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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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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2~9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서봉수 파일:일본 국기.svg 오타케 히데오 3-2
3 1996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유창혁 파일:일본 국기.svg 요다 노리모토 3-1
4 2000~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창호 파일:중국 국기.svg 창하오 3-1
5 2004~05 파일:중국 국기.svg 창하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철한 3-1
6 2008~0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철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창호 3-1
7 2012~13 파일:중국 국기.svg 판팅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정환 3-1
8 2016 파일:중국 국기.svg 탕웨이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정환 3-2
9 2020~2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신진서 파일:중국 국기.svg 셰커 2-0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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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창호
李昌鎬 | Lee Chang-ho
파일:PYH2016012215430001300_P2.jpg
출생 1975년 7월 29일[1] ([age(1975-07-29)]세)
전라북도 전주시 중앙동
(現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2가)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경주 이씨[2]
학력 전주교육대학교 전주부설초등학교 (전학)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6학년 / 전학)
→ 충암초등학교 (졸업)
충암중학교 (졸업)
충암고등학교 (졸업)
직업/소속 바둑기사 / 한국기원
단급 프로 九단
입단 1986년
가족관계 아버지 이재룡[3], 어머니 채수희
형 이광호, 남동생 이영호[4]
배우자 이도윤, 딸 이소정, 이시연
기타 주요 경력 최연소 국제 바둑 기전 우승(16.5세)
(제3회 동양증권배[5][6])
누적 우승 경력 141회(한국 바둑기사 2위[7])
타이젬바둑 닉네임 swing(P), 내안의 神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바둑의 신3. 생애
3.1. 기풍3.2. 주요 묘수들3.3. 바투
4. 여담
4.1. 약력4.2. 수상 기록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6. 어록7. 그에 대한 말8. 저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바둑 기사이다. 별명은 석불(). 그의 사려깊고 우직한 바둑의 기풍에 대한 찬사로 붙은 별명이다.

2. 바둑의 신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0505_410_1.jpg
2005년까지의 전성기 시절 이창호 대 주요 기사 상대전적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지만 승률만 놓고 봤을 때 역시 대단한 건 이세돌 최철한. 괜히 이 두 사람이 포스트 이창호가 아니다. 참고로 2019년 11월 기준 이창호 - 이세돌 상대전적은 이창호가 36승 34패로 2판 더 많이 이겼다. 이세돌이 2019년 11월 19일 프로기사직을 은퇴하여 영원히 바뀔 수 없게 됐다.

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1)
교체되지 않는 권력, 이창호
역대 인류 최고의 기사는 ‘돌부처’ 이창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둑 기사를 언급할 때 우칭위안(오청원)과 함께 가장 먼저 나오는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이며, 프로기사가 정립되고나서 세운 그의 압도적인 기록들은 현재로선 거의 깨지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최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바둑계를 평정했던 기사라고 할 수 있다.

30세 이후의 이창호는 세계 최강의 기사가 아니지만 바둑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는 오청원에 비견되는 선지자였으며, 뛰어난 천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무수한 연구와 새로운 정석이 난무하던 현대 바둑의 백가쟁명 속에서 오로지 그 홀로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십수년간의 전적으로는 사상 최강의 기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바둑 역사의 통시적 업적과 당대의 경기력 양면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기사로는 포석의 창시자 혼인보 도사쿠, 신포석의 창시자 오청원, 끝내기 중요성의 창시자 이창호를 들 수 있고, 현대 바둑에 한정한다면 오청원과 이창호를 든다. 물론 오청원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세계기전이란 개념 자체도 없었고, 일본과 비교해 다른 국가들의 바둑의 수준이 너무나 차이 났기에 국외 활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이창호가 역대 최고의 기사 중 하나로 꼽히는 데에는 단순히 압도적인 기록 뿐만이 아닌, 그가 바둑계를 평정한 이후 바둑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청원 이전까지 중국 바둑은 묘수풀이를 이용한 전투 일변도였고, 일본바둑 역시 포석의 연구를 하긴 했지만 이 없었기 때문에, 18세기~ 19세기에 발명된 포석 형식에 갇혀 있었다. 여기에 오청원은 '돌의 생명'을 주장하여 신포석과 화점 발견으로 바둑계를 한번 갈아 엎었고, 이것을 통해 일본의 초고수들을 연달아 꺾으며 이를 입증하고 포석과 정석에 대한 연구에 큰 변화를 끼쳤다.

한참 후에 나온 이창호는 중반전에서 두터움과 끝내기 분야를 개척하여 바둑기사들의 수명을 줄여버렸다. 이창호 이전에는 여러 바둑기사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기풍으로 바둑을 두었고 이에 따른 다양한 별명들이 있었다. 손오공, 제비, 미학사, 컴퓨터, 우주류, 이중허리 등등. 그러나 이창호 이후로는 이러한 기풍이 차츰 사라졌는데, 다양한 포석들이 구체적으로 손해인지 이득인지 저울질하며 선택하는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11] 또한 끝내기와 형세판단을 통해 계산바둑의 시대를 열었다. 오청원과 이창호를 두고 뉴턴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든 것이 가장 유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바둑계의 GOAT 논쟁이 있을때마다 이 둘이 소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이 만든 메타 안에서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이긴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메타의 변혁을 주도한 이 둘의 업적까지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 [12]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말하면 이창호는 단순히 실력이 좋은 게 아니라 바둑의 메타를 바꾼 것이다. 오청원이 신포석을 개발하여 메타를 바꾸자 오청원 체제가 1990년대까지 오는데, 이창호는 끝내기 메타를 창안한 것이다. 이창호의 메타를 깨기 위해 수많은 바둑기사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이창호를 깨기 위한 공격적인 메타가 나왔을 뿐이지 결국 2010년대까지도 바둑기사들은 이창호의 메타를 의식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창호가 보여준 '끊임없는 형세판단'은 그 이후로, 인공지능의 최적화 바둑이 등장하고 나서도 모든 기사들에게는 기본이 되었다.[13]

