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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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 주도 세력 |
2차 왕자의 난 |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 |
조사의의 난 | 조사의, 이성계 | |
이징옥의 난 | 이징옥 | |
단종 복위 운동 | 사육신 | |
김처의의 난 | 김처의 | |
이시애의 난 | 이시애 | |
임꺽정의 난 | 임꺽정 | |
정여립의 난 | 정여립 | |
송유진의 난 | 송유진 | |
이몽학의 난 | 이몽학 | |
이괄의 난 | 이괄 | |
이인거의 난 | 이인거 | |
삼수의 옥 | 정인중 등 노론 | |
이인좌의 난 | 이인좌 | |
나주 괘서 사건 | 윤지 | |
정유역변 | 홍상범 | |
황사영 백서 사건 | 황사영 | |
홍경래의 난 | 홍경래 | |
임술농민봉기 | 유계춘 등 진주 사람 | |
이필제의 난 | 이필제 | |
이재선 추대 사건 | 안기영 등, 이하응 | |
임오군란 | 김장손, 유춘만 등 오군영의 일원 | |
갑신정변 |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 |
1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이재면 추대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동학 농민 혁명 |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 | |
2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 |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 이두황 등 조선군 훈련대 | |
갑오의병 | 김원교, 서상철 등 | |
을미의병 | 유인석 등 조선 의병 | |
춘생문 사건 | 임최수, 이도철 등 친러파, 친미파 | |
신축민란 | 이재수 | |
을사의병 | 최익현 등 조선 의병 | |
정미의병 | 이인영 등 13도 창의군 | }}}}}}}}}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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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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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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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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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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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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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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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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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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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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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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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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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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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임오군란 壬午軍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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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상황도 | |||||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발생 | 1882년 7월 23일 | ||||
장소 | 조선 한성 일대 | ||||
원인 |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로 인한 군인들의 불만 누적 | ||||
결과 | 반란 진압 성공 및 청의 흥선대원군 납치[1] | ||||
영향 |
청나라의 조선 속국화 작업[2] • 청의 감국대신 파견 및 내정간섭 시작 • 청의 군대 주둔 및 갑신정변 개입 |
[clearfix]
1. 개요
1882년( 고종 19년) 7월 23일, (음력 6월 9일) 구식 군대가 별기군(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를 상대로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사건.진압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제물포 조약, 조일수호조규 속약, 조일통상장정 등이 체결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1891년 기준 청나라인 거류민은 2,000명, 일본인 거류민은 8,600여 명에 육박했다.[3]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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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군대 별기군 |
한편 조선 조정은 기존의 오군영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으로 통폐합하고, 일본의 후원하에 '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인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와 일본 육군 하사관 조교의 지도 아래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2영의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에 밀려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에 군인들은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우대하는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된다.
그 와중에 고종은 세자빈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종의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 회사로부터 구입하는 데 거액의 돈을 지출했다. 링크[4] 국왕이라는 작자가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급여는 체불한 채 아들 혼수품 장만에는 거액의 돈을 들인 것이다.
2.1. 2영 군인과 별기군의 차별 대우
흥선대원군 때에는 급여를 충분히 받아왔던 2영 군인들은 대원군의 섭정 폐지와 고종의 직권화 그리고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들의 텃세와 비리 등으로 별기군에 비해서 대우가 밀리게 되고 차별대우를 받는다. 대원군 섭정기동안에는 대원군이 옛 5군영에 대한 대우에 따라 5군영 군인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었지만 고종이 섭정을 폐지하고 직권화로 가게되고 여기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들의 개화 성향과 맞물려서 이들에게 2영 군인들은 구시대적 쇠락한 존재로 보일 뿐이기에 대원군과 같은 대우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보수적인 노선과 쇄국정책으로 반양(反洋), 반개화 성향이 짙은 대원군과는 달리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들은 개화를 꾀하며 조선왕조 400년동안 대대로 내려온 폐습을 청산하고 새로운 문명을 들이면서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려고 하였기에 2영 군인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버려야 할 존재였다.그렇기에 그 영향은 400년동안 조선왕조의 종묘사직과 나라를 지켜왔던 2영 군인들을 자연스럽게 차별대우하고 외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일본인 교관의 정예 훈련을 받은 별기군들은 신식군이라고도 불리며 일본에서 들여온 총으로 사격술을 익히고 근대식 군사훈련을 통해서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들에게는 대원군 섭정 시절의 잔재를 지워버리는 것과 동시에 조선의 쇄국을 파하고 전면 적인 근대 개화 국가로서 나가기 위해서는 2영 군인들과 같은 구시대 군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2. 2영 군인들의 반일, 반 민 정서와 별기군 증오차별
당연히 2영 군인들은 대원군의 섭정이 폐지되고 명성황후가 사실상 장악한 조정에서 대원군을 따른 구시대 쇠락한 존재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그리고 2영 군인들은 일본인 교관과 조교의 훈련을 받고 일본에서 수입한 소총으로 무장한 별기군에 대한 증오와 차별을 느꼈으며 나가서는 반일 정서로도 이어져서 개화와 별기군을 넘어서 일본과 일본의 후원을 업은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대한 증오와 반민 정서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을 지지하며 동생과 갈등을 빚고있는 흥인군 이최응 등 친민 인사들의 증오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흥인군 이최응은 군란이 일어나게 되자 분노한 2영 군인들에 의해 잡혀서 살해된다.2.3. 군납비리와 부패한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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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청 터 |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
쌀겨와 모래가 섞인 쌀 |
무위영 군인 1:
“아니, 대체 이게 뭐야? 이 쌀이 반이고 겨가 반이잖아!”
무위영 군인 2: “이... 이것 좀 보게! 내 쌀에는 모래가 섞여있네!”
KBS 수목 드라마 명성황후 중에서.
그 문제의 원인은 바로 조미에 식용 쌀이 아니라 썩은 쌀과 겨와 모래가 섞여있었고 양도 기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민씨 척신 정권은 조창과 경창을 장악했는데 이 때 막대한 양의 쌀을 빼돌렸다. 지방에서 수도로 쌀을 올릴 때 쌀은 빼돌리고 대신 겨와 모래를 잔뜩 채워서 수량만 대충 맞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화식(貨殖)이라 한다.무위영 군인 2: “이... 이것 좀 보게! 내 쌀에는 모래가 섞여있네!”
