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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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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남조 초대 천황
일본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
後醍醐天皇
파일:고다이고 황제.jpg
출생 1288년 11월 26일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339년 9월 19일 (향년 51세)
남조 야마토국 요시노 금륜왕사
(現 나라현 요시노군 요시노쵸)
능묘 도노오릉([ruby(塔尾陵, ruby=탑미릉)])
재위기간 일본 황태자
1308년 9월 19일 ~ 1318년 3월 29일
제96대 천황
1318년 3월 29일 ~ 1331년 10월 22일
일본 상황
1331년 10월 22일 ~ 1333년 7월 7일
제96대 천황 (복위)
1333년 7월 7일 ~ 1339년 9월 18일
남조 초대 천황
1336년 9월 20일 ~ 1339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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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황통 다이카구지통([ruby(大覺寺統, ruby=대각사통)])
다카하루([ruby(尊治, ruby=존치)])
부모 부황 고우다 덴노
모후 단텐몬인
형제자매 7남 3녀 중 차남
배우자 고쿄고쿠인, 신무로마치인, 신타케이몬인
자녀 17남 15녀
종교 불교
별호 요시노인([ruby(吉野院, ruby=길야원)])
겐토쿠인([ruby(元德院, ruby=원덕원)])
겐오테이([ruby(元應帝, ruby=원응제)])
원호 고다이고인([ruby(後醍醐院, ruby=후제호원)])
시호 고다이고 덴노([ruby(後醍醐天皇, ruby=후제호천황)])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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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오([ruby(元應, ruby=원응)], 1319년 ~ 1321년)
겐코([ruby(元亨, ruby=원형)], 1321년 ~ 1324년)
쇼추([ruby(正中, ruby=정중)], 1324년 ~ 1326년)
가랴쿠([ruby(嘉暦, ruby=가력)], 1326년 ~ 1329년)
겐토쿠([ruby(元德, ruby=원덕)], 1329년 ~ 1331년)
겐코([ruby(元弘, ruby=원홍)], 1331년 ~ 1334년)
겐무([ruby(建武, ruby=건무)], 1334년 ~ 1336년)
엔겐([ruby(延元, ruby=연원)], 1336년 ~ 13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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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천황이 되기까지2.2. 체포와 유배를 당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타도를 외치다2.3. 겐무 신정을 단행했으나2.4. 필사의 탈출 후 남조 수립
3. 평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96대 천황이자 남조 초대 천황으로 다이카쿠지 황통이었다.

2. 생애

2.1. 천황이 되기까지

고우다 덴노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부황인 고우다 덴노와 고다이고 덴노 사이의 차이가 5대나 되었다. 제88대 고사가 덴노가 병약한 아들인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양위했다가 고후카쿠사 덴노를 몰아내고, 그 아우인 가메야마 덴노에게 황위를 넘겼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손인 지묘인 황통과 가메야마 덴노의 후손인 다이카쿠지 황통이 서로 황위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는 싸우지 말고 돌아가면서 천황을 하라는 중재안을 내놓았다(양통질립). 이 제안을 양쪽 모두 납득하지 못했지만 결국 중재안을 받아들여 고다이고 덴노도 부황 고우다 덴노(다이카쿠지 황통) - 후시미 덴노(지묘인 황통) - 고후시미 덴노(지묘인 황통) - 고니죠 덴노(다이카쿠지 황통) - 하나조노 덴노(지묘인 황통)까지 기다려야 했다. 1318년 드디어 하나조노 덴노의 양위를 받아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때 나이가 31세였는데 이 나이를 먹어도 아버지 고우다 상황의 간섭을 받아야 했고[1] 게다가 다음 황위는 형의 아들인 구니요시 친왕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해야만 했다.

고다이고 덴노의 후손들은 형의 후손들이 없을 때나 고려해보겠다는 말만 나왔으니 그는 아버지인 고우다 상황,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2.2. 체포와 유배를 당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타도를 외치다