3. 생애

1975년 7월 29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와 달리 어릴 적의 이창호는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에 꽤 고집이 세고 식탐도 있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에 따르면 어릴 적 이창호가 문구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주자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다가 그대로 문구점 유리에 몸을 내던져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무서운 건 깨진 유리에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붕대를 감고 온 뒤 다음날에도 바둑을 두었다고... 물론 그런 고집이 후에 뚝심이 되어 천재라는 속성과 합쳐져 돌부처 바둑신 이창호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 이화춘(1986년 사망)[14]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이창호는 84년 두 차례의 시험기를 거치며 이정옥 六단,[15] 전영선 七단[16]을 사사하며 성장해 나간 그는 10살이 되던 해,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17]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로 프로에 입단했다. (1위는 9세에 입단한 조훈현) 바둑을 배운 지 4년 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한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 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다만 훗날 조훈현의 천재관이 바뀌어 아래에도 나와 있듯 이세돌, 박정환 등은 천재가 아니라 하며 이창호야말로 진짜 천재였다는 말을 한다. 조훈현 국수 본인이 최연소 입단 기록(9세)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의 사형이였던 오청원 때문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훈현이 서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음에도 서봉수를 주저 없이 타고난 천재라 했던 것을 보면 조훈현의 눈높이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천재의 기준 자체가 초단기 성장의 기린아 스타일에 좀 더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창호는 어린 시절엔 방금 둔 바둑도 잘 복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묵묵하고 생각이 깊지만 쉽게 그 지적 능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리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런 조훈현이 생각하는 '협소한 의미로' 천재가 아닐 뿐, 조훈현이 이창호를 일반적인 의미로 천재도 아니라고 여기진 않았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달라는 제안을 받기 전에도 '나도 한국 바둑에 제대로 된 대기사가 될 후배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었다. 제안을 받자 '최소한 내 눈에 천재로 느껴질 정도로는 보여야 제자로 받겠다.'고 선언하여, 엄연히 바둑으로 이창호를 직접 테스트하고 천재 기질을 직접 확인하고는 내제자로 받았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창호는 원래 아주 크게 될 아이었으니 절대 내가 창호를 다 키웠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창호가 나에게 배웠다는 것 자체는 내게 자랑을 넘어 영광이고, 창호를 통해 나도 바둑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느끼며 산다.'는 말을 여러 인터뷰에서 한 바 있다. 논리적으로 이창호가 초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장기간 바둑 황제 이창호로서의 세계 바둑 군림은 오로지 조훈현의 위대한 가르침 탓이라고 생각해야 맞고, 아무리 겸손하게 말하더라도 자신이 커다란 뭔가 하나는 가르쳤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훈현은 이창호와 인연을 맺은 4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10대 초중반부터 이창호의 바둑 색깔은 조훈현과 많이 달랐다. 단지 조훈현 입장에서는 어린 이창호에게 자신이 주려 한 색깔과 입단 후 이창호의 혁명적 바둑 패러다임의 방향이 달라서 아쉬웠던 것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이창호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번뜩이는 수와 같이 묘수를 잘 두는 사람을 천재로 보는 사람들은 이창호가 인내의 천재, 노력의 천재이지만, 말 그대로의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조훈현도 말했다시피 이창호의 천재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조훈현 같은 천재도 몰라 봤는데 일반인이 알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이창호의 천재성을 느끼려면 이창호와 대국을 해봐야 안다는 말도 있다. 바둑 전문가 10명 중 7명이 이창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점, 15세도 채 안된 어린 나이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세계 정상에 군림한 점을 보면 천재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어렵다. 사고 방식도 애늙은이 수준으로 노련했다.[18] 즉, 전문가들도 깜빡 속을 선천적인 실력을 감추는 타고난 천재. 이창호 특유의 결이 다른 천재성은 그가 두는 묘수에서도 그 일면이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묘수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곳에 두어져서 국면을 바꾸고 우위의 격차를 크게 만드는 수 등의 성격으로 중반 전투, 사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묘수라면, 이창호의 묘수는 이미 알고 있는 수이지만 대체로 좋지 않은 수라서 무의식적으로 배제되는데 두어지고 보니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가치가 있는 '그 상황에서만 좋은 의미를 갖게 되는 수'이거나 이미 정리가 거의 다 됐다고 생각된 판에서 미세한 수순의 차이로 미세한 이득을 얻어내서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미세하지만 역전을 만들어내는 등의 수순의 묘수, 끝내기의 묘수가 많다. 이런 묘수에 당하는 상대편 쪽은 바둑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정도 자기 두고 싶은대로 만족스럽게 다 두고 판도 다 끝난 마당이고 계가 역시 본인의 계산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종반 50수 가량에 묘수를 맞아 바둑은 역전이 되고 정작 자신이 재역전을 노리려고 해도 둘 곳 자체가 없는 그런 결말로 패배하게 된다. 묘수 3번 두면 진다는 바둑 격언을 떠올려보면 더 무서운 묘수인 셈.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19]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 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 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우리 나이로 101살이였을때도,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 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 되는 게 바둑이다.

여튼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 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20]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310304d798fd95330e8c11217ff0b61ba739849b9e8054fcddeb26becdbf1109.jpg
1989년 제18기 KBS 바둑왕전 결승국 실황. 빨간 옷이 이창호, 왼편은 김수장 (당시)七단[21]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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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제22기 명인전의 제3국. 왼쪽이 스승 조훈현이고 오른쪽이 이창호.
이창호는 내리 3판을 이겨 스승을 꺾어버렸다. 조 국수가 심란한지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긁적인다.[22] 조 국수 뒤의 안경을 쓴 분이 대한민국 유일의 대국수인 조남철.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갔다. 조훈현 九단의 부인 정미화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창호가 밤 늦게까지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창호 방에서 돌을 두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남편을 꺾기 위한 것인가'란 생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고 한다. 더불어 승리한 제자와 패배한 남편을 한 차에 태우고 오는 날에는 만감이 엇갈렸다고 한다. 사실상 남편의 내제자라는 건 부인 입장에서 자식이랑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미화 여사는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입가 후 혼자 씻지도 못하던 이창호를 한동안 매일 같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 그런 입장에서 몇 년 만에 급격한 성장으로 자기 남편을 이기고 우승을 하기도 했으니 기분이 섭섭하며 착잡했을 수 있다. 이창호 또한 조훈현 내외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창호의 결혼식 때 확인할 수 있다.[23] 결국 조훈현 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24]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 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 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25]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 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 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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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26]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했다.(3:2)[27]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동양증권배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우겠는가."라고 말했는데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이다.

그 뒤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 당시 절대 본좌였던 스승인 조훈현을 결국 무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1994년에 13관왕[28]을 하는 등 독주하였다. 이런 독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정도였고, 기간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5년이 약간 안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창호는 승률왕을 독식하였으며 일 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80%대의 승률을 수 차례에 걸쳐 달성했다. 이창호의 평생 승률이 73%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인 셈.

1996년 6월에 七단에서 九단으로 한국 바둑 사상 최초로 한번에 2단을 특별 승단했다. 이세돌은 승단대회를 거부하여 국제 바둑 기전 우승 시 점프 승단 규정을 만들어냈지만, 이창호는 이런 규정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특별 승단을 했다. 참고로 당시 유창혁 七단도 九단으로 같이 특별 승단 되었다. 기록상 유창혁이 며칠 빠르게 九단으로 특별 승단한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 발표로는 2명이 동시에 특별 승단 처리되었다.

우승 역시 통산 138번의 우승[29], 조훈현의 157번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을 한 기사이기도 하다.[30]

