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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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전투 西京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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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010년 (현종 원년) 12월 9일 ~ 12월 17일 | |
장소 |
고려 서경 (現 평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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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성종의 고려 침공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요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조원 (통군녹사) 지채문 (중랑장) 탁사정 (동북계도순검사) 이원 법언 대도수 (행영도통사) ◎ |
지휘관 [[요나라| 遼 ]]
야율문수노 (요 성종[聖宗])
|
참가자 강민첨 (애수진장) 홍협 (낭장) 방휴 (낭장) 최창 (시어사) 조자기 (분대어사) 정충절 (대장군) 정인 원종석 (서경부유수) 최위 함질 양택 문안 |
참가자 [[요나라| 遼 ]] 마보우[[요나라| 遼 ]] 왕팔[[요나라| 遼 ]] 을름[[요나라| 遼 ]]
한기 (합문인진사)
†[[요나라| 遼 ]]
고정 (우복야)[[요나라| 遼 ]] 노의
† [[요나라| 遼 ]] 유경
†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1] | 병력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고려의 승리 - 서경 사수 성공 |
|
영향 |
거란군의 보급로 확보 실패 - 지채문이 남하하여, 현종의 상황 파악 이후 몽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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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요전쟁 중 제2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서경(西京, 현 평양시)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이다.고려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평양주라는 명칭이었다가 고려 대에 들어서 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3경 중 하나로 998년에 명칭을 호경(鎬京)으로 바꾸었기에 전투 당시의 명칭은 호경이다.
2. 배경
1011년 1월 7일(음력 1010년 11월 24일, 전쟁 9일차),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 30만이 삼수채 벌판에서 거란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입고 와해되었다.( 통주 전투)바로 옆 통주성은 거란군의 공성을 방어해냈고, 남쪽의 완항령에서의 매복전이 성공해 남쪽으로 도망치는 패잔병들이 더 학살되는 것만은 막았지만, 거란군에 의해 곽주성, 영주성, 숙주성이 차례로 무너졌다.
3. 전개
3.1. 아슬아슬 항복을 저지한 동북군
1011년 1월 21일(음력 1010년 12월 9일, 전쟁 23일차), 거란군이 서경의 외성 안쪽까지 들어와 본진을 차리고 중흥사의 탑을 불태웠다.1011년 1월 22일(음력 1010년 12월 10일, 전쟁 24일차), 노의가 거란의 향도가 되어 유경과 함께 서경에 항복 권유를 했고, 원종석이 최위, 함질, 양택, 문안 등과 함께 항복문을 작성했다. 지채문이 현종의 명에 따라 최창과 함께 동북면의 병력을 이끌고 서경을 구원하러 오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서경에 이르렀지만 성문이 닫혀 있었다.
최창이 조자기를 불러 왕명을 받들고 왔다면서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묻자 조자기가 노의와 유경이 항복을 권유한 사실을 알려주고 성문을 열어줬으며, 지채문은 옛 궁궐의 남쪽 회랑으로 들어가 부대를 주둔시켰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의와 유경을 억류하고 성을 지키자고 했지만, 원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몰래 지채문과 모의해 군사들을 성 북쪽으로 보내 노의 등이 거란 군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공격해 그들을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태웠다.
성 안 사람들이 지채문을 의심하고 배반해 지채문이 성의 남쪽으로 나가 진을 쳐도 정충절만 그를 따랐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탁사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들을 합세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3.2. 거란 황제를 기만해 하루를 벌다
같은 날[2], 고려 현종의 조근(제후로서 황제를 뵈러 가겠다) 사신이 거란 성종에게 도착했다. 이에 성종은 현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노획과 약탈을 금지하고 진격을 일시 멈추었다. 그리고 마보우, 왕팔을 보내고 을름에게 기병 1,000명을 주어 그들을 호송하게 하면서 한기에게 돌격 기병 200기를 거느려 서경 북문으로 가게 했다.1011년 1월 23일(음력 1010년 12월 11일, 전쟁 25일차), 한기가 서경에 와 보니 유경, 노의가 소식이 없는 것을 추궁하면서 자신의 지시를 들으라고 명령했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시켜 한기 등 100여 명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았으며, 지채문이 선봉이 되어 성 밖으로 나가 을름, 마보우 등을 공격해 패배시켰다. 이 일로 성 안의 사람들이 조금 안정되어 탁사정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지채문, 이원은 자혜사로 나가 주둔했다.