1321년 드디어 부황 고우다 상황의 원정이 끝나고,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구니요시 친왕이 아들 야스히토까지 낳을 정도로 장성했으니 조카에게 빨리 양위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고다이고 덴노는 부하들과 술을 마시며 노는 척하면서 막부 타도 계획을 세웠지만 1324년(쇼추 원년) 발각이 돼서 측근인 히노 스케토모가 사도 섬으로 유배가게 되었고, 다지미 쿠니나가가 저항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쇼추의 변). 고다이고 덴노는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은채 몬칸과 엔칸 등의 승려들을 포섭했으며 황태자비의 순산을 기도하러 간다고 사찰들을 다니면서 이들에 대한 포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고다이고의 '토막'(막부 토벌)은 초기 연합왕국에서나 볼 법한 연립 승계를 끊고 자신의 후손으로 덴노 승계를 단일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었기에 황실의 지지[2]를 얻을 수 없었다. 구니요시 친왕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버티다가 구니요시 친왕이 먼저 사망하게 되니 이번에는 지묘인 황통의 카즈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331년(겐코 원년) 막부 타도 계획이 공가(구케) 출신의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라는 측근의 밀고로 발각되자(겐코의 변) 고다이고는 교토를 탈출하여 거병했다. 이때의 탈출 시점에서 격노한 막부의 싯켄(집권)가인 호조씨는 고다이고 덴노를 폐위하고 지묘인 황통의 황태자인 카즈히토 친왕을 고곤 덴노로 옹립했다. 탈출 이후의 계획은 헤이안 시대 말기 헤이케 정권 시절 고시라카와 천황처럼 히에이산으로 가 은둔한 채 버티면서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으나 진로가 가로막혀 실패했고, 결국 가사기산에 행궁을 둔 채 세력을 모으던 중, 이듬해 발각되어 막부군에게 사로잡힌 후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출가해 승병들과 연대하며 무력과 세력을 키운 서장자[3]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전국 각지에 막부 토벌의 '영지'[4]를 보내 반막부 세력을 모았다. 그 결실로 카와치 지방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하리마 지방에서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円心-), 오슈 지방에서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군사를 일으켰다.

1333년 2월 모리요시 친왕은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호응해 이후 남조의 거점이 되는 요시노산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3월에는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의 조력으로 고다이고 덴노가 유배지인 오키 섬에서 탈출해 재차 호키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씨는 처자를 인질로 삼아 카와치 겐지의 방계 일족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아시카가 다카우지마저 호조씨에 등을 돌렸다. 막부가 덴노를 감시하기 위해 교토에 만든 조직인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육파라 탐제)는 지원군인 줄 알고 환영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공격당해 증발했고, 마찬가지로 무리한 막부의 명령에 빡쳐 동북 지방에서 거병한 (카와치 겐지의 또 다른 분가인) 닛타 요시사다도 당시 4세의 어린 나이에 막부에 인질로 잡혔다가 도망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명목상의 대장이자 간토(관동) 겐지[5] 무사들의 구심점으로 삼아 수만 명으로 병력을 불리며 호조씨의 본거지인 가마쿠라를 공략했다. 이때 두 번이나 토막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호조 가문의 이권 독점 및 독재에 불만을 품은 부대들이 그때마다 토막군으로 합류해 도리어 병력이 늘어났으며, 결국 마지막 총공세로 싯켄 호조 일족이 집단 자결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게 되었다.

2.3. 겐무 신정을 단행했으나

파일:광엄천황.jpg
지묘인 황통의 북조 천황인 고곤 덴노

1334년 수도 교토로 귀환한 고다이고 덴노는 겐무 신정을 단행했다. '겐무 신정'은 중국 신나라의 가황제이자 찬탈자인 왕망을 쓰러뜨리고, 후한 왕조을 개창하여 한나라를 중흥시킨 영걸 세조 광무제 유수의 연호인 '건무'에서 따온 겐무를 연호로 하고,
"새로운 정책이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
라고 당당히 포부를 밝히며 신정을 뒤에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엔기•덴랴쿠의 치세[6]로 되돌아가자.
는 것을 정치 슬로건으로 했다.[7]

우선 자신이 퇴위당하고 대립교황 지묘인 황통의 고곤 덴노가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 정통성을 회복한 뒤 막부(바쿠후), 섭정(셋쇼), 관백(칸파쿠) 등 덴노의 율령 통치를 왜곡하는 조직을 전부 폐지했다. 그리고 지묘인 황통 및 구니요시 친왕의 후손들[8]의 덴노 계승권을 박탈하고, 적장자인 츠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해 황통 계승 단일화를 확립하려고 했다.

한편 덴노의 직접 통치를 뒷받침할 실무 관료 조직 또한 부활, 신설했는데 기로쿠쇼[9], 온쇼보[10], 무샤도코로[11] 등이었다.

사법 개혁, 즉 소송 제도 개혁에도 힘을 쏟아 잣소케쓰단쇼[12]를 설치했다. 조직이 돌아가기 시작한 겐무 신정 후기에는 통치에 있어 어명 형태인 윤지보다는 태정관[13]의 공식문서인 태정관부를 더 많이 사용했다[14].

