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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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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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서하 전쟁 ,1205 ~ 1227, |
서하 | ||
몽골-금 전쟁 ,1211 ~ 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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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보 전투·야호령 전투·회하보 전투 ,1211, |
금나라 | |
대창원 전투 ,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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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곡 전투 ,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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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 전투 ,1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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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호라즘 전쟁 ,1219 ~ 1221, |
파르완 전투 ,1221, |
호라즘 왕조 | |
칼가강 전투 ,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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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전쟁 ,1231 ~ 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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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니차 전투 ,1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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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 전투 ,1241, |
헝가리 왕국 | ||
몽골-남송 전쟁 ,1235 ~ 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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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 |
악주 전투 ,1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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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성 전투 ,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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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주 전투 ,1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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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공방전 ,1235~1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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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 전투 ,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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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1270 ~ 1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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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잘루트 전투 ,1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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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정 ,1274, 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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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원정 ,1257, 1284, 1287, |
쩐 왕조 | }}}}}}}}} |
1. 개요
1223년에 벌어진 몽골 제국 최초의 유럽 침공[1]쿠난 전투를 최초의 유럽 침공으로 보기도 한다.]이자, 이후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배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다. 당시 루스 공국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의 정면 공격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는데, 덕분에 이후 루스 공국들은 연합하여 몽골 제국을 상대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기들의 영지 보전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바투 등의 서방 원정군이 본격적으로 침략해오자 모두 각개격파당했다.참고로 이때의 몽골군은 딱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지역을 공격하려던 의도는 없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호라즘 왕국의 술탄인 무함마드 2세 추격전을 벌인 다음 카스피해 건너편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빙 돌아 귀환하던 도중, 루스 18개 공국 연합군이 먼저 선공을 하면서 확대된 전투였다.(병력도 루스 연합군이 훨씬 많았다.)
2. 배경
(호라즘 왕국과 그 주변 지역 지도. 몽골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짚어보자. 물론 루시 연합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더 북쪽이다.)
1219년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호라즘 제국과 외교적인 마찰을 빚은 후 호라즘으로 쳐들어가서 부하라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는 마침내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11일 만에 사마르칸트를 집어 삼켰지만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2세)가 이미 몽골군을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칭기즈 칸은 자신을 충실히 따르는 장군이자 당대의 명장들로 손꼽혔던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두 개의 만인대를 맡겨 술탄의 뒤를 쫓도록 했다. 이들은 카스피 해 연안에 있었던 호라즘 제국의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술탄을 추격했지만, 이미 무함마드 2세가 카스피 해 안의 섬에서 1220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2]
이에 두 장군은 칭기즈 칸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북쪽으로 올라갔다.
일단 이 둘은 1221년 타브리즈를 포위해서 항복시킨 후,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캅카스 일대의 조지아 왕국을 털어 먹었다. 물론 캅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지역에서 잘 나가던 조지아 왕국이 몽골군과의 대결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 본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토후국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몽골군에 허겁지겁 제물을 바치며 항복을 청했고, 그럼에도 몇 개 도시는 몽골군의 심기를 건드려 도시째 무너진 후 처참하게 응징당했다. 이후 몽골군은 목초지를 찾아 카스피 해 북쪽 초원 지역까지 올라갔고, 이 지역에서 튀르크계 킵차크족( 쿠만-킵차크 연맹)을 흡수하면서 부족한 전력을 채웠다.
1223년 초 칭기즈 칸은 이들에게 전리품을 가지고, 몽골 초원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때마침 캅카스 지역민들이 킵차크족과 연합해 몽골군에게 대항하자 제베와 수부타이는 이들을 제압한 뒤 돌아가는 김에 좀 더 가서 크림 반도까지 진출하여 약탈하고, 전리품을 획득한채 귀환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 과정에서 크림 반도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도시들이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런데 이후 전리품을 충분히 챙겼다고 여긴 몽골군이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사단이 났다. 몽골군에게 두들겨 맞고 서쪽으로 피난갔던 킵차크족들이 북쪽에 위치한 루시의 여러 공국들로 가서 '우리가 몽골군한테 완전히 약탈당했다. 그 다음에는 루시를 노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몽골군을 먼저 선제공격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이걸 듣고 깜짝 놀란 루시 공국들은 당시 러시아권의 수장격이었던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한 뒤, 한참 돌아갈 채비를 하던 몽골군 쪽으로 진군했다.