KBS 수목 드라마 명성황후 중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자면, 오늘날 현재 군인들 월급을 주는 돈봉투에다 부루마불 지폐같은 장난감 돈을 줘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연히 군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확인해 본 결과 사실로 드러나자, 구식 군인들은 포수인 김춘영과 유복만이 주도하여 집단으로 조미 수령을 거부한 뒤 선혜청으로 가서 쌀을 새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급 담당자가 "새로 못 주겠으니까 받기 싫으면 나가라" 라는 식으로 군인들을 모욕하고 자극하는 언동까지 일삼자 결국 군인들은 분노가 폭발하여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했고 주변의 기물을 파손하는 등 온갖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실 사태는 이렇게 악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래의 글은 맨 처음 구식 군인들이 선혜청 관료들을 두들겨 팼단 말을 듣고 음력 6월 5일 고종이 보인 반응이 적힌 실록 내용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7]이 아뢰기를,
"추수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견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 서울 및 경기 지방)은 틀림없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서울)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급료를 내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 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를 구타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
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건호궤(乾犒饋)[8]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영(該營)[9]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 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 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추수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견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 서울 및 경기 지방)은 틀림없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서울)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급료를 내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 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를 구타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
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건호궤(乾犒饋)[8]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영(該營)[9]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 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 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위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홍순목 : "올해는 흉년인데, 나라 곳간도 다 비었습니다. 당장 어제만 해도 군인들이 월급 때문에 창고지기를 두들겨 팼답니다.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렸고 1개월치 월급밖에 안 줬는데 그 양조차도 엉망이었답니다."
고종 : "월급 13개월을 못 준 것부터가 할 말 없는 일인데, 그나마 준 1개월치도 제대로 안 준 건 왜 그런 건가?"
홍순목 : "산지에서 쌀을 수송하다 보면 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심각한 사안이라 엄중히 조사시켰습니다. 근데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니고, 차별 대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식 군인들은 제대로 받으면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제대로 받지를 못했으니 똑같이 하루를 위해 10년 훈련하는 애들 입장에서 화가 안나면 그게 더 이상하죠. 월급 1년이나 넘게 안 받고 스스로 먹을 거 입을 거 해결해 가면서 군령을 안 어긴 겁니다. 오히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습니다."
고종 : "그러게 말이다. 저러고도 그간 난리 안 쳤다니 대단한데?"
고종 : "월급 13개월을 못 준 것부터가 할 말 없는 일인데, 그나마 준 1개월치도 제대로 안 준 건 왜 그런 건가?"
홍순목 : "산지에서 쌀을 수송하다 보면 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심각한 사안이라 엄중히 조사시켰습니다. 근데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니고, 차별 대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식 군인들은 제대로 받으면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제대로 받지를 못했으니 똑같이 하루를 위해 10년 훈련하는 애들 입장에서 화가 안나면 그게 더 이상하죠. 월급 1년이나 넘게 안 받고 스스로 먹을 거 입을 거 해결해 가면서 군령을 안 어긴 겁니다. 오히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습니다."
고종 : "그러게 말이다. 저러고도 그간 난리 안 쳤다니 대단한데?"
그러나, 정작 이렇게 원인 파악은 제대로 했으면서도 제대로 된 조치가 없었다. 특히나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고종의 명령을 무시하고 주동자들을 구속해 버리면서 군인들의 분노가 한층 더 들끓어 올랐고 사건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사실 대처가 어려운 방법도 아니었다. 사건의 발단은 봉급 문제로 인한 불만의 폭발이므로, 아래에 언급하는 것과 유사하게 '나라의 사정이 어려워서 봉급을 제대로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봉급을 횡령한 자들은 조사 후 따로 처벌할 것이며, 봉급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제대로 주도록 약속한다. 선혜청 관리들을 폭행한 자들은 그래도 국법에 따라 처벌해야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처벌하지 않겠으니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으면 완벽한 대처는 안 되었어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일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민란에서도 비슷하게 '탐관오리인 수령은 처벌할 테니,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주동자를 제외하고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라고 밝히는 게 보통이었고, 이러면 민중들도 대부분 납득하고 알아서 자진해산하는 편이었다..[10]
이 대목에서도 위에서 "해당 군영(該營)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 주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주목해서 '정말로 줄 쌀이 없었을 수가 있다' 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11] 일본과 조일무역규칙이라는 경제적 조약을 맺을 때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상당량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도 한 몫 했다는 주장도 있다.[12] 쌀의 대량 유출은 봉급이자 생계 수단으로 사용하는 구식 군인들에게 생계 위협으로 다가왔다. 또한 그 1개월 월급에도 겨와 모래를 섞었다는 사실은 횡령할 의도도, 실제적인 횡령도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13] 이게 얼마나 큰일이냐면, "급료를 제대로 줄 수도 없는 주제에 그나마 있던 돈까지 횡령했다" 라는 말이다. 이는 당시 조선 왕조의 재정 부족과 부정부패가 최악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을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든 대책 마련에 분주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앙 정규군에게 이런 대접을 하려고도 안 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이 2선급 준정규군 부대나 지방 정규군에게 일어났다면 군란이 일어나더라도 중앙군을 통해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가장 정부와 가까운 중앙 정규군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부대 소속 군인들도 등쳐먹을 정도로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여흥 민씨 척족)의 판단력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14]
차라리 정량보다 적게 줄지언정 돈이 없으니 이것밖에 줄 도리가 없다고 달래기라도 했다면 군인들도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게 아니고 없어서 못 주는 건데 뭐 어쩔 수 없지' 정도로 납득해서 끝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렇게 대책도 세우지 않고 군기를 흐트러지게 한 결과는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삼정의 문란에서 가장 문제가 많았던 환곡에서 수령과 아전들이 횡령을 했던 방법도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한가지, 13개월이나 급료를 주지 않았다면 구식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조선 후기 당시 무위영, 장어영의 구식 군인들은 군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급료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평소에는 농사나 막일 혹은 상업 등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한 달에 며칠 정도 근무하는 시스템이었으며, 따라서 급료의 지불 여부에 생계까지 달려있지는 않았다. 즉 100% 전업군인이 아니었음에도 꾸역꾸역 조정에 대한 충심 등의 사유로 남아 있던 병졸들에게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폭발해버린 셈이라 볼 수 있다.
2.4. 조정이 방관한 까닭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정은 이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간 관리자의 은폐 및 왜곡이 들어가긴커녕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까지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인지하고 있기도 했다.[15] 하지만 당시 고종과 조정은 책임자 처벌은 고사하고 그 책임자를 오히려 조사관으로 임명하는 비상식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이는 조선 왕조의 재정 부족으로 인한 행정력 한계와 고질적 부정부패에 따른 무능한 관료층에 따른 나비 효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은 구식 군인들의 반발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완벽히 인식할 수 있었지만, 고종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관료층은 바로 그 부패의 당사자인 민씨 일가들이었고, 이 문제를 위한 국가 재정 우선순위도 낮게 취급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구식 군인들의 소소한 반발을 측근 중 한명인 민겸호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린 채 뒷짐만 지는 형상으로 비쳐지기 되기 쉬웠다.
