짜 '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맞는가?

이런 독재 시스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존의 사회주의 이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의 '독재'라는 단어는 현대의 일인 또는 일당 독재 체제가 아니라, "현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착취자 집단( 부르주아 등)을 배제하고 의식화된 노동자/농민이 권력을 장악함"의 의미를 뜻한다는 것이다.[28] 그러나 특정 개인/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른 집단을 배제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며, 마르크스건 레닌이건 이런 '독재'를 성립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폭력이었다는 점을 보면 모든 독재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중요시하는 중립적 관점에서는 현대의 독재보다 낫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권력의 제한과 견제를 부정하는 이념은 어떤 이유를 붙이건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29] 마르크스나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까지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모두를 포괄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고 어차피 독재는 불가피하니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가운데 두 개의 독재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전제하고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한 것이다. 어찌 보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화된 노동자와 농민은 억압받는 집단이자 다수 집단으로서 항상 옳은 집단으로 평가되었고, 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이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의 입장은 아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권을 잡더라도 착취자의 위치에 설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을 뿐이다. '옳다, 그르다'의 도덕주의적 판단이 아니라, '노동자가 정권을 잡으면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유화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윤이 아닌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과장하여 노동계급의 도덕적 우월성을 전제했는데, 노동자와 농민이 항상 옳은 집단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황제 폐하께서 항상 민심에 따른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이니" 전제군주제도 민주주의지 독재가 아니라고 믿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위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옳다, 그르다'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옳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를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해석하기에 따라 '어차피 어떤 계급이든가에 의한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전제를 깔고서, 일종의 공리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다수인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여러 중간계급에 속한 노동인민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수인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행복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와 인류의 발전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전제하고서 나온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개념인데... '어떤 계급에 의한 것이든 독재는 불가피하다'라는 전제나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라는 전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온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에 대해서 스탈린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과연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것이 또 다른 논란이 된다. 트로츠키주의적 관점에서는 위에서 설명했듯 '어차피 어떤 계급에 의한 것이든 독재는 불가피하므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스탈린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와는 구분되는 관료집단에 의한 독재로 곡해했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 관료집단에서 자기네들의 독재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관료집단이 곧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포장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독재는 독재이지만 어차피 어떤 계급에 의해서든 독재는 불가피하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더 나은데, 스탈린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원래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아니고 이름만 무단 도용한 다른 형태의 독재이며, 그게 아니라 원래 레닌이 의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이다.

어찌되었든 스탈린주의의 독재든, 레닌이 말하는 '원래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든 독재는 독재다.[30] 스탈린주의의 독재는 그것이 정말로 레닌이 '다수인 노동인민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라고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가 논란이 되는 것이다.

6.2.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반적으로, 스탈린주의 시대의 러시아 공산당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탄생한 수많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공산당( 북한의 경우에는 조선로동당)[31] 들이 당 강령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사회주의정당이다!"라는 부분을 삽입했다.[32] 하지만 사실 이 강령들에 나온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실상 스탈린주의를 말하는 것이었고, 소비에트 집중식 국가 시스템이나, 당 중앙 시스템, 국가개발 5개년 계획, 독재 및 감시 시스템 확립이라는 것은 사실상 소련의 방식을 빼다 박았다.

결국 현실사회주의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실상 스탈린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사회주의라 이야기하는 사회주의가 완벽히 스탈린주의와 싱크로율이 맞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화했다. 소련은 일단 흐루쇼프 시기를 지나면서 소련식 사회주의가 한번 바뀌었고,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소련 특유의 스타일의 사회주의가 확립되었기 때문이고, 유고슬라비아 티토 특유의 티토주의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국 마오주의라는 것이 생겼다. 하지만 이들 모두 저마다 뿌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고 있기때문에 당 규약과 강령에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명시했던 것(그래서 동유럽과 비동맹노선의 사회주의를 뭉뚱그려 "현실 사회주의"로 말하기엔 좀 어패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1950년대 이전까지는 사실상 모두 스탈린주의식 사회주의를 따르고 있었고, 그렇다고 이제와서 1940년대처럼 위대한 대원수 스탈린 운운하기는 좀 뭣하고, 그러다 보니 원조의 원조를 찾는 식으로 각자 나름의 현실 사회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써 놓은것이다. 각자 원조따지는 종교전쟁도 아니고 이거 뭐[33] 또한 스탈린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공포의 대숙청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에 그런 인상을 피하고자 이 이름을 고수하는 듯 하다.

