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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 루마니아 공산당 제7대 서기장 루마니아 국가 평의회 의장 루마니아 인민공화국·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총리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Gheorghe Gheorghiu-De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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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Gheorghe Gheorghiu |
출생 | 1901년 11월 8일 |
루마니아 왕국 바슬루이주 브를라드 | |
사망 | 1965년 3월 19일 (향년 63세)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부쿠레슈티 | |
국적 |
[[루마니아| ]][[틀:국기| ]][[틀:국기| ]]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배우자 마리아 알렉세(Maria Alexe) |
직업 | 정치인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정당 | 루마니아 공산당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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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의 7대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자 총리. 이 사람의 후임자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이다. 차우셰스쿠 이전에 집권했던 사람인데다가, 사망 후 대통령이 된 차우셰스쿠가 집권기간(1965-1989)동안 펼친 최악의 독재정치때문에 게오르기우데지 생전의 과오가 루마니아인들 사이에서 잊혀졌지만 그 역시 집권 기간(1945-1965) 동안에 폭압적 공산당 독재를 펼치며 반대자들을 억압하거나 죽인 독재자였다.[1][2]2. 생애
루마니아 동부 브를라드(Bârlad)의 극빈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학교를 떠나 전기 기술자 일을 하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1930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루마니아에서 공산당은 불법정당으로 규정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성씨에 붙은 '데지(Dej)'라는 이름도 그가 공산당원으로 노동운동에 가담하던 중 징계를 받았던 클루지 주의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로 의연하고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훗날 엄청난 악명을 떨치게 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만나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고 차우셰스쿠를 매우 총애하고 신임했다.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1944년 소련군이 동유럽으로 밀고 내려오자 그는 이 틈을 타 탈옥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공산정권의 당 서기장으로 추대되어 소련의 간섭하에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 독재 정치를 펼쳤다.
개인적인 우상화는 물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차우세스쿠가 살던 '봄의 궁전'도 원래에는 게오르기우데지가 자신의 딸들을 위해 만든 곳이었는데 게오르기우데지의 사후에야 완성되었고, 차우셰스쿠는 1970년대 초반에 이를 2배로 중축했으며, 물론 우상화도 게오르기우데지보다 훨씬 심한 수준으로 자행했다.
어마어마한 주석부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게오르기우데지는 당의 서열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나 그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였다. 그는 옛날부터 게오르기우데지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헌신적인 인물이였다. 그래서 의심이 심해진 게오르기우데지를 말년에도 편하게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공업화 경제 개발 정책을 펼치고 소련 이외에 미국, 중국, 유고슬라비아 등 다른 나라들과도 교류하는 자주 외교 노선을 어느 정도 펼치기도 했었으나 1965년 폐암으로 쓰러져 사망하게 된다.
3. 의심병
게오르기우데지는 1965년 초에 수술이 불가능한 암이라는 통보와 함께 불과 몇 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재미있는 증언이 있는데, 1965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했던 공산당 간부는 에드워드 베르가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이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를 하고 있을 때 베르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암이 발견되었을 때 게오르기우데지는 자기가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암의 발병은 자기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한 소련식 보복이라고 말하더군요. 차우셰스쿠에게도 들려주었는데 주석부에 방사선을 쏘면 그 방사선이 자기 방의 문고리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온다고 얘기했어요."
즉 소련에서 방사선을 자신에게 발사해서 암에 걸리게 했다는 음모론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 게오르기우데지가 얼마나 소련의 정보기관이나 음모 등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런 황당한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은 없다. 방사능 홍차 같은 사례를 보면 방사능을 이용한 암살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소련쪽에서 광선의 형태로 방사선을 쏘아서 암에 걸리게 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방사선의 세기는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 방사선 자체가 전자기파의 일종이니 광선의 형태로 편향성을 가지게 쏘는 것은 가능하나, 편향성의 문제 이전에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서 유의미한 살상력을 발휘할 출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실제로 그정도 고출력을 가지는 방사선 장치를 만들어서 실제로 쐈다 한들, 소련 국경에서 부쿠레슈티의 건물 속에 있는 사람을 암에 걸리게 해 죽일 정도의 방사선을 쏘면 그 직선거리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즉사했을 것이다. 애초에 핵폭발 없이 그 정도 위력의 방사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러한 망상에 대해 유일하고 엄청나게 맞장구를 쳤는데, 주변 사람들은 모두 어처구니 없는 말이긴 해도 그래도 친분이 있어서 일부러 맞장구쳐주거나 신임을 얻으려고 아부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차우셰스쿠는 정말로 믿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맞장구를 쳐줘서 그런지 게오르기우데지가 차우셰스쿠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성장한 후에도 간단한 전치사와 맞춤법, 문법도 헷갈려서 글을 쓸 때에 쓴 글들을 '정확한 루마니아어'로 교정해야만 했을 정도로 무식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게오르기우데지의 그러한 공포감이 말년에는 더욱 더 커져서 친한 동료들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생각은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다.
