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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6:38:29

조선의 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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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천주교 박해
정조 15년 순조 원년 헌종 5년 헌종 12년 고종 3년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1. 개요2. 목록3. 평가 및 인식
3.1. 가톨릭 책임론3.2. 조정 책임론
3.2.1. 본질적으로 공권력의 소수 종교 박해3.2.2. 전후관계3.2.3. 정치적 동기의 박해3.2.4. 불교 양명학과의 잘못된 비교3.2.5. 파리외방전교회 제국주의의 첨병?

1. 개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천주교[1] 박해를 정리한 문서.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건국 시기부터 성리학[2]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못박고 그 외의 종교 사상들은 억압하였다. 흔히 숭유억불로 설명하지만, 주요 포인트는 '숭유'에 있었다. 즉 '억불'은 전대 왕조였던 고려의 국가 이념이 불교였기 때문에 도드라진 것일 뿐 도교, 무교 등 유교 이외의 사상을 조선 왕조에서는 모두 억압하였다.[3] 그래서 그리스도교 사상이 이웃한 일본에 '야소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될 동안에도 조선에는 쉽게 전파되지 못하였고, 늦게나마 들어온 가톨릭도 위의 숭유사상에 의거 일정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박해를 가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가톨릭에 대한 박해는 꾸준히 있었는데, 대규모 박해는 19세기 총 4번 있었으며 이 4번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100여 년 가까이 이어져온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가톨릭 활동이 '제한적으로'[4] 허용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5]

2. 목록

2.1. 신해박해



1791년( 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 자세한 내용은 진산 사건도 참고.

가톨릭 17세기 즈음 '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왔는데[6], 당시엔 으로 소개되어 을 읽을 수 있는 일부 층에게만 알려졌고, 애초에 당시 서학(천주학)은 이익, 안정복 실학자들에게 학문처럼 취급되었지 딱히 신앙으로 믿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이것이 신앙으로 본격 세력화되기 시작한 건 남인 실학 선비들이 믿기 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특히 서학에서 말하는 인간평등[7] 사상은 당시 성리학 전통 사회 모순을 비판적으로 보던 비주류 계층에도 암암리에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를 기점으로, 1784년 조선천주교회가 설립된다. 초기 포교 방식은 신자들이 모여서 그냥 모임이나 기도 정도만 하는 것이었기에, 성리학 외 타 학문( 교리) 배제라는 조선 현실상 천주교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긴 쉽지 않았으나[8], 당시 정조 조정도 " 불도 노도 중국에서 굳이 박해한 적은 없다"[9]며 불교의 별파 비슷하게 천주교를 보기도 하는 등[10]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의 천주교는 위기를 맞는다. 사건 요지는 이렇다. 진산에 살던 한 가톨릭 양반 부인(안동 권씨)이 사망하면서 "자기 장례를 치를 때는 절대로 그 어떤 미신행위나 우상숭배 행위 같은 요소들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달라"[11] 유언을 남긴다. 그러자 권씨의 아들(윤지충 바오로) 조카(권상연 야고보)는 유언대로 어머니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집안의 나머지 신주들을 지역사회 몰래 불태운다. 그런데 훗날 이것이 들켜 추궁당하면서 박해 사건으로 커진다. 먼저 장례식에서 신주가 없는 게 지역사회에 들켰는데, 처음에는 윤지충 측도 문제가 된다고 판단해 신주를 '묻었다'고 하면서 소각 사실을 숨겼지만, 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소각 사실이 실토된 것이다.[12]

또 여기서 오해가 많은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편견과 달리 윤지충 처형의 이유는 '제사 폐지' 때문이 아니라 '신주 처리' 문제였다. 윤지충 스스로도 제사 안 지내고 신주 안 세우는 건 나라에서 금한 적 없다고 변론했고,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 역시도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라며 신주를 '소각'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3] 오히려 당시 윤지충과 공권력의 논점은 '조상제사 여부'와 '신주 폐지 여부'가 아니라 '이왕 폐지할 거면 묻어야 했다'(조정)와 '소각이 왜 묻는 것보다 나쁜 거냐'(윤지충)라는 매우 예법적인 문제였다.[14] 사족으로 조선시대에 신주나 시신을 고의적으로 훼손시킬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15]

아무튼 조선 조정도 발칵 뒤집혀 조사 끝에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했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유배시킨다. 다만 사건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은 정조도 원치 않았는데, 이에 대해선 정조가 총애하던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고 있는데다[16] 윤지충과 내종사촌 관계라 사실상 정치 싸움이 될 낌새가 보여 그랬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고, 이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복된다. ( 한국 124위 순교복자)

한편, 일부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처리한 방식 때문에[17] 당시 왕이었던 정조 천주교에 관대했다거나 심지어 관심이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서학(천주교)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도 할 정도로 철저한 성리학주의자였던 정조를 고려하면 딱히 천주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학자간에도 논쟁이 있는 부분.

다만 천주교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정조 입장에선 이가환 등 측근들도 허구한날 연루되어 있다고 반대파들이 공격하는 소재로 쓰는 종교인데 이걸 완전히 끄집어내어 탄압하는 순간 탕평을 내세우던 자신의 이상은 물 건너가고, 반대로 정조 스스로가 천주교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면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의 질서를 왕 스스로가 부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 그래서 정조는 그냥 눈에 보이는 당장의 불을 끄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정조와 세도가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천주교는 더욱 퍼져나갔고, 이후 4번의 대규모 박해를 겪게 된다.

2.2. 신유박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유박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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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801년( 순조 원년, 수렴청정기)에 일어난 박해. 공식적으로나마 교화주의를 내세우던 조선이, 지속적인 천주교 탄압 여론과 반대파 숙청이란 정치적 목적까지 얽혀 아예 대외적으로도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기타 내용은 항목 참조.