현실사회주의에서의 자세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관해서는 해당문서 참조.

참고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1920년대에 결국 스탈린이 만든 것이다. 의외로 스탈린이 레닌 통치기와 이후 과도기에 남긴 유산은 지대하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국명을 만든 것도 스탈린이다.

6.3. 파시즘인가?

스탈린주의의 면모가 드러나면서 이에 대해 좌파 파시즘이란 표현도 등장했다. 즉 기존의 파시즘은 우익의 방향에서 나타났지만 이 스탈린주의는 반대로 좌익의 방향에서 파시즘이 나타난다는 것.

반스탈린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스탈린주의를 과거 "붉은 파시즘"이라고 불렀다. 서구권 기준으론 오늘날 탱키(Tankie)[34] 라는 더욱 노골적인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잘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반대로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향해 "사회파시즘" 세력이라고 낙인을 찍었는데 이는 독일 공산당의 봉기를 우익과 손을 잡아 저지한 사민당에 대한 적개심과 더불어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에 체제를 수호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는 오히려 우익 극단주의 세력의 부흥에 힘을 실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 정작 진짜 파시스트들에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나 반응들과는 별개로, 스탈린주의 자체가 파시즘인지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크다. 왜냐하면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등장 배경 및 요소들은 이 스탈린주의와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탈린 본인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비교하며 파시즘은 재산의 사적 소유권이 그대로 남아있으므로[35] 스탈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밝혔으며,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에서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7. 비판

사실상 오늘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든 가장 큰 주범이자 근원이나 다름없다. 권력의 1인자에 대한 절대 숭배와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조하고, 이를 거스를 경우 혹독하고 잔혹한 탄압 숙청을 당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동구권의 사회주의[36]는 형식상 좌익에 속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현상 유지적인 성향과 기득권에 의한 권력 독점, 사회 · 문화적(특히 성문화에 대해서) 보수성과 금욕주의 강요 같은 사회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가진다는 점에서 우익 보수주의와 완벽히 상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7.1. 공산주의 독재의 주역

스탈린주의 하에서의 소련은 완전한 스탈린 1인 독재체제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 내로라하던 많은 혁명가들을 제치고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했으며, 최대 정적인 레프 트로츠키를 축출한 이후로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옛날의 동지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숙청했다. 그렇게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이를 토대로 소련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물렀다.

문제는 이러한 끔찍한 행태를 보인 스탈린주의가 당시 거의 유일한 공산국가였던 소련의 지배이념이 되었고, 이 때문에 전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생겨난 많은 공산국가들이 이 이념을 토대로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로 전락했고 스탈린이 벌인 학살이나 숙청 등도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 민족 지도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국내 상황에 맞는 자신들만의 사상을 창조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오쩌둥 마오이즘 김일성 주체사상이다.

이 때문에 많은 공산주의 비판론자들에게 공산주의조금이라도 정부를 비판하면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고 전 국민이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라는 극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체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와 비(非)사회주의 좌익 등 스탈린주의에 속하지 않는 좌파들도 독재 세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이며 반공 성향의 인물도 많다.

실제로 냉전 시절, 반공주의 자본주의 진영 선전물에서의 주된 활용이 바로 이 스탈린주의의 폐해에서 기원하였다.

물론 사적소유의 철폐 정도를 제외하고서 인류의 경제 · 문화적 발전을 극도로 저해한 결과를 초래한, 이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한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는 앞으로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과오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사회주의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서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옹호하며 스탈린주의와 같은 체제를 인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믿는 극단주의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7.2. 소련중심주의의 폐해

당대의 소련은 거의 유일한 공산국가였고, 그렇기에 스탈린의 결정은 당대 전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산주의 진영은 그의 말이라면 무비판적으로 따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결론적으로는 자신이 집권하고 있는 소련의 공산화와 안정화(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에 스탈린의 결정들 중에는 공산주의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았다. 대표적인 예들은 아래와 같다.