고다이고 덴노는 공가에 둘러싸여 귀족 중심의 정치를 펼쳤던 실권이 있었던 덴노만 치더라도 여타 덴노와 달리 헤이안 시대 이후 실권을 되찾으려던 덴노로는 최초로 무사들을 상당히 우대했는데, 특히 한때 자신을 적대했다고도 볼 수 있는 가마쿠라 막부 시절, 조정 감시 및 실무를 맡았던 로쿠하라 단다이 소속의 실력파 관료형 무사들을 대거 기용했다. 온쇼보를 적극 활용하여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도 직접 은상을 내려 경우에 따라 조정의 고관으로도 임명했는데 단순히 무력 집단을 포섭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가신이 자기 밑에 가신을 둬 피라미드 형태로 내려가는 중세적인 쌍무적 계약관계를 차단해 막부의 재탄생을 막고, 중앙집권을 도모하는 정책이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15]을 폐지한다는 윤지로 이 구상을 구체화하기도 했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 밑에 여전히 가신이 존재해 이후 무로마치 막부로 이어졌던 만큼 실효성은 높지 않았다.

또한 기존의 방치에 가까운 은상 지급 및 이에 수반하는 지방관 임명제도 또한 개혁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공을 세운 무사를 지토[16]로 임명했는데 장원을 통제해서 세금을 걷는 것은 지토가 직접 현지로 가든, 부하를 보내든, 2차적으로 현지 사정에 능통한 대리를 알아서 구하든 자력으로 걷어야 했다. 이를 지행이라고 했다. 당연히 당시 일본 열도의 지방 정권 상황상, 자기가 받은 장원을 불법으로 무단 점거하고 세금을 꿀꺽하는 현지 세력이 넘쳐났는데 이것도 자신이 무력으로 근성으로 해결해야 했다. 무사가 돼서 이런 것도 해결할 수 없다면 아예 은상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 당시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개인의 무력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고, 자연스레 이미 자기 세력이 있는 무장이나 가문의 힘으로 지원할 수 있는 겐지 같은 무가 출신의 무사들만이 지토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신흥 약소 재지 무사층을 위한 개혁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방법은 공을 세운 무사에게 은상을 줄 것을 명하는 윤지[17]에 <잡소결단소첩>이라는 문서를 부속 서류로 붙여 주는 것이었다. <잡소결단소첩>은 현지에 이미 자리잡은 고위 지방관, 오늘날로 치면 시장인 고쿠시[18]나 슈고[19]에게 지토직 행사[20]를 현지 공권력[21]으로 보장할 것을 명령하는 강제 집행권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잡소결단소(잣소케쓰단쇼)에서 담당했다.

논공행상 또한 최선을 다했는데 로쿠하라 단다이를 없애고 교토를 안정화한 간토(관동) 무사의 수장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경제적으로는 30개소의 장원을 담당하는 지토직을 은상으로 내리고, 가마쿠라 막부 이전에 관동 군권 총책임자에게 주는 비상설직인 진주후쇼군(鎭守府將軍, 진수부장군), 종4위하의 덴노 경호 장관직인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좌병위독), 무사시국의 고쿠시인 무사시노카미, 정4위하로 이때부터 공경[22]에 해당하는 참위(参議, 산기) 등의 요직에 제수했다. 다카우지의 동생으로 함께 공을 세운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도 형의 절반인 15개소의 지토직과 종5위상의 말, 기병 조련 총책임자인 사마노카미(左馬頭, 좌마두)를 제수했다. 곧이어 가마쿠라부[23]의 명목상 수장인 가마쿠라부 쇼군에 적차남인 나리요시 친왕을 임명한 뒤 실질적인 수장인 싯켄(執權, 집권)으로 임명했다.