사건 조사 담당관 임명도 잘못한 게 사건을 맡은 민겸호는 구식 군인들의 봉급을 횡령하고 하인들을 시켜 구식 군인들 쌀가마니에 썩은 쌀+모래+겨를 섞어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처벌을 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사관으로 임명된 것이니 '네가 죽고 싶지 않다면 관계자인 네가 직접 그들을 입막음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셈이다. 만일 구식 군대의 불만을 사태의 장본인인 민겸호 대신 다른 조사관을 임명하여 어떻게든 무마시켰다면,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오히려 구식 군인들을 완전히 자기 편으로 만들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재정 부족과 고질적 부정부패는 민씨 일가와 고종의 잘못된 판단을 누적시키며 산더미처럼 일을 키워버렸다.
- 담당자가 된 민겸호는 그 일처리 하나 똑바로 못 하고 그저 무자비하고 비체계적으로 표면적 주동자만 잡아들여 그들에게 태형을 가해서 구식 군인의 분노만 키웠다.
- 상황의 심각성이 증대했음에도 분노한 병졸의 구심점이 되기 쉬운 대원군을 비롯한 위정척사파와의 접촉도 차단하는 시도도 하지 않고 안일한 대처만 했다.
- 무엇보다도 믿을 구석이라 볼 수 있는 고종의 친위대인 별기군은 고작 4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일종의 시범형 부대라 실질 전투력은 검증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구식군은 별기군에 비해 무장은 뒤쳐질지언정, 수적인 측면에서 우세였다. 만약 기관총이나 대포의 유무로 나뉘어진다면 모를까, 소총수준의 차이라면 작전과 전술로 충분히 극복가능한 문제다.[16]
- 민심또한 별기군에 비해 구식군에 훨씬 더 호의적이었기에 민중들이 구식군에 가담할 경우 안그래도 머릿수로 압도하던 구식군의 수가 더 불어날 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그리됐다.[17]거기에 사태가 벌어진 곳이 바로 수도 한성이다. 군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수도에 무장한 병력을 투입시킨다는 것이 바로 쿠데타이고, 후대의 역사로 알 수 있듯이 수도 서울로 병력 투입하는데 성공하여 서울을 장악한 모든 쿠데타는 반란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18]
- 병졸봉기는 성리학적 질서상 일어나서도 안되며, 너무나도 간단하게 조정의 권위로 누를 수 있어야 했다. 조선 왕조가 전조(고려)의 무신정권과 같은 사례를 철저히 교훈으로 삼아 또 다른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보여줬는데 [19] 그런데 이런 안전조치도 국왕과 세도정치 실권자가 동시에 사고를 친 끝에 병졸(=민중)이 팝박받는 사태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엔 두 차례의 성공한 반정 사례에 따라 '인륜과 백성을 등진 임금을 바로잡기 위해 재대로 된 정통성과 인덕을 가진 이를 임금으로 추대한다'라는 명분이 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해 버린다.
고종과 조정의 생각과는 달리 초동 조치가 실패한 뒤 폭발해 버린 대규모 병졸들이 정치적 구심점을 찾는 만약의 사태가 터질 경우, 조정 입장에선 이걸 막을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했다.[20] 결국 이런 고종과 조정의 고의성까지 의심될 정도로 어리석은 판단은 군란으로 터지고 말았다.
2.4.1. 의도적인 대처 가설
사건의 발단 자체가 하도 황당무계하고 비상식적이다 보니, 고종의 이런 안일한 대처가 무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그리했다는 주장이 나무위키에도 올라온 적이 있다.[21]척화비에서 볼 수 있듯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대단히 추진력이 높았고, 이를 실제로 수행하기 위해 대대적인 국방력 강화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당시 대대적인 국방력 강화를 통해 오군영의 입지와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곧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지지 기반 중 하나인 위정척사파 중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고종은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펼치면서 기존 5군영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고 엘리트로 구성된 별기군을 창설하며 군사적 주도권을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조선의 기존 군 체계를 갈아 엎었다. 이로 인해 군부에서 대원군의 영향력은 대폭 감소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기회만 있으면 권력을 다시 잡으려고 획책했다. 대표적인 예로 한참 뒤인 청일 전쟁 당시 평양 감사에게 청군을 지원해서 일본군과 싸우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대원군이었다.
그 말인즉슨 고종 입장에선 남아 있는 구식군인=언제든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잠재적 위험 인물인 대원군에게 들러붙을 가능성이 높은 불만많은 오합지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구식 군인들을 차별 대우하고 자신이 키운 별기군으로 대체하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2.4.2. 반론
위의 주장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 대원군은 능동적으로 고종에게 위협을 가할 만큼 권력이 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고종이 대원군 때문에 구식 군인들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일단 대원군이 물러난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권력 장악을 노렸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임오군란과 시기상 가장 가까운 대원군의 권력 장악 시도는 1881년, 즉 임오군란부터 1년 전에 있었던 이재선 추대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이재선과 기타 반민씨 세력이었으나, 사건을 획책한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고, 만약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대원군의 재집권이 가능했으리라고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근데 이 사건은 한편으론 대원군의 위세가 1881년에는 상당히 보잘것없었다는 증명도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재선 세력이 쿠데타에 동원하려고 했던 병력 수가 고작 1,000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임오군란에서 추가로 합류한 무장한 백성들만 10,000명에 달했다는 걸 생각하면 계획적인 쿠데타치고는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이고, 심지어 이 병력의 동원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계획된 병력을 다 동원해도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마당에 병력도 거의 모의지 않자 쿠데타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이재선과 주동자들은 이번엔 300명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병력으로 수도를 공격하자는 더더욱 무리수가 심한 계획을 세웠고[22] 결국 이마저도 병력을 포섭할 자금 부족으로 실패, 결국 쿠데타에 회의적인 내부 고발자 발생으로 이재선 추대 음모 세력들은 모조리 뿌리 뽑히게 된다.
