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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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011년
1월 7일[1] (음력 1010년, 현종 1년 11월 24일)[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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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고려 통주성 앞 삼수채 평야 (現 평안북도 동림군 고군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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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성종의 고려 정복 야욕 | |
교전국 |
<rowcolor=#000> 요 (공세) 승
|
고려 (수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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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지휘관 [[요나라| 遼 ]]
야율문수노 (성종(聖宗))
|
지휘관 강조 (행영도통사) † |
참가자 [[요나라| 遼 ]]
야율분노[[요나라| 遼 ]]
야율적로[[요나라| 遼 ]]
야율홍고
|
참가자 이현운 (행영도통부사) ◎ → 최충 (수제관) 노전[3] (행영도통판관) ◎ 노의 (감찰어사) ◎ 양경 ◎ 이성좌 ◎ 노정 (행영도병마부사) † 서숭 (사재승) † 노제 (주부) † 김훈 (좌우기군장군) 김계부 이원 신영한 최질 (중랑장) 이홍숙 이원귀 (방어사) 최사위 (통군사) 김거 (진위부위) 수견 (별장) |
|
병력 | 요군: 200,000명[4][5] | 고려군: 300,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최소 30,000여 명 이상[6] |
결과 | 요의 대승 | |
영향 |
고려 최고 지휘관
강조 사망 및 주력군 궤멸 현종 나주로 몽진 수도 개경 함락으로 인한 각종 문화재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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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여요전쟁에서 행영도통사 강조 휘하의 고려군 30만 명이 요 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20만 명에 크게 패배한 전투다.2. 배경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여요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강동 6주 일대 지도[7] |
- 전쟁의 배경
- 전쟁의 발발
3. 전개
통주 전투의 포진 추정도[8] |
3.1. 고려 강조의 정석 포진
제2차 여요전쟁 고려 행영 군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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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 ||||||
이부상서 참지정사 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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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 |||||||
이부시랑 이현운 |
병부시랑 장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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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판관(行營都統判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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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거사인 곽원 |
시어사 윤징고(尹徵古) |
도관원외랑 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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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수제관(行營修製官) | |||||||
우습유 승이인 |
서경장서기 최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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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 | |||||||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 안소광(安紹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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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 |||||||
어사중승 노정(盧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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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병마판관(行營都兵馬判官) | |||||||
병부낭중 김작현(金爵賢) |
병부낭중 황보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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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좌군병마사 (左軍兵馬使) |
중군병마사 (中軍兵馬使) |
우군병마사 (右軍兵馬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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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감 최현민(崔賢敏) |
예빈경 박충숙(朴忠淑) |
형부시랑 이방(李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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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좌군병마부사 (左軍兵馬副使) |
중군병마부사 (中軍兵馬副使) |
우군병마부사 (右軍兵馬副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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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소감 최보성(崔輔成) |
예빈소경 이량필(李良弼) |
형부낭중 김정몽(金丁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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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좌군병마판관 (左軍兵馬判官) |
중군병마판관 (中軍兵馬判官) |
우군병마판관 (右軍兵馬判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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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위위녹사
고간 (高幹) |
대악승
김재용 (金在鎔) |
상서도사
고연경 (高延慶) |
내알자 류장(柳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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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군사(統軍使) | |||||||
형부상서 최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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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군부사(統軍副使) | |||||||
호부시랑 송린(宋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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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군판관(統軍判官) | |||||||
좌사원외랑 황보신(皇甫申) |
시병부원외랑 원영(元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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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장병 | |||||||
300,000명 | }}}}}}}}} |
- 1010년 11월 15일(음력 10월 1일), 고려 현종이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대거란 전쟁의 전권을 맡겼다.[9]
- 강조는 30만을 동원했다.[10][11]
- 강조는 고려군을 셋으로 나누어 배치했다.[12][13][14]
- 고려 우군은 통주성에 붙여 군영을 세우고 통로를 막았다. 이는 통주성을 보조해 '큰 길' 및 북측 산악 우회를 막았다.
- 고려 좌군은 가물남산을 등지게 군영을 세워 왼쪽은 바다를 오른쪽은 산을 등졌다. 이는 남측 해안 우회를 막았다.