한편 이들을 감시하고 제어하기 위해서 공가의 수장이자 '겐지의 동량'[24]이었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아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동북 무츠국의 수령인 무츠노카미로 임명하고, 3남인 노리요시 친왕[25]을 무츠부 쇼군에 임명해 균형을 맞추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를 토벌한 닛타 요시사다에게는 겐무 신정 때 신설한 덴노의 경호부서인 무샤도코로의 장관으로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가마쿠라 막부 토벌에 초기부터 참여해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승병을 이끌고 고다이고 덴노를 가사기산으로 잠입시키며 전국에 영지를 보내 본격적으로 각지에서 토막군이 거병할 수 있도록 공을 세운 모리요시 친왕은 세이이다이쇼군(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고대로부터 전승한 조정의 의례와 의식을 부활시켜 전통을 계승하고,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겐무 연중행사》라는 실무 의례서를 직접 편찬했다. 종래의 의례서 내용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행사의 기원 등은 과감히 생략하고 언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과거의 기록을 참조해 만든 실용적인 지도서로서 그 서문에도
"뭐 후세의 귀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쩌면,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적혀 있으며 실제로 현대 일본 역사학에서 의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이러한 치적은 당대 공가 귀족들에게도 남조와 북조를 막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앙집권을 위한 신민들의 단합 및 통일을 위해 불교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공가 귀족들의 전유물에 가깝던 교종 대신 무가와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선종에 힘을 실어주었다. 재위하는 동안 황실에 초청하는 선종의 큰 스님을 10번에 걸쳐 국사[26]에 임명했으며, 이때의 선종에 대한 우대는 막부가 바뀌는 동안에도 지속되어 이후 일본의 문화에서 선종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데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또한 모리요시 친왕으로 인해 인연을 맺은 승병들의 지지를 강화해서 이후 남조가 유지되는 동안의 군사력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고다이고 덴노가 정력적으로 일하며, 공을 세운 무사들의 토지 조정을 포함해 각종 개혁을 시행하고 개선하느라 관청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에서 해가 질 때까지 재판소 및 집무실에서 격무에 치였다는 기사가 당대의 기록인 《각영소속상락일기》에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과 실질적으로 재판을 내렸다는 점에서 일정 이상의 법적 지식과 실행력을 갖췄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개혁들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이중 토지문제와 궁전인 대내리 조영이 각 계층의 지지를 잃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잡소결단소첩>은 윤지 발급으로부터 30일 이내에 신고 서류 및 관련 자료를 담당 무사가 제출해야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하여 거의 현대 수준의 행정력을 요구했고, 고쿠시와 슈고 양측에 시행을 담당하게 하여 안 그래도 율령국 내 관할권 문제로 충돌하는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기존의 '지행'은 전부 새로 천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윤지 또한 일종의 신고제 토지조사 정책으로 의도는 좋았지만 지행권자인 각지의 지토들이 공증을 위해 수도 교토로 밀려오고, 새로 소유권을 인정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소송이 난무하게 되었다. 고다이고 덴노가 재판소에서 격무에 시달린 것은 이러한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은상을 받고 출세를 기대했다가 소송에 휘말려서 언제 자기 지행이 인정되나 기다리는 신흥 무사층, 괜히 잘 사는데 머리 아프게 일을 벌인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기존 무사층, 교통 정리가 안 돼서 빡친 지방 수령층까지 죄다 천황에 대해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개혁을 시도하는 군주들의 문제 정책 1순위인 궁전 조성이 얹어졌다. 덴노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토목공사를 위해서 세금이 늘어나니 농민부터 귀족들까지 전부 불만이 증대하게 되었다. 개혁정책이다보니 보수적이고 변화에 관심없는 공가의 지지도 별로 크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니조 강가의 낙서(二条河原の落書)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 자체는 그냥 정부 시책에 대한 불평일 뿐이었지만 겐무 신정을 향해
"요즘 수도에는 (토지 소유 문제 때문에) 고발 소송이 넘쳐나니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
라고 정면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27]

무가 세력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가장 균열이 컸던 것은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있어 황실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모리요시 친왕과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였다. 다카우지는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꿈꿨을 자신의 막부를 여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고다이고 덴노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자기 멋대로 가마쿠라에서 독립하기 이전까지는 군사력과 막부의 재흥을 경계하면서도 다카우지를 가장 총애했는데 일례로 일자배령이 있었다. 주군이 총애하는 가신에게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내려줘서 가신의 이름에 그 한 글자를 대체해 붙여주는 풍습이었는데 한국사로 치면 고려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왕씨를 공신들에게 사성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원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다카'는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실권 싯켄인 호조 다카토키를 주군으로 모실 때, '다카'(高)를 일자배령으로 받아 쓴 것이었지만 고다이고 덴노가 자신의 휘(실명)인 '다카하루'(尊治)에서 '다카'를 줘서 이름을 바꾸어 주었다. 당시 시대상에서 어쨌거나 귀족이 아닌 무사에게 덴노와 같은 이름을 쓰게 해 준 것이니 상당히 높은 대접이었다.