7.3.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서의 비판

스탈린주의 하에서 스탈린과 소련이 보인 문제들과 공산독재체제는 좌익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물론 이런 체제를 옹호하거나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은 스탈린주의의 독단적 일 처리 방식이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영도에 많은 비판을 쏟아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로 대립각을 이루며 무력충돌로 번진 예도 굉장히 많다.

또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레닌주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 중에도 지나친 철권통치로 사회주의를 말아먹은 사상이라는 비난이 존재한다.[37] 심지어 스탈린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레프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국제사회주의[38]들은 아주 이를 갈면서 싫어한다. 심지어 트로츠키가 쓴 책중에는 배반당한 혁명이라고 스탈린주의를 대놓고 디스하는 책이 있을 정도. 3부작 짜리 트로츠키 전기를 집필한 트로츠키주의자 아이작 도이처는 그의 공업화는 업적이라 인정했다. 이는 현재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계열하고는 상반된 견해다.

8. 한국에서의 입지

한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지는 취약한 편이었다. 우선 본격적으로 한국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로, 동구권 해체와 맞물리며 제대로 된 맑스-레닌주의가 학계나 운동권에 편입되지 못했다. 도리어 소련 해체 이후 다수의 PD 운동권이 루이 알튀세르 레프 트로츠키, 혹은 토니 클리프의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이들에 의해 광범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었다. 분단이라는 정치적인 특수성 때문에 북한과 연결되어있는 스탈린주의가 한국에서 크게 거부감을 일으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운동권은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PD 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은 90년대 이후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CA파 시절만 하더라도 레닌주의를 따르는 조직이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이후 개량주의로 방향을 전환했고[39], 2000년대 이후 남은 조직은 거의 대부분이 비 레닌주의 성향(클리프주의 성향의 노연,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볼키그룹 등)을 띄고 있다.[40]

NL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그 자체보다는, 북한 주체사상에 영향을 받았기에 소련 및 동구권 붕괴에 대한 동요는 PD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했다. 물론 충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아무튼 주체사상도 뿌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인만큼, NL 역시 인민전선[41]이나 노농빈동맹론 등 맑레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지만, 애초에 NL 특성상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해서 그러한 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따라서 PD도, NL도 공개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우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PD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후술하겠지만 이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 계통의 이론가들이 자연스럽게 NL 계열로 밀려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NL 일각에서,[42] 그 동안 실천 중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중요도가 증가한 상황이다.

현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권 단위 중 가장 잘 알려진 조직으로는 채만수 소장의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른바 노사과연), 백철현[43]의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 등이 있다. 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이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에 대한 사회구성체 분석과 현실 정세 인식이 크게 차이나는 편이다.[44][45] 노사과연은 채만수 소장의 고령과 여러가지 논란으로 인해 2023년 9월 경 청년회원 집단 탈퇴 사건이 일어나며[46] 세가 기울었고, 자본론 번역에 힘을 쏟고 있다. 한편, 노정협은 최근 범민련 해산 이후 재조직파와 힘을 합쳐 자주연합 준비위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사회과학연구소와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이 두 곳이다. 물론 반수정주의적인 입장을 내세우기는 하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중국의 모택동이 추구했던 반수정주의적 입장과는 분명 다른 입장을 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가 내세운 반수정주의와도 입장이 다르다. 모택동이나 호자는 소련을 사회제국주의 혹은 자본주의로 해석했는데, 노사과연이나 노정협 둘다 이와 같은 입장을 좌편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소련이 수정주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방해체 이전까지 사회주의 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파벌과는 별개로 같은 입장이다.

다만 노사과연 (출신) 활동가들은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지만, 노정협에서는 수정주의가 곧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담보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BRICS를 비롯한 '다극화' 담론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도 노사과연은 전술한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에 따라 비판하는 반면, 노정협에서는 (비판적) 지지를 보인다는 게 차이점.[47]

9. 스탈린주의로 통치했던 공산주의 지도자들

스탈린 본인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 공산주의 국가의 독재자 상당수가 여기에 들어간다.