3.3. 동북군의 짧은 승리와 도망
1011년 1월 24일(음력 1010년 12월 12일, 전쟁 26일차), 현종에게 속았다며 분노한 성종이 을름을 다시 보내 고려군을 공격하게 했는데, 척후병이 거란군이 안정역에 주둔해 무리가 매우 많다고 하자 탁사정과 법언이 군사 9,000명을 거느리고 임원역 남쪽에서 적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죽였지만, 법언은 전사했다.1011년 1월 25일(음력 1010년 12월 13일, 전쟁 27일차), 다음날 지채문이 다시 출전해 거란 군사들을 패해 달아나게 하자 성 안의 장수와 병졸들이 성에 올라가 그 광경을 보고 그들을 추격했으며, 마탄에서 거란군이 군사를 되돌려 공격하자 고려군이 패해 성을 포위당했다.
탁사정이 지채문이 없어지자 이에 두려움을 갖고, 대도수에게 그대는 동문, 자신은 서문으로 나가, 서쪽의 사찰에 머무르고 있는 요 성종을 잡자고 했지만, 탁사정은 그대로 도망가고 대도수는 동문으로 나간 후에 속은 것을 알았지만, 힘을 다해도 맞설 수 없어서 거란에 항복했다. 성 밖 요격전이 멈추어지자 이 날로 서경이 포위 1일차를 맞게 되었다. 거란의 20만 군세가 성을 에워싸자 여러 장수들이 흩어지고 성 안 사람들이 떨면서 두려워했다.
3.4. 혼란을 수습하고 지켜내다
1011년 1월 27일(음력 1010년 12월 15일, 전쟁 29일차), 조원, 강민첨, 홍협, 방휴 등이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신사에서 빌고 점을 쳤더니 길한 징조를 얻었다"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1011년 1월 28일(음력 1010년 12월 16일, 전쟁 30일차), 거란의 후방에서 양규가 거란의 보급선이던 곽주성을 탈환했다. 이 소식에 거란군은 전면퇴각 또는 서경이나 개경을 공략해 약탈로 보급을 충당하는 수 밖에 남지 않았다.
1011년 1월 29일(음력 1010년 12월 17일, 전쟁 31일차), 거란 성종은 5일차가 되어가던 서경의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이동해 개경으로 향하기로 결정한다.
1011년 1월 31일(음력 1010년 12월 19일, 전쟁 33일차), 서경 신사 일대에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쓰러질 정도로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 거란군의 진격이 다소 지연되었다.
4. 결과
제2차 여요전쟁에서 서경이 항복하거나 무너지지 않음으로서 거란의 남하 및 퇴각 모두의 보급거점/중간거점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제3차 여요전쟁에선 이처럼 서경의 인구와 자원을 온전히 보존한 덕에, 거란군을 요격하는 군사도 낼 수 있어, 1만 이상을 죽이는 전과를 내는 바탕도 된다.
5. 대중매체
제2차 여요전쟁을 다룬 드라마인 < 천추태후>와 <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5.1. < 천추태후>
75회에서 다룬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천추태후가 개입해서 주도하는 왜곡이 있지만 서경이 목종 때 고친 호경으로 나오는 점은 맞게 나왔다.성종이 거란군을 이끌고 호경으로 와서 천추태후에게 강조를 인질로 삼고 항복을 요구하지만, 강조가 항복하지 말고 싸우라고 말한다.
대도수, 강민첨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탁사정, 원종석, 최사위는 항복해야 한다고 해서 서경성 내에서 의견이 갈리지만 천추태후가 싸우기로 하자 탁사정이 성 밖으로 몰래 나가 기습해 강조를 구출해야 한다며, 천추태후가 적의 주의를 이끌어주면 대도수가 동문에서 진격하고 자신은 최사위와 함께 서문으로 진격해 양면 공격을 할 것을 제안한다.
천추태후가 성종에게 항복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고려 조정에 이야기해야 한다며 시간을 끄는 동안 탁사정과 최사위는 서문을 나오자마자 개경으로 후퇴하고 대도수, 지채문, 강민첨은 동문으로 나와 풀숲에 숨어있다가 거란군의 진영에 불화살을 날린 후 공격하지만, 거란군에게 밀리는 와중에 서문의 군대가 개경으로 도주했다는 것을 듣는다.
대도수가 지채문과 강민첨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호경성을 지키라면서 남아서 싸우다가 거란군에게 붙잡히며, 성종이 본진을 습격당했다는 것을 전해듣자 군사들을 시켜 호경성을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거란군이 사다리와 공성차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하자 천추태후와 김종현은 거란군과 맞선다.
