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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7:39:37

왕이(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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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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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외교부장
초대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초대 제2대 제3대
저우언라이 천이 지펑페이
제4대 제5대 제6대
차오관화 황화 우쉐첸
제7대 제8대 제9대
첸치천 탕자쉬안 리자오싱
제10대 제11대 제12대
양제츠 왕이 친강
제13대
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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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대만공작판공실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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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만공작영도소조사무실
(1955년-1991년)
초대 제2대
치옌밍 뤄칭창
제3대 제4대
양인동 양스더
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
(1988년-1991년)
초대 제2대
딩관건 왕자오궈
중국공산당 중앙대만공작판공실
(1991년-)
초대 제2대 제3대
왕자오궈 천윈린 왕이
제4대 제5대 제6대
장즈쥔 류제이 쑹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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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11·13대 외교부장
제3대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왕이
[ruby(王,ruby=Wáng)][ruby(毅,ruby=Yì)](왕의, Wang Yi)
파일:왕이_9680B7860A44FF1063D5CC9549E6B582.jpg
출생 1953년 10월 19일 ([age(1953-10-19)]세)
베이징시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베이징제2외국어학원[1] ( 일본어 / 학사)
난카이대학 ( 경제학 / 석사)
외교학원 ( 국제관계학 / 박사)
정당
종교 무종교 ( 국가 무신론)
현직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주요 이력 주일본중국대사
대만 사무판공실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위원
신체 키 171cm[2]

1. 개요2. 생애3. 기타4. 주요 경력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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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현재 중국 외교의 사령탑인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정치국원, 부총리급)과 외교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시진핑이 권좌에 오른 직후인 2013년부터 외교부장을 맡았고, 시진핑 2기인 2018년부터 2023년까지는 외교담당 국무위원(부총리급)을 겸임했다. 외교부장이지만 중국 내 외교분야 1인자는 아니었는데 18년까지는 외교부장의 상관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이었으며 이후에는 정치국원(부총리급)[3] 겸 당의 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으로 이동한 양제츠가 있기 때문.

2022년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만 72세인 양제츠가 은퇴하게 되었고, 정치국 진입에 성공한 왕이는 중국 외교 분야의 1인자로 올라섰다. 69세로 통상적 은퇴연령을 이미 넘긴 왕이의 승격은 이례적이라는 평가[4]를 받았는데, 시진핑의 왕이에 대한 두터운 신임 덕분에 이런 파격적 승진이 가능했다. 물론 연령을 넘기고도 정치국원으로 남은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유샤와 마찬가지로 왕이 역시 평생 외교 업무에만 종사한 직업공무원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입지를 침범하거나 위협할 가능성이 없다[5]는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2. 생애

1953년 10월 19일 베이징시에서 태어났다.[6] 196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문화대혁명 기간이라서 대학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의 지식 청년[7]들이 그랬듯이 왕이 또한 건설단으로 반강제 입대하여 중국 북부 헤이룽장성 지역 오지로 끌려가 8년간 삽질을 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베이징으로 돌아온 왕이는 베이징제2외국어학원 [8]에 입학해 일본어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다. 이후 중국 외교부에 들어가 외교관 생활을 하던 중 저우언라이의 비서이자 중국 외교부 아시아국의 국장을 역임했던 천자둥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1997년부터 1년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연수를 받았다. 이후 부장조리(차관보)로 승진하고, 2001년에는 부부장(차관)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왕이는 최연소 부부장이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주일본중국대사를 역임했고, 이후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을 거쳐 2013년 3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11대 외교부장에 취임하였다.

2018년 3월 19일, 국무위원으로 지명되었다.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로는 학부 시절 전공인 일본어 영어가 있다.