10. 여담

1919년 전 세계의 공산주의 정당 협의기구인 코민테른이 형성되고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관료적으로 퇴보한 후,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 세계 공산당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도 당시 포스터에는 전 조선의 볼셰비키등의 레닌주의적 색채가 진한 구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앨릭스 캘리니코스[48]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주의를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라고 한다. 단지 사적기업에서 국영기업으로 바뀌었을 뿐인 착취체제의 변종이라고 하는 것.[49] 캘리니코스가 속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트로츠키주의의 일파인 국제사회주의경향(IST)[50]을 주도하는 정당이다. 그러니 이들이 스탈린주의를 증오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노동인민을 대하는 태도가 노동인민의 정치적, 사회적 주체성을 부정하고 단지 관료집단에 의해 '먹여 살려야' 할 객체로만 간주한다는 비판도 있다.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은 노동인민이 정치적, 사회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스탈린주의는 이 개념을 왜곡하여 노동인민을 단지 무상복지 혜택을 주고 먹여 살려야 하는 객체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동물농장 사회주의가 아닌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조차 반대하는 비마르스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이다. 이런 유형을 마르크스가 저술한 공산당 선언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한다. 1984에서는 이 주제를 더욱 확장하여 모든 국가가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독재의 길로 빠져들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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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바니아의 국가 원수인 엔베르 호자는 강경한 반수정주의자였다. [2]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26/01/25.htm 과거에는 일본어판을 중역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레닌주의의 제문제()"(즉 '여러 문제')라는 일본식 한자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3] 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1479) Third Edition, Allan Bullock and Stephen Trombley, Eds., p. 506. [4] Lisischkin, G. (Г. Лисичкин), Novy Mir (Мифы и реальность, Новый мир), 1989, № 3, p. 59 [5] Montefiore, Simon Sebag (2004).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Knopf, p.164 [6] 흥미롭게도, 스탈린주의자들의 최대 정적이었던 레프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역시 스스로를 레닌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라고 지칭했고, 트로츠키의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 이나 '스탈린주의 날조학'에서도 '스탈린주의'라는 명칭을 '정통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 벗어난 사이비놈들'이라는 의미의 멸칭으로 사용했다. 물론 당시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지칭이 얼마나 강렬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 전통(레닌주의의 전통)에 속한 계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정통파라고 자칭하면서 적대적인 다른 정파들을 '스탈린/트로츠키의 이단적 분파' 라고 지칭한 것이다. [7] 상기한 연설문에서도 스탈린이 반동파를 숙청하고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을 성공시켜 군을 기계화 했기 때문에 독소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다. [8] 북한 주체사상을 주요 이념을 삼으며 그 어떤 사회주의보다 더 뛰어나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앞의 수정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여전히 반수정주의를 표방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9] 한국에서는 타국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렇지, 트로츠키주의는 한 번도 스탈린주의에 비빌 만한 영향력을 가진 적이 없었고,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기회주의적 이미지 때문에 평가가 좋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곳 위키에도 종종 보이는 소련 망했으니까 트로츠키주의가 대세라는 둥의 근거 없는 헛소리가 대표적인데, 공산주의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라이벌이나 대안이 아니라 없애버려야할 이단이라는 입장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군부에대한 인민민주주의의 비교 우위가 사라지면서 보수세력의 " 인민민주주의=스탈린식 전체주의=사이비 민주화 세력"이라는 비난 # #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몸을 사리느라고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저런 주장이 판치는것에 불과하다. 