어렸을 때는 국내에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창호의 사실상 첫 세계 무대 데뷔였던 요다 노리모토의 특별대국을 참관한 오타케 히데오는 '이창호의 바둑은 분명 강하지만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동생인 이영호의 말에 따르면 보통 식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중국 요리를 먹고 나면 반드시라 할 만큼 탈이 났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예 굶기도 했으며 라면이나 김치를 챙겨 가기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영호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의 매니저를 자청한 이후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 등을 수소문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창호가 해외 경험을 쌓자(그래봤자 20대 초반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승률을 과시하며 세계 바둑계를 학살했다. 딱 한번 1999년 1회 춘란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패했을 뿐이다. 즉 결승에만 오르기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 셈. 1990년대 중국 최강의 기사였으며, '이창호 빼고는 다 이겼던' 마샤오춘 九단을 만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결국 재기 불능으로 몰아넣었다.[31] 일본이나 중국은 스승 조훈현은 물론 서천왕(天王)으로 불리며 중국 킬러로 군림하던 서봉수 九단 역시 벅찬데 더 괴물이 나타났으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이다.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고 할 정도니. 심지어 자신이 외계인도, 터미네이터도 아니라고 직접 해명까지 하였다! # 한 중국 네티즌은 '나는 국가 대항전에서 중국이 이기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이창호가 지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이창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이 표현이 나온 시합에서 이창호는 혼자 중국과 일본의 대표 다섯 명을 연달아 박살내면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전성기 때는 수많은 전설을 일구었다. 우승률(1등을 한 기전 수 / 출전한 기전 수)을 퍼센트로 기록했다거나. 이창호의 전성기에 국내기전 우승률은 80%를 상회했고 국제기전도 엄청났다. 국제기전은 1996~99 우승률이 20회 중 10회로 50%, 메이저는 16회 중 9회로 56.3%라는 충격과 공포. 1년이 아닌 5년간 우승률이 저 정도 수치면 그야말로 괴수 그 자체. 1998년에는 당해에 있었던 메이저 국제바둑기전 삼성화재배, LG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를 싹쓸이 독식했다. 다만 결승전만 1999년에 치른 1998년 춘란배에서 조훈현 九단한테 2-1로 지면서 1998년 대회 전관왕 칭호를 따지는 못했다.

또한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과 함께 중일 슈퍼대항전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바둑 올림픽이라는 응씨배를 넷이서 초대부터 4대 대회까지 12년간 쓸어담았으니까. 특히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창호다. 국제기전 절반을 우승하는 기사를 빼놓고 '슈퍼대항전'을 칭함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바둑계를 주름잡는 이세돌, 구리, 쿵제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한 것은 이창호의 노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세 기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창호가 건재했을 땐 이들마저 이창호보단 약했다는 것. 사실 많은 기사들이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바둑을 나눠먹는 것은 이창호의 노쇠 덕을 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구리, 쿵제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했던 이세돌은 1990년대 후반기인 17세 때부터 '낌새'를 나타냈지만 이창호에 밀려 1인자가 되진 못했고, 이창호가 노화로 인해 기량이 쇠퇴한 뒤부터 비로소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었음을 보면, 전성시 이창호의 기량은 최정상급의 한 수 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세돌과 이창호의 상대 전적도 이창호가 아직 앞서며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번기 대결에서도 이창호가 7승 3패로 우위라는 점은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 단지 현재 바둑계의 추세상 대부분 기전이 속기인데다 이창호의 강점인 정밀한 끝내기가 눈에 띄게 약해진 점을 감안한다면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성적을 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인 기사들은 한중일 통틀어 모두 한물간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창호니까 한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스승의 업적들을 거의 물려받긴 했지만 단 두 가지 물려받지 못한 기록이 있다. 첫째는 전관왕, 둘째로는 연속 타이틀 홀딩 기록.[32] 1994년 왕위전 타이틀을 유창혁이 방어하면서[33] 조훈현이 이룩한 전관왕 타이틀은 아직 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34][35]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로 왕위전 만큼은 한 번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왔다.[36] 때문에 단일 기전 연속 우승 기록이 현재 12연패. 이 기록은 조훈현의 패왕전 16연패 다음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왕위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창호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스승을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창호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로 일본 요다 노리모토. 상대 전적이 좋지 않다.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이창호 본인이 인정한 바 있다. 첫 단추[37]를 잘못 채운 탓인지, 이후 이창호는 요다만 만나면 이상하게 바둑이 꼬이곤 했다. 한때 상대 전적 1승 6패를 기록하는 등 계속 헤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상당히 만회해 둘 간 승률이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8:8 상태에서 제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만났고 이제는 명실상부 우위로 올라서나 했는데, 그만 패배. 요다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동률까지 갔지만 다시 패배하면서, 8승 10패로 다소 열세였다가 2연승을 하며 10승 10패로 맞췄다. 요다 九단에 따르면 2000국이 넘어가는 이창호 九단의 바둑을 대부분 복기해 봤다고 한다. 요다 九단에게 지고 나서는 한때 중국의 마샤오춘 九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역전한다. 200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강동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38]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 연승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개인 기록이 꽤 부진한 시기였던데다가 한국팀의 나머지 인원이 일찌감치 충격적인 광탈을 해 버린 나머지 한국팀에는 이창호 혼자만이, 중국과 일본팀에는 합이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혼자 남은 이창호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고 우승컵을 한국팀에 가져다 줄 확률을 3%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당시 한국팀 단장인 김인 九단이 "우승은 역시 어려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런데 혼자 남은 이창호가 정말로 나머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 버리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39] 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문서 참고. 창하오 9단이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라는 말을 남긴 그 경기이다.

하지만, 상하이 대첩 이후부터 이창호의 부진이 꽤 길다. 당시에는 일시적인 부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이가 30대에 접어든 이창호의 기력이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창호 이전 시대의 바둑은 50대까지 전성기였으니 이창호의 끝내기 메타가 정립된 이후로 20대 중반이 넘으면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이 알려졌다. 다만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왜 이창호가 갑자기 부진한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창호 이후 끝내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현재는 신예 기사들의 끝내기 실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그가 실수가 잦아지고 끝내기에서 미스가 속출하면서 예전처럼 둘 수 없는 이유도 있다. 팬들 사이에는 이창호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일부러 져 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혼자 다 해먹으면 한국 바둑계가 망하니까… 물론 세계적인 승부사가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천부당 만부당하다. 이창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농담거리 정도로만 알아 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이런저런 말을 하고 말미에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은 이제 그만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두 차례 이상 답했다. 이창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1월 16일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64강전에서 17세의 연구생에게 패배, 탈락했다. #관련기사 그냥 진 것도 아니고 100수도 못 채우고 불계패했다.[40]

2010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혼자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창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11월 한국 랭킹이 6위까지 떨어지고, 승률도 60%가 안 나왔다. 입단한 이래 최악의 성적. 이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 멤버가 되었으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11월 23일 광저우 기원에서 열린 남자 단체전 예선리그 2라운드에서 한국 남자팀의 승리에 일조, 특히 또 하나의 '이창호 킬러'로 불릴 정도로 근래 상대 전적이 우세하던 창하오 九단을 다시금 제압하여 역시 이창호다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5일 일본과의 대국에서는 이세돌과 함께 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최철한을 비롯해 나머지 3인이 분발하여 승리, 간신히 결승에 올라갔다. 26일 단체전 결승전에서 제1장으로 나서 중국 랭킹 3위 구리를 관광보내며,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오전 예선 6R에서 패해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점심 먹고 와서… 구리 역시 이창호 못지 않게 부진을 겪고 있긴 하지만, 대국의 내용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중계 해설의 평.

바둑 팬들은 부진한 때에도 진로배, 농심신라면배 등 단체전에서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2010년 제11회 대회 포함 농심신라면배 성적 19승 3패, 승률 86%[41]) 이창호가 믿음을 깨지 않고, 이번에도 활약을 해줘서 '역시 이창호…'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1년 2월 14일 최철한 九단에게 패배하며 데뷔 이후 첫 무관.

2013년 1월 7일 랭킹 1위 이세돌, 떠오르는 신성 박정환을 연파하며 KBS 바둑왕전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2010년 국수전 이후 3년여 만에 우승컵을 추가하는 것.

2013년 2월 1일 패자조 결승에서 이세돌 九단을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박정환 九단과 결승전을 치러 결승 1국에서 승리했으나 2월 2일 2국과 2월 4일 열린 최종 3국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패배로 박정환 九단과의 전적은 6승 10패가 되었고 랭킹도 14위까지 떨어졌다.