- 고려 중군은 청강의 지류 셋이(삼수채) 합쳐지는 지점(합수목)에 군영을 세웠다.[15]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의 합류점에 웅거했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강조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동주(銅州)에 이르렀을 때 고려 장군 강조(康肇)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서 우리 군사에 대항하였다. 한 부대는 동주 서쪽에 진을 쳐서 삼수(三水)에 기대었는데 강조는 그 안에 있었다. 한 부대는 동주에 가까운 산에 진을 쳤으며, 또 한 부대는 동주성에 붙여 진을 쳤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3.2. 고려 중군의 초기 승기
- 1011년 1월 7일 (음력 1010년 11월 24일), 거란 성종의 본대가 삼수채로 들이닥쳤다.[16]
- 강조는 검차를 일렬로 배치하여,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공격하니 여러 차례의 공격을 물리쳤다.[17][18]
강조가 검차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강조가 검차를 배치하여 거란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3.3. 거란군의 고려 중군 돌파
- 강조가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탄기(彈棊)[19][20]를 했다.
-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야율적로(耶律敵魯)와 야율홍고(耶律弘古)를 이끌고 삼수채의 보루(군영)를 격파했다.[21]
- 첫째 보고에[22] 강조는 믿지 않고 숫자가 적을 것으로 판단해 더 들어오게 한 뒤 섬멸하라고 안이하게 지시했다.[23]
- 둘째 보고에 강조는 실수를 후회하며 무릎 꿇었으며[24][25] 곧이어 거란군이 들이닥쳐 강조를 담요로 싸서 데려갔다.
- 강조의 군대가 무너지자 이현운 등의 군대는 바라보다 무너졌다.[26]
- 이현운, 노전, 노의, 양경, 이성좌 등은 강조와 함께 포로로 잡혔고, 노정, 서숭, 노제 등은 전사했다.
거란군이 여러 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탄기를 했다. 거란의 선봉 야율분노가 상온 야율적로를 거느리고 삼수의 보루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군이 쳐들어오고 있음을 알렸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군이 이미 대거 침입하였다.”라고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며 당황했다. 거란군이 이미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고 이현운도 사로잡혔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가 상온 야율적로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 노전, 노의, 양경, 이성좌 등이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 서숭, 노제는 모두 전사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야율분노가 야율홍고(耶律弘古)를 거느리고 삼수영(三水營)을 격파하여 강조를 사로잡으니, 이현온(李玄蘊) 등의 군대는 바라보다가 무너졌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3.4. 고려군의 산개 퇴각
- 평지에 있던 고려 중군은 후퇴하며 수십리에 걸쳐[27] 3만 이상이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28]
- 해안가의 좌군은 소식을 듣고 후방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29]
- 통주성 인근의 우군은 그대로 통주성으로 입성한다.
(지휘부가 없어지니) 아군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거란군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명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가 헤아릴 수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 양규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고려군이 무너진 직후) 마침 대군(大軍)이 도착하였으므로 3만여 급을 참수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3.5. 완항령에서 피해를 멈춘 고려 중군/좌군
- 통주에서 곽주 방면으로 와해된 채 도주하던 고려군은 완항령(緩項嶺)[30][31]에 이르러 지도부와 전열을 정비했다.[32]
-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검을 들고(단병, 短兵) 매복했다가 추격해오는 거란 기병을 기습하자, 거란 병사들이 물러났다.
- 이로서 고려 중군/좌군은 남은 병력이나마 후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33]
거란군이 말을 타고 멀리까지 추격해오니, 좌우기군장군 김훈·김계부·이원·신녕한이 완항령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모두 칼을 손에 쥐고 돌격하여 그들을 쳐부수자 거란군이 약간 퇴각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 양규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 김훈·김계부·이원·신영한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3.6. 통주성은 지켜낸 고려 우군
- 고려 우군은 통주성으로 대피해 갇히게 되었다.[34]
- 거란군은 삼수채에서 생포된 행영도통판관 노전을 합문사 마수와 함께 통주성에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35]
-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거란군의 사신단을 체포하고, 이원구, 최탁, 채온겸, 시거운 등과 함께 통주성을 지켜냈다.
- 거란군은 12일 가량[36] 통주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공략되지 않자 성을 둔 채 남하했다.
