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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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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967년 | ||
폴란드 영지 포즈난 | |||
사망 | 1025년 6월 17일 (향년 57~58세) | ||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992년 5월 25일 ~ 1025년 4월 18일 | |||
보헤미아 공작 | |||
1003년 ~ 1004년 | |||
폴란드 국왕 | |||
1025년 4월 18일 ~ 1025년 6월 1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에슈코 1세 어머니: 보헤미아의 두브라우카 계모: 할덴슬레벤의 오다 |
|
배우자 |
릭다그의 딸 (
무효화) 헝가리의 유디트 ( 사망 또는 무효화) 루사티아의 엠닐다 ( 사망) 메이센의 오다 |
||
자녀 | 3남 4녀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보편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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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국왕.2. 생애
967년경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두브라우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블라디보이, 이복형제로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가 있었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미에슈코와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가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이자, 두 사람을 크베들린부르크에 소환해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볼레스와프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984년 아버지의 주선에 따라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2]과 결혼했다. 그러다 985년 릭다그가 사망하자 아내와 이혼했고, 986년에서 987년 사이에 헝가리 출신의 여인과 재혼했다. 이 여인의 실제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15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디우고시(Jan Długosz)에 따르면,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 유디트라고 한다. 반면 브와제이 슬리윈스키(Błażej Śliwiński, 1954~) 등 현대의 일부 폴란드 및 헝가리 역사가들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이라고 한다. 이 여인은 987~989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1세와 이혼하거나 사망했고, 987~989년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출신의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 엠닐다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990년경, 아버지에 의해 마워폴스카(Małopolska)의 영주로 선임되었다. 991년, 미에슈코 1세는 다고메 유덱스(Dagome Iudex)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해 폴란드 대공국의 국경을 밝히면서, 세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 람베르트에게 분할 상속하겠다고 밝혔다. 992년 5월 25일 미에슈코 1세가 포즈난에서 사망한 뒤, 이 세 아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얼마 후 볼레스와프 1세가 정변을 일으켜 이복형제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계모인 할덴슬레벤의 오다를 몰아내고 폴란드의 유일한 대공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기독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고대 프로이센에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997년, 프라하에서 추방된 주교 보이치에흐 스와니코비치를 프로이센으로 보내 선교 사업을 벌이게 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23일에 보이치에흐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수급이 베어져 기둥에 박히자, 그는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금을 원주민들에게 주고 보이치에흐의 유해를 받은 뒤 그니에즈노 교회에 안치했다. 999년 보이치에흐의 시성식이 거행되었고, 그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그니에즈노 대교구가 독일 대도시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100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그니에즈노에 방문해 성 아달베르트의 무덤을 순례했다. 이후에 열린 그니에즈노 회의에서, 그니에즈노에 대교구를 세우고 크라쿠프, 코워브제크, 브로츠와프에 주교구를 둔 독립된 폴람드 교회 조직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족의 형제로 인정받았고, 오토 3세와 선물을 교환했다. 학계에서는 오토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는 폴란드를 붙들어두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오토 3세가 볼레스와프를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에 이어 제국의 두번째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나중에 에크하르트 1세가 살해되자 볼레스와프가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고자 전쟁을 단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러나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1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샤반느의 아데마르에 따르면, 오토 3세와 볼레스와프는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황금 왕좌를 발견했다고 한다.
1002년, 오토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 차기 황제를 놓고 내전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는 이 기회를 틈타 마이센, 루사티아, 밀스코 일대를 석권했다.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2세는 밀스코와 루사티아의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마이센을 볼라스와프와 동맹을 맺은 마이센 변경백 군젤린에게 넘겨줬다. 이후 남동생 블라디보이가 하인리히 2세로부터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받도록 주선했다. 1003년 블라디보이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망하자, 일전에 보헤미아에서 폭정을 일삼다가 귀족들에게 쫓겨났던 볼레슬라프 3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세우도록 해줬다.