당연한 소리지만, 고종이 의도적으로 구식 군인들을 홀대했다는 주장처럼 대원군이 구식 군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면 굳이 이런 황당무계한 음모를 획책했다가 남은 자기 세력마저 숙청당하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경군 내 자기편을 통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만이니까.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군 지휘 체계가 아예 붕괴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군대를 동원할 역량이 전혀 없었고, 고종이 임오군란에 했던 대처는 결과적으로 권력욕은 엄청나지만 세력이 없어서 실패하던 대원군에게 알아서 칼자루를 바친 짓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대원군이 실제로 구식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장악할 만한 현실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고종이 그런 의심을 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고종의 구식 군대 홀대는 과연 올바른 조치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진짜로 구식 군대가 위협 세력이라고 느꼈다면 일단 수뇌부를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장 해제를 시도하는 방식을 먼저 택해야 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 숙청을 진행할 때도 측근들하고 비밀리에 진행하였고 하나회 수뇌부만 기습적으로 제거하였다. 그리고 하나회와 관계가 있다고 해서 관련 부대를 무작정 해체하지는 않았다. 즉 하나회 수뇌부 장교들과 일반 병사들을 구분하면서 진행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종의 구식 군대 숙청 방식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위험한 방식을 선택했는데 먼저 구식 군대한테 증오의 대상으로 찍혀있던 민겸호를 공개적으로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숙청을 진행하였고 최소한 위험을 방지할 조건이라 볼 수 있는 무기를 회수하는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이는 총은 총대로 그대로 들려놓고 이렇게 군인들을 가지고 놀았다면 이건 불온 세력을 견제하는 게 아니라, 멀쩡한 군인들마저 불온 세력으로 만드는 짓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 고종의 의도가 진짜 이것이었다면 오히려 더더욱 멍청이라는 증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조선이 어떻게 건국 됐는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을미사변 직전에도 고종은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선군 훈련대를 일방적으로 해산한다는 통지를 했을 뿐이지 훈련대 해체로 불만이 쌓여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훈련대 장교 이두황이나 우범선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훈련대를 사실상 배후 조종하는 일본인 교관들마저 구금하는 조치를 하지 않는 바람에 그들이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일본 공사관 측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로 인해 고종은 자신의 부인을 참혹하게 잃어버리고, 아관파천이라는 조선에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이자 결정타를 안기게 된다.[23]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종의 군대에 대한 장악력과 일처리는 너무나 허술하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다. 고의성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고의적이지 않고서야 군권에 관한 문제를 군주가 이런 식으로 일처리 할 수가 없다 라는 상식적인 추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4]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였어도 두고두고 욕먹었을 일처리를, 하루하루가 천지개벽하며 국가의 명운과 존망이 걸린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보여준 것도 큰 문제였다. 막말로 최선의 선택만을 골라도 국가의 생존을 장담 할 수 없는 시대에 최악의 선택을 연달아 고르며 어처구니 없는 대참사를 낸 것이다. 그것도 국가 최후의 보루이자 카드인 군대를 두고 말이다.[25]
3. 전개
3.1. 군란(軍亂)의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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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사관 습격 |
이에 구식 계통 군인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의 주도로 동조하던 한양 주변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여 약탈하고선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26] 흥선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일단 그들을 달래주고는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며,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위장시키고 비밀리에 김춘영의 아버지인 김장손, 그의 동생 유춘만과 함께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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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시위대 |
김장손이 이끄는 제1대가 포도청과 관가( 의금부)를 습격하여 감옥을 부수고 그곳에 투옥 되었던 김춘영, 유복만, 그외 군인들과 위정척사파 및 흥선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죄수들을 전원 석방시켰고 유춘만이 이끄는 제2대는 중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하고 파괴하였다. 모두 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같은시각 경기도로 남하하던 허욱의 제3대는 경기 감영을 지키던 감영군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틈을 타 감영 전체를 장악하여 무기고를 부순 후, 그들과 합세한 10,000명의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주(駐)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레이조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해서 살해했으며,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27]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 싶었다.
3.2. 반군 궁궐 기습 및 중전의 피신
그러나 구식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았고, 다음 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백성들과 합세한 뒤 민씨 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궁궐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중전( 명성황후)을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이최응)과 이조참의 겸 호군인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서,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이때 백성들이 임오군란에 합류했던 것은 민씨 세력과 명성황후가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그들과 똑같은 만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 또한 구식 군인들처럼 민씨 일파에 대한 증오감과 원한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는데, 궁성과 궁궐에서는 이를 막아서거나 저지하려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없었다.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의 거칠 것 따위는 없었으며, 궁궐 안까지 들어와 그 원흉이었던 민겸호[28]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붙잡아서 살해했으며, 사실상 모든 일의 근원이라고 할만한 작자인 중전 민씨를 찾아내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군졸들은 먼저 교동(校洞)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그를 죽였다. 군병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장창(長槍)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 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민두호(閔斗鎬)·민영익(閔泳翊)·민치서(閔致序)·민치상(閔致庠)·민영목(閔泳穆)·민창식(閔昌植)은 종루(鐘樓)에 끌려나와 난자질당하여 죽었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申觀浩)·한성근(韓聖根)·윤흥렬(尹興烈)·홍완(洪玩)·이태응(李泰膺)·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中人通倭者:일어 통역관)의 집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홍완은 포박되어 죽이려 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 밖에도 민가(閔家)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 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피살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저상일월(渚上日月)[29], 1882년(壬午年, 고종 19년) 6월 10일
저상일월(渚上日月)[29], 1882년(壬午年, 고종 19년) 6월 10일
이때 중전 민씨( 명성황후)는 궁녀 옷을 입고서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 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 동생인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30]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3.3. 대원군의 섭정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결국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을 알현하여 사태에 대해 논의한다. 고종은 대원군의 요구대로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음으로써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대원군이 입궐했을 때 만세를 불렀고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어 해산하여 귀가시킨다.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중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파면하면서 그들을 귀양 보내거나 처벌했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 역시 전부 지급했으며 구식 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31]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중전의 시신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중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중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3.3.1. 대원군의 개입 시점
사건의 전개 및 수습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의혹이 있다. 우선 구식 군대 장병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자체는 봉급 문제와 민겸호 등의 잘못된 일 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대원군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다소 의심스럽다. 대원군의 정계 복귀는 봉기를 일으킨 군민들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때 군민들이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이니 일을 해결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에 먼저 자발적으로 대원군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마침 기회를 잡으려던 대원군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자신에게 오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32]3.4. 청나라 군대의 파병과 진압
여기까지만 했어도 민란이 원인이 된 국내 정변 수준에서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 혹은 중전 민씨가(누가 청병했는지는 후술)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톈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한다. 대원군은 청군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잡은 그날에 톈진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중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주둔한 왕십리와 이태원동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 반란을 주도한 11명이 처형당한다.[33]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 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對)백성 사과문[34]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3.4.1. 파병 요청자에 대해
일단은, 군란의 과정에서 중전 민씨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교과서 내용이자 학계의 다수설이었다.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면서 당시 중전의 행동반경이 알려졌다. #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전은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한성, 경기도, 충청도를 거치며 이동하였다. 심지어 이 와중에 인후염과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자세한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창덕궁 →
한성부 관훈동 →
경기도
광주부 적취리[35]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36] → 경기도
이천군 읍내 → 경기도
여주목 단현리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장호원)[37] → 충청도 충주목 노은면[38]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39]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안성군 읍내 → 경기도
양지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포곡면 신원리 → 창덕궁 환궁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까지 동행하여
양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
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 물장수(
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때의 공로로 천거된 인물이다.흔히 청군은 중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라며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말라리아로 고생하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기록에도 없다. 그래서 소거법으로 따지고 보면 고종밖에 남지 않는데, 따라서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보기도 하나, 이 역시 물증은 없다. 그러나 파병은 예로부터 군 통수권자의 고유 권한이며, 군 통수권자에게 그만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국가원수 정도뿐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인 만큼 적어도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엔 벌써 고종에 의해 영선사로 발탁되어, 청에 체류 중이었다.