대체로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던 역대 중국 외교부장과는 달리 국제사회에 중국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강성 외교를 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9] 본인의 성향을 떠나서 시진핑의 등장을 계기로 달라진 2010년대 이래 중국의 패권주의 노선(일명 대국굴기, 중국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0월 22일 발표된 20차 당대회 신임 중앙위원 발표에 이름을 올렸고 양제츠가 퇴임했으므로 양제츠의 직위였던 중앙외사공작위원회[10] 비서장과 판공실 주임에 임명될 가능성이 거의 0순위가 되었다. 7상8하가 깨진 것은 덤. 그가 시진핑의 정책에 얼마나 충성해왔는지 그리고 그의 저돌적 외교 스타일이 시진핑에게 크게 인정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20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예상대로 2023년 1월부로 양제츠에 이어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으로 영전하게 되었으며 외교부장 자리는 주미대사였던 친강(秦刚)이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2023년 7월 25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14기 4차 회의에서 친강 전 외교부장이 해임되고 왕이가 외교부장으로 재임명됐다. # 아무래도 중앙외사공작위원회 주임과 정치국 위원, 그리고 외교부장까지 겸임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에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외교부장을 맡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닌 위의 예상들을 깨고 2024년 11월 현재 1년 4개월 째 외교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3. 기타

그러나 세계적으로 중국의 인권 수준은 매우 낮고 인권 탄압 역시 심각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중국의 인권 기록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중국인이다", "당신은 말할 권리가 없다"는 발언으로 언론의 자유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자국의 문제라 하여 외신에서 보도하고 질문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해 중국의 언론 상황이 후진적임을 스스로 보여줬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j-0UGXUgAEmn0t.jpg
기자: 중국의 인권 침해에 대해 어떻게...
왕이: 저 여자를 체포하시오!
이에 대해 코널리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런 그림을 올리며 왕이를 비판했고, 캐나다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었으며 캐나다 수상 쥐스탱 트뤼도 또한 유감을 표명했다. 중국의 고압적이고 오만한 외교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듯. iPolitics에서도 이 사건을 깠다.
중국인과 영미권 사람들의 키배로 댓글창에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도 영어로 어맨다 코널리를 비난하는 상황. 영상의 질문과 답변 원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 대한민국에서 사드 배치가 확정되자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만나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6072502339_0.jpg
이 자리에서 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에 나선 이유에 대해 "유방 앞에서 칼춤 춘 항장"이라고 비유하며 중국의 안보를 침해한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한중 간 신뢰 기조를 해쳤다고 강하게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2016년 2월부터 헤이룽장성에 탄도미사일 감시 용도로 초대형 레이더 '페이브 포스(Pave Paws)'를 배치해 한반도 전역을 감시해왔기에 중국이 사드 배치에 불만을 드러낼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거세다. 페이브 포스에 대한 설명
* 사드 배치 논란 관련해서 중국을 방문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면담을 했었다. 한겨레
파일:d11877.png
*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후 첫번째 한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팔을 툭 친 걸로 구설수에 올랐다. 中 왕이, 문 대통령에 친근감? 결례? 보통 이런 행위는 상급자가 하급자한테 혹은 동급자끼리나 하는 행동이다. 동급자인 시진핑 주석이 했어도 구설수에 오를 만한데 하급자인 장관이 일국의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절대 아니라 구설에 올랐으나 금방 묻혔다. 그런데 5개월이 지나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방중때 또 한번 팔을 툭 치면서 다시 말이 나오는 중. 왕이, 文대통령 팔 툭툭 치며 인사… 결례 논란 그러나 팔을 치는 것은 왕이 부장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오랜 버릇으로 확인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악수 외교결례 논란 왕이 사태 종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렉스 틸러슨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도 했다.

4.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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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장.svg
10대 11대 12대
양제츠
(2007~2013)
왕이
(2013~2022)
친강
(202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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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둘러보기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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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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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람 행정장관 · 매튜 청 전 정무장관 · 폴 찬 재무장관 · 테레사 쳉 법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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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선거