그러나 볼레슬라프 3세의 통치는 극도로 잔인했고, 자신을 세워준 그의 정책에 계속 어긋났다. 이에 그는 볼레슬라프 3세를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후 알려지지 않은 곳에 죽을 때까지 가두고 프라하에 입성한 후 보헤미아 공작을 자처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하인리히 2세에게 개입을 요청했고,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루사티아, 밀스코 등을 빼앗아간 볼레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하인리히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폴란드 침공을 단행하기로 했다.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를 침공해 보헤미아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보헤미아를 제국의 영역에 귀속시켰다. 뒤이어 1005년 밀스코를 장악했고, 포즈난으로 진군해 볼레스와프를 압박했다. 볼레스와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밀스코와 루사티아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2세가 다른 곳에 신경 쓰던 1007년, 볼레스와프는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을 공격해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바우첸을 공략했다. 1010년 하인리히 2세가 반격을 가했지만 실레시아 일부를 파괴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12년, 볼레스와프 1세와 하인리히 2세는 5년간의 평화 협약을 맺었고,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최종 합의를 맺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밀스코와 루사티아를 봉토로 획득하는 대신 하인리히 2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군대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1015년, 볼레스와프 1세가 지원군을 보내주기를 거부하고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와 함께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볼레스와프 1세는 크누트 대왕의 잉글랜드 정복을 지원했는데, 폴란드 용병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017년, 하인리히 2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볼레스와프 1세를 다시 공격했지만 역시 성과가 없었다. 1018년, 양자는 바우첸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1세는 미스코와 루사티아를 더 이상 황제에게 부여받은 봉토가 아닌 자신의 재산으로 삼을 수 있었고, 키예프를 향한 원정을 벌일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하인리히 2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1018년, 볼레스와프 1세는 사위인 스뱌토폴크 1세를 키예프 대공에 복위시키기 위해 키예프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페체네그족과 연합한 뒤 부그 강 부근에서 야로슬라프 1세의 군대와 대치했다. 야로슬라프 1세가 진을 치고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그는 강을 몰래 도하한 뒤 기습 공격을 가해 대승을 거두었다. 야로슬라프는 본거지인 노브로고드로 도망쳤고, 스뱌토폴크 1세는 폴란드 군대를 앞세워 키예프에 입성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는 스뱌토폴크 1세의 이복 여동생 프레드슬라바 블라디미로브나(Przedsława Włodzimierzówna)를 강제로 첩으로 삼았고, 폴란드군은 키예프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분노한 키예프 시민들이 폴란드군에 야습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고, 폴란드군은 곧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 후 스뱌토폴크 1세는 1019년 군대를 재규합해 쳐들어온 야로슬라프 1세에게 패배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후 새 황제가 된 콘라트 2세가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폴란드 쪽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자, 볼레스와프 1세는 이 때를 틈타 폴란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1025년 부활절 일요일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19세기 폴란드 역사학자 타데우시 보이치에호프스키(Tadeusz Wojciechowski, 1838 ~ 1919)는 1024년 12월 24일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대관식이 열린 장소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이라는 설과 포즈난 대성당이라는 설이 갈리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당시 새로 선출된 교황 요한 19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넘기고 대관식을 허락받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19세기 폴란드 역사가 스타니스와프 자크르제프스키(Stanisław Zakrzewski, 1873 ~ 1936)는 콘라트 2세가 대관식을 인정했고 교황 요한 19세는 형식적으로 승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025년 6월 17일,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포즈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에 안장되었다. 14세기에 카지미에시 3세에 의해 새로운 석관에 유해가 옮겨졌다. 1772년 9월 30일 화재로 인해 석관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고, 1790년 남쪽 탑이 붕괴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유해는 복구 작업 도중에 발견되어 대성당의 챕터 하우스로 옮겨졌다. 1801년, 포즈난 대성당 측은 폴란드 사학자이자 교육자 타데우스 치츠키(Tadeusz Czacki, 1765 ~ 1813)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왕의 뼛 조각 세 개를 그에게 제공했다. 치츠키는 왕의 두 개골 조각 중 하나를 우크라이나 볼린스카 주의 파블리브카(Pavlivka)에 있는 가족 묘지에 보관했고, 나머지 조각 두 개를 폴란드 공주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Izabela Czartoryska, 1746 ~ 1835)에게 보냈다. 공주는 이 조각들을 푸와비(Puławy)에 새로 설립된 박물관에 보관했다. 1938년 포즈난 대학교 선사연구소가 설립된 뒤 왕의 유해가 보관된 무덤을 수색한 끝에 대성당 지하에서 찾아낸 뒤 포즈난 대성당 내부에 조성된 황금 경당으로 옮겼다.