2013년 4월 6일에 열린 제9회 한국물가정보배 예선 2회차에서부터 5월 6일에 벌어진 제18회 박카스배 천원전 예선 3회차까지 12연승을 달렸다. 랭킹도 10위권에 재진입.

2013년 7월 16일 벌어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대표 선출을 위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선 이세돌 九단도 탈락해 많은 이들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42]

2014년부터 들이 커가면서 이창호 九단의 활동이 크게 줄었다. 2016년 현재 아직 한국기원에 현역 프로기사로 등재되어 있긴 하지만 시니어급 대회말고는 기전 출전도 크게 줄어 이제는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황.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말 그대로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43]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1국 때 이세돌 九단을 응원하기 위해 잠깐 나왔었고, 2016년 3월 25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 바둑계 오찬 행사에도 유창혁 九단, 이세돌 九단 등과 함께 배석하기는 했다. 하지만 따로 언급은 않고 그냥 들러리 서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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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6년 갑자기 한국바둑리그에 정관장 팀 김영삼 감독에 의해 2지명(부장)으로 지명받아 바둑 현업에 복귀하게 되었다.[44] 김영삼 9단의 선택이 확 깨는 이유는 정관장 팀 1지명(대장)이 신진서 5단(최연소 주장, 만 16세)인 데다가 2지명을 한동안 바둑계에서 떠나 있던 이창호 9단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2016 한국바둑리그 화제의 팀이 될 듯.

조훈현과 분가한 이후에도 한동안 종로구 - 성북구 쪽에 살다가 2010년대 들어서 딸들 교육 문제로 강남구로 이사가서 살고 있다. 가끔씩 한국기원( 상왕십리역)에 나타나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방문 이후에 건대입구역이나 노량진역 근처의 오락실에 출몰한다. 전성기 시절에도 외국에 나가서도 오락실을 자주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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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바둑리그 이창호九단 승리 세리머니.

2016년 한국바둑리그에 나왔는데 리그를 씹어먹었다. 8월 2일 현재 정관장팀 주장인 신진서 6단이 8전 전승을 기록했는데 40세를 넘은 이창호 9단이 6승 2패를 달렸다. 정관장팀을 뽑은 김영삼 九단이 보고 놀라고 있는 수준이다. 5지명으로 정관장팀에 턱걸이 입성한 박진솔 5단도 6승 2패로 리그를 씹어먹는 중. 신진서(주장) - 이창호(2지명) - 박진솔(5지명) 3명이 20승을 합작했는데 정관장팀 총 개인 승수가 25승이다. 이 세 명이 리그를 나란히 씹어먹다보니 8라운드 중에서 정관장팀이 무려 7승 1패로 단독 선두 질주 중.

이후 후반기에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이전과 같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8승 8패.[45] 포스트시즌에서도 승리 없이 2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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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초에 한국바둑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진리배 한중바둑리그 대항전에 출전했다. 정관장황진단팀 vs 중신 베이징팀의 대항전. 이창호는 정관장황진단팀 소속이었다. 1월 19일 1차전에서 중신 베이징팀의 급격히 잘나가는 신예 한이저우 七단을 장고판에서 꺾더니, 1월 20일에는 LG배 우승 경력까지 있는 주장급 선수 퉈자시 九단을, 그것도 속기에서 꺾어서 충격을 주었다. 이창호가 한이저우-퉈자시를 나란히 꺾어버린 것을 두고 한국 바둑계보다 중국 바둑계가 더 난리가 났을 정도였다.

9월 21일 간만에 세계대회 본선 출전... 와일드카드로 나간 천부배 A조 16강전에서 셰얼하오에게 지며 바로 탈락했다.

2019년 8월 3일 국수산맥배 세계 부문에 와일드카드로 나섰지만, 16강전에서 천야오예에게 패했다.

2020년 8월 제25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에서 시니어조로 데뷔하였다.[46] 세월이... 예선 1회전에서 천풍조 九단, 한상열 六단, 김영삼 九단, 서봉수 九단을 차례로 누르며 예선 결승에 진출을 하였다. 그리고 예선 결승전에서 최규병 九단을 흑 1집반으로 승리하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10월 27일 32강전에서 리쉬안하오에게 패하며 탈락.

2021년 삼성배에서도 시니어조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47][48] 10월 20일 32강전에서 자오천위와 6시간 넘는 대결 끝에 패했다. 중반까지만 해도 우세를 가졌지만, 후반에 역전패를 당했다.

제27기 GS칼텍스배 예선을 뚫고 12년만에 정말 오랜만에 본선에 진출했다.

2022년 2월 15일 제23기 맥심커피배 16강전에서 안성준 9단의 상변 흑대마를 잡고 승리하면서 8강에 진출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초반에 잘 두지 않던 3.3 침입을 했다는 것.

바둑리그로 불린 2004년부터 18시즌 연속으로 출전한 이창호 9단. 2013년부터는 최고령 리거로 활약 중이다. 2022년 이번 시즌 7승8패, 바둑리그 통산 115승106패이다.

10월 27일 삼성배 32강전에서 탄샤오에게 패했다. #

2023년 9월 3일 2023 울산광역시장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결승전에서 최명훈에게 승리하며 오랜만에 우승을 했다.

11월 17일 삼성배 32강전에서 신민준과 접전 끝에 막판 역전패했다.

3.1. 기풍

이창호의 바둑의 가장 큰 특징은 두터움, 침착함, 형세판단, 끝내기다. 강태공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려 보이나 두터운 행마를 주무기로 삼았다. 스승인 조훈현이 쾌속행마로 제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을 생각하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아무리 불리해도 두텁고 침착하게 두어 정확한 끝내기로 마무리해 역전시키니 상대의 중압감과 패배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나이웨이가 "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두면 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도 바둑은 언제나 불리한 것 같다." 했을 정도.[49][50] 상대는 '초중반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지 않으면 후반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무리수를 두고, 그러다가 후반에 이창호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창호가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형세는 자신이 앞서는데도 무표정한 이창호를 보며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51][52] 달리 보자면 이창호는 말 그대로 늪바둑을 두는데 상대가 그 늪에 한번 빠지면 절대로 못 나온다. 상대에게 원하는 대로 둬주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건 이창호가 상대를 자신이 만든 늪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바람을 잡는 것일 뿐이다.

조훈현이 이창호의 전성기에 계속 당했던 패턴이 바로 이것으로, 초중반 조훈현 쾌속행마로 우세 → 조훈현의 무리수 → 이창호의 끝내기로 역전 식으로 계속 당했다. 아직도 끝내기와 형세 판단에 있어서는 이창호가 최정상급임을 인정받고 있으며, 하물며 전성기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모여 관전할 때 끝내기 즈음이 되면, "창호 어디갔어? 창호한테 물어봐!"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고 한다. 양재호에 따르면 이창호는 극초반부터 계가를 한다고 한다. 프로라면 계가 판단이야 모두 가능하지만, 초중반부터 집이 명확하지 않고 형세가 돌 하나에 계속 왔다갔다하는데도 계가를 시합 내내 거듭하며 종국까지 숙고할 수 있는 끈기와 계산력을 겸비한 기사는 이창호를 비롯해 소수의 몇몇뿐이다.[53]

고수 치고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도 반집 승부가 많이 나는 기사 중 하나이다. 때문에 하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몇 번만 더 둬보면 그 반집 차이가 타 기사의 백집 차이보다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반집 승부를 하는 이유는 반집으로 이기나 불계로 이기나 이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 또한 무조건 잡힐 것 같은 대마를 잡지 않는 습관도 있는데, 그 이유는 대마를 잡으려다 보면 운과 실수로 판이 뒤집힐 수도 있지만 대마를 죽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이득을 취해 계가로 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서라고 한다.