2.3. 기해박해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신앙고백을 가사로 만든 생활성가. 천주교 수원교구 김태진 베난시오 신부 작곡.
1839년( 헌종 5년)에 일어난 박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성직자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8],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그 외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천주교 포교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이후 홍경래의 난 세도정치의 문란 등 사회혼란이 가중되면서 천주교는 평민들 사이로 다시 한번 포교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 변화 탓도 있었는데, 우선 신유박해를 일으킨 정순왕후 김씨부터가 정적이던 남인 양반들 숙청용으로 천주교를 이용할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평민 신자들은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고, 정순왕후 세력이 실각한 이후 순조 시대를 이끈 김조순이 등용한 안동 김씨 시파들 중엔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탄압이 한동안 누그러들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를 설정, 조선천주교회는 독립된 교구가 되었으며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사목을 맡게 된다. 1836~37년 사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주교 앵베르, 신부 모방, 샤스탕이 조선으로 몰래 입국해서 본격적으로 포교에 나서자 천주교의 세는 신유박해 전보다 커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교세 확장에 경계심이 일어나고, 마침 1834년 순조가 사망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세도정치 구도는 일단은 안동 김씨가 우세했지만) 1839년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 1777 ~ 1841)[19] 이 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한번 박해가 일어난다.

피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커지자, 더는 신자들의 박해를 볼 수 없던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자수했고, 조선 조정에서는 신유박해 때 청나라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사례와 똑같이 적용해 이들과 천주교인 대부분을 처형했다.

그리고 순교당한 양반들 일부가 안동 김씨와 연루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박해 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풍양 조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안동 김씨는 철종 즉위 전까지 수세에 처했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풍양 조씨의 확대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양해가 있었을 뿐이고, 헌종 척신 자체를 척결하려고 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철종 집권기에 풍양 조씨에 대한 반격이 의외로 적었기 때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총 70명의 순교자들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참고.

2.4. 병오박해

1846년( 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 다른 박해들에 비교하면 순교당한 사람들은 적지만,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른 박해들과 급을 같이 한다.

신유박해 때와 다르게 기해박해 이후로 풍양 조씨의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고,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1808~1853)[20]은 포교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되자 김대건 신부를 육로 대신 해로로 통해 포교활동을 하도록 명했다.

여담으로 페레올의 해로 선교 시도의 이유는 단순히 조선 조정의 탄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38년 교황청의 요동대목구 분리 후,[21] 이곳의 관할권이 대항해시대 이래로 중국 전역의 보호권(patronatus)[22]을 가진 기존 포르투갈 교회 측에서 파리외방전교회로 넘어가면서 발생한 포르투갈 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간의 알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동대목구 분리 전에 만주 지방에 이미 뿌리내린 포르투갈 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프랑스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에 대해 비협조적이 되면서 만주 육로를 통한 조선 밀입국이 쉽지 않게 상황이 변한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페레올' 검색어 참고, 가톨릭신문 참고)

포교활동을 하던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에서 붙잡히면서 그의 사제라는 직책 때문에, 조선 조정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들은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바티스트 세실(Jean-Baptiste Cécille) 제독[23]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과 함께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더욱 더 통상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에 열을 올려야겠다 판단해 김대건 신부의 처형일자를 앞당긴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24]( 헌종실록 13권 분량 참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임치백, 우술임,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이 성인품에 올랐다. ( 한국 103위 순교성인)

2.5. 병인박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병인박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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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고종 3년)에 일어난 박해.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총 24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이 박해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3. 평가 및 인식

3.1. 가톨릭 책임론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사건이긴 하지만, 천주교 측의 책임이 있다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교회의 아시아 선교를 예수회가 주도하던 과거에는 선교지역의 전통이나 예절도 어느 정도 존중해 주었지만, 청나라 선교를 둘러싸고 발생한 오랜 기간의 소위 ' 전례문제 논쟁'의 결과, 교황청 도미니코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교식 제사 우상숭배로 보아 금지시켰다.[25] 문제는 그 시기에 조선 천주교가 설립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도 제사를 폐하도록 가르쳐야 했다는 것. 조선 정부는 관혼상제를 중요히 여겼는데, 맨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양반 계층에서 조상의 신주를 태우는 행동을 그걸 집단적으로 행하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천주교를 믿지 않는 일반 백성들의 반감도 자아내었다. 서학(천주교)에 반대하며 전통을 수호하면서 사회를 바꾸자는 동학이 등장한 것도 천주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도 박해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조선을 없애고 청나라의 지방이 되기를 자청하고, 그게 되지 않으면 외세를 끌어들여 신앙을 보장받는다는 발상은 실현 가능성은 없을지언정 조정 내에서 천주교 자체가 매국적인 위험한 사상인 것으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사실 조선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사회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정감록과 말세 민간신앙 등이 득세한데다 천주교까지 들어오니, 정부 입장에서는 내란 준동 행위를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민간신앙은 예전부터 크게 건드리지 않는데다 조선 이전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처벌 근거와 범위가 부족한데다, 내명부에서도 대비부터가 민간신앙과 불교를 믿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그나마 만만하고 교세 파악이 쉬운 천주교가 대상이 되는건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가끔 청나라나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조선 내 포교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고,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된 조선 내 정세와 현재 사회 상황도 전달하였다. 전 세계 단일교단으로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지니는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활동이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활동이 일종의 스파이 행위로 인식되었다.[26]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 상황 보고를 하고 군대에 구출을 요청한 사실은 정말 수순에 따른 침략 레퍼토리다. 깽판을 치면서 역모를 선동하다 박해를 당하고 프랑스 함대가 그걸 명분으로 공격하고 이득을 보는 과정은 동남아시아 각국과 중국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되풀이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실 어떻게 보면 천주교 쪽이 초기 대응을 잘못한 측면도 없잖아 있긴 하다. 일반 민중은 몰라도 천주교가 초기엔 상류층 위주로 퍼졌다는 걸 감안하면 상류층 신자도 많았을텐데 그러면 진산 사건 1년전에 내려진 교황청의 제사금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진산 사건으로 조선 정부는 확고하게 제사를 일부러 안 지내는 것을 사형으로 다스려 일반 민중 입장에서도 제사 금지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부터 신유박해까지 10년이란 시간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일어난 사학의 일종으로 보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적극적인 탄압은 않는 자세를 취했기에 이 10년은 천주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다. 아닌말로 나중에 천주교 관련으로 처형되는 이승훈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삭탈관작이 된 적도 있는 사람이고 이 사람이 그냥저냥 천주교 신자1이 아니라 조선인 최초로 정식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적 조직력 역시도 자체적으로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청하고 또 그것을 성공시킬 정도로 꽤나 강했다. 괜히 진산 사건에서는 두 주모자인 윤치중, 권상연이 어떤 심문에도 태연하고 신유박해 당시 끌려온 이들도 마찬가지였던게[27]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험과 조직력을 놓고 10년이나 아무런 대책도 못 내놓은 것.