반대로 청이 조선 국내의 누군가로부터 원병 요청을 받고 파병한 것이 아니라 미리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애초에 일본과 마찬가지로 청도 조선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며[40]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감지, 상해에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여차하면 인천으로 투입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김윤식이나 어윤중은 청이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파악한 상태에서 원병 파병을 타진하는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뭐하는 사람이냐, 그 사람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등의 문제에 대한 청으로부터의 자문 요구에 응했던 정도였다는 것.
3.5. 일관파천
무장한 난병들이 창덕궁(昌德宮)에 난입하여 고종이 보는 앞에서 탐관오리로 지목된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주조선 일본공사에게 "조선의 군병들이 또다시 난동을 부릴 경우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고 일관파천(日館播遷)을 타진해온다. 일본공사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이후 군란이 진압되어 파천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4. 향후 국제 정세에 끼친 영향
이후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사변,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지라 임오군란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걷는 회생 불가의 상태임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41]그래서 한국사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사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이다.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된 청의 내정간섭은 조선의 근대화를 사사건건 간섭하고 방해하였고, 이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노력한 전조(고려)에서 벌어진 무신정권의 재림을 막으려는 시도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임오군란은 실패했지만 청나라 군인 원세개가 와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한국사 최초로 외국인을 수장으로 하는 무신정권이 세워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전에 무신정권의 지도자들은 그래도 같은 한국인들이어서 왕권만 유린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원세개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기존에 왕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넘어서 주권마저 유린당해야했다.
시민 혁명 등 현대의 비슷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는데, 민주주의 기반의 현대 국가와는 달리 이 당시 조선은 명실상부한 '전제 왕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민주 국가와 달리 왕조의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조국가에서 민란으로 정권이 위협받는 것은 국가 멸망의 징조로 여겨졌고, 실제로 말기에 들어 민란으로 붕괴한 역사 속의 왕조 국가는 매우 많다.[42] 만약 외세의 개입과 세계 열강이라는 요소가 없었더라도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뒤이은 민란과 혁명으로 스스로 무너졌을 확률이 상당했다.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군인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 자체가 이 당시에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는 포템킨 반란처럼 변방에 배치된 병사, 이민족 출신의 외인부대 같이 처우가 안 좋을 수밖에 없는 병사들한테서 일어나지,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이 그런 일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달리 말하면 당시 조선은 그나마 가장 대우가 좋은 중앙군마저 심각한 처우에 시달렸다는 뜻이다. 또한 전제왕조에서 중앙군은 왕권의 목숨줄과 같기 때문에 반란이나 혁명을 진압하는 세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앙군에 의해 궁궐이 습격당하고 집권 세력이 바뀐다는 것은, 변방 같은 곳의 국방과 치안은 안 봐도 뻔하다는 말이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할 군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43] 임오군란은 우발적인 폭동이, 그 주체가 중앙군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공한 내란으로 발전한 케이스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국가가 제대로 된 나라일리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열강들에게는 임오군란이 일종의 '조선을 노려도 좋다'는 뜻의 청신호로 여겨졌다. 우선 각국 지도층들에게 있어 어떠한 나라의 내부 상황이나 속사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을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대중에게 공개된 것으로 당대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밀로 처리되며, 스파이나 간첩을 통해 알아내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다. 조선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의외로 열강의 식민 침투를 막아낼 저력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와중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 엉뚱한 제3국이 가장 큰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즉, 세계 열강 입장에서도 식민지화는 그냥 대충 깃발만 꼽으면 되는 행위는 아니었고 신중한 포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오군란 같은 사건은 기밀로 감출 수 없는 것이고 외국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는 허약한 실정을 파악한 세계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위한 개항 요구가 빗발쳤고 조로수호통상조약 같이 서양 열강은 물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물포 조약 등 청나라와 일본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포석을 본격적으로 두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을 노리고 수많은 열강들이 외교전[44]과 두 차례의 전쟁[45]까지 불사한 끝에 최종적으론 일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니, 임오군란이 '조선 식민지화'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이러한 비슷한 사례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아편 전쟁을 예시로 들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직후 '민중에 의해 국왕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혼란스러운 프랑스로부터 이권을 나눠 먹기 위해 프랑스 혁명 전쟁이 벌어졌다.[46] 이미 러일전쟁에서 패전하며 휘청거리던 러시아 제국은 1차대전에서 수백만의 사망자를 내며 결국 혁명으로 붕괴 하였고 패망 했다. 이후 볼셰비키가 정국을 잡으며 반혁명 백군과의 내전에 돌입하자 독일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서 이권을 얻어내기 위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하여 어마어마한 이권을 뜯어 냈지만 독일도 이어서 패망하자 어제까지 동지였던 협상국은 공산주의의 전파를 막기 위해 백군을 지원 했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참패로 끝나자 간을 보던 많은 서양 열강들이 본격적인 이권 침투에 나섰다.
위 사건들이 임오군란과 달랐던 점은 다소 손해는 봤지만 조선과 달리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진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혁명은 터졌어도 유럽의 제일가는 강대국이었기에 오히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나 불리한 상황을 딛고 승리해 열강들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오히려 잠시나마 유럽 대륙을 제패하는데 성공했다.[47] 러시아 역시 1차대전 이상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반혁명파와 간섭군을 전부 물리쳐서 살아남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절반을 빼앗기고 전간기 내내 고립 되긴 했지만, 2차대전에서 소련의 승전으로 그 대부분을 되찾게 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참패로 열강에게 이권은 상당수 빼앗겼지만 대륙국가인 중국은 열강 하나가 단독으로 먹기에는 너무 거대했으며, 갈라먹으려고 해도 사람 수가 너무 많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임오군란 이후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 빈약한 기반을 가졌던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1891년 기준 청 거류민은 2천 명, 일 거류민은 8,600여 명에 육박했다.[48]
또한 기존 중앙군이 임오군란으로 해체나 다름없는 상황이 놓이자 신식군대로 재편하게 되는데[49] 문제는 청과 일본이 조선군의 재건을 도와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식군대에 본인들의 교관을 파견하여 군대를 장악해버렸다. 이는 최악의 나비효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먼저 신식군대는 청을 지지하는 집단 일본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나누어져 청일전쟁때 같은 조선군인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총질을 해댔으며, 일본의 영향력에 있었던 조선군 훈련대는 일본인 교관들과 친일파 군장교들에 의해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가담하게 된다.