반면 모리요시 친왕은 처음에는 아무 은상 없이 그냥 승려로 돌아가라는 고다이고 덴노의 명령을 받았다. 이에 반발한 모리요시는 교토에 입성하지 않고 군사적인 시위를 벌이며 임명 전에 자신을 쇼군으로 참칭했다. 고다이고 덴노가 재차 칙사를 보내자 모리요시 친왕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결코 덴노의 아래에서 만족할 리 없다고 예견하고, 덴노를 지지하는 가장 직접적인 군사력과 관직으로 무사들을 집결시켜 다카우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덴노의 3남인 나리요시 친왕을 무츠부 쇼군에 임명하고, 키타바타케 부자를 보내 가마쿠라부를 견제하도록 한 인사정책도 모리요시 친왕의 계책이었다.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받아들여 모리요시를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 및 종4위의 병부경에 임명해 병권을 맡겼다. 이후 모리요시 친왕은 무려 200,000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유지했고, 1334년 겨울 모리요시와 다카우지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다카우지는 황태자 츠네요시 친왕의 모후인 아노 렌시가 모리요시 친왕에게 가진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그는 아노 렌시를 상대로 모리요시 친왕에게 역심이 있으니 내치라는 배갯머리 송사를 하도록 지속적으로 이간질했다. 처음에는 모리요시 친왕을 신뢰했던 고다이고 덴노는 서서히 모리요시 친왕파 무사들의 은상을 줄이면서 세력이 약화되도록 만들었고, 마지막에는 다카우지를 경계하라고 부하들에게 내린 영지마저 덴노에 대한 반란을 의도한 것이라고 왜곡하면서 역으로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자택에서 포박했다. 결국 고다이고 덴노는 모리요시 친왕을 아시카가의 소굴인 가마쿠라에 유폐시켰다.

이 와중에 1335년 호조 정권의 잔당들이 반란(中先代の乱,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켜, 다카우지의 동생인 다다요시가 지키고 있었던 가마쿠라부를 함락시켰다. 다다요시는 혼란을 틈타 유폐되어 있었던 모리요시 친왕을 모살했고, 나리요시 친왕을 교토로 송환한 뒤 미카와국으로 탈출했다. 한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다다요시와 합류한 후 반란을 진압[28]했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서는 동생 다다요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기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리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당연히 고다이고 덴노는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했다.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낮짝도 두껍게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고다이고 덴노에게 요시사다 토벌령을 빨리 내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리요시 친왕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다이고 덴노는 그제서야 포섭을 포기하고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교토에서 요시사다의 토벌군이 내려올때, 북쪽에서는 오슈의 무츠부에 파견된 공경 겸 무장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가 다카우지를 토벌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남하했다.

이해 12월에 아시카가군이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듬해인 1336년 1월, 교토에 입성했다.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산[29]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구스노키 마사시게,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맹활약으로 교토에서 다카우지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크게 깨진 다카우지는 서쪽의 변방인 규슈로 도망가서 다시 병력을 모으는 상황이 되었다. 다카우지가 병력을 추스르고 교토로 다시 출병하자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덴노에게 닛타 요시사다를 버리고 다카우지와 화친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다카우지를 포기한 고다이고 덴노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스노키 마시시게와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이끄는 병력을 상대로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포위되어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채 패배한 후 동생과 함께 할복하여 전사했으며 닛타 요시사다는 교토로 도주했다. 고다이고 덴노는 또다시 히에이산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2.4. 필사의 탈출 후 남조 수립

고다이고 덴노의 군대에 타격을 입힌 다카우지는 지묘인 황통인 고곤 덴노의 동생 고묘 덴노를 옹립하고, 히에이산으로 쫓겨간 고다이고 덴노에게 화의를 요구했다. 고다이고 덴노도 이에 응해 삼종신기를 고묘 덴노에게 넘겨주고 가잔원에 유폐됐으며, 이후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를 창설했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또 다시 근성의 탈출을 감행해 삼종의 신기는 가짜라고 외치며 교토를 떠나 요시노에 정주했고,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며 또다른 조정을 수립했다. 이로써 일본 열도는 난보쿠초 시대의 동란에 돌입하게 되었다.

친왕들을 각지로 파견해서 지방 세력을 포섭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30] 결국 1339년 병으로 쓰러져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한 다음 금륜왕사에서 역적 토벌과 교토 탈환을 유언으로 남기고 붕어했다.[31] 그의 붕어 소식을 들은 숙적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의 명복을 비는 덴류지를 건립했다.