물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하상(정약종의 아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를 두고 조정측이 가진 천주교에 대한 인상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 또한 아버지처럼 순교했다. 물론 정하상의 노력은 실록에 실리지 않고 단지 그가 참수당한 사실과 그의 간략한 행적만이 실려 있기에 알려지지 않았지 천주교 측에서도 나름의 노력을 한 흔적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신유박해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조선은 진산 사건때 공식적으론 천주교를 믿는다고 박해한 게 아니라 제사를 걸고 넘어졌기에 대놓고 제사를 부정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1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신유박해에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문제는 이미 조선은 10년전 사건으로 천주교를 탄압할 명분이 있었고 우연찮게 걸린 무부무군까지 있었기에 천주교는 외통수 상황이었다.

결국 천주교가 박해를 피하려고 했거든 진작에 불효자, 불충 인식을 걷어낼 수 있을만한 노력을 해야 했고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늦게라도 적극적인 반박을 해야 했다. 근데 반박이 아니라 황사영 백서 사건처럼 반역으로까지 비칠 수 있는 초대형 사건을 일으켰으니 그게 문제다. 괜히 마테오 리치가 유교를 인용해가며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다. "무조건 내가 맞고 네가 틀려" 라고 하는 것보단 "네 말이 맞고 네 말에 따라 내 말도 맞아" 라고 하는 게 상대방 기분에는 좋을 것이다. 일본의 카쿠레키리시탄 역시도 탄압 회피용이긴 했지만 성모 마리아상을 불상처럼 제작했고 기도문에 음율을 붙여 불경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28] 현대에도 현지화는 흔하게 일어나는 걸 감안하면 결국 종교라는 특징을 감안하면 그래도 본류는 지키되 본류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현지에 맞출 노력이나 본류가 현지와 괴리되지 않는다고 어필하는 것은 안정적인 존속을 위해선 필연적이었다. 안 그러면 그 결과인 신유박해와 같이 '진산 사건', '무부무군' 등을 보며 '아 이놈들은 불효막심한 패륜아에 불충한 자들이구나' 라고 판단하는 조정의 판단을 되돌릴 수가 없다. 재판으로 치면 피고로 기소되었는데 판사가 증언 기회를 직접 준 것은 아니라도 아예 증언을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증언할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닌데 증언을 아얘 안 하다가 유죄 판결이 나오자 판사에게 이를 간 격이다. 무죄라 하고 싶어도 피고로 기소된 측의 말을 들어봐야 내리지 정황증거(진산 사건, 무부무군)는 유죄라고 말하는데 피고는 입을 안 여는 상황인데 어떻게 무죄를 준단 말인가.

천주교 쪽에서도 나름대로 조정의 부모 조상도 모르는 패륜아 인식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사건의 임펙트가 너무 컸고 정작 이 지경이 되도록 천주교 측에서 조정이 납득할만한 무언가를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황사영 백서 사건은 이런 워낙 깊이 박힌 패륜아 인식에다가 외세와 내통하는 반역자 놈들이라는 인식까지 더해져서 더 심하게 박해받는다. 아닌 말로 조정측의 천주교 박해가 심한 수준인 것도 사실이지만 로마의 기독교 탄압은 그 박해 정도가 더 심하고 또한 잔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인들이 당시 로마의 주 적국인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를 끌어들이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페르시아계 기독교인이 있긴 했지만 당시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위주였기에 크리스트교인들이 손잡을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 당시 사산 왕조는 로마와 사이가 나쁘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편이긴 했다만 여기도 기독교 때려잡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애초에 아무리 그래도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사산 왕조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집단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해줬을까? 아니, 당초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란 말을 누가 했는지 떠올려보자. 모든게 말하란 대로 될 수는 없지만 황사영 백서 사건은 왼뺨을 내민 것이 아니라 불량배 고용해서 상대방의 양뺨을 날려버리려고 한 격이다. 이러니 상대방 입장에서도 곱게 보일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조정이 천주교 말살을 꾀했냐면 일단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까지는 주체인 정순왕후나 노론은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까지는 정적 숙청이 목표였기에 이 시기까지 공식적으로 사형된 천주교인들은 50명뿐이다. 물론 이 50명에는 주요 인물들이 많았기에 천주교인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긴 하고 병오박해와 비교해봐도 적은 숫자는 아니긴 하다. 허나 신유박해때는 애초에 본격적인 탄압을 안 했다가 시작한 것이고 병오박해는 이미 두 번이나 지나가서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근데 이 상황에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니... 괜히 같은 천주교인인데도 정하상이 그를 두고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라고 디스한게 아니다.