거란이 다시 노전 및 합문사 마수로 하여금 격문을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할 것을 권유하니, 성 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 최질·홍숙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서 노전과 마수를 잡았고, 이에 방어사 이원구, 부사 최탁, 대장군 채온겸, 판관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 양규
#}}}3.7. 애국자 강조와 양규, 배신자 이현운
- 거란 성종이 강조를 칼로 살을 잘라내며 겁박해도 절의를 꺾지 않았다.
- 반면 이현운은 쉽게 고려를 버리고 거란에 붙자, 강조가 이현운을 발로 찼다.
- 거란 성종이 끝내 강조를 처형했다.
- 거란 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서북면 도순검사인 양규에게 가짜 항복명령을 내리지만 속지 않는다.
거란 임금이 강조의 결박을 풀어 주며 묻기를,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이 처음과 같았으며 또한 칼로 살을 발라내며 물어도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이현운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두 눈은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일심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며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으로 어찌 이와 같이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거란은 마침내 강조를 처형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거란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하라고 설득하니, 양규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 양규
#}}}4. 결과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여요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야전군 전력 대부분이 지휘체계가 증발해 뿔뿔이 흩어져 서북면 각 성이 수성에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 여진족과 마주하던 동북면 군까지 끌어와서 서경 전투를 아슬아슬 이겨서 거란의 보급로 확보를 좌절시켰다. 이로 인해 동북면에 일시적인 공백이 존재했으므로 여진족도 몰려왔으면 꼼짝없이 털릴 뻔했다.
- 결과론적이지만 야전군 전력 중 많은 전력이 생존해 도주했기에, 이들을 규합해 거란 보급선인 곽주를 탈환하고 끝없이 후방을 교란할 수 있었다. 30만 중 3만이 죽었으니 나머지 27만이 서북면의 각 성으로 흩어졌다고 볼 수 있다.[37] 심지어 통주성 근처의 우군은 그대로 통주성으로 들어갔다.
- 곽주 탈환 후 후방 보급선이 전부 차단된 거란 성종이 서경 함락에 실패한 상황에서 퇴각 대신 개경 약탈을 선택해, 현종이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남쪽의 나주까지 몽진하게 된다.
- 현종에게 정치적 부담이던 강조 일파가 박살이 났다. 전쟁 이후 남아있던 강조 측 인사들도 현종에 의해 귀양 보내졌다.
-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를 보자면 지도부는 파멸했지만 병력 자체는 90% 정도 생존해서 거란군이 후퇴결정을 내리는 데 일조하게 된다. 27만의 고려군이 살아남아 서북면의 각 성으로 흩어진 데 더해 양규의 신출귀몰한 거란군 후방 공격으로 인해 위협을 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 거란군 6천이 방어하던 곽주성이 하룻밤만에 털리고 몰살당했는데, 정상적이라면 최소 6만 이상의 고려군이 등장했다고 상상할 법만하다. 이후로도 양규는 거란군을 마주칠때마다 수천씩 전사시켰고 거란군은 통주 전투에서 살아남은 최소 수십만의 고려군이 뒤에서 점점 지휘체계를 갖춰간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5. 논의
===# 후속 전쟁에 준 교훈 #===- 제3차 여요전쟁 이전 수차례의 국지전 - 거란군은 최대한 고려군을 성 밖 평야로 불러내려고, 고려군은 최대한 거란군을 공성으로 유도하려고 진화한다.
- 제3차 여요전쟁의 귀주 대첩 - 소배압은 적은 피해로 퇴각을 할 수 있었으나, 강감찬이 강조처럼 "평원에 검차진을 짜고 대기하는" 것을 보고 궤멸시킨 뒤 노략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자신하고 분지 속으로 낚여 들어왔다. 그러나 거란군이 덫에 들어온 뒤 김종현의 기병대가 나타나며 거란군은 전멸하게 되었다.
- 고려의 여진 정벌 - 강동 6주처럼 동북 9성을 쌓아 영토를 확고히 하려 했으나, 개마고원을 통해 옆길이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해 여진족에게 영토를 돌려줘야 했다.
- 여몽전쟁 - 훗날 등장하는 우봉 최씨 무신정권은 강조의 몰락을 참고했는지, 몽골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은 나서지 않은 채 백성들의 피해를 수수방관하며 강화도에 숨는 모습을 보였다.
