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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5:24:52

동국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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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편찬 역사3. 내용의 특징
3.1. 1484년본과 1485년본의 차이3.2. 삼국, 고려시대의 재평가
4. 기타
파일:동국통감.jpg [clearfix]

1. 개요

東國通鑑. 조선 세조 9년(1463)에 서거정(徐居正)[1] 등이 왕의 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한 관찬 역사서.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으며 총 56권 28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목인 동국통감의 의미는 '조선(東國) 통치에 배움이 되고 도움이 되는 역사(通鑑)'라는 뜻이다. '통감'이라는 단어는 자치통감에서 따왔다. 자치통감 편찬 당시 신종이 통지(通志)라 불리던 책을 보고 '통치에 도움이 되는 역사'라는 뜻으로 책의 제목을 '자치통감'이라고 바꾼 것이 유래이다.

1484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148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네이버에서 국역된 버전으로 볼수 있다. 링크

2. 편찬 역사

조선 세조 삼국사기 동국사략을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들이 몇 권 남지 않은 데다가 남은 책들도 서술이 탈락된 부분이 많고 난잡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직 우리나라엔 편년체 고대 통사가 없음을 절감하고는 세조 4년(1458) 신하들에게 우리나라도 상고 이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국의 자치통감에 준하는 사서를 편찬함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냈다.

이후 세조 9년(1463) 9월 5일 서현정(序賢亭)에서 다시 신하들에게 빈약한 고대 역사기록을 한탄하며 편년체 역사서가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양성지를 중심으로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만들어 집필을 시작했다. 세조는 생전 계속 동국통감의 편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 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동국통감청의 당상관과 낭관들을 불러 목차를 물어보고 범례를 직접 써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국통감은 세조 생전에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예종 대에도 예종의 단명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가 성종 대에야 신숙주가 재개하고 서거정이 완성했다.

3. 내용의 특징

上下千四百年前者覆而後者戒彙稡五六十卷義欲正而辭欲嚴
위아래로 천사백 년 동안 앞 사람의 실패가 뒷 사람의 경계함이 되게 하였고, 모아놓은 오륙십 권의 책은 의(義)에 대해서는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며, 이야기는 엄정히 하려고 하였다.
『진동국통감전(進東國通鑑箋)』[2], 서거정

내용은 크게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시대에서부터 신라 문무왕 때까지를 삼국기(三國紀), 문무왕부터 고려의 건국 까지를 신라기(新羅紀), 이후 고려말까지를 고려기(高麗紀)로 나누었다.

외기는 단군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하는 기원전 2333년, 즉 단군기원이 최초로 제시된 역사서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외기로 처리해버린 것은 15세기 당대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왕조들이 남긴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삼국시대 이전의 내용은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 기록은 현재에도 부실하고 삼국시대 기록마저도 국내 기록으로는 부족해 일본의 기록까지도 참고해야 한다. 일본서기 같은 책은 역사왜곡이 심하지만 고대사 자료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삼국기의 경우 기존 역사서들과 얼마전 만들어진 권근의 동국사략 등과는 달리, 신라 중심 서술을 뒤집고 처음으로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웠다. 이는 세종 시대부터 이어져온 인식으로 세종이 삼국의 시조들 중에서 신라의 조상에게만 제사를 지내자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삼국 모두의 시조들에게 제사를 지내었다.

연대 표기 또한 동국사략과는 달리 당대에 쓰이던 대로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사용했다. 새 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부터 왕의 즉위기간으로 치는 방법. 유교적 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라 하여 선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한 해는 선왕의 재위기간으로 잡고, 그 다음해부터 새 왕의 즉위기간으로 계산한다. 이처럼 그 당시 썼던 것들을 사실 그대로 온전히 보전했다. 대신 신라기를 따로 독립시켜 신라 통일의 중요성과 그 의미는 확실히 부각시켰고 발해는 한국사로 포함하지 않았다.[3]