거기다 병인박해 시점은 베트남이 천주교 박해했다고 쳐들어가 프랑스가 식민지로 전락시킨 시기(1858년)으로부터 10년도 안 지난 시점이다. 탄압을 조정이 먼저 벌이고 병인양요, 도굴 사건이 벌어진 것이지만 신유박해처럼 나 반역자요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듯한 행위를 저지른 것도 천주교이다. 그래도 먼저 조선에서 박해를 한 것이니 천주교에 책임을 묻는 건 말같잖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조선과 유교는 토착 세력, 천주교와 서양 열강은 외부 세력인 만큼 외부 세력이 토착 세력 사이에서 뿌리뻗으려면 싫어도 토착 세력에게 잘 보이려고 해야 하는데[29] 애초부터 서로 충돌할 여지가 있을 뿐 아니라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박해를 한다고 나라를 팔아먹고 왕족 무덤을 도굴하는 지금 기준으로도 경악스럽지만 그 당시로서는 더 경악스런 범죄를 저지른 것[30]이니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후 조선이 천주교를 공인해줘서 망한 건 아니다. 조선의 멸망과 천주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조선이 천주교를 무작정 허용해줬다면 조선 체제에는 심각한 위협을 가져왔을 것이다. 유교가 흔들리니 유교를 통해 권력을 누려온 양반집단이 흔들릴 것이고 이들에 의해서 천주교 공격이 일어났을 것이고 결국 천주교가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어도 사적인 박해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다 왕도 기존 기득권 집단인 양반들의 지지를 받아 통치를 하는데 이들의 반발을 애써 무시하거나 하면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에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그 대안으로 개화파를 양성하면 되지 않겠냐 싶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양성된다고 해도 그 수는 적을 것이고 개화파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들 역시도 국가나 체제유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경우에는 이를 단행한 세력은 이미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과 역량을 갖추었고 정치적으로도 큰 힘을 갖고 있었지만[31] 개화파는 경력도 경험도 짧았지만 자기가 본 것대로만 따르는, 자기만의 무언가가 부족했다. 결국 천주교를 순순히 공인해줬다고 조선에게는 딱히 이득이 없는 셈. 서로 어떻게든 조율점을 찾아보려고 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교황청에서 제사 금지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다.

실제로 조선은 천주교가 17세기에 이미 들어왔고 18세기 후반에는 신앙으로서 받들어지지만 그래도 한동안 조선 조정과의 마찰이 없었다. 그러다가 1790년에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한 것이 조선에 알려지고 이 때 제사 금지에 반발한 신자들은 일제히 배교했고 남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다 소식 들린지 1년 만에 최초의 박해사건이 터진다. 결국 정말로 조선에서 천주교와 공존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기보단[32] 천주교 쪽에서 먼저 그럴 여지를 없애버린 것에 가깝다.

3.2. 조정 책임론

3.2.1. 본질적으로 공권력의 소수 종교 박해

상기한 '가톨릭 책임론'은 종교를 박해하는 공권력보다 사회 통념에 이질적인 종교가 더 문제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위와 똑같은 논리를 사용한다면, 중세~근대 초 유럽에서 이단자와 이교도를 살해했어도 정당하며,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종교 박해도 정당하게 된다.

유럽 사회의 이교도 박해이든, 이단자 박해이든, 소수 종교가 사회 통념에 이질적인 건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고, 이 통념을 공격하는 요소도 소수 종교에 자주 포함한다. 그러나 소수자 박해가 역사적 맥락에서 '변호'(사회 통념을 거스른다 / 예비 간첩이다)되는 경우는 있어도, '합리화'(잘 박해했다)되는 경우는 없다.[33]

또한 자꾸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식 제사를 안 지낸다는 행위 그 자체는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죽을 이유가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장례와 제례를 중시한 것은 맞지만, "가난한 자가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은 형편상 그럴 수도 있는 것"이며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라는 게 윤지충 시대의 인식이었다. 진산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은 유교식 제사를 지내냐 마느냐가 아니라, "신주를 안 쓸 거면 묻어야지 왜 불태우냐"(조정)와 "불태우는 게 왜 묻는 것보다 나쁜 것이냐"(윤지충)이라는 예법적인 문제였고, 결국 신주의 처리 방법에 시비가 걸려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왜 굳이 불태워서 어그로를 끄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윤지충은 지역사회 몰래 충돌을 최소화하고 불태운 것이다. 이교적 요소를 차단해달라는 어머니 권씨의 유언을 집행하되 지역사회 몰래 조용히 집행하려 했던 윤지충을 조선 사회 전체가 박해한 게 진산 사건의 본질이다. 분명히 당대 시대 여건상 조선 사회의 대응은 변호의 여지가 있으며 이는 책임을 경감시키지만, 변호를 하는 것과 합리화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당장 유럽사에서도 과거의 소수종교 박해들은 "당대 사회에서 그럴 수는 있었다"고 변호 받는 정도이지 "잘 박해했다", "박해 받을 짓을 했다"고 합리화를 하진 않는다. 같은 원리로, 황사영의 대응도 한국 천주교에서 당대 맥락상 '변호'를 할 뿐이지 '합리화'를 하지는 않는다.[34] 그리고 다시 똑같은 원리로, 조선의 박해는 당대 상황에서 '변호'가 되는 것이지 잘 박해했다고 '합리화'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당대 조선 사회의 폭력적 대응이 '변호' 가능하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는 그 자체로 나쁜 짓이며 '합리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교황청이 조상제사를 불허한 것은 원리주의로 단순화시킬 성질이 못된다. 조상제사의 허용 여부는 본질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우상숭배인가, 혹은 비종교적(혹은 종교적 성격이 희석된) 예식인가"라는 논쟁에 기반해있고, 이건 현대에도 학술적으로 단답하기가 어려운 문제이다.[35] 오히려 현대에는, " 유교 종교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종교와 철학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서구중심적 전제'를 깔고 있음을 지적받고 있다. 즉 유교의 종교성과 철학성을 모두 조심스럽게 긍정한다고 할 수 있다.[36] 현대의 한국 가톨릭에서도 조상제사를 허용하되, 축과 합문(闔門)을 금지하고 신위(神位) 등의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조상제사 문화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37] 즉 현 가톨릭의 조상제사 허용은 "탈종교적으로 제한되었을 때의 한정적 허용"이며, 조상제사 문화가 온전히 허용되었을 때 가톨릭적 가치와 충돌한다는 점에서는 19세기이든 21세기이든 해석이 달라지지 않았다.