고려의 무신정변과 비교해보면 임오군란은 주변정세 운이 따라주지 않은 조선판 언럭키 무신정변이었던 셈이다. 무신정변이 발생했을 때 중국 대륙은 금나라와 남송이 서로 대륙을 반분한 상태에서 대치하는 형국이었고 한반도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형국이었다. 또한 금나라 자체가 주변국에 대한 통제력이 미약하고 내부에서 멸망한 요나라의 잔당들이 반기를 드는 등 개입하기가 힘들었으며, 일본도 무사들이 궐기하고 나중에 겐페이 합전까지 일어나는등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주변국들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때 청나라는 대륙을 통일한 상태였고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내부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으며,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으로 국력이 강해진 상태에다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같은 내부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 둘 다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유가 생겼으며, 특히 일본은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준 덕분에 개입할 명분까지도 충분한 상태였다.
다만 임오군란이 부정적인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위정척사파가 조정에서 쓸려나가고 개화파가 그 자리를 채웠다. 또한 전근대적인 물류체계의 한계도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로 꼽혔기에 개화정책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제공해준다. 즉 임오군란은 개화파의 대두와 개화정책을 시작하게 해준 사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2년 후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이런 긍정적인 영향마저 소멸하고 말았던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5. 매체에서의 등장 및 기타
김주영의 대하 소설 객주 8권부터 자세히 묘사되며, 이 작품을 드라마화한 장사의 신 - 객주 2015와 명성황후, 조선 총잡이에서도 그려졌다.이터널시티의 2005년 캠페인의 주요 섹션 중 하나로 등장한다. 패러렐 월드의 일이고 1876년에 이미 한번 역사가 바뀌었으므로 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 차이점.
찬란한 여명이 군란 직전의 상황과 청군의 군란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이태원, 왕십리 전투 등까지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원 역사대로 벌어졌으나 이후 전개는 주인공의 개입으로 완전히 바뀌어 왕비의 교체라는 결과를 낳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아래에서의 봉기로 지배층에 해당하는 인사를 교체한 사실상의 혁명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과 러시아로 망명해서 경험을 쌓고 세력을 모으고 있던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조선 정계에 개입하게 된다.
2006년 SBS 예능 일요일이 좋다 - X맨에서, 개그맨 박명수가 지상렬과 당연하지 게임 중, 임오군란이 먼저야? 신미양요가 먼저야? 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있다.
tv프로그램 천일야사 205회에선 원역사와 같이 흘러가나 마지막 부분에 반란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이 명성왕후 앞으로 끌려온다. 명성왕후의 왜 그랬냐는 질문에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무섭게 쏘아보며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되묻자 명성왕후는 듣자하니 봉급이 밀렸다지, 겨우 그런 일로 내 오라비를 살해하고 나라의 국모인 날 잡으려해?라고 하자 대장은 껄껄거리며 이 나라도 결국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고 조롱한다. 이후는 역사대로 모두 처형당한다.
웹툰 참교육 10화에서 나화진이 구운하이텍고 일진들을 참교육시키고 성적순에 따라 학교 급식을 차별하자 분노한 일진 한 명이 임오군란이 어떻게 일어난지 모르냐며 나화진에게 싸움을 건다. 그러자 나화진은 너네 입에서 임오군란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드디어 교육자로서 가르친 보람이 난다고 기뻐하며 상으로 개기는 일진들 엉덩이 한 대씩만 때렸다(...)[50]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알바하는 일진들이 "나라 지키는 군인들이 봉급 좀 못 받았다고 반란까지 일으키냐? 군기가 빠졌네"라고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정약용이 두 주인공에게 원 역사에서 고종이 했던 짓을 듣고는 군인들의 봉급을 1년 넘게 밀리다니 사람의 자격도 없으며, 나라를 아예 들어다 바쳤다고 평가하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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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년 간 유배 생활 후 귀국
[2]
#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위안스카이, 마젠창,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등 총독과 정치·외교·군사 고문을 파견하고, 영약삼단으로 조선의 외교권에 개입하고, 군대를 조선에 주둔 시키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법률적으로는 조선의 속방 지위를 못박고, 경제적으로는 청국 상인의 조선 진출을 가능케 하여 경제를 종속화 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즉 기존의
조공책봉관계를 근대적
종속관계로 개변하고자
아편전쟁 이후 계획해 오던 조선의 속방화를 본격화 한 것. 이러한 상태는
1882년부터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까지 지속되게 된다. 실제로 청은 해당 기간 동안 유럽 열강과의 외교 무대에서 조선을 청의 식민지로 날조하여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동양의 전통적인 외교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서구의 열강들도 청의 날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이 청의 식민지라는 왜곡된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3]
청상은 수는 적었지만 특유의 단결력과 자본력으로 급성장했다. 한성,
강경은 물론 어느 벽지의 장터에서도 청상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그러나 정작 개성 이북은 연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송상의 영향력으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내륙에서는 조선 객주의 중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적인 조선 상업의 몰락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점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육의전이나, 인천 개항장의 조선 객주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
[4]
「고궁문화」, 국립고궁박물관, p. 27. "황태자비 민씨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이며 임오년(1882년) 왕세자 순종과 가례를 올렸다. 모후인 중전 민씨가 생존 시에 거행된 대혼(大婚)으로서 고종은 신사년(1881년)에 가례에 필요한 혼수 직물을 동경 직물 회사에 주문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가례는 임오년 『嘉禮都監儀軌』와 상당한 수량의 의대 기록이 있는 <궁중발기>로 남아있다."
[5]
대동법 시행에 따라 쌀·포(布)·전(錢) 등을 출납했던 관청.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
[6]
재물을 늘린다는 뜻.
[7]
2년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 개화파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에 죄책감을 느끼고 며느리, 손자와 함께 음독 자살한다.
[8]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호궤(犒饋)라고 한다. 건호궤란 음식 대신 돈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뜻한다.