3. 가족
- 성명 미상의 여인: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 985년 릭다그가 사망한 후 결혼 무효화되었다.
- 유디트?: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 986년에서 989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1세와 이혼했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베즈프림(986/987 ~ 1032): 103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후원에 힘입어 미에슈코 2세를 축출하고 왕복과 왕관을 콘라트 2세에게 바친 뒤 폴란드 대공이 되었지만 폭정을 일삼다가 1032년 피살되었다.
- 엠닐다(970년에서 975년 사이 ~ 1016년 또는 1017년):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알려지지 않은 수도원의 수녀원장.
- 레겔린다(989 ~ 1030): 마이센 변경백 헤르만 1세의 아내.
- 미에슈코 2세(990 ~ 1034): 폴란드 왕(1025 ~ 1031), 폴란드 대공(1032 ~ 1034)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3]: 스뱌토폴크 1세의 아내.
- 오토 볼레스와비치(1000 ~ 1033): 미에슈코 2세 2세에게 축출된 뒤 야로슬라프 1세에게 망명한 후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의 동맹을 이끌어낸 후 양국의 군대를 빌려 형 미에슈코 2세를 축출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를 대신해서 폴란드 대공이 된 베즈프림이 폭정을 자행하다가 1032년 자국민에게 살해되자, 콘라트 2세의 중재에 따라 미에슈코 2세, 디트리크[4]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다.
- 마이센의 오다(996년에서 1002년 사이 ~ 1018년 이후):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의 딸.
- 프레드슬라바 블라디미로브나(? ~ 1018년 이후): 키이우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딸. 1018년 야로슬라프 1세를 물리치고 키이우에 입성한 볼레스와프 1세에 의해 강제로 그의 첩이 되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와 함께 폴란드로 끌려갔으며, 그 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4. 기타
별명인 흐로브리는 용맹한/용감한 사람이란 뜻이다.1000년 오토 3세로부터 폴란드 왕권을 상징하는 왕관을 받았으며 이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대관식때부터 사용되어 볼레스와프의 왕관(korona Chrobrego)이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794년 프로이센 왕국군에게 탈취당했고,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박살난 재정을 복구하겠다는 이유로 왕관과 대관보기를 모두 금으로 녹여 동전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그가 쓰던 검 슈체르비예츠(Szczerbiec)는 폴란드 왕들이 사용하고 대관식에서 대관용 검으로 쓰이면서 폴란드의 전설적 보검이 되었다. 이름은 틈새, 흠, 노치라는 의미의 폴란드어 단어 슈체르바(szczerba)에서 따왔는데, 흠이 있는 검, 또는 (다른 검을 쳐서) 흠집을 내는 검이라고 흔히 해석된다. 전설로는 천사에게 받은 검이며, 볼레스와프 1세가 키이우의 황금문에 들어갈때 이 검으로 황금문을 후려쳐서 칼에 흠집이 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검신 크로스가드 위에 풀러를 따라 구멍이 있는데, 이 틈새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이 틈새는 성유물을 끼우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 그냥 만들다가 흠이 생겼거나 녹이 슬어서 뚫린 구멍을 땜빵 삼아 디자인으로 삼았다는 설 등이 있다.
다만 현존하는 물건은 조사해본 결과 12~13세기 쯤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어서, 10세기 사람인 볼레스와프 1세가 쓴 진품은 아닐 공산이 크다. 어쨌든 중세에 만들어서 14~15세기 쯤부터 폴란드의 대관식에서 쓰인 물건인 것은 확실. 다만 18~19세기에 프러시아 군에게 빼앗겼다가 여기저기로 흘러다니다가 1929년에 소련이 반환했고, 2차대전 중에 다시 피난갔다가 1959년에야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등 근현대에도 꽤나 고생한 검이다.
폴란드 20 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
[1]
단 하기 프로필 이미지는 18세기에 그려진 상상화이다.
[2]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3]
야사에는 두브라프카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나, 역사서에는 이름이 실려있지 않다.
[4]
미에슈코 1세의 세 아들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 중 한 명의 아들