===# 한민족 최대의 평원 전투? #===
통주 전투를 한민족 최대, 혹은 더 나아가 세계사 최대의 단일 회전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료상 수치를 의심 없이 그대로 맹신한 결과로서, 신뢰할 가치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예컨데 영국사의 중요한 분기점인 헤이스팅스 전투는 당대 사료에서 40만 이상의 군이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치른 이수스 전투의 경우 3만 군으로 60만 군을 깨뜨렸다고 기록되었다. 물론 현대에 이런 수치를 믿는 경우는 전무하다.
현대 서구 역사학계에서 병력의 수가 대체로 적게 나타나는 까닭은 원 사료부터 적은 병력을 기록하였던 탓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와 학계에서의 치열한 토론 끝에 가능한 실제 병력을 가능한 수준에서 재구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사에서 수치를 대할 때에는 이러한 연구가 아직 미비한 수준임을 인지하고, 사료상의 숫자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데, 고려사의 경우 '조선보다 나았던 나라' 와 같은 프레임이 유행하면서 유독 사료상의 숫자를 실제 수치 자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 문제가 되고 있다.[38]
6. 대중매체
6.1. 그림
- 2014년,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이 그린 <통주 전투 묘사도>가 책 《고려전쟁 생중계》의 삽화로 삽입되었다. 야율분노-야율적로의 우피실군이 고려군 최고 지휘관이었던 강조를 담요로 생포해 묶어가는 것을 상상해 그렸다.
2014년, 책 《고려전쟁 생중계》의 삽화[39] |
- 2022년, 웹툰 <별을 품은 아이> - 카카오페이지의 웹툰인 《관악 창작만개》에서 《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가 총 4화로 연재했다. 본군의 중앙이 뚫리고야 탄기를 하던 강조가 천막을 나왔고, 이미 상황이 늦었음을 깨닫고 장렬히 칼을 휘두르다가 생포된 것으로 묘사한다.
6.2. 영상
6.2.1. 드라마 천추태후
- 74회
- 75회
6.2.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2023년,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7화 中 전쟁 씬 |
- 6회
- 강조가 장수들을 이끌고 작전 회의를 하면서 통주성 앞 삼수채에 진을 친다.
- 7회
- 강조가 노전과 노의를 검차진을 이끄는 선봉에 서게 하고 김훈을 좌익, 최사위을 우익에 배치한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장방패 사각방진을 향해 철갑기병을 돌격시키자, 고려군은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패 뒤에 숨겼던 검차를 앞으로 돌격시켜 기병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이어서 물풀매로 돌을 던지고, 검차 뒤에서 쇠도리깨와 장창으로 거란군 기병을 공격해 무너뜨리자, 소배압이 거란군을 일시 퇴각시켰다. 소배압은 고려군을 계속 공격하면서 약점이 무엇인지 샅샅이 찾기로 한다.
- 야율분노는 소배압에게 모든 공을 뺏기기 싫어 먼저 척후를 통해서 고려군의 약점을 찾아낸다. 그는 부하로부터 산을 타고 가면 고려군의 뒷편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듣게 되고 이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참수작전을 벌인다.
- 강조가 이현운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거란군과 싸울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군량미를 쌓아 놓은 쪽으로 거란군이 기습했다는 것을 장연우에게 보고받는다. 강조는 "대군이 들어올 길은 모두 막았으니 그 숫자는 소수일 것이므로, 장연우가 진중의 군사만으로 적을 막으라" 지시한다.
- 강조는 곧이어 이현운에게 "검차진을 흐뜨리려는 수작이므로, 전방 검차진을 돌며 '후방에 소란이 일어도 대열을 유지하라'고 전하라. 후방 기습은 곧 전면에 대군이 온다는 것" 지시한다. 그런데 그 순간 야율분노의 거란군이 강조의 천막에 들어서고, 강조- 이현운은 후방교란이 아니라 참수작전이 목적이었음을 깨닫는다.
- 야율분노는 강조를 고려군 진중 높이에 매달고 불을 환히 지펴 고려군들이 이를 보게끔 한다. 이에 고려 군사들은 공황이 퍼지고 진열이 와해된다.