3. 평가

일본의 역대 천황 중 최고의 근성가였다. 일본사 내내 실제 권력은 신하들[32]이 쥐고 천황은 무기력한 꼭두각시였던 기간이 대부분이었는데, 고다이고 덴노는 가장 적극적으로 천황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나름 성과도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에 보기 드문 특이한 유형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결국 겐무 신정은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실패한 이유로 1960년대까지의 고전적인 역사관 및 분석에서는 고다이고 덴노 본인의 실정이 상당한데다가 엄청나게 약점이 많았다고 보았다.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아들로서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군대를 이끌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저항한 고다이고 덴노의 최측근인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33] 고다이고 덴노에게 마지막 출진 전에 남긴 <키타바타게 아키이에 상주문>은 다음과 같이 고다이고 덴노 치세의 문제를 간언하고 있다.
1. 사람을 빨리 선발하여 규슈(구주), 도호쿠(동북)로 파견하시고 더욱이 산요(山陽, 산양), 호쿠리쿠(北陸, 북륙)에도 사람을 두어 반란에 대비하십시오.
이것은 겐무 정권이 수도 교토만을 중시해 무츠부에 아키이에를 파견한 것 외에는 타 지방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번번이 천황의 친정에 대해 반발하고, 교토에서 패배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서쪽의 규슈에서 다시금 거병하여 교토가 공격받게 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2. 여러 지방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하고, 검약하십시오. 토목을 금하고, 사치를 끊는다면 반란은 저절로 잦아들어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3년간 세를 면한다는 것은 닌토쿠 덴노(仁徳天皇)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토목이란 고다이고 덴노가 계획한 궁궐(대내리) 조성 계획으로 이로 인해 20분의 1세 등 자주 임시 조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민심이 피폐해져 빈번히 반란이 일어난 요인이 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3. 관작의 수여에는 신중하십시오. 공적이 있더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에게는 토지와 관작을 주지마십시오.
산보쿠잇소(三木一草)[34]와 종2위 산기(参議, 참의)가 된 아시카가 다카우지, 좌중장(左中将)이 된 닛타 요시사다 등 신분이 낮은 자에게 고위의 관직을 남발한 것과, 관위상당제(官位相当制)를 무시한 인사[35]에 대한 비판이었다.
4. 상을 내릴 때는 공평하십시오. 귀족과 승려에게는 고쿠가(国衙, 국아)령·장원(荘園)을 주고, 무사에게는 지토(地頭, 지두)직을 주십시오.
상을 내릴 때 매우 공정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지토직을 사원에 주거나, 특정 가문의 관직 세습를 타파하고 그들의 지교코쿠[36]와 소령을 몰수하여 무사에게 지토로 내린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5. 임시 행행[37] 및 연회는 그만두셔야 하옵니다.
고다이고 덴노의 빈번한 행행과 연회로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하는 비판이었다.
6. 법령은 업숙히 집행하십시오. 법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 기본 방침이므로 조령모개[38]한 혼란한 상태는 허락하지 마십시오.
고다이고 덴노가 윤지[39] 절대주의를 채택하면서 모순된 윤지를 제시하거나, 앞선 윤지를 취소하는 등, 자주 윤지를 바꾸는 행동이 혼란을 초래하여 천황의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7. 정치에 유해무익한 자를 내치십시오. 현재 귀족, 궁녀 및 승려 중 중요한 정무에서 사리사욕으로 집행하는 자가 많아 정치에 혼란이 오고 있사옵니다.
고다이고 덴노의 총애를 받는 후궁 아노 야스코(阿野廉子)[40], 승려 엔칸(円観), 몬칸(文観) 등이 국정에 관여함을 의식한 비판이었다.
"엔기(延喜)·덴랴쿠(天暦)의 치세[41]로 돌아가자."
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므로, 겐무 신정은 사실상 전제군주제로 회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령제 이후 국가체제의 개편을 노려 관위상당제와 관직세습제를 타파해 기존의 귀족 계층의 해체를 꾀했기에 친정의 개혁은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비롯한 여러 귀족층에게 지지받기 어려웠다.
아키이에의 상소문도
"만약 이 의견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고다이고 덴노의 슬하에서 벗어나 산 속에 틀어박힐 것이다."
라고 끝을 맺고 있어, 아키이에가 고다이고 덴노한테 가진 실망과 분통함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아키이에가 전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위와 같은 비판이 2000년대 이전까지는 일반적이었으나 이후 가메다 도시카즈 등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을 필두로 고다이고 덴노를 재평가하는 논문이 늘어나고 있다.