스탈린을 개무시 하면서 일개 독재자로 묘사하고 그가 없어도 공산주의 이론이 제대로 굴러 간다고 주장(혹은 그런척, 통칭 "그냥 레닌주의")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운동권에서 몸을 사리고 있는 것 뿐인데 스탈린은 역대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급의 인물이 아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공산주의자들에게 절대로 개무시당하는 사람이 아니고, 스탈린을 그의 비민주성으로 비난한다면 레닌주의 노선 전체는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즉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소련이 스탈린 때문에 엇나갔다고 주장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밖에 없으며, 비레닌주의자들은 결코 스탈린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국제적으로 좌파 사이에서 TROTS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 무시당하며 왕따당하는 노선이다. [10] 스탈린주의자들이 흐루쇼프를 지칭하는 멸칭이 수정주의자(Revisionist)인데 이는 그들의 용어로 덜 스탈린주의적인 인물이라는 의미다. [11] 물론 1848년 혁명을 보긴 했으나 이는 사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연장선상이었다. 파리 코뮌은 해체된다. 다만 그의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법화된 뒤 나름대로의 세를 갖춘 정당이 되고, 유럽 각국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이 창당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2] 굳이 따지면 마르크스가 교주 격이라면 주된 포교자가 블라디미르 레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그래서 마르크스를 레닌이 곡해했다는 이야기도 충분히 가능했고, 당대에도 로자 룩셈부르크 등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레닌주의가 없는 마르크시즘이 발달한 서방 강대국들을 제외하고는 레닌과 소련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여 필수요소격이 되었고, 심지어 후에는 서구국가들 조차도 영향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이른바 공산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라 하는 것이다. [13] 레닌의 사상은 마르크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지만 마르크스 당대의 또다른 유명 사회주의자였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의 영향도 받았다. 노동계급 자체보다도 혁명을 이끄는 전위당을 더 중요시한 블랑키의 사상과 레닌주의 사상은 유사한 점이 많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레닌을 블랑키주의자(극좌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14] 이는 적백내전 당시의 전시공산주의 제도에 착안한 것이다. [15] 이러한 정책은 훗날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을 시행하는 많은 나라들에 영향을 준다. [16] 여기서 당 중앙은 무 오류라는 해괴한 이야기를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민주집중제도 개개인의 뜻을 모은 것이고, 당도 개개인의 뜻을 모아서 의견이 전달되니까 여간해선 틀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중우정치 집단 히스테리 따위는 당 중앙의 철통같은 이론과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 이었다. [17] 스탈린주의 여부를 가리는 가장 중요한 이론이다. 본래 일국사회주의론은 부하린이 먼저 제시했지만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대립하던 일국사회주의론을 취하여 트로츠키를 공격한다. 그리고 부하린이 제시한 개념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적용했다. [18] 트로츠키주의의 연속혁명론과 대립한다. 국제혁명론에 대한 상반된 이론.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의 혁명에서 그치지 않고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 내의 혁명세력을 도와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봉건주의 단계인 러시아가 도움을 받음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자본주의 단계를 건널 수 있다 주장했고, 스탈린은 국제혁명 이전에 소련의 안정화가 중요하고 소련의 공업화를 통해과정은 묻지말자.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 할 수 있다 보았다. [19] 그대로 음역하여 "디아마트"라고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의 준말. [20] 마르크스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은, 경제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방식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에 주류경제학의 시선으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다. [21] 현대 중국에서도 이 용어를 쓴다. [22] 기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를 배격한다. [23]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소련의 남성 인구가 부족하여 여성의 입김이 강한 것도 있었다. 반대로 프랑스, 미국 같은 경우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남성들로 인해 갈등이 생겼고 여성 투표가 독일 같은 국가들보다 늦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의] 스탈린의 견해로, 사실과는 다르다 [25]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 해석과 러시아 멘셰비키 이론은 비슷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멘세비키부터가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교조주의를 자처했던 카우츠키의 주장을 그대로 복붙한 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멘셰비키는 2월 혁명 이후 수정주의 일변도로 나아갔다. [26] 가령, 레닌이 러시아 농업 사회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를 도입했으며, 레닌 스스로가 중간 단계는 필요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착각하는 부류가 많은데, 레닌 텍스트를 직접 조사하면, 레닌은 애초에 2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혁명이 완수됐으니,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 단계라고 한 부분이 그대로 나온다. 