이는 스승 조훈현 九단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창호가 프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초반에 유리한 바둑에서도 대마를 노리거나 큰 집 차이로 이기려 하지 않고 작은 집 차이로 이기는 승부를 많이 하자, 혹시 어떤 연유로든 큰 집 차이 승부를 못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창호와 그러한 대국들에 대해 복기를 하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이창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큰 집 승부를 하려면 대마를 잡아야 하는데 대마를 잡기 위해 준동하다간 상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마를 살려주는 대신 다른 곳에서 차근차근 대가를 치르게 하면 작은 집 차이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말은 반상에서 수십 년 정진한 노년 기사들이 새파란 신생 기재들에게 일러주는 충고에 알맞지, 중학생 정도의 어린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실행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한창 성장하는 어린 기사라면 당연히 싸움을 좋아하고 상대를 통쾌하게 누르는 대승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창호는 당시 승부의 본질을 꿰뚫는 확고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4]. 이는 조九단이 신문 인터뷰에서도 한 적이 있지만, 그가 바둑TV에서 해설을 하던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상대 진행자와 이창호에 대한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직접 담담히 말한 적도 있다.
진 사람은 반 집에 땅을 치지만, 그런 상대를 보고 창호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물러서서 그런 건데, 억울해 하실 것이 없는데?'하면서 말이다.[55]
ㅡ조훈현 (월간조선 02년 4월호)
그런데 2005년 이후 부진이 계속되면서[56] 기풍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먹잇감이었던 창하오에게 세계대회 결승에서 두 번 만나 두 번 다 준우승하기도 하고,[57] 국내에서는 목소리가 여린 후배나, 갑자기 나타나 대마를 때려잡는 후배 또는 이창호 잡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닥치고 전투 이후 대마를 잡아먹는 바둑도 자주 보여 주신다. 대단한 것은 기풍도 바뀌고, 예전처럼 정확한 형세판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항상 정상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이창호 스타일의 바둑은 계속 이겨서 재미없으니까 저렇게 둔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부처가 아수라의 칼을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기풍 변화를 두고 본인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초반에 안정적으로 두어서 불리하게 출발하더라도 중후반에 타개와 끝내기로 역전하는 기존 기풍을 유지하면 본인보다 끝내기가 더 정밀한 후배 기사들에게 밀릴 것 같아서, 초반부터 전투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 가는 방향으로 기풍을 바꾸었다고 한다.

2016년 3월 이세돌 九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3연패를 당하던 시기에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다. 관전 중 던진 한마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창호 九단의 견해는 당시 해설하던 그 어느 프로기사들보다 정확하다고 결론이 나왔다. 2국에서 알파고의 수를 해설하던 기사들조차도 '인간들 중에서 이런 수를 둘 만한 사람이 이창호밖에 없다!'며 흥분하는 등 그가 남긴 족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계산력으로 승리를 따내는 알파고의 기풍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데도 이기는 스타일이 전성기 시절 이창호 九단과 가장 흡사한 것 같다는 분석이 많이 나오곤 했다. 지금도 우스개로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와 알파고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하는 VS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였다면 알파고를 발랐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진지하게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알파고에 대해 더 알려진 뒤로는 아무리 전성기 이창호라고 해도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 전에 호언장담했듯 손쉽게 5대0이나 4대1 승부를 내기는 힘들 거라고 보는 의견이 대세이다. [58][59], 이후 알파고가 마스터로 버전업되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되어버렸지만[60], 그만큼 지금까지도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가 강력한 승리 철학과 수읽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기사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자서전인 이창호의 부득탐승('11년 8월 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본인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이야기까지 담아놓은 책이다.

2016년 시점에는 한국바둑리그에서 대마를 때려잡는 바둑은 조금 지양하고 예전처럼 끝내기 공부를 하는 듯한 기풍이 드러나고 있다. 대신에 마샤오춘이나 구리처럼 초반에 포석을 잘 깔고 그 포석의 우세를 지키려는 바둑을 둔다. 문제는 창하오 九단한테는 약해졌다는 것.

최근 기풍으로는 알파고가 등장한 이후로 대부분의 기사들은 인공지능 정석중에 3.3정석을 많이 두어 실리적인 바둑을 두고 있지만 이창호9단은 최신 포석의 흐름을 이어가지 않고 세력을 만들어 공격하는 바둑을 두고 있다.

한국바둑리그 승리 인터뷰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바둑을 프로 기사들이 두는 대국으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하는데, 인공지능의 바둑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공지능으로 공부한 게 도움이 되었던건지 초중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2. 주요 묘수들

바둑의 메타를 바꾸다 보니 묘수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특히 많았던 것은 끝내기의 묘수, 축머리의 묘수이다. 축머리의 묘수 중 진신두는 한국 바둑 최초로 발견했고, 이른바 자폭의 묘수와 같은 트릭, 공배의 묘수와 같은 전설 속에 묻혀 있던 묘수들도 있다.


1989년 국수전(vs 조훈현) 대국에서 작렬한 끝내기 묘수(1분부터). 이창호가 三단이던 시절 끝내기에 강하다는 것을 처음 보여준 바둑이었다. 사실상 이창호 묘수의 신호탄. 이때에는 이 끝내기 묘수로 판은 이겼지만 아직까지 조훈현에게 이기진 못했고(3-1로 조훈현 타이틀 방어), 이듬해(1990) 조훈현을 3:0으로 관광보내고 국수전 타이틀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묘수가 인공지능으로 확인해 본 결과 1선에 붙이는 수는 좋은 수가 맞지만 그 이후 전개는 바둑의 전체적인 판도에서는 그렇게 좋은 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창호의 1996년 국수전서 작렬한 끝내기 묘수(1:07 부터). 이 수는 바둑계에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이창호식 '숨은 한집'을 찾아낸 끝내기 묘수(01:00부터). 2000년 응씨배 8강전. 하필이면 이 대국 상대가 이창호 천적 요다 노리모토라서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바둑이다. 눈알 터지는 반집 끝내기 승부 상황에서 이창호가 요다 노리모토의 집을 선수로 한 집 깎는 엄청난 묘수를 작렬하고 요다가 한방에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다.


1997년 동양증권배에서 마샤오춘을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은 기상천외한 축머리 묘수.(01:00 부터) 이창호 축머리 묘수 중에서 '삼신기'로 불린다. 이 외에도 이창호의 유명한 묘수 5개를 선별한 영상이니 끝까지 보길 권한다.