겐무 신정 중 <잡소결단소첩>은 비록 처음 도입한 개념의 제도라서 시행착오가 존재했으나 이때 잡소결단소에서 실무관으로 일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 고노 모로나오는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한 뒤에 <잡소결단소첩> 제도에서 단점을 고친 <집사시행장> 정책을 시행하면서 무로마치 막부의 핵심제도를 정립했다. 일단 신고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행 담당자를 고쿠시(국사), 슈고(수호) 양 측에서 슈고로 일원화했다. 또한 시급한 경우, 신고를 생략하고 발급받은 문서를 슈고에게 보여주면 즉각적으로 시행될 수 있게 바꾸었다. 행정명령을 간소화•신속화시켜 실효적인 정책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외에도 겐무 신정의 획기적인 정책들(예를 들면 선종 중시)을 여럿 수용했으며, 이러한 공적으로 고노 모로나오는 주군의 일개 집사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다다요시와 비견되는 실세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겐무 신정의 개혁정책을 아시카가 막부가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에서 전성기를 열었던(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막부 관료 무사들의 인재풀 또한 겐무 신정으로 새로 창설한 조직에서 실무직으로 일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다. 고다이고 덴노에게 발탁되어 지방으로부터 교토로 모여든 무가 관료들이 교토라는 정치, 문화의 중추에 몸을 두고 전(前) 로쿠하라 단다이 무사들[45]과 교류하면서 능력이나 지위를 향상시킨 것이다. 심지어 스와 엔추(諏訪円忠)라는 사람은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일개 부교닌(奉行人, 봉행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겐무 정권하에서 잡소결단소의 직원을 경험하여 능력과 인맥을 갈고 닦은 가운데,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최고 정무기관인 효조슈(評定衆, 평정중)의 정치가로 출세했다. 고노 모로나오 또한 본래라면 그냥 촌구석 무장의 집사였는데 전국적인 무대로 뛰어들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성장한 배경이 겐무 신정 때 잡소결단소 관인으로 일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닌지 연구되고 있다.