홍콩 입법회 선거: 2021년 홍콩 입법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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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사건 ·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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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조성인원
(제14기 국무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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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원 총리
리창
국무원 부총리
딩쉐샹
(상무부총리)
허리펑 장궈칭 류궈중
국무위원
둥쥔
(국방부장/상장)
왕샤오훙
(공안부장/총경감)
우정룽
(비서장)
선이친
왕이(11,13대 외교부장)
비서장
우정룽
외교부장 국방부장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교육부장
왕이 둥쥔
(상장)
정산제 화이진펑
과학기술부장 공업정보화부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공안부장
위히준 진좡룽 판웨 왕샤오훙
(총경감)
국가안전부장 민정부장 사법부장 재정부장
천이신
(총경감)
루즈위안 허룽 란포안
인력자원사회보장부장 자연자원부장 생태환경부장 주택도시농촌건설부장
왕샤오핑 왕광화 황룬추
니훙
교통운수부장 수리부장 농업농촌부장 상무부장
리샤오펑 리궈잉 탕런젠 왕원타오
문화여유부장 국가위생건강위원회 주임 퇴역군인사무부장 응급관리부장
쑨예리 마샤오웨이 페이진자 왕샹시
(총감)
중국인민은행장 심계장
이강 허우카이 }}}}}}}}}


