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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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의 왕녀
숙경공주 | 淑敬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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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8년( 인조 26년) 2월 22일 | |
사망 |
1671년(
현종 12년)
2월 17일 (향년 2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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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 장의동 사저 | ||
부왕 | 효종 | |
모후 | 인선왕후 장씨 | |
부군 | 흥평위 원몽린(興平尉 元夢麟, 1648 ~ 1674)[1] | |
자녀 |
슬하 1녀 장녀 - 원숙희(元淑喜, 1668 ~ ?) (양자) - 원명구(元命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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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산 1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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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6녀. 기록에 따라 5녀로 기재된 경우가 있으나 틀린 것은 아니고, 숙종 대에 일찍 요절한 효종의 적장녀 숙신공주를 추증하기 전에는 5녀였다.2. 생애
1659년(효종 10) 우의정 원두표[3]의 손자이자 당시 익위사세마 원만리의 아들 원몽린(元夢鱗)과 가례를 올렸다.당시 숙경공주의 집을 지어주는데, 많은 재화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군대까지 동원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조정의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의 비호로 무사했다.
1671년(현종 12) 공주가 천연두로 사망하자[4], 현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창경궁 숭문당에서 거애하였다.[5]
3. 여담
- 《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매죽헌 이완(李浣)이 수어사로 있을 때, 상벌이 엄격하여 한 관리가 죄를 짓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관리의 누이는 당시 왕대비였던 인선왕후의 시녀였으므로, 그를 통해 목숨을 구명해달라는 청탁을 넣었다. 인선왕후가 불쌍히 여겨 숙경공주를 대신 이완에게 보내 죄를 가볍게 물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완은 "관리의 죄가 중해서 용서할 수 없으니, 내 비록 친히 대비의 명령을 받았더라도 마땅히 뜻에 맞추어 법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샛길로 전해온 말에 있어서이겠는가. 공주는 다시는 이 같은 청을 하지 마시오" 하면서 뿌리쳤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 남편 : 흥평위 원몽린(興平尉 元夢麟, 1648 ~ 1674)
5. 매체에서
- 영화 《공주님의 짝사랑》(1967): 감독은 최은희로, 주인공 숙경공주의 역할로 남정임이 출연하며, 그 외에 한은진, 김광수, 조미령, 전계현 등이 나온다. 임금의 여섯 공주 중 막내 딸인 숙경공주가 인선대비를 위해 열린 잔치에서 성균관 생도인 김선도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먼저 시집 간 언니들의 불평 불만을 듣게 되자, 궁궐을 나와 상궁들을 따돌리고 시장 구경에 나선다. 시장에서 돈도 안 내고 쑥떡을 그냥 집어먹었다가 쑥떡 장수에게 혼나고, 옹기장이와 부딪혀 옹기를 깨트리는 등 온갖 일들을 겪다가 마지막에 장원급제한 김선도와 맺어지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