고다이고 덴노가 직접 편찬한 《겐무 연중행사》는 유래만 적혀 있어 대체 어떻게 의식을 시행했는지 알 수 없어 멘붕인 미시사 역사학자들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자료이기도 하다. 본인이 서문에 밝힌 '참고가 되었으면'하는 게 가장 잘 이루어진 업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고노 모로나오의 일원화는 결국 지방 행정을 맡은 임기제 수령인 고쿠시와 군사권 및 지방 경찰직을 수행하는 슈고의 상호 견제를 통한 통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받기도 했다. 슈고가 지방 무사에게 핵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고쿠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행정권마저 접수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웃 쿠니(율령국)를 무단으로 집어삼켜 복수의 쿠니를 지배하는 슈고 다이묘가 탄생했으며 결국 의도와 달리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센코쿠 시대의 격렬한 난세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1] 원정= 인세이라고 해서 천황들이 양위해 태상황이 되거나 출가해서 법황이 되어서도 정치에 간섭하는 경우였다. [2] 조카인 구니요시 친왕의 다이카쿠지 황통, 라이벌인 지묘인 황통 양측 모두였다. [3] 어머니의 출신이 내친왕(황족)이나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 아니라 황위 계승권 밖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친왕의 명령, 대표적인 예시로 가마쿠라 막부 개창의 명분이 된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있다(모치히토의 경우 고시라카와 덴노의 아들이었음에도 친왕이 되지 못해서 왕이었기 때문에 진짜 영지보다는 격이 조금 떨어졌다). 덴노의 명령은 윤지였다. [5] 원씨, 즉 미나모토씨 [6] 延喜・天暦の治. 후지와라씨 북가에 의한 섭관(셋칸)정치 초기, 덴노가 친정을 행했던 다이고 덴노의 연호인 '엔기'와 무라카미 덴노의 연호인 '덴랴쿠'의 시기를 말한다. [7] 사실 중국과 같은 전제정치를 목표로 했다는 말도 있다. [8] 다이카쿠지 황통이었다. [9] 記録所, 기록소. 일반 정무기구로 조선으로 따지면 후기의 비변사였다. [10] 恩賞方, 은상방. 토막에 공을 세운 무사에게 은상을 내려 무사들을 포섭하는 일종의 보훈처였다. [11] 武者所, 무사소. 인세이(원정) 시절 상황의 경호를 담당한 북면 무사 및 서면 무사의 전통을 덴노 아래로 둔 일종의 경호처였다. [12] 雑訴決断所, 잡소결단소. 덴노를 최고 재판관으로 하는 재판기관이었다. 형사 사건에 한정하지 않고 고쿠시(국사), 지토(지두) 등 지방 관리의 토지 조정 등 민사 행정 소송도 맡았다. [13] 조선으로 치면 전기의 의정부로, 영의정과 비슷한 정1위 정일품 최고위직 장관인 태정대신(다이죠다이진)이 있었다. [14] 이 양상을 두고,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독재를 실행하다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휘하의 무사 및 보수층 공가가 역심을 보이면서 권위가 실추되어 개혁에 실패한 증거로 보는 '고전적인 평가'와 덴노 자체의 신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덴노 직제 관료제로서 조직적인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이라고 보는 '현대적인 평가'가 대립하고 있다. [15] 어가인. 교토 조정과 무관한 가마쿠라 막부 쇼군의 가신 [16] 地頭, 지두. 담당 장원의 조세권 및 지배권을 받고 중앙(조정 혹은 막부)과 고쿠시(국사)에게 조세를 납부하는 무사 지방관이었다. 서양의 중세로 치면 일반 기사나 남작이다. [17] 조선으로 치면 어명 [18] 國司, 국사. 각 율령국(쿠니)의 수령이었다. [19] 守護, 수호. 슈고 다이묘의 기반이 된 막부의 지방 관직이다. [20] 즉 자기가 은상으로 받은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일 [21] 무력 사용을 포함 [22] 공가 집안이기 위한 관직 [23] 막부(바쿠후)는 폐지해서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같은 관동 지역 무사 담당 조직이었다. [24] 겐지에서 갈라진 직계, 방계 모두의 종가 당주 [25] 훗날의 고무라카미 덴노 [26]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고려의 의상국사와 같은 직책이다. [27] 다만 이 낙서는 귀족 입장에서의 불평만이 주로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28] 무로마치 막부의 개설은 이 뒤의 일이었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권위가 깎이지 않기 위해 그에게 정이대장군의 직함을 사후 추인했다. [29] 이곳으로 도망치면 잡기가 어려워서 존버에 성공할 수 있는 역사적인 도피처였다. 실제로 고다이고 덴노도 가마쿠라 막부군과 싸울 때 여기로 도망을 못해서 잡혔지만, 이때는 도망에 성공해 이후 56년간 남조를 지탱할 수 있었다. 한반도로 치면 강화도였다. [30] 그가 붕어한 지 1년 후인 1340년경의 남북조의 영역을 보면, 면적도 남조쪽이 열세이려니와 영역 자체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남조는 자주 수도를 옮겨다니곤 했다. 그렇지만 다카우지 생전에는 북조 역시도 남조를 상대로 우위를 차지하진 못했으며, 심지어는 일시적으로 교토를 뺏기고 북조의 상황 두 명과 덴노가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기에 북조가 남조를 제대로 앞지르는건 남조 제3대인 조케이 덴노 시기부터였다. [31] 군담소설인 《태평기》에 따르면 고다이고 덴노는 죽던 순간에 병상에서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 법화경》을 들고 "비록 짐의 뼈는 남산(요시노)의 이끼에 묻히더라도, 짐의 혼백은 늘 북궐(교토, 북조를 가리킴)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을 높은 산봉우리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상 남쪽으로 향하도록 묻는 천황의 능과는 달리 고다이고 덴노의 능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32] 섭정, 관백, 쇼군, 싯켄, 총리대신 등등등.. [33] 키타바타케 치카후사는 뛰어난 귀족이자 무사로 겐무 신정을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기에 고다이고 덴노가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이자 충신이었다. 그래서 치카후사의 아들 아키이에도 아버지를 이어서 고다이고 덴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34]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하에 총애했던 4명의 신하, 즉 구스노키 마사시게, 유키 지카미츠(結城親光),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를 가리킨다. [35]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자신도 종2위이면서 정•종5위 상당에 해당하는 진주후쇼군(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다. [36] 知行國, 지행국. 일종의 공음전으로 중앙정부에 세를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교(知行. 지행)의 권리를 가지는 영주에게 세를 납부하는 토지로 중앙정부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다. [37] 行幸. 군주가 대궐 밖으로 거동함≒유행 [38] 朝令暮改.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바꾼다는 사자성어로 비슷한 사자성어로 조변석개(朝變夕改)가 있다. [39] 綸旨. 군주가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40] 1370년 일본에서 나온 군기물(군담소설) 《 태평기》를 보면 고다이고 덴노는 미녀를 아주 밝혀 고관들의 딸을 강제로 납치하여 궁녀로 삼았고, 그녀들을 상대로 섹스의 일종인 방중술을 마구 행했다는 내용이 언급될 만큼 아주 음란했다고 한다(...) [41] 엔기(延喜: 901~923)는 다이고 덴노의 연호, 덴랴쿠(天暦: 947~957)는 무라카미 덴노의 연호이다. 헤이안 시대에 천황이 친정하여 이상정치가 실현되었다고 여긴 시기를 가리킨다. [42] 선언문 [43]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음력으로는 똑같이 케이오(慶応) 3년이지만, 양력으로 따지면 해가 바뀐다. [44] 建武, 건무. 1334년을 원년으로 삼은 고다이고 덴노의 연호이다. [45] 가마쿠라 막부 본부에서 호조씨의 연줄에 따른 정치만 일삼던 무사와는 달리 실력 중심으로 출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