참고로 한반도 국가들이 가진 전쟁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와 논평을 하지 않았다. 기성 역사서대로 정치/외교사가 주를 이루고 전쟁 이야기도 상벌의 기준이나 내부의 문제와 같은 정세판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하지 전쟁사의 기록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시성 전투, 황산벌 전투, 기벌포 전투의 승리나 김경손의 결사대의 활약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본시 역사서의 편찬도 유학자들이 말하듯 문무의 도는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듯 전쟁사가 구체적으로 적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전쟁만 치르고 다닌 요나라의 역사서 요사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전쟁 기록이 많은 편이다. 국방부에서 역사 교육을 가르칠때 귀주 대첩의 경우 고려사와 더불어 요사의 내용을 많이 참고로 한다. 조선 후기에는 동사강목이 이 문제에 대해서 보완을 하려했으나 자료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동국통감 이전에 동국병감이 나왔으나 전쟁사를 다룬 동국병감 또한 서문이나 구체적인 기록이 동국통감은 아니더라도 미비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동국통감 편찬 당시 문관 출신들과 혹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문관 출신들과 무관들의 참여를 제한해, 정치사 못지 않게 전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꽤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로 동사강목에선 전쟁사에 대한 기록이 추가가 되었지만 자료 미비로 인해 보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후 현종 13년(1672)에 홍여하(洪汝河)가 동국통감제강을 편찬했다. 동국통감제강은 기존 동국통감을 주자의 존화양이(尊華壤夷)적 역사서술 방법으로 새로 구성한 것이다. 1644년 새롭게 중원의 지배자가 된 청나라를 오랑캐로 격하하고 몰락한 중국 대신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과 국가 권위를 드높이려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끝난 중국 제왕(帝王)의 정통을 신라 → 조선으로 연결하고 기타 다른 국가들을 신하나 찬탈자 형식으로 서술했다.

3.1. 1484년본과 1485년본의 차이

1484년 서거정과 훈구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최초의 동국통감은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깔지 않았고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목적으로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았다. 이후 1485년에 신진사림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신찬동국통감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서술이 주를 이루며 사론 약 400여 편을 추가했다. 초창기 동국통감과 신찬동국통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3.2. 삼국, 고려시대의 재평가

4. 기타


2015년 3월에 동국통감(東國通鑑) 일본 판목본 56권 완질본을 일본 교수가 한국에 기증하였다. 관련 기사 임진왜란 때 동국통감이 일본에 전해진 후 에도 시대에 일본 전역에서 필독서가 되어 널리 읽히며 일본에서 따로 판목본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동국통감은 일본 국학자와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국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불신하게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이유는 이주갑인상처럼 연대를 억지로 끌어올려 동국통감에 나온 사건과 일본서기에 나온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어도 연대가 다르고 일본서기의 기술이 뒤죽박죽에 난장판이 따로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진구황후 관련 기사와 같이 모토오리 노리나가조차 말이 안된다고 비난한 무리수들이 남발해 있었기에 결국 자국 역사서를 불신하게 된 것. 게다가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 중국인들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일본서기는 '외래 물이 든 역사서'로 폄하되기에 이른다. 반대로 고사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이후 '일본 고대정신의 결정체'라고 칭송받게 된다(...).


[1] 동인시화, 동문선, 태평한화골계전, 오행총괄, 사가집, 경국대전, 필원잡기 등을 저술한 조선 전기의 문인 [2] 동국통감을 올리는 전(箋)이라는 뜻으로, 현대의 서문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의 진삼국사기표에 비해서 표가 전으로 격하되었는데, 고려시대의 외왕내제가 원ㆍ명의 압력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3] 발해를 한국사로 보는 시각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고, 그나마 후기에도 발해가 한국사라고 보는 유득공 등과 아니라고 보는 안정복 등이 양립했다. [4] 구할 기회 정도가 아니라 당시 정세(고평릉 사변, 사마소 시군, 독발수기능의 발호)를 볼 때 제 할 일만 했어도 강유가 준비한 일발역전의 패가 (정난의 변과 비슷하게) 먹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