고려군은 불화살을 쏘고 기름통을 부으면서 돌을 던지면서 맞서며, 거란군이 쇠뇌를 날리고 공성차를 동원하자 고려군은 맹화유에 불을 붙여 떨어뜨린다. 성종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소배압의 진언대로 호경성을 포기하고 남하해 고려의 왕을 잡기로 한다.
5.2. < 고려 거란 전쟁>
2023년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9~11회에서 다뤄진다.5.2.1. 거란을 기만하다
통주 전투에서 승리하고 곽주와 영주를 함락시킨 거란군이 서경 점령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이 대세가 되고 강감찬 역시 동조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 강감찬은 친조를 하겠다는 제안을 걸어 거란군의 진격을 늦추고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으로 끌고와 항전하자는 전략을 제시한다.
서경성에서는 거란군이 공격할 일로 인해 소란스러웠는데,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조원이 그들을 꾸짖으며, 강민첨이 동북면에 원군 요청할 것을 말하나 최사위는 숙주가 함락 직전이라며 이미 늦었다면서 우리들끼리 싸워야 한다고 한다. 원종석은 부하들과 함께 거란에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감찬이 친조를 요청하는 사신으로 가서 거짓 항복을 해서 시간을 끌기로 하는데, 강감찬이 서경에 도착해 동북면의 군사들이 올 시간을 벌기 위해 친조를 요청하는 척 하면서 동북면의 군사가 원군으로 올 때까지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말한다. 원종석은 거란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원종석에게 대응할 것을 맡기면서 개경으로부터 언질을 받았다고 말하라며, 최사위에게는 폐하의 명에 따라 개경으로 갈 것을 전한다.
현종은 강감찬을 보내는 것과 별개로 사신을 보내 지채문, 대도수, 탁사정에게 동북면의 군사를 이끌고 서경성으로 남하하라는 명을 전달하며, 탁사정은 지채문에게 먼저 기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가라고 하면서 대도수에게는 보병을 이끌고 출발하라고 지시한다.
강감찬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친조와 항복의 의사를 표하며 성종이 의심하자 강조로 인해 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며, 소배압은 고려의 군사가 아직 많이 남았다는 점을 들어 의심하자 강조 때문에 억지로 끌려갔다고 했다. 성종이 친조를 받아들여 진격을 멈추고 기다리겠다며서 강감찬의 요청에 따라 약탈도 멈추기로 하면서 진격을 일시 저지한다.
5.2.2. 서경성의 항복 저지
소배압이 강감찬을 의심해 그를 치하하기 위해 대접해야 한다고 하면서 강감찬을 거란의 군영에 남겨두고 강감찬을 따라온 군사들만 떠나게 하고, 이현운이 소배압에게 동북면의 군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라고 하자 소배압은 사람을 보내 동북면을 정찰하기로 하며, 소배압은 강감찬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거란의 사신과 함께 서경으로 가서 항복을 권유하라고 하며, 내일 밤 안에 항복시키지 않으면 서경성을 함락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서경성에서는 원종석의 명을 받은 서경의 군사들이 조원, 강민첨을 감옥에 가두며, 원종석이 백성들을 모아 거란에게 항복할 것을 설파하며, 한기 등의 거란 사신과 강감찬이 서경으로 도착하자 원종석이 항복의 뜻을 전하면서 동북면의 군사들이 오고 있다며 거란의 병사들을 서경 안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강감찬의 대거란 기만전술을 모두 폭로하고 부하들을 시켜 강감찬을 감옥에 가둔다.
한기가 강감찬을 다시 거란 군영에 끌려가 거짓 항복을 알리려고 하고, 강감찬은 한기에게 인계되기 전에 상관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조자기에게 변명을 찾는 것 뿐이라며 지금만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하며, 강감찬은 거란 군영에 다시 끌려가 처형될 위기에 놓이지만, 마침 동북면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지채문의 부대이 화살을 날려 한기 등을 죽이면서 구조되고, 강감찬은 지채문을 빨리 서경으로 보내어 항복파 원종석을 저지해달라면서 자신은 항복문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복귀하겠다고 말한 뒤 거란 군영으로 돌아가 원종석의 표문을 전달하며, 소배압은 의심이 가서 서경성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척후병을 보낸다.