2000년 응씨배 4강전에서 위빈 九단한테 작렬한 자폭의 묘수(01:00부터). 이창호 스스로 자폭을 해서 위빈의 선수를 빼앗아 골로 보내는 장면이다. # 동영상에도 나오지만 위빈은 이창호의 자폭 묘수 한방에 멘탈붕괴 상태가 되어서 2국에서 초반에 바둑을 말아먹고 이창호를 결승으로 올려보낸다. 그리고 그 결승에서 창하오 九단한테 3:1로 우승을 따냈다. 이 2000년 응씨배는 16강에서 이창호를 제외한 모든 한국 바둑기사들이 전원 탈락하고, 8강에서부터 이창호 혼자서 중국, 일본기사를 꺾고 우승을 따냈다. 이 때 이창호는 왕리청- 요다 노리모토- 위빈- 창하오를 꺾었다.

2003년 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중국 뤄시허 九단[61]을 상대로 시전한 공배의 묘수. 바둑 책에서나 볼법한 엄청난 묘수라서 당한 뤄시허도 멘붕하고 이 대국을 검토하던 검토/해설진도 동반 멘붕한 엄청난 묘수. 또한 18분부터는 이세돌의 유명한 축 묘수에 버금가는 멋진 묘수도 볼 수 있다. 이 축에 대해 이영구 九단은 "마술 같은 축몰이"라고 평했다. 기사

3.3. 바투

바투에서는 돌부처답지 않은 황당한 행동들과 이어지는 표정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특히, 헤드셋을 거꾸로 끼거나 황당한 초읽기는 백미! 이런 모습을 선보이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30대가 넘었는데도 귀엽다는 의견이 많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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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시절 이창호의 굳건한(...)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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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창하오와의 대국 후에 나온 유명한 짤방이다. 사실 이 때는 창하오가 이창호를 이겼는데, 후에 회식 자리에서 추가로 복기를 청하며 창하오[71]가 이창호한테 공손히 무릎을 꿇은 것. 바둑 갤러리에서 잊을 만하면 합성소재로 활용되는 필수요소이다. 물론 이 짤은 예의를 잘 지키는 창하오[72]의 인품을 보여주는 짤이기도 하다.
* 어떤 사람이든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기 마련인데, 이창호에 대해서는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누구도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독설가로 유명한 마샤오춘이나, 거침없는 표현으로 유명한 이세돌조차도 이창호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춘다. 한마디로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 일례로, 마샤오춘은 거만한 모습이 일상적이었는데, 국제기전이 끝난 한 식사자리에서 이창호가 술을 따라주려 하자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공손하게 술을 받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창호에게 존경을 표했다. 참고로 마샤오춘은 64년생, 이창호는 75년생으로 마샤오춘이 11살이나 연장자이다.
* 굉장히 겸손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인터뷰에서도 항상 상대 대국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고, 본인에 대해서도 굉장히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상대방이 실수를 해서' '운이 좋게 이겼다' 가 단골 레파토리. 소위 말하는 독설은 일절 하지않는 편이다. 또 기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팬이나 타 기사들이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 2020년 유퀴즈에 게스트로 이세돌이 출연했는데, 이때 "이세돌에게 있어서 이창호란?" 질문을 받았는데 #, 이때 이세돌이 "바둑의 신"이라고 답하며 이창호와의 대전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이야기했다.
* 2022년 개봉 예정인 승부(영화)에서 이병헌 유아인이 각각 조훈현과 이창호를 연기한다. 참고로 1991년 MBC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국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된 바 있다.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 승부 (조훈현, 이창호, 1991.11.25 )

4.1. 약력


1986년: 입단(11세 1개월, 조훈현 九단에 이어 최연소 입단기록 2위)

1988년: 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첫 타이틀 획득, 세계최연소)

1990년: 국수, 최고위, 신왕전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준우승. 41연승. 78승 12패로 승률 86.7%

1991년: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박카스, 제왕 우승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최연소 세계챔피언). 명인, 최고위, 대왕, 비씨카드, 박카스, 제왕, KBS우승.

1993년: 국수, 명인, 대왕,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박카스, 제왕, SBS 우승. 90승으로 통산최다승 기록보유.

1994년: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국내 16개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 13관왕으로 통산 최다관왕.

1995년: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

1996년: 九단 특별승단(세계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국수,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국기, 기성, 천원 우승.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세계바둑 최강 결정전 우승.

1997년: 국수, 최고위, 대왕, 왕위, BC카드, 배달왕,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8년: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9년: 기성, KBS, 최고위, 명인, 왕위, 천원 우승

2000년: 기성, 왕위, 명인, 우승

2001년: 통산 1백회 우승. 응씨배 우승, LG배 우승. 기성, 패왕, 명인 우승

2002년: 통산 1천승 달성. 농심신라면배 우승. TV바둑아시아컵 우승. 기성 방어. 패왕 우승, 왕위 우승. 토요타덴소배 결승진출, 명인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제4회 농심辛라면배 한국대표(한국우승)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23년

4.2. 수상 기록

파일:아시안 게임 로고.svg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0 광저우 단체전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창호/상대전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어록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거기에 휘말리면 나를 잃고 상대의 흐름에 이끌려 순식간에 국면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7. 그에 대한 말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 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창하오 9단, 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이창호 기사님을 이기는 게 사실상 목표였고, 사실 끝까지 넘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

"바둑의 신이었어요. 사실상."
이세돌 9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여 이창호 9단을 평가하는 인터뷰를 했을 때. #