3. 양군의 전력
몽골군의 전력은 기록상 확인되는 바로는 2개 만인대(투멘)였다. 보통 1개 만인대는 정원이 10,000명에 달했으나, 실제로 이런 정원을 다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7~8,000명 내외였다. 여기에 장기간의 추격전으로 입은 전력 손실도 있었으나, 카스피해 북부 스텝 초원에서 한해를 나면서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전력을 충원했기 때문에 전체 전력 규모는 15,000~20,000명 사이였다.
이에 반해 루시 연합군은 약 80,000명이라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전력 구성은 갈리치아의 대공 므스티슬라프 흐라브리, 볼리니아의 대공, 쿠르스크의 대공, 키예프와 체르니고프 대공, 수즈달의 대공, 로스토프의 대공이 힘을 합쳐 이루어졌다.
4. 전개
4.1. 전초전
루시 연합군은 전투 직전 몽골군에게 페이크를 하나 걸었다. 몽골군이 병력을 모은 루시 연합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우린 그저 반란을 일으킨 쿠딘족을 토벌하기 위해 온 것이지, 님들과 싸우려 하는 게 아님'이라며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둘러댄 것이다. 때마침그러나 이건 호랑이의 꼬리를 밟은 격이었다. 특히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던 몽골군은 루시군의 기습적인 선공에 격노하여 방향을 바꿔 이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4.2. 전면전
기습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침착하게 진영을 갖춘 뒤, 궁술과 기마술을 운용해 루시군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 넘겼다. 여기에 선봉에 나섰던 킵차크족 전사들이 철수할 수 있게 열어놓은 루시 진영의 틈을 몽골군이 철수하는 킵차크족 뒤에 바싹 붙어서 난입해 들어오자 루시군은 그야말로 충공깽하며 무너졌다. 이후 몽골군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양익을 길게 펼쳐 퇴로를 막고, 루시군을 철저히 학살했다.키예프 대공은 이때 자기 진영에서,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며 기다렸다가 이후 달려온 몽골군에게 포위당했다. 10,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지만 이걸로는 몽골군을 막아내는데만 급급한 정도였으며, 3일 동안의 공격 이후 몽골군이 항복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회유하자 잔존 루시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먼저 후위를 친 루시군을 당연히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고, 포로로 잡은 고위 귀족들을 뺀 나머지 루시군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5.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루시군의 야전 수행 능력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학자들에 따르면 최소 2/3 이상의 루시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공작 6명이 사망했고, 포로로 잡힌 귀족들은 몽골군에 의해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모두 처형되었다.[3] 간신히 살아남은 루시군 수뇌부는 강가의 모든 배를 파괴해 몽골군이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피해는 1237년에 진행된 몽골의 서방 원정 때 분열된 루스 공국들이 힘없이 무너지는 나비효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칼카강 전투 이후 몽골군은 약속된 시간이 지나 무리하게 진격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여태껏 획득한 전리품을 가지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시르다리야강으로 돌아가 칭기즈 칸의 군대에 합세했다.[4] 다만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킵차크족은 가만 놔둘 수 없었는지, 돌아가기 전에 별동대를 조직하여 후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킵차크족의 칸을 추적한 뒤, 없애버렸다.