[9]
군졸들이 소속된 해당 병영
[10]
추가적인 조치로는 왕실의
내탕금이라도 풀어서 조금이라도 급료를 주거나, 혹은 위에 실록 내용에 나온 것처럼 분노한 병사들을 달래기 위한 호궤만이라도 재대로 해주었다면 군란이라는 막장까지는 안 갔을 것이고 덤으로 2영의 군인들의 충성심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세자의 가례에 쓴 엄청난 돈은 아끼지 않으면서 중앙군에게는 이런 대우나 하고 있었던 게 당시 조선의 왕실과 조정이었다.
[11]
경우에 따라서는 이 대목이 사건이 터진 이후 민망하니까 변명으로 붙여둔 기록이란 시각도 있다.
[12]
이는 논란 여지가 있다. 1881년 조선이 일본으로 수출한 쌀은 45077석이고, 임오군란이 터진 1882년 수출된 쌀은 2721석에 불과하다. 조선 전체의 쌀 생산량을 고려하면 대일수출과 상관없이 당시 조선 정부는 정말 쌀이 없었다. 참고로 4년 뒤인 1886년에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246,202담의 쌀을 수입한다 (4담은 1석)
[13]
앞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명성황후는 무속 행사에 과다한 비용을 지출하였고, 병판 민겸호는 민씨 척족의 중심으로 역시나 여러 부정을 저질렀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대원군이 개혁해 보려고 했으나 대원군 자신이 오히려 경복궁 재건과 무분별한
당백전 주조 등으로 역효과를 내면서 가뜩이나 악화시키기 시작했던 왕실 재정을 민씨 척족과 국왕 고종이 전부 까먹으면서 고갈시키기만 할 뿐,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즉, 왕실이 근검절약이라도 했다면 불만을 가졌어도 변호해 줄 건덕지라도 있었지만, 그것이 아니었으니 폭발하는 게 당연지사.
[14]
전세계 국가장 막장의 톱을 달리는
북한도
호위사령부만큼은 최상위 대우를 해주며 북한에서 가장 미녀들이 모인
기쁨조 출신과 결혼을 시켜주는등 자신들의 안위가 중앙군에 달렸다는건 인식하고 있다.
[15]
고종이 그동안 쟤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은 게 용하다고까지 말했기 때문에 몰랐을 수가 없다.
[16]
창과 칼로 무장한 줄루족이 이산들와나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세계최정예 레드코트를 상대로 지형지물과 전략전술, 숫적 우위(대략 5배)를 이용하여 레드코트를 전멸시켰는데 이 때가 1879년, 임오군란 시점으로 고작 3년전 일이다. 또한 상술했다시피 별기군의 실전경험은 전무했다는 점도 고려했어야 한다. 병인양요당시 강화도 내에서 프랑스군과 조선군이 비슷한 병력들로 격돌했을때 조선군은 화승총이었음에도 불구 지리적 우위+ 대포와 함포 지원 없음+ 실전경험이 있는 호랑이잡는함경도 포수들로 비슷한 교전비를 내며 격퇴한바 있다.
[17]
대략 만 여명의 무장한 백성들이 구식군에 가담했는데, 별기군의 수는 고작 400여 명 남짓. 백성들만 따져도 숫적으로 무려 25배 차이인데, 사실 이정도면 나폴레옹 말마따나 전략전술도 필요없는 수준이다. 더구다나 사태가 발생한 곳도 한성이 조선 최대의 도시라는 것도 별기군에게는 불리했고 구식군에게는 유리한 점이었다. 시민들의 협조는 둘째치고,
시가전은 특성상 막강한 화력과 탁월한 숙련도, 튼튼한 조직력이 물량에 상당부분 상쇄되며 피해를 강요 당하는 전장이다. 별기군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 독일군, 소련군, 이스라엘군도 고작 민병대 내지 게릴라들과의 시가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는데 하물며...
[18]
이괄의 난은 예외라면 예외지만 그래도 이때는 왕을 위시로한 수뇌부를 놓쳤고, 그렇기에 패배했으므로 적절한 비교대상은 아니다. 막말로 5.16과 12.12 군사반란 사태도 정부가 바보처럼 손 놓고 무력하게 당하는 대신, 헌법에 보장된 권한으로 사태 수습 및 진압에 나섰으면 꼼짝없이 실패했을거라고 보는게 학계의 중론이다.
[19]
대표적으로 고려 왕조에서는 일시적으로 실시했지만, 조선 왕조에선 정식 과거제의 일부로 실행된 무과. 조선 왕조는 태조 이성계가 본인부터 무장 출신이라서 그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 건국 직후 혼란이 수습되자 마자 정식으로 무과를 실시해서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과거제의 일부로 계속 실시했다. 또한 무관들의 품계를 올려서 문관들과 같은 대우를 해줬으며, 그래도 두려움을 느꼈는지 군부대에 충성파 장교들을 심기도 했다. 이는 중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제외하면 조선 왕조가 군사 반란에 고려 왕조와 달리 안전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20]
정치적 구심점이 흥선대원군이라 그렇지, 만약 전혀 다른 제 3자였다면 조선 왕조는 그 날로 망하던지 아니면 사실상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조선 왕조가 전조(고려)의 사례를 철저히 교훈으로 삼아
무신정권의 재림을 막아보려는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임오군란은 실패로 끝났어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중국군대에 의해 청나라 군인
원세개에게 내정간섭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군인(무신) 출신에 의한 지배가 무신정권의 성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청나라 군인 원세개가 새로운 무신정권을 세운거나 다름없다. 또한 최초의 외국인 출신 무신정권이기도 하다.
[21]
독자연구는 아니며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임오군란의 배후를 흥선대원군으로 지목하는 등의 정치척 연계 주장은 많았다.
[22]
강화도 주둔 병력이 과연 쿠데타 측의 명령을 들을지도 의문이고, 또 강화도 점거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당연히 경군 쪽에서 대비할 시간이 생겨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23]
결과야 어찌됐건 일국의 군주가 자기 마누라와 궁궐 하나 제대로 못 지키고 타국의 영토에서 망명생활을 한 건데 국가적 위신이나 왕가의 정통성과 통치능력이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24]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만 봐도 군대에 보급도 제대로 못해 줄 정도로 엉망으로 나라를 굴리고 있지만, 군대가 자신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는 커녕 개길 생각도 못하게 휘어잡고 있다. 이는 제아무리 부패하고 사악한 북한 수뇌부라 할 지라도 건드리면 될 것과 안 될 것, 정권의 안위가 어디에 달렸는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25]
대략 2천여년 전에 쓰인
육도삼략에서도 한 번 준 지휘권과 권위는 회수하기 쉽지 않으며, 군대를 해산하고 장수를 조정으로 불러들일때가 바로 나라의 보존과 멸망이 판가름나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일침한 바 있다.