- 8회
- 통군사 최사위가 주도하여 군을 수습해 후퇴시킨다.
- 소배압은 자신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기습한 야율분노를 질책한다. 소배압은 고려군을 전멸시키지 않고 와해시켰으므로, 고려군은 대부분의 전력이 보존된채 모두 성으로 들어가 흥화진처럼 농성할 것이므로 고려 정복은 어려워졌다고 질책한다. 또한 요성종이 원하시는 것은 강조가 아니라 고려의 정복이라고 질책한다. 군사들에게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해 소탕하라고 지시한다.
- (통주성에 가깝던 고려 우군) 통주성의 최질은 화살을 쏘아 거란군의 접근을 막으면서 고려 패잔병들을 들어오게 한다.
- (평지에 있던 고려 중군/좌군) 좌우기군장군 김훈은 통군사 최사위에게 "자신이 추격하는 거란군을 저지하겠다. 패잔병들을 수습해 최대한 곽주와 서경으로 보내달라. 또한 황제에게 전령을 보내 사실을 알려달라" 건의한다.
6.2.3. 기타
- 2017년 9월 18일, 국방TV < 토크멘터리 전쟁사> 66화 "고려 vs 거란 전쟁 2편" #
- "강조가 쿠데타 직후여서 누군가에게 큰 군을 맡길 수 없고, 빠르게 전쟁을 끝내야 해서, 평지의 정면대결을 선택해야 했던 정치적 요인이 가장 큰 패인", "가장 강한 중앙군의 중심을 돌파해내자 주변 군이 공포", "당연히 패잔병들은 통주성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 길을 거란군이 막아서, 평지인 남쪽으로 도망가다 7할이 살육당했을 것"[42], "다행히 김훈이 완항령에서 저지해 피해 막아" 등으로 분석했다.
- 2019년 11월 24일, JTBC < 평화전쟁 1019> 2편 #
- "거란의 파상공격에 성처럼 견고했던 고려의 진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다행히 통주성은 함락되지 않아 남은 고려군은 성에 들어가 항전했다" 등으로 나레이션한다.
2019년 11월 24일, <평화전쟁 1019> 2편 中 통주 전투 묘사 |
- 2020년 2월 5일, KBS < 역사스페셜> "천 년 전의 역사전쟁, 고려거란전쟁" #
- 1~3차 여요전쟁 전반을 모두 다루려다보니 통주 전투는 "검차를 믿고 안이하게 대처하던 강조는 거란의 기습에 포로가 되었다"고 1줄로 짧게 나레이션한다.
[1]
율리우스력
1월 1일
[2]
패배 후 완항령에서의 재정비 및 통주성 방어 성공까지를 포함할 경우 음력 12월 초까지.
[3]
이후 거란에 의해 통주성으로 항복을 권유하러 온 이들 중 한 명으로 왔다가, 최질 등에게 잡힌 뒤 다시금 고려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4]
사료상 원래 400,000명이었지만
고려군의 방해로 인해 200,000명 씩 나누어 남하했다.
[5]
역사적으로 재구되지 않은 단순 사료상 값으로서, 거란국지 등의 병력 서술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현대 연구는 거란군의 전체 병력수를 10만여로 추산하기에 이 병력값이 현실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국방부의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집필한 <민족전란사7, 여요전쟁사>에서는 송사, 거란국지, 문헌통고, 속자치통감장편 등을 인용해 당시 요나라가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의 수를 10~12만명으로 추정했다.
[6]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요사에는 고려군의 전사자만 3만여 명이라고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총 사상자는 최소 3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7]
제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은 남하할 때 해안길을 따랐으며, 북상할 때는 내륙길을 이용하려다가 귀주에서 막히자 해안길로 우회했다.
[8]
"거란 야율분노-야율적로의 보루 격파"는 정면돌파로 해석할 수 있으나, 야간에 허를 찌른 기습으로 해석한다면 점선과 같다.