[1] 영문명은 "Beijing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로, 전문적으로 외교관을 양성하는 대학이다. [2] 파일:기시다윤병세왕이.jpg 173cm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185cm의 윤병세 전 외교부장관과 셋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시다 총리보다 작다. [3] 원래 외교부장과 외교 담당 국무위원은 서로 다른 인물이 맡으며 중국 외교분야의 투톱 역할을 했는데, 19차 당대회부터는 G2로 등극한 중국의 대외적 위상에 걸맞게 외교 분야에 힘을 주기 위해 투톱이라는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주었다. 양제츠를 정치국원으로 승격시키고, 국무원에 비해 우위에 있는 당중앙의 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으로 임명하면서 왕이가 국무위원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같은 부총리급이어도 당 서열이 우선이기 때문에 국무위원이지만 당에서는 중앙위원(정원 205명)인 왕이에 비해 정치국원(정원 25명)인 양제츠가 의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더 우위에 있었다. 한국 개념으로는 양제츠를 국가안보실장, 왕이를 외교부 장관으로 보면 된다. [4] 물론 당대회가 가까워지는데도 왕이의 후임으로 유력시되던 후보군들이 승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좌천되거나 다른 부서로 전보되는 등 왕이의 입지가 더 확고해졌기 때문에 2022년에 들어와서는 왕이의 승진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태였다. [5] 외교관이나 군인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벗어날 일이 없고, 성위서기나 시장 등의 지방 고위관료를 지내거나, 중앙판공청이나 중앙조직부 등에서 당 업무 전반을 관장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때문에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같은 정치국원급까지가 실질적인 승진 상한선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최고지도자를 노리기는 어렵다. 물론 중국도 피해갈 수 없던 육방부화를 견제하는 한편 혁명 1세대의 퇴진 이후 당중앙에 대한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던 군부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승진한 해군상장 류화칭같은 인물도 있는 만큼 이런 법칙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6] 시진핑 주석과 같은 연도에 태어났다. [7] 당시 중국은 전반적으로 인민의 학력이 낮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지식 청년으로 불렸다. [8] 이 학교는 평범한 외국어 대학교 이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전문 외교관을 양성하는 엘리트 학교이다. [9] 이러한 중국의 공격적인 대외 행보를 가리켜 "전랑 외교"(Wolf warrior diplomacy)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흥행 대성공을 거둔 액션영화 " 전랑 2"(일명 '중국판 태양의 후예')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10] 주임을 총서기-주석, 부주임을 당조서기-총리가 맡는 중국 외교의 톱 기구이며 비서장과 판공실 주임은 실무 총책임자다. [11] 중국의 경제발전은 공산당의 공로라고 하기도 힘들다. 중국 공산당의 한 일이라고는 높게 쳐주어야 자신의 경제적 실책을 잘 치운 것 뿐이다. 과거 중국의 국민소득이 낮았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국가경쟁력은 마오쩌둥 당시에도 그렇게 낮지 않았다. 대약진운동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원래 중국의 국가 경제규모는 대약진운동 직전에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5위였다. 또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인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인의 1인당 소득보다 높았다. 만약 정상적인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면 중국의 국민소득은 한국보다는 높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금액은 중국인의 3배 정도 더 높다. 악조건 때문이라고 해도 변명이 안 되는 것이, 당시 중국은 한국에 비해 서구화 적응도가 그나마 잘 되어 있었다.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의 성장하기 전까지 한국은 서구의 것들을 대부분 청나라를 통해 접했다. [12] 물론, 일본이 한반도에 세력을 떨칠 때도 중국과 일본 모두에게서 서구의 것을 들어왔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이어졌다. 당장 'Republic'에 해당하는 중국어 번역어인 대한민국의 '민국'부터가 중화민국의 국호의 영향을 받았으며, 천주교도 청나라 북경을 통해 들어왔다. 또 소현세자가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한 곳도 중국 청나라였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에 비하면 서구화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이 중국보다 한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세계 5위의 경제규모를 갖고 있던 나라를 세계 13위로 떨어뜨렸고, 중국 기준으로 일개 도시에 불과하던 홍콩이 중국 전체 규모의 25%를 따라잡히게 했으며, 마오쩌둥이 죽고 1995년대의 한국이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자원, 인구, 국토, 국가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전체 경제규모가 중국의 전체 경제규모의 76%까지 따라잡을 수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중국에 비하면 후발주자였는데,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한국의 산업화를 더더욱 늦췄다. 현재는 국토 때문에 국가경제규모는 차이가 있어도 한국은 국민 개개인의 면과 적어도 국민소득에서는 G7의 일원인 이탈리아 수준까지 끌러올렸다. [13] 반면 중국은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했는데도 소득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과 중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의 격차를 벌리고 상하위치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 역시 중국공산당이 만든 결과이다. 만약 국민당이 중국을 통치했다면 지금 중국은 물론이고 국민소득이 못해도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았을 것이다. 장제스 역시 독재체제를 유지하긴 했으나 장제스/평가에서 장제스의 업적 중 하나로 경제성장을 꼽고 있다. 대약진운동으로 농촌을 싸그리 파괴시킨 마오쩌둥과 다르게, 장제스는 안정적인 농업 부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지도자다. 공업정책도 마오쩌둥에 비하면 훨씬 획기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분명히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현재의 중국보다 미국이 진지하게 경쟁해야 할 막강한 경쟁국으로 자리가 확고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환율조작으로 미국에게 번번히 찍히는 현재의 중국과 달리, 장제스 시기의 중국은 1936년 런던 채권 시장에서는 중국 국채의 이자가 일본 국채의 이자보다 더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이 일본보다 돈을 더 잘 갚을 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개혁들을 바탕으로 중화민국은 가장 풍족한 재정을 보유했다. 그러므로 국공내전 없이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었다면 중국은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천안문 학살 같은 착오 없이 비교적 순탄히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이나 장제스에 대한 평가만 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부분에서 특출나게 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4]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발전은 나름 자립경제를 목표로 삼고 경제나 기술을 질적으로 개선시키려는 시도를 한 장제스나 한국과 달리, 기술 무단도용이나 돈으로 타국 기업을 인수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아무리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좋게 평가해줘도, "그나마 뒤늦게라도 정신차려서 남아있는 중국 인구와 국토, 문화재는 지켜서 최악은 면했다." 정도의 평가가 타당할 지경이다. [15] 왕이가 이 발언을 하고 5년 뒤, 중국은 북한에서까지 석탄을 수입해야 할 정도로 자국 경제가 취약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16] 왕이의 논리대로라면, 북한 헌법 제8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있으며 사회의 모든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중심의 사회제도이다.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여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라고 비슷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으니 북한의 인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발언해도 문제없다. 사실 중국에서 최상의 법 규정은 중국 헌법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규약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국가의 우위에 있기 때문. 그래서 공산국가 헌법에서 헌법조항 운운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17] 정작 같은 중국인인 장제스는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망한다면 나라없는 국민으로는 살 수 있지만 공산주의에 의해 망한다면 노예로조차 살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