즉, 레닌은 중간 단계 생략론을 주장한 적이 전혀 없다. [27] 사실 마오쩌둥 개인의 독창적 해석이라기보단, 스탈린이 논파한 데보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해석 중 모순론에 관한 것을 마오쩌둥이 가지고 와서 발전시킨 것이다. [28]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민주화 달성 여부와 상관 없이) 부르주아 독재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29]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하는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 같은 개혁주의자들이 나온 것이다. [30] 정확히는 당대 시점의 모든 정치체제는 특정 계급에 의한 독재라는 생각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구식 민주주의 역시 입법, 행정, 사법부를 구성하는 소수의 관료와 자본가 계급에 의한 독재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31] 의외로 동유럽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경우는 별로 없다. 동독도 사회주의통일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폴란드 통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사회주의 발전단계 이론에 따라 아직 생산 자본력이 발달되지 못한 나라는 사회주의 혁명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일단 공산당이 아닌 그 전 단계의 당이 혁명을 완수하기 위함이다. 혹은 지역적인 배경에서 기존 정당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 이름만 다르지 뭐 [32] 조선로동당의 경우, 1970년대에 이를 주체사상이라고 바꿨다. 그러나 2024년 5월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를 내걸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국제 사회에 밝혔다. [33] 물론 중국은 그 당시에도 마오주의를 공공연하게 명시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장려했다. 역시 대륙은 사회주의를 해도 그 기상이 다르다 [34] 1950년대 스탈린주의자들이 통치한 동유럽 공산권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면 일단 인민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는 폭압적인 진압을 했다. 그리고 일부 서유럽의 공산당 계열들은 이를 필사적으로 쉴드치는 데 급급했고(대표적으로 영국 공산당. '탱키'라는 용어의 실질적인 어원이다.) 일부 공산주의 계열은 결국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권위주의적 체제와 결별하게 된다. 이로써 탄생한 서유럽에서 탄생한 독자적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유럽공산주의다. [35] 실제로 나치 독일 시기 동안 재벌, 자본가들은 배제되기는커녕 나치와 협력하여 강제수용소로부터 노동력을 공급받았고, 마구잡이로 강제노역을 시키며 주로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고 공급했다. 대표적 예시가 지멘스, 크루프, 메르세데스-벤츠 등. 이들은 전범기업으로 꼽혀 전후재판을 받기도 했다. [36] 특히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새우며 국제적인 연계보다는 다른 공산국가들과 폐쇄정책을 펼쳤던 소련. [37] 그도 그럴 것이 현실사회주의에서 가장 주류가 스탈린주의였기에 사회주의가 좋고 나쁘냐는 가치판단을 떠나서 사회주의하면 스탈린주의가 연상되고, 스탈린주의하면 스탈린 시절의 온갖 사건들이 연상되고야 말았다. 그러니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게 되었다. [38] 트로츠키의 직계 후계자는 아니고, 트로츠키를 스탈린의 '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일종의 상징적 아나그램으로 여기는 것이다. [39] 청년진보당(자율주의→기본소득론), 대장정→행진(알튀세르주의) 등. 이병천, 이진경 등 일부는 포스트모던으로 전환. [40] 물론 이들도 레닌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즉, 트로츠키가 보는 레닌이나 스탈린에게 비판적으로 얘기했던 레닌의 일부분의 모습에 주로 중점을 맞추며 레닌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41] 한국에서는 "민족민주전선론"으로 변용됨 [42] 대중적 인식과 달리, 경기동부연합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이건 주체사상이건 더 이상 사상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43] 범민련 해체 이후 재조직된 자주연합 준비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44] 노사과연은 그리스 공산당의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을 받아들여 중러를 독점자본주의에 따른 제국주의 국가로 보는 반면, 노정협은 정통 스탈린주의 노선에 따르기 때문에 두 국가가 제국주의로 도약할만한 물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 나아가 노정협은 북한은 물론 중국도 국가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물론 수정주의라는 건 인정한다. [45] 그 외에도 PD(정확히는 "좌단위") 계통으로 진보당의 더불어민주연합 참여에 시종일관 적대적인 노사과연과 달리 노정협은 최근 NL 계통과 함께 하고 있어 진보당과 여러 통일운동 조직에 참여하고 있다. [46] 채만수 소장의 독단적인 행보에 반발한 청년위원회 회원들이 단체로 탈퇴해서 청년진보당에 입당했다. [47] 여담으로 정의당에서도 비슷한 분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전환은 중러 제국주의론에 찬성하는 반면, 함께서울은 국제전략센터를 통해 이에 반대하고 다극화 담론에 찬성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48] Alex Callinicos. 1948년생. 정치학 교수이자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중앙위원. [49] 참고로, 60~70년대 독재 시절 한국이 국가자본주의였다. 국가자본주의는 신흥공업국에서 자주 보인다. 물론 스탈린주의의 계획 경제는 국가자본주의와 큰 차이가 있다. [50] 노동자연대도 여기에 속해 있다. 사실 노동자연대의 사상적 뿌리가 영국 사노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