[9]
현종의 명령은 요식행위였고, 사실상 실권자인 강조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
강조가 총괄하는 고려군 병력의 규모가 300,000명이고 실제로 통주 전투에 동원된 병력은 이보다 적었을 거란 해석도 있다. 반대로 보급 전력을 비롯한 황도 개경의 중앙군과 기타 각지의 상비군을 포함하면 총괄 병력은 400,000명을 상회했으며 따라서 동원 병력 역시 과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상충한다. 임용한, 《전쟁과 역사2》 / (113p)
[11]
고려보다 병력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도 세종~세조 시기에는 총동원시 380,000명 이상의 대군을 징발할 수 있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중 정규병력만 100,000명이 넘었으므로, 후삼국시대를 거친 병영국가의 면모를 잃지 않은 이때의 고려가 수십만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12]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도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오자병법》을 인용하며, 하천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배후 기지를 둔 포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동절기여서 하천 자체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하천에 접한 언덕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해준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13]
다만 병력을 어떻게 나누었는 지는 불명이다. 10만씩 셋일수도 있지만, 주무기인 검차가 중군에 있었던 점, 우군은 통주성 인근에 배치한 점을 볼때 주력을 중군에 두고 좌우군은 상대적으로 적게 배치했을 수도 있다.
[14]
그리고 30만이라는 숫자를 긍정하는 의견들도 보급전력을 포함한 평시 고려 병력 수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전장에 배치된 병력은 그보다 적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5]
이 지역이 겨울에 물줄기가 어는 것을 고려하면 전체적인 평야지대가 가장 넓었다. 이를 통해 거란군이 (좁은 산길의 우군, 좁은 해안길의 좌군보다) 검차를 동원한 중군으로 몰려오게끔 의도한 것일 수 있다.
[16]
해안길을 막은 좌군, 내륙길을 막은 우군 방향으로는 가지 않고, 강조의 의도대로 중군으로만 공격을 집중했을 것이 추측된다. 검차는 기동성이 떨어지므로, 상대가 먼저 오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잘 유도된 것이다.
[17]
기병대에 대한 방진의 위력은
비류수 전투에서도 드러난다. 고구려 동천왕은 어택땅 기병돌격으로 1만명의 위나라 군 중 6천을 죽이고 4천만을 남긴 상황에서 다시 5천의 철갑기병으로 정면돌격한다. 이때 관구검은 고구려의 단순한 돌격전술을 파악하고 방진으로 이를 맞이한다. 4천의 위나라 보병은 5천의 고구려 철갑기병을 포함한 2만의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이중 만 8천명을 전사시킨다.
[18]
동북아 최강 기병인 거란군을 상대로 한 이같은 야전에서의 승리는 검차를 위주로 한 방진의 위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거란군 또한 야전에서의 기병우위를 믿고 돌격했을 것이나 검차 위주의 방진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고려군이 여러 차례나 물리쳤다 하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다만 방진은 기동성이 떨어지고 검차가 기록대로 일렬로 배치하여 전면에만 있었다면 측후방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떨어진다.
[19]
알까기 또는
바둑
[20]
배우 개그로,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강조를 맡은
이원종 배우가 2020년 예능에서 알까기를 했던 점이 회자되었다.
#
[21]
이는 야습 정도가 아니라, 거란 본대가 '여러 차례의 공격' 뒤 마침내 약점을 찾아 돌파에 성공한 것일 수 있다. 검차 방진의 약점은 검차가 배치되지 않은 쪽이고, 앞서 검차를 "일렬로 배치했다"고만 했으므로 측후방에 검차가 없거나 적었으며 거란군 기병대가 우회해 들이닥쳤을 것으로 해석된다.
등애가 암벽을 등반하여 검각에서 앞만 바라보던
강유의 뒤로 들이닥친것을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기동성을 버리고 검차를 믿고 삼수채에 알박기 하려는 의도였다면 측후방에도 검차를 둘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22]
두 보고 모두 진주(鎭主)에게 보고받았다고 하므로, 중군병마사 박충숙이 보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23]
강조는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지도 않고 거란군이 검차가 배치된 전면 중 일부를 뚫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거란군이 검차를 돌파하며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방진의 특성상 뚫고 들어오며 기세를 잃어버린 거란군을 포위섬멸하기도 용이하다. 다만, 거란군이 검차가 없는 측후방을 뚫었다면 이는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 할 위기였다. 기병대가 큰 피해없이 돌격에너지를 유지한 채로 방진을 휘저어버리면 전체 진이 손쉽게 와해되어 버린다.