3.2.2. 전후관계

황사영 백서 사건을 들어서 "외세를 부르려 해서 박해했다"고 하는 것은 전후관계과 책임 소재를 뒤집은 것으로, 실상은 "박해 당해서 외세를 부르려 한 것"이다. 곧, 조정에서 윤지충 야고보와 권상연 야고보 등을 박해하자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난 것이며, 그 시작은 분명하게 특정 종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이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황사영의 어리석음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한들, 백서 사건의 본질은 "박해 받던 신자가 참다 못해 외세를 부른 것"이며, 그 이전엔 조정도 조선 가톨릭 신자들도 외국 군대를 가톨릭과 연결시키지 않았다.[38] 비유컨대, 아비의 빠따질에 시달리던 아이가 참다 못해서 옆집 양아치 아저씨를 끌어들이려 했다면, 양아치를 순진하게 믿은 아이도 문제지만, 문제의 시작은 당연히 아비의 빠따질에 있는 것이다. 이건 황사영의 어리석음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결코 희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상황에서 그 아이는 양아치를 부를 아이였으니 빠따질도 정당했다고 하는 건, 전후관계를 뒤집은 것이다.[39]

또한 황사영이 국가와 교회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본 것은 문제가 맞지만, 국가와 교회를 양자택일하도록 상황을 몰고 간 것은 분명하게 조정이었다. 그마저도 황사영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조선인이든 외국인 선교사이든, "아비가 빠따질을 하더라도 일단 참고 견디자"라는 마인드로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때까지 견뎌야 했다.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 파리 외방전교회 샤를르 달레 신부(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평가.
계속 강조되지만, 황사영의 선택 그 자체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동시에, 소수종교에 대한 공권력의 박해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황사영의 선택은 변호가 가능할 뿐이고, 조정의 폭력도 변호가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변호는 되지만 합리화는 할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은 박해에서 시작되었다.

3.2.3. 정치적 동기의 박해

또한 이러한 종교 박해에 정치적 동기까지 섞인 게 조선의 박해였다. 곧 조정에서 천주교를 빌미로 노론 시파와 남인을 몰아내거나(신유박해), 관료들 개인 신념이나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기해박해), 통상 거부를 성직자 처형을 통해 외세에 피력하거나(병오박해), 프랑스와 밀약에 실패하자 양반층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병인박해) 등 조선 정부의 정치적 판단이 대부분이었다.

3.2.4. 불교 양명학과의 잘못된 비교

그리고 " 불교 양명학은 참았는데 왜 가톨릭은 안 참았냐"는 비판은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결여된 것이다. 조선은 개국 후 멸망 때까지 불교를 '관리'한다는 게 공식 지침이었지, 불교 '박멸'이 목표가 아니었다. 불교계를 산으로 내쫓고 재정적으로 고갈시키는 등의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인 사례는 없다.[40] 그리고 양명학은 아예 억압 자체를 받지 않았다. 단지 괴짜나 소수설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41] 반면 가톨릭은 공권력 차원에서 아예 '박멸'을 목표로 했고, 신분의 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인 것인데 당연히 비교대상이 아니다.

3.2.5. 파리외방전교회 제국주의의 첨병?

선교가 서양 본국의 정치적 패권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이건 선교이든 장사이든 인적 교류가 발생하면서 따라붙게 되는 부작용이지, 선교 그 자체가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건 아니다. 프랑스인 선교사가 원주민에게 죽으면 프랑스 정부의 개입 명분이 될 순 있지만, 프랑스인 선교사의 목적은 원주민에게 죽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가 공경을 받는 것은 맞고,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순교는 "어쩔 수 없을 때 당하는 것"이고 제1 목표는 당연히 선교사가 살아남아서 현지에 신자들을 늘리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오히려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 단체 중 제국주의 국가 입장에서 가장 도움이 안 되는 단체였다. 17세기 예수회처럼 국왕의 보호권이랑 얽힌 것도 아니고, 1822년 후로는 자금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한(즉, 프랑스 정부에 금전적으로 묶이지 않은) 파리외방전교회는, 회칙에서부터 최고 목표를 '방인(邦人, 원주민) 사제 양성'으로 잡았기에, 프랑스 제국주의 입장에선 '원주민 교회의 독립성을 의도적으로 강화하는', 참으로 도움 안 되는 단체였다.[42]