8. 저서

파일:하늘에 놓는 돌.jpg
* 하늘에 놓는 돌
이창호가 아직 6단이었던 1993년 쓴 책이다.
파일:이창호의 부득탐승.jpg

[1] 음력 6월 21일. [2] 경주 이씨 42세 ○호(鎬) 또는 ○건(鍵) 항렬이다. [3] 2023년 5월 6일 별세. # [4] 2024년 1월 28일 사망. # [5] 1992년 1월 27일에 우승했다. 상대는 린하이펑 九단. 전적은 이창호 3:2 린하이펑. [6] 2013년 제7회 응씨배를 우승한 판팅위 九단(결승 상대 박정환 九단, 3:1)이 16.6세로 추격했지만 이창호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즉, 이창호의 16.5세 최연소 국제기전 우승 기록은 불멸의 기록이다. [7] 1위는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 九단의 161회. [8] 2위는 이세돌의 19회(메이저 한정 시 14회). [9] 500승 이상 기사 중 500승 달성 당시의 승률이 80% 이상인 유일한 기사. [10] 1500승을 달성한 기사부터가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정도로 극히 드물다. [11] 물론 확실하게 몇 집이 득이냐 손해냐를 알아내는 것은 이후 알파고가 바둑계에 또 한번 변화를 주면서 이루었다. [12]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같이, 이 두 사람이 만든 메타는 어느 한 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는 세계를 확장하는 개념이기에 더욱 적절한 비유이다. [13] 바둑의 메타와 패러다임을 변혁시켰다는 점에서 요한 크루이프에 비견되며, 같은 이유로 알파고는 인간들의 바둑에 있어서 불확정성과 계산바둑의 가능성을 열어냄으로서 슈뢰딩거에 비견된다. [14] 그 지역에서 매우 유명한 유지였다. 이창호가 유명 프로 바둑기사에게 어릴 적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건 천재적 재능뿐 아니라 부유하고 인맥도 넓던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본인 생애가 다할 때까지 바둑에 재능을 보이던 손자 이창호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 전주 출신 바둑기사로 이창호에게 1천판에 달하는 지도대국을 해줬다. [16] 권경언 六단(1941.3.18 ~ 2022.12.04, 1966년 입문, 2021년 3월 은퇴)으로부터 소개받아 이창호를 1년간 지도했다. [17] 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는 제자 [18] 조훈현-이창호 다큐멘터리 승부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도인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준다. 승부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일반인같으면 긴장해서 절대 저런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 [19] 다만 마샤오춘 九단은 오히려 자신과 이세돌을 천재라고 주장했다. 문서 참조. [20] 강훈 九단의 86년 박카스배 우승. 이마저도 조훈현이 아닌 김인 九단에게 승리하고 얻은 타이틀이다. [21] 현재는 九단이며, 시니어 리그에서 활동중이다. [22] 사실 저 자세는 와기(臥棋) 라고 해서 조훈현의 유명한 자세 중 하나이다. 연배가 아래인 기사들을 상대하면서 체력적으로 퍼져서 옆으로 눕다시피 하는 자세인데 언론에서 좋게 포장해줘서 와기 라고 칭한 것. 다만 와기 자체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닌것이 조훈현 이전의 일본 바둑에서도 연배가 높은 기사가 기모노를 입고 삐딱하게 앉아서 돌을 놓는건 클리셰라고 할 정도로 흔한 모습이었다. [23] 결혼식 때 일가 친척을 제외하고는 바둑 관계자를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는데, 조훈현 부부만은 '가족이라 생각했기에' 초청했다고 한다. [24] 원래 계획은 조훈현이 이창호를 五단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데리고 있으려 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불문율로 정해진 내제자가 독립하는 시기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임에도 이창호가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 [25] 알파고가 등장한 현 시점에서 생각하면, 이것은 알파고의 기풍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알파고의 수들이 악수나 떡수로 보이지만 나중에 묘수로 판명하는 것이 이런 경우. 알파고는 이기는 확률이 높은 수를 찾지 더 많이 이기는 수를 찾지 않는다. 반집으로 99% 이기는 수와 8집으로 90% 확률로 이기는 수가 있다면 전자를 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알파고의 바둑에서 이창호 기사의 기풍을 떠올린 걸지도 모른다. [26] 특히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은 이전부터 이창호와 붙어보고 싶다고 말한 바가 있었고, 1990년대에 고바야시 九단이 주취폭력으로 일정 기간 제명 처분을 받기 전까지 커리어 하이를 달리면서 기어이 이창호와의 대국을 몇번 가지게 된다. 상대전적은 이창호 九단이 9승 1패로 우세. [27] 여담으로 린하이펑은 유년 시절의 이창호가 존경하는 기사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당시 어린 나이의 이창호를 상대하던 린하이펑은 '자기 아들보다도 한살 어리다'라며 이창호와의 대국에서 부담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28] 단 전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조훈현 국수의 전관왕은 1980년 9개 기전, 1982년 10개 기전, 1986년 11개 기전으로, 우승 타이틀 수에서는 더 앞섰으며, 이 기록은 2013년 현재까지 최다관왕 기록이다. 이창호의 전관왕 도전은 유창혁이 왕위전과 테크론배로 끝끝내 물을 먹여버리고 만다. [29] 비공식 기전인 타이다배와 세계 최강 결정전은 제외 [30] 2009년 통산 21회 우승 [31] 전체 전적 32전 26승 6패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기전 결승전에서 4번 만나 4번 전승. [32] 최다승 기록도 있기는 한데 이건 앞으로 따라잡을 가능성이 크니… 전성기가 지난 지금 저 두 가지 기록은 갱신하지 못할 듯하다. [33] 당시 이창호가 13개의 타이틀을 손에 들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타이틀이 왕위였다. [34] 다만 조훈현이 전관왕을 기록할 때보다 기전 수가 늘어난 탓도 있다. 이창호의 13개 타이틀이 그 때 타이틀 수보다 많으며, 현재까지 최다관왕 기록. [35] 그리고 당시는 도전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선수권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큰 이유. [36] 유창혁은 91~95년까지 왕위, 96년부터 07년까지 이창호가 타이틀을 지켰다(07년을 마지막으로 왕위전은 중단되었다). [37] 1990년대 초 한-일 신예 대항전이란 형식으로 5번기를 벌여 1:3으로 패배 [38] 강동윤의 별명이 '이창호 잡는 기계'다. 이창호가 오랫동안 압도적 1인자였기에 타도 이창호는 모든 기사들의 숙제였고, 강동윤 같은 기사들이 나오게 된 것. 사실 이창호도 당연히 이를 알기에 기풍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대응을 했다. 00년대 이창호의 바둑은 90년대에 비해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인다. [39] 이창호는 이 대항전에서만 5연승, 농심배 통틀어 13연승을 기록했다. [40] 이때 승리한 한태희는 그해 연구생 1등으로 입단하였다. [41] 저 3패가 한국팀이 농심배를 가져가지 못한 2번의 기록과 일치한다. 19승이라는 기록도 혼자 남은 불리한 상황에서 연승하면서 쌓은 기록들, 특히 2006년 농심배의 폭풍 5연승은… 참고로 이창호를 제외한 다른 한국 기사들의 농심신라면배 총전적은 45승 43패. [42] 사실 이변이라 하기도 뭣한 게… 이창호 九단은 9회부터 계속 선발전 탈락 중이었고 13회까진 와일드카드로 농심배를 출전하였다. 이세돌 九단 역시 10회, 12회를 제외하면 선발전을 통과한 적이 없었다. [43] 사실 이것은 활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대회 예선 같은 데 참가해도 과거와는 다르게 일찍 탈락해서이다. 인터뷰 내용에서 바둑 공부를 하기 어렵다고 하는 대목을 봐도 공부를 하려는 데 어려워서 못한다는 얘기지 승부 바둑을 포기하거나 은퇴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44] 엄밀히 말해서 복귀한 것이 아니다. 이창호는 바둑리그 출범 이래 매년 출전해왔고 2015년에도 마찬가지. [45] 흑번-백번 모두 4승 4패를 기록했다. [46] 보통 시니어 기전은 만 50세부터 출전이 가능하지만, 삼성화재배 시니어조 예선은 만 45세부터 출전이 가능하다. [47] 이번 예선전에서는 기권승이 2번 있었는데 2회전 상대였던 김동엽 九단은 대국장에 나오지 않아서 기권이 되었고, 8강에서는 정대상 九단이 백신 접종을 이유로 기권을 선언했다. 