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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9년 12월 한국 정부가 일본이 진행하던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를 시도한 사건. 일본어로는 '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라고 한다.원인은 당시 일본이 북한과 손발을 맞춰서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들을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보내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2. 발생 배경
1950년대 재일 한국인 사회는 조총련이 흐름을 선점했는데 대한민국과 일본은 당시 미수교 관계였기 때문에 정식 외교관계 대신 대표부를 설치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재일 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일본은 북한과 교섭하여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진행했다. 이는 외국인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에서 밀어내고 싶었던 일본의 이해와 국제사회에서 체제 우월성을 내보이고 싶었던 북한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였다. 두 나라는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건 아니었지만 적십자와 같은 단체를 통해 물밑으로 일을 진행했으며 곧 북송 사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당시 예상되었던 한일회담을 취소하고 일본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은 이를 반대하여 1959년 8월에 일본 적십자사 본사에 난입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진행되던 북송 사업을 막기 위해 결국 공작원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한국에 체류하던 재일학도의용군 중 42명, 한국 본토인 중 24명을 선발하여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결성했다.[1] 공작의 목적은 니가타 적십자센터를 폭파시켜 북송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공작원들은 1959년 9월부터 서울특별시에서 훈련을 받았고 12월에는 경주시 감포항에서 선원으로 위장하여 규슈 북부에 상륙했으며 니가타와 인접한 도야마에 아지트를 설치했다.
1959년 12월 4일 공작원들은 니가타현 시바타시의 술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어이없게도 사람 많은 술집에서 대놓고 공작 관련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찰은 그들의 짐에서 폭발물을 발견했다. # 이후 연달아 추가로 파견되었던 공작원들이 적발되었다. 12월 12일에 거제도를 출발한 명성호(明星號)는 폭풍에 휘말려 공작원 12명이 바다에서 사망했다.
공작은 이듬해 3.15 부정선거로 인해 일어난 4.19 혁명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에 대한 공작 활동을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당연히 이들과의 연관성에 선을 긋고 오리발을 내밀었으나 2009년에 공작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면서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2011년에는 '재일교포 북송저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보상하기도 했다.
3. 여담
이 사건으로 민단과 한국은 일본에서 이미지가 나빠지고 조총련이 기세를 얻었으며 민단이 일본에서 파시스트나 테러리스트라는 등의 이미지를 얻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과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그리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거치면서 한국과 북한의 이미지는 정반대로 바뀌어 버렸다.작전을 할 때 주일미군 기지 루트를 이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