무엇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배경부터가, 기존 선교 방식이 제국주의와 얽히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와 얽히지 않으려는 의도는 비록 결실을 본 것은 아니지만,[43] 파리외방전교회가 이 문제를 의식했으며, 원주민 사제의 빠른 양성이라는 성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포르투갈 왕의 보호권이 지배하던 17세기 중엽 아시아 각국의 교회 상황은 처참했다.[44] 일본의 교회는 한 때 대단히 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통킹에서 일하는 유일한 선교사들이었던 예수 회원들은 1663년에 그곳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쫓겨 나왔다가 6년 후 다시 들어가려다 필요없이 박해만 조장한 셈이 되고 말았다. 1665년에 코친차이나(현 베트남)에서는 선교 활동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포르투갈 사람 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는 1665년에서 1671년 사이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광둥(廣東)에 억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된 주 원인 중의 하나는 당시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함에 있어서 종교외적 특권들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포르투갈 왕권을 등에 업고 유력자(有力者)로 행세한다든지, 그 일부가 심지어 상행위(商行爲)에 가담하는 외도(外道)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치 권력에 유착된 그리스도교는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의 법"이라고 불리웠고, 해로(海路)를 통한 외국 무역의 역사가 거의 없던 동남아 각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예수회원들이 운항하던 상선들은 현지인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주었다. 고아와 마카오에서 예수 회원들이 경영하던 상점들은 인도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유명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영세 입교시키기는 했어도 본방인[45] 사제들을 양성하고 교구를 설립한다는 등의 배려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 선교권을 교황청에서 다시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1653년 1월 27에는 아시아에서 다년간 선교사로 일해 온 62세의 예수회 신부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46]가 파리에 도착했다. ... 그때 로드 신부는 절실히 느낀바가 있었다. 자기와 같은 서양 사람이 아닌 현지의 사제들이 포교활동을 한다면 당국의 눈을 피해 최소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시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기가 얼마나 수월할 것인가? 그런데 그곳[47]에서 선교가 시작된지 30년이 지난 그때까지 단 1명의 방인사제[48]도 양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선례가 그 지역에서도 다시 한번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 박해시대에 만일 일본인 성직자들이 충분히 있어서 비교적 쉽게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성무를 집행할 수가 있었다면, 한 때 인간적 유약성으로 인해 배교했던 사람도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등, 교회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소멸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정이 비슷해서 현지인 가운데 적당한 사람들을 선발 양성하여 사제품을 줄 주교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럽에 돌아가 교황께는 주교들을 청하고, 신자들에게는 선교 자금을 청하며, 자기 수도회 총장에게는 필요한 선교사들을 청하기로 하고 1649년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통킹과 코친차이나의 교회 상황을 보고하면서 그곳에 30만의 신자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사목을 위해 최소 300명의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 박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 것이라는 점 등을 역설하였다.
...로드 신부에 의해 추천을 받아 포교 성성으로부터 파견될 주교들은 바로 이 교회감목이라는 자격으로 가게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발탁된 사람들은 프랑수아 팔뤼(François Pallu), 피에르 랑베르(Pierre Lambert), 이냐스 코톨랑디(Ignace Cotolendi)였다. 이 중 세 번째 인물은 중국 남경의 교황대리감목이면서 북경과 조선도 그의 책임하에 두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도중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1658년 나머지 두 사람이 주교로 서품되고 포교 성성으로부터 파견되어 아시아로 떠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는 이들을 창립자들로 하여 1659년에 사실상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당시 포교성성이 프랑수아 팔뤼(François Pallu)와 피에르 랑베르(Pierre Lambert)를 선교지로 보내면서 내린 훈령과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을 보면, 기존 선교 방식에 대한 교계 내부의 반성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포교성성이 이들을 선교지로 보내면서 내린 훈령을 유심히 보아 둘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이 회의 기본 정신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사제직에 적합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들을 가능한한 많이 훈련시키고 양성하여 성품을 받게 한다고 하는 이 목적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중국 사람들에게 프랑스나 스페인 또는 이탈리아나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들을 그대로 이식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합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우리 쪽의 나라들을 가져다 주지 말고 신앙을 가져다 주십시오. 이 신앙은 어떤 민족의 것이건 간에 그 자체 타기(唾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일체의 관행이나 의식을 배척하거나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보존하고 보호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과 자기 나라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본성에 속한 성향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의 나라 관습을 그 자리에 대치시킨다면 그것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 백성들의 관행과 유럽의 관행을 비교하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 자신을 그들의 관행에 맞추어 그 쪽으로 익숙하게 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그러나 소위 중국 전례 논쟁으로 포교성성의 이런 기본 방침이 얼마나 정면으로 자가당착에 빠졌던가를 우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여기에 표명된 원칙이 실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사례는 상당히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보호권을 앞세운 선교 방식이 내포하고 있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한 포교성성의 기본 의도였고, 그것이 그대로 파리 외전[49]의 근본적인 선교 방법으로도 받아들여진 정신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1) 동인도에 프랑스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하는 계획을 구상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제일 첫째 목표이며, 그 계획을 실제로 수립한 교황청의 첫째 의도는 이교인들의 회개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이교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었다. 다름 아니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나 그 자녀들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에 올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 교회에 걸쳐서 해 주셨던 것과 같이, 각 지방에 성직자단을 구성하고 교계제도를 설립시킨다는 원칙이었다. 그 길만이 단시일 내에 완전한 그리스도교를 형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관계자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의 교회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 그러므로 파리의 신학교로부터 배출된 모든 일꾼들은 그들이 일하게 될 지역에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에 충분한 정도의 신자들이 생기고 그들로부터 목자들을 선발해 낼 수가 있는 단계에 이르면 즉시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자기네들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의 존재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해 나갈 만한 단계에 이르면, 성청의 허락을 받아서 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모든 설비들을 방인 사제들에게 넘겨 주고 물러나 다른 곳을 찾아가 일해야 한다.

3) 따라서 그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
둘째, 새 신자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
셋째,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일.
여기서 둘째보다는 첫째가,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일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 中

또한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속권의 요청으로 조선에 선교한 것도 아니다.
외방전교회는 로마로부터 조선 포교지를 전담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외방전교회는 오랫동안 망설였으나 결국 한국진출을 수락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은 프랑스 국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외방전교회 자신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에 흔히 있었던 것처럼 국가의 팽창세력을 따라 진출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로마 포교성성의 제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하고, 이어 그들이 조선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자 프랑스는 한국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보호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종교보호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가톨릭에 대해 국내에서는 중립을 지키려 하면서도 해외에서는 그 보호정책을 고수하려 하였다. 이라하여 프랑스는 선교사를 살해한 것에 보복을 가하고 박해를 중지시킨다는 구실아래 수차에 걸쳐 조선해안에 군함을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박해를 가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의 意義 -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 최석우

일제강점기 파리외방전교회가 일제의 공권력을 인정해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실망을 줬을 수는 있지만,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말기의 조정을 공권력으로 인정한 것이 또한 파리외방전교회이다. 즉 파리외방전교회는 제국주의 국가이든 가톨릭 박해 국가이든 현지 공권력을 인정했는 것이지, 프랑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단체는 결코 아니었다. 애당초 독일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조선에 부른 사람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이다.