귀환 도중 병에 걸린 제베는 병사했지만 그의 제자이자 같이 동행했던 수부타이는 이 일대의 지형과 부족들에 대한 정보를 온 몸으로 체득했다. 그후 10여 년 뒤 벌어진 몽골군의 서방 원정에서 그 정보들을 바탕으로 정복 사업을 벌였으며 키예프 루시에 포함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는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200여 년 동안 받게 되었다. 심지어 노브고로드 공화국 같은 러시아의 일부 공국들은 지구 반대편의 고려처럼 국체만 간신히 유지한 채 몽골의 속국 신세로 전락( 몽골-타타르의 멍에)했으며, 그나마 가까스로 독립국가를 유지한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제공국도 몽골군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 이를 수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몽골의 통치를 흑역사로 여기는 러시아에서는 칼가강 전투를 역대급 비극의 역사로 인지하며, 실제로 러시아의 국민시인이었던 푸쉬킨은 이 전투를 주제로 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의 영향을 받았던 공산정권 시절 몽골에서 칼가강 전투는 은폐되었지만 공산 정부가 사라진 이후의 몽골에서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배우고 있다.
6. 기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여러 번 묘사된다. 상대적으로 미션 구성이 심심한 오리지날 시절 캠페인인 칭기스칸 켐페인에선 호라즘 정벌이 메인이고 곁다리로 러시아인이 쓸려가는 정도로 묘사되는데 비해, DE 에디션에서 추가된 코티얀 칸 캠페인에서는 좀 더 디테일하고 다이나믹하게 묘사된다. 직전 미션에서 여러 쿠만 부족과 루스 공국들을 규합하지만 다음 미션에서 플레이어가 손 쓸 겨를도 없이 바로 몽골+타타르의 압도적인 전력에 박살나고 쿠만족 패잔병은 간신히 도망가는 걸로 묘사되었다. 승자와 패자 DLC의 므스티슬라프에선 반대로 칼가강 전투 이전의 혼란한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다툼과 알력을 묘사하고 수백년 전 게르만 민족이 그랬듯이 서쪽으로 쫓겨나는 쿠만인들이 믿기 어려운 압도적인 침략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후반엔 대규모의 몽골 부대가 침략해온다. 체르니코프 대공 므스티슬라프와 다른 병사들은 어떻게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루스 공국들은 이 전투에서 배운게 없으며 결국 서로 분열하다가 다시 침략해올 몽골에게 쓸려나갈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며 끝이 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의 몽골 캠페인 첫 미션으로 등장한다.
<조조전> 모드 칭기스 칸에서는 전투 조금 전부터 병에 걸린 제베가 헥헥거리는데, 전투를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다. 역사대로 이 전투를 하면 제베와 무카리가 죽고, 이 전투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두 사람이 산다. 엔딩 분기와 관련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둘 다 해볼 것을 추천한다.
< 징기스칸(대만 게임)> 캠페인 모드에서 칼가강 전투를 모티브로 한 캠페인이 등장하며, 몽골 시점으로 플레이해볼 수 있다. 단, "칼가강"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고, 아바스 왕조의 알나스르와[5] 킵차크-쿠만 부족들을 정벌한 후, 러시아 공국들이[6] 떼거지로 몰려오는 포위전으로 연출된다.
[1]
1221년
조지아 왕국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2]
무함마드 2세가 죽은 섬은 '아베스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에는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
[3]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와 벌거벗은 세계사에 의하면 포로로 잡힌 루시 귀족들을 바닥에 눕혀놓고 그 위에 널판지를 깐 뒤, 몽골군이 그 위에서 집단 군무를 추거나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압사와 질식사인 샘(..) 첨언하자면 몽골은 풍습상 피를 보지 않는 죽음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귀족들이랍시고 나름 대접(?)을 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4]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후 몽골군이 불가 불가르를 공략했다가 케르네크 전투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일지도 모른다.
[5]
징기스칸을 바그다드로 초대한 뒤
페이크를 써서 기습해,
보오르추(보구르치)가 전사한다. 이에 징기스칸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알나스르를 죽여
참교육을 시전하는데... 정사에서 앗 나시르는 몽골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칼가강 전투 이후인 1225년에 병사했다.
[6]
그리고
자란드와 호라즘 잔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