준결승에서 비로소 예선전 첫 대국을 가졌는데 김일환 九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48] 예선 결승전 상대는 유창혁 九단이였는데 백으로 불게승을 거두었다. [49] 그리고 또 이런 점이 재미있게도 이창호 선수를 더욱 더 상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창호 선수가 다 받아주니까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더 이득을 보기 위해 과한 수를 두다 결국 이창호 선수의 반발을 당하고 무너지는 패턴. [50] 근데 더 웃긴 건 루이나이웨이는 이창호 상대로 매우 강한 기사 중에 한명이었다. 한때 상대 승률이 70%를 넘었었다. 이창호는 전성기에 전체 승률 80%를 밥먹듯이 하던 기사라 전적이 대등하기만 해도 이창호 상대로 매우 강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루이나이웨이는 그 이상이었던 셈. [51] 다만 바투에서는 표정변화가 조금씩 나타났는데 팬들은 대환호했다. [52] 이 기믹은 후에 최정이 잇게 된다. [53] 이창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 자리는 소신산 박영훈이 물려받았다. 참고로 이창호의 이러한 면모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기사는 다름아닌 알파고. 프로그램 특성상 첫 수를 놓자마자 계가를 수행하며, 컴퓨터이기 때문에 정신적 피로 없이 이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최선의 수를 탐색한다. [54]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지 얼마나 크게 이기나/지나는 아니다. 축구에서 골 득실 따지듯 바둑도 집 득실을 따진다면 전략이 달라질 것이다. [55] 공교롭게도 2016년에 나타나 세계 최강자의 지위를 보여준 알파고 또한 완전히 같은 기풍을 보여준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대마를 잡으러 가지도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형세가 이기고 있다고 판단되면 대응조차 하지 않는다. 오로지 최종 승리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런 경향은 커제와의 대국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커제가 크게 바둑이 불리해지자 자신의 불확실한 대마를 방치한 채 끊임없이 강수를 두며 이득을 챙기려 했고 알파고는 계속해서 손해를 보며 양보했다. 그러다 더 이상 양보하면 안 될 상황까지 커제가 무리해서 두자 단호하고 완벽한 수읽기로 커제의 대마를 잡아버렸다. [56] 부진이라지만 세계대회 우승 1회, 준우승 9회이다. 국내기전은 여전히 계속해서 우승하는 중이다… [57] 그런데 이 이후 2016년까지 이창호 九단은 창하오 九단한테 엄청나게 약해졌다. 창하오가 그동안 하도 얻어 맞다보니까 맷집이 굉장히 좋아진 듯하다. 2016년에도 이창호 九단은 창하오 九단한테 2:3으로 부진했다. [58] 다만, 추측이 분명하지는 않은 영역. AlphaGo Lee는 공식전을 겨우 5판만 보여주었고, 딥마인드 추정 ELO 3739점도 거기서 한 판을 진 것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 한마디로 오차범위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추가로 참고할만한 사항으로는 AlphaGo Lee의 자가대국 기보 3개가 있다. [59] 이세돌도 이창호 이후 세계 최고의 기사였고,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했다는 평도 있지만 어찌됐든 2016년 시점에서 이세돌은 전성기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전성기 이창호 vs 전성기 이세돌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묻는다면 바둑인들 중 절대다수는 전성기 이창호의 손을 들어줄 정도로 격차가 있는데, 전성기의 이창호와 전성기가 아닌 이세돌 간의 격차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전성기가 아닌 이세돌도 (순간적으로 바둑의 신이 빙의한 덕이라지만) 어찌됐든 1판을 따낸 상대인 알파고 Lee 상대로 이창호가 무기력하게 발릴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60]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는 영역. AlphaGo Master가 프로를 상대로 한 인터넷 바둑 60전 전승, 커제와의 3전 전승, 기존의 AlphaGo Lee를 3점 접바둑 수준으로 압도한다는 점 등 AlphaGo Master에 대해서는 공개된 면모가 많기 때문. 사람과의 공식전에서는 패배한 기록이 안 나왔기 때문에 딥마인드 추정 ELO 4858점은 거의 인공지능끼리의 대국결과에만 기반하였다. 전성기 이창호가 최대 3570점까지 기록하였으므로, ELO 공식에 의한 이창호의 예상 승률은 약 0.06%. 다만 딥마인드 추정 레이팅에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는 점, 시간이 20년 이상 흐르면서 레이팅에 약간의 인플레이션이 있는 점 등은 감안해야 한다. [61] IQ 180으로 멘사 회원이다. 통칭 ' 중국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사나이'라고 불렸다. [62] 메이저한 별명은 아니지만 '삼중 허리'도 있었다. 린하이펑은 신중한 기풍으로 '이중 허리'라고 불렸는데 이창호는 린하이펑보다 한층 더 신중하다는데서 붙은 별명. 당시에는 '린하이펑이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넌다면 이창호는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안 건넌다'는 말이 유행했다. [63] 지금으로 치면 예술체육요원이다. 사회복무요원이 아니다. 당시에는 예술체육요원이 공익근무요원의 한 갈래였다. 이창호를 현역으로 보내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다 예술체육요원이 될 수 있는 예술 분야에 바둑을 추가하는 식이 된 것이다. 물론 이미 이창호가 우승했던 대회를 병무청에서 정한 병역특례 대상 국제 예술 대회에 포함시킨 것이고. 그래서 당시 3개 대회(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응씨배)가 대상이었다. 지금은 병무청에서 바둑을 예술이 아닌 체육으로 해석하기에 특례를 받기 위해선 아시안 게임 외에는 길이 없다. [64] 아무리 그 때 당시 군기가 더 엄격했다고는 해도, 당시 이창호에게 바둑을 배우고 싶어 눈독을 들이던 국내외의 별들을 모으면 은하수를 수놓을 지경이며, 중국에선 바둑계의 살아있는 신으로, 국내에선 인간문화재급 국보나 다름없는 그를 다른 일도 아니고 고작 군화끈으로 기합을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훈련소 교관이 하는 일이 군기 잡기였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 [65] 소문에 의하면 이창호와 바둑을 두려면 최소한 대대장이나 여단장급부터 가능했다고한다. [66] 이창호가 결혼할때 가족 결혼식을 원해서 수많은 바둑인들의 참석을 사양했음에도 혈연이 없는 사람 중에는 조훈현-정미화 부부 하나만 초청했는데, 이들을 단순한 바둑인이 아닌 대부대모, 일종의 양부모 개념으로 대우한 것이다. 즉 단순한 바둑대가 부부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로서 생각한 걸 보여준 것이다. [67] 실제로 조훈현은 개인적인 친분 덕이라지만 국회의원도 해보는 등 바둑 이외로도 영예를 누린 바 있다. [68] 공식기록 전적 192:119 [69] 2010년에 KB바둑리그에서 사제 대결이 한 차례 있었는데 역시 이창호의 승이었다. 그러나 바둑 내용은 승부라기보다는 사제간 연구 대국을 두는 듯 신수가 난무했고, 해설을 하던 유창혁 九단은 "어허, 재미로 바둑 두나요."라는 말까지 했다. 대국 후 복기에서는 이미 30대 중반이 되었건만 이창호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조훈현의 "이러면 어떻게 돼?", "이게 더 좋지 않았나." 등의 물음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예"로 일관하며 2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70] 힘, 승리, 빠른 종전. [71] 이창호보다 고작 1살 어리며 프로는 같은 해에 데뷔했다. [72] 창하오는 중국의 탑급 바둑기사들 중에 드물게 우승을 많이 하던 시절에도 사생활에서 거만함과 공격성이 없고 인성이 공손하고 온화한 것으로 유명해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바둑계에서도 20년 이상 인성도 바둑계 탑급이라고 호평을 받아왔다. 사실 전성기 기풍도 이창호에 가까울만큼 두터운 바둑이었다. [73] 조훈현 九단의 내제자 이전에는 전영선 七단 문하였으며 전영선 七단이 이창호의 기재에 놀라 조훈현 九단에게 소개, 지도기 후 입문. [74] 참고로 이창호의 위엄으로 화제가 된 전설의 짤방도 여기서 나왔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오마쥬 된 바 있다. 본문 참조. [75] 이러한 어록을 남겼음에도 이창호는 져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포커페이스다. 바둑을 둘 때는 늘 침착함을 유지하는 편이다. 그만큼 마인드 컨트롤을 잘한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