[1] 나무위키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문서 제목이기도 한 '가톨릭'이지만, 한국사와 관련된 상황에서는 천주교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2] 유교라고 퉁치기 쉬운데, 사실 성리학은 유교의 한 갈래일 뿐이라, 다른 갈래의 양명학 등은 조선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했다. [3] 물론 국가 체제적으로 조정에서 대놓고 추켜세우지 않았다는 거지, 실상은 선비 중에서도 불교나 도교(혹은 도가) 등에 심취한 자들은 있었다. 또 그 정도도 시기마다 차이는 있었다. [4] 현행 교육과정에선 한국 가톨릭 해방 과정을 상세히 다루지 않기에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천주교가 허용되었다"고 간략히 넘어가지만, 1886년은 가톨릭이 해방된 해가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를 통한 간접적인 묵인이 강화된 해이다. 이후 1899년에 조인된 교민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04년에 체결된 선교조약을 통해 선교사들이 개항장 이외의 타 지역에서도 토지 매입과 건물 건축의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최종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완성되었다. [5] 물론, '사실상'으로 따지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로 서양인들의 가톨릭 활동이 묵인되고 있었다. 곧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으로, 이 해에 천주교회는 인현서당을 설립하여 신자가 아닌 일반인 학생들도 상대로 하는 교육기관을 개설하였다. 그 이후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고,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묵인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6]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후해 소현세자 등 일부 조선인들이 외국 선교사들을 접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명맥이 이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7] 정확히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 당시 조선 사람들의 기존 관념이었던 하늘() 개념이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으로 일치가 되었기에 수용이 아주 쉬웠다. [8] 실제 신해박해 이전부터 일부 유생들이 "천주교 교리가 조선의 성리학 이념에 위배된다"며 위정척사를 내세우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이에 조정이 천주교 서적 수입을 금하기도 했다. [9] 물론 정확히 따지면 삼무일종법난처럼 중국 몇몇 왕조에서 불교를 탄압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 시기가 길진 않았다. [10] 두 종교 모두 천국( 극락), 지옥처럼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실제 채제공은 천주교 교리에도 제법 통달했는지 교리를 정조에게 설명하며 천주교 교리 중엔 좋은 말도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는 식의 괴력난신 드립도 있다고 디스하자 정조는 이게 다 황당무계한 패관 소설을 하도 보니까 그런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11] 김수태. 「안동 권씨 부인의 유교식 조상제사 거부」 교회사학 no.13(2016) : 12. [12] 일각에선 윤지충이 동네 사람들 보라고 온데군데 어그로 끌면서 신주를 불태웠다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윤지충은 그냥 자기 집 신주를 조용히 태우고 가급적 지역 사회와 마찰이 없게 하려 했다. 윤지충이 처음에 신주 소각을 숨기려 한 것은 서양측의 기록(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서신, 1797-08-15, to 사천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과 실록(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7일 무인 2번째기사)에서 교차 검증이 된다. 들킨 이후로는 신주 소각의 정당성을 윤지충이 적극적으로 말한 것도 두 계열 기록에서 공통이다. [13] 정조실록, 같은 기사. [14] 조현범.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 논거에 대한 일 고찰」 종교연구 78, no.1 (2018) : 159. [15]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2번째 기사. [16] 다만 이 사건의 영향으로 배교한다. 사실 정약용 외에도 당시 많은 남인들이 천주교를 믿었는데, 때문에 '천주교 박해=정적 숙청'으로 보는 시각도 생긴 것. [17] 물론 전제군주정과 성리학이 지배하던 당시 시대상 대비 온건했다는 거고,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저것도 명백한 종교 탄압이긴 하다. 정조 시절의 천주교 대책은 크게 보면 숭유에 기반한 교화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젠 이 교화주의란 것도 결국 세부적으로 가면 배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윗선과 무관하게 혹은 묵인하에 일부 관리들의 배교 강요=장형같은 형벌의 형태를 불러오는 측면이 있었다. [1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라우렌시오를 프랑스어로 읽으면 로랑이며, 범은 앵베르 주교가 쓰던 조선 이름인 범세형을 줄였다. 앵베르 주교를 따라온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프랑스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프랑스어로 읽은 피에르, 자크로 두 신부는 나백다록, 정아각백이란 조선 이름을 썼다. 앵베르 주교가 2대 교구장인 이유는 전임자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1792~1835.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조선식 성은 소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당시에는 조선대목구 감목, 이후 서울대교구 교구장 목록으로 소급)이며 범 주교는 후임이다. [19] 1840년에 천주교인도 아닌데도 또는 배교 했다는데도 사람을 죽게 한 것을 묵인했다는 것과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의준(李義準) 등이 정권을 마음대로 했다고 탄핵당하여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죽게 된다. [20] 현지화를 위해 쓴 조선식 성은 고(高) 씨다. 현재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21] 1840년에는 요동대목구가 만주대목구와 몽골대목구로 다시 분리된다. [22] 속권의 국왕이 선교사를 보호하는 권리와 의무. [23] 헌종실록에는 '슬서이(瑟西爾, 瑟西耳)'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4] 김대건은 모어인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까지 6개 국어 구사가 가능했고 당시 조선에서 이런 인재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김대건의 능력을 아깝게 여겨 "배교만 하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이랑 후한 포상도 내리겠다"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25] 교황청의 제사 금지는 200여 년 뒤인 비오 12세 때 이제 제사는 우상숭배에서 관습으로 봐야 한다며 해제되었다. [26] 실제 현재 중국공산당이 기독교 중에서도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인 이유가 가톨릭은 교황청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인데, 중국 정부는 이를 외세의 개입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27] 많은 이들이 순교를 택했고 간혹 배교하겠다고 말한 이도 있지만 이내 번복하여 순교한 사람도 있었다. [28] 다만 그 과정에서 현지화가 너무 이루어지다보니 기존의 교리마저도 크게 뒤흔들리기도 했다. 