지채문은 서경성으로 갔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았고, 강감찬은 낮에 거란의 군영을 빠져나가려 하고 거란 군영에서도 이를 눈치채고 추격하는데, 강감찬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려고 했지만,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이끄는 군사가 화살을 쏴서 강감찬을 구한다. 서경성 내에서는 거란의 군사가 오면 성에 대기한 동북면의 군사가 전멸할 것이라 여기며, 성 밖에 있는 동북면의 군사들 중에서 탁사정은 퇴각, 지채문, 대도수는 항전을 주장하다가 조자기가 낮에 성문을 열자 지채문이 성으로 들어가면서 원종석을 죽인다.
5.2.3. 서경성에서 전투를 시작하다
성종이 서경성의 소식을 듣고 열받아서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성을 공격하라고 하며, 야율분노가 서경성의 북문을 공격하자 지채문이 포위가 더 단단해지기 전에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겠다고 하며, 탁사정이 반대하지만 대도수가 지채문에게 동의해 지채문이 서경성을 나와 군사들을 이끈다. 개경 조정에 전령을 통해 지채문과 대도수가 번갈아가며 거란군을 공격해 여러 차례 승리하고 법언이 이끄는 승병들도 합류해 싸운다고 언급되며, 지채문이 법언과 함께 거란군을 싸우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고려군이 여러 차례 승리한 것으로 인해 지채문은 거란군을 깊숙이 추격하다가 거란군이 화살 공격을 하는 장면만 나오며, 전령을 통해 지채문이 추격하다가 거란군에게 패해 후퇴한 것이 언급된다. 대도수가 지채문을 도우러 가겠다고 하지만, 탁사정은 성문을 잠그고 거란군이 물러갈 때까지 성을 지키기만 하며, 밤 중에 탁사정이 성종이 성종이 사찰에 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서문, 대도수는 동문으로 출격해 거란군을 협공하자고 제안한다.
대도수가 먼저 동문을 나가고 탁사정이 서문으로 나가는데, 조원과 강민첨은 탁사정이 성종이 있는 곳과 반대편으로 가는 것에 의아해하며, 개경 조정에 전령을 통해 탁사정이 도망가고 대도수가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언급된다.
5.2.4. 혼란 속에서 서경을 지켜내다
지채문이 실종, 탁사정이 도망, 대도수가 포로로 잡히는 상황으로 인해 서경은 혼란한 상황이 되었고, 백성들이 서경성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자 조원은 혼란해하면서도 강민첨에게 가서 성 안에 남아있는 무장들에 대해 보고한다. 강민첨이 통군사 휘하의 사람이라고 해서 조원에게 지휘하라고 하자 조원은 자신없다는 태도를 보이지만 강민첨은 자신이 돕겠다고 하며, 거란군이 공격한다는 보고를 받자 조원은 거란군과 맞서 싸우기로 한다.
거란군이 맹화유를 성벽에 투척해 공격하고 조원과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방패로 공격을 막아가며 치열하게 싸우다가 동문에 무관이 남아있지 않아서 강민첨이 동문으로 가서 싸우기로 하고, 무관들이 부족하니 경험이 충분한 병사들을 무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하면서 싸운다. 소배압은 서경성이 함락되지 않자 야율분노가 지휘하는 대신 자신이 지휘하기로 하지만 성종이 야율분노의 설득으로 고려의 왕을 붙잡기 위해 개경으로 진격하기로 하면서 서경에서 철수하며, 소배압이 제대로 된 거점도 마련하지 않고 공격해선 안된다며 반대하지만, 성종이 거점은 곽주로도 충분하다며 개경으로 진격하기로 한다.
[1]
을름의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했을 때 동원한 병력이 9000명인 것을 볼 때 전체 병력 규모는 그보다 많았을 것이다.
[2]
《요사》의 날짜가 《고려사》와 크게 다르고 오차도 심하다. 요사에는 통주 전투가 음력 11월 11일이고 친조 사신이 도착한 것은 음력 11월 16일이며 대도수 항복은 음력 11월 17일로 통주 전투로부터 6일 뒤의 일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통주 전투 패배가 음력 11월 24일이며 대도수 항복은 음력 12월 13일로 통주 전투로부터 18일 뒤의 일이다. 물론 요사의
발해타실이 고려사의 대도수가 아닐 가능성도 있음은 감안해야 한다. 한편 요사는 특정 날짜에 기록된 기사가 정확히 어느 시점까지 아우르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요사로는 날짜를 비교하거나 특정하기가 어렵다. 일단 고려사절요는 이 사건을 음력 12월 10일 기사에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