[26]
알다시피 조선 말기 당시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횡포가 매우 심했는데, 중전 민씨와 여흥 민씨 세력이 이를 부추기고 똑같이 일삼았기 때문이다.
[27]
일본 공사관 직원 3명이 이들에게 살해당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서 남은 직원들과 함께 인천으로 도주했다. 인천에서도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아 호위하던 일본 경찰관 6명이 피살을 당했고 공사관으로 피신하던 일본 유학생 3명 역시 시위대들에 의해 피살을 당한 것이다.
[28]
민영환의 아버지로 사건의 계기를 제공한 주제에 살아남기 위해
내시로 위장하고 궁궐에서 튀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녔던 탓에(...) 발각당해서 궁궐에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뻔뻔하게도 그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입궁하는 걸 보고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대원군은 "나 같은 늙은이를 우습게 보던 분이 이제 와서 그 늙은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냐"는 말로 냉소를 비치면서 거절했으며, 오히려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민겸호를 군말 없이 넘겨줬다. 결국 민겸호는 그를 몹시도 증오하는 구식 군인들과 백성들한테 잔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사실 위에서 보듯 군란을 일으키게 한 원흉이었던 만큼 맞아 죽어도 싼 인물이었다.
군납비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량을 횡령하는 자는 최소한
목을 잘라서 죽이는 형벌로 응징하는 게 관례였을 정도로 크나큰 문제였다. 그래서 그걸 처음으로 어긴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그렇게 당대에서나 지금에서나 욕을 먹는 것이다. 설사 대원군이 민겸호를 측은히 여겨 살려주고 싶었더라도 살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겸호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자 총책임자였다. 군병들의 추대를 받은 대원군이 민겸호를 살려주려 했다간 군병들의 지지를 잃음은 물론 격앙된 군중에 의해 자기 자신도 해를 입을 수 있었다.
[29]
조선시대 함양박씨(咸陽朴氏) 정랑공파(正郞公派) 문중의 박한광(朴漢光), 박득영(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이렇게 6대가 1834년(순조 34)부터 1974년까지 약 140년간 대를 이어가면서 쓴 일기. 총 20책이며,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咸陽朴氏 正郞公派 門中 典籍)으로 포함되어 대한민국 보물 제10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기 작성자의 개인적인 신변에서 일어난 사실에서부터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 당시 한말의 격변하고 있는 국내 상황, 나아가 국외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순조에서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말 격변기 당시 병인양요, 신미양요,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 경술국치 등에 대한 내용이 매우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서 근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0]
애초에 구식 군인들의 목적은 명성황후와 그 지지 세력의 인물들을 처단하는 것이지, 궁녀나 내시들을 주살(죄를 물어서 죽임)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에 속아넘어가서 목적 달성을 못 하게 되었지만(그래도 민씨 일파 인물들을 살해하긴 했다. 안 죽은 이들도 없잖아 있었고 주요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가 생존해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명성황후의 지지자가 아닌 이상 민씨 세력 제거가 아닌 살인을 할 이유가 없어서 죽이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런 임오군란과는 달리
을미사변의 경우 일본은 궁녀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궁녀로 변장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정말 중전 민씨가 구식 군인들에게 피살되었다면 이후의 역사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모르는 일.
[31]
이때 민씨 일가가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여 새로운 화폐를 찍어내어 경제를 혼란스럽게 했는데 대원군은 새로운 화폐 발행을 전면 폐지시켰다.
[32]
다만 임금이었던 고종의 실정책임을 중전에게 물었던 만큼 이들로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 위하여서는 대원군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대원군 역시 재집권을 하기 위한 명목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기에 군란 중간에 지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이러한 군란을 대원군이 계획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33]
9명은 참수로 끝났으나 군인들의 지도자였고 장교 계급에 있었던 김장손과 유복만은 반란의 핵심 주동자라며 참수당한 뒤 시신까지 훼손되는 조선식 능지처참을 받았다.
[34]
전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드물게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 수록했다.
[35]
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노상동과 적취리가 합쳐져서 상적동이 되었다.
[36]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
[37]
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성당 (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부근. 감곡성당은 군란 14년 뒤인
1896년 조선 땅에서 18번째, 충북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다. 당시에는 현재 이천시에 있는 장호원까지 모두 충주에 속했다.
[38]
현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39]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쳐져서 생긴게 양평군이고, 상동면은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
[40]
청으로서는 베트남에 프랑스 세력이 진출해 있고 일본이나 다른 열강들이 은근히 조선을 노리고 있는 상태에서 청의 입장에서 코앞에 위치해 있는 조선과 베트남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에서 떨어뜨리게 되는 상황은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도 조선에 대한 첩보 활동은 필수적이었다. 말하자면
순망치한.
[41]
유능한 군 지휘부나 왕족에 의해 일어난
정변도 아니고, 정부가 봉급도 제대로 안 줘서
중앙의 하급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들고일어난 '민란'에 정권이 뒤바뀔 정도로 중앙 정부가 막장 상태가 되었음이 만천하에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42]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
홍건적,
이자성의 난,
신해혁명 등 중국의 많은 통일 제국들이 이와 같이 민란으로 무너졌다.
[43]
이런 추태는 동학봉기 당시에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모양새만이라도 신식군대를 갖추게 된 조선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에게 번번히 패배해는 추태를 보여주게 된다.
[44]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영국과 미국은 각각 한반도 식민지화를 포기하고 일본의 지배를 인정했다.
[4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청나라와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손을 뗐다.
[46]
그 외에 프랑스 혁명 이념(자유, 평등, 박애)이 유럽 각국으로 퍼지는 걸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47]
다만 이후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패망과 함께 그 때까지 점령한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이후의 영토가 현재까지 이어진다.
[48]
청상은 수는 적었지만 특유의 단결력과 자본력으로 급성장했다. 한성,
강경은 물론 어느 벽지의 장터에서도 청상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그러나 정작 청나라와 가까운 개성 이북은 연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송상의 영향력으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내륙에서는 조선 객주의 중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적인 조선 상업의 몰락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점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종로의 육의전이나, 인천 개항장의 조선 객주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
[49]
기존 군대와 별기군과의 차별 문제도 있어 별기군을 아예 없애버리고 구식 군대만 남은 채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50]
9화에서 일진들 쪽지 시험을 봤는데 시험 난이도가 초등학생도 풀 수 있을 정도로 유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찐따 취급이나 받던 학생 빼고는 전부 처참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찐따 취급 받은 학생을 나화진이 학생들의 왕(...)으로 임명했다. 참고로 시험 문제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운봉공고 기초학력평가 문제를 패러디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