[24]
《
고려사》는 강조가 폐주
목종의 혼령의 일갈에 놀라
투구를 벗으며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했다. 강조가 목종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걸로 보인다.
[25]
이번 보고에 거란군이 전면이 아닌 측후면으로 들어와 방진을 무너트린 것을 알아챘을 것이고, 첫번째 보고 이후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26]
중군 중에서도 1인자 강조와 2-3인자 이현운-장연우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 있었을 알려준다. 강조/이현운 부대까진 무너지고, 장연우 부대는 다수 퇴각했음을 알 수 있다.
[27]
삼수채에서 선주 시가지까지 8km인데, 이는
리(단위)(400m)로 20리다.
[28]
고려의 야전군 지휘체계가 일시에 붕괴해버린 것이다. 전근대의 전투에선 진형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사상자가 대거 발생했다. 중군에 10~20만이 배치되었다면 3만의 전사는 전멸에 준하는 큰 피해이다.
[29]
좌군의 위치상 당장 후퇴하지 않으면 중군을 뚫은 거란군이 가물남산을 우회기동하여 뒤를 막으면 포위전멸당할 위기였다. 삼수채~선주까지 학살이 이뤄지고 있었기에, 그보다 더 후방인 완항령에서야 중군의 잔류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30]
이 주변엔 없는 지명이다. 따라서 '완만하지만 폭이 좁은 고개' 뜻 자체로 해석된다. 선주성에서 곽주성까지의 길이 딱 이러하다.
[31]
완항령 앞의 선주(宣州)에 996년 서희가 성을 쌓은 기록은 있지만 이 때까진 군사적 가치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주성이 군사적 가치를 가질만큼 축성된건 1035년 거란의 공격기록부터다.
[32]
부대를 보존하여 후퇴한 좌군이 중군의 패잔병을 수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3]
해안길을 따라 곽주성, 가주성, 영주성(안북도호부), 호경성(서경)으로 이동한 군은 거란군과 바로 다시금 싸워야 했고, 내륙길을 따라 귀주성, 장흥진으로 이동한 군사들은 세력을 보전했다가 양규의 휘하로 들어갔을 것이다.
[34]
갇히기는 하였으나 통주성의 방어측면에서 보자면 지원군이 도달한 것과 같다. 삼수채의 대패로 사기는 떨어졌겠지만, 우군은 큰 피해없이 성으로 들어왔고 통주성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는다. 물론 예상외로 많은 군사들이 들어오면 성안에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겠지만, 애초에 포진 자체를 통주성 앞에 했으므로 그 정도는 고려해서 식량과 식수를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35]
그런데 노전 같은 경우에는 고려
덕종 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먼 훗날인
충선왕의 즉위년에는 노전과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이 기재돼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처럼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
[36]
음력 기준 11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
[37]
물론 이건 30만이라는 수가 과장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얘기이다. 뒤이어 이어진 전투들에서 영주성, 곽주성, 숙주성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된 점을 볼 때 전력이 크게 보강됐는지는 의문이다.
[38]
조선사의 경우 사료가 풍부하고 교차검증에 쓸 수 있는 사료도 많아 실제 수치에 가깝게 재구하기 용이하며 과장된 수치 대신 재구된 수치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탄금대 전투는 일부 사료에서 8만의 조선군이 투입되었다 과장되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동서기언 등의 사료를 종합하여 실제로는 8천~1만 사이였을 것으로 재구할 수 있으며 이 수치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편이다.
[39]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일러스트
출처 블로그
[40]
이 드라마는
이현운이 신라계와
문화왕후의 사주를 받아 목종을 시해했으며, 이 사실이 목종의 모친인
천추태후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거란군에게 먼저 매국을 했다는 식인 허구의 설정으로
역사 왜곡했다.
[41]
천추태후가 서경(호경성)의 구원군을 이끌고 와 거란 본대를 기습한 뒤 통주성에 들어가 수성을 돕는 허구의 설정으로
역사 왜곡했다.
[42]
역사서에는 30만 중 3만이 전사자라고 되어있으므로 이는 과장된 표현 같다. 애초에 삼수채에서 통주성은 산으로 막혀있어 갈 수 없는 길이다. 실제로 패잔병들은 서경방향으로 후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