4. 평가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비슷하게 새 정권의 창립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국부로 추앙받기도 했었지만 사후 집권한 차우셰스쿠가 권력장악을 위해 격하하면서 그러한 추앙이 부각되지 못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 이후로부터는 뒤를 이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국가의 재앙을 초래한 역적으로 규정되어 큰 비판을 받고 있다.4.1. 긍정적 평가
일부에선 그가 차우셰스쿠보다 나은 통치를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비록 반대파들을 억압, 탄압하며 스탈린주의를 앞세워 독재 정치를 펼치던 공산 독재자였지만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등 정치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고 자신이 사망한 이후 정권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도 일부 보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죽고 차우셰스쿠가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치면서 몇 년만에 그의 예견이 적중해버렸다.비록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 독재 정치를 펼치긴 했으나 성향상 차우셰스쿠보다 온건한 면도 있었고 실제로 이 인간이 통치할 당시 루마니아는 정치나 경제나 상태가 좋았던 점도 있었다. 심지어 더 오래 살았다면 1989년 동유럽 혁명 와중에 차우셰스쿠처럼 혁명 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을 상대로 무력 진압을 사용하지 않고 퇴진을 수용하여 루마니아도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평화적으로 민주화 정착이 성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1989년 동유럽 혁명 와중에 유혈 폭력 혁명으로 공산 독재 체제가 허물어진 나라는 루마니아가 유일하다. 혹은 게오르기우데지가 그때까지 가지 않고 냉전기였던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중반 즈음에 사망해 그때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잡았다 해도 설령 차우셰스쿠의 독재정치는 지금처럼 폭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
허나 게오르기우데지의 공포정치도 차우셰스쿠 못지 않게 만만치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공산당 1당 정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비밀경찰에 의한 압박, 체포 ,추방이 잇다랐고 국유화, 통제경제, 집단농장 현상도 궤를 같이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테러를 당했는데 1946년부터 1947년까지 희생당한 사람만 6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수만 명의 노동력이 게오르기우데지의 호기심에서 시작한 '다뉴브 강-흑해 운하' 공사현장으로 추방되었으며, 소련의 지원으로 세워진 정부인 만큼 루마니아는 소련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했다.당시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회고한 한 학생은 "당시 학교 분위기는 공포로 가득했다.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정보수집이 뒤따랐고 반공주의자 집안 배경을 가졌거나 어쩌다 말 한 번이라도 잘못하면 학생정보원이나 청년지도자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수난을 당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를 후계자로 낙점한 것부터가 게오르기우데지 자신이었고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독재정치의 씨앗을 뿌린 상태에 심한 의심을 남발하는 면모까지 보였으니 이 사람이 계속 살아서 통치했다고 해도 일어날 혁명은 일어나고 차우셰스쿠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죽인 사람 숫자로 보면 게오르기우데지가 차우셰스쿠보다 더 많이 죽였던 만큼 차우셰스쿠 이상으로 이름조차 금기시된다.
다만 차우셰스쿠는 의외로 루마니아 혁명 진압 이전까지는 대량 살상과는 거리가 완전히 멀었으며, 사형 대상도 살인범과 대규모로 '국가 재산'을 횡령한 사람들 정도로만 국한하며 정치범에 대한 사법살인도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했다. 물론 차우셰스쿠가 게오르기우데지 시기인 1957년 12월 4일에 있던 농민들의 항의 시위 현장에서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려 9명을 죽인 적이 있단 것을 감안하면, 차우셰스쿠가 진짜로 사람을 죽이기 싫었서였다기보단 자신이 전 정권보다 '인도주의적'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차우셰스쿠의 통치는 오늘날의 독재국가와 비교하면 사형제를 진작에 완전히 폐지하긴 했으나 지도자 우상화와 억압성으로 악명이 높은 투르크메니스탄의 확장판 격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애초에 차우셰스쿠는 무능한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하면, 게오르기우데지는 발터 울브리히트, 클레멘트 고트발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라코시 마차시 등과 함께하는 잔인한 학살자이자 숙청의 대마왕이었기 때문에 누가 더 악한지를 따지면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사람이 사망한 이후에 차우셰스쿠가 최악의 독재정치를 펼치고 차우셰스쿠의 집권 시기가 더 길었던 바람에 게오르기우데지의 과오는 루마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잊혀졌다.
이원복이 줄거리를 맡아 1990년에 어문각 출판사에서 내놓은 차우셰스쿠 만화에선 게오르규 게오르규 제이라는 이름으로 나와서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그조차도 차우셰스쿠의 막장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5. 둘러보기
[1]
현재 루마니아에서도 차우세스쿠의 독재 정권 시기를 경험했던 중장년층들은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있는 것에 비해, 게오르기우데지 정권 시기를 겪었거나 혹은 게오르기우데지 정권과 차우세스쿠 정권을 양쪽 모두 겪었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당시 당사자들의 노령화와 사망으로 얼마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다. 대략 이승만과 비슷한 시대에 집권했기에 이미 역사속 인물에 가깝다.
[2]
비슷한 예로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는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정적들을 재판도 없이 구금했으며 2차 집권차에는
요웨리 무세베니가 이끄는 반군 토벌을 명분으로 10~5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악랄한 독재자였지만, 그 사이에 오보테를 몰아내고 집권한 인물이 하필이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디 아민이었기에 오보테의 만행들이 많이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