가령 원죄가 삭제되기도 했고 아담의 자녀들끼리 자식을 낳았다며 근친상간이 대놓고 명시되었다. [29] 정 이게 싫거든 기존 토착 세력을 엎어버리면 된다. 가톨릭의 시도는 이쪽으로 볼 순 있긴 한데 그렇다고 이러한 방법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30] 일례로 고종 시기에 세계순방에 나선 보빙사 일행은 이집트에도 방문하여 피라미드를 구경했는데 당시 피라미드는 등반 및 탐사가 유행이었음에도 이들은 남의 무덤은 함부로 밟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수천년 전이라고 해도 왕의 무덤이니 유행이라도 그건 아닌 거 같다며 거절했다. 무덤을 밟는 것조차 이 정도이니 도굴은 말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오자서 자기가 도굴한 왕릉의 주인이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왕임에도 그럼에도 그 행위는 비판받고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떳떳한 일이라 여기지는 못했다. [31] 이들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그 일본 군부조차도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군부가 힘을 키운건 이들, 즉 원로들이 서서히 죽어서 공백이 생기면서부터다. [32] 물론 조선이 천주교를 이전부터 좋게 본 건 아니었다. 체제공이 "저놈들은 아비를 천주(하느님), 조화옹( 예수) 다음인 3번째로 높다고 여기고, 남녀간의 정욕이 없는 자를 정신이 응집되었다 하여 교주로 삼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고, 불교처럼 허황된 소리를 일삼는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박해로 이어지진 않았다.(진산박해 3년 전 일이다.) 즉 좋아서 공존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해할 만큼 위험분자로 보진 않은 것. 그리고 채제공도 천주교를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이 말의 전체 내용은 '사학 중에 간혹 좋은 것도 있는데 그 중에 천주교란 애들입니다. 그런데 개네가 (앞서 말한 내용들)을 하는 거 보니 폐해는 클 듯합니다' 였다. 심지어 진산박해가 일어나던 시점에서도 천주교를 가열차게 비판하지만 그래도 원래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자는 본뜻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천주교를 마냥 마녀사냥마냥 나쁘게 보았다기 보다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나쁜 것이 더 많아서 나쁘게 보았다 정도로 여기면 좋을 듯하다. [33] 또한 후술하듯, 윤지충은 신주 소각을 어디까지나 집안에서 몰래 했지, 공개된 장소에서 사회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 게 아니다. [34] 황사영 시복에 가장 긍정적인 가톨릭 신자들도, "백서를 잘 썼다"고 합리화를 하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박해 당하다보니 극단적 선택을 했구나"고 변호하는 정도이며, 다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고수 한 것 자체는 명백하다는 점을 들 뿐이다. [35] 비슷하게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이슬람교 역시도 전반적으로는 어떤 유형으로든 제사를 부정하지만 튀르크 문화권에서는 이슬람교를 믿지만 제사 비슷한 의식을 하고 이슬람 별파인 알레비파도 조금 비슷한 행위를 한다. [36] 애초에 조선은 천주교를 서이라고 불렀다는걸 잊지 말자. 즉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37] 참고: 《가톨릭대사전》 '조상제사' 문서;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한국천주교주교회의) [38] 백서 사건의 당사자인 황사영부터가 외국 가톨릭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 청나라에선 천주교가 마음껏 허용된다',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면 천주교 허용을 조선에 강요할 것이다'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으며, 서양 군대에 대해서도 백서에선 구체적으로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서양'으로만 적고 있을 뿐이다. [39] 황사영의 대응은 오늘날 가톨릭에서도 '변호'를 할 뿐이지 '합리화'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황사영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근본적 전후관계가 조정의 박해에서 시작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40] 물론 여기에는 불교가 이미 퍼진 지 천년이 되어서 너무 깊게 뿌리박힌데다 왕실의 여인들조차도 불교를 믿는 이가 많았으며 심지어 사대부, 관료조차도 불교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기도 했다. 한 예시로 세종 때 관료인 유정현은 생전에는 수륙재에 반대했으면서 정작 자기가 죽을 때는 수륙재를 베풀게 했다. [41] 사문난적이니 뭐니 하지만 적어도 조선은 이단이라고 죽이는 나라는 아니었다. [42] 그나마 파리외방전교회원이 조선에서 한 가장 '제국주의적인' 행동은 병인박해 당시 리델이 프랑스군에 구출을 요청한 것과 페롱이 참여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 정도인데, 리델의 구출 요청은 제국주의에 이용될 걸 충분히 알만한 사람이 그랬으니 합리화를 하기는 어려우나, 그 자체로는 살려달라는 구출 요청이지 제국주의는 아니다. 그리고 페롱의 도굴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알리지도 않고 한 돌출 행동이었으며, 사건이 벌어지자 전교회에서도 미친 짓으로 취급하고 좌천시켰다.(조현범,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43]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속권 양쪽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속권에 종속되길 거부했으나, 프랑스 속권이 해외에서 휘두르는 무력에는 의지하였다. 한편 프랑스 속권은 파리외방전교회를 백안시했고, 실상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본토에서 받은 대우는 개신교 국가의 가톨릭 선교단체와 크게 다를 바도 없었지만, 선교사들이 개척한 전교 지역을 프랑스 속권은 노골적으로 떡고물로 취급했다. [44] 발췌자 주석: 다만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전교가 이베리아인들이나 예수회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것은 또 아니다. 선교사 본인의 문제(19세기 초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초래한 극히 감정적인 종교성에 기인한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 이로 인한 선교사들의 지적 능력 악화, 속권의 간섭은 싫지만 필요하면 속권의 무력에 호소하려는 이중적 태도)와 외부의 문제(혁명 이후의 전교회의 재정적 열악함, 신학교 폐쇄, 본국에선 전교회를 백안시하지만 전교 지역이 개척되면 이를 떡고물로 보는 프랑스 속권의 이중적 태도)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냐 이베리아냐 영미냐, 혹은 파리외방전교회냐 예수회냐 개신교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의 남아시아·동북아·동남아 선교는 필리핀의 가톨릭화와 한국의 부분적 개신교화 정도를 제외하면 큰 교세를 얻는 데 실패했다. [45] 발췌자 주석: 원주민 [46] 발췌자 주석: 일본 선교를 목적으로 1618년에 로마를 떠났으나 일본의 쇄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코친차이나와 마카오에서 선교를 했다. [47] 발췌자 주석: 코친차이나와 마카오 [48] 발췌자 주석: 원주민 사제 [49] 발췌자 주석: 파리외방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